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은 잠옷은 나도현의 손에 갈기갈기 찢겨 나갔지만 양시은은 저항하지 않았다. 어차피 저항해봤자 잔뜩 화가 난 나도현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그가 화를 내면 낼수록 그녀는 평범한 일상과 멀어지게 된다. 마치 마리오네트처럼 아무 반응 없는 그녀의 모습에 나도현은 더 화가 치밀었다.“산송장이야?”“그럼 뭘 어떻게 하라고. 말해줘.”양시은은 너무도 서러웠다.“지금 당장 네가 보냈던 사진에서 했던 동작 그대로 전부 보여줘. 내 앞에서 다시 해봐.”조금 전 수치스러웠던 행동을 다시 한번 더 하라고 하니 양시은은 순간 죽고 싶었다. 지금 죽는다면 나도현이 더는 그녀를 괴롭히지 않을 테니까.“그 사진들 내가 이미 전부 저장해 두었지. 너도 하민이한테 보여주고 싶지...”“할게. 하면 되잖아.”양시은은 얼른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들을 위해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했고 결국 날이 밝을 때까지 그에게 시달리게 되었다.그제야 만족한 나도현은 잠을 자지 않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한 뒤 변호사 사무소로 출발했고 그곳에서 잠을 보충했다.방에 남겨진 양시은은 미약해진 스탠드 조명을 보다가 천장을 바라보았다.이 고통은 대체 언제쯤 끝이 날까.그녀는 새벽이 되어서야 잠들게 되었기에 늦게 일어나게 되었다. 양채은은 평소처럼 그녀의 방 문을 두드리며 그녀를 부르지 않았다. 오히려 아침을 만들어 놓고 주방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양시은은 일어나자마자 나도현이 목에 남긴 흔적을 화장품으로 가린 후 목폴라 티를 입고 1층으로 내려갔다.“언니, 요즘 왜 이렇게 늦게 일어나? 혹시 밤마다 나 몰래 서리하러 간 거 아니야?”양채은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그릇을 챙겨주며 말했다.“농담이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난 사실 언니가 조금 늦게 일어났으면 해.”양시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양채은이 한 말은 현실이 될 가능성이 없었으니까. 그녀가 늦게 일어난 건 핸드폰을 늦게까지 봐서가 아닌 밤새 내내 괴롭힌 누군가의 탓이었다
양시은은 허민기가 건넨 것을 받지 않았다.“괜찮아. 하민이는 지금 우유를 먹으면 안 되는 상태라고 의사 선생님이 그러셨거든.”“그럼 네가 먹어. 이렇게나 말랐는데 우유라도 먹어야 영양분이 조금이라도 보충될 거 아니야.”허민기는 고집스럽게 우유를 그녀에게 건넸다.“이건 비싼 것도 아니잖아. 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이 얼마인데 설마 이 정도도 못 받아주는 거야?”양채은은 그를 보다가 이내 자신의 언니를 보더니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어제까지만 해도 그녀는 양시은에게 언젠가 좋은 남자를 만날 거라고, 과거 따윈 신경 쓰지 않는 남자를 만날 거라고 말했기 때문이다.그런데 이렇게 바로 나타나 주지 않았는가. 양시은은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녀의 생각은 달랐기에 얼른 손을 내밀어 우유를 받았다.“고마워요. 전 언니 동생 양채은이라고 해요.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아, 전 허민기예요.”허민기는 간단히 자신을 소개했다. 말하면서 그는 부단히 양시은을 힐끗힐끗 보았고 양채은은 당연히 그 눈빛을 놓칠 사람이 아니었다. 예전의 그녀도 허민기와 같은 눈빛으로 강태경을 보았으니 허민기가 자신의 언니를 얼마나 좋아하고 있는지를 예상할 수 있었다.게다가 양채은은 자신의 언니가 예전에 어떤 힘든 연애를 했는지 알고 있었기에 늘 양시은이 걱정되었다. 그 상처 속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을까 봐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양시은이 평생 혼자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지금은 하민이가 어려 매일 엄마를 찾고 있다고 하지만 나중에 어른이 되면 분명 자기 가정을 이룰 것이었기에 그때가 되면 그녀의 언니는 외롭게 혼자 살게 되지 않겠는가.양채은이 두 사람을 어떻게 이어줄까 생각하고 있을 때 붉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다가왔다. 그리곤 세 사람 앞에 멈춰서더니 양채은이 들고 있던 우유 박스를 들어 바닥에 던졌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양채은은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곤 미간을 한껏 구겼다.“이건 제 물건이에요. 미친 거라면 우리한테 시비 걸지 말고 데스크에
