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마태수가 안내되어 들어왔다.깊이를 알 수 없는 최하준의 눈동자가 마태수에게 고정됐다.“증인과 함께 몰래 저질 전선으로 교체한 사람이 누구입니까?”마태수는 이민수 쪽을 쳐다보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사람입니다.”이민수는 당황해 어쩔 줄 몰랐다.“무슨 헛소리야 이게, 강여름이 매수한 건가?”마 회장은 머쓱하게 말했다.“날 매수한 건 당신이지. 호텔이 불탄 뒤 당신이 해외에 있는 내 아들에게 2억을 송금했잖소.”이민수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이정희 여사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주대성은 더욱 노발대발했다.“전선을 바꾼 게 당신이었다니! 강여름 씨를 내세워 날 농락한 건가?”하준이 말했다.“주 선생님, TH에선 친딸을 전면에 내세웠으니 선생님을 농락했다고 볼 순 없습니다. 그저 조카를 보호하려던 거죠.”다시 법정이 술렁거렸다.“강 회장은 알고 있었단 거야?”“아이고, 모를 리가 있겠어요? 그룹 총수가?”“맙소사, 이민수 혹시 강씨 집안 사생아 아냐? 어떻게 조카 보호하겠다고 친딸을 버려?”“강 회장 부부가 이 딸을 미워한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정말이었네, 너무 심하잖아.”강태환 부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강태환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최 변호사, 말조심하시오. 이 일에 대해 우리 부부는 아는 바가 없소. 마태수가 매수당했다는 것도 몰랐소.”최하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명세서 한 장을 내밀었다.“그럴지도요. 두 분께선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 강 선생님께 이민수가 2억짜리 골동품을 선물했던데요.”“헐, 그러니까 조카한테 뇌물까지 받고도 모른 척하는 거야?”“당연하지, 일개 시공 담당자가 어떻게 저런 짓을 벌여? 분명 TH 대표자가 묵인한 거지.”“TH 정말 역겹다. 그래도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인테리어 회산데.”“됐어. 이딴 형편없는 회사는 불매해야 해.”“망해라, 그지 같은 회사.”순식간에 법정 뿐 아니라 SNS에서까지 일대 소란이 일었다.더욱이 라이브로 중계되던 재판에 순식간에
“좋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지요.”최하준의 훈훈한 얼굴이 다시 침착하고 냉정해졌다.“존경하는 재판장님, 이민수는 이번 루브린호텔 사건에서 전선만 바꿔치기한 게 아닙니다. 이 자가 사용한 방수 자재 또한 최하품입니다. 물론 이런 일이 주화그룹 공사 건에서만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예전에 리모델링했던 주택, 박물관, 비즈니스클럽에도 똑같은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무슨 소리야! 난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고!”이민수가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그럴 리 없어, 저 녀석이 다 알아냈을 리 없어!’“하지만 후반 작업을 담당했던 업체들 모두 누수, 단전 등의 부실 상황에 대해 보고한 바 있습니다. 여기 업자들이 직접 녹화한 비디오가 있습니다.”최하준이 메모리카드를 제출했다.“그뿐만이 아닙니다. 건축 공정도 날림으로 진행해 건물 몇 동에서는 벽면 타일이 떨어져 내려 사람이 다친 사례까지 있었습니다. 이민수의 배경이 워낙 세서 피해자는 배상금 조금 받고 눈감아줄 수밖에 없었지만 말입니다.”업자들의 고발 영상이 재생되자 이민수는 스르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전부 자신과 함께 작업했던 사람이다. 잘 묻어놨기에 영원히 드러날 일 없으리라 생각했는데.이 인간은 대체 이걸 어떻게 알아낸 거지?!괴물인가!두려움과 절망이 함께 밀려왔다.이렇게 후회스러운 적이 없었다.여름이 이런 대단한 인물과 연줄이 닿아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오만함을 완전히 뺀 이민수는 여름을 보며 구원이라도 청하듯 말했다.“여름아, 나 좀 살려주라. 내가 잘못했어. 나 네 오빠잖아, 우린 사촌이야, 가족, 어?”여름은 그저 역겨울 뿐이었다.“날 모함할 때는 우리가 가족인 게 생각 안 났나 봐? 하늘이 다 보고 있어. 그런 짓을 저질렀으면 벌 받아야지.”말을 마치고 여름은 주대성을 보았다.“호텔 일은 제 책임도 있습니다. 제가 TH를 믿고 계약하시라고 했으니까요. 사실 제가 회사를 그만둔 것도 이민수 씨가 자재 대금 빼돌리는 걸 두고 볼 수 없어 그랬던 겁니다. 윗선에
