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를 잡고서 여름은 가장 매운 코스를 주문했다. 각종 내장, 양고기, 소고기…음식이 다 나오자 천엽을 국물에 넣어서 후후 불어 입에 넣었다.‘음~ 이 맛이야.’최하준의 표정이 약올라 죽을 지경이다. ‘자기 먹고 싶은 것만 먹겠다? 나는 안중에도 없다 이거지?’예전같으면 최하준이 좋아하는 메뉴로 주문했을 터였다. 그리고 친절하게 ‘이렇게 먹어요, 저렇게 먹어요’ 하면서 먹여주었겠지?이제는 더 이상 최하준을 위해 세심하게 배려하지 않는다.여름의 눈에 최하준은 없으니까.가슴에 시린 통증이 느껴졌다. 시큰둥한 목소리로 여름을 불렀다.“고기 먹고 싶습니다.”“손이 없어요, 입이 없어요? 직접 드세요!”여름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머리에 열이 확 뻗쳤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어느새 최하준은 젓가락을 들고 먹기 시작했다.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잘생긴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궈진 숯덩이가 되었다. 이를 갈며 말했다. “도대체 얼마나 매운 코스를 시켰길래 이럽니까?”“매운 맛 4단계.”“나를 못 먹게 하려고 아주 필사적이군요!”최하준이 냉소했다.여름이 미간을 찡그리며 얼굴을 들었다. 뜨거운 열기에 작은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아니거든요. 나 원래 이렇게 매운 음식을 좋아해요. 그동안 당신 입맛에 맞추다 보니 집에서 매운 음식을 안 한 것 뿐이죠. 난 지금 매운 음식이 너무 당겨요. 딴 사람 신경 쓰느라 내 입맛을 희생하고 싶지 않다구요. 아시겠어요?”최하준이 심란해졌다. ‘매운 음식을 좋아한다고?’‘나랑 입맛이 같은 거 아니었어?’입맛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이 사람의 태도였다. 여름의 태도는 최하준을 열 받게 했고 하는 말들은 모두 예전과 달리 얼음장이다.“이건 짚고 넘어가죠. 내가 언제 맞춰 달랬습니까? 강여름 씨가 나서서 그런 거지?”‘어쭈? 다 내 탓이라 이거지? 자업자득이 이럴 때 쓰는 말인가?’최하준을 탓할 게 아니라는 걸 여름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 미련한 자신을 탓해야 한다. ‘눈이
’어쩔 수가 없었다’니 이 얼마나 츤데레인가! 이지훈은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여름 씨는 갔어? 먹고 널 이렇게 두고 혼자 간 거야?”“입 다물어.”최하준이 이지훈을 노려보았다. 차 안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최하준은 지금 통증으로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이지훈은 친구의 창백한 옆모습을 보고 몰래 사진을 찍어 여름에게 톡을 보냈다.-제수씨, 하준이가 제수씨랑 마라탕 먹다가 위장병이 도져서 지금 병원에 데리고 가는 중입니다. 하준이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얘가 말은 안 해도 속으로 제수씨 엄청 생각합니다.”“너 지금 뭐 찍었냐?”최하준이 눈을 떴다. 이지훈의 휴대 전화를 낚아 챘다. 내용을 보고는 얼굴이 일그러지며 불같이 화를 냈다.“내가 누굴 생각해? 너 제정신이냐?”“이게 다 제수씨가 너한테 돌아가서 잘 챙겨주게 하기 위한 나의 빅 픽쳐라 이거야.”‘어휴… 옆에 있는 내가 더 힘들다. 좋아한다고 인정하는 게 그렇게 어렵냐.’ 이지훈의 농담에 최하준이 코웃음을 치더니 입을 닫아버렸다.그러고는 휴대전화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그때 휴대전화를 알림이 떴다.여름이 ‘동성제일병원’의 전화번호를 보내왔다. 이어서 톡이 왔다.-동성에서 소화기 내과로는 가장 잘 하는 병원이에요. 접수부터 하고 얼른 데려가세요. 아, 맞다, 마라탕은 최하준 씨 자유 의사로 동석한거니 제 책임 아니에요. 피해 보상 같은 건 꿈도 꾸지 마세요.“……”이지훈이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마른 침을 삼켰다. 최하준에게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내 핸드폰 줄래? 새로 산지 얼마되지…”말이 끝나기도 전에 휴대전화가 창 밖으로 날아갔다.이지훈이 울상이 되어 말도 못하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화가 나서 눈에 뵈는 게 없는 친구에게 휴대전화를 배상하라고 따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최하준의 위경련이 멈추질 않았다. 게다가 마음은 더 쓰렸다.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자 마음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변한단 말인가. 불과 얼마 전까지만
