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이미 눈앞에 놓여 있었다. 양시은이 거부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여러 남자를 만나느니, 차라리 내 옆에만 가만히 있는 게 낫지 않아? 내가 줄 돈이 다른 놈들보다 적을 것 같아? 한 달에 1000만 원 줄게. 어때? 내가 기분 좋으면 보너스도 챙겨 줄 수 있고.”나도현의 말은 마치 가느다란 은침을 연달아 쑤셔 넣듯 양시은의 가슴을 모질게 후볐다. 이미 온몸에 구멍이 난 것처럼 고통스러웠는데도 그는 여전히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아니면 동생한테 계속 돈 빌리면서 언니니까 괜찮다고 뻔뻔하게 굴 거야?” “아니야, 이 돈은 내가 꼭 갚을 거야. 만약 네 정부가 되어야 한다면 나도 조건이 있어.”“조건? 들어나 보자.”양시은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3개월. 딱 3개월만 네 정부로 있을게. 그동안 네가 어떻게 굴어도 상관없어. 대신 3개월 끝나면 채은이도 나도 건드리지 마. 앞으로 우리 둘은 다시는 보지 않는 거야. 괜찮지?”그렇게 하면 박은희 쪽에도 분명히 변명이 될 테고, 양채은도 다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그리고 나도현은 3개월 동안 마음껏 복수할 수 있으니 그 뒤에는 다시 잘나가는 도련님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서로에게 나쁘지 않은 제안인 듯싶었다.그러나 나도현의 눈빛은 한층 더 험악해졌다.“양시은, 정말 제멋대로 꿈꾸고 있네. 고작 3개월? 네가 날 몇 년이나 망가뜨린 걸 그렇게 끝낼 생각이야?”그가 겪은 고통은 무려 4년이었다. 이제 와서 겨우 3개월로 모든 걸 끝낼 수 있을 리는 없지 않은가.“어느 정도면 날 놓아줄 건데?”양시은이 거칠게 물었다.차라리 다른 방법을 쓰기 위해 박은희와 다시 흥정을 해 볼 수도 있었다.어차피 4년이나 버텼는데 몇 달쯤 늘어나는 건 문제도 아닐 것 같았다.“평생 끝은 없어. 나는 널 절대 풀어주지 않아.”나도현은 그녀 마음속 희미한 기대마저 앗아갔다.“내가 널 놓으면 넌 곧장 애 아빠 찾아가서 알콩달콩 살겠지? 설령 내가 질렸다고 해도 도망은 꿈꾸지 마. 네 자식 생각해서라도 얌전히
양시은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눈물만 흘렸다.돈을 다 주워 담자 나도현이 어딘가에서 옷 한 벌을 꺼내 그녀 쪽으로 던졌다.“갈아입어. 내 앞에서.”양시은은 옷을 펼쳐 본 순간 수치심에 숨이 막힐 뻔했다.거의 천이 없는 데다 블랙 레이스로 된 야릇한 디자인이어서 제대로 가릴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서로 감정이 무르익은 순간이라면 재미로 입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오직 모욕감만 들 뿐이었다.“갈아입을 생각 없어? 내가 직접 벗겨 줄까?”나도현은 불만스러운 듯 그녀를 재촉했다.그 시선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니 참을 수 없이 불쾌했다.이미 둘은 여러 차례 몸을 섞었는데도, 그의 면전에서 이렇게 수치스러운 옷을 갈아입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양시은은 작게 중얼거렸다.“혹시... 내가 방에 들어가서 갈아입으면 안 돼?”“네 동생 방 말이야? 귀찮게 굴지 마.”그는 몇 번 손을 뻗어 그녀의 윗옷을 단숨에 찢어버렸다.“다시 말하지만, 지금 당장 내 앞에서 갈아입어.”결국 양시은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거실 창문이 열려 있어서 차가운 바람이 몸에 와 닿았다.옷을 다 갈아입자 나도현은 그녀를 부엌으로 끌고 갔다.“채소 씻어.”그는 뒤에서 그녀를 괴롭히면서도 야채를 씻으라고 시켰다. 