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준이 자기에게까지 질투를 하다니 상혁은 난감했다.“회사 일을 보고 드리고 있었습니다. 늦었으니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서둘러 떠나는 상혁의 뒷모습을 보며 여름은 수건으로 하준의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 주었다.“김 실장님은 예의바르게 대해야지. 우리 회사를 위해서 엄청 애써주고 계신단 말이야. 김 실장님은 오로지 쭌 생각만 한다고.”“난 모르는 사람인데 왜 내 생각을 해?”하준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여름은 어이가 없었지만 침착하게 설명했다. “쭌은 최 씨지? 우리 집안에 아주 큰 회사가 있는데 요즘 상황이 좀 어려워졌거든. 김 실장님은 아주 유능한 인재라서 여기저기서 데려가려는 데가 많은데 도 여전히 남아서 일하면서 날 도와주고 있어. 김 실장님이 없으면 난 너무 힘들었을 거야.”하준은 완전히 감탄한 얼굴이었다.한참을 그러고 있더니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입이 비죽 나왔다.“그치만 내가 엄청 멋지게 3점 슛 넣었는데 안 봐주니까 그랬지.”3점 슛?”여름은 살짝 의심스러웠다.“그렇게 잘 한다고?”“그럼. 내가 얼마나 잘하는데.”하준이 턱을 치켜들며 한껏 오만한 포즈를 취했다.“엄마, 쭌 굉장하다니까요.”여울이 뛰어오더니 여름의 귀에 대고 종알거렸다.“머리가 2살 밖에 안 된다면서요? 그래서 실컷 놀려 먹으려고 했는데 농구를 전보다 더 잘하잖아?”“……”여름은 우스워서 여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사람을 무시하면 쓰나?”“아니, 쭌이 날 무시한다니까요.”여울이 발을 굴렀다.“네가 농구를 못하니까 그렇지.”하준이 으쓱해서 하늘을 쳐다보았다.“뭐 하늘이 형은 그냥 그렇더라. 나에게 양보해 준다더니 해보니까 별거 아니던데? 그냥 여울이보다 좀 나은 정도?”졸지에 무시당한 하늘은 할 말을 잃었다.‘저기, 자꾸 형이라고 부르지 말아주실래요? 놀리는 것 같거든요.’“이제 안 놀아. 민관이 삼촌하고 태권도 배우기로 했거든.”하늘이 시원스럽게 공을 내던지고 갔다.“태권도? 나도 할래.”하준이 눈을 반짝였다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그대로 서재로 들어갔다. 오늘밤 하준은 계속해서 여름을 깜짝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전에 의사가 지능이 계속 2살 수준에 머무를 것이라고 했을 때 여름은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그러나 최악의 절망 속에서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지금 하준은 모르는 것이 많다. 심지어 글자도 읽을 줄 모른다. 그러나 농구나 무예처럼 예전에 몸이 익혔던 것은 몸이 기억하는 듯하다.“앉아 봐.”여름은 책상에 그림책을 하나 펼쳤다.“오늘부터 글자를 가르쳐줄 거야.”“어.”하준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준이 앉자 여름은 그대로 하준의 다리에 앉았다.친밀한 자세에 하준은 순간 당황해서 어설프게 여름의 가느다란 허리를 안았다. 여름에게서 풍기는 은은한 향기에 하준의 호흡이 빨라졌다.책을 펼치던 여름은 갑자기 뭔가를 느끼고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너무 기능을 잘하게 된 거 아니냐고!’“여름아, 저기….”하준이 곤란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해줘.”여름은 책을 들고 얼굴을 붉혔다.“난 글자 가르치러 왔거든.”“난 지금 공부할 생각이 없는데.”하준이 가련한 얼굴을 하고 여름을 빤히 바라보았다.“……”30분 뒤.책은 한쪽으로 치워졌다.여름은 책상에 앉아서 두 손으로 하준의 목을 감았다. 하준의 뜨거운 키스가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여름은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얼마 전까지만해도 그렇게 어설프던 하준의 키스가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다.이전의 하준처럼 카리스마 넘치고 뜨거웠다. 여름을 단숨에 삼켜버릴 듯한 기세였다.지능은 떨어졌지만 성격은 여전했다.특히나 두 사람의 친밀한 행위에서 보이는 하준의 모습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여름은 그런 하준에게 특히나 빠져들었다.몸 속에서 갈망이 솟아났다.전에는 하준의 몸이 회복이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두 사람은 꽤 오랜 시간 관계를 가지지 못했다.욕망이 생기기 시작하자 억제하기 힘들었다.“쭌….”이 순간 여름은 하준에게 글자를 가르치려고 서재에 들어왔다는 사실조차도 완전히