하얀 종이엔 까만 글씨로 분명하게 적혀 있었다. 하민이와 나도현은 혈연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이다.그는 몇 번이나 종이를 펄럭이며 꼼꼼히 읽어보았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고 바뀌어버린 건 싸늘해진 그의 눈빛이었다.예상하고 있던 결과였고 하민이가 그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더는 양시은을 봐줄 필요가 없었다.오전에 모든 업무를 마친 그는 시간이 남아돌았던지라 병원에 가서 양시은을 괴롭힐 생각을 하면서 차 키를 들고 사무소를 나섰다....한편 병원에서는 양시은이 무슨 말을 하든 여자는 양시은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특히 양시은을 바라보는 허민기의 눈빛을 봤을 때 그녀는 폭탄이 터지듯 폭발하고 말았다.“지금 시대가 개방적인 시대여서 다행인 줄 아세요. 만약 예전이었으면 그쪽 같은 여우는 이미 간통죄로 징역을 받았을 테니까요!”“미쳤어요? 머리에 문제라도 있는 거예요? 우리 언니가 그냥 단순한 친구 사이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아직도 못 알아듣는 거예요? 평소에도 자주 대화를 나눈 적 없다고 하잖아요. 못 믿겠으면 그쪽 남편 핸드폰 기록이라도 뒤져봐요! 설마 그것도 확인하지 않고 찾아온 거예요? 그리고 그쪽 남편이 우리 언니 학생 시절 사진을 저장하고 있든 말든 우리 언니와 무슨 상관있다고 그래요! 그건 저 사람이 멋대로 저장한 거잖아요!”양채은은 더는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허민기가 마음에 들었던 그녀였지만 지금은 증오하게 되었다. 애인이 있었으면서 양시은을 찾아와 잘 보이려고 하고 이런 소란을 만들었기 때문이다.“그쪽은 끼어들지 말아요. 입 닥치고 가만히 있어요. 그쪽도 뒤에서 바람이나 피우고 있을지 누가 알겠어요? 보나 마나 그 언니에 그 동생이겠죠.”여자는 양채은을 위아래 훑어보았다.“행색을 딱 보니 답이 나오네요. 그쪽도 누군가의 내연녀인 거죠?!”그 말에 양채은은 버튼이 눌려버렸다. 그녀와 강태경은 분명 떳떳한 커플이었고 약혼식도 했는데 어떻게 내연녀라는 말인가.“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
하지만 여자는 그럼에도 분이 풀리지 않아 양시은을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보았다. 그녀는 허민기와 연인 사이가 된 지 5년이나 되었다. 그 5년 동안 그녀는 매일 같이 허민기에게 결혼 얘기를 꺼내면서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고 싶다고 했지만 허민기는 그때마다 거절했다.허민기는 그녀에게 아직은 젊으니 결혼 결정을 빨리할 필요 없다는 이유를 내놓았다. 그의 말에 그녀는 아무 의심도 하지 않고 믿고 있었지만 오늘 양시은을 보니 모든 게 이해가 갔다. 허민기는 아직 젊어서 결혼을 하기 싫은 게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지 못해서 결혼하기 싫은 것이었다.만약 결혼 얘기를 꺼낸 사람이 그녀가 아니라 양시은이었다면 허민기는 분명 아주 기뻐하면서 멍청이처럼 헤실헤실 웃었을 것이다.“얼른 가자. 굳이 신고까지 당해야 미친 짓을 멈추려는 건 아니지?”허민기는 다시 한번 여자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여긴 병원이야. 네 집이 아니라고. 지랄도 정도껏 해.”‘지랄도 정도껏 하라니! 지금 내가 이러는 이유도 전부 너 때문이잖아!'‘네가 병원으로 출근하듯 드나들지 않았다면, 양시은과 연락하고 지내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난 피해자라고!'서러운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았지만 신물이 난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허민기에 전부 꾹 삼켜버리고 말았다.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애초에 그는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고 있었고 그저 그녀가 억지를 부리고 난동을 피운다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소란을 피워봤자 그녀에게 남는 건 미친 여자라는 꼬리표였고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태경 씨, 저 여자가 분명 저랑 언니한테 손찌검하려고 했어요. 어떡해요. 배가 조금 아픈 것 같아요. 태경 씨, 너무 무서워요.”양채은은 나도현의 팔을 꽉 잡았다.“아기는 괜찮아?”그녀와 양시은의 집안 사정은 좋지 않았다. 비록 부모가 있긴 했지만 차라리 없는 것이 더 낫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한 명은 도박에 빠져 살았고 다른 한 명은 자주 집안의 물건을 때