“전에는 오빠가 이렇게 자존심이 1도 없는 사람인 줄 왜 몰랐을까? 입찰 있던 날 건축위원회 앞에서 나한테 한 말 기억 안 나? 며칠 전 공사 현장을 물바다로 만들고 날 엿 먹이려고 한 것도 잊어버리셨나 봐? 일찍 발견했기 망정이지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피해 보상은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 회사 이미지까지 어쩔 뻔했어?!한선우! 악랄한 짓거리들 하나하나 소름 끼쳐. 추억이니 뭐니 들먹이지 마. 정말 일말의 죄책감도 없어? 어떻게 사과 한 마디 없이 그렇게 뻔뻔한 얼굴로 내 앞에 서 있을 수 있어?”한선우는 여름의 질책에 얼굴이 시뻘게졌다. 한마디 변명도 못한 채 입을 다물어 버렸다.사실 한선우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요 며칠 조금 후회가 되기도 했지만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차마 고개를 숙일 수는 없었다.여름이 한선우를 빤히 보았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휴… 그만하자. 내가 너무한다고 생각하지 마. 투자금 빠지는 것 때문에 그러지? 그 돈만 틀어 막으면 해결될 문제잖아. 우리 아빠가 3조 정도 유동자산이 있는 거 내가 알아. 예비 사위니까 아마 사정을 얘기하면 도와주실 거야.”한선우가 어리둥절했다.“TH디자인그룹이 돈이 그렇게 많아?”“비밀리에 투자하신 데가 있는데 수익이 괜찮더라고.”여름은 말을 마치고 자리를 떠났다. 자리에 선 채로 생각에 잠긴 한선우를 힐끗 보고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여름이 준 정보는 사실이었다. 다만 TH에서 한선우를 도와 이 난관을 헤쳐나갈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한선우는 재빨리 차를 타고 TH디자인그룹으로 향했다.집안은 텅 비어 있었다. 가사 도우미 말로는 어제 세 식구가 해외로 여행을 갔다고 했다.가장 필요한 때에 휴가를 보내러 해외에 나가다니.한선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심호흡을 하고 강여경에게 전화를 걸었다.받지 않았다.이튿날 강여경에게서 전화가 왔다.“어쩌죠? 어제 비행기에 있어서 못 받았어요.”“왜 나간다고 미리 말 안 했어?”강여경은 억울해 하며 말했다.“여름이 일
한선우가 자신을 비아냥거렸던 사람에게 눈을 부릅떴다.“다시 한 번 더 말해보시지?”그 사람은 회사의 여성 CEO였다. 일어나서 직언을 퍼부었다.“제가 틀린 말 했습니까? 요즘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한선우 대표가 TH디자인그룹의 상속인이 되기 위해, 사귀던 여자 친구를 가차없이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정성을 쏟는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이건 정말 우리 한주그룹 이미지에 먹칠을 하고 있는 셈 아닙니까?!”“그러니 회장님, 아드님을 좀 단속하심이 어떠신지요? 자리에 걸맞지 않습니다.”주주들 중 한 명이 한준성 회장에게 말했다.한준성 회장은 이미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냉엄한 말투로 한선우에게 말했다.“한선우, 대표이사자리를 주원이에게 넘기도록 해라. 오늘 이후로 회사의 어떤 프로젝트에도 참여할 필요가 없다.”힌선우는 이 모든 것을 믿을 수 없었다.“아버지…”“너는 날 실망시켰다.”한준성이 자리를 떠났다.회의가 끝난 후 한주원이 한선우에게 다가와 싱글거리며 말했다.“형님, 마음 푹 놓으세요. 회사는 제가 자~알 운영하겠습니다. 회사 일은 걱정 마시고 편안히 쉬세요.”한주원이 회의실 입구를 나서는데 뒤에서 ‘퍽’ 하고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한주원은 씩 웃으며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았다.******한주그룹, 변화의 시작.이 소식은 순식간에 동성 전체에 퍼졌다.멀리 외국에 있던 강여경도 이 소식을 접했다. 화가 나서 컵을 깨부술 뻔했다.가까스로 화를 억누르고 이정희에게 안겨 울먹였다.“엄마, 이제 어떡해요. 선우 오빠가 한주그룹을 승계하지 못하면 어쩌죠? 그럼 한주그룹 대표이사 자리도 없어져 버려요.”이정희가 강여경의 등을 토닥였다.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딸이 이제까지 죽을 고생을 다 했는데 약혼마저 이 모양이니 말이다.“아무래도 여름이가 의심스럽다. 조만간 손 좀 봐줘야겠어.”“약혼자를 바꿔버려야겠어. 이 강태환의 딸인데 동성에서 제일 잘나가는 남자의 배필이 되어야지, 암.”강태환이 두 모녀를 바라보았다. “하
