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전에 그가 직접 배웅까지 했던 김민재였다.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입니까?”“인 선생님께 감사하다는 인사도 하고 충고 한마디 할까 해서요. 모든 사람이 당신의 냉담함을 감당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가끔은 먼저 다가가야 합니다.”“무슨 뜻인가요?”인명진은 핸드폰을 꽉 쥐며 미간을 찌푸렸다.전화를 끊을지 말지 고민 중이었다. 의미 없는 전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런데 전화기 너머의 사람은 마치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그 생각 해보셨습니까? 어쩌면 상대방도 원하고 있다는걸요.”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사실 자신에 대한 그녀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살아온 지난날들을 생각하면 망설여졌다. 멋도 없고 차갑기만 죽은 나무처럼 심장이 얼어붙은 자신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남들은 봄이 돌아오면 그가 새싹을 틔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이미 죽은 지 오래되었다.은서우는 그와 다른 사람이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스스로 이렇게 독단적인 선택을 했고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며 그녀를 차갑게 밀어냈다. 계속해서 자신을 속이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연기를 했다. 그러나 그의 거짓말이 누군가에 의해 들통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마음속에 숨겨두었던 가장 진실한 문제를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마음이 있다면 좀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세요. 은 선생님처럼 좋은 여자는 언제든지 다른 남자한테 빼앗길 수가 있으니까.”말을 마친 김민재는 쿨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김민재의 전화를 끊고 그는 차 시트에 기대어 앉아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그와 김민재는 사실 친분이 좀 있었고 몇 마디 나눌 수 있는 친구 사이였다. 김민재는 그를 진심으로 상대했고 방금 한 말도 그를 위하는 마음에서 한 진심 어린 충고였을 것이다. 머릿속에 맴도는 말을 곱씹다 보니 그의 눈
이 협회는 의학계에서 설립한 협회였고 회원들은 모두 명망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어 신석림처럼 유명한 의사거나 이준서같이 배경이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협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두 부류로 나뉘어졌다.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집단을 만들지 않고 사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으며 오롯이 자신의 본업에만 충실하고 오로지 실력으로 협회에 들어온 사람들이었다.한때 인명진도 협회의 사람이었지만 나중에는 협회에서 탈퇴했다. 이것들은 모두 그녀가 우연히 인명진한테서 알게 된 사실이다. 오랫동안 협회에 대해 궁금했던 그녀는 마침내 협회의 포럼을 봤고 저도 모르게 눈이 움직였다.그러다가 이내 빨간색으로 표시된 글씨가 한눈에 들어왔다.[이름도 없는 젊은 의사가 무엇 때문에 전무후무한 수술을 성공할 수가 있었겠는가? 클릭하면 그 내막을 볼 수 있습니다.]이혜성은 냉큼 핸드폰을 빼앗아 버렸다.“어디나 이런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야. 신경 쓸 거 없어.”이혜성이 자신에게 보여주기를 꺼리는 것을 보고 은서우는 그 안의 내용이 좋은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약간 실망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협회에 조금이나마 기대를 걸었었는데 지금은 그런 기대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어. 이런 사람이 글을 올리도록 하는 것을 보면 협회가 어떤 곳인지 충분히 설명이 되니까.”이혜성은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고는 급히 다가와 그녀의 입을 막았다.“이런 말을 함부로 하면 어떡해? 간도 크다.”은서우는 그녀의 손을 끌어내렸다.“왜 말하면 안 되는데? 내 실력으로 성공시킨 수술이야. 그런데 그들은 뒤에서 악의적으로 날 비방하고 있어. 들어가 안 봤길래 다행이지 들어가 봤으면 얼마나 어마어마한 내용이 있을지 상상도 안 돼.”아무리 성격이 좋은 사람이라도 화를 낼 줄 안다. 하물며 원래 성격이 톡 쏘는 은서우는 더 말할 것도 없지.어쩌면 전에 하도 참고 살아서 이제 와서 폭발한
