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이현은 노승아가 감옥에 갇히는 건 너무 쉽게 넘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자신의 손으로 그녀를 직접 처리하고 싶었다“아직 머리는 굴러가나 보네.”여이현이 비웃으며 말했다. 마치 그녀의 운명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저승사자처럼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최후통첩을 날렸다.“네 인생도 여기서 끝이야!”“아니, 안 돼요!”노승아는 감정이 격해져 소리쳤다.“함부로 날 가두는 건 불법이에요. 이렇게 하면 오빠도 쉽게 넘어가지 못할걸요!”그녀는 여이현이 어떤 무리수를 둘까 봐 두려웠다.감옥에 보내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 그가 자신을 가둔다면 그 결과는 더욱 참혹할 것이 분명했다.순순히 잡혀가서 고통받을 수는 없다.차라리 감옥에 갇히는 게 나을 것이다.그렇게 생각하니 노승아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도망쳐야만 했다.노승아는 곧바로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다.여이현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전혀 말리지 않았다. 그는 노승아가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의 입가에는 잔혹한 미소만이 떠올랐다.그 모습은 어떤 살인마보다도 더 오싹했다.노승아는 미친 듯이 달렸다. 주변을 둘러볼 여유조차 없었다.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그저 한 방향으로 내달렸다.오랫동안 뛰다 보니 온몸에 힘이 빠졌지만 여이현에게 잡힐까 두려워 멈출 엄두도 나지 않았다.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고 둘러보니 주위는 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어 마치 미로와 같아 도무지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하늘 높이 솟은 나무들이 빽빽하게 서 있어 햇빛조차 들어오지 못했다.그리고 앞쪽에는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절벽이 펼쳐져 있었다.‘여긴 대체 어디지?’노승아는 점점 더 불안감과 혼란스러움에 사로잡혔다.“꺄악!”부주의로 돌에 걸려 노승아는 그만 땅에 넘어져 주저앉고 말았다.손이 땅에 닿으면서 날카로운 풀 가시가 그녀의 손바닥을 찔렀다.순간 피가 흘러나왔다.온몸은 흙투성이가 되었고 머리카락은 땀으로 엉겨 붙어 있었으
이곳의 경비들은 용경호와 가까운 사이었기에 온지유는 먼저 그들에게 물어보기로 했다.“대장님은 아직 귀가하지 않으셨습니다. 언제 돌아오실지는 저희도 알지 못합니다.”경비가 대답했다.“어디로 가셨는지 아세요?”온지유가 다시 물었다.“저희는 잘 모릅니다.”묻나 마나 한 답변이었다.아무런 해결책도 되지 않았다.당장 곁에 여이현이 필요한데 그는 하필 지금 온지유의 옆에 없었다.시간이 지나면서 화도 절반은 누그러졌고 제대로 설명만 해준다면 온지유도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하지만 여이현은 기어코 그 쉬운 일을 하려 하지 않았다.더 이상 온지유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사랑하지 않더라도 말은 똑바로 해야 하지 않을까.온지유는 이런 애매한 태도가 가장 싫었다.그래서 다시 물었다.“용경호 씨에게 전화해서 어디에 있는지 언제 돌아오는지 물어봐 주세요!”“알겠습니다, 사모님.”경비는 즉시 온지유의 요청대로 행동했다.온지유는 체면을 지키려 에둘러서 여이현의 행방을 알아내고자 했다.전화가 걸렸다.온지유가 옆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경비는 질문을 던졌다.전화를 끊은 후 그가 말했다.“사모님, 대장님은 오늘 밤에는 돌아오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어디에 있는지는 물어보았나요?”“말씀해 주지 않았습니다.”온지유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 마음이 답답했다.어디 있는지 그렇게 알려주고 싶지 않은 걸까?노승아를 풀어준 이후로 그는 행방을 감춘 채 전화도 받지 않았다.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온지유는 실망과 함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런 모호한 상황이 정말 싫었다.경비는 온지유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물었다.“사모님,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온지유는 차가운 표정으로 매우 불쾌한 듯 말했다.“저쪽이 어디 있는지도 말해주지 않는데 내가 어디를 가든 이젠 상관없잖아요.”“사모님, 이미 늦은 시간입니다. 이렇게 갑자기 나가시면 저희는 대장님께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경비가 걱정스럽게 말했다.온지유는 헛웃음을 지