만약 나도현도 다른 부잣집 자식들처럼 망나니로 살았다면, 여자를 그저 한낱 놀이 상대라고만 생각했다면 양시은이 떠나든 말든 그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것이고 그토록 슬퍼하지 않았을 것이다.양채은도 그와 같은 처지인 것 같았다. 만약 양채은이 양시은을 진심으로 언니로 대하고 걱정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오늘처럼 나서줄 수 있었겠는가.양시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현이 일부러 자신을 자극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거기에다 예전에는 서로 사랑했던 사이였으니 나도현은 어떤 말로 그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지 아주 잘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속으로 한번 또 한 번이고 자신에게 말했다. 나도현의 말을 신경 쓰지도 말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라고 했지만 나도현이 내뱉은 말은 마치 저주를 거는 주문이 되어 그녀의 머릿속에 깊이 박혀 버렸다.“왜 말을 하지 않는 거지?”나도현은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꽉 잡으며 억지로 자신과 눈을 맞추게 했다.“안 들리는 것처럼 연기하지 마. 남자 앞에서 재잘재잘 잘 떠들지 않았나? 왜 지금 내 앞에서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거지?”끼익.이때 등 뒤에 있던 문이 열리고 양채은이 나왔다. 나오자마자 맞이하게 된 두 사람의 모습에 걸음을 멈추고 당황한 듯 말했다.“태경 씨, 언니. 두 사람 지금 뭐 해요?”양채은의 시선에서 두 사람은 코가 닿을 정도로 바싹 붙어 있었다. 거리가 너무도 가까운 것이 아니겠는가.하지만 양시은은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언니였고 나도현은 그녀와 평생을 함께할 약혼자였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배신해도 언니와 약혼자만은 그녀의 편을 들어줘야 하는 것이다.양시은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지만 나도현은 손을 놓아주지 않았고 그 자세 그대로 유지했다.“전부 다 본 거 아닌가?”“태경 씨, 일단 우리 언니를 놔줘요. 대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양채은은 나도현과 양시은은 번갈아 보며 설명을 요구했다.“네 언니가 밖에서 아무 남자나 만나도 다니는 바람에
강태경 성격이 원래 이런 걸 어쩌겠는가. 다른 방면에서는 양채은에게 아주 잘해주었기에 그녀도 굳이 자신의 스킨십을 피하는 이유를 꼬치꼬치 캐묻고 싶지 않았다.“검사는 해봤어? 아기는 어떻대?”나도현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러자 양채은은 웃으며 말해주었다.“아기는 무사하대요. 방금 의사 선생님께 물어봤는데 출혈한 흔적도 없다고 했어요. 조금 전 배가 아팠던 건 갑작스럽게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 것이니 집에서 휴식하면 괜찮을 거라고 했어요. 그리고 운동도 되도록 피하라고 했고 이제 처방해준 약을 먹으면 된다고 했어요.”“그럼 요 며칠은 얌전히 집에만 있어. 자꾸 언니 따라 어딜 가지도 말고.”나도현은 양채은과 나란히 복도를 걸었다. 양시은을 지나치면서 그는 깊은 의미가 담긴 두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양채은은 마치 하나의 끈 같았다. 한쪽 끝은 나도현의 손에 단단히 쥐어져 있었고 다른 한 끝은 양시은에게 묶여 있었다. 양채은이 그에게 더 의지할수록 이 끈은 나도현에게 더 단단히 묶이고 있었다.“언니, 우리랑 함께 돌아갈 거야. 아니면 하민이 보러 갈 거야?”양채은은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가 병원으로 온 이유도 애초에 자신의 아이를 보기 위함이었기에 당연히 그녀의 선택은 후자였다. 어차피 그녀는 나도현을 피하고 싶기도 했다.“그럼 우린 먼저 집으로 갈게. 하민이 상태 확인하고 꼭 택시 타고 돌아와. 버스 타지 마. 버스는 오래 기다려야 하잖아. 그리고 사람도 많아서 앉을 자리도 없잖아.”양채은은 또 그녀에게 걱정 서린 잔소리를 해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양시은의 계좌로 돈을 입금했다. 많지는 않았지만 양시은이 한 달 내내 택시를 탈 정도는 되었다.양시은은 두 사람의 모습을 눈으로 배웅하였다. 엘리베이터가 닫히고 나서야 그녀는 계단으로 올라가 하민이의 병실로 갔다.“엄마, 오늘은 왜 이렇게 늦게 오신 거예요?”하민이는 그녀를 보자마자 달려와 꽈악 끌어안았다.“방금 병실 밖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중에 엄마 목소리도 있었던 것
