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서우는 협회에서 왜 자신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는지 잘 모르겠다. 편지 끝에는 협회에 오라는 초대까지 있었다.가장 먼저 떠오른 건 협회의 호의가 아니라 상대방이 또 이런 방식으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녀를 노리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인명진을 노리는 것은 아닌지 라는 생각이었다. 이혜성은 내키지 않아 하는 그녀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고 싶지 않아? 이건 협회의 초대야. 우리처럼 풋내기 신인은 평소에 이렇게 큰 인물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없어.”“하지만 협회에 들어간다면 얘기는 달라지지.”은서우는 고개를 저었다.“당분간은 그럴 생각 없는데.”“그럼 지도 교수는...”“그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지. 고마워. 그런데 더 이상 설득하지 마. 협회에 대해 좋은 인상이 있는 게 아니라서 들어가고 싶지 않아.”그녀는 담담하게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말했다. 이혜성은 그녀가 협회에 들어가길 바랬지만 단호하게 싫다고 하는 모습을 보고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자신을 배려하는 친구를 보며 은서우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러나 마음속의 걱정은 여전했다.한편, 인명진은 이곳에서 하루 더 머물렀고 내일은 그가 경성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은서우는 마침 그의 집으로 가서 이 일을 그에게 전해주려고 했다.결국 혼자서는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두 사람이 함께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인명진이 병이 날 줄은 몰랐다.가사 도우미한테서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믿지 않았다.“아프다고요? 그럴 리가요.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인명진 같은 사람도 아플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것 같다.가사 도우미는 한숨을 내쉬었다.“정말이에요. 꽤 심한 모양이더라고요. 급성 장염 때문에 아직도 열이 많이 나고 있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 전에 살펴보고 가셨고요.”“지금은 2층 침실에서 자고 계십니다.”그녀한테 인명진은 뭐든 해내는 슈퍼맨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 또한 평범한 인간이고 화낼
“방에 있으면서 할 일이 없어서요.”뜻밖에도 그가 한마디 해명했다. 그러나 해명을 안 하기보다 못했다.그녀의 눈썹이 일그러졌다.“방안에서 할 일이 없다니요?”안색이 어두워진 그녀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어찌 됐든 아프면 푹 쉬어야죠. 책은 내가 가지고 갈 테니까 얼른 가서 쉬어요.”누군가에게 이렇게 쫓기는 일이 처음이라 좀 신기했다.물론 은서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는 순순히 말을 듣지 않았을 것이다. 은서우만이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다.그러나 인명진은 침대로 가지 않고 의자에 가서 앉았다.“방금 볼일이 있어서 왔다고 했죠?”잠깐 망설이던 그녀가 말을 꺼냈다.“협회에서 나한테 메일을 보냈어요. 나도 조금 전에 확인한 거고요. 시간 되면 한번 왔다 가라고 하더라고요.”말을 마친 그녀는 긴장한 표정으로 인명진의 얼굴을 살폈다. 협회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그가 이 얘기를 들으면 분명 불쾌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기분이 안 좋아지면 방법을 생각해 그를 달래주려 했다.“뭐 하러요?”아니나 다를까 그는 듣자마자 바로 미간을 찌푸렸고 눈빛이 어두워지면서 매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협회에서 몰래 은서우를 찾아가다니. 그것도 그가 모르는 상황에서 말이다. 그녀는 인명진이 화가 난 이유를 오해했다. 그가 자신이 협회와 접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는 이내 자신은 협회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해명했다.“난 갈 생각이 없어요. 정말이에요.”조급해하는 그녀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왜요? 협회에 들어가면 좋은 점이 많을 텐데.”협회가 자신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지만 초보 의사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거라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었다.초보 의사들의 입장에서 협회는 기를 쓰고 들어가고 싶은 곳이었다. 의학계의 유명 인사들을 만날 수 있고 수많은 의료 서적들을 볼 수 있으니 들어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그러나 은서우는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단호한 눈빛을 보였다.“난 가지 않을 거예요.”“나 때문인가요?”그가 미간
