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게 말이에요. 헤어진 지 몇 년이나 되었는데도 남자가 다른 여자를 만났다고 그 사람 회사를 망가트리려고 했나 봐. 세상에, 너무 못됐다.”“생기기도 얼마나 표독스럽게 생겼나 봐봐요. 딱 봐도 아주 속도 좁은 타입이지.”“어디서 많이 보던 얼굴이다 싶었더니 우리 단지에 사는 사람 아니야?”“어머나! 리버사이드는 워낙 고급단지라 재벌집 자재들이 많이 사는데 저 아가씨도 참 안 됐네. 어쩌다가 저런 사람한테 걸렸담?”“아가씨, 일어나요. 그러고 땅바닥에 엎드리고 있지 말고.”나이가 지긋한 여자가 나서서 부드럽게 신아영을 달랬다.“고맙습니다. 하지만 언니가 제 남자친구의 회사를 그만 놓아주겠다고 할 때까지는 일어날 수 없어요.”신아영이 울먹였다.“윤서 언니, 다시는 오빠랑 연락도 하지 않을게요. 제발 봐주세요.”그러면서 신아영은 바닥에 더 납작 엎드렸다.“너 예전보다 아주 더 고단수가 되었구나.”윤서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아무 짓도 안 했는데 신아영의 말 몇 마디로 졸지에 세상 못된 전여친이 되어 버린 것이다.“네 쇼 봐줄 기분 아니니까 그러고 바닥에 널부러져 있을 테면 계속 그러고 있던지.”그러고는 신아영의 손을 잡아 떼었다.신아영은 죽어라 치맛자락을 붙들고 늘어져 눈물을 짰다.“언니, 그렇게 해주신다고 말씀해주시면 바로 갈게요. 아니면 언니 화가 풀릴 때까지 저한테 무슨 짓을 시키셔도 좋아요.”“아영아….”이때 고급 승용차가 길가에 멈추더니 윤상원이 차에서 튀어나왔다. 바닥에 널부러져 여기저기 찰과상으로 피가 번진 신아영을 보고는 분노가 치밀어 바로 그쪽으로 뛰어갔다. 상황을 비웃는 듯한 윤서의 얼굴이 보였다.윤상원은 화가 치밀어 그 기세로 바로 윤서의 뺨을 후려쳤다.“너 정말 못됐구나!”윤서는 얼굴이 불에 덴 것처럼 화끈화끈했다.윤상원의 분노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뇌리에 3년 전 일이 다시 떠올랐다.그러나 윤서는 더 이상 3년 전의 임윤서가 아니었다.“윤….”윤서가 입을 열기도 전에 갑자기 분노한 목소리가
전에는 송영식의 그런 성격이 너무 싫었는데 지금 보니 꽤나 귀엽게 보였다.“그만 때리세요.”신아영이 울부짖었다. 아무도 자기에게 신경을 쓰지 않자 신아영이 윤서의 치맛자락을 잡고 매달렸다.“언니, 제발 송 대표 좀 그만 때리라고 말려주세요.재벌에 정치 명문가라고 사람을 이렇게 하찮게 취급하면 안 되잖아요?”구경꾼은 점점 더 늘어났다.재벌에 정치 명문가라는 말은 매우 민감한 단어였다.“대통령 후보로 나올 그 송태구의 가족이란 말이야?”“아무래도 그런가 본데? 송태구의 수양딸이 이 단지에 산다고 들었는데.”“그러면 저 여자가 송태구의 수양딸이야?”“어쩐지 기세등등하다 했더니, 아직 대통령도 아닌데 애비의 지위를 믿고 까부는구먼.”“……”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하나하나 윤서의 귀에 흘러 들었다.윤서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신아영을 밀어냈다.“닥치지 못해? 시작부터 너 혼자 북치고 장구 쳤잖아? 너희들이 다짜고짜 달려들어서 폭력을 행사했잖아? 내가 너더러 무릎 꿇으라고 했니? 사귀는 5~6년 동안 여자친구는 나인데도, 윤상원은 네가 아프다면 쪼르르 달려가, 쇼핑한다면 쪼르르 달려가, 기분 안 좋다면 쪼르르 달려가, 심지어 너 생리 때는 생리대까지 사다 바치더라? 그러고도 너희가 순수하고 깨끗한 관계라고?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니까 사람이 가마니인 줄 알아?”윤서가 워낙 큰소리를 화를 냈기 때문에 구경하던 사람들도 그 말을 들었고 신아영을 쳐다보는 시선도 달라졌다.