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선우는 강여경을 안아 차에 태웠다. 차가 저 멀리 사라지자, 이제는 정말 한선우와 끝이 났음을 직감했다. 한선우에 대한 사랑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미움과 증오만이 가득했다.“불쌍해서 어쩌나….” 우산을 쓴 이민수가 실실 웃으며 걸어왔다.“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었네.”여름은 녹초가 되어 더 이상 이민수를 상대할 힘이 없었다. 겨우 몸을 일으켜 자신의 차 방향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이민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늘 일은 이모와 이모부 귀에도 들어갈걸. 그분들은 원래도 너보다 여경이를 유난히 아꼈는데 이제 집에 발 디딜 생각은 하지도 마라. 반겨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탁”여름은 차 문을 세게 닫고 시동을 걸었다.다 아는 일이었다. 이제 아무 상관 없다. 어쨌든 여름의 인생은 이미 충분히 비참했다. 어쨌든 이 세상에 진심으로 여름을 아껴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은 없다.******저녁 6시 반.최하준이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이 조용했다. 전에는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집안 모두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고, 문을 열면 음식 냄새가 가득했었다. 주방에서 분주한 모습으로 요리를 하는 모습은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그런데 오늘은, 온 집안이 칠흑같이 깜깜하고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거실 등을 켰다. 여름이 소파 모서리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머리도 엉망이고 두 눈은 초점을 잃었다. 지오를 품에 꼭 껴안고 턱을 고양이 머리 위에 파묻은 채 꺼져가는 불씨처럼 생기를 잃은 모습이었다. 여름은 늘 생기 넘치고 밝은 모습만 보여줬다. 이렇게까지 생기를 잃고 어두운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입찰에서 떨어졌습니까?”최하준이 무심하게 재킷을 소파 위로 휙 던지며 물었다.“실패 한 번 한 것 가지고 너무 실망할 것 없어요. 아직 어리니까….”“사람들은 나이가 어리면 놀리거나 무시하죠.” 여름이 발끈하여 최하준을 바라보았다. 벌게진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당신 같은 사람들에게는 사람 감정이 그렇게 우스워요?”최하
“누군데?”“강여름. 술집에서 혼자 술 마시는데 완전 꽐라야. 쯧쯧…. 근데 여전히 예쁘네.”“그 나쁜 년!”진가은이 버럭 화를 냈다. 여름 덕분에 지난번 사람들 앞에서 완전 망신을 당했다. 그 일로 동성 사교계에서 웃음거리가 되었다. 낮에 있었던 사건을 전해 듣고 얼마나 통쾌했는지 모른다. ‘흥, 이걸로는 충분하지 않지. 더 짓밟고 싶었는데, 절호의 기회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이야.’“너 아직 여름이 좋아하지?”“좋아하면 뭐 하냐? 학교 다닐 때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잖아. 난 좀 놀아보고 싶었는데….” 오성재가 비열하게 웃었다.“확 괴롭혀보고 싶네.”“오케이! 네 소원 내가 들어줄게.”진가은이 은밀한 계획을 들려주었다.오성재는 진가은이 알려준 놀라운 계략에 완전히 흥분했다.“그래도 괜찮을까?”“나만 믿고 하라는 대로 해. 강여름 옆에는 지금 아무도 없거든. 일이 터지면 집에서 더 나 몰라라 할걸.”“좋아, 한 번 놀아 볼까!”오성재가 여름을 보며 실실거렸다.******너무 마셨나? 여름은 정신이 가물가물했다. 테이블 위에 칵테일 한 잔이 놓여 있었다.주문을 했는지 정신이 오락가락했지만, 술도 떨어졌겠다 고민 없이 그냥 들고 마셔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름은 정신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비즈니스 클럽 특실.지오는 푹신한 의자에 배를 깔고 누워 있었다. 최하준이 주는 생선 조각을 슬며시 맛보더니 이내 머리를 저으며 뒤로 물러앉았다. 이지훈은 ‘쯧’ 혀를 차며 말했다.“너희 집 고양이는 왜 이 모양이야? 까다로운 입맛으로는 고양이 중에 최고일 거다. 그거 이 집에서 제일 좋은 생선인데….”“주방장 솜씨가 영 별로인가 보지.”최하준은 치킨 요리를 깨작거리고 있었다. 요즘 여름이 만들어 주는 가정식을 먹다 보니 어느새 익숙해졌는지 다른 요리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그런데 …. 왜 집에서 안 먹고 여기서 이래?”이지훈이 부루퉁해서 물었다.“여름 씨가 해주는 음식이 제일 맛있다며…. 가서 해 달