재판이 끝난 뒤 이민수는 죽은 듯이 바닥에 앉아 있었다.이윽고 경찰이 와 끌고 나갔다.강태환 일가는 완전히 기가 죽은 채 뒷문으로 서둘러 빠져나갔다.윤서가 감격에 겨워 달려와 여름을 꽉 안았다.“완전 사이다! 진짜 대단하세요! 저는 뭐 길어봤자 20년 형 정도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무기징역이라뇨. 완전 인정! 팬 됐어요, 진짜.”“맞아요, 정말 대단했어요.”여름도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빨리, 더 통쾌하게 끝났다. 이민수를 제대로 혼내줬고, 가족들은 잘 빠져나갔지만, TH는 망했다. 이제 TH에 공사를 맡기는 곳은 없을 것이다.“대단? 그게 전부입니까?”최하준이 눈썹을 치켜 올려 여름을 응시했다.이제껏 재판이 끝나면 늘 들어오던 찬사지만 오늘 여름의 평가는 더 듣고 싶었다.여름이 고개를 들어 최하준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검은 눈동자에 심장이 마구 뛰었고 왜 그런지 얼굴마저 뜨거워졌다. 당연히 그냥 대단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너무 멋있고 매력적이었다.다만 이런 닭살 멘트를 내뱉기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바로 이때, 양유진이 품위 있게 걸어오고 있었다. 그 뒤를 한선우가 따라왔다.“우리 여름 씨, 축하해요.”양유진이 대견하다는 듯 부드럽게 여름을 보다가 최하준에게 몸을 돌려 말했다.“최 변, 오늘 정말 고맙습니다. 우리 여름 씨 이렇게 승소할 수 있게 도와줘서.”잔뜩 올라가 있던 최하준의 입꼬리가 조금씩 쳐지고 있었다.‘뭐지, 지금 이 상황은? 내 사람 일에 왜 다른 남자가 나한테 감사하다는 거야?”싸늘한 기운이 최하준을 휘감았다. 윤서와 여름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그러나 한선우만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양유진에게 여름을 뺏기기라도 할까 봐 다급히 최하준의 손을 잡고 말했다.“오늘 정말 신세 많았습니다. 제가 여름이를 대신해서 감사드릴게요. 시간 되실 때 제가 식사 대접하겠습니다.”“흥!”목 깊은 곳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눈빛은 더욱더 싸늘해졌다. 최하준이 웃자 여름은 머리카락
“그럼요.” 윤서도 얼른 나서서 거들었다.“오늘 최 변호사님 공이 너무 커서, 여름이가 따로 대접을 해야 할 거예요.”“예, 그러니까요. 제가 벌써 예약을 해놨거든요. 먼저 갈게요.”여름은 서둘러 최하준을 끌고 나갔다.빨리 피해야지, 안 그러면 최하준의 마수에서 죽음을 면치 못할 것 같았다.여름이 최하준을 휙 잡아끌고 떠나는 모습을 보며 양유진과 한선우 표정이 심각해졌다.양유진은 최하준과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거만함이 하늘을 찌르는 사람이었다. 워낙 까다로워서 말 씹히는 것도 다반사인데 여름은 이 사람 팔을 잡아끌고 간다?갑자기 레스토랑에서 두 사람이 함께 사라졌던 일이 생각났다. 이 두 사람 관계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한선우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직 남아있는 윤서를 붙들고 물었다.“윤서야, 여름이랑 최 변 사이에 뭔가 있는 거지? 최 변이 설마 여름이 좋아하는 거냐?”“맞다, 네 친구가 최 변을 안다고 했지? 그게 누구야?”“최 변호사는 의뢰하기도 힘들고 사건을 맡는다고 해도 수임료가 어마어마하다고 들었는데, 여름이가 그런 큰 돈이 있어?”한꺼번에 여러 질문이 쏟아지자 윤서는 짜증이 났다.“오빠랑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가! 짜증 나게.”“너….”한선우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잘 들어요. 그나마 지난번에 여름이 파출소에서 꺼낼 때 힘 보탠 거 때문에 봐주는 거지, 아니면 벌써 내 손에 죽었어, 흥!”윤서가 한선우를 떨치고 가버렸다.******지하 주차장.김상혁은 앞에서 운전하고 뒷자리엔 두 사람이 말없이 앉아있었다.최하준은 고개를 숙여 핸드폰을 보며 눈 한 번 돌리지 않았다.그러나 온몸에서 퍼져 나오는 싸늘한 기운에 차 안은 마치 에어컨이라도 켜놓은 듯 몹시 싸늘했다.여름은 수시로 최하준을 곁눈질했다. 이 남자 기분이 안 좋다는 건 잘 알 수 있었지만, 질투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아마 조신하지 못하게 행동했다고 의심하는 거겠지.여름이 다른 남자 차를 타
