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함께 해주시면 너무 안심될 것 같아요.”전면창 앞에서 여름은 빙긋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내일 이사회에 여름은 사실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차진욱이 나와준다니 여름은 심장을 짓누르던 큰 바위가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나가…. 당신에게 배울 필요 없다니까….”“나가라면 나가죠. 이래 놓고 내일 다시 부르지 마십시오. 절대 안 와요!”“……”갑자기 복도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여름은 미간을 찡그리며 문을 열었다. 여름이 부른 선생님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문을 나서고 있었다.복도에는 책이 마구 널부러져 있었다.하준은 그 옆에 서 있었다. 여름이 나오는 것을 보더니 억울하다는 듯 까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화났다는 듯 여름을 노려보더니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그러면서 문을 있는 힘껏 쾅하고 닫았다.“이 녀석, 열지 못 해? 어디 선생님께 이 따위 버르장버리냐? 우리 좋으라고 공부하라고 하냐? 다 너 좋으라고 하는 거 아니냐? 평생 이러고 문맹으로 지낼 셈이야? 여울이와 하늘이도 너보다 아는 글자가 많다.”하준의 태도에 한병후는 있는 대로 화가 났다.“안 해! 공부하기 싫다니까! 날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글자 따위 몰라도 상관 없다고!”하준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니? 널 아끼니까 공부하라고 하잖아? 네가 더 잘 됐으면 해서!”한병후는 머리가 아팠다. 자식을 가르쳐 본 경험이 없이 쉰이 넘어서 좋은 아버지가 되려고 해도 오히러 하준을 자극하는 말만 할 뿐이었다.“여름이가 날 안 좋아하니까 공부 안 해. 다 필요 없어. 여름이만 날 좋아하면 된단 말이야!”당당하기 그지 없는 하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한병후는 난감해졌다.“여름이가 왜 널 안 좋아해? 여름이가 선생님도 아닌데 널 어떻게 가르치냐? 그리고 여름이도 자기 생활이 있어. 어떻게 1분 1초를 다 너에게 붙어 있냐? 계속 이러면 여름이가 정말로 널 안 좋아하게 된다!”“……”서재가 갑자기 조용해졌다.하준도 아무 말
여름이 이 집에 사는 이유는 순전히 하준 때문이었다.하준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여름이 가는데 나도 따라 갈 거야.”“… 왜?”“왜냐니?”하준은 머리를 긁적였다.“몰라. 어쨌든 난 여름이랑 딱 붙어 있을래.”여름은 울고 싶었다. 어쩐지 마음은 따뜻해 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서글픈 마음이 더 컸다.“우리 얘기 좀 하자.”여름은 다시 하준에게 걸어갔다.하준은 여름의 작은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다 보니 확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흥!’하더니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여름은 따라 들어가 문을 닫았다.서재 바닥은 하준이 엉망진창을 만들어 놨다. 선생님이 수업을 하려고 했을 때 얼마나 성질을 부렸는지 알만했다.하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을 그렁그렁하고 여름의 손을 잡았다.“잘못했어. 어제 변태라고 해서 미안해. 아직도 화났어? 다시는 그런 말 안 할게. 날 떠나지 마.”여름은 전혀 대비하지 못하고 있다가 하준에게 안겨서 당황했다.뜨거운 눈물방울이 어깨에 떨어질 때야 후회가 되었다.아무리 덩치가 크고 농구를 잘하고 몸놀림은 여전하다고 해도 하준의 심리적인 나이는 두 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것이다.하주에게 이렇게 큰 부담을 지워주지 말았어야 한다는 생각에 우울해졌다.“어제 변태라고 불러서 화난 거 아니야. 그냥… 쭌이 자꾸 자라서 날 떠날까 봐 두려웠어.”여름이 가볍게 맗ㅆ다.“쭌은 깨어나서 처음 날 봤을 때 아줌마라고 했잖아. 난 준의 아줌마가 되고 싶지 않아. 사랑하는 사람, 쭌의 여자친구가 되고 싶어.”“아줌마가 싫으면 하지 마. 사랑하는 사람 내 여자친구 아무거나 다 해!”하준이 여름을 꼭 안았다.“하지만 쭌은 사랑하는 사람이 뭔지 모르잖아? 여자친구가 뭔지 알아?”여름이 가볍게 하준을 떼어내며 물었다.아무 것도 모르는 하준이 까만눈을 깜빡였다.여름은 하준을 보고 웃었다.“그거 봐. 쭌은 아무것도 모르잖아. 아는 게 너무 적어서 그래. 왜 책을 읽고 영어를 배우라고 하는 지 알아? 쭌이 빨리 자랐으면 해
