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박연희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가늘고 흰 손가락으로 자신의 아랫배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이곳에 정말 아이가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남편은 임신 소식에도 그녀에게 물었다... 누구의 아이냐고 물었다.조은혁이 아니면 대체 누가 있단 말인가?하인우?지난 2년 동안 박연희는 마에 씌기라도 한 듯 조은혁을 사랑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특히 낯선 여자와 키스하는 사진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조은혁은 박연희를 사랑하지 않는다.박연희도 마냥 멍청한 것은 아니다. 그녀 역시 몰래 조사해 본 적이 있었다.오빠의 비서는 그녀에게 조은혁을 건드리지 말라며 얼버무렸다. 조은혁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며 그녀는 조은혁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결국 조은혁과 엮인 것도 모자라 1년 전에는 결혼까지 해버렸다.박연희는 굳이 해명하지 않았다.그저 가녀린 몸을 한껏 웅크리고 마치 태아를 보호하려는 듯 허리를 약간 구부리고 나지막이 물었다.“이 아이 갖고 싶어요?”상당히 어려운 질문이었다...한참이 지났지만, 조은혁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고 박연희도 이로 하여 깨달았다.이 아이가 그들의 아이가 아니라고 의심하니 지금으로서 가장 안전한 방법은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다. 혹은 정말 조은혁의 아이라고 해도 그는 아마 낳지 못하게 할 것이다...조은혁은 오빠에게 보복해야 하니까.몸을 웅크리고 있는 박연희의 목소리는 낮다 못해 더 이상 낮출 수 없는 정도였다.“그럼 그냥 지울게요.”잔인한 혼인, 사랑받지 못하는 아내, 강약이 분명한 관계, 박연희는 아이를 보호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녀 역시 무의식 간에는 아이를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말을 마치고 박연희는 고개를 들어 조은혁을 바라보았다.붉게 물든 눈시울에는 어느새 눈물이 아른거렸지만 동시에 평소에는 없던 강인함을 띄고 있었다.보아하니 이미 모든 진실을 알게 된듯싶었다.조은혁의 깊은 동공은 마치 그녀를 심판하는 듯 또는 뭔가 고민하는 듯
그는 박연희의 몸속에 아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큰 기척을 냈다.푹신한 침대는 계속하여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고 상황은 침대 머리맡에 걸린 그림들이 와르르 떨어질 정도로 치열했다... 이윽고 남자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그림을 옆에 내동댕이치고는 그녀의 몸을 움켜쥐고 자신의 품으로 필사적으로 끌어당겼다.싫어, 싫다고...박연희의 눈물 가득한 눈이 점차 몽롱해지고 눈앞이 점점 흐려졌다.예전에 조은혁은 그녀를 냉대하더라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렇게 난폭하게 군적이 없었다.조은혁은 정말 미친 것 같았다.조은혁은 박연희를 점유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몸을 자세히 검사하며 그 어느 곳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는 정말 박연희를 미치게 하려고 작정한 듯싶었다.응석받이로 곱게 자란 그녀가 어찌 그 참담한 온갖 괴롭힘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결국, 박연희는 울다가 정신을 잃고 말았다...그제야 조은혁도 그녀의 몸에서 손을 뗐다.조은혁은 박연희를 놓아주고 그녀의 옆에 누워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조금 전의 광기를 회상했다... 사실 조은혁이 신경 쓰이는 건 박연준과의 원한인지 아니면 박연희가 다른 남자와 사귄다는 것인지 그조차도 알 수 없었다.그 젊은 남자아이와 함께 있으면 박연희는 매우 즐거워 보였다.마치 그들이 처음 사귈 때처럼 박연희는 한없이 행복해했다.혹시 박연희는 누구든 상관없이 사귀기만 하면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조은혁이 그녀의 유일한 사랑이라는 것도 결국 착각인 건 아닐까? 그저 누가 잘해주면, 누가 함께 놀아주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건 아닐까?한참 동안 조은혁은 몸을 기울여 자신의 어린 아내를 바라보았다.조은혁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어루만진 뒤, 또 그녀의 아랫배를 가볍게 만져주고는... 이불을 따뜻하게 덮어주었다.이윽고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검은 가운을 걸치고 서재로 가서 김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분부했다.30분 후, 김 비서가 도착하고 그녀의 곁에는 하와이에서 가장 좋은 산부인과의 의사가 서