“제가 떠나는 건 이현 씨가 돌아오지 않아서가 아니에요.”온지유는 이미 충분히 상처받았다. 여이현과 함께한 이 몇 년간 온지유는 그의 신뢰를 얻지 못했고 쉽게 깨지고 이어 붙이는 관계에 지쳤다. 그의 무관심에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이제껏 너무 쉽게 여이현을 용서했기에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일 테다.이제 더 이상 미련을 가져서는 안 된다.“사모님, 제발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경비는 거의 무릎을 꿇고 사정할 기세였다.하지만 온지유는 이미 인내심이 바닥났다. 경비들이 무슨 말을 해도 떠나기로 결심했다.경비들이 필사적으로 막아섰지만 온지유는 꿋꿋이 배를 안고 자리를 떠나려 했다.이렇게 나오면 그들은 당연히 앞을 막을 수 없었다.온지유는 당당히 떠났다.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경비들은 그녀를 뒤따라가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온지유는 걸어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전화를 걸어 사람을 부르기로 했다.아예 친정으로 돌아가려 마음먹었다.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백지희가 차를 몰고 도착했다.“지유야, 웬일이야? 얼마 전에 겨우 화해하더니 또 떠나려는 거야?”백지희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여이현이 온지유를 사랑한다는 건 확실한데 고작 며칠 만에 이렇게 되어버리다니 믿기지 않았다.온지유는 차 문을 열고 타며 그들을 등졌다.“일단 출발하자. 천천히 이야기할게.”지금 온지유는 여이현과 관련된 사람들만 봐도 불쾌하고 짜증이 났다.사랑이 깊으면 미움도 깊어진다는 말을 이제야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백지희는 일단 시동을 걸고 그곳을 벗어났다.온지유는 차 안에서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나올까 봐 한참 동안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그리고 나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현 씨가 노승아를 풀어줬어.”“뭐?”백지희는 깜짝 놀랐다.“말도 안 돼! 노승아가 너를 그렇게 괴롭혔는데? 어릴 적에도 분명히 너에게 뭔가 손을 댔을 거야. 그런 사람은 감옥에 있는 게 당연한 건데 이현 씨는 왜 그런 짓을 한 거래? 군인이고, 법을 아는 사람인데
“알겠어.”백지희는 더 캐묻지 않고 온지유를 집에 바래다주기로 했다.온지유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며 허전한 마음을 달랬다.사랑이란 바로 이런 거일지도 모른다. 상대의 사소한 행동에도 신경 쓰이고 자신의 보잘것 없는 마음이라도 소중히 여겨주길 바라는 것.하지만 현실은 상상과는 너무 달랐다.그때, 백지희가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았다.온지유는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지만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했다.“아니 대체 왜 길을 가로막고 있는 거야! 한두 대도 아니고 이렇게 많이!”백지희는 화가 잔뜩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늦은 밤에 이런 상황이 벌어지니 정말 기가 막혔다. 다행히 백지희의 운전 실력이 좋아 사고는 나지 않았다.온지유는 차에 비치는 강한 불빛 때문에 눈이 부셔 앞이 보이지 않았다.그 탓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이윽고 갑자기 차 문이 열렸다.백지희는 한바탕 욕이라도 하려다가 나타난 사람을 보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만 같이 집으로 돌아가자. 무슨 일이든 집에서 얘기하자고. 나 이제 돌아왔으니까.”여이현이 차 옆에 서서 차분한 목소리로 온지유에게 말했다.그 목소리를 듣고 온지유는 고개를 들었다.그녀의 눈앞에는 여이현의 얼굴이 있었다. 그는 꽤 급하게 달려온 듯 옷차림이 헝클어져 있었다. 하지만 온지유의 마음은 여전히 차가웠다.집에 돌아올 시간이 없다며?어디 있는지도 못 알려준다며?떠난다니까 이제 와서 이렇게 다급하게 나타나다니. 이미 상처는 줄대로 다 줘놓고 뭐가 그렇게 급한 걸까.온지유는 차갑게 말했다.“집으로 돌아갈 거예요. 여기는 내 집이 아니잖아요.”“넌 내 아내야. 내 모든 것이 너의 거니까 이 집도 네 집이지.”여이현이 다시 말했다.온지유는 비웃듯 그를 쳐다봤다.“우리 이혼했잖아요? 기분 좋으면 다 내꺼고, 내키지 않으면 자산 몇억과 집을 가져가고? 그래도 이 정도면 이득 본 셈이네요 뭐. 그런데 아쉽게도 남자의 말은 믿을 게 못 되는 걸요. 다 거짓말일 뿐이니까.”