“지오가 출산하려고 해요?”“웬 일로 전화를 거셨습니까?”최하준의 목소리가 냉랭했다.“내가 묻잖아요!”여름은 다급했다. 오랫동안 정성을 다해 돌봤던 고양이라 정이 많이 들었다.“힘들어 해요.”“그럼 빨리 병원으로 안 가고 뭐해요?”여름이 호통을 쳤다.이렇게 작고 귀여운 고양이가 엄마가 되려고 엄청난 고통을 참아내고 있다니.“새끼를 낳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움직이기 어려우니 강여름 씨가 와주는 게 좋겠어요. 지오가 여름 씨를 보고 싶어 합니다. 이런 순간에는 당신의 격려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만약의 경우 지오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어요.”최하준은 한동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위경련으로 아픈데도 여름은 남의 일처럼 병원 전화번호만 던져주고 가버렸다. 최하준은 그 이후로 자기 자신보다 고양이를 돌보는데 집중했다.여름이 쏘아붙였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지금 바로 가요.”“서둘러요. 얼마 못 버틸 것 같아서 솔직히 무섭습니다.”최하준이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야야야야, 우리 여름이~, 나 어때? 화장 잘 먹었지. 이제 가자.”윤서가 화려한 무늬의 빨간 스커트로 갈아입고 걸어 나왔다.“어때? 이거 꽤 괜찮지?”“윤서야, 진짜 미안한데… 지오가 출산 중이래. 내가 가봐야 할 것 같아. 잘못하면 오늘 밤에 죽을지도 몰라.”여름이 ‘죽는다’는 말을 거듭 강조하며 황급히 문을 나섰다.윤서가 웅얼거렸다.“…너 새끼 받을 수 있어?”돌아오는 건 문 닫는 소리 뿐이었다.‘아… 뭐야… 나 스커트는 뭐 한다고 이렇게 열심히 골랐다니?’ ‘남의 집 고양이가 부럽긴 처음이네… 하하…’******여름은 미친 듯이 차를 달려 컨피티움에 들어섰다.현관 비밀번호는 그대로였다.집 안에는 전등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최하준이 고양이의 출산실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조용히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치 사랑하는 딸의 출산을 지켜보는 아버지처럼.“어때요? 새끼 나왔어요?”여름이 쌩하고 달려갔다.“네.”최하준이 복잡한 심
여름은 믿기로 했다.지오를 쓰담쓰담 했다.“우리 지오, 고생했어. 넌 용감한 엄마야. 진짜 대단해.”지오가 힘없이 ‘야옹’하고 소리를 내더니 축 늘어졌다.“배가 고픈가 봅니다.”최하준이 말했다.여름도 그렇게 생각했다. 새끼를 낳느라 온 힘을 다 썼을 것이다.“영양식을 만들어줘야겠어요.”주방에 불이 다시 켜 지고 열기가 피어 올랐다. 전에 입던 앞치마도 챙겨 입었다.최하준이 일어서서 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몸짓 하나하나가 다 마음에 들었다. 집 안에 요리하는 냄새가 솔솔 풍기기 시작했다.“나도 배가 고픕니다.”여름은 못 들은 척 했다. 최하준이 여름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귓가에 입을 대고 말했다.“나 배고파요! 안 들립니까?”귀가 멍멍했다. 하마터면 냄비를 떨어뜨릴 뻔했다.휙 하니 그를 바라보니 능글능글 웃고 있었다.“최하준 씨! 당신 입으로 직접 나더러 불결하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이렇게 불결한 사람이 만든 음식을 먹고 싶으신지? 토하진 않을까 심히 걱정이 되네요!”“……”최하준의 얼굴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내가 그런 소릴 했다고? 설사 했더라도 굳이 기억할 필요는 없는데…’“그게 저… 그땐 너무 화가 나서 듣기 민망한 말을 한 겁니다.”최하준은 매끈한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부당한 방법으로 피해를 입었는데 아무렇지 않게 침착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뭐 화가 나는데 화낼 권리도 없습니까?”‘헐… 누가 변호사 아니랄까 봐 말은 청산유수네. 진짜 얄미워.’여름은 말문이 막혔다..“요리하세요.”최하준이 한 마디 하고는 주방 테이블을 두드렸다.“네, 하죠.”여름은 웃음이 나왔다.여름이 이 집을 비운 지 꽤 오래인데 냉장고 안의 식재료들은 모두 완벽하게 구비가 되어 있었다. 모두 신선하고 고급진 재료들이다.여름은 지오를 위해서 연어 미트볼과 고양이 푸딩을 정성껏 만들어 주었다.최하준을 위해서는 간단히 국수를 만들었다. 국수 위에는 쫑쫑 썬 쪽파와 향긋한 소스, 그리고 청양고추를 살짝 올렸다.“벌써 다했습
