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인명진도 기회를 봐서 염정아의 집에 가보고 싶었다. 어쨌든 그도 염정아의 주치의라고 할 수 있으니까. 환자의 병세가 오랫동안 치료되지 않는 상황에서 주치의가 집에 와서 환자의 거주 환경을 확인하는 것은 매우 정상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초대도 없이 찾아가는 건 예의가 아닌 듯했고 섣불리 찾아갈 수가 없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은서우도 같은 생각이라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은 그만 얘기해요. 어차피 당분간은 염정아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니까. 그동안은 우리가 많이 돌봐줘요.”그 후, 은서우는 자주 요양원으로 갔고 매번 갈 때마다 염정아한테 물건을 챙겨다 주었다.시간이 지나면서 염정아는 여전히 차가운 태도였지만 적어도 이전보다는 그녀를 대하는 태도가 훨씬 부드러워졌다. 어느 하루, 은서우는 똑같이 요양원으로 향했고 염정아가 좋아하는 오렌지도 챙겨갔다.오렌지는 특별히 과일 가게에 들러 먹음직스러운 것으로 몇 개 골랐다. 염정아가 오렌지를 보고 기뻐할 표정을 생각하니 은서우는 힘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도착해서 문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원망의 소리가 들려왔다.“네 동생이 좋은 마음으로 널 보러 여기까지 왔는데 고맙다고는 하지 못할망정, 어떻게 이래? 내가 평소에 널 이렇게 가르쳤니?”“동생한테 잘하라고 한 말들은 귓등으로 들은 거니?”점점 더 입에 담기도 험한 말들을 쏟아냈다. 문밖에 서 있는 은서우도 그 소리를 듣고 마음이 차가워졌다. 그러나 병실 안의 사람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고 결국 참지 못한 은서우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만하세요.”문이 벽에 세차게 부딪혔고 엄청난 소리에 안에 있던 사람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그러나 병실 안에 있던 여자는 이내 얼굴이 일그러진 채로 들어오는 은서우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그쪽은 누구예요? 들어오기 전에 노크부터 하는 거 몰라요? 예의가 없네.”그녀는 말하면서 몸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아까 문밖에서는 이 여자의 모습이 잘 안 보였는데 이제 들어오니 잘 보였다.염
눈물을 닦아주고 은서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저들 때문에... 자신을 탓하지 마.”“네?”“저 사람들은 네가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야. 저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노력하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너 자신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해.”은서우는 염정아를 쳐다보면서 추억에 잠긴 듯했다. 아마도 예전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 것 같다. 소씨 가문에서의 지난날들, 그녀 또한 염정아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짓밟히고 힘들게 살았었다. 그때는 어려서 잘 몰랐다. 자신이 노력만 하면 소씨 가문에서 언젠가는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나 많은 시련을 겪고 나니 깨닫게 되었다. 때로는 환심을 살 가치가 없는 사람도 존재한다는 것을. 어쩌면 그 사람한테 비굴하게 비위를 맞춰야 할 때면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이미 끝난 것이 아닐까?“가끔은 포기하는 법을 배우는 것도 좋은 일이야.”방안은 한동안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얼마 후, 염정아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선생님도 예전에 이런 경험이 있었어요?”염정아가 예민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말이 너무 티가 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자신의 경험을 차근차근 들려주었다.염정아는 옆에서 열심히 듣고 있었다. 다 듣고 나서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생각에 잠겼다.한편, 병원에 일이 있었던 은서우는 요양원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염정아한테 최대한 그들을 상대하지 말라고 몇 마디 당부한 뒤 자리를 떴다. 병원에 돌아온 후, 그녀는 이전에 계속 내버려두었던 논문이 떠올랐고 그날 저녁 밤을 새워가면서 그 논문을 마무리 지었다.다음 날, 완성된 논문을 들고 그녀는 인명진을 찾아갔다. 논문을 읽으면서 인명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은서우는 논문이 통과되지 않을까 봐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어때요?”그가 논문을 내려놓고 그녀를 향해 웃었다.“잘 썼네요. 이제는 선생님이 필요 없겠는데요
