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침이 점점 커지자, 노승아는 얼빠진 표정으로 얼어붙었다. 인파 속에 서서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뒤에서 욕먹는 건 자주 있는 일이니 상관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녀가 보고 듣는 앞에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MC는 애써 분위기를 환기해 보려고 말했다.“인터넷에서 떠도는 루머는 믿지 마세요. 다시 마지막 캐릭터를 환영해 볼까요?”“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어요? 인터넷에 설명글이 올라와 있어요! 노승아는 구린 데가 있는 게 분명해요! 당장 경찰 불러요! 범죄자가 마구 돌아다니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요?”“진정하세요. 다들 진정하세요.”MC는 아직도 질서를 유지하려고 했다.“그게 사실이라면 승아 씨가 이곳에 오지도 못...”사람들은 MC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노승아를 미워하다 못해 증오했던 그들은 급기야 물건을 던지기 시작했다.“악!”무언가에 머리를 부딪힌 노승아는 머리를 감싸며 설명하려고 했다.“아니에요, 제가 한 거 아니에요...”현장 스태프는 후다닥 달려와서 그녀를 데려가려고 했다. 사람들은 아직도 분에 차서 외쳤다.“안 그래도 여자 시체가 발견돼서 분위기가 흉흉한데, 노승아가 진짜 연루된 거면 인간도 아니에요! 여자들을 위해서라도 처단해야 한다고요! 저런 사람이 멀쩡히 연예인 놀음하고 있는 거라면 희생자의 속은 누가 달래요!”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말이었다. 그들은 더욱 일치한 목소리로 말했다.“나가라! 나가라!”“나가라! 나라가!”노승아는 처음으로 이토록 선명한 증오를 느껴봤다. 어쩐지 인생이 망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번에는 완전히 망하는 것이었다.그녀는 아직 감옥에 들어가지 않았다. 증거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루머는 증거도 필요 없이 그녀를 감옥보다 더 한곳에 넣을 수 있었다.원래의 그녀는 하늘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어야 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일까?스태프를 따라 무대 뒤로 들어간 그녀는 손을 덜덜 떨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몸에는 날아오는 물건에 부딪혀 난 상처로 가득했다.
말을 마친 김예진은 물건을 정리하게 시작했다.노승아는 아직도 울고 있었다. 그러나 안색은 싸늘했다. 그녀는 어떻게든 재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갯벌에 빠진 것처럼 몸부림칠수록 더 깊이 빠져들었다.‘이제 어떡하지? 이제 어떡해야 하지?’그녀는 최고의 스타가 되어서 모두가 부러워하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러니 이제 와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이때 또다시 노크가 들려왔다. 김예진은 짜증 난다는 듯이 문을 열었다.“글쎄 나간다고 했...”찾아온 사람은 여이현의 부하였다. 김예진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언니!”절망에 빠져 있던 노승아도 여이현의 사람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그녀는 눈물을 닦으면서 후다닥 달려갔다.“이현 오빠는요? 오빠가 저를 찾았어요?”여이현은 그녀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여이현만 손을 뻗어주면 그녀는 살길이 있었다.“노승아 씨, 따라오시죠.”“네. 이현 오빠가 가만히 있지 않을 줄 알았어요. 오빠가 저를 도와주려고 하는 거죠? 지금 당장 갈게요!”노승아는 여이현을 포기한 적 없었다. 그에게는 무조건적인 신뢰가 있었다. 더군다나 지난 세월 동안 그는 한 번도 그녀를 포기할 적 없었다.이번에도 믿어 의심치 않았던 노승아는 흔쾌히 그들을 따라갔다.차 안은 아주 조용했다. 노승아가 웃는 얼굴로 이것저것 묻는데도 그들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그래도 노승아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곧 여이현과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모든 일이 무사히 풀릴 것으로 자부했다.하지만 이번에는 그녀의 생각처럼 순탄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적한 교외에 가게 되었다. 사방이 전부 산이라 왠지 음침한 느낌을 줬다.차가 잠깐 멈춘 사이 노승아를 주변을 둘러봤다. 이때 한 사람이 그녀를 폭력적으로 밀쳤다.“뭐 하는 짓이에요? 난 이현 오빠 약혼녀예요. 죽고 싶지 않으면...”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손이 포악하게 묶였다.“뭐 하는 짓이냐고요?!”노승아는 몸부림치며 반항했다.“그쪽이야말로 죽고 싶지 않으면 입 다물어요.”노승아는 묶인 채로
