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사람들보다 피부가 하얗던 인명진의 등은 여드름 하나 없이 깔끔하고 매끈해 상처가 더욱 두드러지게 보였다.하지만 그런 건 신경을 쓸 여유조차 없었던 은서우는 약을 바르는 데에만 신경 썼다.반대로 인명진은 은서우의 숨결과 그녀의 손끝에 온 신경이 쏠려있었다.자신의 등이 이렇게 예민한지 이제야 알게 된 인명진은 늦은 후회를 하며 주먹을 꽉 쥐고 참고 있었다.갑자기 은서우는 상처를 입으로 호호 불어주며 말했다.“매우 아프죠? 좀 불어줄게요.”인명진은 순간 움찔하더니 즉시 셔츠를 잡아 올려 입고는 흰 가운을 걸치며 말했다.“이 정도면 됐어요. 고마워요.”텅 빈 사무실을 둘러보던 은서우는 그제야 단둘이 한 방에 있다는 걸 인식했다.누가 봐도 애매한 분위기였고,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떠오른 은서우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말했다.“원장님,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인명진은 어색한 분위기가 싫어 은서우의 말을 잘랐다. 그녀의 말을 듣기 싫어서가 아니라 자신조차 모르겠는 기분이 이상해서였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그만 가죠.”경찰서로 간 두 사람은 진술서를 작성했고 경찰의 협조하게 합의하려고 했지만, 상대방은 원만한 합의를 원하지 않았다.심지어 그 사람들은 자리에 앉는 순간부터 욕설을 퍼부었다.경찰이 책상을 두드리며 말렸지만 전혀 소용없었고 그 남자는 오히려 인명진을 가리키며 분노했다.“저 새끼가 내 딸을 죽였다고! 목숨은 목숨으로 갚아야지!”경찰은 막무가내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인상만 찌푸렸다. 은서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했다.“그렇다고 해도 법으로 해결해야지 이렇게 막무가내로 폭력을 쓰는 건 아니죠. 그리고 따지고 보면 이 일은 원장님과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잖아요.”은서우의 말에 가족들은 오히려 더 크게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고 그녀가 심호흡하고 다시 사건의 전말을 설명하려는 찰나 인명진이 입을 열었다.“제가 설명할게요.”인명진은 짧고 명확하게 사건의 자초지종을 설명했
깜짝 놀란 은서우는 인명진의 손을 잡고 여기저기 살피며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고 말했다.“손은 왜 이래요? 왜 방금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던 거예요?”은서우의 손을 피하며 상처를 숨기는 인명진의 차가운 눈매는 가로등 불빛을 받아 더욱 지치고 피곤해 보였다.“괜찮아요. 큰 상처도 아니고 놔두면 괜찮아져요.”“안 돼요.”은서우는 다시 인명진의 손을 끌어당겨 물티슈로 피를 닦은 뒤 상처에 밴드를 붙였다.자신의 상처를 치료하는 은서우를 조용히 지켜보던 인명진의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그는 차갑게만 느껴지던 가로등 불빛이 조금 따뜻하게 느껴졌고 복잡하고 예민했던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다음 날, 두 사람은 구태원을 찾아갔다.구태원은 외과에서 권위 있는 의사였는데, 원장 선거에서 인명진 보다 표수가 조금 모자라 원장에서 밀려났고 어쩔 수 없이 계속 외과 의사로 일하고 있었다.구태원은 모든 사실을 부정했다.“나 때문이라는 증거 있어요? 장기이식이 거부반응이 일어나는 건 정상적인 현상이잖아요. 누굴 탓하겠어요?”“하지만, 거부반응이 있다고 무조건 죽는 건 아니잖아요. 원장님이 안 계셨으면 구 선생님이 수술했어도 되고 아니면 원장님한테 연락해도 되잖아요.”구태원은 얼굴빛이 싹 변하더니 가볍게 한마디 했다.“깜빡했어요.”어이없는 구태원의 대답에 멍하니 있던 은서우는 이내 분노가 치밀어 올라 이성을 잃었다.‘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자기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는데 사과는커녕 잘못을 인정도 안 해? 그리고 그걸 전부 원장님한테 뒤집어씌운 거야?”인명진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은서우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는 듣기 거북한 욕을 듣는 것도 괜찮았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평가하든 다 상관없었지만, 환자의 죽음만은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었다.인명진은 만약 그 당시 자신이 있었다면 그 환자는 분명 살 수 있었을 거로 생각했다.짝!이성을 잃은 은서우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채 화가