호텔 바닥은 아수라장이었다.잠에서 깬 지유는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지유는 미간을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커다란 몸집을 가진 남자가 옆에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지나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은 조각과도 같았고 눈매도 깊고 진했다.아직 깊은 잠이 들어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지유가 몸을 일으키자 이불이 그녀의 몸에서 미끄러져 내렸고 뽀얗고 매혹적인 두 어깨에 어젯밤 남긴 흔적이 보였다.지유가 앉았던 자리에 선명한 핏자국이 보였다.시간을 보니 어느새 출근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유는 바닥에 널브러진 출근룩을 다시 집어 들어 얼른 갈아입었다.스타킹은 이미 남자에 의해 찢겨 있었다.지유는 스타킹을 돌돌 말아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하이힐을 신었다.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깔끔하게 차려입은 지유는 어느새 워커홀릭 비서로 완전히 돌아왔고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들어온 사람은 청순한 미녀였다.지유가 부른 사람이었다.이현의 취향이 이런 여자였다.지유가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침대에 누워서 대표님 깨나길 기다리면 돼요. 다른 건 한마디도 하지 마요.”지유는 고개를 돌려 아직 단잠에 빠진 남자를 힐끔 쳐다봤다. 억울한 마음에 코끝이 찡해졌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방에서 나왔다.지유는 두 사람이 어젯밤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이현이 아는 게 싫었다.그들 사이에 계약에 의하면 아무도 모르게 3년간 결혼을 유지하면 바로 이혼할 수 있었다.이 기간에 선을 넘는 행동은 그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지유는 7년째 이현의 비서로, 3년째 이현의 와이프로 있었다.졸업한 그날부터 이현의 곁을 한시도 떠난 적이 없었다.같은 날, 이현은 지유에게 두 사람은 그저 상사와 부하의 관계일 뿐 이 관계를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지유는 복도 창가에 서서 어제 일을 떠올렸다. 이현은 그녀를 안고 침대에 누워 ‘승아’라는 이름을 연신 불러댔다.지유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승아는 이현의 첫사랑이었다.이현은 지유를 승
이에 지유가 화들짝 놀라며 하마터면 발을 삐끗할 뻔했다.중심을 잘 잡지 못한 지유는 그렇게 이현의 몸에 기댔다.이현은 지유의 몸이 앞으로 쏠리자 손으로 지유의 허리를 잡아줬다.뜨거운 체온이 전해지자 지유는 어젯밤 그가 저돌적으로 그녀를 덮치던 화면이 떠올랐다.지유는 가까스로 진정하고 고개를 들어 이현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 봤다.이현의 눈동자는 매우 진지했고 그 속엔 질문과 의혹도 담겨 있었다. 눈빛은 지유를 뚫어버릴 것만 같았다.지유는 심장이 벌렁거렸다.이현과 더는 눈을 마주칠 엄두가 나지 않아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아까 나간 그 여자라고 생각했을 때도 이현은 불같이 화를 냈는데 여기서 만약 지유가 자신이었음을 인정한다면 후과가 그리 좋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아니라고 하기엔 억울했다.만약 어젯밤 잠자리를 가진 사람이 지유라는 걸 이현이 알게 된다면 결혼 생활을 조금이라도 더 이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그래도 지유는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게 겁나 고개를 숙인 채로 물어봤다.“그건 왜 묻는 거예요?”지유는 사실 남몰래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이현이 코웃음을 치더니 이렇게 말했다.“너는 그런 용기가 없을 것 같아서.”지유는 멈칫하더니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어쩌면 이현은 어젯밤 잠자리를 가진 사람이 지유가 아니길 더 바랄지도 모른다. 계약 결혼일뿐이니 말이다.게다가 며칠만 더 지나면 계약도 끝나간다순간 이현이 지유의 손을 힘껏 낚아챘다.지유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이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심사하듯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지유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발버둥 치며 손을 빼려 했지만 이현이 지유를 전신 거울 앞으로 바짝 몰아갔다.“뭐 하는 거예요?”지유는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긴장과 두려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너 정말 사무실에서 잠들었어?”지유는 칠흑같이 어두운 이현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혹시나 들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3년 전, 결혼한 첫날 밤, 지유는