“좋을 대로.” 최하준은 넥타이를 당기며 김상혁에게 말했다.“속도 올려. 뛰어내리면 바로 죽을 수 있을 정도로.”“…….”이 악마 같은 인간.김상혁이 정말 속도를 내는 걸 보며 여름은 씩씩거리며 최하준을 노려봤다. 진짜 뛰어내릴 용기는 없었다.“이리 와요.”여름이 안정된 걸 보고 최하준은 쌀쌀맞게 손가락으로 손짓했다.“안 묶는다고 약속하면요.”여름이 불안해하며 말했다.“내가 언제 묶는다고 했습니까? 혼자 넘겨짚어 놓고.”최하준은 짜증 내며 덥석 여름의 팔을 잡아 자신의 무릎 위에 끌어다 앉혔다.차 안에 다른 사람도 있는데, 여름은 난처해 화르르 얼굴이 빨개졌다. 섣불리 움직이기도 그렇고, 일상적인 이야기로 화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오늘 뭐 먹고 싶어요? 다 해줄게요.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그놈의 먹을 거.”최하준의 표정이 냉랭했다.“온종일 먹는 거 말고는 나한테 해줄 게 없습니까?”여름은 어이가 없었다.‘온종일 나한테 먹을 것만 찾는 건 당신이잖아!’“흥, 오늘 그 사람들은 왜 온 겁니까?”“모르겠어요.”여름이 맑고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앞으로 그 두 인간은 만나지 마십시오.”“…….”여름은 최하준의 오만한 말투에 진땀이 났다.한선우가 형편없는 인간인 건 인정한다, 하지만 양유진은 성공한 청년사업가라고! “싫은 눈치입니다?”최하준이 얼굴을 찌푸렸다. 위험한 눈빛이었다.“아유, 천만에요.”“그 사람들 쭌이랑은 차원이 다르죠. 오늘 쭌 법정에서 완전 멋졌어요. 정말 어떻게 한 거예요? 민수 오빠가 저지른 범행은 나도 몰랐는데 그렇게 다 찾아내고. 진짜 대단해요!”여름은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사실이었다. 이기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던 재판이었다. 이민수는 워낙 교활한 인간이라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판을 뒤집기란 너무 어려워 보였다.하지만 최하준은 그걸 우습게 해냈다.최하준을 바라보는 여름의 눈이 너무나도 초롱초롱 빛나 최하준은 어느새 기분이 좋아졌다.재판에서 수없이 이겨봤지만 이번 재판이 가
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 안 했어도 그럴 참이었다.보답의 의미로 그가 좋아하는 음식으로만 준비했다.식사 준비를 하며 인터넷 뉴스를 잠시 들여다봤다.좋았어! 지금 인터넷은 온통 TH를 욕하는 여론으로 뒤덮였다. 이번에 강태환은 조사 대상이 아니었지만 네티즌들은 그룹 총수인 강태환이 무고하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게다가 TH에 대한 보이콧 움직임도 나타나기 시작했다.TH는 끝이다!여름을 오해하던 사람들도 모두 이제는 동정하고 있었다.예전에 몇천 명정도이던 팔로워 수가 지금은 수십만 명이 되었다. 웬만한 인플루언서 못지않았다.이모님이 화려하게 차려진 칠첩반상을 보고 감탄했다. “어머나, 사모님 음식 솜씨가 이렇게 훌륭하시니 내가 한 음식은 거들떠보지도 않으셨던 거군요.”여름도 안다. 하준이 말은 안 해도 이미 자신의 음식에 길들어 있다는 걸.“다음에 음식할 때는 레시피를 알려드릴게요. 그럼 제가 없어도 이모님이 해주실 수 있잖아요.”“좋죠. 하지만 사모님이 안 계실 일이 있겠어요? 평생 함께하는 게 부부인걸요.”이모님은 웃으며 청소를 계속했다. 여름의 말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이제 재판도 끝났겠다, 여름은 이제 돈 버는 데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평생 이렇게 애매한 상태로 하준 옆에 묶여있을 수는 없었다.식사 준비를 마치고 보니 이모님이 바빠서 하는 수 없이 여름이 직접 이층에서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수영장으로 가 최하준을 불렀다.온수 풀장 안에서 돌고래처럼 움직이고 있는 건장한 남자의 몸이 눈에 들어왔다.수영장 가에 서서 그 모습을 보던 여름은 살짝 넋이 나갔다. 자신이 보았던 수영선수들이 이 정도 수준이었다. 이 사람이 수영까지 이렇게 잘할 줄은 몰랐다. 최하준이 맹렬히 여름이 있는 쪽의 수면을 뚫고 나왔다. 검은 머리카락이 젖은 채로 이마에 붙어 있어 물방울이 머리카락을 따라 뺨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높은 콧날을 지나 새빨간 입술, 쇄골까지…여름은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렇게 많이 먹는데 몸은 어떻게 이