“나랑… 여울이나 하늘이는 뭐가 다른데?”“여울이랑 하늘이가 쭌보다 훨씬 작은 거 몰라? 여울이랑 하늘이는 진짜 세 살이야. 쭌이 두 살이면 어떻게 세 살보다 그렇게 크겠어? 나보다도 크잖아?”여름은 한숨을 쉬더니 사실대로 말했다.“왜 쭌은 유치원을 안 보내주는 지 알아? 쭌은 유치원에 어울리지 않으니까. 그리고 학교도 안 맞아. 쭌은 사실 서른 세 살이야. 나보다도 6살은 더 많다고.”“……”하준은 어리둥절한 나머지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얼굴을 했다.“쭌은 사고를 당해서….”여름이 자기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여기에 문제가 생겼어. 그래서 자기가 두 살이라고 생각한 거야. 나중에 진짜 두 살짜리 아가는 어떤지 보여줄게.”자기가 두 살이라고 생각하던 하준은 당황했다.“……”하준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내가 진짜… 그렇게 늙었어?”하준은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아니, 안 늙었어.”여름이 하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준 나이는 남자가 제일 매력적인 나이야. 공부도 하고 일도 하면 더 매력적일 거야.”너무나 놀라고 실망했던 하준은 자기가 매력적이라는 말을 듣자 마음이 살짝 풀렸다.“그러면 열심히 공부하고 일도 할 거야. 내가 여름이를 돌봐줄게.”“그래. 오후에 선생님이 오시면 괜히 성질 부리지 말고, 응?”여름이 부드럽게 타일렀다.하준은 얌전히 끄덕였다.“여름이 말 잘 들을게.”“착하네. 내려가서 밥 먹자.”여름이 환하게 웃었다.최란과 한병후는 갑자기 얌전해진 하준을 보고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다.“아유, 역시 네가 수단이 좋구나.”하준이 물을 마시러 간 사이에 최란이 얼른 다가와 여름의 손을 잡았다.“하준 씨에게 진짜 나이를 말해줬어요.”여름이 털어놨다.최란은 깜짝 놀랐다.“그걸 받아들였어? 충격 받지 않았니?”“계속 숨길 수도 없잖아요. 그리고 하준 씨가 바보도 아닌 걸요. 시간이 흐르면 결국 자기가 다르다는 걸 알았을 거예요.”여름이 양손을 펼쳐 보였다.“심리적 수용력이 우리가
여울은 어쨌거나 철면피라 별 신경 쓰지 않았다.그러나 하늘은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여름은 혹시 하늘이가 하준의 얼굴에 책을 집어 던지지나 않을까 걱정됐다.“부끄럽게 무슨 짓이야?”여름이 하준을 흘겨보았다.“그런 건 쭌이 어렸을 때 다 배운 거니까 그렇지. 전에 배웠던 걸 선생님이 가르쳐 주실 때 다시 꺼내서 아는 거라 다른 사람보다 빠르게 배우는 거야.”“그래! 뭐 그런 걸로 그렇게 잘난 척을 하는데!”여울이 눈을 흘겼다.“나이 비슷한 애들끼리나 비교하는 거지. 어제는 우리에게 누나, 형 하더니 이게 뭐야? 뻔뻔하게.”“너…”하준은 바짝 약이 올라서 얼굴이 빨개졌다.“나 안 뻔뻔하거든!”“뻔뻔해! 아저씨야!”여울이 메롱을 해 보였다.하준은 화가 나서 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자기 진짜 나이를 생각하고는 꾹 참았다.하늘은 그 모습을 보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너무해. 셋이서 나만 괴롭히고.”하준은 씩씩 거리며 볼을 부풀렸다. 억울한 것을 간신히 참는 모양새였다.“아유! 알았어, 알았다고. 안 그럴게.”마음이 여린 여울은 그림책을 보러 갔다.******여울과 하늘이 잠들자 하준이 몰래 여름의 귀에 속삭였다. “ I love you.”하준의 목소리는 너무나 듣기 좋았다. 고요한 밤에 하준의 저음으로 그런 말을 들으니 여름은 심장이 두근거렸다.하준의 준에 달빛이 비쳐 반짝였다. 사람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빛이 담긴 듯 보였다.“오늘 배운 거야.”하준이 발그레한 여름의 볼을 보며 말했다.“고마워. 너무 좋다.”여름이 하준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그 말의 진정한 뜻을 모른대도 여름의 심장은 이미 녹아버렸다.하준이 앞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한대도 그것은 미래의 일이었다.지금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 싫었다.여름은 하준이 자신을 한 번 사랑하게 만들었으니 다시 사랑하게 만들 자신도 있었다.******다음 날.하준이 깨어나자 여름은 하준에게 블랙 슈트를 입으라고 종용했다.옷을 입자 여름은 위아래로 하준을