온지유가 듣고 싶었던 말은 이런 게 아니었다. 찝찝한 기분이었지만 그녀는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설마 당신 없이는 혼자서 못 살거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당신이 노승아와 있을 때도 난 잘만 살았어요. 아이 때문에 걱정하는 거라면 내겐 친구도 있고 부모님도 있어요. 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날 거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요.”온지유는 단호했다.여이현은 온지유와 아이의 이후의 삶이 걱정되었다.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은 행복할지 몰라도 언젠가 자신이 변해 그녀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르는 괴물이 된다면 그때야말로 온지유에게 가장 큰 고통을 주게 될 것이다.불편한 진실이어도 현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온지유의 냉정한 얼굴을 보고 여이현도 자신의 결정이 틀린 건 아닐지 두려웠다.자신의 결정이 온지유를 더 아프게 할까 봐.“본가로 가려는 거야?”여이현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맞아요.”온지유가 짧게 대답했다.여이현은 온지유의 배를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하지만 꼭 몸조심해. 다치지 말고. 위험하니까 당분간은 자주 나가 돌아다니지 말고. 아이가 태어날 때 내가 곁에 있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최선의 준비를 해둘게.”온지유는 여이현이 더 잡아줄줄 알았다.하지만 정작 그의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마지막 인사처럼 들리는 게 아닌가.온지유는 참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당신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네가 정 가고 싶다면 말리지 않을게.”여이현은 여전히 담담하게 말했다.“백지희 씨가 너를 데려다줄 거지만 내 사람들도 따라가서 네가 안전하게 집에 도착하는 걸 확인해야겠어.”여이현은 그 이상 아무것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고 달래지도 않았다.그의 태도에 온지유의 화는 더 커졌다.“좋아요, 그럼 비켜 주세요!”온지유의 목소리는 차가웠다.여이현은 눈치있게 한발 물러섰다. 온지유는 그 순간 차 문을 세게 닫아버리고는 쳐다보지도 않고 차가운 눈빛으로 앞만 바라봤다.백지희는 그 옆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그녀는
“게다가 노승아를 풀어주러 나가서는 집에 돌아오지도 않고 말이야. 여기에 내가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지 않아? 조금 짜증을 내더라도 받아줄 수 있는 부분이잖아. 그런데 이현 씨는 매번 사라지기만 해. 이번엔 따라와서도 본가에 돌아간다는 나를 그냥 보내버리고. 이건 그냥 손을 놓은 거나 마찬가지 아니야?”온지유는 여이현의 뜻을 눈치챘다. 눈에는 눈물이 차올랐다. 다음 순간에는 바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온지유는 애써 흘러나오는 눈물을 참았다. 더 이상 다른 사람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백지희는 아직도 납득 되지 않았다.“일단 돌아가서 며칠 푹 쉬고 그 뒤에 또 어떻게 나올지 보자. 이현 씨가 단순히 지유 네 선택을 존중한 거였을 수도 있지 않아? 혹시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면 네가 더 싫어할까 봐. 이현 씨도 너의 생각을 읽을 수는 없으니까 엇갈릴 수도 있는 거지. 하지만 서로가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아무 문제 없을 거야.”“그래, 문제없을 거야.”온지유는 살짝 웃음을 떠올렸다.“하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이현 씨가 져줘야겠어.”“아이고, 됐어. 그만 생각해. 돌아가서 자고 내일 아침 일어나면 다 괜찮아 질 거야.”백지희가 온지유를 달랬다.온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속상하더라도 생활은 계속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예전 이혼 소동이 있었을 때도 잘 지나오지 않았던가.“대표님, 사모님은 이미 떠나셨습니다.”여이현은 그 자리에 굳은 것처럼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온지유가 떠난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며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그 모습을 견딜 수 없었던 용경호가 다가가 귀띔을 했다.여이현은 그제야 정신이 돌아오고 고개를 돌렸다.“그래, 돌아가자.”여이현의 목소리는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딘가 정신이 팔려 있는듯 공허했다.용경호가 그 모습을 눈치채고 말했다.“대장님, 제가 한마디만 할게요. 사모님이 신경 쓰이신다면 한 두 마디라도 더 좋게 말씀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조금 기분만 풀어 드리면 사모님도 함께
