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 양채은은 지금 이 기분을 어떻게 형언해야 할지 몰랐다.강태경은 그녀에게 아주 좋은 사람이었고 그녀의 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지금 그녀에게 전부 가짜라고 하지 않는가.진짜 이름은 나도현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었고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몰랐다.그녀는 어디 내놓을만한 집안 배경을 가진 것도 아니고 대단한 위인도 아니었을뿐더러 일을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인맥도 없었다.경찰은 넋 나간 그녀를 보며 물었다.“혹시 신체 포기 각서 같은 것에 사인하거나... 은행 카드를 빌려주거나 하지 않았어요?”지금 이 시대에 보이스 피싱이 난무하고 있었기에 물어보는 것이었다.양채은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그냥 저한테 용돈 준 기록뿐이에요. 전 임산부라 뭘 가져갈 만한 것도 없거든요.”그럼 더욱 이상했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고 그저 이름만 가짜로 알려주었다니.경찰은 조사한 내용을 더 자세히 양채은에게 알려주었다.“나도현, 경성의 엘리트 변호사고 아마도 나도현 씨의 악취미에 이용당한 것 같네요.”돈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악취미가 있기 마련이었다. 양채은은 원래부터 충격을 받은 상태였지만 경찰의 말을 들으니 더 괴로웠다.그러니까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도현의 손에 놀아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나도현이 자신에게 잘해주었던 기억이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더욱 괴로워졌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괴로웠던 것은 경찰서로 나오자마자 누군가 빠르게 그녀를 검은색 차로 납치한 것이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경계하며 덜덜 떨리는 몸으로 물었다.“당신들은 누구죠? 대체 뭘 원하는 거죠!”검은색 차는 창문마저 꼭꼭 닫혀 있었다. 차 안에는 운전자와 조수석, 그리고 그녀의 옆에 앉은 사람, 총 세 명의 남자가 있었고 전부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그녀의 옆에 앉은 남자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나도현을 찾고 있는 거 아니었나? 우리가 도와주지.”양채은은 더 겁에 질렸다.“좋은 사람이라면 왜 전부 얼굴을 가리고 있는 거죠?”“네가
비록 차는 느리게 달리고 있었지만 갑자기 밀려 그대로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고 너무도 아팠다. 하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양채은은 검은색 차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곤 양시은에게 전화를 걸었다.“언니, 지금 뭐 해? 나 궁금한 게 있어서 물어보려고. 직접 얼굴 보고 물어보고 싶은데...”양채은의 목소리만 들어도 양시은은 그녀가 분명 무언가를 눈치챘다는 것을 알아챘다. 양채은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 불안해할 양채은이 걱정되어 양시은도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고 그렇게 양시은은 양채은을 찾아가기로 했다.양채은은 길가에 앉아 표정이 잔뜩 어두워진 채 공허한 눈빛으로 길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양시은은 그런 그녀를 발견하고 얼른 뛰어갔다.“채은아, 무슨 일이야?”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양채은은 고개를 들며 잔뜩 비웃음이 담긴 얼굴로 보았다.“언니는 정말로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긴 지 몰라서 묻는 거야? 사랑하는 언니야?”양채은이 의미심장하게 내뱉은 말과 조롱 섞인 미소, 그리고 싸늘해진 눈빛에 양시은은 그녀가 모든 걸 알아버렸음을 직감했지만 이렇듯 빨리 알아버리게 될 줄은 몰랐다.양시은은 목이 너무도 아팠고 무언가 딱딱한 것이 막혀버린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채은아, 나도 일부러 숨기려고 한 건 아니었어. 그때 나도현과 헤어진 건 나도현 어머니에게서 돈을 받아서였어.”양시은은 고개를 푹 숙인 후 양채은의 곁에 앉았다. 하지만 양채은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딴 과거는 신경 쓰지 않아. 내가 지금 받아들일 수 없는 건 언니가 날 속이고 있었다는 거야. 대체 왜 말을 하지 않은 건데? 내가 언니한테 그렇게 나쁜 사람이었어? 이용당하고 있다는 걸 알려주기 싫을 만큼?! 아니면 나한테 진실을 알려주고 나면 내가 언니한테서 나도현을 빼앗아갈까 봐 걱정된 거였어?!”양채은은 역시 모든 걸 다 알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렇듯 흥분할 리가 없었다.양시은은 비록 마음이 괴롭기는 했지만 양채은이 지금 알게 된 것이 나중에 알게 된