말을 마친 여름은 여울을 제리고 서재에서 나갔다.허둥지둥 서두르는 게 눈에 보였다.아무리 담대한 여름이라고 해도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었다.‘하마터면 완전히 정신줄을 놓을 뻔했어.아니, 왜 이렇게 자제가 안 되는 거야?이래가지고서는 위엄이 사라진다고.’여울을 씻기고 옷을 갈아 입히고 나자 차마 서재로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래서 결국 하늘에게 하준을 불러와서 둘이 같이 씻으라고 했다.“오늘은 하늘이가 준에게 목욕하는 법을 가르쳐 봐.”여름이 아들에게 지시했다.“싫어. 왜? 여름이가 씻겨 줘.”하준은 여름의 말을 듣자마자 싫은 얼굴을 했다.“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러면 쭌도 엄마에게 씻겨달라고 해.”하늘이 하준을 흘려보았다.“손이 있으니까 혼자 씻어 봐. 여자애가 남자애를 씻기면 안 돼. 몸을 마구 여자애들에게 보여주는 거 아니라고.”“……”‘아니거든, 아들아. 여자 친구는 남자 친구랑 그럴 수 있다고.너무 원리 원칙대로 가르쳐 주지 마. 최하준이 나에게도 몸을 안 보여주면 어쩌란 말이야?’아니나 다를까 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러면 여자애가 내 몸을 보고 싶다고 하면?”“그건 변태지.”그렇게 말하더니 하늘은 목욕탕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하준이 복잡한 눈으로 변태 강여름을 흘긋 쳐다보았다.여름의 머리에서 김이 나오는 게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나 아이 앞에서 다른 말은 할 수 없어서 하준의 등을 떠밀었다.“얼른 들어가서 씻어.”그러더니 여름은 여울이의 옷을 들고 씻으러 가는 척 했따.밤이 되자 네 사람은 큰 침대에 다 같이 누웠다.늘 하던 대로 하늘과 여울이 가운데 자리했다. 그런데 오늘은 큰 아기가 하나 늘어버렸다. 여울이 한사코 엄마 곁에서 자려고 했기 때문에 하늘은 반대편으로 밀려났다. 하준은 여울과 하늘 중간에 끼어 있었다.하준은 자기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내 여름 쪽으로 비비고 들어갔다. 가운데 끼어 있던 여울이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쭌이랑 엄마 사이에 껴서 짜부됐잖아! 하늘이 쪽으로 좀
창으로 달빛이 들어왔다. 여름의 얼굴이 달아올라 뜨거워졌다. 속으로 물색 없는 하준을 얼마나 욕했는지 모른다전에 그렇게 자신과 이혼하고 백지안과 함께 해야 한다고 난리더니 그 다음에는 다시 둘이 다시 사귀어야 한다고 난리, 그러더니 이제는 변태라고까지…‘대체 누가 날 변태로 만든 거냐고?나도 한 때는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소녀였는데….인제는 변태 소리나 듣고 말이야. 전에 나에게 뽀뽀해 달라고 할 때는 왜 변태라고 안 하고?’아무리 지능에 문제가 생겼으니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해도 여름은 뭔가 억울했다.“아아, 그으래….”여름은 입술을 깨물고 낮게 속삭였다.“그러면 앞으로 쭌 안 볼 거야. 생각해 보니까 부적절한 일인 것 같네. 앞으로 옷 갈아 입을 때는 아빠한테 가서 입혀달라고 해.”하준은 움찔했다. 그러기 싫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아빠한테 가기 싫은데. 여름이가 해줘.”“왜? 내가 쭌의 몸을 보면 번태라며?”여름이 유유히 물었다.“그러면… 난 여름이가 변태인 게 좋아.”하준이 여름에게 바짝 기대왔다. 여름이 귀에 하준의 뜨거운 숨이 닿아 불이 붙는 것 같았다.“……”여름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뭐냐? 지금 날 놀리는 거야?”여름은 눈을 감고 모른 척했다.“여름아…”여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하준이 여름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뭐라고 말 좀 해 봐.”질척거리는 하준을 보자 여름은 골치가 아팠다. 지금 확실히 얘기해주지 않으면 아무래도 끝이 날 것 같지 않았다. 무엇보다 여울과 하늘이 깰 까봐 겁이 났다.“나이가 어리다는 것만 믿고 함부로 굴면 안 돼.”여름은 가차없이 말을 이었다.“나랑 뽀뽀하고 애가 옷 갈아 입혀 줄 때 기분 좋지? 그러면서 나더러 내가 변태라고? 그러면 쭌은 뭔데?”하준은 멍했다. 거의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지만 여름이 화가 난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여름이 그렇게 엄한 모습은 처음 봐서 하준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여름이에게 뭐라
