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도우미 일이 돈을 더 많이 버는걸요.”양시은은 이런 말을 듣는 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가사도우미 중개소를 운영하는 유영숙도 그녀와 같은 나이에 도우미 일을 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고 말했었다. 만약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그녀도 당연히 이 일을 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하민이에겐 병원비가 필요했다. 비록 지금은 양채은에게서 돈을 빌리긴 했지만 전부 그녀가 나중에 갚아야 하는 돈이었다.하민이 병원비만큼은 그녀는 직접 두 손으로 벌고 싶었고 힘들다고 해도 그녀의 힘으로 벌어온 돈이니 안심하고 쓸 수 있다.“집에 남동생이라도 있어요?”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말하는 남자의 몸에선 벌써 반응이 일어나고 있었다.양시은은 아무것도 모른 채 티브이 서랍을 닦고 있었다.“아니요. 남동생은 없고 아들이 있어요. 전 아들 병원비를 벌고 있거든요.”남자는 그녀가 농담하는 줄 알았다.“에이, 그런 농담은 하지 말아요. 몸매도 이렇게 좋은데 어떻게 아들이 있어요. 한눈에 봐도 젊은 아가씨인걸요.”그의 아내는 작년에 아이를 낳았지만 아이를 낳고 난 아내의 모습은 바람을 불어넣은 풍선처럼 살이 오르기 시작했고 결국 인생 최대 몸무게 74kg을 달성했다.아이를 낳고 나면 원래부터 여자의 배는 축 처지게 되었지만 거기에다 지방 살이 있으니 앉을 때마다 불룩 몇 겹으로 튀어나왔다. 그 모습은 정말이지 돼지 같았기에 부부 생활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양시은처럼 허리는 잘록하고 엉덩이는 탄탄하여 보는 사람마저 본능적인 욕망을 일으키게 하지 않았다.“정말이에요. 아들이 올해 세 살인걸요.”양시은은 남자의 속마음을 알 리가 없었던지라 물어보는 대로 전부 대답해주었다. 남자는 그제야 양시은이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님을 눈치챘고 표정이 변해버렸다. 아이가 있다는 말은 이미 결혼했다는 의미였기에 손을 대기가 어려워지게 된다.“대충 보니 청소 다 한 것 같은데 오늘은 바깥에 바람이 세게 부니까 강아지 산책은 안
여주인은 빠르게 일당을 정산해서 양시은의 계좌로 입금해주었다.“우리 연락처라도 추가할까요? 앞으로 우리 집은 일주일에 세 번만 오시면 돼요. 만약 저랑 제 남편이 어디 먼 곳으로 가게 되면 매일 한 번 오시면 돼요. 그때 제가 연락할게요.”“네, 그럼 오늘은 이만 가볼게요.”양시은은 청소 도구를 전부 원래 자리에 돌려놓고 집을 나섰다. 부자들만 모여 사는 아파트는 역시 달랐다. 집안에 전문 청소 도구만 정리해두는 창고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녀는 아무것도 챙겨올 필요 없이 그저 몸만 와서 청소하면 되었다.“여보, 오늘 새로 산 원피스지? 예쁘네. 당신이랑 아주 잘 어울려. 우리 여보는 하루가 다르게 예뻐지네.”등 뒤로 아내에게 한껏 아부를 떨고 있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이렇게 좋은 아파트에서 사는 것도, 월급 많이 주는 회사에서 일할 수 있는 것도 전부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었다. 전부 좋은 아내를 만난 덕분이었다. 아무리 속으로는 아내가 돼지 같다고 욕하고 있어도 아내 앞에서는 영원히 입에 발린 소리만 해야 했다. 그리고 양시은은...비록 오늘은 손을 대지 못했지만 앞으로 언젠가 기회가 있을 것이었다....한편 나도현은 변호사 사무소로 돌아온 뒤 서류를 정리하고는 의뢰인을 만났다. 사건에 관해 자세하게 얘기를 나누다가 의뢰인은 재차 당부했다.“나 변호사님, 이 사건은 제게 아주 중요한 사건이에요. 반드시 이겨야 하는 거예요. 절대 지면 안 돼요. 이건 의뢰비 외에 제가 따로 챙겨드리는 소소한 성의니까 받아주세요.”의뢰인은 말하면서 쇼핑백을 꺼냈고 그 안에는 금괴가 있었다.나도현은 당연히 받지 않았고 심지어 쇼핑백을 열어보지도 않고 돌려주었다.“제 의뢰인이니 최선을 다해 재판에서 이길 겁니다. 그러니 이런 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부 제가 응당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고맙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변호사님.”의뢰인은 감사 인사를 하며 사무소를 나섰다. 의뢰인의 여자친구가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의뢰인이 나가자마자 바로