고개를 들어보니 승아가 앞치마를 두르고 손에 국자를 들고 있었다.지유를 본 승아는 표정이 살짝 굳었다가 다시 부드럽게 인사했다.“아주머니 손님이에요? 마침 삼계탕을 조금 더 끓였는데 같이 와서 먹어볼래요?”승아의 느긋한 태도는 마치 그녀가 이곳의 안주인인 것 같았다.오히려 지유가 멀리서 찾아온 손님처럼 보였다.하긴 얼마 지나지 않아 지유는 곧 이 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된다.지유는 이런 거지 같은 상황에 미간이 찌푸려졌다.이현과 결혼할 때 모든 사람에게 알렸고 승아도 축복을 보내왔기에 지유가 이현의 와이프라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승아는 지유가 문 앞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자 얼른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왔으면 손님이죠. 얼른 들어와요.”승아가 가까이 다가오자 옅은 재스민 향이 풍겨왔다. 이현은 작년 생일에 지유에게 똑같은 향수를 선물했다.지유는 목구멍이 점점 메어와 숨쉬기가 힘들었고 다리가 천근만근인 듯 움직이기 힘들었다.여진숙은 지유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자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지유야, 여기 서서 뭐 하는 거야? 손님이 왔으면 차라도 내와야지.”지유는 승아와 겨뤄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물었다.“어머님, 승아 씨가 왜 우리 집에 있는 거예요?”여진숙이 답했다.“승아도 오랜만에 귀국했으니 한 번쯤은 나 보러 와야 할 거 아니니? 왜? 승아가 우리 집에 오면 안 돼? 현이도 뭐라 안 하는데 네가 뭐라고 시비야?”“그런 뜻 아니에요.”지유가 고개를 푹 숙였다.“아, 지유 언니였구나. 이현 오빠가 결혼사진을 보여준 적이 없어서 못 알아봤네요. 기분 상했다면 죄송해요.”지유는 환하게 웃는 승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허.’하긴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여자에게 다른 여자와 결혼한 사진을 보여줄 리가 없지.이때 여진숙이 호통치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얼른 승아한테 차를 내주지 않고 뭐 해?”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놓은 주전자를 들었다.승아는 여진숙과 웃고 떠들며
“지유 언니 오늘 기분이 별로 안 좋다면서 오기 싫다고 해서 내가 올 수밖에 없었어요.”승아는 얼른 손에 난 덴 자국을 일부러 보여주며 말했다.“오빠도 지유 언니 너무 미워하지 마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예요. 일을 그르친 건 아니죠?”지유가 회사의 서류를 다른 사람에게 넘긴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이현은 안색이 너무 어두웠지만 승아 앞이라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넥타이를 살짝 풀며 덤덤하게 말했다.“아니야.”이현은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왔으니 앉아.”이현의 말에 승아는 내심 기뻤다. 그녀를 받아준다는 건 그래도 미워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회의하러 간다면서요? 내가 방해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이현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이렇게 말했다.“회의 시간 뒤로 30분 미루세요.”승아는 입꼬리가 올라갔다. 전에 인사도 없이 떠나서 혹시나 이현이 원망하면 어쩌지 했는데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심각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잃어버린 시간은 다시 메꾸면 된다.소파에 앉은 승아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해명하려 했다.“오빠,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요. 그때 내가 인사도 없이 떠난 거 잘못한 거 알아요. 근데 지금은 다시 돌아왔으니까...”“먼저 일 처리 좀 할게.”이현이 승아의 말을 잘라버렸다.승아는 하려던 말을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바빠 보이는 이현의 모습에 승아는 별수 없이 이렇게 말했다.“오빠 일 끝나는 거 기다릴게.”승아는 방해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남은 반 시간 중 얼마나 더 앉아 있어야 마주 보고 앉아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약간 이현의 속내를 맞히기 어려웠다.진호가 안으로 들어와서야 이현은 하던 일을 멈췄다.이현이 걸어오자 승아가 웃으며 말했다.“오빠, 나...”“손은 아직도 아파?”그녀의 상처를 발견했다는 건 그녀를 걱정한다는 걸까?승아가 잽싸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이제 안 아파요.”“응.”이현이 가볍게 대답하더니 진호의 손에서 한약을 받아왔다.“귀국해서 계속 속이 안 좋다며, 목