은서우는 협회에서 왜 자신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는지 잘 모르겠다. 편지 끝에는 협회에 오라는 초대까지 있었다.가장 먼저 떠오른 건 협회의 호의가 아니라 상대방이 또 이런 방식으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녀를 노리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인명진을 노리는 것은 아닌지 라는 생각이었다. 이혜성은 내키지 않아 하는 그녀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고 싶지 않아? 이건 협회의 초대야. 우리처럼 풋내기 신인은 평소에 이렇게 큰 인물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없어.”“하지만 협회에 들어간다면 얘기는 달라지지.”은서우는 고개를 저었다.“당분간은 그럴 생각 없는데.”“그럼 지도 교수는...”“그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지. 고마워. 그런데 더 이상 설득하지 마. 협회에 대해 좋은 인상이 있는 게 아니라서 들어가고 싶지 않아.”그녀는 담담하게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말했다. 이혜성은 그녀가 협회에 들어가길 바랬지만 단호하게 싫다고 하는 모습을 보고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자신을 배려하는 친구를 보며 은서우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러나 마음속의 걱정은 여전했다.한편, 인명진은 이곳에서 하루 더 머물렀고 내일은 그가 경성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은서우는 마침 그의 집으로 가서 이 일을 그에게 전해주려고 했다.결국 혼자서는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두 사람이 함께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인명진이 병이 날 줄은 몰랐다.가사 도우미한테서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믿지 않았다.“아프다고요? 그럴 리가요.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인명진 같은 사람도 아플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것 같다.가사 도우미는 한숨을 내쉬었다.“정말이에요. 꽤 심한 모양이더라고요. 급성 장염 때문에 아직도 열이 많이 나고 있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 전에 살펴보고 가셨고요.”“지금은 2층 침실에서 자고 계십니다.”그녀한테 인명진은 뭐든 해내는 슈퍼맨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 또한 평범한 인간이고 화낼
“방에 있으면서 할 일이 없어서요.”뜻밖에도 그가 한마디 해명했다. 그러나 해명을 안 하기보다 못했다.그녀의 눈썹이 일그러졌다.“방안에서 할 일이 없다니요?”안색이 어두워진 그녀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어찌 됐든 아프면 푹 쉬어야죠. 책은 내가 가지고 갈 테니까 얼른 가서 쉬어요.”누군가에게 이렇게 쫓기는 일이 처음이라 좀 신기했다.물론 은서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는 순순히 말을 듣지 않았을 것이다. 은서우만이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다.그러나 인명진은 침대로 가지 않고 의자에 가서 앉았다.“방금 볼일이 있어서 왔다고 했죠?”잠깐 망설이던 그녀가 말을 꺼냈다.“협회에서 나한테 메일을 보냈어요. 나도 조금 전에 확인한 거고요. 시간 되면 한번 왔다 가라고 하더라고요.”말을 마친 그녀는 긴장한 표정으로 인명진의 얼굴을 살폈다. 협회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그가 이 얘기를 들으면 분명 불쾌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기분이 안 좋아지면 방법을 생각해 그를 달래주려 했다.“뭐 하러요?”아니나 다를까 그는 듣자마자 바로 미간을 찌푸렸고 눈빛이 어두워지면서 매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협회에서 몰래 은서우를 찾아가다니. 그것도 그가 모르는 상황에서 말이다. 그녀는 인명진이 화가 난 이유를 오해했다. 그가 자신이 협회와 접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는 이내 자신은 협회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해명했다.“난 갈 생각이 없어요. 정말이에요.”조급해하는 그녀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왜요? 협회에 들어가면 좋은 점이 많을 텐데.”협회가 자신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지만 초보 의사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거라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었다.초보 의사들의 입장에서 협회는 기를 쓰고 들어가고 싶은 곳이었다. 의학계의 유명 인사들을 만날 수 있고 수많은 의료 서적들을 볼 수 있으니 들어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그러나 은서우는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단호한 눈빛을 보였다.“난 가지 않을 거예요.”“나 때문인가요?”그가 미간