가사도우미 중개소에서 소개해주는 일자리는 대부분 시급이 만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소개해준 곳에서 만육천 원을 주겠다고 하니 많이 주는 것이었다.몇 시간만 일해도 6만 원을 벌 좋은 기회였던지라 양시은은 당연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고 그녀의 대답에 유영숙은 웃으며 말했다.“그럼 내가 자세한 집 주소를 문자로 보내줄게요. 아, 이 집은 디지털 도어락이라 앱으로도 문을 열 수 있다고 했으니까 시은 씨는 그냥 가면 돼요. 엄청나게 잘사는 집이거든요. 일 잘하고 행동이 빠릿빠릿하고 깔끔한 도우미를 원한다고 했으니까 이번에 시은 씨가 잘하면 앞으로 주기적으로 시은 씨만 부를 수도 있을 거예요.”오래 일할 수 있다니.양시은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 하민이를 안았다.“미안해, 하민아. 엄마도 하민이랑 시간 더 보내고 싶었는데 영숙 아주머니가 엄마한테 연락해서 엄마는 지금 일하러 가봐야 할 것 같아.”그녀는 당연히 아들과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아들 옆에 있으면 돈을 벌 수 없고, 돈이 없으면 아들의 병도 치료할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시간이 있어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곁에 아들이 없는데...“엄마,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되고 저는 괜찮아요. 오히려 사과해야 할 사람은 저인걸요.”하민이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는 하민이 병원비를 위해 일하고 계시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멋진 엄마예요.”아이의 말을 들은 양시은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적어도 하민이만큼은 그녀를 이해해 주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병실을 떠나기 전 사과를 예쁘게 깎아 하민이에게 준 뒤 택시를 타고 늘봄아파트로 갔다....한편 나도현은 차를 몰고 양채은은 집 문 앞까지 데려다주었지만 그는 차에서 내릴 생각은 없었다.“태경 씨, 같이 안 들어가요?”양채은은 안전벨트를 풀면서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며칠 동안 너무 바쁘게 보낸 거 아니에요? 쉬엄쉬엄해요. 입에 풀칠하고 살 정도만 아니면 되니까요.”그녀는 돈을 밝히는 물질적인 여자가 아니었고 남자에게
“언니가 임신했을 때를 전 아직도 기억하고 있거든요. 출산을 앞두고 있었는데 그때 언니는 이별의 상처를 받아서 상태가 정말 좋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저도 굳이 그 일에 관해 묻지 않았어요. 또 묻는다는 건 어쩌면 언니의 상처를 후벼 파는 것일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제 추측으로는 하민이가 언니의 전 남자친구의 아이일 가능성이 아주 크다고 생각해요.”양시은의 전 남자친구는 바로 그였다. 나도현은 태연하게 계속 떠보았다.“그럼 네 언니가 왜 남자친구랑 헤어지게 되었는지는 알아? 아이까지 있었다면서, 그러면 결혼해야 하는 거잖아. 대체 왜 이렇게 된 거래?”“아마도 언니 전 남자친구 쪽에서 결혼을 바라지 않았던 게 아닐까요? 어쨌든 구체적인 건 저도 잘 몰라요. 언니가 말해주지 않았거든요.”양채은은 별생각 없이 말했지만 나도현은 다르게 듣고 있었다.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차갑게 비웃었다. 그에게 갑자기 헤어지자고 통보를 해놓고, 그를 고통 속에서 괴롭게 살게 해놓고 동생 앞에서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지 않았는가. 진정한 피해자는 그였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쓰레기가 되어 있었다.“어차피 4년도 지난 일이에요. 하민이도 컸고 전 언니에게도 몇 번이나 그때 일은 잊으라고 말했거든요. 좋은 남자를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도 하고 말이에요. 그러는 게 언니한테도 좋고 하민이한테도 좋을 테니까요.”나도현의 서늘해진 눈빛을 눈치채지 못한 양채은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는 절대 양시은이 다른 남자를 만나게 하지 않을 것이고 결혼도 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었으니까.“됐어. 넌 먼저 들어가서 쉬어. 난 변호사 사무소로 가봐야 하니까. 최근에 새 사건을 맡았거든. 의뢰인과 잘 얘기를 나눠봐야 해.”나도현은 더는 그녀와 이 대화를 이어가지 않았다. 양채은은 그에게 걱정 어린 말을 몇 마디 하곤 차에서 내렸다. 집 안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니 나도현은 양시은이 떠올랐고 가슴이 답답해졌다.시동을 걸어 사무소로 향했다. 그는 일로 복잡해
