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떠나는 건 이현 씨가 돌아오지 않아서가 아니에요.”온지유는 이미 충분히 상처받았다. 여이현과 함께한 이 몇 년간 온지유는 그의 신뢰를 얻지 못했고 쉽게 깨지고 이어 붙이는 관계에 지쳤다. 그의 무관심에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이제껏 너무 쉽게 여이현을 용서했기에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일 테다.이제 더 이상 미련을 가져서는 안 된다.“사모님, 제발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경비는 거의 무릎을 꿇고 사정할 기세였다.하지만 온지유는 이미 인내심이 바닥났다. 경비들이 무슨 말을 해도 떠나기로 결심했다.경비들이 필사적으로 막아섰지만 온지유는 꿋꿋이 배를 안고 자리를 떠나려 했다.이렇게 나오면 그들은 당연히 앞을 막을 수 없었다.온지유는 당당히 떠났다.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경비들은 그녀를 뒤따라가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온지유는 걸어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전화를 걸어 사람을 부르기로 했다.아예 친정으로 돌아가려 마음먹었다.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백지희가 차를 몰고 도착했다.“지유야, 웬일이야? 얼마 전에 겨우 화해하더니 또 떠나려는 거야?”백지희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여이현이 온지유를 사랑한다는 건 확실한데 고작 며칠 만에 이렇게 되어버리다니 믿기지 않았다.온지유는 차 문을 열고 타며 그들을 등졌다.“일단 출발하자. 천천히 이야기할게.”지금 온지유는 여이현과 관련된 사람들만 봐도 불쾌하고 짜증이 났다.사랑이 깊으면 미움도 깊어진다는 말을 이제야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백지희는 일단 시동을 걸고 그곳을 벗어났다.온지유는 차 안에서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나올까 봐 한참 동안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그리고 나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현 씨가 노승아를 풀어줬어.”“뭐?”백지희는 깜짝 놀랐다.“말도 안 돼! 노승아가 너를 그렇게 괴롭혔는데? 어릴 적에도 분명히 너에게 뭔가 손을 댔을 거야. 그런 사람은 감옥에 있는 게 당연한 건데 이현 씨는 왜 그런 짓을 한 거래? 군인이고, 법을 아는 사람인데
“알겠어.”백지희는 더 캐묻지 않고 온지유를 집에 바래다주기로 했다.온지유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며 허전한 마음을 달랬다.사랑이란 바로 이런 거일지도 모른다. 상대의 사소한 행동에도 신경 쓰이고 자신의 보잘것 없는 마음이라도 소중히 여겨주길 바라는 것.하지만 현실은 상상과는 너무 달랐다.그때, 백지희가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았다.온지유는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지만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했다.“아니 대체 왜 길을 가로막고 있는 거야! 한두 대도 아니고 이렇게 많이!”백지희는 화가 잔뜩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늦은 밤에 이런 상황이 벌어지니 정말 기가 막혔다. 다행히 백지희의 운전 실력이 좋아 사고는 나지 않았다.온지유는 차에 비치는 강한 불빛 때문에 눈이 부셔 앞이 보이지 않았다.그 탓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이윽고 갑자기 차 문이 열렸다.백지희는 한바탕 욕이라도 하려다가 나타난 사람을 보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만 같이 집으로 돌아가자. 무슨 일이든 집에서 얘기하자고. 나 이제 돌아왔으니까.”여이현이 차 옆에 서서 차분한 목소리로 온지유에게 말했다.그 목소리를 듣고 온지유는 고개를 들었다.그녀의 눈앞에는 여이현의 얼굴이 있었다. 그는 꽤 급하게 달려온 듯 옷차림이 헝클어져 있었다. 하지만 온지유의 마음은 여전히 차가웠다.집에 돌아올 시간이 없다며?어디 있는지도 못 알려준다며?떠난다니까 이제 와서 이렇게 다급하게 나타나다니. 이미 상처는 줄대로 다 줘놓고 뭐가 그렇게 급한 걸까.온지유는 차갑게 말했다.“집으로 돌아갈 거예요. 여기는 내 집이 아니잖아요.”“넌 내 아내야. 내 모든 것이 너의 거니까 이 집도 네 집이지.”여이현이 다시 말했다.온지유는 비웃듯 그를 쳐다봤다.“우리 이혼했잖아요? 기분 좋으면 다 내꺼고, 내키지 않으면 자산 몇억과 집을 가져가고? 그래도 이 정도면 이득 본 셈이네요 뭐. 그런데 아쉽게도 남자의 말은 믿을 게 못 되는 걸요. 다 거짓말일 뿐이니까.”