이 일에 대해 부모님은 이미 한번 온지유를 나무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래도 하나뿐인 소중한 딸이었기에 겉으로는 나무란다고 하더라도 속으로는 걱정이 앞섰다.더군다나 둘은 곧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되게 생겼으니 말이다.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모른다. 앞으로 둘이 곁에서 지켜주지 못하더라도 지유가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그랬기에 모두가 흔쾌히 받아들였다.“아니에요, 엄마.”온지유가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그땐 아직 준비가 덜 돼 있어서 말 못 했던 거에요. 저도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온지유가 바로 뒤에 백지희만 따라 나오자 정미리는 바로 눈치를 채고 물었다.“얘, 설마 또 이현이랑 싸운 건 아니지?”정미리의 추측은 맞았다. 하지만 온지유는 그 일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전 집에 들어도 오면 안 되나요 뭐? 자꾸 이상한 추측 하지 마세요. 운수 없게요.”“우리도 걱정돼서 그러는 거지.”정미리가 대답했다.“우리는 네가 잘 지내기만 하면 돼. 배에 아기도 있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다면 나와 네 아버지가 편히 발 뻗고 잘 수 있겠니? 그러니까 작은 일이라도 캐묻게 되는 거지. 걱정된단 말이야.”“아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집에 와보고 싶었어요.”온지유는 그래도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 이실직고하면 부모님은 꼭 여이현에게 의견이 생길 것이고 사이가 더 어색해질지도 몰랐다.여이현에게도 어느 정도 체면을 남겨주고 싶었다.“그럼 됐다.”정미리는 이미 여이현을 시험해 봤다. 사흘도 안 지나서 지유가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면 정미리의 안목도 녹슨 것이다.두 사람의 감정과 관련한 물음은 조심스럽게 해야 했다,백지희는 온지유를 바래다주고 그들과 몇마디 나누고는 돌아갔다.모두가 백지희에게도 남으라고 요청했지만 백지희는 따로 할 일이 있다며 사양했다.마지막으로 다들 백지희를 따뜻하게 배웅해 줬다.“야식 먹을래?”정미리가 온지유에게 물었다.“임신하면 배가 자주 고플 테니까 뭐 먹고 싶은
“그래요?”온지유는 쉽사리 긍정할 수 없었다. 기억이 흐릿했기에 지금 생각 나는 것들도 충격을 받아 각인 된 단편기 억일 뿐이니 말이다.온지유는 자신이 대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온경준은 한숨을 푹 쉬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네 과거를 숨긴 건 정말 미안해. 네가 실종되었을 때 우리도 경찰에 신고했었어. 하지만 경찰도 네가 학교에서 실종된 이후로 행방을 못 찾았다고 했고, 몇 개월을 찾았지만 결국 네가 혼자 집으로 돌아왔지. 우리는 네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네가 돌아왔을 때 너는 문 앞에 상처투성이인 몸으로 웅크리고 앉아 있었어. 의미 모를 말을 계속 중얼거리면서 말이야. 그리고 곧 쓰러져서는 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정상으로 돌아왔었어. 그때의 일은 다 잊고 다른 사람의 기억을 제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지.”그때의 일은 부모님에게도 암흑한 시간이었다.“네가 기억 해 내기 싫어 했고,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어. 네 상처를 다시 긁어 낼까봐.”그들도 마음이 아팠고 자책도 했다. 온지유는 그 기억을 잊어야만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 올 수 있었다. 그렇다면 부모로서는 당연히 딸이 즐겁게 생활 하기를 바랐으리라.최악의 경우도 대비하고 있었지만 밖에서의 온지유의 이미지도 지켜주고 싶었다.온지유가 다시 공포에 빠지지 않도록 그들은 온지유의 말을 다 따르기로 했다.이를 통해 상대적으로 더 끔찍한 일을 잊을 수만 있다면.온지유의 생활 속에서 잊힌 기억이든, 안 잊힌 기억이든 모두 온지유의 생각대로 맞춰줬다.그리하여 온지유가 생각하고 있는 그 가상의 이야기가 꾸며진 것이다.온지유는 그 말을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 구출 당한 기억이 그리도 생생한데 결국 그 모든 게 다 허상이었다니.그럼 진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중학 생활 중 정말 아무런 걸림돌도 없었단 말인가?부모님은 자신을 위해서라는 걸 잘 알고 있다.어린 여자아이가 오랜 시간 실종되고 또 그렇게 위험한 곳에서 홀로 도망쳐 나오다니. 온몸이 상처투
