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민욱은 박태준한테서 원하는 반응을 얻지 못해서인지, 실망한 듯 몸을 일으켜 세웠다.“아버지가 올해 설에 좀 보자고 하시네.”박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막 귀국해서 피곤할 텐데, 얼른 들어가서 쉬어. 저녁에 밥이나 같이 먹자.”마지막 말은 그냥 인사차레로 한 말이었다. 하지만 곧 기민욱한테 돌아온 대답에 박태준은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기민욱의 사상은 일반 사람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잠시 망각한 대가였다.“알겠어. 그럼 저녁 때까지 휴게실에서 한숨 잘게.”박태준은 잠시 할말을 잃었다. 하지만 반대로 기민욱은 그의 말에 기분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기민욱이 휴게실로 향하기 전, 사무실 입구에서 박태준을 돌아보며 물었다.“형은 나 안 버릴 거지?”박태준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뜨끔했다. 그가 손에 쥐고 있던 펜을 꽉 쥐며 대답했다.“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얼마 전에 형 나이 또래 사람이 결혼하는 걸 봤거든. 현도 형수님이 생기면 날 버릴까 봐 걱정돼서.”박태준은 속에서 올라오는 짜증을 누르며 답했다.“그럴 일 없어. 쓸데없는 걱정 좀 하지 마.”“형, 그럼 오늘 약속한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나 안 버리겠다고 한 거, 잊으면 안 돼. 안 그러면 나 진짜 많이 슬플 거야.”기민욱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며 자리를 떠났다.휴게실 인테리어는 굉장히 단조로웠다. 간이 침대 하나와 머리맡에는 작은 서랍장, 그리고 옷장이 전부였다. 기민욱은 한쪽에 있는 작은 욕실에 들어가 박태준이 쓰던 세면용품들로 몸을 씻었다. 그리고는 침대에 누어 익숙한 냄새를 코로 들이마셨다. 그는 마치 자신이 박태준이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동시에 지독한 질투심이 속에서 솟구쳐올라왔다.기민욱은 때때로 박씨 가문에 입양되는 꿈을 꿨다. 그랬더라면 자신도 박태준처럼 곱게 자란 도련님이 되었을지도 몰랐다.그가 부드러운 베개를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형, 만약 박씨 가문에서 날 못 받아준다면, 내가 형에게 새로운 집을 선물 해줄게.”기민욱
강혜정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과거를 꺼내지 않으려는 것인지, 아니면 신은지의 물음에 대답하려는 것 인지 알 수 없었다. "육정현은 왜 왔어?” 신은지는 박태준의 이름을 내뱉을 뻔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모르겠어요, 이따가 진 비서한테 물어볼게요.” 초대장 일은 모두 그가 처리하고 있으니, 이치대로라면 육영 그룹의 연회에 늦지 않을 것이다. 그의 신원은 알 수 없지만, 육영 그룹은 그동안 사사건건 박씨 가문을 겨냥하여 얼마나 많은 협력을 빼앗았는지 모른다. 이런 관계에서 상대방을 초청한 것은 완전히 자신에게 부담을 준 것이다. 강혜정은 자신이 표정 관리를 잘하지 못할까 봐 박태준 쪽을 쳐다보지도 못하며 물었다. "그 사람 요즘 잘 지내?” 친자 확인 검사서를 묻기 위해 이 질 문을 했지만, 강혜정은 박용선이 자신을 기운 나게 하기 위해 속인 것일까 봐 감히 묻지 못했다. 지금에 와서야 강혜정은 박태준이 아직 살아있다고 감히 확신했다. "잘 지내요. 기민욱은 감히 그에게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요. 기껏해야 그의 자유를 제한했을 뿐이에요." 신은지는 그의 몸에 난 상처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박태준의 도착으로 현장 분위기는 묘하게 경직되었고, 그를 이전에 본 사람들 외에는 모두 놀란 상태로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서있었다. 음악 소리 외에는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진영웅도 멀지 않은 곳에 박태준이 나타나자 얼떨떨해하고 있었다.그는 육영 그룹의 사람을 초대하지 않았다. 등장하자마자 시선을 집중시킨 박태준은 자연스럽게 박영헌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은 그의 신원을 알게 되었다. "그 육씨 가문 그 시골 아이? 이건 박 대표랑 너무 닮았어. 정말 똑같이 생겼는데 설마 박씨 가문 사생아는 아니겠지.” 그들이 박태준과 육정현을 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한 가지 이유는, 박씨 가문의 배경과 능력으로는 자기 자식을 다른 사람으로 살게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고 또한 박씨 가문과 육씨 가문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라고 생