노승아는 여이현의 말에 온몸이 얼어붙고 말았다.이제 노승아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여이현은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그마저도 자신을 버린다면 이제는 완전히 끝이었다.“이현 오빠!”노승아는 눈물을 쏟으며 아픔도 잊고 여이현 쪽으로 기어갔다.“잘못했어요. 나 정말 잘못했어요. 제발 이러지 마세요...”발밑에 매달리는 노승아를 여이현은 마치 벌레 보듯 냉랭하게 바라보았다.그는 고개를 숙였지만 여전히 당당한 태도로 차갑게 웃었다.여이현은 길고 섬세한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잡으며 나지막이 물었다.“잘못했다고? 말해봐, 뭘 잘못했는지.”그의 말에 노승아는 순간 멍해졌다.‘잘못 했나? 내가 대체 무얼?’하지만 살아 남기 위해서는 여이현의 도움이 필요했고 지금은 여이현에게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이현 오빠가 뭘 잘못 했다고 하면 내가 뭘 잘못한 거겠죠. 말만 해주시면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제발 용서해 주세요.”노승아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고 가련한 모습으로 여이현의 자비를 바랐다.여이현은 불쾌하다는 듯 잡고 있던 노승아의 턱을 놓고 소독용 물티슈를 꺼내 손을 닦으며 말했다.“노승아, 네가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건 알겠어. 하지만 지금 그 말 속에서 진심은 느껴지지 않네. 반성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거든.”노승아는 간신히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여이현의 눈빛은 여전히 싸늘했다.“온지유에게 독을 주입했을 때 넌 오늘 같은 날이 올 거라 생각이나 해봤어?”노승아의 입술이 떨리기 시작했다.“하지만 말했잖아요. 오빠가 나와 결혼만 해준다면 언니에게 해독제를 줄 거라고!”노승아의 말에 여이현의 눈빛은 한층 더 날카로워졌고 이마에 핏줄이 서기 시작했다.그의 분노는 최고조에 달해 더는 참지 못하고 노승아의 목을 움켜쥐었다.“해독제? 네가 해독제를 가지고 있긴 해? 한 번만 더 말해 봐, 네가 정말 해독제를 가지고 있긴 하냐고!”여이현은 처음부터 노승아가 진짜 해독제를 가지고 있
여이현은 노승아가 감옥에 갇히는 건 너무 쉽게 넘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자신의 손으로 그녀를 직접 처리하고 싶었다“아직 머리는 굴러가나 보네.”여이현이 비웃으며 말했다. 마치 그녀의 운명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저승사자처럼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최후통첩을 날렸다.“네 인생도 여기서 끝이야!”“아니, 안 돼요!”노승아는 감정이 격해져 소리쳤다.“함부로 날 가두는 건 불법이에요. 이렇게 하면 오빠도 쉽게 넘어가지 못할걸요!”그녀는 여이현이 어떤 무리수를 둘까 봐 두려웠다.감옥에 보내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 그가 자신을 가둔다면 그 결과는 더욱 참혹할 것이 분명했다.순순히 잡혀가서 고통받을 수는 없다.차라리 감옥에 갇히는 게 나을 것이다.그렇게 생각하니 노승아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도망쳐야만 했다.노승아는 곧바로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다.여이현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전혀 말리지 않았다. 그는 노승아가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의 입가에는 잔혹한 미소만이 떠올랐다.그 모습은 어떤 살인마보다도 더 오싹했다.노승아는 미친 듯이 달렸다. 주변을 둘러볼 여유조차 없었다.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그저 한 방향으로 내달렸다.오랫동안 뛰다 보니 온몸에 힘이 빠졌지만 여이현에게 잡힐까 두려워 멈출 엄두도 나지 않았다.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고 둘러보니 주위는 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어 마치 미로와 같아 도무지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하늘 높이 솟은 나무들이 빽빽하게 서 있어 햇빛조차 들어오지 못했다.그리고 앞쪽에는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절벽이 펼쳐져 있었다.‘여긴 대체 어디지?’노승아는 점점 더 불안감과 혼란스러움에 사로잡혔다.“꺄악!”부주의로 돌에 걸려 노승아는 그만 땅에 넘어져 주저앉고 말았다.손이 땅에 닿으면서 날카로운 풀 가시가 그녀의 손바닥을 찔렀다.순간 피가 흘러나왔다.온몸은 흙투성이가 되었고 머리카락은 땀으로 엉겨 붙어 있었으