씻는 게 끝나니 다시 채소를 썰라고 했다.이미 정신이 반쯤 나가 버린 그녀는 칼을 쥐는 것조차 힘겨웠다. 칼질은 삐뚤빼뚤 자칫하면 손이라도 벨 듯 위태로웠다.그때 거실에서 양채은 목소리가 들려왔고 점점 가까워졌다.“태경 씨, 저 방금 잠깐 눈 좀 붙였어요. 제가 대신 채소라도 썰까요? 맨날 태경 씨 혼자 고생하니까 마음이 안 좋아요.”양시은은 숨이 멎을 듯한 공포를 느꼈다.만약 양채은이 부엌문을 연다면 정말 큰 일이었다. 그러나 나도현은 그녀를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는 멀쩡한 얼굴로 대답했다.“괜찮아. 너는 거실에서 밥 기다리면 돼.”양채은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또 물었다.“아, 맞다. 혹시 언니 못 봤어요? 방에 없던데... 나
양시은이 정리를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음식은 이미 식탁 위에 차려져 있었고 양채은도 산책을 마치고 돌아왔다.양채은은 국자로 국물을 뜨며 안에 들어 있는 각진 형태의 당근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태경 씨, 오늘 당근은 왜 이렇게 이상하게 썰었어요? 평소 요리 실력 같지 않은데요?”“그거 내가 한 거 아니야.”나도현은 간단히 대답했다.이 집에는 단 세 사람밖에 없으니 그가 썰지 않았다면 누가 했는지 자명했다.양채은은 고개를 돌려 양시은을 보았다.“언니 원래 요리 잘했잖아. 근데 왜 이렇게 당근 모양이 특이해?”“오랜만에 칼 잡아서 감각이 좀 서툴러진 것 같아.”양시은은 차라리 땅으로 꺼지고 싶은 기분이었다.그녀가 의자를 당겨 앉으려는데 동작이 조금 커서 허리를 삐끗할 뻔했다.양채은이 급히 부축했다.“언니 허리 진짜 심각해 보인다. 내일 내가 병원 같이 가 줄까?”“아니야, 그냥 병원 갈 일 있을 때 진료 보면 돼.”양채은과 함께 병원에 가는 건 상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녀의 허리 상태를 알면 미친 듯이 몰아붙일 것이기 때문이다.양채은도 더 묻지 않았다.식사 시간 대부분을 양채은이 떠들었고 나도현이 가끔 대답해 주었다.양시은은 머리를 푹 숙인 채 존재감 줄이기에 급급했다.식사가 절반쯤 진행됐을 무렵 나도현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를 보니 박은희였다.그는 화면을 확인하고 폰을 들고 발코니로 나갔다.“어머니, 무슨 일이에요?”“무슨 일이긴. 아무 일 없으면 엄마가 아들 찾으면 안 돼? 너 벌써 2주나 집에 안 왔잖아. 오늘 저녁이라도 집에 와 줘.”박은희는 이미 며느릿감을 물색해 둔 상태였고 오늘 나도현에게 소개할 작정이었다.원래는 거절하려던 나도현이었지만 박은희가 말을 이었다.“내가 오늘 특별히 네 건강 생각해서 보양탕까지 끓였어. 몇 시간 동안 불 앞에 서 있었더니 손에 물집까지 잡혔다. 네가 와서 조금이라도 마셔 줘야 엄마가 위로받지 않겠니.”결국 그는 거절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이렇게 애써 준다는데 모
휴대폰 화면을 보자마자 양시은은 등골이 서늘해졌다.[사진 찍어서 보여 줘. 지금 무슨 옷 입고 있는지.]이건 분명히 나도현의 말투였다.그가 이 시간을 못 참고 검사를 하러 온 것이다.하지만 옆에는 양채은이 함께 앉아 있었다.양시은은 재빨리 답장을 쳤다.[잠깐만 기다려. 내가 방에 들어가서 찍어 보낼 게.]그리고 휴대폰을 움켜쥔 채 자리에서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가려고 했다.그런데 양채은이 아직 대화가 덜 끝났다며 무심코 따라오려 했다.그 와중에 휴대폰이 계속 진동했다. 한 번, 두 번, 쉼 없이 문자가 쌓이고 있었다.“언니, 누가 자꾸 메시지 보내? 설마... 언니 남자 생긴 거 아니야? 나도 드디어 형부가 생기는 건가?”양채은은 눈을 반짝이며 기대에 차 물었다.진심으로 그녀가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양시은은 쓴웃음을 지었다.