“……”‘그렇게 티가 났나?’여름은 속마음을 다 들킨 듯했다.“아니거든. 그냥 그렇게 입혀 놓으니까 너무 근사해서.”여름은 정색하고 답했다.“정말?”하준은 민망한 듯 머리를 긁더니 헤헤 웃었다.“너무 잘생겨서 넋이 나갔어?”“……”하준에게 팩트 폭행을 당한 여름은 당황했다. ‘겨우 하루 만에 너무 발전이 빠르잖아? 역시 사람은 책을 읽어야 해. 머리에 든 게 많으니 사람이 다라지는군.’“아니거든. 내가 잘생긴 사람을 얼마나 많이 봤는데 그런 걸로 정신을 못 차리고 그러겠어?”여름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했다.하준이 씩 웃었다.“누군데? 누가 나보다 잘생겼어?”“이주혁 선생, 송영식! 둘 다 엄청 잘생겼잖아? 매력이 달라서 그렇지.”여름이 빙긋 웃었다.“이 세상에 잘생긴 사람이 당신 하나 뿐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시지.”하준은 속으로 코웃음을 치고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내가 제일 잘생겼거든.이 세상에서 제일 잘생겼다고.’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여름은 하준에게 핸드폰을 건넸다.“전에 자기가 쓰던 핸드폰이야.”하준이 지문인식으로 열어보니 바탕화면에 하준과 여름의 셀카가 보였다. 얼굴을 맞대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었다.하준은 움찔했다. 느낌이 묘했다.여름이 운전해서 FTT로 향했다. 하준은 보조석에 앉아 호기심에 차서 핸드폰에 몰두했다.전에 게임을 하고 애니메이션을 볼 때는 자기 핸드폰이 하나 있었으면 싶었다.그러다가 드디어 손에 넣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몰랐따.진지하게 전에 다운받아 놓은 어플을 보니 자기가 좋아하는 게임이 없었다. 죄다 금융 어플이나 재테크 어플 뿐이었다.재테크 어플을 열어 보니 주식 화면이 보였다.주식이라면 어제 금융학 교수가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하준은 잠시 주식 화면을 들여다 보다가 로그인을 시도했다. 비밀번호가 기억 나지 않았지만 신분증과 핸드폰 번호로 쉽게 비밀번호를 찾았다. 들어가 보니 돈이 꽤 많은 게 아닌가?‘내가 이렇게나 돈이 많았구나.’떡본 김에 제사 지
“최하준, 사람을 짜증나지 않게 하면 하루가 안 지나가지?”여름은 완전히 이성을 잃고 소리 질렀다.“주식을 그렇게 많이 사들이다니 정신 나갔어? 돈 벌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 지금 당신은 예전의 최하준 회장이 아니라고! 아직도 자기가 무슨 초거대 재벌인 줄 알아?”여름은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었다.원래 하준은 여유자금이 생기면 무조건 회사의 연구개발에 투자하곤 했다.그러다가 FTT가 적대적 인수를 당하고 나서 이사장과 회장 자리도 모두 빼앗겼다.‘지금은 부모님께 빌붙어 사는 주에게 그렇게 큰 돈을 써버리다니….돈이 뭐 하늘에서 그냥 뚝 떨어지는 둘 아는 거야, 뭐야? FTT를 되찾지 못하면 지금 남은 그 돈으로 재기를 노려야 하는데 그걸 다 주식시장에 박아버리다니….’하준은 여름이 소리를 지르자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이렇게 화난 여름은 처음 보아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그게 큰 돈이야?”“당연히 큰 돈이지. 보통은 평생 벌어도 못 벌 돈이라고.”“아, 그런데 내가 들어갈 때 주식이 계속 오르는 중이었거든. 지금 팔면 수익이 25%정도 되는데.”하준은 혼란스러운 듯 핸드폰을 들어 여름에게 보여주었다.여름은 다시 흠칫했다. 얼른 가져가서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 졌다.눈깜짝하 사이에 수익은 25.5%가 되어 있었다.가장 맹렬한 기세로 오른 주식을 보니 가격이 미친듯이 올라서 상한가를 찍었다.‘이게 무슨….’여름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돈 벌기 쉬운 줄 알았지.”하준이 코를 문지르며 조용히 말했다.여름은 헛웃음이 나왔다.‘쉽다고?나는 주식을 샀다하면 떨어지는데 당신은 돈 벌기가 그렇게 쉽니?’주식 한 가지만 상한가를 쳤다면 우연이겠거니 하겠는데 하준이 사들인 다섯 가지 주식이 모두 그랬다.여름은 심란한 듯 옆에 있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하준이 이 정도로 고수인 줄 처음 알았다.‘까도 까도 양파같구먼.’여름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거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어쩌다 한 번씩 하는 건 괜찮지만 그렇게 많