졸업한 후에 나도현은 변호사가 되었고 허효준은 판사가 되었기에 두 사람은 자주 만난다고 할 수 있었다. 양시은과 헤어진 4년 동안 나도현은 자주 허효준을 불러내 술을 마셨고 두 사람은 아주 친한 사이였기에 돈을 빌려주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았다. 여하간에 절친한 친구였으니까.“그럼 나도 편하게 말할게. 2천만 원 빌려줄 수 있어? 꼭 현금이어야 하니까 이따가 저녁에 같이 술이나 한잔하자. 올 때 현금으로 바꿔서 와줘.”“왜 굳이 현금이어야 하는 거야? 그냥 계좌로 보내는 게 더 편하지 않나?”나도현은 조금 의심스러웠다. 게다가 허효준은 더 수상하게 한참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그 돈은 우리 할머니께 드리려고 그러는 거야. 우리 할머니는 여든이 넘으셔서 글씨도 잘 모르고 핸드폰도 할 줄 모르셔. 그래서 현금만 쓰시거든. 부탁할게, 도현아. 나 좀 도와주라.”“그래, 알았어. 그럼 이따가 저녁에 늘 가던 곳에서 만나자.”여하간에 술도 마시고 싶었던지라 그는 흔쾌히 대답했다. 먼저 근처 은행으로 가서 현금을 인출한 뒤 종이봉투에 잘 넣어두고 차를 몰아 늘 가던 술집으로 갔다.4년 동안 그는 자주 이곳을 찾아왔기에 술집 직원들과도 친해져 있었다. 술집으로 들어가자 얇게 입은 여자가 술잔을 그의 앞으로 내밀며 인사를 했다.“도현 씨, 오셨어요? 요즘에 우리 가게에 새 메뉴 나왔는데 맛 좀 보실래요?”“아니요.”나도현은 여자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여자는 포기하지 않고 그에게 몸을 들이밀었다.“그럼 이번에는 어떤 세트를 주문하시려고? 제가 마음에 안 드신다면 우리 가게에 새로 온 예쁜 아가씨들도 많거든요. 다들 각자의 매력이 있는 사람들인데 불러드릴까요?”나도현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들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나씨 가문의 아들이었으니 당연히 부자였다. 만약에 그의 눈에 들기라도 한다면 인생 역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나도현은 걸음을 멈추었다.“필요 없다고 말했는데 왜 사람 말을 못 알아듣는 거죠?”“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필요한 거
허효준은 나도현이 양시은을 잊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가 오늘 나도현을 불러낸 이유는 함께 술 마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일 때문이었으니까.그는 시선을 돌려 나도현의 가방을 보았다.“도현아, 내가 말한 돈은 가져왔어?”“당연하지. 네가 보기 드물게 나한테 부탁했잖아. 그런데 내가 어떻게 안 빌려주겠냐?”나도현은 종이봉투를 그에게 건네주었다.“이 안에는 2천만 원이 있어. 방금 은행에서 가져온 거야. 한 푼도 모자라지 않으니까 혹시 할머니께서 더 필요하다고 하시면 나한테 또 말해도 돼. 그리고 우리 사이에 빌린 돈 갚겠다고 하지 않아도 돼.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갚고 없으면 그냥 갚지 마.”허효준은 종이봉투를 든 순간 망설이게 되었다. 이 안에 있는 돈을 확인하게 되면 더는 돌일 킬 수 없기 때문이다. 나도현은 확실히 그에게 아주 좋은 친구였고 그를 진심으로 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나도현에게 돈이 많다고 해도 자기 자신이 돈을 버는 것만큼은 못했다.망설이던 허효준은 결국 종이봉투를 열기로 마음먹었고 안에 있는 돈을 한 장씩 세어보았다. 불편했는지 아예 전부 꺼내 확인했다.“설마 내가 적게 챙겨줬을까 봐 그러는 거냐?”나도현은 아무 생각 없이 물었고 허효준은 고개를 저었다.“그건 아니야. 적어도 상관은 없는데 난 네가 더 많이 챙겨줬을까 봐 그러는 거야. 내가 널 모르냐? 봐, 내가 너한테 빌린 돈은 2천만 원인데 안에는 2천 4백만 원이 들어 있잖아.”그는 4백만 원을 빼내 나도현에게 돌려주었다.“이렇게 할 필요 없어.”“됐어. 그냥 가져. 이미 은행에서 빼낸 거고 다시 은행가기 귀찮아. 그냥 할머니께 드리는 내 작은 성의라고 생각하고 받아.”나도현은 다시 그에게 돈을 건네며 말했다. 이미 준 것을 뭐하러 다시 돌려받겠는가.허효준은 고개를 끄덕인 후 술잔을 들었다.“오늘은 우리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즐기자. 취하기 전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는 거야.”나도현은 그와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누군가 멀지 않은
“괜찮아. 난 너보다는 멀쩡하니까 택시 타고 가면 돼. 지금은 편리하게 콜택시도 부를 수 있잖아. 아니면 네 가족이 오기 전까지 같이 기다려줄까?”허효준은 두 시간 내내 나도현이 술을 마시는 것만 지켜보고 있었기에 정작 본인은 얼마 마시지 않았다.나도현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먼저 가도 돼. 집 도착하면 문자 하고.”“그래, 알았어. 그럼 난 이만 가볼게.”허효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도망치듯 가버렸다. 어느 정도 나온 후 그는 뒤를 돌아보더니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도 당연히 나도현을 절친한 친구로 생각하고 싶었지만 너무도 차이가 큰 집안 때문에 여전히 그와는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가 평생을 노력한다고 해도 나도현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자신의 처지를 바꾸고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어 하는 게 뭐가 잘못된 거란 말인가....