양채은의 반응은 너무도 격했고 무슨 말을 하든 믿지 않으려 했다.“저랑 태경 씨는 알고 지낸 지 오래된 사이예요. 태경 씨가 저한테 얼마나 잘해주는데요. 일도 열심히 하고 능력도 뛰어난 변호사인데 어떻게 그런 짓을 할 리가 있겠어요? 당장 다시 조사해보세요. 분명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걸 거예요!”국장은 그녀가 말 마치기를 기다린 후 물었다.“양채은 씨, 방금 태경 씨라고 호칭하던데 맞습니까?”“네, 맞아요. 제 약혼자 이름은 강태경이에요. 곧 결혼할 사이인데 그 호칭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양채은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 눈앞에 있는 경찰이 쓸데없는 것에 관심이 참 많다고 생각했다. 곧 결혼할 사이인 예비부부의 호칭까지 신경 쓰다니 말이다.국장은 고개를 저었다.“이건 두 사람이 곧 결혼할 사이이든 아니든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이 이름은 양채은 씨가 말해준 약혼자의 신분 정보랑 일치하지 않습니다. 혹시 알고 있습니까?”“그게 무슨 소리세요. 저한테 그런 농담은 통하지 않아요.”양채은은 멍한 표정을 지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덜덜 떨리는 몸으로 국장을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보았다.‘그럴 리가 없잖아! 태경 씨 이름은 강태경이라고. 강태경이 아니면 대체 뭐라는 거야? 태경 씨가 날 속일 리가 없다고!'“신분 정보를 알고 있지만 상대의 이름이 뭔지를 모르는 걸 보니 양채은 씨도 이 사건과 연관이 있다고 의심이 되는군요.”국장은 그녀를 데리고 취조실로 들어갔다. 양채은은 여전히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그 사람이 강태경이 아니면 대체 뭔데요?”“나도현.”이 이름은 양채은에게 아주 낯선 이름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한 순간이 아주 많았지만 살면서 단 한 번도 이 이름을 들어본 적 없었다.“신분 정보를 알고 있다는 건 신분증을 보았다는 소리인데 본인이 알고 있는 이름과 신분증에 있는 이름이 다르다는 걸 모르셨습니까? 양채은 씨,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거죠?”국장은 계속 말을 이었다.양채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약혼식이 있던
여이현에게도 딸이 있었고 매일 만날 수 있지만 온지유와 법로는 오랜 시간 동안 떨어져 살지 않았는가.게다가 법로는 지금 시한부였고 살 수 있는 시간이 5년뿐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이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고 서로에게 좋은 추억만 남겨야 했다.권다솔도 이해하고 있었던지라 여이현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곤 배진호의 팔짱을 꼈다. 그리고 함께 차를 주차해둔 곳으로 갔다.“사실 요즘 시간의 여유가 생겼잖아. 그래서 너랑 함께 다른 도시로 가서 여행하려고 했는데 지금 보니 그 계획을 뒤로 미뤄야겠네.”배진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그의 눈빛은 한없이 다정했다. 그녀가 곁에 있으니 너무도 좋았기 때문이다.권다솔은 웃으며 말했다.“요 며칠은 시간이 없겠지만 다음 주에 가면 되잖아. 다다음 주도 괜찮고. 어쨌든 우리에겐 이젠 시간은 많아.”두 사람은 아직 젊었으니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한편 양채은 쪽 상황.양시은이 일하러 나가니 집 안에는 그녀 혼자 남게 되었다.할 일이 없었던 그녀는 집안을 구석구석 청소하려고 했지만 별장이 너무 컸던지라 힘도 많이 들어가 쉬었다가 할 수밖에 없었다.청소를 마치고 나니 어느덧 저녁이 되었다.양채은은 시간을 보곤 나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도현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만약 오늘 집으로 돌아올 수 없대도 그저 간단한 대화 몇 마디면 충분했다.신호 연결음이 한참이나 들려왔지만 받지 않았다. 그녀는 문자를 보낸 뒤 얌전히 기다렸지만 여전히 아무런 답장도 오지 않아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그녀가 알고 있는 강태경은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시간을 내서 그녀의 문자에 답장을 해주거나 전화를 해주었다. 그런데 오늘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전화든 문자든 한 통도 오지 않았고 잠수를 탄 사람처럼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한참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그의 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사무소 전화번호도 나도현이 그녀에게 알려준 것이었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걸어본 적 없었다.