온지유가 듣고 싶었던 말은 이런 게 아니었다. 찝찝한 기분이었지만 그녀는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설마 당신 없이는 혼자서 못 살거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당신이 노승아와 있을 때도 난 잘만 살았어요. 아이 때문에 걱정하는 거라면 내겐 친구도 있고 부모님도 있어요. 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날 거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요.”온지유는 단호했다.여이현은 온지유와 아이의 이후의 삶이 걱정되었다.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은 행복할지 몰라도 언젠가 자신이 변해 그녀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르는 괴물이 된다면 그때야말로 온지유에게 가장 큰 고통을 주게 될 것이다.불편한 진실이어도 현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온지유의 냉정한 얼굴을 보고 여이현도 자신의 결정이 틀린 건 아닐지 두려웠다.자신의 결정이 온지유를 더 아프게 할까 봐.“본가로 가려는 거야?”여이현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맞아요.”온지유가 짧게 대답했다.여이현은 온지유의 배를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하지만 꼭 몸조심해. 다치지 말고. 위험하니까 당분간은 자주 나가 돌아다니지 말고. 아이가 태어날 때 내가 곁에 있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최선의 준비를 해둘게.”온지유는 여이현이 더 잡아줄줄 알았다.하지만 정작 그의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마지막 인사처럼 들리는 게 아닌가.온지유는 참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당신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네가 정 가고 싶다면 말리지 않을게.”여이현은 여전히 담담하게 말했다.“백지희 씨가 너를 데려다줄 거지만 내 사람들도 따라가서 네가 안전하게 집에 도착하는 걸 확인해야겠어.”여이현은 그 이상 아무것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고 달래지도 않았다.그의 태도에 온지유의 화는 더 커졌다.“좋아요, 그럼 비켜 주세요!”온지유의 목소리는 차가웠다.여이현은 눈치있게 한발 물러섰다. 온지유는 그 순간 차 문을 세게 닫아버리고는 쳐다보지도 않고 차가운 눈빛으로 앞만 바라봤다.백지희는 그 옆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그녀는
“게다가 노승아를 풀어주러 나가서는 집에 돌아오지도 않고 말이야. 여기에 내가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지 않아? 조금 짜증을 내더라도 받아줄 수 있는 부분이잖아. 그런데 이현 씨는 매번 사라지기만 해. 이번엔 따라와서도 본가에 돌아간다는 나를 그냥 보내버리고. 이건 그냥 손을 놓은 거나 마찬가지 아니야?”온지유는 여이현의 뜻을 눈치챘다. 눈에는 눈물이 차올랐다. 다음 순간에는 바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온지유는 애써 흘러나오는 눈물을 참았다. 더 이상 다른 사람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백지희는 아직도 납득 되지 않았다.“일단 돌아가서 며칠 푹 쉬고 그 뒤에 또 어떻게 나올지 보자. 이현 씨가 단순히 지유 네 선택을 존중한 거였을 수도 있지 않아? 혹시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면 네가 더 싫어할까 봐. 이현 씨도 너의 생각을 읽을 수는 없으니까 엇갈릴 수도 있는 거지. 하지만 서로가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아무 문제 없을 거야.”“그래, 문제없을 거야.”온지유는 살짝 웃음을 떠올렸다.“하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이현 씨가 져줘야겠어.”“아이고, 됐어. 그만 생각해. 돌아가서 자고 내일 아침 일어나면 다 괜찮아 질 거야.”백지희가 온지유를 달랬다.온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속상하더라도 생활은 계속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예전 이혼 소동이 있었을 때도 잘 지나오지 않았던가.“대표님, 사모님은 이미 떠나셨습니다.”여이현은 그 자리에 굳은 것처럼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온지유가 떠난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며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그 모습을 견딜 수 없었던 용경호가 다가가 귀띔을 했다.여이현은 그제야 정신이 돌아오고 고개를 돌렸다.“그래, 돌아가자.”여이현의 목소리는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딘가 정신이 팔려 있는듯 공허했다.용경호가 그 모습을 눈치채고 말했다.“대장님, 제가 한마디만 할게요. 사모님이 신경 쓰이신다면 한 두 마디라도 더 좋게 말씀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조금 기분만 풀어 드리면 사모님도 함께