구태원은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상이 밝혀졌다.여자아이의 죽음은 우연이 아니라 구태원이 이식할 간을 몰래 바꿔치기했기 때문에 거부반응이 생겼던 거였다.조사가 끝난 뒤 병원은 구태원의 착오로 인해 많은 돈을 배상했지만, 여전히 가족들의 아픈 마음은 보상해 줄 수 없었다. 결국 돈이 죽은 사람을 대신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은서우도 슬퍼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혐의를 벗은 인명진은 병원의 최신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시키겠다는 은서우와의 약속을 지켜주었다.나이도 어리고 실력도 인증되지 않은 은서우를 어려운 프로젝트에 참여시킨대고 생각했던 병원 사람들은 인명진의 결정에 불복했다.하지만 인명진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제 조수로 선택한 사람이에요.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책임지죠.”인명진이 자기 조수로 선택한 사람이라 굳이 다른 사람의 동의는 필요 없었다.그는 사람들의 불복에도 은서우를 연구에 참여시켰다.은서우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뒤 많은 전문 지식을 배웠고 실력도 나날이 발전했다. 그녀는 인명진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원장님, 시간 괜찮으세요?”은서우는 큰 용기를 내고 인명진의 사무실에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인명진은 얇은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들어와요.”은서우가 들어오자, 인명진은 그녀를 쭉 훑어보았다. 은서우는 며칠 전과는 달리 자신감이 생긴 것 같았다.예전에 그녀는 업무 능력이 누구보다 뛰어났지만, 항상 자신을 보잘것없는 존재로 생각했고 자신감이 부족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눈빛도 일거수일투족도 지금껏 본 적이 없는 자신감 넘치는 여유가 느껴졌다.인명진은 뿌듯한 눈빛으로 은서우를 바라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무슨 일이에요?”은서우는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원장님한테 신세 진 게 너무 많아서 보답으로 음식이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혹시 시간 괜찮으실까요?”인명진이 병원에 온 뒤로 많은 여자들이 은근히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고 식사 약속을 건네기도 했지만, 그는 단 한
“당장 카드에 사천만 원 보내. 휠체어를 좋은 거로 바꿔야겠어.”은서우는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타고 있는 휠체어도 산 지 얼마 안 됐잖아. 그건 그냥 핑계고, 또 다른데 탕진하고 싶은 거겠지.”속셈이 들킨 소태훈은 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헛소리 그만하고, 줄 거야 말 거야? 사천만 원만 보내주면 한동안 귀찮게 안 할 테니까 빨리 보내!”소태훈의 말에 지난 과거가 더욱 후회스럽고 원망스러워진 은서우는 휴대전화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은서우는 그날 밖에 나가지 말걸, 그 차를 타지 말걸, 수없이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그랬다면 죽는 사람이 자신이었을 거고, 그랬다면 최소한 이렇게 소씨 가문 사람들한테 시달리면서 살 필요도 없었겠지.소씨 가문 사람들은 흡혈 충처럼 그녀의 골수까지 다 빨아들일 기세였다.은서우는 무기력해져 맥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지난번에도 말했잖아. 나 돈 없어. 몇 번을 물어봐도 내 대답은 똑같아. 인터넷에 올리고 싶으면 올려.”은서우는 지금까지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충분히 했으니 미안해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소태훈의 협박도 오로지 그가 꼬투리를 잡은 거였다.말을 마친 은서우가 전화를 끊자, 소태훈은 끈질기게 다시 걸어왔고 지긋지긋해진 그녀는 아예 번호를 차단해 버렸다.은서우는 더 이상 소씨 가문 사람과 연계하고 싶지 않았다.몇 분 전의 기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생기를 잃은 채 은서우는 옷으로 뒤덮인 소파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시간이 얼마나 지났을지 인명진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준비가 다 됐어요? 지금 데리러 갈게요.”은서우는 그제야 몸을 뒤척이며 일어나 앉았다.“아직이요. 조금만 기다려줘요.”인명진의 전화 한 통이 그녀를 다시 숨을 쉬게 한 것 같았다.즉시 옷을 차려입고 계단을 뛰어 내려간 은서우가 주위를 훑어보자 멀지 않은 잔디밭에 아우디 한대가 보였다.차 안에서 휴대전화를 보고 있던 인명진은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고 그의 눈길은 은서우가 입고 있는 베이지색
