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이 계속해서 말했다."네가 먼저 뽀뽀했어."그는 단지 자제하지 못했을 뿐이었다.그때 그는 원래 신은지를 집에 데려다주려고 했지만 그녀가 집안에서의 처지를 생각했다. 술에 취한 것을 사람들이 보면 그녀를 괴롭힐까 봐 그는 그녀를 호텔로 데려갔다.그녀를 침대에 눕힌 뒤 박태준의 시선은 그녀의 정교한 눈매에 눈이 쏠렸다. 그녀의 흐릿한 두 눈과 붉게 물든 취한 뺨에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고 정신을 차렸을 때 신은지의 손이 이미 그의 목을 감싸고 있었다.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는데 반짝이는 눈동자에 별빛을 담긴 듯 반짝이고 있다.그녀가 고개를 젖히니 촉촉한 입술은 그를 향해 조금씩 다가왔고 그는 그녀에게서 달콤한 과일주 향과 머리카락 사이의 샴푸 냄새를 맡았다. 복숭아 향이었다.그는 피할 수 있었을까?할 수 있었다. 의지만 있었다면 힘을 많이 쓸 필요도 없이 피할 수 있었다.그의 목을 잡고 있는 두 손은 너무 허약해서 조금만 움직이면 미끄러질 것 같았지만 또 그 무게는 너무 무거워서 그가 자신의 모든 의지력을 다 쏟아부어도 이길 수 없을 정도였다. 그저 수없이 상상해 왔던 그녀의 빨간 입술에 키스할 수밖에 없었다.박태준은 신은지가 자기를 나유성로 여겼는지, 아니면 술에 취해 난폭하게 굴었는지는 모르지만 어느 쪽이든 그녀가 먼저 한 일이었다.그는 밀어내지 않았고 밀어내기 싫었다. 그들은 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생일파티 내내 그는 소파에 있는 장식용 버클과 비슷한 지위에 있었고 마이크도 그보다 존재감이 있었다.신은지는 그가 이렇게 큰 사실일 털어놓을 줄 몰랐다.다음날 깨어났을 때 목에 있는 키스마크 두 군데만 보였을 뿐 전날 밤의 일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가 먼저 손을 댔다고 하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너 짐승이야? 나 그때 어렸어.”"성인이잖아."그녀의 안색이 변한 걸 보고 그는 말을 이어 나갔다."나는 뽀뽀만 하고 다른 건 하지 않았어.”“…"신은지는 말문이 막혀 화를 내려고 했지만 지금 두 사람의 관계를
신은지는 추위를 많이 타서 겨울만 되면 밖에 나가기를 꺼렸다. 국내는 택시를 잡기가 편해 이렇게 길옆에서 찬바람을 맞고 있는 일이 드물었다.박태준은 신은지를 품에 안고는 부 좌석으로 갔다.“차에 타.”차에 시동이 걸려 있어 히터를 빵빵하게 켜고 있어 따뜻했다. 신은지는 그저 빨리 차에 타고 싶었다. 그러나 신은지는 아직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동료들 아직 저기에 있어.”여긴 국내도 아니고 퇴근하고 각자 집을 가는 것이 아니었다.다 같은 호텔에 묵고 있고 좀 있다가 같이 밥도 먹어야 한다. 그냥 사람들을 두고 가면 박물관에서 계속 일을 할 생각은 때려치워야 했다.박태준이 말했다.“저쪽에 교통사고가 났어. 내가 올 때 이미 연락했으니까 부른 택시가 곧 올 거야.”말하고 난 후, 한 비즈니스 카가 그들의 앞에 섰다. 기사님이 창문을 내리고는 표준적이지 않은 영어로 차에 타라고 말했다.조금 후 회식이 있어 신은지는 동료들과 함께 가려고 했다. 신은지가 박태준에게 이유를 설명했다.“회식 자리에 널 데리고 가는 건 불편하니까 너 먼저 가서 밥 먹고 있어. 좀 있다가 호텔 위치하고 호텔 방 번호 문자로 보내줄게.”좀 서 있으니 신은지는 이미 밖의 온도에 적응했다. 여전히 추웠지만 적어도 말은 제대로 할 수 있었다.3월의 로마는 사실 그렇게 춥지는 않았다. 