“저 회사가 당신 디자인을 도용했다는 겁니까?”성 회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네, 그렇습니다. 제 노트북 안에 증거가 있어요. 모든 시뮬레이션도 제가 직접 했던 것들입니다. 저 평면 설계도도 물론 제가 프로젝트를 맡으면서 손으로 하나하나 그린 것이고요. 여기 초안이 있습니다.”여름은 최대한 떨지 않으려고 노력했다.“한번 볼까요.”여름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자신의 노트북을 열었다. 하지만 그 안에 있어야 할 문건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심지어 가방 속에 있던 디자인 초안도 없어졌다. 순간적으로 그녀는 정해천을 쏘아 보았다.“당신이 손댔어요?”이 사람 말고는 없다.“미친 거 아냐? 우리는 같은 회사 동료라고!” 정해천이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무대 위에 있던 강여경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그만해. 나에게 불만이 있으면 사석에서 해결하면 될 것이지…. 지금 이시간이 TH디자인그룹에 얼마나 중요한데, 굳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렇게 날 모함하고 난처하게 만들어야겠어?”성 회장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아는 사이입니까?”여름이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강여경이 말을 가로챘다.“제 자매입니다. 저희가 최근에 불화가 있었던지라…”이민수가 책상을 탕 치며 일어났다.“여경아, 더 이상 인정 베풀 거 없다. 네 명예를 더럽혀서 자기가 회사를 빼앗으려는 의도가 뻔해.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네. 네 디자인까지 몰래 훔쳐본 모양이다.”“절대 아닙니다.”여름은 끓어오르는 분노에 어쩔 줄 몰랐다.“그럼 증거를 가져와. 증거도 없이 사람을 무고하다니. 여경이가 이 프로젝트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아? 네가 남 지적할 자격이나 있어!”이때 정해천이 몸을 일으켰다. “아,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 어쩐지 내 디자인보다 더 좋다 했더니…. 다른 사람 것을 표절한 것이었네요. TH그룹의 사람이었군! 염 대표님, 이거 완전 우리가 놀아난 것 아닙니까?” 염 대표의 표정이 어두웠다.“강여름 씨, 저 사람들 얘기가 모두 진짜인
얼마나 주저앉아 있었을까? 문이 천천히 열렸다. 강여경이 우산을 들고 와 앞에 섰다. 우산 아래에서 강여경은 기세등등했다.“정말 고맙다. 덕분에 내가 이 프로젝트를 땄네. 넌 정말 천재야.”여름이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강여경을 노려보았다. 강여경이 깔깔거렸다.“그렇게 노려볼 거 없어. 네 디자인이 아니었어도 어차피 나에게 올 프로젝트였어. 선우 오빠가 외삼촌에게 따로 말을 넣어뒀었거든. 너 그거 모르지? 오빠 외삼촌하고 성 회장하고 오래된 친구 사이래. 네 작품은 그저 구색 맞추기였을 뿐이야.”외삼촌이라니…… 최하준…?여름은 자신의 가슴이 예리하게 난도질 당하는 고통을 느꼈다. 숨도 쉬기 힘들었다. 기회를 준 것에 대해 최하준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었다. 그런데 최하준은 진작에 결과를 조작해 놓고 있었다니....'도대체 왜 나를 속였을까? 그 사람은 내가 이번 입찰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다 알고 있잖아?'배신감에 눈물이 흘렀다. 얼굴은 온통 젖어 빗물인지 눈물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여름이 참담해 할수록 강여경은 더욱 통쾌했다.“애석하게도 모든 사람이 너에 대해 알아버렸으니 이 바닥에서 너는 퇴출이야. 정말 안됐다, 얘. 걱정하지 말고 앞가림이나 잘해. 엄마 아빠는 내가 모실 테니. TH디자인그룹과 선우 오빠도 곧 내 것이 될 거야.재미있는 사실 하나 알려줄까? 사실은 말이야, 오빠 눈에는 네가 안 차. 전단이나 돌리고 너무 부끄럽대. 넌 오빠에게 어울리지 않아.”“강여경!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냐!”이성의 끈이 툭 끊어져 버렸다. 여름은 실성한 사람처럼 강여경을 땅바닥에 쓰러뜨리고 있는 힘껏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강여경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 나쁘게 웃었다.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여름을 잡더니 거칠게 진흙탕에 집어 던졌다.한선우가 강여경을 끌어안더니 자신의 외투로 꼭 감싸주는 게 보였다.“너무 뭐라고 하지 말아요. 여름이가 오늘 입찰에 실패해서 상심이 클 거예요.”강여경은 한선우의 품에 안겨 벌벌