“지금 내 처지를 봐. 나한테 누가 관심을 주겠어?”집도 재산도 없고 병든 아이를 돌보느라 빚더미에 앉아 있는데, 어떤 남자가 이런 상황을 반길까?“그럴 수도 있지! 진짜로 언니를 사랑하는 사람이면 조건 같은 건 신경 안 쓴다니까. 예를 들어, 나랑 태경 씨도 그렇잖아. 그 사람은 차도 있고 집도 있는데 난 아무것도 없어. 그런데도 나랑 결혼했잖아.”양채은은 자신의 사례를 들어 열심히 설명했다.나도현이 강태경이라는 배려심 많은 남자로 비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이다.“나는 이렇게 좋은 사람 만났는데 언니라고 못 만날 이유가 있나? 좀 자신감을 가져! 세상에서 제일 좋은 거 다 누려도 모자랄 언니잖아.”그녀가 해맑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그러나 양시은은 마음이 울적했다.‘채은아, 세상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아... 좋은 남자가 어디 흔한 줄 알아? 강태경이 어떤 사람인지 알면 엄청 놀랄 거야...’그때 휴대폰이 울렸다.나도현이 문자가 아니라 직접 전화를 걸어 온 것이었다. 그는 참지 못하고 바로 전화를 건 모양이다.“와, 이 정도면 누군지 진짜 궁금한데?
나도현이 갑자기 전화한 것을 보아 답장도 없고 전화도 받지 않은 양시은이 이유인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화가 나 양채은에게 연락해 그녀를 난처하게 하려는 것이다.“걱정되어서 전화했어. 지금 어디야?”나도현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그는 양시은이 양채은의 옆에 있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지금처럼 담담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의 목소리를 양시은은 전부 듣고 있었다.핸드폰을 든 양채은은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당연히 집에서 얌전히 태교에 집중하고 있었죠. 태경 씨, 오늘 많이 바빠요?”“아니, 별로. 네 언니는?”나도현이 바로 양시은을 찾아대기 시작하자 양채은은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현이 이상하리만큼 양시은에게 관심을 보이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곰곰이 생각한 그녀는 나도현이 양시은의 처지를 전부 알고 있어서, 그녀를 위하는 마음에 그녀의 언니도 걱정하는 것으로 생각했다.“언니는 제 옆에 있어요. 내일은 언니랑 함께 병원에 가기로 했거든요. 하민이를 못 본 지 꽤 된 것 같아서요.”“네 언니가 지금 뭘 입고 있는지...”나도현은 일부러 말꼬리를 늘이며 말하고 있었지만 말을 마치기도 전에 양시은이 말을 잘랐다.양시은의 이마엔 식은땀이 흘러나왔고 몸이 비틀대고 있었다.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채은아, 난 이만 방으로 가서 쉴게.”만약 계속 나도현에게 영상을 찍어 전송하지 않는다면 계속 이런 식으로 그녀를 괴롭힐 것이 분명했다.“어? 내가 부축해줄까?”핸드폰을 들고 있는 양채은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랐지만 오늘따라 유난히도 양시은이 수상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디가 수상한지는 몰랐다.“괜찮아.”양시은은 도망치듯 빠르게 방으로 가버렸다. 정말이지 1초라도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알았어. 그럼 얼른 가서 쉬어.”양채은은 다시 소파에 앉았다.“참, 태경 씨. 방금 우리 언니가 뭐라고 했어?”“별거 아니야. 그냥 내일 병원엔 네 언니 혼자 가도 되지 않겠냐는 말을 하고 싶었어.