여이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아주머니, 도현이에게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저희한테 자세하게 말씀해주셔야 저희 나름대로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요.”“그래. 도현이에게 너희 같은 친구들이 있어서 참 다행이구나. 난 정말 더는 방법이 없단다.”박은희는 사건의 자초지종을 전부 말해주었다. 물론 자신이 이 일을 만든 사람이라는 것은 쏙 빼놓고 말이다.거실에 앉은 나도현의 친구들은 침묵했고 저마다 표정이 좋지 못했다.“도현이는 내가 직접 곁에 두고 키운 아이야. 절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야. 내가 알아. 분명 누군가 모함하고 있는 걸 거야.”박은희는 말하면 말할수록 마음이 괴로웠다. 지금 아들이 경찰서에 있으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착했던 아들의 모습이었다.나도현은 결혼과 사업 문제에서만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을 뿐 다른 부분에서는 아주 얌전한 아들이었다.“아주머니, 일단 진정하시고 저희가 어떻게든 방법을 생각해내 볼게요.”권다솔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박은희를 부축한 채 서재로 갔다.“일단 먼저 쉬고 계세요. 몸 상하면 안 되잖아요.”배진호의 시선이 바로 권다솔에게 향했다. 권다솔이 박은희를 부축하고 다시 돌아와 옆에 앉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두 사람의 모습을 본 최주하는 연신 감탄을 해댔다.“두 사람 사이가 아주 좋네요. 전에 엄청 크게 싸웠다던데 그것도 전부 헛소문이죠?”지금 두 사람의 모습만 봐도 여전히 서로 엄청나게 사랑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이는데 어딜 봐서 싸웠단 말인가.설령 싸웠다고 해도 무슨 일로 싸웠든 배진호가 먼저 권다솔에게 사과할 것이다.권다솔은 웃는 얼굴로 말했다.“예전에 한 번 크게 싸웠으니까 이젠 서로를 더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진호 씨는 걱정이 많은 사람이거든요. 저뿐만 아니라 아이한테도 그래요. 벌써 아기들 옷을 자꾸만 사 온다니까요.”분명 아직 출산까지 몇 개월 남았는데도 말이다.“미리 준비해둬서 나쁠 건 없잖아.”배진호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고 서로
박은희는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을 후회했다.“남자가 얼굴도 시원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다니는 주제에 남자라고 할 수나 있어요?”“사모님, 설마 절 자극하는 방법으로 가면을 벗게 만들려는 건 아니죠? 제가 정말로 개처럼 사모님의 말만 고분고분 들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마음 급해진 박은희와 달리 가면남은 더 평온해졌다.심지어 비꼬는 어투로 말하고 있어 박은희는 정말이지 짜증이 치밀어 미칠 것 같았다.“얼마를 원하는 거죠? 얼마면 내 아들을 경찰서에서 나오게 할 거냐고요.”나도현이 무사히 경찰서에서 나온다면 그녀는 돈이 얼마가 들든 상관하지 않았다.그러나 가면남은 고개를 저었다.“이건 돈 문제가 아니에요. 만약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거였으면 사모님도 이렇게 절 찾아오진 않았겠죠.”그 말인즉슨 박은희가 더는 생각해낼 방법이 없어 그를 찾아온 것이라는 의미였지만 그도 방법이 없었다.가면남은 팔짱을 끼며 말했다.“법은 제가 만든 것도 아니잖아요. 제 인맥은 사모님보다 적고 사모님도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하시니 저는 더 방법이 없지요. 그러니 조급해하지 마시고 그냥 그 안에서 해결될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라고 하세요.”“내가 어떻게 조급해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박은희는 정말이지 가면남의 뺨을 후려치고 싶었다.경찰서로 잡혀간 사람은 그녀의 아들이었기에 당연히 가면남은 태연할 수밖에 없고 이런 심드렁한 말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다.“그렇게 조급하면 왜 굳이 그런 짓을 꾸며가며 아들을 해치려 한 거죠? 전 일은 확실하게 했고 돈은 사모님이 주신 거잖아요. 사모님이 돈 주면서 시키지 않았다면 전 이런 일을 할 이유도 없고 하지도 못했겠죠. 아들을 구치소로 보낸 사람은 사모님이 아닌가요?!”그의 말은 무거운 돌이 되어 박은희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고 손이 저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렸다.그녀가 원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나도현이 그 안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걸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지금쯤이면 임다혜와 결혼해 나진 그룹