일을 마친 양시은은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앉아 쉬고 있었다. 정말이지 오늘따라 더 힘든 것 같았다. 하지만 은행 앱으로 본 잔액을 보니 오늘 노동이 가치가 있다고 느껴졌다. 여하간에 하루 만에 꽤나 많이 벌었기 때문이다.“언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오늘은 얼마나 벌었어?”양채은은 그녀의 다리라도 주물러주고 싶어 옆에 앉으며 말했지만 양시은이 당연히 그렇게 하게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넌 임산부야. 그리고 오늘 의사 선생님도 푹 쉬라고 말씀하셨다며. 그럼 푹 쉬어야지, 왜 내 다리를 주물러 주려고 해.”“에이, 다리 주물러 주는 게 뭐가 힘든 일이라고. 그냥 손이랑 팔만 움직이는 거잖아. 난 언니가 걱정된단 말이야. 언니는 임산부인 나보다 더 힘들어 보이니까.”양채은은 너무도 씁쓸했다. 강태경도 매일 바쁘게 일만 했고 양시은도 하루에 아르바이트 몇 개나 하면서 바쁜 시간을 보냈다. 세 사람 중 현재 가장 한가한 사람은 그녀였기에 저도 모르게 감탄하게 되었다.“난 가끔 그런 생각해. 매일 이렇게 집에만 있으면 폐인이 되지 않을까 하고 말이야.”“넌 나처럼 돈을
양시은은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행여나 나도현이 말실수라도 할까 봐 두려웠지만 양채은은 그런 그녀의 마음도 모른 채 스피커 모드로 전환했다.다행히 아주 조용했고 남자의 숨소리가 작게 들려올 정도였다.“태경 씨, 지금 어디예요?”나도현이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릴 수 없었던 양채은이 먼저 물었고 그는 누가 들어도 술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술집이야. 지금 데리러 와줄래?”“네, 지금 갈게요!”양채은은 듣자마자 핸드폰을 내려놓고 얼른 방으로 옷 갈아입으러 가버렸기에 그가 나직하게 내뱉은 말을 듣지 못했다.“시나.”이것은 그가 양시은에게 지어준 애칭이었다.예전에 그와 연애할 때 그는 유독 그녀를 시나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했고 이별한 뒤 다시 그녀를 시나라고 부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호칭을 듣자마자 그녀는 너무도 놀라고 말았다.다행히 양채은은 이미 방으로 올라갔기에 그 호칭을 듣지 못했다. 만약 듣기라도 했다면 분명 화를 낼 것이었다.양시은은 핸드폰을 들더니 통화 종료를 꾹 눌렀다.몇 분 지나지 않아 양채은이 방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그저 잠옷 위에 겉옷만 걸치고 나왔다.“언니, 나랑 같이 태경 씨 데리러 가자. 나 혼자서 태경 씨 부축하기는 힘들 거야. 방금 목소리도 들어보니까 술 조금만 마신 게 아닌 것 같더라고. 안 그러면 왜 언니한테 전화를 걸었겠어.”양시은은 너무도 가기 싫었지만 양채은이 무언가 부탁하는 일은 아주 드물었고 만약 이대로 거절한다면 다소 인정이 없는 사람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결국 양채은의 재촉에 양시은은 하는 수 없이 양채은과 함께 택시 타고 술집에 도착했다.두 사람이 도착했을 때 나도현은 이미 술에 취해 테이블에 엎드려 잠든 상태였고 주위로 빈 술병이 굴러다니고 있었다.“세상에. 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그저 보기만 했을 뿐인데 양채은은 속상해 죽을 것 같았다. 나도현이 열심히 돈을 벌기 위해 몸 건강도 생각하지 않고 무리하게 접대를 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그녀는 얼른 앞으로 다가가 나도현
‘설마 우리 언니를 좋아하게 된 건가?'충격적이고 터무니없는 생각이 떠오르자 양채은은 자신에게 깜짝 놀라고 말았다.“사람 잘못 보셨어요. 전 채은이가 아녜요.”양시은은 얼른 나도현을 양채은에게 밀어내며 말했지만 나도현은 대놓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안고 싶은 사람은 양시은인데, 여기서 양채은이 왜 나오는 거지?'그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왜 날 밀어내는 거지?”“태경 씨, 사람 착각하셨어요. 제가 태경 씨 약혼자라고요.”양채은은 더는 지켜볼 수 없어 성큼성큼 걸어오며 나도현의 손을 자신의 허리에 가져다 댔다.“저랑 언니는 비록 닮긴 했지만 태경 씨가 헷갈릴 정도는 아니라고요!”이 말을 끝으로 양채은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방금 그의 행동은 확실히 너무 했다고 생각했다.나도현은 또다시 양채은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마침 도착한 택시에 양시은은 다가가 조수석에 올라탔다.그 모습을 본 나도현은 비틀대며 택시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고 양채은도 황급히 따라간 뒤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차에 올라탄 나도현은 의자에 기대어 잠들어 버렸고 양채은은 차마 그를 깨울 수 없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더 많이 자길 바랐던 그녀는 택시가 집 앞까지 도착한 후에도 혼자서 나도현을 부축한 채 집 안으로 들어갔다. 