그러나 협회의 사람들한테 부탁하고 싶지는 않았다. 인명진뿐만 아니라 그녀도 그들이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어떻게든 되겠죠 뭐.”그녀의 모습을 보니 예상대로 깊이 생각하고 있지 않은 듯했다. 그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럴 줄 알았어요. 내가 이미 생각해 둔 게 있거든요. 추천서가 필요하다면 나중에 내가 써줄게요.”“정말요?”그녀는 눈빛을 반짝거리며 목소리를 높였다.사실 인명진을 찾아오려고 했었다. 그의 실력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것이었고 협회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도 인명진 한 사람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한테 너무 폐를 끼친다고 생각했다. 가뜩이나 많이 도와준 사람한테 추천서까지 써달라고 한다면 너무 뻔뻔스러울 것 같았다. 그녀는 기뻐하다가 이내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그건 너무 폐를 끼치는 게 아닐까요?”그가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한때 같은 병원에서 근무했으니 우리도 친구 아닌가요? 이런 사소한 일은 별거 아니에요. 폐를 끼친다고 생각하지 말아요.”그제야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추천서를 써줄 사람이 없을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녀는 남아서 인명진을 돌봤고 가사 도우미의 일도 발 벗고 나서서 했다.주방 밖, 가사 도우미는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 들어가려는 그녀를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정말 직접 하시게요?”은서우를 못 믿는 것이 아니라 인명진이 아직 아프고 위장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그녀 또한 함부로 음식을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은서우의 가는 손가락을 보면 요리할 줄 아는 사람은 같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한마디 한 것이었다. “제가 할게요. 아가씨처럼 젊은 사람은 기름기가 많은 주방과는 어울리지 않아요.”은서우는 머리를 묶으면서 대답했다.“아니에요. 이런 일에 익숙하거든요.”그 말 한마디에 어린 시절의 억울함과 수많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그 일들은 이미 다 지나간 일이었다.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말해
인명진은 눈 깜짝할 사이 죽 두 그릇을 먹었다. 배가 부르고 나서야 그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입을 닦았다.“죽 맛있네요.”가사 도우미가 웃으며 말했다.“서우 씨가 만든 거예요. 전 영양사라는 사람이 이런 방법도 생각해 내지 못하고. 오늘은 서우 씨가 와서 정말 다행이에요.”은서우는 어색하게 웃었다.“이건 그저 보통 가정집에서 먹는 방법이에요.”“어렸을 때 집안 형편이 별로였거든요. 입맛이 없으면 이런 죽을 만들어 먹었죠. 그래서 한번 만들어 본 건데 뜻밖에도 입맛에 잘 맞았나 보네요.”가사 도우미는 겸손하다고 연신 그녀를 칭찬했다.인명진은 테이블 위에 놓은 음식들을 보며 마음이 따뜻해졌다.5성급 호텔의 요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만들어준 사람의 마음이 잔뜩 들어있는 음식들이었다. 은서우가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기분이 좋았다.“고마워요.”그가 그녀를 향해 말했다.잠시 어리둥절해 있던 그녀가 급히 입을 열었다.“별거 아니니까 고마워할 것 없어요.”인명진이 자신을 도와준 데에 비하면 이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이번 일을 마음에 담아두었다. 말은 하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대학원에 무사히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이틀 후, 몸이 괜찮아진 인명진은 경성으로 돌아갔다.경성 쪽에는 아직 많은 일들이 그가 처리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떠나기 전에 그는 자신의 노트를 은서우에게 건넸다. “이건 그동안 내가 적어두었던 노트예요. 내 생각들도 적어두었으니 시간 되면 한번 봐 봐요.”의사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을 내어주면서도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깃털처럼 가벼운 물건도 아닌데 말이다. 은서우는 깜짝 놀랐다. 손에 쥐고 있는 노트가 무겁게 느껴졌다. “이렇게 중요한 걸 나한테 그냥 주는 거예요? 안 돼요. 이건 받을 수가 없어요.”말을 하면서 그녀는 노트를 돌려주려고 했다.그러나 인명진이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막아섰다.“대학원에 들어가겠다면서요? 그냥 해본 소리입니까? 아니라면