지유는 걸음을 멈췄다. 이현과는 부부 관계에서 오는 조화로움보다는 위계질서에서 오는 거리감이 더 컸다.“대표님, 지시 사항 있으신가요?”이현이 고개를 돌리더니 거리감이 느껴지는 지유의 얼굴을 보며 명령조로 말했다.“앉아.”지유는 이현이 무엇을 하려는지 몰랐다.이현이 지유 쪽으로 걸어갔다.지유는 자신과 가까워지는 이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순간 이현이 어딘가 달라 보였고 이에 지유는 숨이 가빠졌다.긴장하기도 하면서 어딘가 이상했다.그녀가 딱히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이현이 먼저 그녀의 손을 잡았다.이현의 따듯한 손이 지유의 몸에 닿자 그녀는 마치 데이기라도 한 것처럼 얼른 손을 빼려 했다. 하지만 이현이 너무 꽉 잡고 있어 빼려고 해도 뺄 수가 없었다. 이현은 지유를 확 끌어당기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손 다쳤잖아, 몰랐어?”이현의 관심이 지유는 퍽 의외였다.“난... 괜찮아요.”“수포까지 났어.”이현이 물었다.“왜 나한테 얘기하지 않은 거야?”이현이 큰 손으로 그녀의 상처를 살폈다. 지유는 그런 이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3년이라는 시간 동안 지유는 이현의 손을 잡고 그가 따듯함으로 그녀를 이끌어주기를 바랐다.하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다.지유가 포기하려 할 때마다 이현은 다시 희망을 주었다.“큰일 아니에요. 며칠이면 나아요.”지유가 대답했다.“연고 좀 가져오라고 할게.”지유는 눈시울이 붉어지는 걸 느꼈다. 몇 년의 기다림 끝에 이제 좀 보상받는 것 같았다.하지만 지유는 이성적이었다. 이현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이현은 연고를 가져와 그녀의 상처에 발라줬다. 지유는 그녀의 앞에 쪼그리고 앉은 어딘가 조심스러워 보이는 이현에 혹시 자신도 그가 아끼고 사랑하는 여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상처가 나니 그래도 눈길을 주는 이현이었다.7년이나 옆을 지키면서 극진하게 챙겨주기보다 차라리 조그마한 상처를 내는 게 그의 이목을 끄는 데에는 더 낫겠다는 우스운 생각까지 들었다.다친 게 아깝지 않았다.하염없이
지유는 눈앞이 까매지며 어지러웠다. 그때 누군가 다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이런 실수를 하면 어떡해요? 온 비서님, 온 비서님...”그 목소리가 점점 가물가물해졌고 지유는 그대로 쓰러졌다.다시 깨어나 보니 병원이었다. 하얀 천정을 보고 있노라니 아직도 머리가 어지러웠고 깨질 듯이 아팠다.“온 비서님, 깨셨어요?”윤정이 눈시울을 붉히며 의자에서 일어나 다급하게 그녀의 상황을 확인했다.“어디 불편한 데 없어요? 의사 부를까요?”지유는 아직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윤정을 보며 몸을 일으켰다.“저는 괜찮아요. 공사장은 어떻게 됐어요? 다른 부상자는 없어요?”윤정이 말했다.“일단 공사장 일은 상관하지 마세요. 떨어진 유리에 뇌진탕이 왔대요. 어찌나 놀랐는지. 저는 온 비서님 못 깨어나는 줄 알았어요.”윤정은 다시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다.윤정은 지유를 따라다니며 일을 돕는 비서와도 같은 존재였기에 평소에 지유는 윤정을 많이 아꼈다.아직 젊은 윤정은 이런 상황을 맞닥트려본 적이 없어 많이 놀란 것 같았다.“저 이제 깼잖아요. 걱정하지 마요.”지유가 그런 윤정을 다독였다.머리를 만져보니 머리엔 붕대가 감겨 있었고 아직 통증이 느껴졌다. 지유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렇게 물었다.“공사장은 괜찮아요?”갑자기 일어난 사고로 시공에 영향줄까 봐 무서운 지유였다.“괜찮아요. 온 비서님, 이렇게 심하게 다쳤는데 그깟 공사장이 무슨 대수에요? 평소에도 힘들게 일하시면서 저까지 신경 써 주시는데 이참에 얼른 누워서 쉬세요.”윤정은 너무 죄책감이 들었다. 자신이 재촉하지만 않았더라면 지유가 이런 사고를 당할 일도 없다고 생각했기에 업무와 관련된 일은 아무것도 보고하고 싶지 않았다.지유는 이미 습관된 것 같았다.몇 년간 업무를 수행하는 기계처럼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이현의 기분을 생각해 업무 전반을 다 챙겼다.그러니 자기도 모르게 업무부터 걱정했다.게다가 여씨 집안에 빚진 20억도 있으니 마음 편히 있을 수가 없었
“방에 있으면서 할 일이 없어서요.”뜻밖에도 그가 한마디 해명했다. 그러나 해명을 안 하기보다 못했다.그녀의 눈썹이 일그러졌다.“방안에서 할 일이 없다니요?”안색이 어두워진 그녀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어찌 됐든 아프면 푹 쉬어야죠. 책은 내가 가지고 갈 테니까 얼른 가서 쉬어요.”누군가에게 이렇게 쫓기는 일이 처음이라 좀 신기했다.물론 은서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는 순순히 말을 듣지 않았을 것이다. 은서우만이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다.그러나 인명진은 침대로 가지 않고 의자에 가서 앉았다.“방금 볼일이 있어서 왔다고 했죠?”잠깐 망설이던 그녀가 말을 꺼냈다.“협회에서 나한테 메일을 보냈어요. 나도 조금 전에 확인한 거고요. 시간 되면 한번 왔다 가라고 하더라고요.”말을 마친 그녀는 긴장한 표정으로 인명진의 얼굴을 살폈다. 협회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그가 이 얘기를 들으면 분명 불쾌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기분이 안 좋아지면 방법을 생각해 그를 달래주려 했다.“뭐 하러요?”아니나 다를까 그는 듣자마자 바로 미간을 찌푸렸고 눈빛이 어두워지면서 매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협회에서 몰래 은서우를 찾아가다니. 