비록 힘들긴 했지만 양시은에게 도와달라고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양시은은 원래부터 그녀에게 켕기는 것이 있었던지라 당연히 먼저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고 그저 묵묵히 뒤를 따라갔다.“언니.”양채은은 겨우 나도현을 소파까지 부축한 뒤 눕혔다.“태경 씨는 내가 남아서 챙겨주면 되니까 언니는 방으로 가서 쉬어. 야밤에 나 도와준다고 술집까지 갔잖아.”자매였던지라 양시은은 양채은이 자신을 쫓아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그래, 알았어. 너도 일찍 쉬어.”양시은은 별다른 말 없이 방으로 돌아온 뒤 방 문을 꼭 걸어 잠갔다.거실엔 양채은과 나도현만 남게 되었다. 양채은은 아까부터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지만 나도현 몸에서 나는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나도현은 눈을 떴다. 몸을 덮은 담요를 본 그는 어젯밤 자신을 챙겨준 사람이 양시은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몸을 일으키자 바닥에 이불 깔고 자는 양채은을 발견했다.“일어났어요? 어제는 왜 그렇게 술을 마신 거예요? 오는 택시에서 잠들어 버렸더라고요. 제가 태경 씨를 얼마나 힘들게 끌고 왔는지 알아요? 원래는 깨워서 꿀물이라도 마시고 자게 하려고 했는데 너무 깊이 잠들어서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더라고요.”양채은은 인기척에 눈을 뜨고 말했다. 그러면서 거실을 대충 치우고는 주방으로 들어가 다시 따듯한 꿀물을 만들어 왔다.“지금은 술이 깼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마셔요. 꿀물은 사람 몸에도 좋으니까요.”“이런 거 할 필요 없어.”나도현은 꿀물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마실 생각이 전혀 없었던 그는 이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엔 온통 양시은뿐이었다.그는 생각한 대로 양시은의 행방을 물어보았다.“태경 씨,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왜 우리 언니한테 그렇게 관심이 많은 거예요?”양채은은 한참 머뭇거리다가 그래도 설명을 들을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 입을 열었다. 나도현이 아무리 그녀의 가족이라 양시은을 관심한다고 하지만 보는 사람은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 행동을 볼 때마다 양채은은 어딘가 심기 불편해졌다.“태경 씨는 제 약혼자고 언니는 곧 태경 씨의 처형이 되고요. 전 태경 씨가 우리 언니를 가족처럼 여겨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엔 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언니는 지금 우리 집에 얹혀사는 처지이고 언니가 무엇을 하든 그건 언니의 자유라고 생각해요. 태경 씨가 일일이 걱정하고 간섭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그녀의 말에 나도현은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내 일에 간섭하는 거야?'그는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지금 내가 쓸데없는 걱정 한다고 말하고 싶은 거지?”“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전 그렇게 말한 적 없으니까 오해하지 말아요. 그냥 우린 우리대로 살고 언니는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나도현은 눈을 떴다. 몸을 덮은 담요를 본 그는 어젯밤 자신을 챙겨준 사람이 양시은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몸을 일으키자 바닥에 이불 깔고 자는 양채은을 발견했다.“일어났어요? 어제는 왜 그렇게 술을 마신 거예요? 오는 택시에서 잠들어 버렸더라고요. 제가 태경 씨를 얼마나 힘들게 끌고 왔는지 알아요? 원래는 깨워서 꿀물이라도 마시고 자게 하려고 했는데 너무 깊이 잠들어서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더라고요.”양채은은 인기척에 눈을 뜨고 말했다. 그러면서 거실을 대충 치우고는 주방으로 들어가 다시 따듯한 꿀물을 만들어 왔다.“지금은 술이 깼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마셔요. 꿀물은 사람 몸에도 좋으니까요.”“이런 거 할 필요 없어.”나도현은 꿀물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마실 생각이 전혀 없었던 그는 이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엔 온통 양시은뿐이었다.