한선우는 강여경을 안아 차에 태웠다. 차가 저 멀리 사라지자, 이제는 정말 한선우와 끝이 났음을 직감했다. 한선우에 대한 사랑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미움과 증오만이 가득했다.“불쌍해서 어쩌나….” 우산을 쓴 이민수가 실실 웃으며 걸어왔다.“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었네.”여름은 녹초가 되어 더 이상 이민수를 상대할 힘이 없었다. 겨우 몸을 일으켜 자신의 차 방향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이민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늘 일은 이모와 이모부 귀에도 들어갈걸. 그분들은 원래도 너보다 여경이를 유난히 아꼈는데 이제 집에 발 디딜 생각은 하지도 마라. 반겨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탁”여름은 차 문을 세게 닫고 시동을 걸었다.다 아는 일이었다. 이제 아무 상관 없다. 어쨌든 여름의 인생은 이미 충분히 비참했다. 어쨌든 이 세상에 진심으로 여름을 아껴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은 없다.******저녁 6시 반.최하준이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이 조용했다. 전에는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집안 모두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고, 문을 열면 음식 냄새가 가득했었다. 주방에서 분주한 모습으로 요리를 하는 모습은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그런데 오늘은, 온 집안이 칠흑같이 깜깜하고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거실 등을 켰다. 여름이 소파 모서리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머리도 엉망이고 두 눈은 초점을 잃었다. 지오를 품에 꼭 껴안고 턱을 고양이 머리 위에 파묻은 채 꺼져가는 불씨처럼 생기를 잃은 모습이었다. 여름은 늘 생기 넘치고 밝은 모습만 보여줬다. 이렇게까지 생기를 잃고 어두운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입찰에서 떨어졌습니까?”최하준이 무심하게 재킷을 소파 위로 휙 던지며 물었다.“실패 한 번 한 것 가지고 너무 실망할 것 없어요. 아직 어리니까….”“사람들은 나이가 어리면 놀리거나 무시하죠.” 여름이 발끈하여 최하준을 바라보았다. 벌게진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당신 같은 사람들에게는 사람 감정이 그렇게 우스워요?”최하
“누군데?”“강여름. 술집에서 혼자 술 마시는데 완전 꽐라야. 쯧쯧…. 근데 여전히 예쁘네.”“그 나쁜 년!”진가은이 버럭 화를 냈다. 여름 덕분에 지난번 사람들 앞에서 완전 망신을 당했다. 그 일로 동성 사교계에서 웃음거리가 되었다. 낮에 있었던 사건을 전해 듣고 얼마나 통쾌했는지 모른다. ‘흥, 이걸로는 충분하지 않지. 더 짓밟고 싶었는데, 절호의 기회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이야.’“너 아직 여름이 좋아하지?”“좋아하면 뭐 하냐? 학교 다닐 때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잖아. 난 좀 놀아보고 싶었는데….” 오성재가 비열하게 웃었다.“확 괴롭혀보고 싶네.”“오케이! 네 소원 내가 들어줄게.”진가은이 은밀한 계획을 들려주었다.오성재는 진가은이 알려준 놀라운 계략에 완전히 흥분했다.“그래도 괜찮을까?”“나만 믿고 하라는 대로 해. 강여름 옆에는 지금 아무도 없거든. 일이 터지면 집에서 더 나 몰라라 할걸.”“좋아, 한 번 놀아 볼까!”오성재가 여름을 보며 실실거렸다.******너무 마셨나? 여름은 정신이 가물가물했다. 테이블 위에 칵테일 한 잔이 놓여 있었다.주문을 했는지 정신이 오락가락했지만, 술도 떨어졌겠다 고민 없이 그냥 들고 마셔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름은 정신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비즈니스 클럽 특실.지오는 푹신한 의자에 배를 깔고 누워 있었다. 최하준이 주는 생선 조각을 슬며시 맛보더니 이내 머리를 저으며 뒤로 물러앉았다. 이지훈은 ‘쯧’ 혀를 차며 말했다.“너희 집 고양이는 왜 이 모양이야? 까다로운 입맛으로는 고양이 중에 최고일 거다. 그거 이 집에서 제일 좋은 생선인데….”“주방장 솜씨가 영 별로인가 보지.”최하준은 치킨 요리를 깨작거리고 있었다. 요즘 여름이 만들어 주는 가정식을 먹다 보니 어느새 익숙해졌는지 다른 요리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그런데 …. 왜 집에서 안 먹고 여기서 이래?”이지훈이 부루퉁해서 물었다.“여름 씨가 해주는 음식이 제일 맛있다며…. 가서 해 달