말을 마치고 나니 더욱 화가 났다. “공정하게 경쟁할 기회를 달라고 하지 않았나?”이지훈이 미안해했다.“신주 인테리어에 공평하게 경쟁할 기회를 주면 된다고 했거든. 성 회장은 신주가 작은 회사니까 입찰에 참여만 시켜주면 지명도를 올릴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서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특별히 강여름을 지목한 지는 몰랐던 모양이야.”최하준이 미간을 문질렀다. ‘어떻게 그렇게 근사한 디자인이 탈락했나 싶었더니, 이런 상황이었군. 어쩐지 어젯밤 좀 이상하다 싶더니⋯.’최하준은 잠시 생각하더니 스마트 폰을 꺼내 김상혁에게 문자를 보냈다.“오늘 입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좀 알아봐.”이지훈이 말했다.“그건 내가 가서 물어보면 금방 알 수 있는데.”최하준이 웃었다.“너한테 또 맡기느니 그냥 내 쪽에서 알아보지.”이지훈은 속상했다. 확실히 이번 건은 자신이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이다.이때 단톡방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열어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뭐 이렇게 수준 떨어지는 인간이 많아. 거 멀쩡해 보이는 여자인데 아깝네. 이런 사진이 돌았으니 누군지 알려지면 꽤나 부끄럽겠는걸.”최하준이 흘끗 들여다보았다. 어떤 여자가 침대에 널부러져 있는 사진이었다.뒷모습이지만 청바지에 셔츠를 입은 날씬한 몸매가 드러났다.생각해 보니 그것은 오늘 저녁에 여름의 옷차림이었다.최하준이 갑자기 전화기를 빼앗아갔다.“여기 어디야?”“모르지. 어디 호텔 아닌가, 왜 그래?”최하준이 이지훈을 노려봤다.“강여름이잖아.”이지훈이의 입이 벌어졌다.“젠장, 7시 반에 사진을 더 뿌린다는데, 이제 15분 남았어.”“당장 경찰에 신고해.”최하준은 급히 노트북을 열었다. 금방 사진을 올린 곳의 IP를 추적해 냈다. 천만다행으로 가까운 데 있는 호텔이었다.******호텔.여름은 머리가 너무 아프고 막 구토가 올라왔다.간신히 눈을 떠보니 낯선 방에 있었다.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앉으려고 했지만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갔다.“괜히 힘 뺄 거 없어.”뚱뚱한
“누구야?”오성재가 당황하며 주섬주섬 일어섰다.최하준이 침대 위 상황을 쓱 훑어보았다. 여름의 얼굴이 벌겋게 부어올랐고 셔츠는 찢어져 있었다.머리끝까지 화가 난 최하준이 오성재에게 일격을 날렸다.“널 감옥에 보낼 분이시다.”워낙 힘이 좋아서 일격에 오성재를 바닥에 널부러뜨릴 수 있었다.그다음 바로 카메라를 오성재 앞에서 부숴버렸다. 그러더니 양복을 벗어 침대에 있는 여름의 몸을 얼른 감쌌다.“강여름 씨, 괜찮습니까?”퉁퉁 부어오른 얼굴에 손을 댈 수는 없어서 부드럽게 등을 쓸어주었다.“소, 손대지 마!”머리가 어지러웠다. 누군가의 손이 닿으니 저도 모르게 입술을 덜덜 떨면서도 반항을 했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여름은 자존심 강하고 아름다우며 귀여운 사람이었다.좀 미운 적도 있지만 멀쩡하던 사람이 이런 꼴이 된 것을 보니 최하준은 마음이 아팠다.“두려워하지 말아요. 납니다. 이제 아무도 해치지 않아요.”부드럽게 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익숙한 남자의 부드러운 향기를 맡자 여름은 저도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풀어졌던 동공이 촛점을 찾으며 눈앞에 있는 사람이 또렷이 보였다.“쭌,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요?” ‘꿈에서 정말 누가 날 구하러 왔구나.’“꿈이 아닙니다. 이제 괜찮아요.”최하준이 부드럽게 눈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등 뒤로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졌다.돌아보니 오성재가 몰래 빠져나가려고 살금살금 기어가는 중이었다.“잠깐만 기다려요.”여름을 가볍게 도닥이더니 돌아서는데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이 여자에게 무슨 짓을 했나?”오성재는 놀라서 다리가 풀렸다. 도망을 쳐보려 했으나 뒤에서 의자가 날아와 퍽 하고 떨어지자 무서워서 일어나지도 못했다.최하준이 성큼성큼 다가오자 오성재는 공포에 떨었다. 