은서우는 한숨을 내쉬었다.“논문의 주제가 그들의 핵심 가치관에 맞지 않는 걸까?”“그 말... 다른 사람 앞에서는 절대 하지 마. 또 무슨 화를 불러올지 모르니까.”이혜성은 말을 하면서 두려움에 몸을 살짝 떨었다. 은서우가 이렇게 대놓고 협회의 잘못을 말할 거라고는 이혜성도 생각지 못한 것 같다. 누가 은서우만큼 대담하겠는가?“나도 그냥 해본 소리야. 얼마나 힘들게 쓴 논문인데 통과가 안 됐잖아. 불평도 몇 마디 못 해?”이혜성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그러니까 왜 쓸데없이 협회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서는. 이제 어떡할 거야? 원장님이랑 너 두 사람 협회에서 완전히 낙인찍힌 것 같은데.”그 말에 흠칫하던 은서우는 웃음이 나왔다.진짜 사제지간은 아니지만 두 사람한테만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말이다.인명진의 논문도 전에 협회에 퇴짜를 맞은 적이 있었다. 아마 협회에서는 그들을 끝없이 겨냥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 또한 이대로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깊은 생각에 잠겼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더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어쩔 수 없이 이 문제는 잠시 제쳐 두기로 하였다.그 후, 그녀는 이 일을 그대로 인명진에게 말해주었다. 인명진은 놀란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저 그 말을 듣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진작부터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에요. 하지만 저들이 이렇게까지 뻔뻔스러운 줄은 몰랐습니다.”그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은서우는 인명진도 이 일을 그냥 넘길 거라고 생각하고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이틀 뒤, 연구 프로젝트를 맡은 그녀가 들뜬 마음으로 인명진을 찾아갔을 때 인명진은 자리에 없었다. “원장님 어디 가셨는지 알아요?”의사는 그녀에게 고개를 저으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글쎄요.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전 은 선생님께 여쭤보려고 했는데요.”“원장님께서 하셔야 할 수술이 여러 건 있는데. 지금 자리에 안 계시니까 다른 선생님한테 맡길 수밖에 없겠어요.”인명진의 능력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이로 인해 매일 업
진호빈 교수는 의과대학의 베테랑 교수로 대학교 2학년 이상의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한 달에 수업이 달랑 세 번 뿐이었고 때로는 그마저도 확실치 않았다. 그러나 그의 수업은 늘 학생들로 가득 찼다. 강의가 좋았기 때문이고 진호빈 교수가 가르친 제자들은 모두 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인재들이었다.아무리 못하더라도 최소한 대학원 졸업생이었다.신석림이 의학계의 한 축이라면 진호빈 교수도 명실상부 의학계의 다른 한 축이었다.가장 다른 점이라면 신석림은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협회를 설립하고 업계의 인재들을 흡수했지만 진호빈 교수는 권력을 중히 여기지 않았다.자유로운 영혼이라 가끔은 제자들조차도 그를 만날 수가 없었다. 그의 수업을 듣는 건 엄청 어려운 일이었다. 정말 보기조차 힘든 분이니까. 그런데 인명진이 깜짝 놀란 소리를 했다.“진 교수님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어왔어요. 바로 다음 주 강의예요.”“정말요?”한껏 들뜬 표정을 지으며 폴짝폴짝 뛰는 그녀를 보고 그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네, 다음 주 수요일에 교수님께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실 거예요. 논문에 관한 일은 교수님께서 해결해 주실 거고요.”논문에 관해서는 은서우에게 도움을 줄 수 없었다.그도 협회의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있으니까. 그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껏 그 사람들을 상대하지 않았던 것이다.그러나 진 교수는 달랐다. 그는 신석림과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어쩌면 진 교수가 다른 방법을 제시하거나 그녀를 도울지도 모른다.어쨌든 인명진은 은서우가 자신처럼 그들의 표적이 되어 이런 분쟁에 휘말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다만 그녀는 너무 기뻐서 그의 다른 의미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그녀는 다음 주 수요일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이 깜짝 소식에 논문이 통과되지 않은 일도 별것 아닌 게 되었다.그런 기대 속에서 수요일이 찾아왔다.의과대학 캠퍼스. 울창한 나무들이 숲길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옆에는 운동장이 있었다. 가
은서우가 교실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종소리가 울렸다.빼곡히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며 그녀도 서둘러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녀의 행동은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의 놀라움을 불러일으켰다. 진호빈 교수의 수업에 청강생이 있다니...예전에는 이런 상황이 한 번도 없었다. 잠시 후, 종소리가 울린 지 한참이 지나서야 나이가 지긋한 진 교수가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손에 물병을 든 채 안으로 들어왔다. 머리는 이미 희끗희끗했지만 활기차 보였고 재킷을 입고 있는 그는 유난히 여유로워 보였다. 수업을 하러 온 것 같지는 않고 소풍을 나온 사람 같아 보였다. “안녕하세요.”