말을 마치고 나니 더욱 화가 났다. “공정하게 경쟁할 기회를 달라고 하지 않았나?”이지훈이 미안해했다.“신주 인테리어에 공평하게 경쟁할 기회를 주면 된다고 했거든. 성 회장은 신주가 작은 회사니까 입찰에 참여만 시켜주면 지명도를 올릴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서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특별히 강여름을 지목한 지는 몰랐던 모양이야.”최하준이 미간을 문질렀다. ‘어떻게 그렇게 근사한 디자인이 탈락했나 싶었더니, 이런 상황이었군. 어쩐지 어젯밤 좀 이상하다 싶더니⋯.’최하준은 잠시 생각하더니 스마트 폰을 꺼내 김상혁에게 문자를 보냈다.“오늘 입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좀 알아봐.”이지훈이 말했다.“그건 내가 가서 물어보면 금방 알 수 있는데.”최하준이 웃었다.“너한테 또 맡기느니 그냥 내 쪽에서 알아보지.”이지훈은 속상했다. 확실히 이번 건은 자신이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이다.이때 단톡방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열어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뭐 이렇게 수준 떨어지는 인간이 많아. 거 멀쩡해 보이는 여자인데 아깝네. 이런 사진이 돌았으니 누군지 알려지면 꽤나 부끄럽겠는걸.”최하준이 흘끗 들여다보았다. 어떤 여자가 침대에 널부러져 있는 사진이었다.뒷모습이지만 청바지에 셔츠를 입은 날씬한 몸매가 드러났다.생각해 보니 그것은 오늘 저녁에 여름의 옷차림이었다.최하준이 갑자기 전화기를 빼앗아갔다.“여기 어디야?”“모르지. 어디 호텔 아닌가, 왜 그래?”최하준이 이지훈을 노려봤다.“강여름이잖아.”이지훈이의 입이 벌어졌다.“젠장, 7시 반에 사진을 더 뿌린다는데, 이제 15분 남았어.”“당장 경찰에 신고해.”최하준은 급히 노트북을 열었다. 금방 사진을 올린 곳의 IP를 추적해 냈다. 천만다행으로 가까운 데 있는 호텔이었다.******호텔.여름은 머리가 너무 아프고 막 구토가 올라왔다.간신히 눈을 떠보니 낯선 방에 있었다.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앉으려고 했지만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갔다.“괜히 힘 뺄 거 없어.”뚱뚱한
“누구야?”오성재가 당황하며 주섬주섬 일어섰다.최하준이 침대 위 상황을 쓱 훑어보았다. 여름의 얼굴이 벌겋게 부어올랐고 셔츠는 찢어져 있었다.머리끝까지 화가 난 최하준이 오성재에게 일격을 날렸다.“널 감옥에 보낼 분이시다.”워낙 힘이 좋아서 일격에 오성재를 바닥에 널부러뜨릴 수 있었다.그다음 바로 카메라를 오성재 앞에서 부숴버렸다. 그러더니 양복을 벗어 침대에 있는 여름의 몸을 얼른 감쌌다.“강여름 씨, 괜찮습니까?”퉁퉁 부어오른 얼굴에 손을 댈 수는 없어서 부드럽게 등을 쓸어주었다.“소, 손대지 마!”머리가 어지러웠다. 누군가의 손이 닿으니 저도 모르게 입술을 덜덜 떨면서도 반항을 했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여름은 자존심 강하고 아름다우며 귀여운 사람이었다.좀 미운 적도 있지만 멀쩡하던 사람이 이런 꼴이 된 것을 보니 최하준은 마음이 아팠다.“두려워하지 말아요. 납니다. 이제 아무도 해치지 않아요.”부드럽게 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익숙한 남자의 부드러운 향기를 맡자 여름은 저도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풀어졌던 동공이 촛점을 찾으며 눈앞에 있는 사람이 또렷이 보였다.“쭌,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요?” ‘꿈에서 정말 누가 날 구하러 왔구나.’“꿈이 아닙니다. 이제 괜찮아요.”최하준이 부드럽게 눈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등 뒤로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졌다.돌아보니 오성재가 몰래 빠져나가려고 살금살금 기어가는 중이었다.“잠깐만 기다려요.”여름을 가볍게 도닥이더니 돌아서는데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이 여자에게 무슨 짓을 했나?”오성재는 놀라서 다리가 풀렸다. 도망을 쳐보려 했으나 뒤에서 의자가 날아와 퍽 하고 떨어지자 무서워서 일어나지도 못했다.최하준이 성큼성큼 다가오자 오성재는 공포에 떨었다. 여름의 배후에 이런 힘 센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아, 아무 짓도 안 했습니다. 그냥 옷이 찢어졌는데 도착하신 거예요. 진짭니다. 