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시은은 어떻게 덥석 받을 수 있겠는가.고작 며칠 사이에 양채은은 그녀에게 아주 많은 돈을 빌려주었기에 마냥 계속 받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언니, 내가 만약 혼자 살았으면 언니가 언제까지 머물어도 상관없는데 지금은 내겐 태경 씨가 있잖아. 그리고 난 임신한 몸이니까 아기도 언젠가 태어날 테고 영원히 언니랑 함께 살 수는 없어. 그러니까 받아. 이 정도면 반년 정도의 월세를 낼 수 있을 거야.”양채은은 단호하게 말하면서 돈을 주려고 했다.양시은은 그녀가 자신을 내쫓으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다만 가족 간의 정 때문에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한 것이었다.곰곰이 생각해보면 양채은의 행동도 이해가 되었다. 이미 약혼까지 하고 가정이 생겼는데 어느 누가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길 바라겠는가. 한 지붕 아래 가족이 함께 산다면 당연히 불편할 것이었다. 거기에다 나도현이 최근에 보인 행동으로도 양채은은 두 사람이 어떤 사이인지 눈치를 채지 못했으나 분명 뭔가가 있다는 것만큼은 알아냈을 것이다.그녀는 정말로 이 집에서 나가고 싶었지만 이 집을 나가는 것이 두려웠다. 나가는 순간 나도현이 절대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거니까. 자신을 괴롭히는 거라면 두렵지 않았지만 그녀에겐 양채은과 하민이가 있었다. 이 두 사람은 그녀의 약점이었고 그녀를 옭아매고 있는 밧줄이기도 했다.양채은은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더 마음이 불편해졌다.“언니, 난 그냥 해본 말이야. 그러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 우린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으니까 함께 사는 건 당연하잖아. 지금 나에게 유일하게 남은 가족은 언니인걸.”만약 누군가 그녀에게 그녀가 유일한 가족을 집에서 내보내게 될 거라고 말했다면 그녀는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어젯밤부터 그녀는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모든 사이엔 거리감이 있어야 불편함 없이 살 수 있다는 말처럼 따로 살았다면 강태경이 자신의 언니를 매일 마주치게 될 일도 없을 테고 어젯밤과 같은 일도 생기지 않았을 거로 생각했다.“채은아, 이 돈은 정
“저희와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그중 한 명이 나도현의 곁으로 다가가 서늘한 은빛을 내는 쇠고랑을 채워주었다.나도현은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 법을 어기는 행동을 한 적 없는데 왜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것인지 말이다. 게다가 그에게 수갑까지 채우지 않았는가.그는 본능적으로 수갑을 피하며 말했다.“착각하신 거 아닙니까?”“나도현 씨 아닙니까? 저희는 이미 사진까지 확인하고 왔고 알맞게 찾아왔습니다. 그러니 내뺄 생각하지 마시고 얌전히 저희랑 함께 가주시죠!”공무원은 언성을 높여 말했다. 그들이 직접 찾아와 체포한다는 건 명확한 증거가 있다는 의미였으니 당연히 착각할 리가 없었다.“일단 저를 왜 데리고 가려는지 이유부터 들어야겠습니다.”나도현은 지금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의 반응에 공무원들은 그가 일부러 모른 척하며 빠져나가려 한다고 생각했다.“본인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저희보다 본인이 더 잘 알겠죠. 변호사라면서 매일 법 관련 문서만 보았을 텐데 어떻게 자신이 불법을 저질렀다는 것을 모를 수 있습니까! 그러니 잘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 겁니다. 솔직하게 전부 털어놓던가, 아니면 계속 명령에 불복종하면 공무집행방해죄를 더 추가할 겁니다!”나도현은 일단 얌전히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경찰서로 온 뒤 그는 취조실로 들어가게 되었고 그의 사건은 경찰 국장이 직접 맡게 되었다.경찰 국장은 반백 살이 넘은 중년 아저씨였고 안경을 끼고 있었지만 눈빛은 아주 날카로웠다.“나도현 씨 맞으시죠? 허효준 씨랑은 어떤 사이죠?”“저희는 대학 동기였지만 졸업 후에는 절친한 친구로 지냈습니다.”나도현은 비록 경찰 국장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취조실까지 들어왔으니 묻는 대로 전부 대답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두 사람의 관계가 확실히 끈끈한가 보군요. 그래서 허효준 씨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 겁니까? 나중에 둘이 서로 짜고 치려고?”“전 그런 생각한 적도 없고 그런 일을 한 적도 없습니다.”나도현의