그랬기에 양채은은 강태경이 자신을 대충 대하려 한다는 생각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든 양채은이 말을 이었다.“알았어요. 그럼 얼른 일해요. 전 더는 방해하지 않을게요. 어차피 이따가 저녁에 다시 못다 나눈 대화를 이어서 해도 되니까요.”아까부터 전화를 끊고 싶었던 나도현은 그녀의 말에 주저 없이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차에서 앉아 조금 기다리니 양시은에게서 또 문자가 왔다. 이번에 받은 것은 영상이었고 전보다 파격적이었다.그는 아주 만족한 얼굴로 확인하더니 핸드폰을 넣고 차에서 내렸다.박은희는 이미 저녁을 한 상 가득 차리고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왼쪽 자리는 나도현을 위해 비워두었고 오른쪽 자리에는 그녀가 마음에 쏙 들어 하는 예비 며느리 임다혜가 앉아 있었다.“어머님, 도현 씨가 저를 싫어하면 어떻게 해요?”임다혜는 수시로 고개를 떨구어 손목에 있는 바쉐론 콘스탄틴을 보았다.‘이렇게나 늦었는데 나도현은 왜 아직도 오지 않은 걸까?'‘설마 일부러 날 피하고 있는 걸까?'그러자 박은희는 눈웃음을 지으며 임다혜를 보았다. 그녀는 양시은을 대했던 것처럼 압박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래도 괜찮단다. 감정은 천천히 쌓아가는 거잖니. 넌 정말 좋은 아이인데 도현이가 널 싫어할 리가 있겠니? 오히려 나보다 더 너랑 결혼하고 싶다고 할지도 모르겠구나.”“그러면 다행이죠. 저희 부모님이 매일 시집가라고 잔소리를 하시거든요. 얼른 손자 안아보고 싶다고 하세요.”임다혜는 발그레해진 얼굴로 말을 꺼냈다.그녀는 어릴 때부터 자신이 정략결혼을 할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부모님과 오빠가 아무리 그녀를 애지중지해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았기에 유일하게 바라는 것은 나이가 비슷한 남자 중에서 그나마 자신의 마음에 드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었다.그리고 나도현이 그녀가 선택한 남자였다.박은희는 입에 귀에 걸린 채 말했다.“그건 나도 네 부모님이랑 같은 생각이란다. 우리 집은 아들딸 차별 같은 거
박은희는 두 사람이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했기에 얼른 수저를 내려놓으며 끼어들었다.“잘됐구나. 나이도 비슷하고 공통점도 많으니 둘이서 얘기를 나눠 보아라. 난 이만 방에 가서 피부 관리를 받아야 할 것 같구나.”박은희가 자리를 뜨자 임다혜는 나도현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시간 없습니다.”나도현은 단칼에 그녀를 거절했다.“오늘 시간 없는 거면 괜찮아요. 다음에 다시 얘기를 나누면 되니까요. 도현 씨의 사무소 근처에 카페가 새로 생겼더라고요. 우리 다음에는 그곳에서 만나 커피 한잔하면서 얘기해요.”임다혜는 그의 거절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도 나도현이 자신을 좋아하기를 바라지 않았고 그가 그녀와 결혼하고 아이를 한 명 낳겠다고만 해도 충분했다.나도현의 미간이 한껏 구겨졌다.“언제가 되든 시간이 없을 겁니다. 임다혜 씨, 어머니가 무슨 목적으로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고 했는지 저도 그렇고 임다혜 씨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전 말을 돌려 하는 걸 싫어해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전 임다혜 씨랑 결혼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도현 씨, 그렇게 확신하지 말아요. 어쩌면 생각이 다시 바뀔 수도 있잖아요.”웃고 있던 임다혜의 표정이 굳어버렸지만 이내 다시 원래의 모습대로 돌아왔다.처음에 어른이 되고 나서 정략결혼을 해야 한다고 했을 때도 그녀는 아주 싫었다. 그런데 그녀가 싫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부잣집에서 태어나 아기 때부터 지금까지 호화롭게 살긴 했지만 그 대가는 부모님이 정해주는 상대와 결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나도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지금 나도현이 자신을 밀어내고 거절해도 나중엔 결국 그녀와 결혼하리라고 말이다. 어차피 박은희든 나용민이든 절대 나도현이 원하는 상대와 결혼하지 못하게 할 거니까.“임다혜 씨와 같은 조건이라면 분명 결혼하려는 남자가 줄을 섰을 텐데 왜 굳이 저한테 매달리는 거죠? 전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나도현도 자신이 가소롭게 느껴졌다.분명