밖을 내다보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북적이던 거리가 이제는 적막이 흘렀다.지금은 퇴근 시간대라 노점상들이 한창 손님을 맞이하며 돈을 벌어야 할 때였다. 모두가 한꺼번에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건 말이 안 됐다.설령 그렇다고 해도 이 모든 게 남태건이 꾸민 짓이라는 결론밖에 나올 수 없었다.“너, 정말 비열하고 추잡하구나.”권다솔은 그에 대한 혐오감이 더욱 심해졌다.하지만 남태건은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칭찬 고맙다. 내가 노점상들한테 각각 200만 원을 줬거든. 이제 너한테 선택지는 한 가지야. 나랑 만나.”그는 그녀를 꼭 얻어야 했다.권다솔은 비웃음을 흘리며 손을 지퍼에 올렸다.“난 선택하지 않을 거야.”어찌 인간이 짐승과 어울리겠는가.그녀는 적절한 타이밍에 지퍼를 열어 호신용 스프레이를 꺼내려는 순간 남태건이 갑자기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녀를 끌어안았다.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은 채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너한테서 정말 좋은 향이 나는 거 알아? 다음 주에 네가 이혼하면 그날 바로 결혼하는 게 어때?”“꺼져!”그녀는 힘껏 뒤로 발길질하며 그를 걷어차려 했다.하지만 남태건은 그녀의 행동을 예상한 듯 순식간에 그녀의 다리를 잡은 채 손으로 더듬으며 말했다.“보아하니 너도 나랑 함께하고 싶어서 참을 수 없는 모양이네. 난 지금 바로 널 갖고 싶은데, 여기서 할까? 얼마나 짜릿하겠어?”그는 원래는 그녀에게 멋진 밤을 선사하려고 했다. 7성급 호텔에 장미로 덮인 침대와 로맨틱하게 촛불까지.하지만 그녀가 너무 말을 안 듣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원래 말 안 듣는 고양이는 잘 길들여야 발톱을 감출 줄 알게 되는 법이다.“남태건!”그녀는 화가 치밀어 오른 채 소리를 질렀다.“너 지금 무슨 짓 하는지 알아? 너 그러다 감옥 갈 거야!”그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종아리를 따라 손을 위로 더듬었다.“우리가 부부가 된 후에도 날 감옥에 보낼 수 있을까? 어쩌면 오늘이 지난 뒤 네 뱃속
그럼 처음부터 딱 잘라 거절하는 편이 나았다.김영은은 그녀의 편에서 단호하게 말했다.“그만 돌아가. 돈은 바로 계좌로 보낼게. 물건은 혼자 옮길 수 없을 테니 경호원을 불러서 도와줄게.”경호원이라는 말을 들은 남태건은 더욱 씁쓸해졌다.이 또한 은근히 그를 경고하는 것이었다. 만약 여기서 무슨 짓을 저지르더라도 집에는 경호원이 있으니 즉시 제압할 수 있고 그는 결국 쫓겨날 수밖에 없다는 의미였다.남태건은 마지막으로 권다솔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솔아, 잘 지내. 몸조심하고.”‘가급적이면 외출은 삼가는 게 좋을 거야’물론 남태건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그는 예전에도 권다솔을 스토킹한 적이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생각이었다. 기회를 보면서 그녀를 강제로 데려갈 계획이었다.그때 두 사람의 친밀한 사진이 인터넷에 퍼지게 되면 그녀의 부모님은 이를 악물고 승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사회는 여자에게 항상 더 가혹한 법이다.그녀의 부모님이 딸의 명예를 조금이라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결국 그를 사위로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남태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우리 딸, 이제 모든 물건은 돌려주었어. 앞으로 네가 하고 싶은 건 마음껏 해도 돼. 엄마, 아빠는 언제나 네 뒤에서 지켜줄게.”김영은은 그녀에게 힘을 북돋아 주었다.그녀는 김영은을 꼭 안아줬다. 아무래도 미리 대비하는 게 아무 준비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나았다.다음 날, 출근길에 권다솔은 가방 안에 호신용 스프레이 한 병을 넣었다. 여러 종류의 고춧가루로 만들어졌기에 아주 소량만으로도 사람을 울릴 수 있었다.하루 종일 별다른 일은 없었고 퇴근 후에 동료들과 근처 먹자골목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권다솔이 그중 한 골목 입구를 지나던 순간 옆에서 손을 뻗어와 그녀를 강제로 끌고 갔다.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눈앞에는 남태건이 서 있었다.그는 예전의 신사적인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엄마는 지금 병이 매우 심각해요. 아마 수술을 받는다 해도 남은 인생을 병상에 누워서 보내야 할 가능성이 커요.”배진호는 엄마에 대해 자업자득이라는 말밖에 할 게 없었다.처음에 권다솔은 그녀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매사에 세심하게 신경 써주고 자주 찾아뵈러 가서는 다양한 보신탕을 끓여주기도 했다.만약 그녀가 터무니없는 행동만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들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었다.그녀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말했다.“어쩌다 그렇게 됐어요?”분명 두 사람이 이혼하기 전만 해도 정미진은 건강에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다.그런데 얼마 되지도 않은 시간에 상황이 이렇게 악화될 줄은 몰랐다.“계속 아픈 척하다가 이제 진짜 병이 든 거죠. 악화 속도가 매우 빨라서 이미 치료의 최적 시기를 놓쳤어요.”배진호는 간단히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권다솔은 하마터면 꼴좋다고 말할 뻔했다.하지만 정미진은 어디까지나 그의 친어머니라는 점을 고려해 그만 삼켜버렸다.전화를 끊고 난 뒤 그녀는 혼자 방에 앉아 많은 생각에 잠겼다. 