이곳의 경비들은 용경호와 가까운 사이었기에 온지유는 먼저 그들에게 물어보기로 했다.“대장님은 아직 귀가하지 않으셨습니다. 언제 돌아오실지는 저희도 알지 못합니다.”경비가 대답했다.“어디로 가셨는지 아세요?”온지유가 다시 물었다.“저희는 잘 모릅니다.”묻나 마나 한 답변이었다.아무런 해결책도 되지 않았다.당장 곁에 여이현이 필요한데 그는 하필 지금 온지유의 옆에 없었다.시간이 지나면서 화도 절반은 누그러졌고 제대로 설명만 해준다면 온지유도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하지만 여이현은 기어코 그 쉬운 일을 하려 하지 않았다.더 이상 온지유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사랑하지 않더라도 말은 똑바로 해야 하지 않을까.온지유는 이런 애매한 태도가 가장 싫었다.그래서 다시 물었다.“용경호 씨에게 전화해서 어디에 있는지 언제 돌아오는지 물어봐 주세요!”“알겠습니다, 사모님.”경비는 즉시 온지유의 요청대로 행동했다.온지유는 체면을 지키려 에둘러서 여이현의 행방을 알아내고자 했다.전화가 걸렸다.온지유가 옆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경비는 질문을 던졌다.전화를 끊은 후 그가 말했다.“사모님, 대장님은 오늘 밤에는 돌아오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어디에 있는지는 물어보았나요?”“말씀해 주지 않았습니다.”온지유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 마음이 답답했다.어디 있는지 그렇게 알려주고 싶지 않은 걸까?노승아를 풀어준 이후로 그는 행방을 감춘 채 전화도 받지 않았다.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온지유는 실망과 함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런 모호한 상황이 정말 싫었다.경비는 온지유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물었다.“사모님,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온지유는 차가운 표정으로 매우 불쾌한 듯 말했다.“저쪽이 어디 있는지도 말해주지 않는데 내가 어디를 가든 이젠 상관없잖아요.”“사모님, 이미 늦은 시간입니다. 이렇게 갑자기 나가시면 저희는 대장님께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경비가 걱정스럽게 말했다.온지유는 헛웃음을 지
“제가 떠나는 건 이현 씨가 돌아오지 않아서가 아니에요.”온지유는 이미 충분히 상처받았다. 여이현과 함께한 이 몇 년간 온지유는 그의 신뢰를 얻지 못했고 쉽게 깨지고 이어 붙이는 관계에 지쳤다. 그의 무관심에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이제껏 너무 쉽게 여이현을 용서했기에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일 테다.이제 더 이상 미련을 가져서는 안 된다.“사모님, 제발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경비는 거의 무릎을 꿇고 사정할 기세였다.하지만 온지유는 이미 인내심이 바닥났다. 경비들이 무슨 말을 해도 떠나기로 결심했다.경비들이 필사적으로 막아섰지만 온지유는 꿋꿋이 배를 안고 자리를 떠나려 했다.이렇게 나오면 그들은 당연히 앞을 막을 수 없었다.온지유는 당당히 떠났다.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경비들은 그녀를 뒤따라가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온지유는 걸어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전화를 걸어 사람을 부르기로 했다.아예 친정으로 돌아가려 마음먹었다.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백지희가 차를 몰고 도착했다.“지유야, 웬일이야? 얼마 전에 겨우 화해하더니 또 떠나려는 거야?”백지희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여이현이 온지유를 사랑한다는 건 확실한데 고작 며칠 만에 이렇게 되어버리다니 믿기지 않았다.온지유는 차 문을 열고 타며 그들을 등졌다.“일단 출발하자. 천천히 이야기할게.”지금 온지유는 여이현과 관련된 사람들만 봐도 불쾌하고 짜증이 났다.사랑이 깊으면 미움도 깊어진다는 말을 이제야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백지희는 일단 시동을 걸고 그곳을 벗어났다.온지유는 차 안에서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나올까 봐 한참 동안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그리고 나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현 씨가 노승아를 풀어줬어.”“뭐?”백지희는 깜짝 놀랐다.“말도 안 돼! 노승아가 너를 그렇게 괴롭혔는데? 어릴 적에도 분명히 너에게 뭔가 손을 댔을 거야. 그런 사람은 감옥에 있는 게 당연한 건데 이현 씨는 왜 그런 짓을 한 거래? 군인이고, 법을 아는 사람인데
“알겠어.”백지희는 더 캐묻지 않고 온지유를 집에 바래다주기로 했다.온지유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며 허전한 마음을 달랬다.사랑이란 바로 이런 거일지도 모른다. 상대의 사소한 행동에도 신경 쓰이고 자신의 보잘것 없는 마음이라도 소중히 여겨주길 바라는 것.하지만 현실은 상상과는 너무 달랐다.그때, 백지희가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았다.온지유는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지만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했다.“아니 대체 왜 길을 가로막고 있는 거야! 한두 대도 아니고 이렇게 많이!”백지희는 화가 잔뜩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늦은 밤에 이런 상황이 벌어지니 정말 기가 막혔다. 다행히 백지희의 운전 실력이 좋아 사고는 나지 않았다.