나도현은 임다혜의 손을 뿌리치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도현 씨, 자꾸 그렇게 절 거부하지 말아요. 단호하게 거절하지 말라고요. 저 아니어도 아주머니는 계속 도현 씨에게 맞선 상대를 알아봐 줄 거고 그 여자들도 저처럼 말이 통하지 않을 거예요. 그때 가면 더 골치 아파지는 건 도현 씨라고요!”임다혜는 다시 쫓아왔다.“그냥 저랑 연기하면 된다니까요. 도현 씨한테 문제가 될 건 없잖아요. 오히려 눈앞에 있는 귀찮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대체 왜 거절하는 거예요?”나도현도 왜 그런 것인지 몰랐다.예전에는 양시은만 있으면 온 세상을 가진 기분이었고 다른 여자가 아무리 예쁘다고 한들 그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나중에 양시은이 그의 곁을 떠나니 미친 사람처럼 그녀와 닮은 사람을 찾아다니기 바빴고, 더 나중에는 양시은이 돌아왔다.그는 지금 온통 그녀를 괴롭히고 싶은 생각뿐이었고 서로 상처를 주고 있었던지라 더는 다른 여자를 상대할 시간의 여유와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이 설령 그저 연기하는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그냥 절 한 번만 도와준다고 생각해요. 안 그러면 저희 부모님이 계속 저한테 스트레스 줄 거라고요. 전 배 불뚝 나온 아저씨랑 맞선 보고 싶지 않아요. 제발 부탁드려요. 절 도와주면 언젠가 이 빚을 꼭 갚을게요. 무엇으로든 전부 갚을게요.”임다혜는 물러서는 척하며 기회를 노렸다.비록 지금은 연기해달라고 했지만 나중에 연기하면서 진짜로 서로 사랑하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그녀는 자신이 어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완벽한 여자라고 생각했기에 분명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했다.나도현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무언가가 떠오른 듯 더는 조금 전처럼 단호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그럼 그 연기를 언제까지 해주면 되는 거죠?”“3개월이면 될 것 같아요. 그 후엔 좋게 헤어지면 돼요. 3개월 지나면 바로 항공편을 예약해서 해외로 떠날 생각이에요. 그러면 제 가족들도 저 찾지 못하게 될 거고 더는 결혼 독촉도 하지 않겠죠.”임다혜는 거짓말을 술술 내
나도현은 입술을 짓이겼다. 지금 이 기분을 어떻게 형언해야 할지 몰랐다. 양시은이 돈을 위해 자신을 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양시은의 아들도 자신과 혈연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양시은은 그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니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나도현은 더는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네 할머니는 아무런 잘못도 없으시잖아. 걱정하지 마. 네 할머니는 내가 어떻게든 보살펴줄 테니까.”“고마워.”허효준은 고개를 숙이면서 감사 인사를 전했다. 나도현도 고개를 까닥거리며 인사를 받아준 뒤 허효준과 멀어졌다.그가 경찰서에서 나오자 박은희는 사특한 기운을 몰아낸다며 소금을 뿌려댔고 나도현은 가만히 있었다.박은희의 의식이 끝난 후에야 나도현은 차에 탈 수 있었다.“대체 누구한테 부탁해서 절 구해내신 거예요?”나도현은 허효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박은희는 양시은과 했던 거래를 잊지 않았다. 하지만 이 공로를 아무것도 모르는 임다혜에게 돌리고 이 사실에 대해 알린다면 더 불리해질 것이었기에 결국 사실대로 말해주었다.“양시은이 어떻게 녹음 파일을 구했는지 모르겠지만 나한테 주면서 거래를 하자더구나. 양시은 아들이 인질로 잡혀 있었어.”모든 게 허효준이 했던 말과 일치했다.나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술을 짓이겼다. 박은희는 그런 나도현의 안색을 살피며 잔소리를 해댔다.“너도 얼른 양시은을 향한 마음을 접어. 그러면 네가 한 짓에 관해 더는 묻지 않으마. 하지만 앞으론 반드시 내가 하라는 대로 해. 임다혜랑 결혼도 다음 달에 해버려.”박은희는 양시은을 여전히 인정하지 않았기에 당연히 양채은도 인정할 리가 없었다. 더구나 나도현은 예전에 쓰던 이름으로 양채은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나도현도 진심으로 대한 적 없는 여자를 더욱 며느리로 받아들일 리가 없지 않겠는가.나도현은 비록 양채은에게 진심은 아니었지만 박은희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를 순 없어 차갑게 말했다.“임다혜는 어머니가 좋아하는 사람이잖아요.”“내가