신은지는 자신의 어깨를 누르는 여자의 손을 쳐다보더니 신경도 쓰지 않고 입매를 비틀었다. "그래서 나에게 물이라도 끼얹겠다는 거야?” “……” 여자가 사실 그렇게 하려고 했었다. 그녀는 신은지가 못마땅했다. 예전에 신은지는 신씨 가문의 큰 아가씨였을 때, 계모와 여동생에게 온갖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당당했었다. 나중에 신은지가 고리대금업자에게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된 것을 알고 기뻐했었다. 하지만 결국 신은지는 눈 깜짝할 사이에 판세를 뒤집고, 남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박태준과 결혼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지금은 신은지는 박태준과 이혼했고, 박태준은 죽어 없는 데고 재경 그룹의 행사에 참석했다. 주변에서 카메라를 들이대는 기자들을 보자 여자는 주춤했다. 하지만 신은지의 도발에 그녀는 매우 불쾌했다. 오랫동안 분노를 누르며 겨우 복수할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어떻게 이렇게 그냥 넘어갈 수 있겠는가? 신은지는 한눈에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리며 말했다. "왜 면이 서지 않을 까봐 걱정돼? 그럼 비켜, 내 입맛 떨어뜨리지 말고.” 여자는 화가 나서 이를 악물었지만 최근에 맞은 보톡스 때문에 큰 표정의 변화 없이 큰 눈을 부릅뜨고 한스러운 듯 신은지를 노려보려 볼 뿐이었다. 신은지는 그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상관하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비켜줄래? 착한 개는 사람의 길을 막지 않아.” “너……” 말을 마친 그녀는 다시 접시를 들고 스테이크를 집고 파스타를 조금 담았다. 신은지가 돌아서자 그 여자가 그녀 앞을 가로막자 신은지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어깨를 부딪치고 식당 쪽으로 걸어갔다.그 여자는 신은지를 막고 싶었지만 막은 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신은지의 뒷모습을 보며 아래턱을 치켜들고 코웃음 칠 수밖에 없었다. “신은지, 다음에는 불멸의 남자를 찾아보는 것이 어때? 남자 잡아먹는 네 운명덕에 다음에 재수 없이 걸릴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하네……” 신은지는 그녀의 말에 정신이 팔려, 그녀 무리의 다른 하나가
신은지의 말에 빨간 입술의 여자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니 정말 CCTV카메라 두 대가 그녀 쪽을 향하고 있었다.그녀의 표정이 굳어지며 눈물도 그치고, 이내 한스러운 듯 신은지를 노려보며 울분을 참으며 돌아섰다.그녀는 원래 신은지가 벙어리 냉가슴 앓는 줄 알고 일부러 그런 말을 해서 신은지를 자극하려고 한 것이었다.하지만 신은지는 그녀의 의도대로 행동하지 않았고 스스로의 면을 구기지도 않았다.신은지는 그녀가 떠나자 돌아서서 나유성 앞으로 갔다. 소스로 젖어 있던 나유성의 셔츠는 이미 말랐다.옅은 색의 셔츠였기에 얼룩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미안해. 나 때문에 옷이 더러워졌어. 위층 방에 올라가서 좀 쉬고 있어. 내가 가서 갈아입을 옷을 찾아올게.” 신은지는 발목이 아픈 티를 내지 않았지만 나유성은 그녀의 걸음걸이가 좀 이상하다는 것을 보고 발목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차렸다. "옷은 다른 사람에게 찾아서 갖다 달라고 할게. 너야 말로 발목을 삐어서 하이힐을 신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내가 부축해 줄 테니 잠깐 앉아 있어. 내 옷 가져다 달라고 하면서 네 플랫슈즈도 한 켤레 사다 달라고 할게. 몇 사이즈 사 오라고 해?” 신은지는 자신의 발에 신은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신고 있는 구두의 굽은 낮은 편이었고, 발목을 삐었지만 걷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게다가 그녀도 이제 돌아가려고 했었다. 원래 연회에 올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은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다른 사람 귀찮게 할 필요 없어. 내가 가서 어머니, 아버지께 먼저 가보겠다고 말하면……” 신은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나유성은 다시 손을 뻗어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 “밞지 않게 조심해.” 바닥에 떨어진 스테이크와 파스타는 웨이터가 청소했지만 아직 처리하지 못한 소스가 있었다. 신은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나유성이 가까이 있어 서로 거리를 두고 싶어 돌아서지 않고 건너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유성은 신은지가 보지 못