빌어먹을! 최하준은 태어나서 이렇게 화가 나기는 처음이었다.여름은 무서워서 다리가 덜덜 떨렸다. 울고 싶지만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여기 오는 것이 아니었는데…“내 잘못이에요… 실망이라면… 미안해요. 그러니까 좀 놔주세요.”여자의 얼굴에 깊은 두려움이 스쳐가는 것을 최하준은 보았다. 커다랗고 그윽한 눈망울이 자신의 고양이를 닮았다. 최하준의 마음이 고통으로 무너졌다. 처음으로 가슴 뛰게 한 사람이 이렇게 완벽하게 나쁜 인간이였다니!“가!”최하준은 분을 참지 못하고 여름을 힘껏 밀쳤다. 여름이 바닥에 쓰러졌다.“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마시죠.”넘어질 때 바닥에 부딪친 무릎이 아파 죽을 지경이다.아픈 무릎을 잡고 겨우 일어섰을 때 여름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지오만 아니었어도 안 왔어요. 이렇게 업 다운이 심한데 누가 그런 성격을 견딜 수 있겠어요!”여름은 말을 마치자마자 재빨리 자리를 떠났다.최하준은 머리 속에서 팽팽한 줄 하나가 툭 끊어진 느낌이었다.테이블 위에 남겨진 국수를 바닥에 던져 버리고 싶었지만, 요 며칠 밥 한 끼 제대로 먹지 못한 것을 생각하며 애꿎은 컵을 던져 깨뜨려버렸다.컵을 깨뜨리고 나니 오히려 허탈하고 심기가 불편해졌다.‘왜 여자 하나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나는 거지?나를 못 견디겠다?진짜로 자신이 한 달콤한 말들은 전혀 기억 못하는 걸까?표정도 눈빛도 모두 거짓이었나?좋다.다시는 강여름이 돌아오지 못 하게 하겠어. 아무리 용서를 빌어도 절대로 상대하지 않을 거다.’화를 내면서 국수를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제길… 엄청 맵잖아!’ 매운 걸 먹으니 또다시 위장이 아프기 시작했다.하지만 위경련보다 더 아픈 건 최하준의 마음이었다..******여름이 돌아왔다. 윤서는 집에서 마스크팩을 하고 있었다.여름이 온 걸 보고는 농담을 던졌다.“에이~, 이렇게 빨리 돌아올 걸 왜 나갔어? 자고 올 줄 알았더니.”“무슨 소리야. 나는 지오가 걱정돼서 가본 거라고.”지오가 생각나자 가슴이 뭉클했다.
“오빠네 아버지하고 신아영 아버지하고 군대에서 만난 친구 사이야. 두 분이 전역 후에 창업을 하셔서 둘이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냈대. 그래서 그런가 지금도 오빠가 아영이를 동생처럼 생각해.”“신아영이 오빠를 단순히 오빠로 생각하는 거 맞아?”여름이 윤서의 눈치를 살폈다.윤서는 말없이 한숨을 쉬었다.“너도 그렇게 느꼈구나? 나도 전에 같은 의심을 했었거든. 근데 증거가 없어.”“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다?”“응.”******일주일 후.강여경 가족은 해외 여행을 마치고 동성에 돌아왔다.TH그룹 별장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한선우에게서 다시 전화가 결려왔다.강여경은 발신자를 보더니 짜증 섞인 표정이다. 억지로 전화를 받으면서 상냥하게 말했다.“선우 오빠, 무슨 일이에요?”“우리가 일이 있어야만 전화하는 사이던가?”바로 이 시각, 한선우는 TH그룹 별장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방금, 강여경과 부모가 돌아온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당연히 아니지.”강여경의 부드러운 목소리 때문에 한선우는 기분이 풀릴 뻔했다. 그러나 바로 이어진 여경의 한 마디로 분위기가 살벌해졌다.“아직 여행 중이에요. 곧 서핑하러 나가려던 참이라 통화 길게 못해요.”“그래?”“그럼 내가 본 건 뭐지? 방금 네가 TH별장으로 돌아오는 걸 똑똑히 봤는데. 나 지금 입구에 있어. 왜 거짓말을 하지?”“……”강여경이 창밖을 내다보았다.“더 이상 한주그룹 대표이사가 아니라서 파혼하고 싶은 거야?”한선우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좋아요. 기왕 이렇게 된 거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강여경이 냉담하게 말을 이었다.“한선우 씨, 본인 처지를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양유진 쪽에서도 등을 돌렸고 한주그룹 승계인 자격도 박탈당했으니 나랑은 이제 레벨이 맞지 않아요. 나는 TH의 주인인데 오빠랑 너무 차이가 지지 않겠어요? 우리 좋게 헤어져요.”한선우는 믿을 수 없었다.“강여경, 너 이렇게 신의가 없는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