지금 정미진은 자신을 돌보는 것도 힘든 상황이었다. 비록 여전히 두 사람의 관계에 간섭하고 싶어 할지라도 이제는 그럴 힘조차 없었다.이런 상황에서 과연 이혼해야 할까?그녀는 정말로 알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창문을 열어보니 남태건이 김영은 앞에 서 있었다.“지난번에 이미 할 말을 다 했고 앞으로 더 이상 연락할 필요도 없는데 이제 와서 또 뭘 하려는 거니?”김영은은 다소 불쾌한 기색으로 말했다.증거가 모두 드러났는데도 남태건은 왜 이렇게 미련을 못 버리는 걸까?그녀는 외간 남자의 몇 마디 달콤한 말에 딸을 내어줄 사람이 아니었다.“저와 다솔의 관계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걸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감히 그런 기대를 할 수도 없고요. 오늘은 전에 드린 물건을 돌려받으려고 온 거에요.”남태건은 최대한 겸손한 태도를 취하며 말했다.그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었고 그
“전 치료 받지 않았어요.”정미진은 크게 후회했다.온갖 계산을 다 해가며 일을 꾸몄지만 결국 제대로 걸려든 사람은 본인이었다.이럴 줄 알았다면 애초에 이런 짓을 왜 했을까?“하지만 환자분 차트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데요.”“약은 먹지 않았고 링거도 다 버렸어요.”정미진은 말할수록 후회가 밀려왔다.이제는 의사조차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는 정미진을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치료받기 싫으시면 그냥 퇴원 수속 밟으세요. 집에서 지내는 게 나을 거예요. 약값도 아낄 수 있고 요즘 젊은이들 돈 벌기 얼마나 힘든데요. 게다가 소문나면 우리 병원 체면도 말이 아니거든요.”“안 돼요! 제가 잘못했어요. 이제부터는 치료에 협조할게요.”정미진은 순순히 의사의 의견에 따랐다.입으로는 죽고 싶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죽음을 가장 두려워했다.그녀는 진심으로 살고 싶었다.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돈 걱정도 없고 배진호도 권다솔 문제를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효자였다. 그녀가 죽게 되면 모든 게 끝나버리는 셈이다.그녀는 계속해서 지금의 행복을 누리고 싶었다.“일단 병실로 돌아가세요. 치료를 받으시려면 가족분께서 동의서를 작성하셔야 하고 저희 병원 측에서도 다시 조사를 진행해야 합니다.”의사는 그녀를 설득해 병실로 돌려보낸 뒤 이 상황을 상세히 보고했다....저녁, 배진호는 정관수술을 마쳤다.잃어버린 아이를 떠올리며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고통을 느꼈다.아버지로서 아이를 지키지 못한 건 어쩌면 그의 잘못이었다. 그는 남은 생을 후회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때 권다솔이 전화를 걸어왔다.권다솔?배진호는 핸드폰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된 채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번호였다.그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다솔 씨, 이제야 저한테 연락하는 거예요?”“전 그냥 월요일에 이혼 절차를 마치러 가는 걸 잊지 말라고 전하려던 것뿐이에요.”그녀는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임신 사실을 숨기기
“걔가 어떻게 아이를 가질 수 있겠어?”정미진은 비웃음을 흘렸다.“지난번에 의사한테 물어봤더니 걔 체질은 워낙 임신하기 힘들대. 특히 유산까지 한 번 겪고 나면 더더욱 그렇지. 아무리 우리 진호를 유혹한다 해도 아이는 못 얻을걸.”갑자기 병실 문이 열렸다.배진호는 분노로 가득 찬 얼굴을 하고서 문밖에 서 있었다.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치 그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그는 자신의 엄마가 이렇게 비열하고 이기적인 사람일 줄은 차마 상상도 못 했다.“진호야, 갑자기 어쩐 일이야?”정미진은 진심으로 당황했다.방금까지 병실 안에 누구도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속마음을 거리낌 없이 털어놓았다.다만 배진호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제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우리 엄마가 뒤에서 이런 짓들을 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엄마도 여자인데 어떻게 다솔 씨한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어요?”배진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권다솔을 유산하게 만든 것도 모자라 이제는 이렇게 이기적인 생각까지 하고 있다니.그녀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렇게까지 대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그제야 권다솔이 왜 확실하게 선을 긋고 떠나려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더는 해치고 싶지 않았다.“방금 그냥 해본 말이야. 엄마가 무슨 짓을 하진 않았잖아...”“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저 오늘 바로 정관수술 예약할 거예요. 제 아이를 잃은 이상 앞으로도 다른 아이는 절대 갖지 않을 거예요.”배진호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말했다.그는 오늘 중으로 수술을 예약하고 실행에 옮길 생각이었다.이 말을 들은 정미진은 마치 청천벽력을 맞은 듯한 충격에 빠졌다.그녀가 이렇게까지 애써가며 미래의 손자를 위해 준비했는데 결국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만약 배진호가 진짜 정관수술을 한다면 그녀는 평생 손자를 보지 못할 것이다.“불효 중 가장 큰 불효가 자손을 남기지 않는 것이야. 네가 정말 그렇게 한다