아까 추워서 몸이 떨리던 것은 따뜻한 박물관에서 갑자기 밖에 나와 그런 것 같다. 박태준은 신은지의 손을 계속 잡고 있었다. 신은지의 손은 따뜻해지지 않았다. 신은지의 말을 듣고 박태준은 추워 하얘진 신은지의 얼굴을 보고는 부 좌석의 문은 열었다.“앉아.”박태준이 허리를 굽혀 신은지에게 벨트를 해주었다.“조금만 기다려봐. 리더하고 말 좀 하고 올게.”“무슨 말을…”신은지가 말리려고 했으나 박태준은 이미 차 문을 닫은 채 비즈니스 카 옆으로 걸어갔다.슈트를 입은 박태준의 다리는 길고 곧았다. 그러나 신은지는 지금 감상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자신을 난감하게 할 말을 할 거라는 걱정은
박태준의 말을 듣고 신은지는 그저 이곳에 출장 나왔다고 생각했다.“그럼 여기에 집을 사서 뭐 해? 집을 빌리거나 호텔에 있는 게 더 좋잖아.”자기절로 청소도 안 해도 되고 얼마나 편한가.박태준이 말했다.“내 집에서 있는 게 편하잖아. 침구를 안 바꿨을 걱정도 안 해도 되고 전에 묵고 간 손님이 물포트로 뭘 했을지 누가 알아.”신은지는 할 말을 잃었다.그래, 부자들의 세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신은지는 좌석을 잘 놓은 후 길 양켠에 국내와는 다른 스타일의 건물들을 보았다. 겨우 6시 반이었으나 이미 캄캄한 밤이 되었다.박태준이 산 아파트는 사람이 북적북적한 곳에 있었다. 아파트 밖에는 딱 야시장이 있었고 헌병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조금 시끄럽기는 했으나 조금 늦게 돌아와도 안전했다.박태준이 운전하는 속도는 아주 늦었다. 신은지는 처음에는 주위에 사람이 많은 원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이상함을 느꼈다. 앞에 있는 액세서리 가게만 이미 세 번을 본 듯 했다.박태준이 이 주위를 계속 맴돌고 있는 것이었다.신은지의 표정은 점점 놀라움으로 변했다.“너 설마… 어느 아파트인지 못 찾고 있는 건 아니지?”박태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의 표정의 보고 신은지의 생각이 맞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신은지는 뭐라고 했으면 좋을 지 말을 잃었다.신은지가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박태준은 차를 길옆에 세우고 말했다.“잠시만 통화 좀 할게.”박태준은 이탈리아어로 통화를 했다. 신은지는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박태준의 행동에서 무슨 의미를 표달하려고 하는지 대충 알아챘다.일 분 후, 박태준이 통화를 끊고 차에서 나가며 말했다.“좀 걸어야 할 거 같아.”집은 2층에 있었는데 박태준이 열쇠로 문을 열어 들어가서 현관에 있는 스위치를 켜니 집안은 순간 환해졌다.연한 컬러의 인테리어에 등불과 가구는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그 어디에서나 이곳 특유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박태준은 키를 신발장 위에 놓으며 말했다.“이미 사