온지유는 차에 비치는 강한 불빛 때문에 눈이 부셔 앞이 보이지 않았다.그 탓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이윽고 갑자기 차 문이 열렸다.백지희는 한바탕 욕이라도 하려다가 나타난 사람을 보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만 같이 집으로 돌아가자. 무슨 일이든 집에서 얘기하자고. 나 이제 돌아왔으니까.”여이현이 차 옆에 서서 차분한 목소리로 온지유에게 말했다.그 목소리를 듣고 온지유는 고개를 들었다.그녀의 눈앞에는 여이현의 얼굴이 있었다. 그는 꽤 급하게 달려온 듯 옷차림이 헝클어져 있었다. 하지만 온지유의 마음은 여전히 차가웠다.집에 돌아올 시간이 없다며?어디 있는지도 못 알려준다며?떠난다니까 이제 와서 이렇게 다급하게 나타나다니. 이미 상처는 줄대로 다 줘놓고 뭐가 그렇게 급한 걸까.온지유는 차갑게 말했다.“집으로 돌아갈 거예요. 여기는 내 집이 아니잖아요.”“넌 내 아내야. 내 모든 것이 너의 거니까 이 집도 네 집이지.”여이현이 다시 말했다.온지유는 비웃듯 그를 쳐다봤다.“우리 이혼했잖아요? 기분 좋으면 다 내꺼고, 내키지 않으면 자산 몇억과 집을 가져가고? 그래도 이 정도면 이득 본 셈이네요 뭐. 그런데 아쉽게도 남자의 말은 믿을 게 못 되는 걸요. 다 거짓말일 뿐이니까.”
온지유가 듣고 싶었던 말은 이런 게 아니었다. 찝찝한 기분이었지만 그녀는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설마 당신 없이는 혼자서 못 살거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당신이 노승아와 있을 때도 난 잘만 살았어요. 아이 때문에 걱정하는 거라면 내겐 친구도 있고 부모님도 있어요. 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날 거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요.”온지유는 단호했다.여이현은 온지유와 아이의 이후의 삶이 걱정되었다.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은 행복할지 몰라도 언젠가 자신이 변해 그녀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르는 괴물이 된다면 그때야말로 온지유에게 가장 큰 고통을 주게 될 것이다.불편한 진실이어도 현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온지유의 냉정한 얼굴을 보고 여이현도 자신의 결정이 틀린 건 아닐지 두려웠다.자신의 결정이 온지유를 더 아프게 할까 봐.“본가로 가려는 거야?”여이현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맞아요.”온지유가 짧게 대답했다.여이현은 온지유의 배를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하지만 꼭 몸조심해. 다치지 말고. 위험하니까 당분간은 자주 나가 돌아다니지 말고. 아이가 태어날 때 내가 곁에 있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최선의 준비를 해둘게.”온지유는 여이현이 더 잡아줄줄 알았다.하지만 정작 그의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마지막 인사처럼 들리는 게 아닌가.온지유는 참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당신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네가 정 가고 싶다면 말리지 않을게.”여이현은 여전히 담담하게 말했다.“백지희 씨가 너를 데려다줄 거지만 내 사람들도 따라가서 네가 안전하게 집에 도착하는 걸 확인해야겠어.”여이현은 그 이상 아무것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고 달래지도 않았다.그의 태도에 온지유의 화는 더 커졌다.“좋아요, 그럼 비켜 주세요!”온지유의 목소리는 차가웠다.여이현은 눈치있게 한발 물러섰다. 온지유는 그 순간 차 문을 세게 닫아버리고는 쳐다보지도 않고 차가운 눈빛으로 앞만 바라봤다.백지희는 그 옆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그녀는
일주일 만에 권다솔은 많은 일을 해냈다.그녀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업무 태도는 이미 팀장의 인정을 받았다.“내일 고객을 만나러 가는데 지연 씨도 같이 가죠.”“네? 제가 정말 가도 되나요?”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이전에 그녀는 여이현의 비서로 일했던 경험이 있다 보니 혼자서도 충분히 고객을 만나러 갈 수 있었다.하지만 회사에 들어온 지 겨우 일주일 만에 아직 수습 기간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 안에 고객을 만날 기회를 준 걸 봐서는 팀장이 그녀를 얼마나 인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물론이죠. 지연 씨의 업무 능력을 지켜본 결과 저보다 더 뛰어난 것 같은데요. 고객을 만나는 건 당연히 가능하죠.”팀장은 그녀를 전적으로 믿었다.고객을 만나기 전에는 많은 준비 작업이 필요했다. 팀장은 프로젝트 자료를 모두 그녀에게 메일로 보내 주었다.권다솔은 그렇게 오랜만에 메일을 열게 되었다.팀장이 보낸 파일 외에 배진호가 보낸 메일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삭제하려 했지만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메일을 열어버렸다.