그것도 그가 모르는 상황에서 말이다. 그녀는 인명진이 화가 난 이유를 오해했다. 그가 자신이 협회와 접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는 이내 자신은 협회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해명했다.“난 갈 생각이 없어요. 정말이에요.”조급해하는 그녀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왜요? 협회에 들어가면 좋은 점이 많을 텐데.”협회가 자신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지만 초보 의사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거라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었다.초보 의사들의 입장에서 협회는 기를 쓰고 들어가고 싶은 곳이었다. 의학계의 유명 인사들을 만날 수 있고 수많은 의료 서적들을 볼 수 있으니 들어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그러나 은서우는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단호한 눈빛을 보였다.“난 가지 않을 거예요.”“나 때문인가요?”그가 미간
은서우는 협회에서 왜 자신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는지 잘 모르겠다. 편지 끝에는 협회에 오라는 초대까지 있었다.가장 먼저 떠오른 건 협회의 호의가 아니라 상대방이 또 이런 방식으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녀를 노리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인명진을 노리는 것은 아닌지 라는 생각이었다. 이혜성은 내키지 않아 하는 그녀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고 싶지 않아? 이건 협회의 초대야. 우리처럼 풋내기 신인은 평소에 이렇게 큰 인물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없어.”“하지만 협회에 들어간다면 얘기는 달라지지.”은서우는 고개를 저었다.“당분간은 그럴 생각 없는데.”“그럼 지도 교수는...”“그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지. 고마워. 그런데 더 이상 설득하지 마. 협회에 대해 좋은 인상이 있는 게 아니라서 들어가고 싶지 않아.”그녀는 담담하게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말했다. 이혜성은 그녀가 협회에 들어가길 바랬지만 단호하게 싫다고 하는 모습을 보고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자신을 배려하는 친구를 보며 은서우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러나 마음속의 걱정은 여전했다.한편, 인명진은 이곳에서 하루 더 머물렀고 내일은 그가 경성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은서우는 마침 그의 집으로 가서 이 일을 그에게 전해주려고 했다.결국 혼자서는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두 사람이 함께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인명진이 병이 날 줄은 몰랐다.가사 도우미한테서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믿지 않았다.“아프다고요? 그럴 리가요.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인명진 같은 사람도 아플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것 같다.가사 도우미는 한숨을 내쉬었다.“정말이에요. 꽤 심한 모양이더라고요. 급성 장염 때문에 아직도 열이 많이 나고 있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 전에 살펴보고 가셨고요.”“지금은 2층 침실에서 자고 계십니다.”그녀한테 인명진은 뭐든 해내는 슈퍼맨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 또한 평범한 인간이고 화낼
이 협회는 의학계에서 설립한 협회였고 회원들은 모두 명망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어 신석림처럼 유명한 의사거나 이준서같이 배경이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협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두 부류로 나뉘어졌다.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집단을 만들지 않고 사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으며 오롯이 자신의 본업에만 충실하고 오로지 실력으로 협회에 들어온 사람들이었다.한때 인명진도 협회의 사람이었지만 나중에는 협회에서 탈퇴했다. 이것들은 모두 그녀가 우연히 인명진한테서 알게 된 사실이다. 오랫동안 협회에 대해 궁금했던 그녀는 마침내 협회의 포럼을 봤고 저도 모르게 눈이 움직였다.그러다가 이내 빨간색으로 표시된 글씨가 한눈에 들어왔다.[이름도 없는 젊은 의사가 무엇 때문에 전무후무한 수술을 성공할 수가 있었겠는가? 클릭하면 그 내막을 볼 수 있습니다.]이혜성은 냉큼 핸드폰을 빼앗아 버렸다.“어디나 이런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야. 신경 쓸 거 없어.”