“어머나, 저러면 화 나지.”“누구 말이 진짜인지 모르겠네. 일단 경찰에 신고부터 하자. 저러다 사람 잡겠어.”“……”신아영은 이제 더는 쇼를 할 생각이 없어졌다. 윤상원은 바닥에 널부러져 송영식에게 발길질을 당하고 있었다.신아영은 얼른 윤상원의 몸 위로 달려가 엎드렸다.“제발 그만 때리세요. 차라리 절 때려요.”귀여운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애원을 하니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거기에 대고 험한 짓은 할 수 없을 상황이었다.송영식도 이 정도면 손을 멈추리라 생
송영식이 피식 웃었다.이때 경찰이 도착했다.현장에 구경꾼이 많고 사건 당사자가 보통 사람이 아닌 거슬 보고 경찰은 바로 일행을 경찰서로 데리고 갔다.******1시간 뒤 송근영이 달려왔다.콧등이 시퍼렇게 부은 윤상원과 긁힌 상처 투성이인 신아영을 보더니 얼굴이 바로 싸늘하게 변했다.“누나가 어, 어쩐 일이야?”송영식은 깜짝 놀라서 말까지 더듬었다.”“네가 싸움질 한 게 이미 다 소문나서 사람들이 재벌 집안이 갑질했다고 난리다.”송근영이 싸늘하게 나무랐다.“집에 복귀하자 마자 또 집안에 먹칠을 해?”“언니, 송 대표 잘못이 아니에요.”윤서가 일어서서 송근영 앞을 막아 섰다.“넌 또 얼굴이 왜 이래?”송근영의 눈이 가늘어졌다.“저 놈이 그랬어.”송영식이 바로 윤상원을 가리켰다.“어머니가 윤서에게 옷을 가져다 주라고 해서 와 봤더니 저 놈이 윤서를 때리고 있더라고.”송근영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날카로운 시선이 윤상원에게로 향했다.윤상원은 몸이 떨렸다. 송근영은 쿠베라 그룹을 책임지는 인물로 명성은 익히 들어 아는 터였다. 게다가 송근영은 매섭기로 유명했다. 어지간한 재벌가에서도 다들 송근영이라면 벌벌 떨었다. 윤상원도 그저 신문에서나 보던 인물이었다.지금 실물로 보니 송근영의 몸에서는 아우라가 퍼져 나오는 것이 보기만 해도 기가 눌렸다.“그게, 송 대표와 임윤서 씨가 먼저 우리 윤후그룹을 압박해서 일이 시작된 겁니다.”윤상원이 그래도 이를 악물고 작은 소리로 말해 보았다.“그게 다 저와 임윤서 씨가 사귈 때 생긴 오해로 인한 일입니다. 제 여자친구인 아영이가 임윤서 씨에게 사과 하고 우리 윤후그룹을 그만 놓아달라고…”“그래서 신아영이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는 제 치맛자락을 잡아 사람을 오가지도 못하게 하더라고요.”윤서가 바로 끼어들었다.“그러고 나서 저 윤상원 씨가 나타나서는 제 따귀를 올려 붙였는데 송 대표가 나타나 제 대신 나서준 거예요. 주변에 아마 CCTV가 있을 테니까 걷어다가 보시면 저는 신아영 씨
“야….”윤상원이 확 인상을 쓰더니 윤서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부어오른 윤서의 뺨을 보니 흠칫하게 되었다.‘내가 저렇게 세게 때렸나?’“윤상원 씨, 대체 나한테 몇 번 째 손을 댄 건지나 생각해 보시죠. 전에도 저한테 그렇게 험하게 하시더니. 내게 그렇게 만만한가 봐요?”윤서가 담담히 물었다.“뭐라고? 이게 처음이 아니야? 빨리 말하지 그랬어?”송영식이 이를 갈았다.“진작 알았으면 아까 더 세게 패주는 건데.”윤서는 다소 놀란 얼굴로 송영식을 바라보았다.조각 같은 얼굴에 확연한 분노가 드러났다. 어쩐지 적응이 안 되었다.두 사람은 내내 죽어라 싸우는 상대가 아니었던가?송근영도 눈을 가늘게 떴다. 윤상원은 콧등이 시퍼렇게 부어 오르긴 했지만 차림새와 얌전한 얼굴을 보면 여자에게 폭력을 휘두르게 생기지는 않았다.어쨌거나 윤서는 임신까지 했는데 사고가 벌어져 아이라도 잃게 되면 큰일이었다.송근영이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아주 대담하네요. 