이미 열린 김에 그가 무슨 말을 보냈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다가 마지막 부분을 보게 되었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다.그날 밤 그녀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 배진호란 말인가?그럼 남태건이 했던 말은 또 무슨 뜻이지?권다솔은 배진호를 차단 목록에서 해제하려는 순간 아빠가 전화를 걸어와 그녀를 사무실로 호출했다.문을 열자마자 화가 잔뜩 난 권용민의 얼굴이 보였다.“아빠,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화가 나셨어요?”권다솔은 그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진정하세요. 저녁에 제가 맛있는 음식을 해줄게요.”“나랑 네 엄마가 전에 정말 어리석었어. 어린애한테 속아서 완전 농락당했지 뭐니. 네가 그 녀석이랑 엮이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꼴이었을 거야.”남태건 얘기만 나오면 권용민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의 이름조차 부르고 싶지 않았다. 권다솔이 의아해하자 그는 두툼한 서류 뭉치를
그녀는 단순히 남태건을 비웃은 게 아니라 자신마저 비웃었다.정말로 몇 번이나 사람을 너무 쉽게 믿었다.“신뢰란 누가 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쟁취하는 거예요. 이제 그만 가세요. 부모님께 무릎을 꿇는 건 괜찮지만 저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건 정말 아니에요.”“권다솔!”남태건은 다시 손을 뻗어 그녀의 옷자락을 꼭 붙잡았다.그는 손에 힘을 가했다. 혹시라도 손을 놓는 순간 그녀를 영원히 잃게 될까 봐 두려웠다.“어서 돌아가요. 앞으로 태건 씨만의 인생을 사세요. 저도 제 인생을 살 거예요. 이미 말했잖아요. 우리 둘은 친구조차 될 수 없다고.”권다솔은 아예 외투를 벗어버렸다.남태건의 손에는 외투만 남아 있었고 아무것도 붙잡지 못했다.그는 그녀가 부모님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김영은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지만 하려던 말을 애써 삼켜버린 채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집에 돌아온 권다솔은 부모님께 아까 얘기는 하지 않고 곧바로 회사 얘기를 꺼냈다.“아빠, 엄마. 오늘 오후부터 바로 회사로 가서 일하고 싶어요. 직책은 정해 놓으셨어요?”“굳이 이렇게 서두를 필요 없어. 이틀 정도 푹 쉬어라.”비록 권용민은 모든 준비를 마쳤지만 막상 그녀가 출근하려 하니 마음이 약해졌다.아직 회사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라면 자유롭게 놀 수 있었지만 정식으로 출근하게 되면 다른 직원들처럼 매일 출근 도장을 찍어야 했고 함부로 결근할 수 없는 생활이 될 터였다.“아빠 머리에도 이제 흰머리가 있네요.”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흰머리를 뽑아주었다.권용민은 여전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몇 가닥뿐이야. 나도 거울 보면서 봤어. 내 나이에 흰머리 있는 건 정상이지.”“관리를 잘하면 아빠 나이엔 여전히 까만 머리를 유지할 수 있어요. 제가 걱정되는 건 알겠지만 언제까지 아빠 엄마의 보호 아래서 살 수는 없잖아요. 이제는 제가 아빠 엄마를 돌볼 때예요.”그녀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권다솔의 강력한 요청에 권용민
“병이 있는 사람이 치료를 받는 건 생명을 연장하려는 거고 병이 없는 사람이 치료를 받는 건 장수하는 사람이 목을 매달겠다는 거나 다름없지. 그냥 속이려고 한 말이야.”정미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자식은 결국 부모를 이기지 못하는 법이지.’그는 원래 배진호가 이미 의료비를 납부했다고 말하려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돈을 냈건 안 냈건 그녀가 병이 없는 이상 제대로 된 환자처럼 치료를 받을 리 없었다.그리고 배진호에게 의료비를 환불하면 명백히 어떤 속임수가 있다는 걸 드러내는 꼴이었다.고민 끝에 그는 묘안을 생각해 냈다.“이렇게 할까? 매일 약을 가져다줄 테니 먹지 말고 수액도 맞지 마. 그럼 혹시라도 네 아들이 물어보면 우리 둘 다 곤란하지 않을 거야.”“그래, 네 말대로 할게. 역시 의사라 그런지 머리가 참 좋네.”그녀는 자신에게 큰 재앙이 닥쳐오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비행기에서 내린 뒤 권다솔은 바로 집으로 향했다. 남태건은 평소처럼 손에 크고 작은 선물을 들고 그녀의 부모님께 극진히 대하고 있었다.그녀의 부모님은 예전과 달리 그에게 예의를 갖췄지만 거리감을 유지하며 말했다.“태건아, 우리한테 이런 거 줄 필요 없어.”“마음만 고맙게 받을게. 돈이 꽤 들었을 텐데 우린 답례로 줄 것도 없으니 그냥 안 받는 게 낫단다.”남태건은 말에 숨긴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들은 지금 그를 전혀 반기지 않았고 자주 만나는 것도 원치 않았다. 결혼 얘기는 더더욱 바라지 않는 듯했다.그가 더 애써 만회하려 하면 할수록 김영은은 더욱 단호하게 말했다.“그만 돌아가.”“제가 뭐가 부족한지 말씀만 해주세요. 다 고치겠습니다. 제발 이렇게 단번에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남태건은 무릎을 꿇으며 애원했다.너무 갑작스러운 나머지 둘은 깜짝 놀란 채 그를 일으키려 했다.하지만 남태건은 끝까지 무릎을 꿇고 꼼짝하지 않았다.“만약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저를 쫓아내신다면 계속 무릎 꿇고 있을 겁니다.”“태