‘허효준이 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거지?'“그리고 나도현 씨가 최근 맡은 그 사건, 피고인이 다국적 기업의 돈세탁에 연루되어 있었죠. 나도현 씨가 제출한 증거로...”경찰 국장은 미간을 확 구기더니 서류 봉투를 열어 안에서 서류를 꺼내 나도현 앞에 툭 던졌다.“직접 보세요. 대체 본인이 뭘 증거로 제출했는지.”서류에 적힌 내용은 전부 변명에 불관했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서류 사이에 끼어있는 한 장의 수표였다. 이렇게 많은 증거가 한꺼번에 쏟아지니 아무리 그가 변호사라고 해도 자신의 결백을 밝힐 수 없었다. 그는 심지어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인지도 말지 못했다.이 증거들은 그가 직접 정리해서 법원에 제출한 것이었지만 그가 제출한 서류와 내용이 전혀 달랐다. 마치 누군가 중간에서 바꿔치기한 것 같았다. 하지만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한 것일까? 그는 모든 것을 직접 했다. 서류 복사를 비서에게 시킨 것 빼고는 말이다. 그렇다면 설마...“나도현 변호사님, 증거가 산처럼 쌓여있는데 어떻게 자신의 결백을 밝힐지부터 생각하시죠.”경찰 국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경멸의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젊고 능력 좋은 변호사에다가 나씨 가문 사람이면 앞길이 창창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런 사람이 본인의 앞길을 망치고 있는 것이 한심했다. 판사에게 뇌물을 바치고 나라를 팔았다는 증거가 가득했기에 나도현의 변호사 앞길은 이미 막힌 것과 다름이 없었다....박은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현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바로 나도현을 빼내려고 했지만 사건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을 듣자마자 표정이 변해버렸다.“그렇게 심각하다고요?”“사모님, 그 마음은 이해가 되나 이 사건은 지금 제가 직접 맡고 있어서 풀어드릴 수 없습니다.”경찰 국장은 직접 그녀를 만나 설명했다.“사모님도 이치를 아는 사람이니 이 일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아실 거로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 주세요.”박은희는 자신이 어떻게 경찰서에서 걸어 나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차에 올라탄
박은희는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을 후회했다.“남자가 얼굴도 시원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다니는 주제에 남자라고 할 수나 있어요?”“사모님, 설마 절 자극하는 방법으로 가면을 벗게 만들려는 건 아니죠? 제가 정말로 개처럼 사모님의 말만 고분고분 들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마음 급해진 박은희와 달리 가면남은 더 평온해졌다.심지어 비꼬는 어투로 말하고 있어 박은희는 정말이지 짜증이 치밀어 미칠 것 같았다.“얼마를 원하는 거죠? 얼마면 내 아들을 경찰서에서 나오게 할 거냐고요.”나도현이 무사히 경찰서에서 나온다면 그녀는 돈이 얼마가 들든 상관하지 않았다.그러나 가면남은 고개를 저었다.“이건 돈 문제가 아니에요. 만약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거였으면 사모님도 이렇게 절 찾아오진 않았겠죠.”그 말인즉슨 박은희가 더는 생각해낼 방법이 없어 그를 찾아온 것이라는 의미였지만 그도 방법이 없었다.가면남은 팔짱을 끼며 말했다.“법은 제가 만든 것도 아니잖아요. 제 인맥은 사모님보다 적고 사모님도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하시니 저는 더 방법이 없지요. 그러니 조급해하지 마시고 그냥 그 안에서 해결될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라고 하세요.”“내가 어떻게 조급해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박은희는 정말이지 가면남의 뺨을 후려치고 싶었다.경찰서로 잡혀간 사람은 그녀의 아들이었기에 당연히 가면남은 태연할 수밖에 없고 이런 심드렁한 말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다.“그렇게 조급하면 왜 굳이 그런 짓을 꾸며가며 아들을 해치려 한 거죠? 전 일은 확실하게 했고 돈은 사모님이 주신 거잖아요. 사모님이 돈 주면서 시키지 않았다면 전 이런 일을 할 이유도 없고 하지도 못했겠죠. 아들을 구치소로 보낸 사람은 사모님이 아닌가요?!”그의 말은 무거운 돌이 되어 박은희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고 손이 저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렸다.그녀가 원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나도현이 그 안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걸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지금쯤이면 임다혜와 결혼해 나진 그룹