여름의 배후에 이런 힘 센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아, 아무 짓도 안 했습니다. 그냥 옷이 찢어졌는데 도착하신 거예요. 진짭니다. 맹세합니다.”“이 여자를 때렸나?”최하준이 오성재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이때 진가은의 핸드폰이 울렸다. 누군가가 전화를 걸었다.‘오성재가 경찰에 잡혀갔습니다.”“어떻게든 보석으로 빼내.”“그게, 힘들 것 같습니다. 이 대표가 동성에서 눈에 안 띄게 하라고 특별히 전화주셨습니다. 동성에서 그 댁은 건드리면 안 되죠.”순간 진가은은 침울해졌다.“그래도 오성재에게 가족들이 무사하기 바란다면 입 꾹 다물라고 전해.”“알겠습니다.”******병원.여름은 얼굴이 아파서 깼다.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누가 데려온 거지?’몽롱한 가운데 최하준의 모습이 뇌리에 스쳤다.“깼습니까?”옆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고개를 돌려보니 최하준이 소파에서 일어나 걸어왔다.“결혼도 한 사람이 왜 혼자서 술을 마십니까?”얼굴을 보자 반가웠는데 분위기 깨는 소리를 해서 마음이 불편했다.“그러게요. 결혼한 걸 깜빡하고 있었네요.”최하준은 어이가 없어서 픽 웃었다. 애초에 자기가 고백을 하고 죽자살자 매달리더니 이제는 결혼한 것을 잊었다고?.“아직 뭘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내가 제때 도착하지 못했으면 평생 남을 굴욕 사진을 엄청나게 찍힐 뻔했습니다. 강여름 씨는 체면이 필요 없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필요하거든요.”“걱정 마세요. 아무도 제가 최하준 씨와 결혼한 건 모르거든요.”여름은 다시 싸한 기분이 되었다. 자신에게 마음이 있어서 구하러 온 줄 알았더니 본인 체면 때문이었다니.최하준은 여름의 이런 말투에 화가 났다.“그러면 내가 쓸데없이 나서서 구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말입니까?”여름은 피곤해서 더는 싸우고 싶지 않았다.가만히 눈을 감고 이불을 있는 대로 당겨 번데기처럼 돌돌 말았다.여기저기 상처 난 여름의 뺨을 보니 최하준은 다시 울컥 화가 났다.여름이 쓰러졌을 때는 오성재를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판이었는데, 깨어나니 왜 좀 더 조심하지 못했냐고 여름을 비난하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여름이 입을 꾹 다물어버리니 최하준은 더욱 답답했다.병실에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이지훈이 뛰어 들어왔다.“오성재는 해결
여름은 이불을 힘껏 잡아당겼다. 가뜩이나 식구들에게 대접받지 못하는 처지인데 이제는 영원히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여름은 슬프게 웃었다.“상관없어요.”‘어쨌든 아무도 날 신경 쓰지 않는걸. ‘최하준이 잠시 아무 말 없더니 지훈을 돌아봤다.“경찰 쪽에 얘기해서 강여름 씨가 경찰에 협조해서 잠복수사 중이었다고 발표해달라고 하지. 강여름 씨 덕분에 불법 촬영물을 유통하는 조직을 잡아서 수사 중이라고.”여름은 깜짝 놀라서 멍하니 최하준을 쳐다봤다.‘자기 명예에 손상이 갈까 봐 커버해 주는 걸까, 아니면 날 위해 그러는 걸까?’여름은 이 사람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이지훈이 엄지를 치켜올렸다.“좋은데? 그러면 사람들도 이러니저러니 안 할 테고, 오히려 제수씨의 용감함을 칭찬할 거야. 지금 바로 가서 처리하지.”여름은 이 사람의 어떤 면을 믿어야 좋을지 헷갈렸다.“오늘⋯⋯ 고마워요.”최하준의 입꼬리가 조용히 올라가더니 ‘흥’하고는 말했다.“마침내 인사를 듣는군요.”여름은 아무 말도 없었다.너무 많은 일이 벌어져서 이제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좋을지도 모르게 되었다.“뭐 좀 먹겠습니까?”최하준이 물었다.그러고 보니 점심도 저녁도 안 먹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남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핸드폰 좀 찾아 주실래요? 어플로 뭐 배달시킬게요.”“거 참 말 섭섭하게 하는군요.”최하준은 화가 났다. ‘멀쩡하게 사람이 눈 앞에 있는데 도와달라는 말은 않고 핸드폰을 찾다니. 내가 그런 것도 안 해줄 인간으로 보이나?’“얌전히 누워있어요. 내가 가서 먹을 걸 좀 사오겠습니다.”최하준이 자리를 뜨자 여름은 쓴웃음을 지었다.기대기 싫은 게 아니라 차마 못 하는 것이었다.최하준은 한선우의 외삼촌이다. 언제든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닌가.20분이 지나자 최하준이 도시락을 들고 돌아왔다.여름은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힘 빼지 말아요. 의사가 최소한 이틀은 쉬어야 회복될 거라고