이혜성이 자신에게 보여주기를 꺼리는 것을 보고 은서우는 그 안의 내용이 좋은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약간 실망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협회에 조금이나마 기대를 걸었었는데 지금은 그런 기대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어. 이런 사람이 글을 올리도록 하는 것을 보면 협회가 어떤 곳인지 충분히 설명이 되니까.”이혜성은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고는 급히 다가와 그녀의 입을 막았다.“이런 말을 함부로 하면 어떡해? 간도 크다.”은서우는 그녀의 손을 끌어내렸다.“왜 말하면 안 되는데? 내 실력으로 성공시킨 수술이야. 그런데 그들은 뒤에서 악의적으로 날 비방하고 있어. 들어가 안 봤길래 다행이지 들어가 봤으면 얼마나 어마어마한 내용이 있을지 상상도 안 돼.”아무리 성격이 좋은 사람이라도 화를 낼 줄 안다. 하물며 원래 성격이 톡 쏘는 은서우는 더 말할 것도 없지.어쩌면 전에 하도 참고 살아서 이제 와서 폭발한
조금 전에 그가 직접 배웅까지 했던 김민재였다.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입니까?”“인 선생님께 감사하다는 인사도 하고 충고 한마디 할까 해서요. 모든 사람이 당신의 냉담함을 감당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가끔은 먼저 다가가야 합니다.”“무슨 뜻인가요?”인명진은 핸드폰을 꽉 쥐며 미간을 찌푸렸다.전화를 끊을지 말지 고민 중이었다. 의미 없는 전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런데 전화기 너머의 사람은 마치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그 생각 해보셨습니까? 어쩌면 상대방도 원하고 있다는걸요.”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사실 자신에 대한 그녀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살아온 지난날들을 생각하면 망설여졌다. 멋도 없고 차갑기만 죽은 나무처럼 심장이 얼어붙은 자신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남들은 봄이 돌아오면 그가 새싹을 틔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이미 죽은 지 오래되었다.은서우는 그와 다른 사람이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스스로 이렇게 독단적인 선택을 했고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며 그녀를 차갑게 밀어냈다. 계속해서 자신을 속이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연기를 했다. 그러나 그의 거짓말이 누군가에 의해 들통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마음속에 숨겨두었던 가장 진실한 문제를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마음이 있다면 좀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세요. 은 선생님처럼 좋은 여자는 언제든지 다른 남자한테 빼앗길 수가 있으니까.”말을 마친 김민재는 쿨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김민재의 전화를 끊고 그는 차 시트에 기대어 앉아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그와 김민재는 사실 친분이 좀 있었고 몇 마디 나눌 수 있는 친구 사이였다. 김민재는 그를 진심으로 상대했고 방금 한 말도 그를 위하는 마음에서 한 진심 어린 충고였을 것이다. 머릿속에 맴도는 말을 곱씹다 보니 그의 눈
그녀는 업무 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인명진이 왜 갑자기 이 일에 개입했는지에 대해서 전혀 깊이 생각하지 않았고 김민재가 병원에 머무르기를 원하지 않는 남자의 마음 또한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A 도시 병원에 김민재가 아는 의사라고는 은서우 뿐이었고 만약 그가 병원에 남아 있는다면 분명 은서우한테 자신을 보살펴 달라고 부탁할 것이다. 그럼 경성에 있는 인명진은 어쩔 방법이 없게 된다.자신이 없는 곳에서 두 사람이 밤낮으로 함께 있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생각하니 인명진의 눈빛에 저절로 한기가 돌았다. 으스스한 분위기에 은서우는 에어컨 바람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이 옷을 적게 챙겨 입은 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전혀 인명진의 마음을 알지 못하였다. 퇴원 절차는 이내 이루어졌고 그날 오후, 김민재는 사람들을 불러 짐정리를 하고 퇴원 준비를 했다. 자신이 치료한 환자이고 오랫동안 알고 지냈기 때문에 은서우는 특별히 하던 일을 내려놓고 그를 배웅하러 왔다. 김민재는 옆에 있던 인명진을 보고 일부러 물었다.“은 선생님, 한번 안아봐도 될까요?”그녀는 어안이 벙벙해졌다.무의식적으로 옆에 있는 인명진을 보고 싶었지만 끝내 참았다. 그녀한테 물어본 것이지 인명진한테 물어본 것이 아니었고 게다가 이 일은 그녀의 일이니 그녀 스스로 결정해야 할 문제였다.이런 일까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물어봐야 하는 건 아니니까.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는 대담하게 대답했다.“그래요.”이내 팔을 뻗어 김민재와 포옹했다. 남녀 사이의 애틋한 포옹이 아니라 단순히 작별의 의미에서의 포옹이었고 닿는 순간 이내 몸이 떨어졌다. 그러나 인명진은 그 모습을 보기가 불편했고 은서우가 김민재의 품에서 빠져나오기도 전에 손을 뻗어 옷깃을 잡고 그녀를 끌어당겼다.“원장님?”그녀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너무 과격하게 반응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때, 김민재가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인 선생님은 다른 사람이 보는 게 두려워서 그랬을 겁니다. 소문