여이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아주머니, 도현이에게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저희한테 자세하게 말씀해주셔야 저희 나름대로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요.”“그래. 도현이에게 너희 같은 친구들이 있어서 참 다행이구나. 난 정말 더는 방법이 없단다.”박은희는 사건의 자초지종을 전부 말해주었다. 물론 자신이 이 일을 만든 사람이라는 것은 쏙 빼놓고 말이다.거실에 앉은 나도현의 친구들은 침묵했고 저마다 표정이 좋지 못했다.“도현이는 내가 직접 곁에 두고 키운 아이야. 절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야. 내가 알아. 분명 누군가 모함하고 있는 걸 거야.”박은희는 말하면 말할수록 마음이 괴로웠다. 지금 아들이 경찰서에 있으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착했던 아들의 모습이었다.나도현은 결혼과 사업 문제에서만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을 뿐 다른 부분에서는 아주 얌전한 아들이었다.“아주머니, 일단 진정하시고 저희가 어떻게든 방법을 생각해내 볼게요.”권다솔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박은희를 부축한 채 서재로 갔다.“일단 먼저 쉬고 계세요. 몸 상하면 안 되잖아요.”배진호의 시선이 바로 권다솔에게 향했다. 권다솔이 박은희를 부축하고 다시 돌아와 옆에 앉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두 사람의 모습을 본 최주하는 연신 감탄을 해댔다.“두 사람 사이가 아주 좋네요. 전에 엄청 크게 싸웠다던데 그것도 전부 헛소문이죠?”지금 두 사람의 모습만 봐도 여전히 서로 엄청나게 사랑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이는데 어딜 봐서 싸웠단 말인가.설령 싸웠다고 해도 무슨 일로 싸웠든 배진호가 먼저 권다솔에게 사과할 것이다.권다솔은 웃는 얼굴로 말했다.“예전에 한 번 크게 싸웠으니까 이젠 서로를 더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진호 씨는 걱정이 많은 사람이거든요. 저뿐만 아니라 아이한테도 그래요. 벌써 아기들 옷을 자꾸만 사 온다니까요.”분명 아직 출산까지 몇 개월 남았는데도 말이다.“미리 준비해둬서 나쁠 건 없잖아.”배진호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고 서로
여이현에게도 딸이 있었고 매일 만날 수 있지만 온지유와 법로는 오랜 시간 동안 떨어져 살지 않았는가.게다가 법로는 지금 시한부였고 살 수 있는 시간이 5년뿐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이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고 서로에게 좋은 추억만 남겨야 했다.권다솔도 이해하고 있었던지라 여이현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곤 배진호의 팔짱을 꼈다. 그리고 함께 차를 주차해둔 곳으로 갔다.“사실 요즘 시간의 여유가 생겼잖아. 그래서 너랑 함께 다른 도시로 가서 여행하려고 했는데 지금 보니 그 계획을 뒤로 미뤄야겠네.”배진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그의 눈빛은 한없이 다정했다. 그녀가 곁에 있으니 너무도 좋았기 때문이다.권다솔은 웃으며 말했다.“요 며칠은 시간이 없겠지만 다음 주에 가면 되잖아. 다다음 주도 괜찮고. 어쨌든 우리에겐 이젠 시간은 많아.”두 사람은 아직 젊었으니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한편 양채은 쪽 상황.양시은이 일하러 나가니 집 안에는 그녀 혼자 남게 되었다.할 일이 없었던 그녀는 집안을 구석구석 청소하려고 했지만 별장이 너무 컸던지라 힘도 많이 들어가 쉬었다가 할 수밖에 없었다.청소를 마치고 나니 어느덧 저녁이 되었다.양채은은 시간을 보곤 나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도현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만약 오늘 집으로 돌아올 수 없대도 그저 간단한 대화 몇 마디면 충분했다.신호 연결음이 한참이나 들려왔지만 받지 않았다. 그녀는 문자를 보낸 뒤 얌전히 기다렸지만 여전히 아무런 답장도 오지 않아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그녀가 알고 있는 강태경은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시간을 내서 그녀의 문자에 답장을 해주거나 전화를 해주었다. 그런데 오늘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전화든 문자든 한 통도 오지 않았고 잠수를 탄 사람처럼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한참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그의 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사무소 전화번호도 나도현이 그녀에게 알려준 것이었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걸어본 적 없었다.