은서우는 인명진에게 메뉴판을 건네며 말했다.“봐봐요. 못 드시는 음식 있어요?”인명진은 간결하게 대답했다.“없어요.”은서우는 다시 메뉴판을 받아 들고 현재 자신의 경제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요리를 몇 개 주문했다.“이 정도면 될까요?”인명진은 은서우를 힐끗 쳐다봤다.분명히 덤덤한 눈빛이었지만 은서우는 쪽팔려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밥을 사주겠다고 큰소리쳐놓고 겨우 이 정도밖에 못 산다는 게 창피했다.‘분명히 날, 별로라고 생각하시겠지.’은서우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인명진이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좋아요. 그리고 내 생각만 하지 말고 은서우 씨가 좋아하는 걸 주문해요.”인명진도 은서우가 자신의 입맛을 고려해 주문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속마음을 들킨 은서우는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음식이 올라왔고 은서우는 익숙하게 젓가락을 가져왔다.“이 식당은 젓가락을 직접 가져와야 해요. 여기요. 전부 소독한 거예요.”은서우의 말에 인명진은 기분 좋게 젓가락을 받았다. 의사들은 아무래도 어느 정도 결벽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인명진도 예외는 아니었다.그는 물끄러미 은서우를 보며 말했다.“이런 것까지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은서우는 인명진의 눈길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저도 의사잖아요. 직업병인가 봐요.”은서우의 말에 인명진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무심코 주변을 훑어보던 인명진의 눈길은 갑자기 누군가에게 멈췄고 은서우는 자신이 제일 존경하던 원장의 표정이 갑자기 바뀌는 걸 즉시 알아차렸다.인명진은 누군가의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온지유?”자신의 이름에 여자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여자의 얼굴을 올려다본 은서우의 눈에는 놀라움이 스쳤다.온지유는 인명진을 발견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윤별의 손을 잡고 다가왔다.“명진 씨가 여기 왜 있어요? 병원이 바쁜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요?”말을 마친 온지유의 눈길은 은서우에게 멈췄고 그녀는 잠깐 멈칫하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은서우는 인명진이 그런 눈빛으로 누군가를 바라보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확실하게 티가 난건 아니지만 자세하게 보면 알아차릴 수 있었다.더욱이 은서우는 인명진 옆에서 한동안 머물렀던 사람이라 미묘한 그의 표정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죄송해요. 원장님, 저 때문에 난처해진 거 아니에요?”고개를 들고 은서우를 바라보던 인명진은 그녀의 눈빛에 하고 싶었던 말을 또다시 목구멍으로 삼킨 채 다른 말을 꺼냈다.“앞으로 사석에서는 원장님이라고 부르지 마세요.”“그러면 뭐라고 부를까요? 인 선생님이라고 부를까요?”“이름 불러요.”인명진은 나이프와 포크로 접시에 놓인 스테이크를 자르며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도 은서우는 기분이 좋은 듯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그러면 앞으로 병원에서는 원장님이라고 부르고 사석에서는 인명진 씨라고 부를게요.”은서우가 부르는 이름에 인명진은 잠시 흠칫했지만 이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요.”은서우는 식사 자리가 너무 좋았다. 돈에 대한 걱정과 집사람들 때문에 받았던 스트레스들이 전부 사라질 만큼 행복한 시간이었다.병원에서 인명진이 준 차트를 받아쥔 은서우는 뿌듯한 마음에 의기양양해지기도 했다.하지만 병원 내부에서는 점점 귀에 거슬리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단순히 은서우가 인명진이 꽂은 낙하산이고 공평하지 못하다는 말이 퍼지고 있을 때는 인명진이 신경 쓰지 말라는 말에 은서우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하지만 소문은 점점 더 허황한 쪽으로 퍼졌고 심지어 근무시간에 수군거리는 사람도 있었다.“은서우 같은 배경이 어떻게 우리 병원에 들어온 거예요? 여기가 무슨 개인 진료소도 아니고 시에서도 권위 있는 병원이잖아요.”“내가 뭐라 그랬어요. 무조건 낙하산이라니까요? 원장님과 엄청 가깝게 지내잖아요. 두 사람 사이에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지도 모르죠.”“그럼 설마...”