그가 강단에 서서 학생들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밑에서 갑자기 소리가 났다.“교수님, 안녕하세요.”은서우도 한마디 따라 했다.그 후 그녀는 수업이 곧 시작될 줄 알고 준비해 온 노트북과 노트 그리고 펜을 꺼냈다.그러자 진 교수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이번 수업에는 새로운 학생이 와서 기쁩니다.”사람들의 주목을 받자 그녀는 등골이 서늘해졌다.소심한 성격이라 그런 건 아니고 갑자기 이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니 좀 부담스러웠다. 다행히 수업이 시작되고 나니 사람들도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수업에 집중하였다. 수업은 역시나 상상 그 이상이었다. 진호빈 교수는 의학계에서 유명한 사람답게 의학에 대한 견해가 깊었고 일반인이 따라올 수 없는 수준이었다. 45분짜리 수업에서 그녀는 여러 번 깜짝 놀랐고 전에 이해되지 않던 점들에 대해서도 답을 얻게 되었다. 수업이 끝났을 때, 조금 여운이 남았고 수업이 너무 빨리 끝난 것 같아서 못내 아쉬웠다. 때마침 주위의 학생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고 누군가 불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진 교수님의 수업은 다 좋은데 매번 내용을 다 이해할 수가 없어. 강의가 너무 빠르신 것 같아.”“그래? 난 괜찮던데. 진 교수님께서 좀 더 강의를 많이 하셨으면 좋겠어.”은서우도 또 강의를 듣고 싶었다. 그녀가 물건을 다 정리했을 때, 교실 안의 사람들은
“앉게나. 명진의 제자라고 들었어. 명진이와는 잘 아는 사이야. 명진이의 제자면 나한테도 제자인 거나 다름없지.”자리에 앉던 은서우가 그 말을 듣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교수님께서 저희 원장님을 알고 계세요?”말을 꺼내자마자 그녀는 자신이 어리석은 말을 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아는 사이가 아니었다면 인명진이 어떻게 이리 쉽게 수업의 방청석 자리를 구할 수 있었겠는가?진 교수는 그녀의 말실수에도 개의치 않고 빙그레 웃었다. 그저 눈앞의 그녀가 매우 활발하다고 생각했다.“정말 다행이군. 난 그놈이... 됐네. 지금처럼이라도 좋은 거지.”진 교수가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를 은서우는 듣지 못하였다. “명진이한테서 들으니 나한테 도움을 청할 일이 있다고? 그 논문 때문인가? 논문은 가지고 왔나?”진 교수가 말길을 돌렸다.“네, 가져왔어요.”그녀는 조심스럽게 논문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진 교수는 돋보기를 들고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보기 시작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논문이 별로인 줄 알아 그녀는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이건 제가 처음으로 쓴 논문입니다. 부족한 점이 많을 거예요. 그래도 너그럽게 봐주세요.”그녀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아닌데. 난 아주 좋은 것 같아.”은서우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진 교수한테서 이렇게 높은 평가를 받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의 칭찬에 그녀는 몸 둘 바를 몰랐고 말까지 더듬었다.“하지만 협회에서는 제 논문이 안 된다고 했습니다.”협회에서 보낸 메일을 보면 논문의 주제가 가치관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했고 내용이 왜곡되었다며 여러 가지 트집을 잡았다.성격이 좋아서 다행이지 다른 사람 같았으면 벌써 화가 나서 펄쩍펄쩍 뛰었을 것이다. 진 교수는 돋보기를 벗고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협회는 늘 이런 식이야. 다른 사람들이 하는 헛소리를 듣지 말게나. 처음으로 쓴 논문이 이 정도의 수준이라면 아주 훌륭한 거라고.”사실 논문이 다시 발표될 수 있다는 기대를 하지 않
진 교수는 자신이 신석림을 설득하겠다고 약속했다. 설득을 못하더라도 논문은 분명 통과시켜 주겠다고 했다.진 교수도 고마웠지만 그녀는 진 교수와 만날 기회를 준 인명진한테 더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돌아가는 길에 그한테 선물이라도 사갈까 생각해 보았지만 부족한 게 없는 사람인 것 같았다.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끝내 결정을 할 수가 없었다.바로 이때, 인명진에게서 급한 전화가 걸려 왔다. “진 교수님 만나고 나오는 길이에요?”“네, 이미 나왔어요. 왜요?”그녀는 그의 다급한 목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지금 일이 있어서 잠깐 밖에 나와 있거든요. 방금 요양원에서 전화가 왔는데 염정아가 자살 시도를 했고 지금 응급실로 오고 있다고 하네요.”“네?”순간, 은서우는 핸드폰을 움켜쥐었고 두말없이 그의 부탁을 받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염정아도 마침 병원에 실려 왔고 산소 부족으로 인한 내장 출혈이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급히 응급처치를 했고 한 시간 반이 지나서야 겨우 염정아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 후 그녀는 병상 앞에서 무려 두 시간이나 기다렸고 저녁 7시가 되어서야 염정아는 겨우 정신이 돌아왔다. 은서우는 물 한 모금 마실 겨를도 없이 목이 쉰 상태로 걱정스럽게 물었다.“어때? 아직도 아파?”산소 부족의 결과는 아주 심각하다. 산소 호흡이 안 된다면 단 30분 만에 호흡 곤란 상태가 오고 심할 경우 내장 출혈과 뇌사 상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다행히 염정아는 제때 발견되었고 그렇지 않았더라면 뇌사 상태에 빠져 누구도 그녀를 구하지 못했을 것이다.염정아는 고개를 저었다. 목에 멍이 든 것을 보니 아마도 밧줄에 의해 생긴 상처인 듯하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아직도 상처가 선명한 걸 보니 얼마나 심하게 조였는지 알 수 있었다.상처를 보니 화가 났지만 낼 수가 없었고 마음만 아팠다. 그동안 지내온 시간들이 헛된 것은 아닌 듯하다.“왜 갑자기 이런 짓을 해? 전에는 괜찮았잖아.”은서우는 다정한