다시 앞으로 돌아와 얼굴을 닦으려고 할 때 두 눈이 마주쳤다. 최하준의 눈이 불타오르고 있었다.여름의 얼굴도 빨개졌다. 서둘러 눈을 내리깔았지만, 자신의 그런 모습이 얼마나 많은 말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최하준은 머리 속에 팽팽했던 한 줄기 줄이 끊어진 것 같았다. 돌연 여름의 허리를 잡고 물었다.“그거, 끝났습니까?”여름은 머리가 멍해져서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곧, 여름의 몸이 들어 올려졌다. “뭐 하는 거예요?”여름이 놀라서 최하준의 목을 껴안았다.“강여름 씨, 당신 유혹 기술이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군요.”최하준은 여름을 안고 위층 침실로 갔다.여름은 미칠 것 같았다. ‘내가 언제 유혹했냐고, 저기요, 당신이 나더러 닦으라 그래 놓고. 자제력 갑인 사람 아니었어? 언제는 역겹다며?”침대에 던져질 때까지 여름은 옴 몸이 떨렸다.계약서에 사인한 날, 이런 날이 오게 되리란 걸 예상 못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겁났다. 지난번 트라우마가 아직 남아있었다.최하준이 그녀의 코끝을 손끝으로 꼬집었다. 뭘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잠깐만요.”여름이 최하준의 가슴을 밀어냈다. 눈가가 빨겠다. 원망이 가득한 얼굴이었다.“쭌, 우리 이러면 안 돼요. 난 당신과 어울리지 않아요.”“주제 파악이 빠르군요.”최하준이 주춤하더니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말문이 막힌 여름은 억지로 계속 괴로운 척했다.“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이제 알아버려서…. 당신은 정상급 변호사고 나는 빽 없는 일개 디자이너잖아요. 이렇게 평범한 내가 신계에 있는 거나 다름없는 당신을 잡고 늘어지는 건 신성 모독 같은 거죠.”“내 침대에 올라오지 못해 안달 아니었습니까?”“…….”‘그땐 한선우 외삼촌인 줄 알고 그랬지.’하지만 사실을 얘기할 순 없었다.“그땐 뭘 잘 몰라서, 당신 몸을 차지하면 마음도 차지하게 될 줄 알았죠. 나중에야 틀렸단 걸 깨달았어요.”“틀렸습니다.”최하준은 여름의 턱을 쓰다듬더니 그윽하
화가 나 전화를 걸었다.“강여름 씨, 당장 돌아오지 못하겠습니까? 계약서 내용 다시 짚어줘요? 내가 자선사업 하는 줄 압니까? 필요할 때는 공짜로 도와달라고 하더니, 그깟 음식이 몇백억짜리가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게다가 처음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순진한 척입니까?”한마디 한마디가 듣고 있는 여름을 때리고 있었다.처음엔 미안하기만 했던 여름도 이제 화가 치밀었다.“무슨 근거로 내가 처음이 아니라고 말하는 거예요?”“한선우랑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었다면서 아직 첫 경험이란 게 남아 있다는 겁니까?”최하준은 요즘 젊은 사람들이 순수하게 사귈 수도 있다는 걸 믿지 않았다.“한 적 없어요.”여름은 위축되어 말했다.“믿거나 말거나.”최하준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10분 주겠습니다. 당장 내 앞에 나타나지 않으면 감당 못 할 일 생길지도 모릅니다.”망연자실한 여름은 수영장 가에 잠시 서 있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갔다.빚진 것 투성이인데 배은망덕한 인간이 되고 싶진 않았다.최하준은 현관에 서서 여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두침침한 불빛이 가물가물하게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미안해요. 고의는 아니었어요. 그냥 무서워서….”여름은 고분고분하게 곁으로 가 허심탄회하게 사과했다.“아직 원하면, 방으로 돌아갈게요.”최하준이 이를 꽉 물고 물었다.“전에 나한테 술수 쓸 때는 두려워 보이지 않던데?”“그땐… 너무 좋아서 눈에 보이는 게 없었거든요!”여름은 울고 싶은 심정으로 거짓말을 했다.“거절당하고 나서는 소심해져서, 트라우마가 생겼어요.”“…….”좀 아까 깎인 체면이 조금 회복된 기분이었다.“알겠습니다. 당분간 손 안 대는 걸로 하죠. 밥 먹읍시다.”최하준은 차가운 얼굴로 거실로 돌아갔다.여름은 멍하게 서 있었다. 이렇게 쉽게 자신을 놓아주다니, 불가사의한 일이었다.******TH그룹.회의실에서 강테환은 사장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AB팀에 벌써 디자이너 다섯 명, 건축사 네 명이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제가 알아본 바로는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