정미진은 순간 당황했다.그동안 배진호가 모든 걸 양보했던 이유는 그녀가 병에 걸렸기 때문이었다.만약 그가 진실을 알게 된다면 분명 크게 소란을 피울 것이고 결국 권다솔과 다시 만날 가능성도 있었다.이런 가능성을 떠올리자 정미진은 두 눈이 깜깜해졌다.“진호야, 엄마 말 좀 들어봐.”“사실이 이렇게 뻔히 드러났는데 뭘 더 설명하시겠다는 거예요? 나이도 있으신 분이 어찌 이렇게 어린애처럼 구세요?”배진호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걸로 농담하면 안 되죠.”의료 기록에는 명확히 병명이 적혀 있었고 게다가 이미 전문가와 상담한 후였다.더 이상 시간을 끌면 안 되는 병이었다.지금 수술을 받으면 완치 후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지만 조금만 더 늦추면 수술해도 병상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그는 정미진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내가 이러는 것도 다 너 잘되라고 그런 거야. 네가 내 속을 좀 덜 썩이면 이렇게까지 거짓말할 필요도 없잖니.”정미진은 더 이상 변명이 통하지 않자 모성애라는 명분을 내세워 배진호를 압박하려 했다.장황하게 이유를 늘어놓으며 말했지만 그는 예상과 달리 소리를 지르거나 격하게 화내지도 않았다. 그저 병상 앞에 서서 슬픈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엄마가 원하던 건 전부 이루셨잖아요. 이젠 제발 말 좀 들으세요.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치료받으세요.”그제야 정미진은 깨달았다.그는 그녀가 수술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알아냈지만 그녀가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몰랐다.‘그거면 됐지!’그녀는 계속해서 이 핑계로 배진호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강요할 수 있었다.정미진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그럼 권다솔과 이혼해. 네가 이혼 서류를 엄마 앞에 가져오는 날부터 엄만 치료받을게.”“이미 이혼 절차는 끝냈어요. 지금은 이혼 숙려 기간일 뿐이에요.”배진호는 차분히 설명했다.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말해야 했다. 혹시라도 그녀가 화를 내면 몸을 전혀 돌보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눈앞에 이혼 서류가
“도대체 누가 밖에서 헛소문을 퍼뜨린 거야! 진짜 사람을 이렇게 괴롭혀도 되는 거니?”김영은은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 질렀다. 그녀는 소문을 퍼뜨린 계정을 찾아내면 꼭 고소해서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다.“불난 집에 부채질한 거겠죠. 전 누구 소행인지 알 것 같은데요.”권다솔은 이미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과연 그 사람 말고 누가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권용민은 다급하게 물었다.“누군데? 아빠한테 말해봐. 가만두지 않겠어.”“남태건이요.”권다솔은 덤덤하게 내뱉었다.순간 전화 너머로 정적이 흘렀다.둘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믿기 어렵다는 눈빛이었다.남태건은 평소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고 권다솔에게도 진심으로 대했으며 둘을 친부모처럼 공경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이런 일을 뒤에서 꾸밀 수 있단 말인가?권다솔 역시 부모님이 쉽게 믿지 않을 걸 알았다. 그래서 한 마디 덧붙였다.“태건 씨는 늘 저와 결혼하고 싶어 했어요. 우리 집 문을 한참이나 두드리면서 이웃들까지 다 소란스럽게 만들었고 제가 거절하자 엄마, 아빠를 찾아갔잖아요. 지금은 엄마, 아빠까지 거절했으니 극단적인 행동을 벌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죠.”“그런데, 다솔아, 우리한테 증거가 없잖아. 증거도 없이 태건이를 탓하는 건 너무 불공평한 것 같아.”그녀의 어머니는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남태건을 오해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만약 정말로 남태건이 이런 일을 저질렀다면 지금까지 꾸며낸 이미지로 그들을 속여 왔다는 뜻이었다.그런 사람을 딸에게 소개하려 했다는 사실에 그녀는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결국 권용민이 결정을 내렸다.“좋아. 다솔이 넌 밖에서 편히 놀다가 돌아와. 엄마랑 아빠가 조사해 볼게. 만약 정말로 태건이의 소행이라면 앞으로 우리 집 근처에도 못 오게 할 거야.”“아니에요. 저도 티켓 끊고 바로 돌아갈게요. 엄마, 아빠가 제 일 때문에 계속 신경 쓰시는 게 너무 죄송해요. 밖에서 논다고 해도 마음이 편치 않을 거예요.”그녀는