그는 생각한 대로 양시은의 행방을 물어보았다.“태경 씨,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왜 우리 언니한테 그렇게 관심이 많은 거예요?”양채은은 한참 머뭇거리다가 그래도 설명을 들을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 입을 열었다. 나도현이 아무리 그녀의 가족이라 양시은을 관심한다고 하지만 보는 사람은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 행동을 볼 때마다 양채은은 어딘가 심기 불편해졌다.“태경 씨는 제 약혼자고 언니는 곧 태경 씨의 처형이 되고요. 전 태경 씨가 우리 언니를 가족처럼 여겨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엔 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언니는 지금 우리 집에 얹혀사는 처지이고 언니가 무엇을 하든 그건 언니의 자유라고 생각해요. 태경 씨가 일일이 걱정하고 간섭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그녀의 말에 나도현은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내 일에 간섭하는 거야?'그는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지금 내가 쓸데없는 걱정 한다고 말하고 싶은 거지?”“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전 그렇게 말한 적 없으니까 오해하지 말아요. 그냥 우린 우리대로 살고 언니는
‘설마 우리 언니를 좋아하게 된 건가?'충격적이고 터무니없는 생각이 떠오르자 양채은은 자신에게 깜짝 놀라고 말았다.“사람 잘못 보셨어요. 전 채은이가 아녜요.”양시은은 얼른 나도현을 양채은에게 밀어내며 말했지만 나도현은 대놓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안고 싶은 사람은 양시은인데, 여기서 양채은이 왜 나오는 거지?'그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왜 날 밀어내는 거지?”“태경 씨, 사람 착각하셨어요. 제가 태경 씨 약혼자라고요.”양채은은 더는 지켜볼 수 없어 성큼성큼 걸어오며 나도현의 손을 자신의 허리에 가져다 댔다.“저랑 언니는 비록 닮긴 했지만 태경 씨가 헷갈릴 정도는 아니라고요!”이 말을 끝으로 양채은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방금 그의 행동은 확실히 너무 했다고 생각했다.나도현은 또다시 양채은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마침 도착한 택시에 양시은은 다가가 조수석에 올라탔다.그 모습을 본 나도현은 비틀대며 택시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고 양채은도 황급히 따라간 뒤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차에 올라탄 나도현은 의자에 기대어 잠들어 버렸고 양채은은 차마 그를 깨울 수 없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더 많이 자길 바랐던 그녀는 택시가 집 앞까지 도착한 후에도 혼자서 나도현을 부축한 채 집 안으로 들어갔다. 비록 힘들긴 했지만 양시은에게 도와달라고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양시은은 원래부터 그녀에게 켕기는 것이 있었던지라 당연히 먼저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고 그저 묵묵히 뒤를 따라갔다.“언니.”양채은은 겨우 나도현을 소파까지 부축한 뒤 눕혔다.“태경 씨는 내가 남아서 챙겨주면 되니까 언니는 방으로 가서 쉬어. 야밤에 나 도와준다고 술집까지 갔잖아.”자매였던지라 양시은은 양채은이 자신을 쫓아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그래, 알았어. 너도 일찍 쉬어.”양시은은 별다른 말 없이 방으로 돌아온 뒤 방 문을 꼭 걸어 잠갔다.거실엔 양채은과 나도현만 남게 되었다. 양채은은 아까부터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지만 나도현 몸에서 나는
양시은은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행여나 나도현이 말실수라도 할까 봐 두려웠지만 양채은은 그런 그녀의 마음도 모른 채 스피커 모드로 전환했다.다행히 아주 조용했고 남자의 숨소리가 작게 들려올 정도였다.“태경 씨, 지금 어디예요?”나도현이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릴 수 없었던 양채은이 먼저 물었고 그는 누가 들어도 술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술집이야. 지금 데리러 와줄래?”“네, 지금 갈게요!”양채은은 듣자마자 핸드폰을 내려놓고 얼른 방으로 옷 갈아입으러 가버렸기에 그가 나직하게 내뱉은 말을 듣지 못했다.“시나.”이것은 그가 양시은에게 지어준 애칭이었다.예전에 그와 연애할 때 그는 유독 그녀를 시나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했고 이별한 뒤 다시 그녀를 시나라고 부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호칭을 듣자마자 그녀는 너무도 놀라고 말았다.