말을 마친 양채은은 바로 자리를 떠나버렸고 양시은은 그런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양채은의 마음이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 그녀였어도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그녀는 바로 박은희를 찾아가려고 했고 택시를 잡은 후 나씨 가문 본가로 향했다.이곳을 찾아온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박은희의 초대로 와본 적 있었다.박은희는 그녀에게 호화롭기 그지없는 집안 내부를 보여준 뒤 8억을 주면서 나도현의 곁에서 떨어지라고 말했다. 그때 그녀는 속으로 맹세했다. 다시 이곳으로 발을 들이지 않으리라.그런데 오늘 그녀는 양채은을 위해 다시 발을 들이게 되었고 입구 경비원이 그녀를 막아섰다.“누구시죠?”양시은은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전 양시은이라고 해요. 제 이름을 사모님께 말씀드리면 들어오라고 하실 거예요.”그녀는 양채은을 붙잡지 않은 이유가 양채은에게 받아들일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양채은을 혼자 오랫동안 둘 수는 없었던지라 서둘러야 했다.입구 경비원은 너무도 침착한 그녀의 모습을 보곤 이내 들어가 보고를 올리기로 했다.그녀의 이름을 들은 박은희는 안색이 변했고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는 대신 직접 나와서 양시은을 만났다.박은희를 본 순간 양시은은 모든 걸 깨닫게 되었다. 특히 박은희의 싸늘한 눈빛만 봐도 박은희는 그녀가 이 집안에 발을 들일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 직접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박은희는 비꼬아 말했다.“왜, 돈이 필요한 거니?”양시은은 입술을 짓이기며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아니요. 오늘 이렇게 찾아온 건 사모님이 제 가족을 건드려서예요. 전에 이미 약속했잖아요. 나도현의 곁에서 떨어져 영원히 눈앞에 나타나지 않기로요. 전 그 약속을 지켰어요.”그녀를 찾아온 사람은 나도현이었다.“내가 네 가족을 건드렸다고? 도현이가 왜 네 동생한테 접근한 건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알고 있는 거 아니니? 네 동생한테는 난 손도 대지 않았다.”박은희의 표정을 보니 거짓말하고 있는 건 같지 않았다. 박은희가 아니라면.
“저한테 뭘 해줄 필요는 없어요. 그냥 우리 가족만 건들지 않으면 돼요. 그게 제 유일한 요구예요.”마스크남은 나직하게 웃었다.“이 세상에서 돈과 권력을 마다하는 사람이 존재하다니. 참 신기하네요.”허효준은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그냥 내 요구만 들어줘요. 앞으로 다시는 날 찾아오지도 말고요. 그 어떠한 것도 들어주지 않을 거니까요.”그러나 마스크남은 이렇듯 손쉽게 허효준을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그다음 순간 그는 허효준에게 리스트를 건넸다.“이 위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든 풀어줘요. 안 그러면 그쪽이 엘리트 변호사를 모함했다는 사실을 까발릴 거니까요.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시민들이, 그쪽 직장에서 그쪽을 가만둘 것 같아요?”여기까지 녹음한 양시은은 아주 만족했다. 그러나 나가려던 순간 허효준이 그녀를 알아보았다.“시은 씨가 여긴 왜 있는 거예요?”마스크남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해버렸다.양시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잽싸게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녀는 구체적인 상황을 몰랐지만 허효준이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목격하고 나도현이 모함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그들이 그녀를 가만둘 리가 없지 않겠는가.허효준은 뒤쫓아 가고 싶었지만 마스크남이 그를 불러세웠다. 그는 태연하게 차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어차피 도망쳐봤자 손바닥 안이라는 걸 모르나요?”허효준은 마스크남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마스크남의 눈빛이 더 어둡게 가라앉았다.“양시은에게 아들이 있지 않나요?”그 말에 허효준은 바로 깨닫게 되었다.마스크남은 핸드폰을 꺼내더니 누군가에게 연락했다.“병원 쪽으로 가서 양시은의 아들을 인질로 잡고 있어.”허효준은 다른 사람이 이 일에 휘말리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지만 이미 이 지경이 되었으니 양시은이 다른 곳에 가서 말할 수 없게 막아야 했다.양시은은 녹음 파일을 저장한 후 바로 박은희를 찾아가려고 했지만 마스크남이 한 발 더 빨랐다.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하민이의 울음소리에 양시은은 더는 나도현을 도와줄 수