양채은의 반응은 너무도 격했고 무슨 말을 하든 믿지 않으려 했다.“저랑 태경 씨는 알고 지낸 지 오래된 사이예요. 태경 씨가 저한테 얼마나 잘해주는데요. 일도 열심히 하고 능력도 뛰어난 변호사인데 어떻게 그런 짓을 할 리가 있겠어요? 당장 다시 조사해보세요. 분명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걸 거예요!”국장은 그녀가 말 마치기를 기다린 후 물었다.“양채은 씨, 방금 태경 씨라고 호칭하던데 맞습니까?”“네, 맞아요. 제 약혼자 이름은 강태경이에요. 곧 결혼할 사이인데 그 호칭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양채은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 눈앞에 있는 경찰이 쓸데없는 것에 관심이 참 많다고 생각했다. 곧 결혼할 사이인 예비부부의 호칭까지 신경 쓰다니 말이다.국장은 고개를 저었다.“이건 두 사람이 곧 결혼할 사이이든 아니든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이 이름은 양채은 씨가 말해준 약혼자의 신분 정보랑 일치하지 않습니다. 혹시 알고 있습니까?”“그게 무슨 소리세요. 저한테 그런 농담은 통하지 않아요.”양채은은 멍한 표정을 지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덜덜 떨리는 몸으로 국장을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보았다.‘그럴 리가 없잖아! 태경 씨 이름은 강태경이라고. 강태경이 아니면 대체 뭐라는 거야? 태경 씨가 날 속일 리가 없다고!'“신분 정보를 알고 있지만 상대의 이름이 뭔지를 모르는 걸 보니 양채은 씨도 이 사건과 연관이 있다고 의심이 되는군요.”국장은 그녀를 데리고 취조실로 들어갔다. 양채은은 여전히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그 사람이 강태경이 아니면 대체 뭔데요?”“나도현.”이 이름은 양채은에게 아주 낯선 이름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한 순간이 아주 많았지만 살면서 단 한 번도 이 이름을 들어본 적 없었다.“신분 정보를 알고 있다는 건 신분증을 보았다는 소리인데 본인이 알고 있는 이름과 신분증에 있는 이름이 다르다는 걸 모르셨습니까? 양채은 씨,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거죠?”국장은 계속 말을 이었다.양채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약혼식이 있던
호텔 바닥은 아수라장이었다.잠에서 깬 지유는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지유는 미간을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커다란 몸집을 가진 남자가 옆에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지나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은 조각과도 같았고 눈매도 깊고 진했다.아직 깊은 잠이 들어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지유가 몸을 일으키자 이불이 그녀의 몸에서 미끄러져 내렸고 뽀얗고 매혹적인 두 어깨에 어젯밤 남긴 흔적이 보였다.지유가 앉았던 자리에 선명한 핏자국이 보였다.시간을 보니 어느새 출근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유는 바닥에 널브러진 출근룩을 다시 집어 들어 얼른 갈아입었다.스타킹은 이미 남자에 의해 찢겨 있었다.지유는 스타킹을 돌돌 말아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하이힐을 신었다.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깔끔하게 차려입은 지유는 어느새 워커홀릭 비서로 완전히 돌아왔고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들어온 사람은 청순한 미녀였다.지유가 부른 사람이었다.이현의 취향이 이런 여자였다.지유가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침대에 누워서 대표님 깨나길 기다리면 돼요. 다른 건 한마디도 하지 마요.”지유는 고개를 돌려 아직 단잠에 빠진 남자를 힐끔 쳐다봤다. 억울한 마음에 코끝이 찡해졌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방에서 나왔다.지유는 두 사람이 어젯밤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이현이 아는 게 싫었다.그들 사이에 계약에 의하면 아무도 모르게 3년간 결혼을 유지하면 바로 이혼할 수 있었다.이 기간에 선을 넘는 행동은 그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지유는 7년째 이현의 비서로, 3년째 이현의 와이프로 있었다.졸업한 그날부터 이현의 곁을 한시도 떠난 적이 없었다.같은 날, 이현은 지유에게 두 사람은 그저 상사와 부하의 관계일 뿐 이 관계를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지유는 복도 창가에 서서 어제 일을 떠올렸다. 이현은 그녀를 안고 침대에 누워 ‘승아’라는 이름을 연신 불러댔다.지유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승아는 이현의 첫사랑이었다.이현은 지유를 승