맹세합니다.”“이 여자를 때렸나?”최하준이 오성재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이때 진가은의 핸드폰이 울렸다. 누군가가 전화를 걸었다.‘오성재가 경찰에 잡혀갔습니다.”“어떻게든 보석으로 빼내.”“그게, 힘들 것 같습니다. 이 대표가 동성에서 눈에 안 띄게 하라고 특별히 전화주셨습니다. 동성에서 그 댁은 건드리면 안 되죠.”순간 진가은은 침울해졌다.“그래도 오성재에게 가족들이 무사하기 바란다면 입 꾹 다물라고 전해.”“알겠습니다.”******병원.여름은 얼굴이 아파서 깼다.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누가 데려온 거지?’몽롱한 가운데 최하준의 모습이 뇌리에 스쳤다.“깼습니까?”옆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고개를 돌려보니 최하준이 소파에서 일어나 걸어왔다.“결혼도 한 사람이 왜 혼자서 술을 마십니까?”얼굴을 보자 반가웠는데 분위기 깨는 소리를 해서 마음이 불편했다.“그러게요. 결혼한 걸 깜빡하고 있었네요.”최하준은 어이가 없어서 픽 웃었다. 애초에 자기가 고백을 하고 죽자살자 매달리더니 이제는 결혼한 것을 잊었다고?.“아직 뭘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내가 제때 도착하지 못했으면 평생 남을 굴욕 사진을 엄청나게 찍힐 뻔했습니다. 강여름 씨는 체면이 필요 없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필요하거든요.”“걱정 마세요. 아무도 제가 최하준 씨와 결혼한 건 모르거든요.”여름은 다시 싸한 기분이 되었다. 자신에게 마음이 있어서 구하러 온 줄 알았더니 본인 체면 때문이었다니.최하준은 여름의 이런 말투에 화가 났다.“그러면 내가 쓸데없이 나서서 구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말입니까?”여름은 피곤해서 더는 싸우고 싶지 않았다.가만히 눈을 감고 이불을 있는 대로 당겨 번데기처럼 돌돌 말았다.여기저기 상처 난 여름의 뺨을 보니 최하준은 다시 울컥 화가 났다.여름이 쓰러졌을 때는 오성재를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판이었는데, 깨어나니 왜 좀 더 조심하지 못했냐고 여름을 비난하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여름이 입을 꾹 다물어버리니 최하준은 더욱 답답했다.병실에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이지훈이 뛰어 들어왔다.“오성재는 해결
여름은 이불을 힘껏 잡아당겼다. 가뜩이나 식구들에게 대접받지 못하는 처지인데 이제는 영원히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여름은 슬프게 웃었다.“상관없어요.”‘어쨌든 아무도 날 신경 쓰지 않는걸. ‘최하준이 잠시 아무 말 없더니 지훈을 돌아봤다.“경찰 쪽에 얘기해서 강여름 씨가 경찰에 협조해서 잠복수사 중이었다고 발표해달라고 하지. 강여름 씨 덕분에 불법 촬영물을 유통하는 조직을 잡아서 수사 중이라고.”여름은 깜짝 놀라서 멍하니 최하준을 쳐다봤다.‘자기 명예에 손상이 갈까 봐 커버해 주는 걸까, 아니면 날 위해 그러는 걸까?’여름은 이 사람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이지훈이 엄지를 치켜올렸다.“좋은데? 그러면 사람들도 이러니저러니 안 할 테고, 오히려 제수씨의 용감함을 칭찬할 거야. 지금 바로 가서 처리하지.”여름은 이 사람의 어떤 면을 믿어야 좋을지 헷갈렸다.“오늘⋯⋯ 고마워요.”최하준의 입꼬리가 조용히 올라가더니 ‘흥’하고는 말했다.“마침내 인사를 듣는군요.”여름은 아무 말도 없었다.너무 많은 일이 벌어져서 이제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좋을지도 모르게 되었다.“뭐 좀 먹겠습니까?”최하준이 물었다.그러고 보니 점심도 저녁도 안 먹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남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핸드폰 좀 찾아 주실래요? 어플로 뭐 배달시킬게요.”“거 참 말 섭섭하게 하는군요.”최하준은 화가 났다. ‘멀쩡하게 사람이 눈 앞에 있는데 도와달라는 말은 않고 핸드폰을 찾다니. 내가 그런 것도 안 해줄 인간으로 보이나?’“얌전히 누워있어요. 내가 가서 먹을 걸 좀 사오겠습니다.”최하준이 자리를 뜨자 여름은 쓴웃음을 지었다.기대기 싫은 게 아니라 차마 못 하는 것이었다.최하준은 한선우의 외삼촌이다. 언제든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닌가.20분이 지나자 최하준이 도시락을 들고 돌아왔다.여름은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힘 빼지 말아요. 의사가 최소한 이틀은 쉬어야 회복될 거라고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