‘허효준이 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거지?'“그리고 나도현 씨가 최근 맡은 그 사건, 피고인이 다국적 기업의 돈세탁에 연루되어 있었죠. 나도현 씨가 제출한 증거로...”경찰 국장은 미간을 확 구기더니 서류 봉투를 열어 안에서 서류를 꺼내 나도현 앞에 툭 던졌다.“직접 보세요. 대체 본인이 뭘 증거로 제출했는지.”서류에 적힌 내용은 전부 변명에 불관했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서류 사이에 끼어있는 한 장의 수표였다. 이렇게 많은 증거가 한꺼번에 쏟아지니 아무리 그가 변호사라고 해도 자신의 결백을 밝힐 수 없었다. 그는 심지어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인지도 말지 못했다.이 증거들은 그가 직접 정리해서 법원에 제출한 것이었지만 그가 제출한 서류와 내용이 전혀 달랐다. 마치 누군가 중간에서 바꿔치기한 것 같았다. 하지만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한 것일까? 그는 모든 것을 직접 했다. 서류 복사를 비서에게 시킨 것 빼고는 말이다. 그렇다면 설마...“나도현 변호사님, 증거가 산처럼 쌓여있는데 어떻게 자신의 결백을 밝힐지부터 생각하시죠.”경찰 국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경멸의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젊고 능력 좋은 변호사에다가 나씨 가문 사람이면 앞길이 창창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런 사람이 본인의 앞길을 망치고 있는 것이 한심했다. 판사에게 뇌물을 바치고 나라를 팔았다는 증거가 가득했기에 나도현의 변호사 앞길은 이미 막힌 것과 다름이 없었다....박은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현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바로 나도현을 빼내려고 했지만 사건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을 듣자마자 표정이 변해버렸다.“그렇게 심각하다고요?”“사모님, 그 마음은 이해가 되나 이 사건은 지금 제가 직접 맡고 있어서 풀어드릴 수 없습니다.”경찰 국장은 직접 그녀를 만나 설명했다.“사모님도 이치를 아는 사람이니 이 일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아실 거로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 주세요.”박은희는 자신이 어떻게 경찰서에서 걸어 나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차에 올라탄
“저희와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그중 한 명이 나도현의 곁으로 다가가 서늘한 은빛을 내는 쇠고랑을 채워주었다.나도현은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 법을 어기는 행동을 한 적 없는데 왜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것인지 말이다. 게다가 그에게 수갑까지 채우지 않았는가.그는 본능적으로 수갑을 피하며 말했다.“착각하신 거 아닙니까?”“나도현 씨 아닙니까? 저희는 이미 사진까지 확인하고 왔고 알맞게 찾아왔습니다. 그러니 내뺄 생각하지 마시고 얌전히 저희랑 함께 가주시죠!”공무원은 언성을 높여 말했다. 그들이 직접 찾아와 체포한다는 건 명확한 증거가 있다는 의미였으니 당연히 착각할 리가 없었다.“일단 저를 왜 데리고 가려는지 이유부터 들어야겠습니다.”나도현은 지금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의 반응에 공무원들은 그가 일부러 모른 척하며 빠져나가려 한다고 생각했다.“본인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저희보다 본인이 더 잘 알겠죠. 변호사라면서 매일 법 관련 문서만 보았을 텐데 어떻게 자신이 불법을 저질렀다는 것을 모를 수 있습니까! 그러니 잘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 겁니다. 솔직하게 전부 털어놓던가, 아니면 계속 명령에 불복종하면 공무집행방해죄를 더 추가할 겁니다!”나도현은 일단 얌전히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경찰서로 온 뒤 그는 취조실로 들어가게 되었고 그의 사건은 경찰 국장이 직접 맡게 되었다.경찰 국장은 반백 살이 넘은 중년 아저씨였고 안경을 끼고 있었지만 눈빛은 아주 날카로웠다.“나도현 씨 맞으시죠? 허효준 씨랑은 어떤 사이죠?”“저희는 대학 동기였지만 졸업 후에는 절친한 친구로 지냈습니다.”나도현은 비록 경찰 국장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취조실까지 들어왔으니 묻는 대로 전부 대답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두 사람의 관계가 확실히 끈끈한가 보군요. 그래서 허효준 씨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 겁니까? 나중에 둘이 서로 짜고 치려고?”“전 그런 생각한 적도 없고 그런 일을 한 적도 없습니다.”나도현의
양시은은 어떻게 덥석 받을 수 있겠는가.고작 며칠 사이에 양채은은 그녀에게 아주 많은 돈을 빌려주었기에 마냥 계속 받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언니, 내가 만약 혼자 살았으면 언니가 언제까지 머물어도 상관없는데 지금은 내겐 태경 씨가 있잖아. 그리고 난 임신한 몸이니까 아기도 언젠가 태어날 테고 영원히 언니랑 함께 살 수는 없어. 그러니까 받아. 이 정도면 반년 정도의 월세를 낼 수 있을 거야.”양채은은 단호하게 말하면서 돈을 주려고 했다.양시은은 그녀가 자신을 내쫓으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다만 가족 간의 정 때문에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한 것이었다.곰곰이 생각해보면 양채은의 행동도 이해가 되었다. 이미 약혼까지 하고 가정이 생겼는데 어느 누가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길 바라겠는가. 한 지붕 아래 가족이 함께 산다면 당연히 불편할 것이었다. 거기에다 나도현이 최근에 보인 행동으로도 양채은은 두 사람이 어떤 사이인지 눈치를 채지 못했으나 분명 뭔가가 있다는 것만큼은 알아냈을 것이다.그녀는 정말로 이 집에서 나가고 싶었지만 이 집을 나가는 것이 두려웠다. 나가는 순간 나도현이 절대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거니까. 자신을 괴롭히는 거라면 두렵지 않았지만 그녀에겐 양채은과 하민이가 있었다. 이 두 사람은 그녀의 약점이었고 그녀를 옭아매고 있는 밧줄이기도 했다.양채은은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더 마음이 불편해졌다.“언니, 난 그냥 해본 말이야. 