양채은의 반응은 너무도 격했고 무슨 말을 하든 믿지 않으려 했다.“저랑 태경 씨는 알고 지낸 지 오래된 사이예요. 태경 씨가 저한테 얼마나 잘해주는데요. 일도 열심히 하고 능력도 뛰어난 변호사인데 어떻게 그런 짓을 할 리가 있겠어요? 당장 다시 조사해보세요. 분명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걸 거예요!”국장은 그녀가 말 마치기를 기다린 후 물었다.“양채은 씨, 방금 태경 씨라고 호칭하던데 맞습니까?”“네, 맞아요. 제 약혼자 이름은 강태경이에요. 곧 결혼할 사이인데 그 호칭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양채은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 눈앞에 있는 경찰이 쓸데없는 것에 관심이 참 많다고 생각했다. 곧 결혼할 사이인 예비부부의 호칭까지 신경 쓰다니 말이다.국장은 고개를 저었다.“이건 두 사람이 곧 결혼할 사이이든 아니든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이 이름은 양채은 씨가 말해준 약혼자의 신분 정보랑 일치하지 않습니다. 혹시 알고 있습니까?”“그게 무슨 소리세요. 저한테 그런 농담은 통하지 않아요.”양채은은 멍한 표정을 지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덜덜 떨리는 몸으로 국장을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보았다.‘그럴 리가 없잖아! 태경 씨 이름은 강태경이라고. 강태경이 아니면 대체 뭐라는 거야? 태경 씨가 날 속일 리가 없다고!'“신분 정보를 알고 있지만 상대의 이름이 뭔지를 모르는 걸 보니 양채은 씨도 이 사건과 연관이 있다고 의심이 되는군요.”국장은 그녀를 데리고 취조실로 들어갔다. 양채은은 여전히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그 사람이 강태경이 아니면 대체 뭔데요?”“나도현.”이 이름은 양채은에게 아주 낯선 이름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한 순간이 아주 많았지만 살면서 단 한 번도 이 이름을 들어본 적 없었다.“신분 정보를 알고 있다는 건 신분증을 보았다는 소리인데 본인이 알고 있는 이름과 신분증에 있는 이름이 다르다는 걸 모르셨습니까? 양채은 씨,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거죠?”국장은 계속 말을 이었다.양채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약혼식이 있던
여이현에게도 딸이 있었고 매일 만날 수 있지만 온지유와 법로는 오랜 시간 동안 떨어져 살지 않았는가.게다가 법로는 지금 시한부였고 살 수 있는 시간이 5년뿐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이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고 서로에게 좋은 추억만 남겨야 했다.권다솔도 이해하고 있었던지라 여이현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곤 배진호의 팔짱을 꼈다. 그리고 함께 차를 주차해둔 곳으로 갔다.“사실 요즘 시간의 여유가 생겼잖아. 그래서 너랑 함께 다른 도시로 가서 여행하려고 했는데 지금 보니 그 계획을 뒤로 미뤄야겠네.”배진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그의 눈빛은 한없이 다정했다. 그녀가 곁에 있으니 너무도 좋았기 때문이다.권다솔은 웃으며 말했다.“요 며칠은 시간이 없겠지만 다음 주에 가면 되잖아. 다다음 주도 괜찮고. 어쨌든 우리에겐 이젠 시간은 많아.”두 사람은 아직 젊었으니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한편 양채은 쪽 상황.양시은이 일하러 나가니 집 안에는 그녀 혼자 남게 되었다.할 일이 없었던 그녀는 집안을 구석구석 청소하려고 했지만 별장이 너무 컸던지라 힘도 많이 들어가 쉬었다가 할 수밖에 없었다.청소를 마치고 나니 어느덧 저녁이 되었다.양채은은 시간을 보곤 나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도현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만약 오늘 집으로 돌아올 수 없대도 그저 간단한 대화 몇 마디면 충분했다.신호 연결음이 한참이나 들려왔지만 받지 않았다. 그녀는 문자를 보낸 뒤 얌전히 기다렸지만 여전히 아무런 답장도 오지 않아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그녀가 알고 있는 강태경은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시간을 내서 그녀의 문자에 답장을 해주거나 전화를 해주었다. 그런데 오늘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전화든 문자든 한 통도 오지 않았고 잠수를 탄 사람처럼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한참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그의 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사무소 전화번호도 나도현이 그녀에게 알려준 것이었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걸어본 적 없었다.
여이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아주머니, 도현이에게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저희한테 자세하게 말씀해주셔야 저희 나름대로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요.”“그래. 도현이에게 너희 같은 친구들이 있어서 참 다행이구나. 난 정말 더는 방법이 없단다.”박은희는 사건의 자초지종을 전부 말해주었다. 물론 자신이 이 일을 만든 사람이라는 것은 쏙 빼놓고 말이다.거실에 앉은 나도현의 친구들은 침묵했고 저마다 표정이 좋지 못했다.“도현이는 내가 직접 곁에 두고 키운 아이야. 절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야. 내가 알아. 분명 누군가 모함하고 있는 걸 거야.”박은희는 말하면 말할수록 마음이 괴로웠다. 지금 아들이 경찰서에 있으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착했던 아들의 모습이었다.