감히 우리 집안 사람에게 손을 대다니.”윤상원은 몸이 덜덜 떨렸다. 송근영의 담담한 눈빛에 주변 공기가 다 얼어붙는 것 같았다. 슬슬 후회되기 시작했다.“저기…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흥분했었나 봅니다.”“우리 집안 사람을 건드려 놓고 너무 흥분했었다는 한마디면 다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나요?”송근영의 매끈한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하지만 저도 송영식에게 맞아서 이 지경이…”송근영이 웃었다. 웃는 모습마저도 얼음조각 같았다.“우리 집안 사람이 남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날이 다 있네?”윤상원은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신아영이 용감하게 일어섰다.“이게 다 저 때문에 벌인진 일입니다. 벌하시려거든 저를 벌하세요.”“아영아….”윤상원의 동공이 흔들렸다.신아영이 눈물을 뚝뚝 떨궜다.“오빤 아무 말도 하지 마. 오늘은 내가 잘못한 거야. 내가 깜냥을 모르고 덤벼들어서 그래.”윤상원은 주먹을 꽉 쥐었다. ‘깜냥을 모르기는 나도 매한가지였는걸.’윤서는 둘의 쇼를 냉랭하게 바라보았다.송근영은
‘절대 그 지경이 되도록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나도 모르겠다.”윤상원이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자기가 어디 송근영에게 대항할 힘이나 있겠는가? 송영식의 본가는 둘째치고 윤서네 리마그룹만해도 임준서가 경영하면서 애진작에 윤후 따위는 저멀리로 젖히고 승승장구하는 중이었다.이제는 솔직히 윤서네 집안만 상대하기에도 힘에 부치는 실력이었다.신아영이 이를 갈았다.“오빠, 좋은 수가 있어. 오늘 저쪽에서 우리를 때린 건 사실이잖아? 송영식이 우리를 때린 부분만 따서 퍼트리면 분명 난리가 날 거야. 저쪽 집안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곧 송태구가 대통령 선거에 나선다지만 기록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거지. 모르긴 몰라도 정적들은 저쪽 집안 평판을 깎는 일이라면 다들 와르르 달려들 거야. 우리는 그 기회를 노리는 거지.”윤상원은 깜짝 놀랐다. 신아영이 완전히 낯선 사람처럼 보였다.신아영이 눈물을 또르르 흘렸다.“어쩔 수 없잖아. 그리고 저쪽에서 우리한테 갑질한 것도 사실이고.”“아영아, 송태구는 차기 대통령 선거에 나서는 가장 유력한 후보라고. 대통령이라는 건 한 나라의 미래를…”“오빠, 아까 송영식이랑 송근영의 기고만장한 꼴 못봤어? 저걸 그냥 두면 저 사람들이 얼마나 더 사람을 우습게 알고 갑질을 더 하겠어? 임윤서도 저렇게 기고만장한데 자기 양아버지가 대통령이 되고 나면 우리에게 뭐 선택의 여지가 생길 것 같아?”신아영이 쓴웃음을 지었다.“우리는 그냥 보통 사람이잖아? 난 이기적이라서 오빠랑 우리 식구가 그냥 평안히 살았으면 하고 바랄 뿐이야.”윤사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한참을 망설이더니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차는 송영식의 본가를 향했다.가는 길에 송근영이 잠시 차를 세웠다. 기사가 후다닥 약국에 가더니 곧 냉찜질 팩과 약을 사왔다.“일단 이거라도 얼굴에 좀 대자. 그러고 나서 약을 좀 바르던지.”“고맙습니다.”윤서가 얼른 냉찜질 팩을 받아 들었다. 송근영이 보기에는 그렇게 쌀쌀맞은데 이렇게 세심한데 놀랐다.냉찜