은서우는 거절하지 않았다.남자의 숨결이 너무도 익숙해서 뒤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사실 뒤돌아보지 않은 이유가 더 있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그녀는 몸에 걸쳐 있는 외투를 잡아당기며 입을 열었다.“예전에 들었던 말이 생각났어요.”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녀가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병원은 교회보다 더 많은 기도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그게 잘 와닿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들어보니까 나도 이미 당사자가 되어있더라고요.”담담한 말투에 서글픔과 탄식이 가득 차 있었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그가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꼭 안았다.그의 행동에 그녀는 물론 그도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나 손을 놓지 않았고 그녀도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고 잠시 후 약속이나 한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두 사람 사이에 있던 벽이 지금 이 순간 허물어진 것 같았다. 은서우는 마음속의 이야기를 그에게 털어놓았다. “사실 오래전부터 그렇게 느꼈었는데 오늘에서야 깨닫게 된 것 같아요.”“가끔은 내가 위선적인 사람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지만 도와줄 수가 없었어요. 그저 마음속으로만 불쌍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아니요. 당신은 착한 사람이에요.”“자신을 의심하지 말아요. 이미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충분히 다 했으니까.”병원 복도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은서우는 고개를 숙이고 그에게 잠시 기대어 있었다.다음 날, 그녀는 아무 일 없었던 사람처럼 행동했다. 병원에서 일하다 보면 불행을 많이 보게 되고 때로는 우울하고 비관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타락할 사람이 아니었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본업에 충실했다. 열심히 일해야만 사람들을 진정으로 도울 수 있는 거니까. 그녀는 여전히 병원 일로 많이 바빴지만 매일 최소 한 시간은 시간 내서 염정아를 보러 갔다. 염정아의 기분을 풀어주고 그녀가 자살하려는 생각이 다시
“왜? 마음이라도 아픈 거야?”“알았어요.”그녀는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잠시 후, 집으로 돌아와 불을 켜던 그녀는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최지후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왜 불도 안 켜고 있어요?”여울은 놀란 가슴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어두컴컴한 게 좋아서.”그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이리 와봐.”여울은 얌전히 다가가 살짝 몸을 숙여 그의 관자놀이를 주물렀다.“왜요? 기분 안 좋아요?”“응.”무심하게 대답하던 그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당신은 나 배신하지 않을 거지?”그 말에 여울은 손끝이 살짝 떨렸다.‘설마 최지후가 뭔가 눈치라도 챈 걸까?’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그냥 궁금해서.”그가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당연히 그럴 일 없죠. 난 지후 씨 곁에 평생 있을 거예요.”그녀는 예쁜 말로 골라서 했고 원하는 답을 들은 최지후는 이내 환하게 웃었다.“그래. 당신이 날 배신한다면 내가 당신을 지옥으로 끌고 갈 거야.”농담처럼 들리지만 왠지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졌다. ...“윤슬 씨, 나 어떡하죠? 최근에 회사의 프로젝트들이 지석훈 때문에 다 엉망이 되어버렸어요.”엄우정이 다급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지금 이 순간, 그녀는 문지원을 건드린 것이 엄청 후회되었다.강윤슬은 그녀를 보며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바보같이 왜 일을 만들어서는... 일이 틀어지니까 날 찾아와?’“윤슬 씨, 말 좀 해봐요. 내가 누구 때문에 그런 건데요?”강윤슬이 말이 없자 엄우정은 더 초조해졌다.이번 일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집에도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강윤슬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우정 씨, 석훈이는 이제 우정 씨가 알던 사람이 아니에요. 나도 우정 씨를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모르겠어요.”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문지원 씨를 찾아간다면 어쩌면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몰라요. 문지원 씨는 줄곧 우정 씨와 협력하고 싶어