배진호는 이 시간에 잠들지 않았다.그는 이미 조사 자료를 손에 넣은 채 한 장 한 장 넘겨 보고 있었다.마지막까지 다 보고 난 그는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어머니의 수술은 가짜였지만 병은 진짜였다. 그의 어머니는 현재 폐암 초기 상태였고 심장 상태도 별로 좋지 않았다. 게다가 두 병이 함께 겹친 상황이라 치료하기 쉽지 않을 게 분명했다.이런 상황인데도 어머니는 수술을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계속해서 권다솔과 헤어지라고 압박하고 있었다.배진호는 내일 어머니와 진지하게 이야기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잠 자기 전 시간을 확인하려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남태건이 이 시간에 보낸 도발적인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그 순간, 배진호는 온몸의 혈액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았다.남태건과 권다솔이 결혼한다고?이미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면 틀림없이 사실일 것이다.하지만 이게 권다솔 본인의 뜻인지 아니면 그녀의 부모님께서 결정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아마도 전자일 가능성이 컸다. 권다솔의 부모님은 딸의 의견을 존중하는 분들이다. 만약 그녀가 원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강제로 결혼 시킬 리 없었다.‘왜 이런 일은 항상 나한테만 일어나는 거지?’그는 권다솔을 포기할 수도 그렇다고 그녀의 결혼을 망칠 수도 없었다. 이제 두 사람은 정말 인연이 아닌 것 같았다. 그만 집착을 버리고 놓아주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잠들기 전, 배진호는 권다솔에게 메일 한 통을 보냈다. 메일의 마지막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난 술집에서의 그날 밤을 잊을 수 없어. 네가 내 목에 팔을 두르고 내 이름을 부르던 그 순간을. 다솔아, 네가 정말 날 싫어한다면 이 메일을 삭제해 줘. 앞으론 더 이상 널 방해하지 않을게. 하지만 언제든 네가 날 찾고 싶다면 난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거야.”배진호는 권다솔이 메일을 확인하는 습관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 메일을 발견할 때쯤이면 아마 한참 시간이 흐른 뒤일 것이다.어쩌면 그녀는 이 메일을 평생 보지 않을
남태건은 그들이 참으로 안타깝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사람과 끝까지 함께하지 못한 결말이란 결국 이런 것이었다.그는 절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남태건은 자신이 권다솔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다. 결혼 후에는 매일 밤 집으로 돌아와 그녀와 오붓한 시간을 보낼 것이고 만약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셋이 함께 여행을 다니며 행복한 가정을 꾸릴 것이다.그는 자신의 결혼 생활이 부모님의 결혼 생활보다 훨씬 더 행복하리라 확신했다.“제 결혼 문제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마세요. 오늘 두 분을 부른 이유는 단지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며칠 안에 양가 부모님이 만나서 함께 식사할 테니 저의 체면을 깎지 말아 주세요.”말을 마친 남태건은 몸을 돌려 떠났다.그는 더 이상 부모와 할 이야기가 없었다.이후 그는 권용민에게 연락해 식사 날짜를 논의하려 했다. 그러나 권용민은 미안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하네. 우리 다솔이가 여행을 떠나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네. 식사 약속은 다음에 다시 잡도록 하지.”그는 권용만의 말 속에서 거절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다음에 다시 논의하자는 한마디는 구체적인 날짜를 말하지 않았기에 즉 식사 약속을 잡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아버님, 다솔이가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양가 부모님께서 먼저 만나도 되지 않겠습니까?”그러나 남태건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이미 자신의 부모님께 이야기를 전했는데 이 약속이 무산된다면 그의 부모님께서 어떻게 생각하겠는가?그러나 권용만운 딸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여겼다.“태건아, 양가의 만남은 중요한 일이라 서두를 필요 없어. 다솔이가 돌아오면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하자. 이런 일은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네.”남태건은 어떻게 전화를 끊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그가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건 권다솔이 그를 피하려고 멀리 떠났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부모님마저 이전처럼 친절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그렇다면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권다솔, 모든 건