은서우는 차트를 쥐고 있던 손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수군거리던 사람들은 은서우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은서우는 믿을 수 없는 눈빛으로 간호사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을 맥없이 툭 떨어뜨렸다.“뭐라고요?”‘어떻게 안 거지? 그 인턴이 말했나? 하지만 그 여자는 이미 병원을 나갔는데?’여자 간호사는 자기 팔을 툭툭 털며 냉소를 짓고 말했다.“모르고 있었나 봐요? 인터넷 찾아봐요. 누군가가 은 선생님이 한 짓들을 전부 다 까발렸으니까.”은서우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녀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비틀거리는 몸을 겨우 가누고 서둘러 휴대전화를 꺼냈다.초조함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은서우는 제발 자신이 생각하는 그것만은 아니길 간절히 바랐지만 결국 그 바람은 산산조각이 났고 일은 결코 그녀가 바라는 대로 따라주지 않았다.인터넷에 들어가 보자 실시간 검색어에 ‘몰카’라는 단어가 올라가 있었다.은서우는 마치 누군가 팔다리의 힘을 쫙 뺀 것처럼 그 자리에 풀썩 물어 앉을 것 같았다.간호사는 괴상 야릇한 표정으로 은서우를 비꼬며 망했다.“우리 원장님이 누굴 제일 이뻐하죠? 바로 여기 있는 은 선생님이에요. 근데 이뻐하고 생각해 주면 뭐 해요? 은혜를 원수로 갚는데. 누가 감히 상상조차 했겠어요? 앞에서는 좋은척하면서 뒤에서 몰래 사진 찍어서 팔고 있을 줄?”꽉 쥔 주먹 때문에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은서우는 아무 감각도 느끼지 못했다. 주위의 비웃음과 조롱이 끊임없이 은서우의 귓속으로 파고들어 그녀의 양심을 후벼팠다.은서우의 머릿속에는 약을 탔던 날 인명진이 그걸 발견하고 혐오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던 얼굴이 확대되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수군거리는 주변의 소리는 마치 인명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들렸다.“은서우 씨, 이렇게 배은망덕한 사람인 줄 몰랐네요. 내가 그렇게 많은 걸 도와줬는데 이런 식으로 보답하는 거예요? 사람을 정말 잘못 봤네요.”“은서우 씨가 이런 사람인 줄 몰랐네요. 애당초 좋게 보는 게 아니었는데.”“지금이라도 떠나세요. 내 눈앞에서 알짱거리지 말고.”은서우는 환청에 멍해진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서있었다
은서우는 아무래도 설명해야 할 것 같았다.“뒤에서 제 얘기를 했다고 운 게 아니라 다른 것 때문에...”은서우는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이미 실시간 검색어를 봤고 며칠 전 은서우한테서 자초지종을 다 들었던 인명진은 즉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차렸다.인터넷에는 은서우의 몰래카메라 사건부터 시작해 과거에 일하던 곳부터 매일 밤 아르바이트를 했던 영상과 사진도 올라와 있었다.글을 올린 사람의 말에 의하면 은서우는 어릴 때부터 가정 형편이 좋지 못했고 회사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전부 돈이 많은 남자 덕분이라고 설명했다.돈이 많은 남자는 누가 봐도 인명진이었다.은서우의 과거를 아는 사람은 병원에 한 사람도 없었고 심지어 인명진조차도 며칠 전 은서우가 직접 말해줘서 알게 된 거라 결국 이 사실을 알고 폭로할 수 있는 사람은 가족밖에 없었다.여기까지 생각한 인명진은 은서우가 불쌍하고 안쓰러웠다.지난날 은서우가 밤에조차 아르바이트했던 이유는 소씨 가문 사람들한테 돈을 주기 위해서였는데, 그들은 고맙게 생각하기는커녕 이제 와서 은서우가 더는 돈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렇게 뒤통수를 친 거였다. 이리저리 차이는 은서우의 처지가 마치 축구공 같았다. 인명진은 그윽한 눈빛으로 은서우를 바라보며 말했다.“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말들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은서우 씨는 자기 앞에 일만 잘하면 돼요. 그리고 내 생각이 궁금하다면 분명하게 말할게요. 나는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습니다. 은서우 씨의 잘못이 아니잖아요.”멍하니 인명진을 바라보던 은서우는 코끝이 찡해지며 겨우 가라앉혔던 눈물이 다시 차오르는 것 같았다.“정말요?”“네.”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겨우 이런 말 한마디에도 감동받아 눈물을 글썽이는 건지, 인명진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은서우를 바라봤다.하지만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는 무기력한 마음을 인명진도 잘 알고 있었다.인명진도 어릴 때 법로 밑에서 크면서 항상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았었다.그때 그는 매일 누군가 자신을 이해해 주기를 갈망했고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