박은희는 눈물을 흘리는 양시은의 모습에도 마음이 약해지지 않았고 어떻게든 양시은이 가지고 있는 증거로 나도현을 구해낼 생각만 했다.게다가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모습에 박은희는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왜 마침 시은 씨가 그 증거를 가지고 있는 거지?”양시은은 손을 들며 맹세했다.“아르바이트할 때 효준 씨가 우연히 제가 일하는 가게로 왔고 마침 제가 서빙하고 있어서 녹음한 거예요. 사모님, 제가 왜 제 친자식으로 장난을 치겠어요?”양시은은 한 치의 거짓 없는 얼굴로, 토끼 같은 동그란 눈빛으로 말했다.박은희도 그녀와 같은 여자고 한 아이의 엄마로서 당연히 양시은의 지금 감정을 이해하고 있었다.하지만 만약 양시은의 아이가 죽게 된다면 양시은은 패닉에 빠질 것이다. 그런 상태의 양시은은 미쳐버리거나 죽어버리게 될 가능성이 아주 컸고 나도현도 양시은을 점차 잊으리라 생각했다.박은희의 머릿속에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핸드폰을 나한테 넘겨. 네 아들은 내가 어떻게든 방법을 생각해내 볼 테니까.”양시은은 핸드폰을 박은희에게 넘기려던 순간 직감했다.“아니요. 사모님께서 그렇게 흔쾌히 제 요구를 들어주실 리가 없죠. 전 사모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요. 제가 죽기를 바라고 있고 더는 나도현 앞에서 나타나길 바라지 않는 거잖아요.”박은희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순간 양시은은 자신의 추측이 정확했음을 눈치챘다.그녀는 이 틈을 타 제안했다.“계약서라도 써주세요.”박은희는 인맥을 동원해서라도 그녀의 아들을 구해낼 방법이 있었지만 나도현은 그저 잠시 누명을 썼을 뿐이다. 박은희가 하민이를 구해내는 걸 본 후에야 그녀는 나도현을 위해 이 녹음 파일을 박은희에게 건넬 생각이다.생각보다 눈치가 빠른 양시은에 박은희도 더는 방법이 없어 그녀의 요구대로 계약서를 쓰기로 했다.양시은은 그제야 녹음 파일을 그녀에게 전송했고 박은희는 하는 수 없이 사람을 보내 하민이를 구해야 했다.마스크남은 지금 이런 시기에 누군가 자신을 찾아와 깽판을 벌일 줄은 몰랐
천사와 악마의 목소리는 이러했다.“하민이는 원래부터 아픈 아이였잖아. 네 언니는 애초에 널 동생으로 생각한 적도 없는데 왜 언니 입장까지 고려해야 하는 거지? 그런 사람이라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하는 거야!”악마의 목소리가 점차 그녀의 이성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천사의 목소리는 여전히 악마와 대항하고 있었다.“안 돼. 아이가 아직 어리잖아...”그러자 악마는 다시 반박했다.“양채은, 만약 네가 손 놓고만 있다가 네 아이가 사라진 뒤에야 복수할 생각이야?”양채은은 당연히 자신의 아이가 사라지길 바라지 않았다.몇 년 동안 그녀는 항상 노력했지만 양시은은 그녀가 노력하는 모습을 본 적 없었고 심지어 약혼식 그날에도 나도현과 뒹굴고 있었다.분명 나도현은 그녀의 약혼자이고 그녀의 배 속에 있는 아이의 아빠인데도 말이다. 오로지 그녀의 배 속에 있는 아이만 나도현에게 아빠라고 불러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양채은의 눈빛이 점점 싸늘해졌다....한편 나도현은 녹음 파일 덕분에 검찰과 경찰은 허효준을 소환해 조사하기 시작했고 허효준이 다른 누군가와 나도현을 모함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나도현을 석방했다.나도현이 나오자 허효준이 들어가게 되어 두 사람의 상황은 정반대가 되었다.원래는 그저 스쳐 지나가게 되겠지만 나도현은 허효준 앞에 서 있었다.그는 처음부터 자신이 누군가에게 모함당했을 거라곤 생각도 하지 않았다. 여하간에 변호사가 된 순간부터 그의 손으로 들어온 사건은 전부 잘 해결되었으니 말이다. 더구나 그에겐 나씨 가문이 있었으니 아무도 그를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그런데 허효준이 누군가와 손을 잡고 자신을 모함했다고 하니 나도현은 배신감에 가슴이 아팠다.“허효준, 난 널 제일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어. 난 너도 내 소꿉친구들이랑 같은 취급을 하고 있었다고.”여이현과 최주하, 지석훈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다. 허효준은 그의 대학교 시절 친구였지만 그는 변호사가 되었고 허효준은 판사가 되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다시 친해져 나도