무슨 이유로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문 앞에 있다고 하니 한 번은 만나봐야 할 것 같았다.은서우는 심호흡을 몇 번 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이준서는 사무실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고 은서우가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창턱에 있는 화분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이 박사님, 그건 제가 키우고 있는 화분이에요. 떨어뜨리지 마세요.”그러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화분이 창턱에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은서우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도 실내 쪽으로 떨어졌고 창문 밖으로 떨어진 게 아니었다. 아니면 화분이 떨어져서 사람을 다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화가 나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 박사님, 지금 뭐 하는 거예요?”은서우는 벌컥 화를 냈다. 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화분이 떨어졌으니 이건 일부러 그런 것이 틀림없다.이준서는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미안해요. 얼마예요? 내가 배상해 줄게요. 원하는 만큼 배상해 줄 테니까 말만 해요.”은서우는 깊은숨을 들이마셨다.‘어쩐지 성격이 차분한 인명진도 싫은 티를 팍팍 내더라니. 정말 꼴 보기 싫은 인간이야.’“괜찮습니다. 제가 직접 살 거예요. 여긴 어쩐 일이세요?”“더 이상 긴말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방금 당신을 찾아간 사람이 이미 명확하게 말했을 거 아니에요? 선생님께서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세요.”이준서는 한 손을 바지 주머니를 내밀었고 검은색 귀걸이가 살짝 빛을 반짝였다.은서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신 선생님께서 저를요? 왜죠?”그녀는 자신이 신석림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고 이준서와도 몇 마디 얘기를 나눈 게 다였다고 생각했다. 이준서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별일은 아니고요. 그냥 단순히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하시네요. 어쨌든 엄청난 수술을 성공시켰고 이제는 유명인이 되었잖아요. 안 그래요?”그의 입에서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것 같아 은서우는 그냥 포기하고 솔직하게 말했다.“그럼 돌아가서 전해요.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인명진을 향해 환하게 웃던 모습, 얼마나 순수하고 밝았는지 모른다.그러나 이준서 그를 향한 그녀의 얼굴은 차갑기만 했다. 차 키를 누르던 그가 백미러를 통해 그녀를 쳐다보았다.“좀 웃으면 안 됩니까? 무뚝뚝한 얼굴이 얼마나 보기 흉한지 모르죠?”은서우는 그한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전 의사이지 웃음을 파는 여자가 아니에요. 웃는 여자가 보고 싶다면 술집에 가서 찾아봐요. 돈 주면 실컷 볼 수 있을 테니까.”말문이 막힌 그의 안색이 점차 어두워졌다.인명진을 제외하고 그를 할 말이 없게 만드는 사람은 은서우가 처음이었다. 그녀는 아마 자신이 이준서의 마음속에 이미 인명진과 같은 혐오스러운 사람이 되었다는 걸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알아도 상관없었다. 전혀 신경 쓸 부분이 아니니까. 다만 서로에게 싫은 사람 일뿐. 협회는 생각한 것과 거의 비슷했다.딱 봐도 일반인이 발을 디딜 수 있는 곳이 아니었고 전문적으로 접대하는 고급 클럽처럼 보였다. 인테리어는 거의 대리석으로 되어있었고 으리으리했다. 프런트 데스크에는 사무직처럼 정장 차림을 한 여성이 있었고 이준서가 건네준 신분증을 확인하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이 박사님, 어서 오세요.”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은서우는 온몸이 불편할 정도였다. 이준서가 잠시 잡담을 나누는 것을 보고 그녀는 재촉하기 시작했다.“신 선생님은 어디 계시나요?”프런트 데스크의 직원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신석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그녀의 말투에 다소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러나 은서우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럴 여유도 없었다. 그냥 빨리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끝내고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던 이준서는 그게 습관이 되었는지 화를 내지 않았다.“뭐가 그리 급합니까?”은서우의 눈빛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어깨를 으쓱하며 직원과 이야기를 마치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고급스러운 곳은 엘리베이터도 으리으리했다. 엘리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