최주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역시 그럴 줄 알았어. 문지원 씨 때문이 아니라면 네가 나한테 보자고 할 일도 없겠지.”“말해 봐.”한참을 망설이던 지석훈은 끝내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됐다. 술이나 먹으러 가자.”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최주하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술잔을 들자마자 최주하의 핸드폰이 울렸고 확인해 보니 여울한테서 걸려 온 전화였다. “잠깐 전화 좀 받게 올게.”지석훈은 고개를 끄덕였고 최주하는 밖으로 나오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이야?”“볼 일이 있어서요...”전화를 끊고 최주하는 다시 지석훈에게로 다가갔다. “미안하다. 일이 있어서 가 봐야 할 것 같아. 나중에 시간 되면 내가 술 살게.”“됐어. 일 있으면 가.”최주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혼자 술을 마시던 지석훈은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신한 그룹의 그 프로젝트, 나한테 넘겨.”전화를 끊은 후, 그는 눈앞의 술잔을 쳐다보며 깊은 생각에 빠져 버렸다. 자신이 왜 신한 그룹을 겨냥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이 본능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한편, 프라이빗한 호텔에 도착한 최주하는 흰 원피스를 입은 채 소파에 앉아 있는 꽃 같은 여인, 여울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의 눈빛은 아무런 파동이 없었다. “말해.”여울은 그를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주하 씨, 최지후 씨가 저한테 마음을 완전히 연 것 같아요.”그녀의 말대로 확실히 성공적이었다. 현재 최지후는 여울을 완전히 신임하고 있었고 무방비 상태라 그녀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한 것도 사실이다.“알아. 하지만 난 더 가치가 있는 것이 필요해.”최주하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왠지 모르게 갑자기 부담감이 확 밀려왔고 최주하가 만족할 만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자신의 처지가 곤란해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저... 최지후 씨가 최근에 입찰을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입찰 문서를 손에 넣었어요.”그녀는 급히 입을 열
문지원은 이미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였고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라 고통스러웠다. 지석훈에게 붙어있으면 조금은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손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고는 필사적으로 그를 향해 더 가까이 다가갔다. 부드러운 입술이 닿자 흠칫 놀라던 그의 눈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그가 앞에 앉아 있는 운전기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출발해요. 가장 가까운 호텔로 갑시다.”이내 가림막이 내려졌고 문지원은 여전히 끙끙거리며 그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길에 그의 몸도 덩달아 뜨거워졌다. 얼마 후, 차가 호텔 앞에 멈춰 섰고 그가 그녀를 안아 들고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프런트 데스크에 다가가 블랙 카드를 꺼내며 한마디 했다.“스위트룸으로 잡아줘요.”프런트 데스크의 직원은 훤히 다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룸에 들어온 후, 그는 문지원을 침대에 눕혔다. 막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하는데 그녀가 그의 목을 감싸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가지 마요.”그녀를 한참 동안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문지원, 이건 당신이 선택한 거야.”더 이상 그도 참지 않았고 들끓어 오른 욕정을 드러냈다. ...뜨거웠던 밤이 지나고 아침 햇살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잠에서 깨어난 문지원이 몸을 움직이는데 갑자기 온몸이 쑤시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자마자 그녀는 바로 고개를 돌렸고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그가 천천히 눈을 뜨는데 눈빛은 평온하기만 했다.“깼어?”“저기... 우리...”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지만 지석훈은 아주 자연스러웠다.“걱정하지 마. 책임질게.”“책임... 책임질 필요 없어요. 어젯밤 일은 사고였어요.”어젯밤의 일에 대해 기억이 남아있었고 자신이 약을 먹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이 일로 지석훈한테 뭔가를 요구하고 싶지 않았고 오히려 그한테 고마웠다. 