“화 안 났어.”여름이 고개를 저었다.“그냥 우리는 무슨 사이일까 하고 생각했어. 난 쭌에게 어떤 사람이야?”하준은 잠시 진지하게 생각하더니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이모. 내가 좋아하는 사람….”여름은 씁쓸하게 웃었다.“난 이모가 아니야. 됐다. 이런 소리 해서 뭐 해? 잠이나 자자.”여름이 창문을 향해 돌아누웠다.속으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그런 건 물어서 뭐 해? 지금 어린애나 다름 없는 상태인데. 사랑이 뭔지도 모르고 끽해야 좋아한다는 말이나 할 게 뻔했잖아.’하준은 가느다란 여름의 그림자를 보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뭔가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너무나 아프고 가슴이 벌렁거렸다.왜 이렇게 견디기 어려운지, 자신이 뭔가 잘못 대답한 것인지 불안했다.하준은 너무나 당황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아침에 일어 났을 때 기운이 없는 눈가에는 다크서클이 내려와 있었다.여름은 능숙하게 여울과 하늘을 씻겼다. 하준은 조용히 다가갔다.“나도 씻겨줘.”“혼자 해 봐.”치약을 짜주더니 여름이 엄하게 말했다.“평생 나에게 기대서 살 수는 없어. 혼자서 하는 법을 배워야지.”하준은 진지한 여름의 얼굴을 보면서 할 수 없이 시키는 대로 이를 닦았다.하늘과 여울은 빠르게 아침을 먹고 등원했다. 하준은 어설프게 밥을 떠 먹었다. 사뭇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여름이 한마디 했다.“선생님 세 분을 불렀어. 아침 먹고 나면 선생님이 글자랑 영어 가르쳐 주실 거야. 오후에는 금융을 배울 거야.”최란이 혀를 내둘렀다.“너무 과한 거 아니니?”“하준 씨의 학습 수용능력은 보통 사람을 초월해요. 다 원래 머리 속에 들어 있던 지식이에요. 아마도 선생님은 그걸 환기 시키는 역할 정도를 해주게 될 거예요. 만약 이 방법이 안 통한다면 방법을 바꿔 볼게요”여름이 정색했다.“하준 씨는 지금 하늘이처럼 순서대로 차례차례 지식을 쌓아가며 성장하는 게 아닐 거예요. 그런 흐름으로 가다가는 40~50살이 되어 버릴 거예요.”최란은 말문이 막혔다. 여름이 하는
식당에는 다시 잠깐 정적이 흘렸다.최란과 한병후가 서로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은 여름의 말에 흥미가 일었다.확실히 여름의 생각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었다.“정말 미안하다.”최란이 죄책감에 마음이 아픈 듯 말했다.“하준이가 정말 너에게 너무 빚이 많다. 두 사람이 사귀면서 계속해서 일방적으로 너에게 희생이 강요되었는데 그걸 다 품어주었구나.”“누가 누구에게 빚진 거 없습니다. 아마도 저와 하준 씨는 그런 운명이었는지도 모르죠. 사랑에 빠지는 건 쉬울지 몰라도 그 사랑을 평생토록 유지하는 건 정말 어렵네요.”말을 하면서 여름은 점점 더 마음이 쓰려졌다. 그간행복을 찾았다고 생각할 때마다 더 큰 좌절을 맛보았던 것ㅇ다.여름은 일어나 고개를 떨군 채로 자리를 떠났다.최란과 한병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사랑하기는 쉬워도 지키기는 어렵다….’여름의 말은 자기들의 이야기이기도 했다.그러나 여름과 하준에 비교하면 자신들은 조금 더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최소한 같이 앉아서 밥은 먹을 수 있지 않은가?“어떻게 생각해요?”최란이 씁쓸하게 한병후를 보고 물었다.“여름이 생각대로 하지. 생각해 봐요. 정말 불공평하지. 하준이는 여름이를 행복하게 해주기 보다 상처를 많이 줬지. 반면에 여름이는 하준이 대신 회사 관리하랴, 애들 돌보랴, 심지어 하준이 본인까지도 돌보고 있어. 뒤로는 양유진, 백지안이 호심탐탐 노리는데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젊은애 혼자서 견디기에 너무 힘들 거야.”한병후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하지만 하준이 성격에 동의할 리가 없잖아.”최란은 골치가 아팠다.“제가 동의를 안 하면 어쩔 거야? 평생 저러고 여름이에게 돌봐달라고 할 수도 없잖아.”한병후가 강경하게 말했다.******군 병원.강신희는 철문을 잡고 미친 듯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이 짐승! 감히 날 가둬? 내가 왜 이런 짐승을 못 알아봤을까?”“이혼해! 날 놔줘!”“여경이를 보게 해줘. 여경이를 어쩐 거야? 강