송영식은 은근히 기뻤다.“그건 뜻밖이네.”“다 신아영이 너무나 가식적이 탓이지. 난 그렇게 표리부동한 인간이 제일 싫었어.”송근영이 담담히 답했다.임윤서는 문득 송근영이 하는 ‘네가 하는 쇼에는 반드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라는 말이 장난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송영식이 송근영을 잔뜩 추켜세웠다.“누나 말이 맞아. 신아영은 정말 완전히 가식덩어리더라. 툭하면 질질 우는 걸로 우리가 자기를 괴롭히는 것처럼 만들어서 문제를 회피하고.”“그걸 다 아는 사람이 왜 백지안 때는 그걸 알아 채지 못 했을까, 그래?” 송근영이 문득 물었다.송영식은 말문이 막혔다.임윤서가 말했다.“누군가를 너무나 사랑하고 아끼게 되면 상대가 하는 말은 다 맞는 것 같고, 뭘 해도 마음이 짠하고 그렇죠. 우리처럼 옆에서 보는 사람이야 신아영이 가식적인 게 빤히 보여도 윤상원의 눈에는 자기를 위해서 모든 걸 희생하는 사람으로 보일 거예요. 그렇지만… 신아영을 사랑하는 윤상원의 마음만은 진심일 거예요.”“그래.”송근영이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난 그런 사람이 너무 싫어.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누군가를 해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돼.”임윤서가 놀란 얼굴을 했다.자기가 했던 말을 송근영이 똑같이 했기 때문이다.전에는 송근영이 냉혈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그렇게 차갑고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본가에 도착한 뒤.윤서는 한바탕 야단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전유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오더니 윤서의 얼굴을 매만졌다. 목이 메는 듯했다.“세상에, 얼마나 아팠니?”전유미가 한숨을 쉬었다.“그게….”윤서가 입을 열었다. 가슴에서 따스한 기운이 올라왔다.사실 송태구의 수양딸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송씨 집안에 대해서 그렇게 진한 정이 느껴지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지금 자신에게 잘해주는 것은 배속의 아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아니다. 아무 말 말거라. 근영이한테 들었다. 다 그 쪽 녀석이 너무 했더구나.”전유미가 흥분해서 송근영에게 말
송영식의 얼굴이 화르륵 타올랐다.열기는 머리 끝까지 뻗쳤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윤서가 얼굴이 빨개져서 있는 대로 욕을 하고 있었다.“이 변태야!”그러더니 홱 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기까지 했다.송영식은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숙여 아래를 보고는 귀까지 빨개져서 얼른 방으로 뛰어 들었다.‘젠장, 미쳤나?평생 마법사로 잘 지냈는데 그런 모습을 봤다고 몸이 이렇게 될 게 뭐야?아오, 정말 망신스러워서, 원.’송영식은 살면서 이런 멘붕은 처음으로 겪었다.이제 윤서 앞에서 체면은 다 구긴 거나 다름 없었다.송영식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옆 방의 윤서도 송영식 때문에 제댈 못 잤다.