나도현은 결혼과 사업 문제에서만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을 뿐 다른 부분에서는 아주 얌전한 아들이었다.“아주머니, 일단 진정하시고 저희가 어떻게든 방법을 생각해내 볼게요.”권다솔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박은희를 부축한 채 서재로 갔다.“일단 먼저 쉬고 계세요. 몸 상하면 안 되잖아요.”배진호의 시선이 바로 권다솔에게 향했다. 권다솔이 박은희를 부축하고 다시 돌아와 옆에 앉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두 사람의 모습을 본 최주하는 연신 감탄을 해댔다.“두 사람 사이가 아주 좋네요. 전에 엄청 크게 싸웠다던데 그것도 전부 헛소문이죠?”지금 두 사람의 모습만 봐도 여전히 서로 엄청나게 사랑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이는데 어딜 봐서 싸웠단 말인가.설령 싸웠다고 해도 무슨 일로 싸웠든 배진호가 먼저 권다솔에게 사과할 것이다.권다솔은 웃는 얼굴로 말했다.“예전에 한 번 크게 싸웠으니까 이젠 서로를 더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진호 씨는 걱정이 많은 사람이거든요. 저뿐만 아니라 아이한테도 그래요. 벌써 아기들 옷을 자꾸만 사 온다니까요.”분명 아직 출산까지 몇 개월 남았는데도 말이다.“미리 준비해둬서 나쁠 건 없잖아.”배진호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고 서로
박은희는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을 후회했다.“남자가 얼굴도 시원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다니는 주제에 남자라고 할 수나 있어요?”“사모님, 설마 절 자극하는 방법으로 가면을 벗게 만들려는 건 아니죠? 제가 정말로 개처럼 사모님의 말만 고분고분 들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마음 급해진 박은희와 달리 가면남은 더 평온해졌다.심지어 비꼬는 어투로 말하고 있어 박은희는 정말이지 짜증이 치밀어 미칠 것 같았다.“얼마를 원하는 거죠? 얼마면 내 아들을 경찰서에서 나오게 할 거냐고요.”나도현이 무사히 경찰서에서 나온다면 그녀는 돈이 얼마가 들든 상관하지 않았다.그러나 가면남은 고개를 저었다.“이건 돈 문제가 아니에요. 만약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거였으면 사모님도 이렇게 절 찾아오진 않았겠죠.”그 말인즉슨 박은희가 더는 생각해낼 방법이 없어 그를 찾아온 것이라는 의미였지만 그도 방법이 없었다.가면남은 팔짱을 끼며 말했다.“법은 제가 만든 것도 아니잖아요. 제 인맥은 사모님보다 적고 사모님도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하시니 저는 더 방법이 없지요. 그러니 조급해하지 마시고 그냥 그 안에서 해결될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라고 하세요.”“내가 어떻게 조급해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박은희는 정말이지 가면남의 뺨을 후려치고 싶었다.경찰서로 잡혀간 사람은 그녀의 아들이었기에 당연히 가면남은 태연할 수밖에 없고 이런 심드렁한 말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다.“그렇게 조급하면 왜 굳이 그런 짓을 꾸며가며 아들을 해치려 한 거죠? 전 일은 확실하게 했고 돈은 사모님이 주신 거잖아요. 사모님이 돈 주면서 시키지 않았다면 전 이런 일을 할 이유도 없고 하지도 못했겠죠. 아들을 구치소로 보낸 사람은 사모님이 아닌가요?!”그의 말은 무거운 돌이 되어 박은희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고 손이 저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렸다.그녀가 원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나도현이 그 안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걸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지금쯤이면 임다혜와 결혼해 나진 그룹
‘허효준이 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거지?'“그리고 나도현 씨가 최근 맡은 그 사건, 피고인이 다국적 기업의 돈세탁에 연루되어 있었죠. 나도현 씨가 제출한 증거로...”경찰 국장은 미간을 확 구기더니 서류 봉투를 열어 안에서 서류를 꺼내 나도현 앞에 툭 던졌다.“직접 보세요. 대체 본인이 뭘 증거로 제출했는지.”서류에 적힌 내용은 전부 변명에 불관했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서류 사이에 끼어있는 한 장의 수표였다. 이렇게 많은 증거가 한꺼번에 쏟아지니 아무리 그가 변호사라고 해도 자신의 결백을 밝힐 수 없었다. 그는 심지어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인지도 말지 못했다.이 증거들은 그가 직접 정리해서 법원에 제출한 것이었지만 그가 제출한 서류와 내용이 전혀 달랐다. 마치 누군가 중간에서 바꿔치기한 것 같았다. 하지만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한 것일까? 그는 모든 것을 직접 했다. 서류 복사를 비서에게 시킨 것 빼고는 말이다. 그렇다면 설마...“나도현 변호사님, 증거가 산처럼 쌓여있는데 어떻게 자신의 결백을 밝힐지부터 생각하시죠.”경찰 국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경멸의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젊고 능력 좋은 변호사에다가 나씨 가문 사람이면 앞길이 창창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런 사람이 본인의 앞길을 망치고 있는 것이 한심했다. 