박태준은 미간을 찌푸리고 담배를 피우려고 싶었지만 오늘 담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평소 가끔 담배를 피우고 싶을 때가 있어도 참았지만 오늘은 참을수록 짜증이 났다. 게다가 기민욱이 계속 귓가에 재잘거리는 바람에 더 짜증이 났다. "나가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 기민욱은 그를 지켜만 볼 뿐 막지 않았다. 재경 그룹에서 손님들을 위해 담배를 준비해서 식당에 두었다. 밖에 작은 발코니가 있어 흡연구역으로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이미 그곳에는 사람이 많이 있는지 얇은 커튼뒤로 사람들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비쳤다. 박태준은 발코니로 가지 않고, 바깥 정원으로 나갔다. 그는 외투를 걸치지 않았다. 유리문이 열리자 바람이 눈송이를 휘날리며 그의 옷깃사이로 불어 들어왔다. 박태준은 찬 바람에 살을 칼로 베인 듯한 통증을 느꼈고, 밖으로 나온 지 불과 1분도 채 되지 않아 온몸이 얼었다. 담배를 든 손도 걷잡을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고, 입술은 푸른빛을 띠었다. 한기가 마음속의 짜증까지 가라앉히며, 너무 추워서 다른 생각은 전혀 할 수 없었다. 바람이 불어 담배 연기가 매우 빨리 타올랐다. 박태준은 담배를 껐지만 연회장에 들어가지 않고 뒤쪽으로 돌아가 안전통로로 위층으로 올라갈 준비를 했다. …… 위층 방. 욕실에서 나온 사람은 나유성이었다. 그는 호텔에서 제공하는 가운을 입고 허리띠를 느슨하게 맨 채 머리카락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욕실 문을 열고 나오는 나유성은 놀라 물었다. "왜 네가 여기 있어?” "어떤 웨이터가 나에게 시어머니가 정원에서 넘어져서 부축을 받아 이 방으로 와서 쉬고 계시다고 말했어. 그래서 방으로 올라와 문을 두드렸는데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고, 방문도 열려 있어서 들어왔어.”"비서에게 갈아입을 옷을 가져다 달라고 해서 문을 닫지 않았어. 그리고 아주머니는 본 적이 없는데?”분명히 속은 것이다.상대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이곳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된다.신은지가 막 몸을 돌려 나가려 하자
신은지는 무의식적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일이 많은 것이 적은 것만 못하다고 그저 자극적인 기사를 위해 진실을 외면한 파파라치들이 이 광경을 보고 어떻게 쓸지 누가 알겠는가? 신은지가 옷장에 발을 들여놓자 박태준도 뒤따라 들어왔다. 신은지는 안 그래도 당황해하고 있었는데 그의 행동에 더욱 당황해하며 물었다. ”왜 들어오는 거야?” "그럼 나는 들어가지 않고 남아서 스캔들나라고? 나유성은 지금 샤워 가운만 입고 있는 데다가 단정하지 않아." 신은지는 박태준이 항상 '옷이 단정하지 않다'는 말을 할 때 이를 악물었다. “이 모습을 기자들이 보면 뭐라고 하겠어?” "……” 옷장 문이 닫히자 안은 옷장 안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방 문이 열리며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줄줄이 들어와 나유성을 찍으며 물었다. "나유성 씨, 방에 혼자 계셨나요?” 나유성의 얼굴은 차가웠다. 동의 없이 개인적인 공간으로 돌진하는 일을 당하면 당연히 즐겁지 않다. 지금 바로 그들에게 화내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당신들 말은, 당신들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인가요?” “……” "나가세요. 저는 옷을 갈아입어야겠어요.” "나유성 씨, 박 대표님의 전 부인이 당신 방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기자가 말을 다 하지 않았는데, 나유성은 그녀를 향해 발을 옮겼고, 다른 사람들은 뒤로 물러나며 그에게 길을 내주었다.어두운 안색으로 나유성은 그 기자의 목에 걸려있던 기자증을 보며 말했다. “비방하고 모욕하는 말은 법적 책임을 져야 할 거예요.” 옷장 속. 박태준은 신은지를 끌어안고 옷자락으로 그녀의 손을 닦고 있었는데, 손가락부터 손가락 사이, 손목까지 단 한 곳도 놓치지 않았다. 누군가가 옷장 문을 갑자기 열까 봐 신은지는 몸과 마음은 밖에 있었다. 박태준의 움직임을 알아차렸을 때, 그녀의 손은 곧 벗겨질 것 같았다. 아무리 그의 옷이 고급지고 부드럽다고 해도, 이렇게 여러 번 손을 닦아대면 피부가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뭐 하는 거야?" 신은지