시원함에 잠들뻔한 신은지는 박태준의 꿍꿍이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근데 박태준의 꿍꿍이는 신은지에게 먹혔다. 신은지는 원래 힘들어서 움직이기 싫었는데 지금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있고 따뜻한 공기에 감싸있는 데다가 박태준이 마사지까지 해주니 더 움직이기 싫었다.견고했던 의지가 무너지기 시작했다.신은지가 타협할 기색이 보이니 박태준은 계속 유혹했다. “아래에 옷 가게가 있는데 호텔에 가도 내려가야 되잖아. 먼저 가서 보고 마음에 드는 게 없으면 그때 다시 말할가?”오늘 밤 여기에서 자게 되면 내일에는 한 시간 일찍 일어나서 호텔에 가야 한다.일찍 자든 늦게 자든 어느 쪽도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았다.신은지가 아직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고 박태준이 말했다.“아니면 내가 아래에 내려가서 사다 줄까?”신은지는 박태준이 패션 고자였던 것이 떠올라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그냥 같이 가는 거로 하자.”내일 흑역사를 만들지 않기 위해 신은지는 직접 갔다.아래에 있는 옷 가게는 브랜드는 아니었고 질량도 보통이었지만 옷 스타일은 이뻤다.신은지는 아까까지만 해도 힘들어서 뻗었으나 이쁜 옷을 보니 다시 힘이 나는 듯했다.신은지는 하얀색 긴 패딩을 입어보며 말했다.“어때? 이뻐?”박태준이 말했다.“응.”신은지가 코트를 하나 골라서 패딩과 함께 들고 말했다.“어느 게 더 이뻐?”“다 이뻐.”신은지는 피부가 하얗고 키가 크고 많이 약하지만 살이 있어야 할 곳에 자랐다. 외모는 빼어났고 머리카락은 아주 보드라웠다. 옷이 아니라 포대기를 써도 이쁠 사람이었다.박태준의 말에 쇼핑 열정이 식기 시작했다.“그냥 허수아비처럼 서 있는 게 나을 거 같아.”박태준이 급히 말했다.“아니 진짜로 다 이뻐.”가이드가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아니면 입어 보는 게 어떠세요?”로마는 낭만의 도시다. 그곳에 생활하는 사람들마저도 낭만적이었다. 신은지가 탈의실에 들어간 후, 가이드는 박태준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여성이 기뻐할지 알려주었다.“아가씨가 듣고 싶은 말
집에 올라가기 전에 신은지는 마트에 갔고, 박태준이 따라오려고 하니 깜짝선물을 준비한다며 못 오게 했다.남자의 시선은 또 한 번 쇼핑백에 있는 그 얇은 천 조각에 꽂혔다. 오는 길에 몇 번 봤는지 모르는데, 볼 때마다 얼굴이 붉어졌다.야한 속옷을 산 후 신비한 표정으로 마트에 들어가면서 따라오지 못하게 하니 박태준은 그녀가 뭘 사러 갔는지 나름대로 짐작이 갔다.두 사람이 처음도 아니고 박태준이 순정남도 아니지만 이렇게 야한 건 처음이다.박태준은 긴장한 나머지 쇼핑백의 끈을 더 꽉 잡아 머릿속에서 튀어나오는 격정적인 화면을 간신히 억눌렀다.그가 망상에 빠져 있을 때, 신은지가 물건을 사 가지고 나왔다. 그녀는 박태준이 가로등 아래 멍하니 서 있는 것을 보고 그의 어깨를 툭 쳤다.“무슨 생각해? 들어가자.”제 정신이 돌아온 그는 신은지를 쳐다보다가 이내 부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고,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어, 그래.”그녀의 차가운 손가락에 손이 닿자, 박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자기 손으로 그녀의 손을 완전히 감쌌다.“왜 이렇게 차가워?”신은지는 그가 마음대로 잡게 내버려뒀다.“빨리 들어가자.”추워 죽겠다. 그녀의 재촉은 박태준의 귀에 들어온 후 자동으로 다른 메시지로 바뀌었다. 그녀가 급해하는 건 혹시...박태준은 얼빠진 사람처럼 신은지에게 이끌려 같은 쪽 손발을 같이 내밀면서 집으로 향했고, 걷다가 시선이 저절로 쇼핑백에 쏠렸다.신은지의 손을 잡은 그의 손은 약간 뜨거웠다. 점차 얼굴도 뜨거워지고 마지막에는 온몸이 뜨거워졌다.“은지야, 급해하지 마...”신은지는 걸음걸이가 좀 어색했다. 그녀는 그의 등을 떠밀며 거의 뛰어서 계단을 올라갔다.“급해. 엄청 급해. 빨리 걸어.”박태준은 문을 열었지만 불은 켜지 않았다. 그는 끈적끈적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목젖이 오르락내리락하더니 쉬어서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은지야.”그가 손을 내밀어 안으려 할 때 신은지는 그를 확 밀어내고 화장실로 급히 뛰어