판사에게 뇌물을 바치고 나라를 팔았다는 증거가 가득했기에 나도현의 변호사 앞길은 이미 막힌 것과 다름이 없었다....박은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현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바로 나도현을 빼내려고 했지만 사건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을 듣자마자 표정이 변해버렸다.“그렇게 심각하다고요?”“사모님, 그 마음은 이해가 되나 이 사건은 지금 제가 직접 맡고 있어서 풀어드릴 수 없습니다.”경찰 국장은 직접 그녀를 만나 설명했다.“사모님도 이치를 아는 사람이니 이 일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아실 거로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 주세요.”박은희는 자신이 어떻게 경찰서에서 걸어 나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차에 올라탄
“저희와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그중 한 명이 나도현의 곁으로 다가가 서늘한 은빛을 내는 쇠고랑을 채워주었다.나도현은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 법을 어기는 행동을 한 적 없는데 왜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것인지 말이다. 게다가 그에게 수갑까지 채우지 않았는가.그는 본능적으로 수갑을 피하며 말했다.“착각하신 거 아닙니까?”“나도현 씨 아닙니까? 저희는 이미 사진까지 확인하고 왔고 알맞게 찾아왔습니다. 그러니 내뺄 생각하지 마시고 얌전히 저희랑 함께 가주시죠!”공무원은 언성을 높여 말했다. 그들이 직접 찾아와 체포한다는 건 명확한 증거가 있다는 의미였으니 당연히 착각할 리가 없었다.“일단 저를 왜 데리고 가려는지 이유부터 들어야겠습니다.”나도현은 지금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의 반응에 공무원들은 그가 일부러 모른 척하며 빠져나가려 한다고 생각했다.“본인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저희보다 본인이 더 잘 알겠죠. 변호사라면서 매일 법 관련 문서만 보았을 텐데 어떻게 자신이 불법을 저질렀다는 것을 모를 수 있습니까! 그러니 잘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 겁니다. 솔직하게 전부 털어놓던가, 아니면 계속 명령에 불복종하면 공무집행방해죄를 더 추가할 겁니다!”나도현은 일단 얌전히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경찰서로 온 뒤 그는 취조실로 들어가게 되었고 그의 사건은 경찰 국장이 직접 맡게 되었다.경찰 국장은 반백 살이 넘은 중년 아저씨였고 안경을 끼고 있었지만 눈빛은 아주 날카로웠다.“나도현 씨 맞으시죠? 허효준 씨랑은 어떤 사이죠?”“저희는 대학 동기였지만 졸업 후에는 절친한 친구로 지냈습니다.”나도현은 비록 경찰 국장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취조실까지 들어왔으니 묻는 대로 전부 대답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두 사람의 관계가 확실히 끈끈한가 보군요. 그래서 허효준 씨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 겁니까? 나중에 둘이 서로 짜고 치려고?”“전 그런 생각한 적도 없고 그런 일을 한 적도 없습니다.”나도현의
양시은은 어떻게 덥석 받을 수 있겠는가.고작 며칠 사이에 양채은은 그녀에게 아주 많은 돈을 빌려주었기에 마냥 계속 받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언니, 내가 만약 혼자 살았으면 언니가 언제까지 머물어도 상관없는데 지금은 내겐 태경 씨가 있잖아. 그리고 난 임신한 몸이니까 아기도 언젠가 태어날 테고 영원히 언니랑 함께 살 수는 없어. 그러니까 받아. 이 정도면 반년 정도의 월세를 낼 수 있을 거야.”양채은은 단호하게 말하면서 돈을 주려고 했다.양시은은 그녀가 자신을 내쫓으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다만 가족 간의 정 때문에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한 것이었다.곰곰이 생각해보면 양채은의 행동도 이해가 되었다. 이미 약혼까지 하고 가정이 생겼는데 어느 누가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길 바라겠는가. 한 지붕 아래 가족이 함께 산다면 당연히 불편할 것이었다. 거기에다 나도현이 최근에 보인 행동으로도 양채은은 두 사람이 어떤 사이인지 눈치를 채지 못했으나 분명 뭔가가 있다는 것만큼은 알아냈을 것이다.그녀는 정말로 이 집에서 나가고 싶었지만 이 집을 나가는 것이 두려웠다. 나가는 순간 나도현이 절대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거니까. 자신을 괴롭히는 거라면 두렵지 않았지만 그녀에겐 양채은과 하민이가 있었다. 이 두 사람은 그녀의 약점이었고 그녀를 옭아매고 있는 밧줄이기도 했다.양채은은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더 마음이 불편해졌다.“언니, 난 그냥 해본 말이야. 그러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 우린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으니까 함께 사는 건 당연하잖아. 지금 나에게 유일하게 남은 가족은 언니인걸.”