“회장님, 지난 번에 의뢰한 사모님과 여울이 친자 감별이 끝났습니다.”맥퀸이 다급히 다가왔다.“니아만에서 결과를 찍어서 보냈습니다. 한 번 보시죠.”차진욱이 핸드폰을 받아서 보았다. 여울과 강신희의 모녀관계는 확인할 수 없지만 미토콘드리아 검사 결과 친혈육인 것이 확인 되었다. CB그룹의 최고 의료 시설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확인해준 것이었다.여울이가 강태환의 손녀라면 강신희와 여울은 조금 더 관계가 멀어진다. 그러나 두 사람의 유전자와 미토콘드리아 분석 결과 이모 할머니와 조카손녀가 아닌 외할머니와 외손녀 관계가 확실한 것이 드러났다.분노에 찬 맥퀸의 목소리가 들렸다. “완전히 강여경에게 속은 겁니다. 보아하니 전에 도련님이 검사했던 머리카락도 모두 강여름의 것이었던 모양입니다. 강여경이 막 니아만에 왔을 때 묵었던 호텔을 조사해 봤습니다. 메이드가 그러는데 빗에서 머리카락을 빼서 드렸다고 하더군요. 머리에서 직접 뽑은 게 아니고.”“민우를 나무랄 수도 없지. 누가 머리카락을 한 올씩 바꿔치기 한다는 생각을 했겠나?”차진욱의 싸늘한 눈이 가늘어졌다.‘정말 아주 제대로 디테일하게 작전을 짰었군.’“사모님께 말씀드릴까요?”맥퀸이 망설이며 물었다.“그 사람이 믿겠나?”차진욱이 코웃음을 쳤다.“지금 날 전혀 신뢰하지 않는데. 내가 거짓으로 꾸며냈다고 생각할 거라고. 지금 자기를 없애고 강여름과 결혼하려고 한다고 생각하니까.”“하아, 사모님도 참….”맥퀸이 이마를 문질렀다.“얼마나 지나야 좋아지시려는지….”“완전히 치료하려면 반년은 걸린다고 하더군.”차진욱이 미간을 문질렀다.“아무래도 이쪽 의료가 우리 쪽보다 못한 것 같아. 좀 일찍 신희를 니아만으로 옮기고 싶어.”“그것도 괜찮겠네요. 사모님이 계속 여기 계시는 것도 시한폭탄 터지기만 기다리는 것 같아서요. 강여경 사망 소식이라고 들으시면 큰일입니다.”맥퀸이 말을 이었다. “아, 조사해 밨습니다. 강여경과 강태환 부부가 내내 가족으로 되어 있어서 이쪽 법에 따르면 강여경이
“네, 함께 해주시면 너무 안심될 것 같아요.”전면창 앞에서 여름은 빙긋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내일 이사회에 여름은 사실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차진욱이 나와준다니 여름은 심장을 짓누르던 큰 바위가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나가…. 당신에게 배울 필요 없다니까….”“나가라면 나가죠. 이래 놓고 내일 다시 부르지 마십시오. 절대 안 와요!”“……”갑자기 복도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여름은 미간을 찡그리며 문을 열었다. 여름이 부른 선생님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문을 나서고 있었다.복도에는 책이 마구 널부러져 있었다.하준은 그 옆에 서 있었다. 여름이 나오는 것을 보더니 억울하다는 듯 까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화났다는 듯 여름을 노려보더니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그러면서 문을 있는 힘껏 쾅하고 닫았다.“이 녀석, 열지 못 해? 어디 선생님께 이 따위 버르장버리냐? 우리 좋으라고 공부하라고 하냐? 다 너 좋으라고 하는 거 아니냐? 평생 이러고 문맹으로 지낼 셈이야? 여울이와 하늘이도 너보다 아는 글자가 많다.”하준의 태도에 한병후는 있는 대로 화가 났다.“안 해! 공부하기 싫다니까! 날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글자 따위 몰라도 상관 없다고!”하준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니? 널 아끼니까 공부하라고 하잖아? 네가 더 잘 됐으면 해서!”한병후는 머리가 아팠다. 자식을 가르쳐 본 경험이 없이 쉰이 넘어서 좋은 아버지가 되려고 해도 오히러 하준을 자극하는 말만 할 뿐이었다.“여름이가 날 안 좋아하니까 공부 안 해. 다 필요 없어. 여름이만 날 좋아하면 된단 말이야!”당당하기 그지 없는 하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한병후는 난감해졌다.“여름이가 왜 널 안 좋아해? 여름이가 선생님도 아닌데 널 어떻게 가르치냐? 그리고 여름이도 자기 생활이 있어. 어떻게 1분 1초를 다 너에게 붙어 있냐? 계속 이러면 여름이가 정말로 널 안 좋아하게 된다!”“……”서재가 갑자기 조용해졌다.하준도 아무 말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