기민욱은 침울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왜 그렇게 물어보시죠?”"육 사장의 외모를 보면 올해 적어도 서른 살은 되지 않았나요? 방금 올라오기 전에 연회장에서 육 사장을 보았고, 내가 연회장을 후에 그가 사라졌다고 해도 불과 20분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기민욱 씨는 그 사이 CCTV를 확인하고 사람을 찾으러 왔어요. 만약 기민욱 씨가 그를 죄수라고 생각한다면, 저는 더 이상 묻지 않을게요.”나유성은 온화하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진심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지만 만약 기민욱 씨가 그를 당신의 형이라고 생각한다면, 저는 기민욱 씨에게 정신과 의사를 만나보길 권해요. 기민욱 씨가 이해가 잘 되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어떤 어머니들은 자기 아들에 대해 남다른 독점욕을 가지고 있고,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자기 아들을 빼앗아 간다고 생각해요. 제가 보기에 지금 기민욱 씨의 심리는 그런 어머니와 비슷해요. 빨리 치료를 받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기자들은 나유성의 '부탁'으로 이미 방을 나갔고, 현재 방안에는 기민욱과 나유성 두 사람만 남아있어 대화가 없을 때는 유난히 조용했다.옷장 속.박태준의 목소리는 더욱 낮아져 완전히 신은지의 얼굴에 붙어서 귓속말을 하고 있었다. "내가 나유성이 꿍꿍이가 있다고 했을 때, 넌 그가 도와주는 것뿐이라고 했어. 그리고 육정현의 이력은 네이버에 아주 분명히 나왔는데, ‘외모를 보아하니’ 라니? 분명히 내가 늙었다고 비꼬는 거야.”"기민욱의 행동이 병이라고 욕까지 해줬잖아?”"그게 무슨 욕이야, 기민욱은 원래 병이 있는데. 단지 사실을 말한 것뿐이야.”“……”그래.유치한 남자와는 소통하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다.그것도 연적 앞에서 말이다.하지만 방을 좀 둘러보겠다는 기민욱의 말에 신은지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긴장되었다. "만일 유성가 기민욱을 막지 못하면 어떻게 해?” "그러면 둘러보라고 해. 들키면 속이면 옷장 문을 여는 순간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버려.” 만약 박태준의 말처럼 그렇게
기민욱의 제안에 말에 나유성이 대답하기도 전에 박태준은 말했다."내가 선택한 친구를 기민욱, 네 몇 마디 말로 마음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꿍꿍이가 좀 있는 놈이기는 해도 기본 인품은 문제없는 친구라고….…” 잘난 체하는 말이었지만 신은지는 박태준의 말에 동의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나유성은 말했다. "좋아요.” “……” “……” 박태준과 신은지는 동시에 할 말을 잃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것과 같았다. 다음 순간, 나유성은 옷장 문에 놓았던 손을 떼자 옷장문이 열렸다. 기민욱은 옷장 문을 조금만 열어도 안에 숨어 있던 박태준과 신은지를 볼 수 있었다. 방금까지 침착함을 유지했던 박태준의 얼굴이 굳어졌다. 박태준은 굳은 얼굴로 옷장문을 보며, 이따가 나유성에게 화풀이하며 그를 한 대 때려줄까 생각했다. 신은지도 옷장 문을 주시하며 기민욱이 문을 여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기민욱이 옷장 안을 제대로 보기 전에 달려 나가 그가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도록 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를 때리는 동안 박태준에게 도망갈 기회를 줄 수 있을 것이다. 그 순간 나유성은 말했다. "협력 이야기는 아래층으로 내려서 자세히 하는 것이 어떨까요?” "이야기는 당연히 해야겠지만, 그전에 나유성 씨가 우리 형을 숨겼는지 알고 싶어요. 나에게 옷장을 한 번 보여 준다면 제게 성의를 보였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하." 나유성은 한 발로 옷장 문을 막고 한 손으로 기민욱의 목을 잡았다. 그는 기민욱을 들어 방의 바깥 복도에 내동댕이쳤다. "육정현은 네 형이지만, 난 네 형이 아니야. 그런데 왜 자꾸 기어오르지? 말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마. 조건을 내거는 일은 서로 평등한 관계나 될 때 내걸 수 있는 거야! 기민욱 씨는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어야 하는데, 당신이 나와 조건을 내걸 위치가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기민욱은 항상 뒤에서 음흉한 일을 계획하고 벌이지만 힘을 쓰는 일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