다행히 양채은은 이미 방으로 올라갔기에 그 호칭을 듣지 못했다. 만약 듣기라도 했다면 분명 화를 낼 것이었다.양시은은 핸드폰을 들더니 통화 종료를 꾹 눌렀다.몇 분 지나지 않아 양채은이 방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그저 잠옷 위에 겉옷만 걸치고 나왔다.“언니, 나랑 같이 태경 씨 데리러 가자. 나 혼자서 태경 씨 부축하기는 힘들 거야. 방금 목소리도 들어보니까 술 조금만 마신 게 아닌 것 같더라고. 안 그러면 왜 언니한테 전화를 걸었겠어.”양시은은 너무도 가기 싫었지만 양채은이 무언가 부탁하는 일은 아주 드물었고 만약 이대로 거절한다면 다소 인정이 없는 사람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결국 양채은의 재촉에 양시은은 하는 수 없이 양채은과 함께 택시 타고 술집에 도착했다.두 사람이 도착했을 때 나도현은 이미 술에 취해 테이블에 엎드려 잠든 상태였고 주위로 빈 술병이 굴러다니고 있었다.“세상에. 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그저 보기만 했을 뿐인데 양채은은 속상해 죽을 것 같았다. 나도현이 열심히 돈을 벌기 위해 몸 건강도 생각하지 않고 무리하게 접대를 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그녀는 얼른 앞으로 다가가 나도현
“괜찮아. 난 너보다는 멀쩡하니까 택시 타고 가면 돼. 지금은 편리하게 콜택시도 부를 수 있잖아. 아니면 네 가족이 오기 전까지 같이 기다려줄까?”허효준은 두 시간 내내 나도현이 술을 마시는 것만 지켜보고 있었기에 정작 본인은 얼마 마시지 않았다.나도현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먼저 가도 돼. 집 도착하면 문자 하고.”“그래, 알았어. 그럼 난 이만 가볼게.”허효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도망치듯 가버렸다. 어느 정도 나온 후 그는 뒤를 돌아보더니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도 당연히 나도현을 절친한 친구로 생각하고 싶었지만 너무도 차이가 큰 집안 때문에 여전히 그와는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가 평생을 노력한다고 해도 나도현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자신의 처지를 바꾸고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어 하는 게 뭐가 잘못된 거란 말인가....일을 마친 양시은은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앉아 쉬고 있었다. 정말이지 오늘따라 더 힘든 것 같았다. 하지만 은행 앱으로 본 잔액을 보니 오늘 노동이 가치가 있다고 느껴졌다. 여하간에 하루 만에 꽤나 많이 벌었기 때문이다.“언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오늘은 얼마나 벌었어?”양채은은 그녀의 다리라도 주물러주고 싶어 옆에 앉으며 말했지만 양시은이 당연히 그렇게 하게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넌 임산부야. 그리고 오늘 의사 선생님도 푹 쉬라고 말씀하셨다며. 그럼 푹 쉬어야지, 왜 내 다리를 주물러 주려고 해.”“에이, 다리 주물러 주는 게 뭐가 힘든 일이라고. 그냥 손이랑 팔만 움직이는 거잖아. 난 언니가 걱정된단 말이야. 언니는 임산부인 나보다 더 힘들어 보이니까.”양채은은 너무도 씁쓸했다. 강태경도 매일 바쁘게 일만 했고 양시은도 하루에 아르바이트 몇 개나 하면서 바쁜 시간을 보냈다. 세 사람 중 현재 가장 한가한 사람은 그녀였기에 저도 모르게 감탄하게 되었다.“난 가끔 그런 생각해. 매일 이렇게 집에만 있으면 폐인이 되지 않을까 하고 말이야.”“넌 나처럼 돈을
허효준은 나도현이 양시은을 잊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가 오늘 나도현을 불러낸 이유는 함께 술 마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일 때문이었으니까.그는 시선을 돌려 나도현의 가방을 보았다.“도현아, 내가 말한 돈은 가져왔어?”“당연하지. 네가 보기 드물게 나한테 부탁했잖아. 그런데 내가 어떻게 안 빌려주겠냐?”나도현은 종이봉투를 그에게 건네주었다.“이 안에는 2천만 원이 있어. 방금 은행에서 가져온 거야. 한 푼도 모자라지 않으니까 혹시 할머니께서 더 필요하다고 하시면 나한테 또 말해도 돼. 그리고 우리 사이에 빌린 돈 갚겠다고 하지 않아도 돼.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갚고 없으면 그냥 갚지 마.”허효준은 종이봉투를 든 순간 망설이게 되었다. 이 안에 있는 돈을 확인하게 되면 더는 돌일 킬 수 없기 때문이다. 나도현은 확실히 그에게 아주 좋은 친구였고 그를 진심으로 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나도현에게 돈이 많다고 해도 자기 자신이 돈을 버는 것만큼은 못했다.망설이던 허효준은 결국 종이봉투를 열기로 마음먹었고 안에 있는 돈을 한 장씩 세어보았다. 불편했는지 아예 전부 꺼내 확인했다.“설마 내가 적게 챙겨줬을까 봐 그러는 거냐?”