처음에는 윤상원과 신아영의 일로 뒤척이다가 나중에는 송영식 때문에 완전히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최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역시나 발코니에서 일은 너무나 부끄러웠다.임신을 하긴 했지만 어쩌다가 벌어진 일이지 윤서는 이쪽 방면에서는 거의 경험이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다음 날.방문을 열고 나오는데 옆 방 문이 열리더니 주황색 옷을 입은 송영식이 나왔다.송영식은 늘 새기 화려한 옷을 즐겨 입었다.보통 어느 정도 신분이 올라가면 사람은 차분한 옷을 입기 마련인데 송영식은 완전히 예외였다.워낙 우월한 미모라 뭘 입어도 어지간한 배우나 모델 뺨치기 일쑤였다.그러나 윤서는 당장은 송영식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얼른 고개를 돌리고 그대로 걸어갔다.송영식은 얼굴이 흙색이 되었다.윤서가 자신을 더러운 것 보듯 피하는 모습을 모고 저도 모르게 윤서의 손을 잡았다.“뭐 하는 건데?”“이거 놔. 이 변태야.”윤서가 몸부림을 쳤다.송영식은 억울해 미칠 지경이었다.“나 변태 아니거든. 당신이 그렇게 입고 나와 서 있으니까 내가 그러게 된 거 아냐?”윤서는 잠시 멍해졌다.‘내가 뭘 어떻게 입었었는데?’윤서의 작은 얼굴은 뒤늦게 더 새빨갛게 달아올랐다.“나가 죽어!”그러더니 힘껏 발로 차버렸다.송영식은 고통
송영식은 완전히 억울한 얼굴을 하고 두사람 뒤를 따랐다.내려가니 송우재, 송윤구, 송태구 등이 모두 모여있었다. 아침 한 번 먹는데도 대가족이 모두 모인 것이다.송영식이 싱글벙글했다.“제가 복귀했다고 다들 아침 일찍부터 오셨군요.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송태구가 한심하다는 듯 송영식을 흘끗 쳐다봤다.송윤구가 미간을 잔뜩 모았다.“어제 네가 윤상원을 폭행한 영상이 지금 온라인에 돌고 있어서 대책을 논의 중이다. 공 의원 쪽이 배후에서 분란을 조장하고 있는지 지금 일이 아주 커졌어.”송영식과 임윤서의 안색이 동시에 확 변하더니 얼른 휴대 전화를 켰다.은 이미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영상은 우선 임윤서가 단지에서 걸어 나오고 곧 신아영이 다가와 몇 마디 하고 뒤이어 바닥에 꿇어 앉는다. 임윤서가 무시하고 가려고 하자 영상으로 봤을 때는 신아영이 질질 끌려 가는 것으로 보인다. 곧 윤상원이 나타나 윤서의 뺨을 때리고, 그 자리에 송영식이 나타나 무자비하게 윤상원에게 주먹을 날린다.마지막에는 신아영이 맞는 장면까지 나왔다.-임윤서 기고만장한 거 봐라. 사람이 무릎까지 꿇고 비는데 쳐다도 안 보네, 아니 심지어 질질 끌고 감. 송태구 수양딸이라서 그런가? 내 여친이 저랬다가는 가만 안 둔다.-송태구가 아직 대통령도 안 되었는데 수양딸이 저렇게 갑질을 하고 날뛰는데 저 집안 사람을 괜찮겠나?-송영식 풀스윙 날리는 거 봐. 맞은 사람은 지금 입원했대. 완전 심각한 상태인가 봐.-송영식 경찰에도 안 잡혀감?-경찰서에 가기는 했는데 그 집안 사람이 와서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바로 빼갔대. -영상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되지. 저 여자는 왜 꿇어앉았대?-임윤서가 윤후그룹에 무슨 짓을 했다고 함. 요즘 뉴스에 발암물질 검출된 과자 못 봄? 그게 윤후그룹 거. 사실은 그 정도 함량이면 인체에 피해가 없다는데 뒤에서 송영식 네 집안에서 조작을 좀 한 듯?-너무 하네. 권력 없고 돈 없으면 저렇게 막 갑질해도 되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