그가 아니었다면 어젯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르니까.“왜? 그렇게 나랑 선 긋고 싶은 거야?”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는 차갑게 입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종업원은 바로 환하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부탁이라니요.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다른 분이셨다면 아마 저한테 드레스값을 배상하라고 했을 거예요. 제 형편에 그건 턱도 없는 일이죠. 정말 감사드립니다.”문지원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냥 옷 한 벌일 뿐이에요.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그리고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에요.”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탈의실로 향했다.“바로 여기입니다. 들어가시죠.”그녀는 별생각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고 탈의실 안에는 아주 좋은 향이 났고 옷장에는 깨끗한 새 옷이 걸려 있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세련미가 넘치는 옷들이었다. 손을 뻗어 옷들을 어루만지며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연한 파란색의 긴 드레스를 선택했다. 입고 있던 드레스의 지퍼를 여는데 손이 지퍼에 잘 닿지가 않았다. 사람한테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이곳은 사람이 흔히 드나드는 곳이 아니었다. 지퍼를 열려고 애를 쓰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도와줄까?”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급히 고개를 돌리니 음흉한 얼굴의 남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딱 봐도 좋은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순식간에 그녀의 안색이 차가워졌다.“여긴 여자 탈의실이에요. 당장 나가시죠.”말을 마친 그녀가 밖으로 걸어 나가려는데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졌고 몸이 나른해지면 바닥에 쓰러졌다.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른 그녀를 남자가 번쩍 안아 올리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많이 예뻐해 줄게.”아직 약간의 의식이 남아 있던 그녀는 몸부림치고 싶었지만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파티장 안, 엄우정은 일부러 무심코 한마디 했다.“방금 탈의실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파티장에서 도대체 뭐 하는 짓인지.”다른 여자들도 그 소리를 듣고는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막았다. “설마요. 혹시 방금 문...”순간 그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사람들은
지석훈은 밖으로 나온 뒤 그녀를 놓아주었고 문지원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뭐 하는 거예요? 이번 협력이 나한테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그가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뭐 대단한 프로젝트도 아니잖아. 당신은 자존심도 없어? 그렇게 모욕을 주는 데도 왜 가만히 있는 건데?”그의 말을 듣고 나니 왠지 모르게 억울한 느낌이 들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순간 당황한 지석훈은 얼른 휴지를 꺼내 건네주었다.“왜 울어?”방금 엄우정한테 그런 모욕을 당하고도 그녀는 울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지석훈의 말 몇 마디에 그녀는 억울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나도 뭐 수모를 당하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요? 하지만 방법이 없잖아요. 문정 그룹은 이번 협력이 필요하고 난 의지할 사람이 없어요.”“내가 다른 프로젝트를 찾아줄 테니까 나한테 의지해.”그가 갑자기 한마디 내뱉었다. 그 말에 문지원도 그도 모두 어리둥절해졌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엄우정과의 협력을 내가 망쳤으니 당연히 내가 보상해 줘야지.”“준비하고 있어. 저녁에 나랑 같이 파티에 참석해.”말을 마치고 그는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문지원은 웃음이 저절로 나왔고 마음속이 따뜻해졌다. ...그날 저녁, 문지원은 지석훈을 따라 파티 장소로 향했다. 서먹해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팔을 뻗으며 입을 열었다.“팔짱 껴.”망설이고 있는데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팔짱 안 끼고 나 혼자 들어가게 둘 거야? 사람들이 날 비웃을 텐데?”입술을 오므리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았다. 그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살짝 올라갔다.저도 모르게 본인이 웃었다는 사실조차 그는 자각하지 못한 것 같다. 파티장에 들어간 뒤, 지석훈은 그녀를 데리고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멀지 않은 곳, 강윤슬이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문지원, 이 여우 같은 년.”“지석훈이 문지원한테 푹 빠진 모양이네요.”이