악역은 그가 맡기로 했다.“아니에요. 애초부터 태건 씨의 아이가 아니에요. 저한테 거짓말한 거예요.”권다솔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배진호의 아이예요.”그녀는 손을 뻗어 배를 어루만지며 생각했다. 설마, 잃어버렸던 그 아이가 다시 그녀한테 돌아온 걸까?그녀는 권용민에게 단호하게 말했다.“어찌 됐든 간에 전 이 아이를 꼭 지킬 거예요. 저랑 진호 씨는 이미 이혼했지만 진호 씨는 저를 괴롭힐 사람이 아니에요. 제가 잘 알아요.”“그렇다면 배진호 어머니는 어떡하려고? 그처럼 고약한 시어머니를 만나면 누구든 불행할 수밖에 없어.”권용민은 그녀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남태건과 비교하니 이제는 배진호가 조금 나아 보이기까지 했다.게다가 그가 찾아본 증거에 따르면 권다솔에게 달린 악플들은 배진호가 퍼뜨린 것이 아니었다. 석규리가 권씨 가문의 경쟁업체를 찾은 것이었다. 더 이상 배진호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법이다.만약 배진호 혼자였다면 권용민은 아이를 위해 그를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를 생각하면 단호해질 수밖에 없었다.“아빠가 말을 직설적으로 해서 미안하다만 배진호의 어머니가 있는 한 너희 둘이 다시 만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다.”“그건 저도 잘 알아요.”아이를 위해서라도 그녀 역시 그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이미 시어머니 때문에 아이를 한 번 잃었지만 하늘의 축복으로 다시 아이를 가졌으니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그녀가 명확히 결정을 내린 것을 보고 권용민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편, 배진호는 매일 병원에 들러 정미진을 보살폈다. 정미진은 그의 앞에서 약을 먹고 링거를 맞는 척하며 완벽히 연기하고 있었다.그러던 어느 날, 배진호는 병원 문을 나서다 병실에 물건을 두고 온 것이 떠올라 급히 되돌아갔다.문 앞에 도착하자 어머니와 여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렇게 며칠째 연기하느라 들어간 병원비만 해도 적지 않잖아요. 오빠도 돈 버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제가 병원비를 봤는
그는 바닥에 쓰러진 딸을 보더니 깜짝 놀라 그녀를 안아 들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얼른 구급차 불러!”지나가던 직원이 급히 응급 전화를 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급차가 회사 건물 앞에 도착했다. 권용민은 딸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그는 응급실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왔다 갔다 오간 지도 셀 수 없었다. 권용민은 평생 딸 하나만 바라보며 살아왔다. 만약 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그조차 견딜 수 없는데 만약 아내가 이 일을 알게 된다면 하늘이 무너질지도 몰랐다.온갖 걱정이 머릿속을 떠다니던 찰나 의사가 걸어 나왔다. 아직 말을 꺼내기도 전에 권용민은 양어깨를 단단히 붙잡고 물었다.“의사 선생님, 지금 제 딸은 어떤 상태인가요? 도대체 무슨 병에 걸린 겁니까?”권용민은 속이 바싹 타들어 갔다.의사는 그의 손을 보며 한 발짝 물러서려 했지만 너무 세게 잡고 있는 바람에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그는 속으로 어쩌면 세상 모든 부모의 마음은 다 같을지도 모른다며 한숨을 내쉬고는 차분히 설명했다.“따님은 괜찮습니다. 단순히 저혈당 증상이 나타난 겁니다. 그런데 지금 따님이 임신 중이라 반드시 잘 챙겨 드셔야 합니다.”권용민은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완전히 멍해졌다.‘임신이라니?’그럼 이 아이는 남태건의 아이인가?원래 그는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남태건은 지나치게 계산적인 데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 딸과 엮이는 것을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권다솔이 남태건의 아이를 임신했다니, 그녀는 얼마 전에도 아이를 잃었는데 또 낙태 수술을 한다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게 될 것이 뻔했다.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도 가능하지만 남태건의 성격상 아이를 두고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권용민은 걱정을 가득 안고 딸을 만나러 갔다.“아빠, 지금 아빠 상태를 보면 마치 제가 정말 큰 병에 걸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잖아요.”권다솔은 병상에 누운 채 창백한 얼굴