그러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 우린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으니까 함께 사는 건 당연하잖아. 지금 나에게 유일하게 남은 가족은 언니인걸.”만약 누군가 그녀에게 그녀가 유일한 가족을 집에서 내보내게 될 거라고 말했다면 그녀는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어젯밤부터 그녀는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모든 사이엔 거리감이 있어야 불편함 없이 살 수 있다는 말처럼 따로 살았다면 강태경이 자신의 언니를 매일 마주치게 될 일도 없을 테고 어젯밤과 같은 일도 생기지 않았을 거로 생각했다.“채은아, 이 돈은 정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나도현은 눈을 떴다. 몸을 덮은 담요를 본 그는 어젯밤 자신을 챙겨준 사람이 양시은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몸을 일으키자 바닥에 이불 깔고 자는 양채은을 발견했다.“일어났어요? 어제는 왜 그렇게 술을 마신 거예요? 오는 택시에서 잠들어 버렸더라고요. 제가 태경 씨를 얼마나 힘들게 끌고 왔는지 알아요? 원래는 깨워서 꿀물이라도 마시고 자게 하려고 했는데 너무 깊이 잠들어서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더라고요.”양채은은 인기척에 눈을 뜨고 말했다. 그러면서 거실을 대충 치우고는 주방으로 들어가 다시 따듯한 꿀물을 만들어 왔다.“지금은 술이 깼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마셔요. 꿀물은 사람 몸에도 좋으니까요.”“이런 거 할 필요 없어.”나도현은 꿀물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마실 생각이 전혀 없었던 그는 이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엔 온통 양시은뿐이었다.그는 생각한 대로 양시은의 행방을 물어보았다.“태경 씨,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왜 우리 언니한테 그렇게 관심이 많은 거예요?”양채은은 한참 머뭇거리다가 그래도 설명을 들을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 입을 열었다. 나도현이 아무리 그녀의 가족이라 양시은을 관심한다고 하지만 보는 사람은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 행동을 볼 때마다 양채은은 어딘가 심기 불편해졌다.“태경 씨는 제 약혼자고 언니는 곧 태경 씨의 처형이 되고요. 전 태경 씨가 우리 언니를 가족처럼 여겨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엔 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언니는 지금 우리 집에 얹혀사는 처지이고 언니가 무엇을 하든 그건 언니의 자유라고 생각해요. 태경 씨가 일일이 걱정하고 간섭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그녀의 말에 나도현은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내 일에 간섭하는 거야?'그는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지금 내가 쓸데없는 걱정 한다고 말하고 싶은 거지?”“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전 그렇게 말한 적 없으니까 오해하지 말아요. 그냥 우린 우리대로 살고 언니는
‘설마 우리 언니를 좋아하게 된 건가?'충격적이고 터무니없는 생각이 떠오르자 양채은은 자신에게 깜짝 놀라고 말았다.“사람 잘못 보셨어요. 전 채은이가 아녜요.”양시은은 얼른 나도현을 양채은에게 밀어내며 말했지만 나도현은 대놓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안고 싶은 사람은 양시은인데, 여기서 양채은이 왜 나오는 거지?'그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왜 날 밀어내는 거지?”“태경 씨, 사람 착각하셨어요. 제가 태경 씨 약혼자라고요.”양채은은 더는 지켜볼 수 없어 성큼성큼 걸어오며 나도현의 손을 자신의 허리에 가져다 댔다.“저랑 언니는 비록 닮긴 했지만 태경 씨가 헷갈릴 정도는 아니라고요!”이 말을 끝으로 양채은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방금 그의 행동은 확실히 너무 했다고 생각했다.나도현은 또다시 양채은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마침 도착한 택시에 양시은은 다가가 조수석에 올라탔다.그 모습을 본 나도현은 비틀대며 택시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고 양채은도 황급히 따라간 뒤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차에 올라탄 나도현은 의자에 기대어 잠들어 버렸고 양채은은 차마 그를 깨울 수 없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더 많이 자길 바랐던 그녀는 택시가 집 앞까지 도착한 후에도 혼자서 나도현을 부축한 채 집 안으로 들어갔다. 비록 힘들긴 했지만 양시은에게 도와달라고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양시은은 원래부터 그녀에게 켕기는 것이 있었던지라 당연히 먼저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고 그저 묵묵히 뒤를 따라갔다.“언니.”양채은은 겨우 나도현을 소파까지 부축한 뒤 눕혔다.“태경 씨는 내가 남아서 챙겨주면 되니까 언니는 방으로 가서 쉬어. 야밤에 나 도와준다고 술집까지 갔잖아.”자매였던지라 양시은은 양채은이 자신을 쫓아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그래, 알았어. 너도 일찍 쉬어.”양시은은 별다른 말 없이 방으로 돌아온 뒤 방 문을 꼭 걸어 잠갔다.거실엔 양채은과 나도현만 남게 되었다. 양채은은 아까부터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지만 나도현 몸에서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