그는 말없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하인우를 바라보았다.이토록 맞고 나서도 하인우의 얼굴은 여전히 품격 있고 잘생긴 티를 벗어낼 수 없었다.그러자 조은혁은 가볍게 피식 웃으며 물었다.“손을 잡아? 어느 손으로 잡았는데?”말을 이어가며 그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야구 방망이를 집었다.하인우는 눈을 치켜뜨고 눈앞의 남자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그는 이 남자가 박연희의 남편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박연희는 그토록 가냘프고 연약한데 그녀의 남편은 극악무도하고 잔인한 남자이다.하인우는 이를 악물고 말을 쥐어짜 냈다.“나와 연희는 순결하다고! 하지만 당신은 사람을 가졌더라도 연희의 영혼은 영원히 가질 수 없어. 연희는 영원히 당신의 것이 될 수 없어. 연희는 결국 자유를 찾아 날개를 펴고 날아갈 거니까.”그러자 조은혁은 옆에 있던 서류를 집어 훑었다.철학을 배운다고?그는 피식 웃으며 천천히 하얀 장갑과 고글을 끼고는 한마디 말도 없이 야구 방망이를 휘둘렀다...하인우의 두 손은 모두 망가져 버렸다.외마디 비명이 울려 퍼지고 조은혁은 눈을 내리깔고 담담히 미소를 지었다.“이건 네가 내 아내를 꼬신 대가야. 난 이미 성질을 많이 가라앉혔으니 3개월 후에... 네 목숨이 지켜질지는 모두 네 운에 달려있겠네.”하인우는 땅에 쓰러졌다.그는 말로 이룰 수 없는 고통에 온몸이 경련을 일으켰고 끊임없이 눈을 깜박이며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손이 완전히 망가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붙일 수도 없는 상태인 것이다...그때, 카드 한 장이 땅에 떨어졌고 안에는 2천만 원이 들어있었다.그리고 동시에 조은혁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이걸로 손 고쳐.”그러자 하인우는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외쳤다.“당신도 언젠가는 업보를 받게 될 거야! 난 연희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이건 사랑이고 변태적인 소유가 아니야.”“그래?”조은혁은 여유로우면서도 음산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다가가 하인우의 왼손을 짓밟았다
오빠!꿈에서 깨어난 조은서가 눈을 떴다. 사방은 여전히 캄캄했다.조은서는 악몽을 꾸었다.꿈에서 조은서는 조은혁과 박연희를 보았는데 꿈속에서 그녀의 오빠는 박연희에게 매우 잘해주었지만, 반면 그들의 엔딩은 마냥 좋지 않았다... 마치 그녀와 유선우의 결말처럼 말이다.조은서는 일어나 앉아 몸을 웅크리고 자신을 꼭 끌어안았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아직도 몸이 덜덜 떨렸다.꿈자리가 너무 리얼했다.그때 누군가의 손바닥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눈을 들자 어둠 속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유선우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하얀 가운을 입고 휠체어에 앉아있었는데 휠체어가 아니었다면 그의 몸은 예전과 조금도 달라 보이지 않았다...유선우가 온화한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이안이는 곧 괜찮아질 거야.”“알고 있어요.”조은서는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어 유선우를 올려다보았다. 유선우를 향한 그녀의 눈빛은 갈망과 구걸을 가득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당장 유선우를 안고 싶었다... 낮의 강인함도 지금 이 순간 모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조은서가 먼저 스킨쉽을 제안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가벼우면서도 연약한 목소리로 물었다.“선우 씨, 저 좀 안아줄래요?”유선우의 까만 눈동자는 밤이 깊어 차마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이번에도 유선우는 그녀를 거절하고 떠날 거라 생각하던 그때, 유선우는 이미 가볍게 조은서를 다리 위로 끌어당기며 조용히 말했다. 다리에 감각이 없다고, 아프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잠시 후, 그는 머리를 숙여 그녀에게 키스하면서 동시에 손을 조은서의 잠옷 속으로 집어넣었다.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고 있었다.모든 것이 느릿느릿하고 침착해 보였지만 오직 하늘만이 그가 얼마나 긴장했는지 알 것이다. 혹여나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을까, 그녀가 더욱 반감을 품을까 두려웠다. 어쨌든 그는 현재 장애인이기 때문에 오직 한 손만 움직일 수 있었다...몇 년 동안 한 번도 성관계를 가져본 적이 없었고 지난 2년 동안