이준서가 이를 악문 채 그녀를 쳐다보며 뭔가 따지려고 하는데 그때 인명진이 그녀를 자신의 곁으로 끌어당겼다.인명진은 차갑게 그를 노려보았다.“당신이 이곳에서 행패를 부릴 입장은 아닌 것 같네요.”“인명진.”그의 말을 무시한 채 인명진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를 쳐다보았다.“괜찮아요? 아파요?”손목이 빨개졌다. 그러나 진지한 그의 옆모습을 본 순간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하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프지 않아요. 당신이 있으면 저 사람도 나한테 어찌하지 못할 거예요. 그래도 여기서 그만 얘기하고 얼른 가요.”“그래요.”고개를 끄덕이던 인명진은 담담하게 이준서를 쳐다보며 한 마디 내뱉었다. “이번 내기에서는 내가 이겼습니다. 돌아가서 당신 선생님께 전해요. 협회에서 경성과 A 도시의 일까지 손을 뻗지 말라고요. 그렇지 않으면 그 나이에 크게 망신을 당하게 될 겁니다.”말을 마치고 두 사람은 긴 복도를 떠났다.이준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은서우는 보지 않았다.다만 인명진이 조금 걱정되었다. “아까 한 얘기 말이에요. 정말 저들과 완전히 사이가 틀어진 거예요? 신 선생님 쪽은...”어쨌거나 신석림은 의학계에서 지위가 높은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그녀마저도 그의 명성을 들었을 정도이니 인명진이 곤경에라도 처할까 봐 두려웠다.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그가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걱정하지 말아요.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그리고 사이가 틀어진 지는 오래되었어요.”크게 신경 쓰지 않는 그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그녀는 그제야 안심되었다. 한편, 김민재는 수술이 끝난 후에도 약을 복용하면서 체내의 세포 분열 속도를 억제하였다. 관찰 기간은 몇 달에서 반년 정도였다.그래도 그는 매우 만족했다. 그리고 은서우에 대한 고마움이 가득했다.“고마워요. 당신이 아니었다면... 난 아마 평생 이 연구소를 떠날 수 없었을 겁니다.”김민재가 그녀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은서우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처음 그가 이
그 당시 그는 이 일이 이준서 그리고 신석림과 관련된 일이라고 짐작했었다.“당신들은 협회의 일원으로서 어떻게 하면 많은 환자에게 혜택을 줄 수 있을지는 생각하지 않고 허구한 날 어떻게 하면 독점할 생각부터 하고 있네요. 나도 당신들 같은 사람으로 만들 생각입니까? 꿈도 꾸지 말아요.”인명진은 경멸이 가득 찬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준서의 얼굴에 웃음이 점차 사라졌다. 그가 인명진을 혐오스럽게 바라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랐다.“그거 알아요? 난 당신같이 잘난 척하는 사람이 참 별로더라고요. 좋은 마음에서 귀띔해 주는 건데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더 이상 뭐라 하지 않겠습니다.”“어차피 수술이 실패하면 당신은 내기에서...”내기에서 진다는 말을 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였다.잠시 후, 수술실의 불이 꺼졌고 미닫이문이 좌우로 열리자 은서우가 달려 나왔다. 그녀는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가장 먼저 인명진에게로 달려갔다.지금 이 순간, 그녀의 눈에는 그밖에 보이지 않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목소리가 한껏 들떠있었다.“인명진 씨, 나 해냈어요. 수술 성공했다고요.”그가 자신의 품 안에서 폴짝폴짝 뛰는 그녀를 한 손으로 받쳐주며 옅은 미소를 지었어요.“잘했어요.”간단한 한마디 말이었지만 은서우는 만족스러웠다.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이 순간만큼은 보람을 느꼈다. 이건 단지 그녀에 대한 인정뿐만이 아니라 그녀에게도 자신의 능력을 되짚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힘들었던 지난 시간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자신에게는 의사가 될 자격이 없다고 의심했던 것 같다. 열등감이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었다는 걸 그녀조차도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것들은 모두 과거가 되었고 보이지 않는 열등감과 어둠이 모두 먼지처럼 사라졌다. 그녀도 이젠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요. 방금 수술할 때...”이준서를 발견한 순간, 은서우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시선에 그녀는 지금 자신의 자