너무 거침없이 전개되어 신은지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어리둥절해졌다.“만져... 뭘 만져?”입으로는 그렇게 물었지만 몸은 성실해 묻자마자 손이 조건반사적으로 올라갔다.박태준은 그녀의 동작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밀착해 왔다. 그는 고개를 숙여 입술을 그녀의 이마에 댔고, 조금씩 아래로 내려갔다. 따뜻한 촉감이 잠자리가 수면을 건드리듯 피부에 가볍게 닿았다.에어컨 온도가 높게 설정돼서 이불을 덮지 않아도 춥지 않았다.박태준은 그녀의 부드럽고 따뜻한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가 내쉰 숨이 그의 얼굴을 스치면서 따뜻한 기운이 지나간 후 약간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이같이 진실한 촉감에 그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팔에 힘을 주었다.‘은지는 내 거다. 장장 11년 동안 짝사랑한 끝에 마침내 철저히 내 여자가 됐다.’앞으로 사람들은 그녀를 박 사모님, 작은 사모님, 대표 부인이라고 부를 것이다. 어떤 호칭이든 그의 이름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박태준은 저도 모르게 그녀를 더 꼭 끌어안았다. 가슴에서 뜨거운 감정이 솟구치면서 통제가 안 되고 점점 더 흥분됐다. 조금 전까지 부드럽고 잔잔하던 입맞춤은 순식간에 욕망으로 가득 차고, 폭풍우처럼 그녀의 몸을 휩쓸었다.이 집은 2층이고, 아래에 야시장이 있어 창문을 꼭 닫아도 시끄럽고 벅적벅적한 분위기를 단절할 수 없다. 누군가는 노래를 부르고, 누군가는 수다를 떨고, 누군가는 술을 마시고...박태준은 신경이 예민해 시끄러운 것을 견디지 못하는데, 이 순간 전혀 귀찮게 느껴지지 않았고 심지어 이국땅의 흥청거림이 좋았다.“은지야.”품에 안긴 여인은 너무나 부드럽고 따뜻해서 잠시도 놓고 싶지 않다.그는 그녀의 가느다란 목과 약간 튀어나온 쇄골에 입을 맞추었다.신은지가 조금 전 씻어서 그런지, 여러 가지 향기가 한데 섞여 박태준의 코를 자극했다.“은지야.”쉰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박태준, 그의 눈빛은 도취된 듯 반짝반짝 빛났다.“대회가 끝나면 우리 혼인신고 하자. 어때?”두
다음날, 생체시계에 의해 깊은 잠에서 깨어난 신은지는 손에 힘이 빠져 하마터면 들지 못할 뻔했다. 눈을 뜨자마자 잠들어 있어도 결함을 찾을 수 없는 박태준의 잘생긴 얼굴을 보고 어젯밤의 기억이 가물가물 떠올랐다.그녀는 이 나쁜 놈이 어떻게 미친 듯이 자신을 못살게 굴었는지 모두 생각났다.신은지는 얼굴을 찡그리며 자기를 안고 달게 자는 박태준을 발로 걷어찼다.그녀의 발에 차여 잠에서 깬 박태준이 눈을 뜨니 신은지가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차여서 얼얼한 허리를 만지며 얄궂은 미소를 지었다. 습관적으로 침대 협탁에 놓인 손목시계를 가져다 시간을 확인한 그는 일어날 때가 된 것을 보고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일어났다.