이 일에 대해 부모님은 이미 한번 온지유를 나무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래도 하나뿐인 소중한 딸이었기에 겉으로는 나무란다고 하더라도 속으로는 걱정이 앞섰다.더군다나 둘은 곧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되게 생겼으니 말이다.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모른다. 앞으로 둘이 곁에서 지켜주지 못하더라도 지유가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그랬기에 모두가 흔쾌히 받아들였다.“아니에요, 엄마.”온지유가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그땐 아직 준비가 덜 돼 있어서 말 못 했던 거에요. 저도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온지유가 바로 뒤에 백지희만 따라 나오자 정미리는 바로 눈치를 채고 물었다.“얘, 설마 또 이현이랑 싸운 건 아니지?”정미리의 추측은 맞았다. 하지만 온지유는 그 일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전 집에 들어도 오면 안 되나요 뭐? 자꾸 이상한 추측 하지 마세요. 운수 없게요.”“우리도 걱정돼서 그러는 거지.”정미리가 대답했다.“우리는 네가 잘 지내기만 하면 돼. 배에 아기도 있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다면 나와 네 아버지가 편히 발 뻗고 잘 수 있겠니? 그러니까 작은 일이라도 캐묻게 되는 거지. 걱정된단 말이야.”“아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집에 와보고 싶었어요.”온지유는 그래도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 이실직고하면 부모님은 꼭 여이현에게 의견이 생길 것이고 사이가 더 어색해질지도 몰랐다.여이현에게도 어느 정도 체면을 남겨주고 싶었다.“그럼 됐다.”정미리는 이미 여이현을 시험해 봤다. 사흘도 안 지나서 지유가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면 정미리의 안목도 녹슨 것이다.두 사람의 감정과 관련한 물음은 조심스럽게 해야 했다,백지희는 온지유를 바래다주고 그들과 몇마디 나누고는 돌아갔다.모두가 백지희에게도 남으라고 요청했지만 백지희는 따로 할 일이 있다며 사양했다.마지막으로 다들 백지희를 따뜻하게 배웅해 줬다.“야식 먹을래?”정미리가 온지유에게 물었다.“임신하면 배가 자주 고플 테니까 뭐 먹고 싶은
“그래요?”온지유는 쉽사리 긍정할 수 없었다. 기억이 흐릿했기에 지금 생각 나는 것들도 충격을 받아 각인 된 단편기 억일 뿐이니 말이다.온지유는 자신이 대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온경준은 한숨을 푹 쉬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네 과거를 숨긴 건 정말 미안해. 네가 실종되었을 때 우리도 경찰에 신고했었어. 하지만 경찰도 네가 학교에서 실종된 이후로 행방을 못 찾았다고 했고, 몇 개월을 찾았지만 결국 네가 혼자 집으로 돌아왔지. 우리는 네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네가 돌아왔을 때 너는 문 앞에 상처투성이인 몸으로 웅크리고 앉아 있었어. 의미 모를 말을 계속 중얼거리면서 말이야. 그리고 곧 쓰러져서는 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정상으로 돌아왔었어. 그때의 일은 다 잊고 다른 사람의 기억을 제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지.”그때의 일은 부모님에게도 암흑한 시간이었다.“네가 기억 해 내기 싫어 했고,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어. 네 상처를 다시 긁어 낼까봐.”그들도 마음이 아팠고 자책도 했다. 온지유는 그 기억을 잊어야만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 올 수 있었다. 그렇다면 부모로서는 당연히 딸이 즐겁게 생활 하기를 바랐으리라.최악의 경우도 대비하고 있었지만 밖에서의 온지유의 이미지도 지켜주고 싶었다.온지유가 다시 공포에 빠지지 않도록 그들은 온지유의 말을 다 따르기로 했다.이를 통해 상대적으로 더 끔찍한 일을 잊을 수만 있다면.온지유의 생활 속에서 잊힌 기억이든, 안 잊힌 기억이든 모두 온지유의 생각대로 맞춰줬다.그리하여 온지유가 생각하고 있는 그 가상의 이야기가 꾸며진 것이다.온지유는 그 말을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 구출 당한 기억이 그리도 생생한데 결국 그 모든 게 다 허상이었다니.그럼 진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중학 생활 중 정말 아무런 걸림돌도 없었단 말인가?부모님은 자신을 위해서라는 걸 잘 알고 있다.어린 여자아이가 오랜 시간 실종되고 또 그렇게 위험한 곳에서 홀로 도망쳐 나오다니. 온몸이 상처투