나도현은 아무 생각 없이 물었고 허효준은 고개를 저었다.“그건 아니야. 적어도 상관은 없는데 난 네가 더 많이 챙겨줬을까 봐 그러는 거야. 내가 널 모르냐? 봐, 내가 너한테 빌린 돈은 2천만 원인데 안에는 2천 4백만 원이 들어 있잖아.”그는 4백만 원을 빼내 나도현에게 돌려주었다.“이렇게 할 필요 없어.”“됐어. 그냥 가져. 이미 은행에서 빼낸 거고 다시 은행가기 귀찮아. 그냥 할머니께 드리는 내 작은 성의라고 생각하고 받아.”나도현은 다시 그에게 돈을 건네며 말했다. 이미 준 것을 뭐하러 다시 돌려받겠는가.허효준은 고개를 끄덕인 후 술잔을 들었다.“오늘은 우리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즐기자. 취하기 전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는 거야.”나도현은 그와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누군가 멀지 않은
졸업한 후에 나도현은 변호사가 되었고 허효준은 판사가 되었기에 두 사람은 자주 만난다고 할 수 있었다. 양시은과 헤어진 4년 동안 나도현은 자주 허효준을 불러내 술을 마셨고 두 사람은 아주 친한 사이였기에 돈을 빌려주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았다. 여하간에 절친한 친구였으니까.“그럼 나도 편하게 말할게. 2천만 원 빌려줄 수 있어? 꼭 현금이어야 하니까 이따가 저녁에 같이 술이나 한잔하자. 올 때 현금으로 바꿔서 와줘.”“왜 굳이 현금이어야 하는 거야? 그냥 계좌로 보내는 게 더 편하지 않나?”나도현은 조금 의심스러웠다. 게다가 허효준은 더 수상하게 한참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그 돈은 우리 할머니께 드리려고 그러는 거야. 우리 할머니는 여든이 넘으셔서 글씨도 잘 모르고 핸드폰도 할 줄 모르셔. 그래서 현금만 쓰시거든. 부탁할게, 도현아. 나 좀 도와주라.”“그래, 알았어. 그럼 이따가 저녁에 늘 가던 곳에서 만나자.”여하간에 술도 마시고 싶었던지라 그는 흔쾌히 대답했다. 먼저 근처 은행으로 가서 현금을 인출한 뒤 종이봉투에 잘 넣어두고 차를 몰아 늘 가던 술집으로 갔다.4년 동안 그는 자주 이곳을 찾아왔기에 술집 직원들과도 친해져 있었다. 술집으로 들어가자 얇게 입은 여자가 술잔을 그의 앞으로 내밀며 인사를 했다.“도현 씨, 오셨어요? 요즘에 우리 가게에 새 메뉴 나왔는데 맛 좀 보실래요?”“아니요.”나도현은 여자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여자는 포기하지 않고 그에게 몸을 들이밀었다.“그럼 이번에는 어떤 세트를 주문하시려고? 제가 마음에 안 드신다면 우리 가게에 새로 온 예쁜 아가씨들도 많거든요. 다들 각자의 매력이 있는 사람들인데 불러드릴까요?”나도현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들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나씨 가문의 아들이었으니 당연히 부자였다. 만약에 그의 눈에 들기라도 한다면 인생 역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나도현은 걸음을 멈추었다.“필요 없다고 말했는데 왜 사람 말을 못 알아듣는 거죠?”“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필요한 거
여주인은 빠르게 일당을 정산해서 양시은의 계좌로 입금해주었다.“우리 연락처라도 추가할까요? 앞으로 우리 집은 일주일에 세 번만 오시면 돼요. 만약 저랑 제 남편이 어디 먼 곳으로 가게 되면 매일 한 번 오시면 돼요. 그때 제가 연락할게요.”“네, 그럼 오늘은 이만 가볼게요.”양시은은 청소 도구를 전부 원래 자리에 돌려놓고 집을 나섰다. 부자들만 모여 사는 아파트는 역시 달랐다. 집안에 전문 청소 도구만 정리해두는 창고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녀는 아무것도 챙겨올 필요 없이 그저 몸만 와서 청소하면 되었다.“여보, 오늘 새로 산 원피스지? 예쁘네. 당신이랑 아주 잘 어울려. 우리 여보는 하루가 다르게 예뻐지네.”등 뒤로 아내에게 한껏 아부를 떨고 있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이렇게 좋은 아파트에서 사는 것도, 월급 많이 주는 회사에서 일할 수 있는 것도 전부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었다. 전부 좋은 아내를 만난 덕분이었다. 아무리 속으로는 아내가 돼지 같다고 욕하고 있어도 아내 앞에서는 영원히 입에 발린 소리만 해야 했다. 그리고 양시은은...비록 오늘은 손을 대지 못했지만 앞으로 언젠가 기회가 있을 것이었다....한편 나도현은 변호사 사무소로 돌아온 뒤 서류를 정리하고는 의뢰인을 만났다. 사건에 관해 자세하게 얘기를 나누다가 의뢰인은 재차 당부했다.“나 변호사님, 이 사건은 제게 아주 중요한 사건이에요. 반드시 이겨야 하는 거예요. 절대 지면 안 돼요. 이건 의뢰비 외에 제가 따로 챙겨드리는 소소한 성의니까 받아주세요.”의뢰인은 말하면서 쇼핑백을 꺼냈고 그 안에는 금괴가 있었다.나도현은 당연히 받지 않았고 심지어 쇼핑백을 열어보지도 않고 돌려주었다.“제 의뢰인이니 최선을 다해 재판에서 이길 겁니다. 그러니 이런 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부 제가 응당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고맙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변호사님.”의뢰인은 감사 인사를 하며 사무소를 나섰다. 의뢰인의 여자친구가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의뢰인이 나가자마자 바로