고통스러워 이를 악무는 그녀의 모습과 달리 박태준의 얼굴은 사욕을 채운 후의 상쾌함 그 자체였다. 그는 거실 화장실로 가서 씻은 후 아침을 사러 내려갔다. 그가 돌아왔을 때 신은지는 촉촉한 얼굴로 화장실에서 나왔다.박태준은 그녀가 화장실에서 나오면서 손을 문지르는 것을 보고 스스로 켕기는 바가 있는 듯했다.“와서 아침 먹어.”신은지는 그를 상대하기 싫었지만 배고파서 음식을 들고 소파 쪽에 앉았다.이탈리아의 아침 식사는 빵과 커피 위주의 간단식인데, 신은지는 한국에 있을 때 담백하고 따뜻한 음식을 즐겨 먹었다. 게다가 그녀는 아침에 입맛이 없는 편이라 억지로 먹고 있었다.박태준은 그녀가 먹기 싫은데도 배를 채우기 위해 억지로 구겨 넣는 것을 보고 안쓰러워했다.“너 아직 여기 오래 있어야 하는데, 매일 이것만 먹으면 안 되지. 아니면 내가 한식 요리사를 고용할까? 여기서 대회 장소가 멀지 않잖아. 며칠 후에 여기로 이사할래?”“아니야. 고작 한 달인데, 조금만 참으면 돼.”아침만 입맛에 맞지 않으니 점심때 더 많이 먹으면 되지, 유별나게 굴 필요 없다. 게다가 대회 기간에는 보통 한정된 구역을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이 업계에서 이런 종류의 대회를 개최하는 것이 처음이라 구체적인 조항은 그녀도 잘 모른다.박태준
신은지는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인파 속에 박태준은 보이지 않았다.“우리는 아까 그 홀에 있어.”그들은 자세히 보기 때문에 30분 만에 겨우 세 개 전시품을 봤고, 그가 방금 떠나간 곳에서 20m도 되지 않는 곳에 있었다. 그들은 사람 수가 몇 안 되는 데다 모두 동양인 얼굴이라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외국인 속에서 쉽게 눈에 띄었다.박태준은 호흡이 가빠졌지만 목소리는 더 낮아졌다.“위치를 보내줘. 방금 전화를 받으면서 좀 멀리 와서 길을 찾지 못하겠어.”그의 목소리는 원래 중저음인데, 살랑살랑 말하니 더 살가운 느낌이 들었다.신은지는 그에게 위치를 보내며 놀려댔다.“박 대표님이 길치인 줄은 몰랐네요.”“서양 건축에 무감각해서 그래. 유학 시절에도 강의실을 찾지 못하는 일이 많았어.”“그럼 아까 우리가 어느 홀에 있었는지는 기억나?”신은지는 웃음기 가득한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손가락은 ‘위치 발송’ 버튼 위에 멈춘 채 누르지 않고 있었다.“눈여겨보지 않았어. 그냥 네 뒤를 따라다녔어.”“내가 팔아먹을까 봐 두렵지도 않아?”신은지는 코웃음을 쳤지만, 화난 말투가 아니라 연인 사이에 장난치면서 앙탈 부리는 것에 더 가까웠다.“참, 네가 지난번 이탈리아에 출장 왔을 때 나에게 사다 준 팔찌 있잖아. 그거 어느 가게에서 샀어? 유라가 계속 예쁘다고 하는데, 마침 여기 출장 온 김에 하나 기념품으로 사 가려고.”“어떤 팔찌? 이쪽에 분점이 있는지 확인해서 직접 점원한테 가져다 달라고 할게.”박태준은 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노트를 꺼냈다. 그는 신은지와 관련된 모든 일을 분류해 적고, 날짜도 표시해 놓았다. 어느 날 정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까 봐 걱정돼서다.신은지가 말하는 팔찌에 관해 기억이 없지만 자신의 기억을 믿지 못하는 그는 노트를 꺼내 다시 확인했다.예전에는 자기 전에 다음 날 일정을 봤지만 지금은 자기 전에 노트를 펼쳐본다.“은방울꽃 진주 팔찌 말이야. 연두색...”박태준은 팔찌가 적힌 페이지까지 넘겼지만, 기록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