밥을 다 먹고 나자 최하준이 여름을 눕혔다.“저기, 내 핸드폰 봤어요?”“못 봤습니다. 기절했을 때 어디 흘린 모양입니다. 나중에 하나 삽시다.”그때 최하준의 핸드폰이 울렸다.최하준은 전화를 받으며 나갔다. 밖에 김상혁이 기다리고 있었다.“과학문화거점센터 일 조사했습니다. 어제 입찰 시 TH의 강여경 디자이너가 시안을 소개할 때 강여름 씨가 자신의 작품을 강여경 씨가 훔쳐 갔다고 말했답니다.”“그런 일이 있었나?”최하준의 눈에 서늘한 기운이 서렸다.“성 회장이 증거를 대라니 강여름 씨가 노트북에 들어있다고 했는데 열어보니 모든 자료가 삭제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신주 인테리어의 정해천 디자이너를 범인으로 지목했으나, 증거가 없어서 다들 보는 가운데 크게 말다툼이 벌어졌고 결국 센터 밖으로 끌려나갔다고 합니다.”“끌려나가?”최하준이 마지막 구절을 되물었다.“그렇습니다.”김상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오랜 세월 최하준을 보좌했지만 이렇게 분노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어제 TH에서 어떤 디자인을 제출했었나?”“제가 사람을 시켜서 찍어왔습니다.”김상혁이 스마트 폰을 건넸다. 보자마자 최하준의 얼굴이 매섭게 변했다.전에 여름의 디자인을 보았는데 강여경이 제출했다는 작품은 분명 여름의 디자인과 똑같았다.어젯밤 여름의 상태가 이상했던 이유가 이거였다. 결과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최하준도 원망스러웠던 것이리라.그런 불공정한 입찰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말이다.잠시 후 최하준은 스마트폰을 김상혁에게 돌려주었다.“성 회장이 이런 짓을 한 지 꽤 오래되었으니 이제 슬슬 세상에 알려질 때도 됐지.”김상혁은 바로 알아들었다.“알겠습니다. 성 회장이 물러나면 센터와 TH의 MOU는⋯...”“당연히 폐기되는 거지.”최하준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TH가 요즘 어디랑 작업 중인지 알아보고 훼방을 좀 놔. 강여경도⋯. 좀 손 봐줘야겠어.”“아, 입찰을 새로 받으면 그 프로젝트는 강여름 씨에게 가나요? 지금은 신주 인테리어에서 쫓겨났습니다만.”“그
여름은 바지를 혼자 벗을 힘도 없어서 결국 최하준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침대로 돌아오자 여름은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갔다.최하준은 속으로 웃었다. ‘그간 그렇게 대놓고 사람 유혹하는 시늉을 하더니 이렇게 숙맥이었단 말이야?’******1시간 뒤 최하준은 간병인을 불러주었다.그러나 여름은 이미 잠이 들었다. 최하준은 다음 날 아침 소송이 있어서 밤에 자료를 준비해야 했다. 그래서 간병인에게 몇 마디를 부탁하더니 떠났다.여름은 한밤중에 깨어났다. 소파에는 웬 40대 부인이 앉아 있었다.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간병인이 깨어나서 말했다.“선생님께서 사모님을 보살펴 달라고 절 부르셨어요.”“아, 네.”여름은 잠시 어리둥절했다.불러달라고는 했지만 정말 간병인을 불렀을 줄이야. 왠지 모를 실망감이 느껴졌다.어쨌든 혼인신고도 한 부부인데, 남아서 돌봐주면 좋을 것을⋯.그러나 여름은 바로 이해했다. 두 사람은 그저 계약 결혼 관계일 뿐 최하준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어제 병원에 데려다 놓고 밥을 먹여준 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다.간병인은 역시나 베테랑이라서 여름이 아무 말 없는 것을 보더니 웃었다.“선생님이 정말 자상하시더라고요. 밤에 11시 넘어서야 가시면서 저더러 밤에 자지 말고 잘 돌봐달라고 부탁하셨어요. 병원 주방장에게도 따로 영양가 있고 깨끗한 음식으로 세 끼 잘 차려달라고 하고 가셨어요.”여름은 눈을 깜빡였다. 잠이 덜 깨서 아직 꿈을 꾸고 있나 싶었다. 간병인이 말하는 최하준은 평소 여름이 느끼는 최하준과는 사뭇 달랐다.간병인이 말했다.“병원에서 별별 가족들을 다 봐서 제가 좀 아는데 댁의 선생님은 츤데레세요.”여름은 멍해졌다. 어젯밤 자신을 구해주던 모습은 분명 꽤 다정했었다.아침.여름이 검사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두 사람이 있었다. 최하준과 정해천이었다.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정해천의 콧등이 시퍼렜다. 여름을 보더니 바로 무릎을 꿇었다.“미안합니다. 돈에 눈이 멀어서 여름 씨 디자인을 훔쳐내는 대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