조은서는 확인하고 싶었다. 과연 유선우는 진심인지 아니면 본심이 아닌 말인지.유선우도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들은 몇 년 동안 부부로 지내며 서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그녀가 있었다... 조은서도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그래서 조은서는 다시 진이 정원에 나타났고 그와 관계를 맺었으며 그를 그렇게 꼭 껴안은 것이다.방금도 조은서는 진작에 한계에 다다랐지만 여전히 그의 수요를 만족시켜 주었다.이것들은 모두 진심으로 상대를 깊이 사랑해야만 가능한 것이다.유선우의 마음은 저도 모르게 슬퍼졌다. 두 사람은 분명 서로를 뜨겁게 사랑했지만 마치 단 한 번도 사랑한 적 없는 사이 같았다. 예전에는 조은서가 그를 사랑했고 나중에 그녀의 마음이 서서히 식어갈 때쯤 유선우가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그리고 지금 그들은 사랑할 수 없는 사이다.매번 가슴속에 희망의 불꽃이 피어오르다가도 힘없는 두 다리를 볼 때마다 그 불길은 빠르게 식어갔고 불길이 타오르던 그 자리에는 결국 쓸쓸함만 남겨졌다.유선우는 상처받은 듯한 조은서를 바라보며 마음을 독하게 먹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은서야, 우리 사이에 아직 여지가 있다고 생각해? 그래. 난 아직 널 좋아하지만, 너에게는 이미 다른 사람이 생겼어. 사랑이란 게 말은 쉽지만 행동으로 보여주는 건 어려운 법이야. 나는 지금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남은 삶은 이제 홀가분하게 살고 싶어. 빚을 졌다 해도... 너에게 빚진 바이올린의 꿈은 나도 오른팔로 갚았는데 이젠 충분하지 않겠어?”유선우는 피식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그 웃음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그러고 나서 그는 조은서가 물러날 때까지 그녀를 지켜보았다.여자들은 항상 강한 자부심을 느끼기에 거북한 그의 말을 듣고도 계속하여 그에게 매달릴 여자는 없을 것이다. 물론 조은서는 더욱 그렇다.방금 얼마나 뜨거웠으면 지금은 또 그만큼 낭패해진다.조은서의 몸도 점차 식어갔다.그녀는 실크 잠옷을 천천히 걷어 올려 하얀 피부에 남겨진 붉은 자국을
조은서는 백미러를 통해 심정희와 눈을 마주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15분 후, 차는 서서히 한 별장 구역의 사도에 들어섰고 별장 입구에 다다랐을 때 그들은 저 멀리 문 앞에 서 있는 검은색 랜드로버 한 대와 그 옆에 서 있는 키 큰 남자 한 명을 보게 되었다.그리고 조은서는 곧바로 그 사람이 박연준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하지만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을 뿐 그녀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그러자 옆에 있던 심정희가 화를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저 인간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다시 찾아와! 우리 집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놓고도 종일 주위를 얼쩡거리는 건 대체 무슨 심산이야?”앞서 조은서는 심정희에게 조은혁과 박연희의 일을 알리지 않았다. 잠깐의 고민을 거친 뒤, 결국 사실대로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오빠가 1년 전에 박연준의 여동생을 아내로 맞았어요... 박연희라고, 이제 21살이에요.”그러자 심정희는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그럴 리가! 올해 우리 모두 하와이에서 살았는데 네 오빠가 이런 큰일을 치렀는데 아무런 흔적도 드러내지 않았다고? 혹시 박씨 남매가 우리를 속인 건 아니야?”하지만 조은서는 씁쓸하게 웃으며 답했다.“제가 전화했더니 오빠가 인정하더라고요.”순간 심정희는 착잡한 마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두 사람이 말을 하는 사이에 차가 박연준의 옆에 다가가자 그가 손을 뻗어 차를 가로막았다.조은서는 그가 박연희에 관한 일을 묻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여 그녀는 차 문을 열고 심정희에게 이준이와 이안이를 데리고 먼저 집으로 들어가 있으라고 전한 뒤, 혼자 남아 박연준과 이야기를 나누었다...황혼 속에서 작은 아이 두 명과 함께 심정희의 뒷모습은 점차 멀어져만 갔다.조은서는 점차 작아져만 가는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박연준도 마찬가지였다...그는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는 담배를 거의 잊어버리고 한참 동안 쓴웃음을 지었다.“그 사람과 아들, 딸 모두 가진 거야? 의외네.”조은서도 그제야 눈을 돌려