일주일 만에 권다솔은 많은 일을 해냈다.그녀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업무 태도는 이미 팀장의 인정을 받았다.“내일 고객을 만나러 가는데 지연 씨도 같이 가죠.”“네? 제가 정말 가도 되나요?”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이전에 그녀는 여이현의 비서로 일했던 경험이 있다 보니 혼자서도 충분히 고객을 만나러 갈 수 있었다.하지만 회사에 들어온 지 겨우 일주일 만에 아직 수습 기간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 안에 고객을 만날 기회를 준 걸 봐서는 팀장이 그녀를 얼마나 인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물론이죠. 지연 씨의 업무 능력을 지켜본 결과 저보다 더 뛰어난 것 같은데요. 고객을 만나는 건 당연히 가능하죠.”팀장은 그녀를 전적으로 믿었다.고객을 만나기 전에는 많은 준비 작업이 필요했다. 팀장은 프로젝트 자료를 모두 그녀에게 메일로 보내 주었다.권다솔은 그렇게 오랜만에 메일을 열게 되었다.팀장이 보낸 파일 외에 배진호가 보낸 메일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삭제하려 했지만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메일을 열어버렸다.이미 열린 김에 그가 무슨 말을 보냈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다가 마지막 부분을 보게 되었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다.그날 밤 그녀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 배진호란 말인가?그럼 남태건이 했던 말은 또 무슨 뜻이지?권다솔은 배진호를 차단 목록에서 해제하려는 순간 아빠가 전화를 걸어와 그녀를 사무실로 호출했다.문을 열자마자 화가 잔뜩 난 권용민의 얼굴이 보였다.“아빠,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화가 나셨어요?”권다솔은 그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진정하세요. 저녁에 제가 맛있는 음식을 해줄게요.”“나랑 네 엄마가 전에 정말 어리석었어. 어린애한테 속아서 완전 농락당했지 뭐니. 네가 그 녀석이랑 엮이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꼴이었을 거야.”남태건 얘기만 나오면 권용민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의 이름조차 부르고 싶지 않았다. 권다솔이 의아해하자 그는 두툼한 서류 뭉치를
그녀는 단순히 남태건을 비웃은 게 아니라 자신마저 비웃었다.정말로 몇 번이나 사람을 너무 쉽게 믿었다.“신뢰란 누가 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쟁취하는 거예요. 이제 그만 가세요. 부모님께 무릎을 꿇는 건 괜찮지만 저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건 정말 아니에요.”“권다솔!”남태건은 다시 손을 뻗어 그녀의 옷자락을 꼭 붙잡았다.그는 손에 힘을 가했다. 혹시라도 손을 놓는 순간 그녀를 영원히 잃게 될까 봐 두려웠다.“어서 돌아가요. 앞으로 태건 씨만의 인생을 사세요. 저도 제 인생을 살 거예요. 이미 말했잖아요. 우리 둘은 친구조차 될 수 없다고.”권다솔은 아예 외투를 벗어버렸다.남태건의 손에는 외투만 남아 있었고 아무것도 붙잡지 못했다.그는 그녀가 부모님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김영은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지만 하려던 말을 애써 삼켜버린 채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집에 돌아온 권다솔은 부모님께 아까 얘기는 하지 않고 곧바로 회사 얘기를 꺼냈다.“아빠, 엄마. 오늘 오후부터 바로 회사로 가서 일하고 싶어요. 직책은 정해 놓으셨어요?”“굳이 이렇게 서두를 필요 없어. 이틀 정도 푹 쉬어라.”비록 권용민은 모든 준비를 마쳤지만 막상 그녀가 출근하려 하니 마음이 약해졌다.아직 회사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라면 자유롭게 놀 수 있었지만 정식으로 출근하게 되면 다른 직원들처럼 매일 출근 도장을 찍어야 했고 함부로 결근할 수 없는 생활이 될 터였다.“아빠 머리에도 이제 흰머리가 있네요.”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흰머리를 뽑아주었다.권용민은 여전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몇 가닥뿐이야. 나도 거울 보면서 봤어. 내 나이에 흰머리 있는 건 정상이지.”“관리를 잘하면 아빠 나이엔 여전히 까만 머리를 유지할 수 있어요. 제가 걱정되는 건 알겠지만 언제까지 아빠 엄마의 보호 아래서 살 수는 없잖아요. 이제는 제가 아빠 엄마를 돌볼 때예요.”그녀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권다솔의 강력한 요청에 권용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