고개를 숙이고 자세를 낮추는 그녀의 모습에 엄우정은 엄청 통쾌했다.“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기회를 줘야죠. 하지만...”잠시 말을 멈추던 엄우정은 끝내 뒷말을 계속하지 않았다. 반면, 그 어떠한 기회도 놓치기 싫었던 문지원은 이내 앞으로 다가서며 물었다.“하지만요?”엄우정은 악랄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카톡의 모든 남자 친구에게 당신이 다른 여자의 남자 친구를 빼앗은 나쁜 여자라고 문자를 보내요.”그 순간, 문지원은 분노에 가득 찬 눈빛을 보이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건 그녀에 대한 모욕이었다.마음속으로 대충 짐작이 된 그녀는 분노가 섞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 “엄 대표님, 협력에 대해 얘기하는 자리입니다. 대표님께서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장난을 치시면 안 되죠. 사적인 감정을 업무에 끌어들이면 되겠습니까?”“그래요? 그럼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것 같네요.”문지원의 말에 엄우정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문지원, 네까짓 게 뭔데...’“문성 그룹에서 이번 기회를 놓친 건 오롯이 당신 문지원 때문이라는 것만 알아둬요.”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말 한마디를 남긴 채 발걸음을 옮겼다.그 순간, 문지원이 그녀의 팔목을 덥석 잡았고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팔목을 잡고 있는 문지원의 눈빛이 조금은 차분해졌다. 침을 꿀꺽 삼키더니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방금은 제가 감정 조절이 잘 안됐습니다.”“그 뜻은 문자를 보내겠다는 말인가요?”그녀의 요구는 악랄했고 이번 협력에 대해 장난처럼 가볍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던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억지로 이 굴욕을 삼켰다. 그녀한테는 지금 이런 상황에서 제멋대로 할 수 있는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문자를 보내는 것일 뿐, 어디가 덧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진실 게임을 한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피식 웃던 엄우정은 조롱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문지원 씨,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설마 달랑 문자 하나
최지후는 피식 웃었다. 눈앞의 여자가 순수하고 귀여웠다. “여울 씨 생각은?”여울은 그가 최주하와 생김새는 비슷하지만 최주하에 비하면 어리석고 오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쉽게 손에 잡히다니, 너무 시시한데...’잠깐 망설이던 그녀는 손을 떨며 치마 뒤에 있는 지퍼를 열었다. 지퍼를 반쯤 내리자 매끄럽고 하얀 등이 훤히 드러났고 그가 바로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여기서 말고.”모처럼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났으니 여기서 대충 관계를 가지고 싶지는 않았다.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그녀는 순순히 그를 따라 나갔다. 한편, 최주하는 핸드폰에 올라온 사진을 보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최지후가 이렇게 쉽게 걸려들 것이라는 건 진작부터 예상하고 있던 일이라 전혀 놀라지 않았다. 남들 앞에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는 사생아의 신분이니 좋은 여자를 만나봤을 리가 있겠는가?그는 최지후 자신보다 최지후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다. 잠시 후, 그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캐슬 호텔.룸 안, 문지원은 두 손을 꼭 잡은 채 초조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가끔 고개를 숙이고 손목시계를 확인했고 약속된 시간을 이미 훨씬 넘긴 시각이었다. 미팅을 하기로 했던 협력자가 나타나지 않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심하게 찌푸렸다. 얼마 후, 문 앞에서 자물쇠가 비틀리는 소리가 들렸고 검은색 긴 드레스를 입은 차가운 여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문 대표님, 죄송해요. 제가 좀 늦었네요.”문지원은 바로 고개를 들었고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협력은 그녀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었다. 오랜 기다림에 대한 분노는 온데간데없고 눈앞의 사람이 약속 장소에 나타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문지원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저도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말을 하면서 문지원은 손을 뻗어 의자를 끌어당겼다. 그러나 눈앞의 여자는 자리에 앉지 않고 그녀를 쳐다보며 차갑게 웃었다 .“문지원 씨, 저랑 협력하고 싶은 거예요?”