그는 종종 조은서의 꿈을 꾸고는 했다.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는 그 감정이 동정이 아니라 그리움이었음을 깨달았다. 박연준은 그의 앞에 있던 조은서, 슬픈 어조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결혼생활에 대해 말하던 조은서, 그리고 항상 믿음 어린 눈길로 그를 보던 조은서를 그리워했다...그 후, 그는 자주 하와이로 출장을 가서 그녀를 보고는 했다.심지어 조은서와 자주 만나기 위해 박연희를 하와이에 있는 미대에 보내기도 했다. 그래봤자 겨우 밥이나 먹고 커피나 마시는 데서 그칠 수밖에 없었지만 그 사소한 것조차 박연준에게는 큰 행복이었다.하지만 지금은 그의 곁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그가 조은서를 연모하는 마음은 이젠 절대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녀가 느끼기에 그건 더럽고 추악한 감정이었으니까....조은서가 별장으로 돌아왔다.한창 아이들이랑 놀아주고 있던 심정희는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들었고 조은서가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조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와이에 한 번 다녀오려고요. 박연희뿐만 아니라 오빠를 위해서도 한 번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제 겨우 잘살아 보려고 하는데 다시 복수의 늪에 빠지게 둘 수는 없어요.”심정희도 그 말에 동의했다.어찌 되었든 산 사람은 살아야지.조은서는 비행기 티켓을 끊으며 심정희에게 말했다.“길어서 이틀이면 돌아올 거예요. 혹시 집에 일이 생기면... 선우 씨한테 연락해서 해결하라고 하세요.”비록 서로 얼굴을 붉히며 헤어졌지만 그래도 유선우는 조은서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었다.심정희가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어.”말을 하던 중 조은서는 심정희의 정수리 쪽에서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몇 가닥을 발견했다. 그녀는 왠지 죄송한 마음이 들어 심정희의 두 손을 잡으며 말했다.“어머니, 아직 젊으시잖아요. 그러니까 혹시라도 맘에 드는 분 만나시면...”“무슨 소릴 하는 거야!”심정희가 단호하게 거절했다.“지금은 네
조은서는 홀로 윗층으로 올라갔다.그녀는 곧바로 2층 동쪽의 안방으로 들어선 후 널찍한 응접실을 지나 두 사람의 침실에 도착했다.침대 머리맡에는 결혼사진 한 장이 없었고 침실에는 여자애가 쓸 법한 아기자기한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소파 위에 자그마한 캔버스 하나만 놓여 있었는데 캔버스의 그림은 완성되지 않은 채였다.하지만 희미한 윤곽으로 추측해 봤을 때 그림속의 사람은... 조은혁이 틀림없었다.드레스룸에는 여자 옷도 적었지만 남자의 옷은 그것보다 더 적었다.조은서는 드레스룸에 걸린 여자 옷의 부드러운 촉감을 느끼며 두 사람의 관계를 대충 눈치챌 수 있었다. 결혼 한지 1년이 지났는데도 옷이 이렇게 적은 걸 보니 조은혁이 박연희를 잘 대해 주지 않는 다는 것만은 아주 명확했다.그녀는 침실에 오랫동안 머물지 않고 바로 아래층으로 다시 내려왔다.1층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김 비서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조은서가 그녀에게 물었다.“저희 오빠는 여기 자주 안 오나 봐요?”김 비서는 바른대로 말했다.“네, 일주일에 한 번씩 와요.”더 캐물어 봤자 좋지 않은 이야기만 들을 것 같았기에 조은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녀가 이만 별장을 떠나려고 할 때, 한 젊은 경호원이 물통을 들고 지하실에서 나왔다.별 생각 없이 그 쪽을 보던 조은서는 물통 속의 물이 온통 핏빛인 걸 보고는 흠칫 굳었다가 김 비서를 바라보았다.순간 김 비서는 발밑이 꺼져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조은서는 하와이에서 일주일 동안 지내다가 일주일 뒤 B시의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그녀는 출구 쪽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박연준을 발견했다.선글라스 너머로 무언의 대화를 주고받던 두 사람은 함께 근처에 있던 스타벅스에 향했다.자리에 앉은 뒤 선글라스를 벗은 조은서가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나 미행했어요?”못 본 새에 박연준은 더 초췌해진 것 같았다.그는 조은서의 커피도 주문한 후 자리에 앉아 자연스럽게 담배를 꺼냈다가, 지금 있는 곳이 커피숍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