경비와 데스크 직원은 여름과 하준을 진작에 알아보았지만 일부러 난처하게 만드는 것이었다.그런데 하준이 화를 내기 시작하니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가 압도적이었다. 데스크 직원과 경비는 하준의 분위기에 완전히 압도되었다.속에서는 계속 물음표가 올라왔다.‘바보가 됐다더니 이게 바보라고?’“비켜!”하준은 경비의 멱살을 잡아서 그대로 집어던졌다.그러고는 경멸의 시선을 던졌다.“한 입 거리도 안 되는 것들이! 주제에 FTT에서 경비를 맡아? 낙하산이지?”“이 이게 죽고 싶나?”경비는 화가 나서 얼굴이 벌겋게 되었다. 혼자서는 도저히 하준의 상대가 안 될 것 같았다. 아니, 떼거지로 붙는데도 하준을 이기기는 힘들 듯했다.어쨌더나 신임 회장이 최하준이 오거든 무슨 수를 쓰든 모욕을 주라고 명령했었다.경비가 다른 경비를 불렀다.여름은 앞에 펼쳐지는 난장판을 바라만 보았다. 하나 둘씩 눈 앞에 경비가 널브러져서 일어나지 못했다.“쓸모없는 것들.”하준이 선글라스를 추어 올렸다. 경멸하는 시선까지 더해지니 엄청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여름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너, 너무하구먼. 경찰에 신고하겠어.”제일 먼저 나섰던 경비가 툴툴거리며 핸드폰을 꺼냈다.“걸어요!”여름이 피식 웃었다.“우리가 경찰을 부를 판이었으니까. 자기 회사도 못 들어가게 막다니. 그것도 여럿이서 한 사람을 공격하다니, 집단 구타지? 재미있네. 대체 회사를 어떻게 관리하는 건지 맹원규를 불러 봐야겠네.”경비는 그대로 굳어졌다.자기는 맹 회장의 백으로 취직을 했다. 아무리 바보라도 이런 일을 맹 회장을 끌고 들어가게 되면 큰일이라는 것쯤은 알았다. “오셨어요?”이때 상혁이 후다닥 뛰어 왔다. 상혁은 목에 출입증을 걸고 있었다.상혁이 1층 지원 부서로 좌천되었다는 말은 들었지만 직접 눈을 보니 울분이 치밀었다.“응. 그런데 입구에서 개떼가 막고 들여보내질 않아서.”하준이 싸늘하게 말했다.개떼 소리를 들은 경비와 데스크 직원은 할 말을 잃었다.“……”새로 온 직원
상혁은 둘을 데리고 그대로 회의실로 향했다.여름은 FTT 회의실은 처음이었다. 들어가서 보니 안은 꽤 넓었다. 십여 명이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었다. 짙은 색 양복을 입은 중년 남자가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옆에 선 비서가 차를 따르고 있었다.여름은 그 사람을 흘끗 보고 맹원규라는 것을 바로 알았다. 온라인으로 조사를 해보았는데 베테랑 경영자로 전에 해외에서 꽤 큰 기업의 CEO도 맡았었다.실물을 보니 얼굴이 음험한 것이 얼마나 교활한 인간인지가 느껴졌다. 강여경이 FTT 관리를 맡길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최 이사 아니신가?”걸음 소리를 듣더니 맹원규가 하준에게 고개를 까딱했다. 씩 웃기는 했지만 일어서지는 않았다. 여름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그러나 여름은 맹원규가 자신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맹원규가 자신에게 위세를 떨려고 그러는 것도 알아챘다.여름은 웃으면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맹원규 앞에 툭 던졌다.“최란 이사는 오늘 몸이 좋지 않아서 이사회에 참석하니 않으십니다. 서면으로 나에게 전권을 위임해서 이번 회의에 참석하라고 하셨습니다.”“그렇군.”맹원규가 사인을 보더니 공손하게 고개를 끄덕했다.“최란 이사는 나이가 많으니 이해합니다.”“쉰 남짓이 많은 나이던가요?”여름이 맹원규를 흘끗 보았다.“그쪽도 곧 쉰이 다 된 걸로 보이는데. 뭐 어디 불편한 거 있으면 우리에게 얘기 하세요. 나이가 많으니 이해할게요. 꼭 맹 회장이 있어야 회사가 돌아가는 건 아니니까.”맹원규는 순식간에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즉각 반응하지 않았다. 얼굴에는 시종일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히려 여름을 압박하는 듯한 표정이었다.“그런 뜻이 아닌데 오해하신 것 같군. 그리고 난 이제 겨우 마흔 하나요. 몸도 건강하고.그리고 남자랑 여자는 원래 몸이 다르니까, 뭐.”“어머나 그러셨구나. 하도 나이 들어 보여서. 내가 잘못 봤나 보네요.”여름이 생글생글 웃었다.“확실히 다르긴 하죠. 매년 병으로 사망하는 남자가 여자보다 훨씬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