방 안에 들어온 여자들은 저마다 다른 모습과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모두 예외 없이 눈빛 속에 욕망이 가득했다.최지후는 여자들을 한번 스쳐본 후 흥미를 잃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여자들은 흔히 보던 사람들이라 특별할 게 없었다.그는 차가운 태도로 매니저를 쳐다보며 물었다.“이게 네가 말한 새로 온 애들이야?”술집 매니저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최지후는 그의 중요한 고객이었기에 실수하면 큰일 날 수 있었다.“도련님 혹시 마음에 안 드시나요?” 술집 매니저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최지후는 잠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테이블에 놓인 술잔을 들어 매니저의 얼굴에 확 뿌렸다.“너 지금 나 무시하는 거지? 감히 이런 것들로 대충 넘기려고?”술집 매니저는 잠시 멈칫하다가 곧바로 반응했다. 그는 얼굴을 닦으며 더욱 기를 쓰고 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가요. 절대 아니에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러겠어요. 도련님 마음에 안 드신다면 바로 다른 사람들로 교체해 드릴게요.”그때 문이 열리며 한 여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 802호 맞나요?”최지후는 그 목소리에 곧바로 반응했다. 그는 목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봤고 그곳에 눈길이 멈췄다.여자는 흰색 긴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검은 머리는 어깨 위로 흘러내려 있었다. 얼굴에는 화장기가 전혀 없었지만 자연스러우며 청순해 보였다. 무엇보다 그녀의 눈에는 불안하고 긴장된 기색이 가득했다.그녀는 신임임이 분명했다.최지후는 술집 매니저를 놓으며 말했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진작에 데려왔어야지. 왜 이제야 데려왔어? 좀 더 일찍 데려왔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술집 매니저는 최지후가 눈앞의 여자를 매우 만족스러워하는 것을 알아챘다. 그는 머릿속으로 그가 데려온 사람 중에 이 여자가 있었나 하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그래도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최지후가 만족하면 그게 제일 중요했다.그는 재치 있게 말했다.“좋은 건 항
여자는 잠시 멈칫하다가 최주하가 너무 많은 금액에 당황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급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도 알아요. 이 돈이 적은 금액은 아니라는 거... 하지만 저는...”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최주하가 말을 끊었다. 그는 다소 불쾌한 듯 여자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2억만 있으면 뭐든지 할 거야?”여자는 그 말에 희망의 불씨가 다시 피어났다. 그녀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 뭐든지 할 수 있어요.”최주하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좋아. 도와줄 수는 있어. 그런데 너도 나를 위해 뭔가를 해야 해.”여자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어요.”그러자 그녀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일어나서 최주하의 옷을 풀려고 손을 뻗었다.최주하는 눈살을 찌푸리며 여자의 손목을 잡으며 제지했다.“뭐 하는 짓이야?”그의 눈에 드러난 혐오감에 여자는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필요하지 않으신가요?”이건 서로가 알고 있는 은유적인 표현이었다. 여자의 의도는 두 사람 모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여자는 지금 자신이 가진 것 중에서 최주하가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은 이 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확실히 네 도움이 필요해. 하지만 그 대상은 내가 아니라 내 동생이야.”그렇게 말하며 최주하는 휴대전화에서 한 장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진 속 남자는 최주하와 어느 정도 닮아 보였다.“내 동생이야. 내 동생을 유혹해서 그 옆에 남아있는 거야.”최주하는 간결하게 설명했다.여자는 혼란스러워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조금은 꺼리는 눈치였다. 그녀의 목표는 분명 최주하였기 때문이다.최주하는 그녀의 태도를 보고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원하지 않는다면 그냥 나가. 강제로 시킬 생각은 없어.”“저 할게요. 하겠습니다.”여자는 곧장 마음을 다잡으며 간절히 말했다.최주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실망하게 하지 마.”최주하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자의 휴대전화에는 1억이 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