수술 날짜가 다가오자 은서우는 밤낮으로 바삐 돌아쳤고 누락된 부분이 없는지 몇 번이나 확인해 보았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그녀는 깊은숨을 들이마셨다.“서우 씨, 힘내요.”옆에 있던 간호사가 입을 열었다. 이번 수술은 특별하기 때문에 조수와 간호사는 모두 병원의 사람들이 아니었고 프로젝트팀에서 배정된 사람들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준서 쪽의 사람들이었다. 주변에 아는 사람이 없어서 은서우는 매우 초조했다. 직접 수술을 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데다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혼자 수술을 마쳐야 하니 불안하기만 했다. 그러나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른 이상 돌이킬 수가 없었다. 은서우는 장갑을 착용하고 수술 준비를 했다. 수술실로 들어가려는 찰나, 누군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그 사람은 멀지 않은 곳에서 묵묵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를 보자마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인명진이었다. 불안과 걱정이 싹 사라졌고 순식간에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그녀는 온몸에 힘이 솟아올랐다.혼자가 아닌 한 앞으로 나아갈 용기가 있었다. 수술은 오랫 시간 진행되었다. 내과와 관련된 모든 수술은 쉬운 것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심장과 골수에 관한 수술이 가장 많은 시간과 정력을 소모했다.그녀는 온 정신을 가다듬고 수술에 집중하였고 자칫 사고라도 날까 봐 눈 한번 깜빡이지 못하였다. 시간은 일분일초가 흘러갔고 수술실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드디어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메스가 쟁반 위에 떨어졌다. 은서우는 마스크와 소독 장갑을 벗고 활짝 웃었다.“수술 성공입니다”수술실 밖, ‘수술 중’이라는 네온사인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남자는 밖에서 아무 말도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걱정이 되어 그런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저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기다리던 사람이 나와 환하게 웃으며 그한테 자신이 해냈다고 말하길 바랐다. 이때, 이준서가 다가와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이렇게 늦게 나온 걸 보면 내가 내기에서 이긴 것 같네요. 안 그래요
“김수연.”무거운 목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고 이내 은서우는 검은색 양복에 모자와 마스크를 쓴 남자가 걸어오는 것을 보게 보였다.꽁꽁 싸매고 있었지만 남자의 하얀 속눈썹과 눈을 보고 은서우는 한눈에 알아봤다. 백색증을 앓고 있는 자신의 환자 김민재라는 것을. 김민재도 여기서 인명진과 은서우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여긴 어떻게...”인명진도 김민재를 알아보고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사과하라고 하세요.”김민재가 입을 열기도 전에 김수연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은서우에게 사과했다.“미안해요. 내가 너무 제멋대로 굴었어요. 용서해 줘요.”그녀가 이렇게 빨리 사과할 줄은 몰랐다. 김민재도 평소 제멋대로 굴던 동생이 이렇게 빨리 사과할 줄은 몰랐다.“용서할게요. 하지만 성격 좀 고쳐요. 누구나 당신을 용서해 주는 건 아니니까. 여기저기서 이렇게 제멋대로 굴지 말고요.”말을 마치고 난 은서우는 바로 자리를 떴다.김민재가 그녀의 환자이긴 하지만 이 일은 김수연과 그녀 사이의 일이었고 지금은 근무시간이 아니니까 그들과 더 접촉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인명진이 그녀의 뒤를 따라왔다.“원장님, 감사합니다.”그녀가 고개를 돌리고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왜 나한테 고맙다고 해요?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방금 원장님께서 나서서 편들어 주셨잖아요. 다만 오랫동안 적어두었던 노트가 없어졌네요.”그녀는 열심히 강의를 들으며 메모했고 미래에 대한 계획도 생각하고 있었다.그런데 노트가 이렇게 허무하게 없어져서 그녀는 화가 났다.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수심이 가득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인명진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노트가 없어도 괜찮아요. 중요한 건 서우 씨 머릿속에 있는 지식이니까. 기억나지 않는다면 나한테 문자 해요. 아니면 우리 집에 와요. 내가 따로 가르쳐줄게요.”그 말에 은서우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정말이에요?”“내가 언제 거짓말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