나도현은 입술을 짓이겼다. 지금 이 기분을 어떻게 형언해야 할지 몰랐다. 양시은이 돈을 위해 자신을 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양시은의 아들도 자신과 혈연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양시은은 그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니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나도현은 더는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네 할머니는 아무런 잘못도 없으시잖아. 걱정하지 마. 네 할머니는 내가 어떻게든 보살펴줄 테니까.”“고마워.”허효준은 고개를 숙이면서 감사 인사를 전했다. 나도현도 고개를 까닥거리며 인사를 받아준 뒤 허효준과 멀어졌다.그가 경찰서에서 나오자 박은희는 사특한 기운을 몰아낸다며 소금을 뿌려댔고 나도현은 가만히 있었다.박은희의 의식이 끝난 후에야 나도현은 차에 탈 수 있었다.“대체 누구한테 부탁해서 절 구해내신 거예요?”나도현은 허효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박은희는 양시은과 했던 거래를 잊지 않았다. 하지만 이 공로를 아무것도 모르는 임다혜에게 돌리고 이 사실에 대해 알린다면 더 불리해질 것이었기에 결국 사실대로 말해주었다.“양시은이 어떻게 녹음 파일을 구했는지 모르겠지만 나한테 주면서 거래를 하자더구나. 양시은 아들이 인질로 잡혀 있었어.”모든 게 허효준이 했던 말과 일치했다.나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술을 짓이겼다. 박은희는 그런 나도현의 안색을 살피며 잔소리를 해댔다.“너도 얼른 양시은을 향한 마음을 접어. 그러면 네가 한 짓에 관해 더는 묻지 않으마. 하지만 앞으론 반드시 내가 하라는 대로 해. 임다혜랑 결혼도 다음 달에 해버려.”박은희는 양시은을 여전히 인정하지 않았기에 당연히 양채은도 인정할 리가 없었다. 더구나 나도현은 예전에 쓰던 이름으로 양채은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나도현도 진심으로 대한 적 없는 여자를 더욱 며느리로 받아들일 리가 없지 않겠는가.나도현은 비록 양채은에게 진심은 아니었지만 박은희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를 순 없어 차갑게 말했다.“임다혜는 어머니가 좋아하는 사람이잖아요.”“내가
나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떠나버렸다.그는 확실히 양시은과 양채은 자매를 찾아가지 않았고 여이현과 친구들을 만났다. 그들과 만나기로 한 장소는 경성의 유명한 클럽이었고 여이현은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배진호는 핸드폰을 든 채 끊임없이 누군가와 문자를 보내고 있었고 최주하와 지석훈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도현은 너무도 심란했다.“두 사람, 이렇게 만난 것도 아주 오랜만인데 자꾸 핸드폰만 하고 있을래? 평소에도 그러는 거야? 안 힘들어?”나도현은 이내 술을 원샷했다. 그의 머릿속엔 온통 양시은의 생각으로 가득했다. 배진호는 소파에 널브러지며 말했다.“힘들 리가 있나요. 이런 기분이 뭔지 모르죠? 너무도 행복한 이 기분을 말이에요. 예전에는 감정이라는 것이 하등 쓸모없는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직접 사랑을 하고 보니 정말 행복하네요.”배진호는 정말로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그는 권다솔과 수많은 일이 있었고 함께 손을 잡고 세계 여행하면서 세상에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권다솔이 곁에 있는 것보단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나도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최주하는 눈짓을 했다.“참나. 그게 지금 우리 앞에서 할 소리예요? 그래도 이해는 가네요. 여이현 곁에서 얼마나 참고 있었겠어요. 그동안 참고 있어서 수고했네요. 연애하고 싶은 걸 대체 어떻게 참았대?”배진호는 화도 나지 않았다.“참을 게 뭐가 있겠어요. 그때는 제게 일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기에 딱히 연애할 생각도 없었죠. 하지만 지금은 아내가 있는 게 너무도 행복하네요.”“쯧쯧. 두 사람 정말 똑 닮았네. 나중에 진호 씨에게 딸이 생기면 분명 여이현처럼 매일 우리에게 딸 사진만 보여주겠네요! 안 봐도 뻔해요!”여이현이 예전에 어떤 사람인지 그들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허구한 날 무뚝뚝한 표정을 했고 온지유가 그의 곁에서 비서 일을 오랫동안 했는데도 결혼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매일매일 아들과 딸 사진을 보여주면서 사랑스러운 눈길로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