그리고 엄마가 아프다는 시점도 너무 절묘했다. 설마 아픈 척하는 건가?이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배진호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떴다. 반드시 철저히 조사해야 했다.그가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는 잠에서 깨어났다.아들의 의심을 불러일으킨 것도 모른 채 여전히 의사와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내 아들 앞에서 꼭 내 병이 심각한 것처럼 말해줘야 해. 안 그러면 걔 마음이 여전히 그 여자한테 기울어 있을 거야.”“걱정 마. 동창끼리 네 계획을 망치기라도 하겠어?”의사는 가슴을 두드리며 장담했다.“내가 다 맡을 테니 신경 쓰지 마. 그런데 사실 나도 부탁이 하나 있는데 우리 아들이 유학을 가야 하는데 돈이 조금 모자라거든. 좀 도와줄 수 있어? 올해 보너스 나오면 바로 갚을게.”정미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흔쾌히 승낙했다.어차피 그녀는 돈에 쪼들리지 않았으니.배진호가 비서로 일할 때부터 매달 월급 일부를 그녀에게 보내왔고 이후 그가 회사를 차려 독립하면서 더 많은 돈을 보내왔다.그녀는 사고 싶은 것을 마음껏 사면서 이제는 좋은 며느리를 얻는 데만 집착하고 있었다.“돈은 천천히 갚아도 돼. 여유가 생기면 갚아. 동창 사이인데 내가 너를 믿지 않겠어?”그녀의 말에 의사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병실을 나선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사람이 참 복에 겨워 사는 줄 모르네. 배진호 같은 아들에, 그토록 훌륭한 며느리까지 얻었는데 뭐가 불만이야? 게다가 그 집안의 돈은 몇 대가 써도 부족함이 없는데 굳이 문제를 만들 필요가 있나? 나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야. 그냥 일도 때려치우고 집에서 술이나 한잔하면서 낚시도 하고 가끔은 카드놀이도 하면서 살겠지. 생각만 해도 얼마나 여유롭겠어?”하지만 그는 정미진이 아니었고 방관자로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다음 날 아침, 권다솔은 간단히 짐을 챙긴 후 캐리어를 끌고 여행사로 향했다.그곳에는 대형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고 모든 인원이 모이자 운전기사는 공항으로
지금 그의 모습이 헌신짝이랑 다를 게 뭐가 있지?권다솔 때문에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을까?배진호는 전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그는 여전히 석규리를 등진 채 그녀를 무시했다.석규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한 통의 메시지를 보낸 뒤 불과 30분도 채 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가 직접 나타났다.정미진을 본 순간 배진호는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엄마! 몸도 안 좋으신데, 게다가 이제 막 수술을 끝내셨잖아요. 퇴원하시면 어떡해요?”“내가 와서 다행이지! 아니면 네가 여기서 얼마나 더 멍청하게 서 있었을지 몰라. 진호야, 엄마가 곧 죽게 생겼는데 너 정말 엄마를 좀 편하게 보내줄 수 없는 거니?”정미진은 배진호의 이마를 꾹 눌러가며 안타까워했다.권다솔의 가정환경이 조금이라도 평범했다면 돈으로 해결했을 것이다.하지만 권다솔은 권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정미진이 아무리 손을 뻗어도 권씨 가문까지 닿을 수 없었기에 결국 배진호에게만 압박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엄마가 부탁할게. 죽기 전에 몇 날이라도 좀 조용히 지낼 수 있게 해줘. 더 이상 문제 일으키지 말고 권다솔과 깨끗이 끝내. 네가 꼭 여기에 남아 있겠다면 엄마도 너랑 같이 있을 거야.”정미진은 외투를 벗어 석규리의 손에 건넸다.그녀는 안에 얇은 옷만 입고 있었다.석규리가 옷을 다시 정미진의 어깨에 덮어주려고 했지만 정미진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엄마가 아들 교육을 제대로 못 시킨 탓에 내 아들이 한밤중에 여기서 바람 맞고 있잖아. 나만 병실에서 잘 먹고 편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어?”“엄마, 정말 제가 무릎이라도 꿇어야 멈추시겠어요?”배진호의 눈에는 이미 생기가 없어진 채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봤다.역시나 자신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진호야, 엄마는 네가 무릎 꿇으라고 이러는 게 아니야. 엄마가 원하는 건 네가 권다솔과 완전히 끝내는 거야. 이게 엄마의 마지막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