“하지만 도우미 일이 돈을 더 많이 버는걸요.”양시은은 이런 말을 듣는 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가사도우미 중개소를 운영하는 유영숙도 그녀와 같은 나이에 도우미 일을 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고 말했었다. 만약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그녀도 당연히 이 일을 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하민이에겐 병원비가 필요했다. 비록 지금은 양채은에게서 돈을 빌리긴 했지만 전부 그녀가 나중에 갚아야 하는 돈이었다.하민이 병원비만큼은 그녀는 직접 두 손으로 벌고 싶었고 힘들다고 해도 그녀의 힘으로 벌어온 돈이니 안심하고 쓸 수 있다.“집에 남동생이라도 있어요?”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말하는 남자의 몸에선 벌써 반응이 일어나고 있었다.양시은은 아무것도 모른 채 티브이 서랍을 닦고 있었다.“아니요. 남동생은 없고 아들이 있어요. 전 아들 병원비를 벌고 있거든요.”남자는 그녀가 농담하는 줄 알았다.“에이, 그런 농담은 하지 말아요. 몸매도 이렇게 좋은데 어떻게 아들이 있어요. 한눈에 봐도 젊은 아가씨인걸요.”그의 아내는 작년에 아이를 낳았지만 아이를 낳고 난 아내의 모습은 바람을 불어넣은 풍선처럼 살이 오르기 시작했고 결국 인생 최대 몸무게 74kg을 달성했다.아이를 낳고 나면 원래부터 여자의 배는 축 처지게 되었지만 거기에다 지방 살이 있으니 앉을 때마다 불룩 몇 겹으로 튀어나왔다. 그 모습은 정말이지 돼지 같았기에 부부 생활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양시은처럼 허리는 잘록하고 엉덩이는 탄탄하여 보는 사람마저 본능적인 욕망을 일으키게 하지 않았다.“정말이에요. 아들이 올해 세 살인걸요.”양시은은 남자의 속마음을 알 리가 없었던지라 물어보는 대로 전부 대답해주었다. 남자는 그제야 양시은이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님을 눈치챘고 표정이 변해버렸다. 아이가 있다는 말은 이미 결혼했다는 의미였기에 손을 대기가 어려워지게 된다.“대충 보니 청소 다 한 것 같은데 오늘은 바깥에 바람이 세게 부니까 강아지 산책은 안
“언니가 임신했을 때를 전 아직도 기억하고 있거든요. 출산을 앞두고 있었는데 그때 언니는 이별의 상처를 받아서 상태가 정말 좋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저도 굳이 그 일에 관해 묻지 않았어요. 또 묻는다는 건 어쩌면 언니의 상처를 후벼 파는 것일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제 추측으로는 하민이가 언니의 전 남자친구의 아이일 가능성이 아주 크다고 생각해요.”양시은의 전 남자친구는 바로 그였다. 나도현은 태연하게 계속 떠보았다.“그럼 네 언니가 왜 남자친구랑 헤어지게 되었는지는 알아? 아이까지 있었다면서, 그러면 결혼해야 하는 거잖아. 대체 왜 이렇게 된 거래?”“아마도 언니 전 남자친구 쪽에서 결혼을 바라지 않았던 게 아닐까요? 어쨌든 구체적인 건 저도 잘 몰라요. 언니가 말해주지 않았거든요.”양채은은 별생각 없이 말했지만 나도현은 다르게 듣고 있었다.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차갑게 비웃었다. 그에게 갑자기 헤어지자고 통보를 해놓고, 그를 고통 속에서 괴롭게 살게 해놓고 동생 앞에서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지 않았는가. 진정한 피해자는 그였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쓰레기가 되어 있었다.“어차피 4년도 지난 일이에요. 하민이도 컸고 전 언니에게도 몇 번이나 그때 일은 잊으라고 말했거든요. 좋은 남자를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도 하고 말이에요. 그러는 게 언니한테도 좋고 하민이한테도 좋을 테니까요.”나도현의 서늘해진 눈빛을 눈치채지 못한 양채은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는 절대 양시은이 다른 남자를 만나게 하지 않을 것이고 결혼도 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었으니까.“됐어. 넌 먼저 들어가서 쉬어. 난 변호사 사무소로 가봐야 하니까. 최근에 새 사건을 맡았거든. 의뢰인과 잘 얘기를 나눠봐야 해.”나도현은 더는 그녀와 이 대화를 이어가지 않았다. 양채은은 그에게 걱정 어린 말을 몇 마디 하곤 차에서 내렸다. 집 안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니 나도현은 양시은이 떠올랐고 가슴이 답답해졌다.시동을 걸어 사무소로 향했다. 그는 일로 복잡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