만약 누군가 그녀에게 그녀가 유일한 가족을 집에서 내보내게 될 거라고 말했다면 그녀는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어젯밤부터 그녀는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모든 사이엔 거리감이 있어야 불편함 없이 살 수 있다는 말처럼 따로 살았다면 강태경이 자신의 언니를 매일 마주치게 될 일도 없을 테고 어젯밤과 같은 일도 생기지 않았을 거로 생각했다.“채은아, 이 돈은 정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나도현은 눈을 떴다. 몸을 덮은 담요를 본 그는 어젯밤 자신을 챙겨준 사람이 양시은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몸을 일으키자 바닥에 이불 깔고 자는 양채은을 발견했다.“일어났어요? 어제는 왜 그렇게 술을 마신 거예요? 오는 택시에서 잠들어 버렸더라고요. 제가 태경 씨를 얼마나 힘들게 끌고 왔는지 알아요? 원래는 깨워서 꿀물이라도 마시고 자게 하려고 했는데 너무 깊이 잠들어서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더라고요.”양채은은 인기척에 눈을 뜨고 말했다. 그러면서 거실을 대충 치우고는 주방으로 들어가 다시 따듯한 꿀물을 만들어 왔다.“지금은 술이 깼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마셔요. 꿀물은 사람 몸에도 좋으니까요.”“이런 거 할 필요 없어.”나도현은 꿀물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마실 생각이 전혀 없었던 그는 이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엔 온통 양시은뿐이었다.그는 생각한 대로 양시은의 행방을 물어보았다.“태경 씨,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왜 우리 언니한테 그렇게 관심이 많은 거예요?”양채은은 한참 머뭇거리다가 그래도 설명을 들을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 입을 열었다. 나도현이 아무리 그녀의 가족이라 양시은을 관심한다고 하지만 보는 사람은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 행동을 볼 때마다 양채은은 어딘가 심기 불편해졌다.“태경 씨는 제 약혼자고 언니는 곧 태경 씨의 처형이 되고요. 전 태경 씨가 우리 언니를 가족처럼 여겨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엔 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언니는 지금 우리 집에 얹혀사는 처지이고 언니가 무엇을 하든 그건 언니의 자유라고 생각해요. 태경 씨가 일일이 걱정하고 간섭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그녀의 말에 나도현은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내 일에 간섭하는 거야?'그는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지금 내가 쓸데없는 걱정 한다고 말하고 싶은 거지?”“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전 그렇게 말한 적 없으니까 오해하지 말아요. 그냥 우린 우리대로 살고 언니는
‘설마 우리 언니를 좋아하게 된 건가?'충격적이고 터무니없는 생각이 떠오르자 양채은은 자신에게 깜짝 놀라고 말았다.“사람 잘못 보셨어요. 전 채은이가 아녜요.”양시은은 얼른 나도현을 양채은에게 밀어내며 말했지만 나도현은 대놓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안고 싶은 사람은 양시은인데, 여기서 양채은이 왜 나오는 거지?'그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왜 날 밀어내는 거지?”“태경 씨, 사람 착각하셨어요. 제가 태경 씨 약혼자라고요.”양채은은 더는 지켜볼 수 없어 성큼성큼 걸어오며 나도현의 손을 자신의 허리에 가져다 댔다.“저랑 언니는 비록 닮긴 했지만 태경 씨가 헷갈릴 정도는 아니라고요!”이 말을 끝으로 양채은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방금 그의 행동은 확실히 너무 했다고 생각했다.나도현은 또다시 양채은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마침 도착한 택시에 양시은은 다가가 조수석에 올라탔다.그 모습을 본 나도현은 비틀대며 택시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고 양채은도 황급히 따라간 뒤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차에 올라탄 나도현은 의자에 기대어 잠들어 버렸고 양채은은 차마 그를 깨울 수 없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더 많이 자길 바랐던 그녀는 택시가 집 앞까지 도착한 후에도 혼자서 나도현을 부축한 채 집 안으로 들어갔다. 비록 힘들긴 했지만 양시은에게 도와달라고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양시은은 원래부터 그녀에게 켕기는 것이 있었던지라 당연히 먼저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고 그저 묵묵히 뒤를 따라갔다.“언니.”양채은은 겨우 나도현을 소파까지 부축한 뒤 눕혔다.“태경 씨는 내가 남아서 챙겨주면 되니까 언니는 방으로 가서 쉬어. 야밤에 나 도와준다고 술집까지 갔잖아.”자매였던지라 양시은은 양채은이 자신을 쫓아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그래, 알았어. 너도 일찍 쉬어.”양시은은 별다른 말 없이 방으로 돌아온 뒤 방 문을 꼭 걸어 잠갔다.거실엔 양채은과 나도현만 남게 되었다. 양채은은 아까부터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지만 나도현 몸에서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