아버지로서 딸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비록 정미리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에서는 온지유를 계속 염려하고 있었다. 소중한 딸이 또다시 같은 일을 겪게 될까 봐 두려웠다.정미리는 이 일로 인해 마음이 극도로 불안해져 있었다.온지유는 그녀를 진정시키며 쉬라고 권했다.한참을 진정하고 나서야 정미리는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온경준은 그동안 계속 거실에 앉아 있었다. 그는 온지유를 기다리고 있었다.정미리가 안방으로 들어간 후 온경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온지유에게 물었다.“최근에 무슨 일이 있었니?”아빠의 질문을 듣고 온지유는 그에게 다가갔다.“왜요, 아빠?”“너희 엄마도 말했잖니. 오랜만에 돌아와서 배가 이렇게 많이 불러있으니 얼마나 오랜 시간 우리와 함께하지 않았는지 너도 생각해 보렴. 그동안 너무 바빴던 거니, 아니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이현이와의 관계는 정말 괜찮은 거지?”온경준이 걱정하는 것은 다름 아닌 온지유의 행복과 안전이었다.“아빠, 정말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 해결할 거예요.”온경준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그 사람들이 또 널 찾아온 건 아니고?”온지유는 순간 멈칫했다.“그렇지 않다면 네가 이런 질문을 할 리가 없잖니.”온경준의 얼굴은 더욱 심각해졌다.“경찰에 신고하자. 가장 중요한 건 네 안전이야.”“왜 아빠도 엄마랑 똑같게 구세요.”온지유는 부모님의 걱정을 덜어주고 싶었다.“저는 이렇게 멀쩡히 잘 있잖아요. 진짜 무슨 일이 있었으면 벌써 큰일 났겠죠. 만약 무슨 일이 있다 해도 전 잘 대처할 수 있어요. 그리고 제가 지금 안전하게 여기까지 살아온 것도 그 사람들에게 제가 가진 무언가가 필요해서겠죠. 그래서 더더욱 함부로 할 수 없는 거고요.”온지유는 과거에 그 조직과 대면한 경험을 떠올렸다.그녀의 특별함은 다른 이들이 가지지 못한 것이었다.노승아조차 그녀가 가진 비밀을 두려워할 정도였다.노승아가 질투해서 자신을 죽이려 했던 것 이외에는 다들 온지
“네, 승아 씨는 며칠째 회사에 나오지도 않고 행방불명 상태예요.”회사 사람들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온지유는 노승아에게 기억을 되찾았다고 겁줘서 정보를 캐내려고 했다.하지만 돌아온 답은 노승아가 며칠째 회사에 나오지 않았다는 답이었다.뭔가 이상했다.온지유는 노승아가 출소 후 어디 행사에도 참여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물론 그 행사는 한산하게 끝나 노승아의 입지는 바닥을 쳤으며 경력도 완전히 무너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종까지 될 정도는 아니었다.혹시 실종을 빙자해서 다시 한번 화제를 모으려는 건가?전형적인 노승아의 수법이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하지만 회사도 모른다면 단순한 홍보 전략은 아닌 듯했다.온지유는 다시 물었다.“그래도 회사 직원인데 신고는 안 하나요?”“우리가 승아 씨 가족도 아니고 회사에도 정해진 규정이 있으니까요. 윗선에서 명령이 내려오지 않으면 함부로 움직일 수 없어요. 말 한마디라도 회사 이미지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까요.”그 말을 듣고 온지유는 차가운 현실을 느꼈다.여이현이 처음 연예 기획사를 설립했을 때는 그 모든 게 노승아를 위한 것이었다.그런데 지금은 노승아가 실종됐는데도 모두가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니.온지유는 그들의 냉혹함과 무정함에 화가 났지만 생각해 보니 지금 상황이 이상하게 느껴졌다.노승아는 출소하고 나서 다시 연예계에 복귀했다.사람들이 그녀가 출소한 사실을 모르는 만큼 큰 영향은 없어야 했다.문제가 된 건 그 기사 때문이었다.그리고 만약 회사가 나서서 조치를 취했다면 기사는 금세 사라졌을 것이다.그녀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회사가 공세를 펼쳤다면 기사 삭제는 물론이고 여론도 잠잠해졌을 것이다.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마치 노승아가 회사에서 버림받은 듯했다.달리 홍보도 없고 네티즌들의 비난도 그대로 방치되고 있었다.한때 회사의 대표 연예인이었던 노승아가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여이현이 노승아를 그렇게 아꼈다면 지금쯤 모든 문제를 해결했어야 했다.그런데 왜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