천사와 악마의 목소리는 이러했다.“하민이는 원래부터 아픈 아이였잖아. 네 언니는 애초에 널 동생으로 생각한 적도 없는데 왜 언니 입장까지 고려해야 하는 거지? 그런 사람이라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하는 거야!”악마의 목소리가 점차 그녀의 이성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천사의 목소리는 여전히 악마와 대항하고 있었다.“안 돼. 아이가 아직 어리잖아...”그러자 악마는 다시 반박했다.“양채은, 만약 네가 손 놓고만 있다가 네 아이가 사라진 뒤에야 복수할 생각이야?”양채은은 당연히 자신의 아이가 사라지길 바라지 않았다.몇 년 동안 그녀는 항상 노력했지만 양시은은 그녀가 노력하는 모습을 본 적 없었고 심지어 약혼식 그날에도 나도현과 뒹굴고 있었다.분명 나도현은 그녀의 약혼자이고 그녀의 배 속에 있는 아이의 아빠인데도 말이다. 오로지 그녀의 배 속에 있는 아이만 나도현에게 아빠라고 불러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양채은의 눈빛이 점점 싸늘해졌다....한편 나도현은 녹음 파일 덕분에 검찰과 경찰은 허효준을 소환해 조사하기 시작했고 허효준이 다른 누군가와 나도현을 모함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나도현을 석방했다.나도현이 나오자 허효준이 들어가게 되어 두 사람의 상황은 정반대가 되었다.원래는 그저 스쳐 지나가게 되겠지만 나도현은 허효준 앞에 서 있었다.그는 처음부터 자신이 누군가에게 모함당했을 거라곤 생각도 하지 않았다. 여하간에 변호사가 된 순간부터 그의 손으로 들어온 사건은 전부 잘 해결되었으니 말이다. 더구나 그에겐 나씨 가문이 있었으니 아무도 그를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그런데 허효준이 누군가와 손을 잡고 자신을 모함했다고 하니 나도현은 배신감에 가슴이 아팠다.“허효준, 난 널 제일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어. 난 너도 내 소꿉친구들이랑 같은 취급을 하고 있었다고.”여이현과 최주하, 지석훈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다. 허효준은 그의 대학교 시절 친구였지만 그는 변호사가 되었고 허효준은 판사가 되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다시 친해져 나도
박은희는 눈물을 흘리는 양시은의 모습에도 마음이 약해지지 않았고 어떻게든 양시은이 가지고 있는 증거로 나도현을 구해낼 생각만 했다.게다가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모습에 박은희는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왜 마침 시은 씨가 그 증거를 가지고 있는 거지?”양시은은 손을 들며 맹세했다.“아르바이트할 때 효준 씨가 우연히 제가 일하는 가게로 왔고 마침 제가 서빙하고 있어서 녹음한 거예요. 사모님, 제가 왜 제 친자식으로 장난을 치겠어요?”양시은은 한 치의 거짓 없는 얼굴로, 토끼 같은 동그란 눈빛으로 말했다.박은희도 그녀와 같은 여자고 한 아이의 엄마로서 당연히 양시은의 지금 감정을 이해하고 있었다.하지만 만약 양시은의 아이가 죽게 된다면 양시은은 패닉에 빠질 것이다. 그런 상태의 양시은은 미쳐버리거나 죽어버리게 될 가능성이 아주 컸고 나도현도 양시은을 점차 잊으리라 생각했다.박은희의 머릿속에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핸드폰을 나한테 넘겨. 네 아들은 내가 어떻게든 방법을 생각해내 볼 테니까.”양시은은 핸드폰을 박은희에게 넘기려던 순간 직감했다.“아니요. 사모님께서 그렇게 흔쾌히 제 요구를 들어주실 리가 없죠. 전 사모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요. 제가 죽기를 바라고 있고 더는 나도현 앞에서 나타나길 바라지 않는 거잖아요.”박은희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순간 양시은은 자신의 추측이 정확했음을 눈치챘다.그녀는 이 틈을 타 제안했다.“계약서라도 써주세요.”박은희는 인맥을 동원해서라도 그녀의 아들을 구해낼 방법이 있었지만 나도현은 그저 잠시 누명을 썼을 뿐이다. 박은희가 하민이를 구해내는 걸 본 후에야 그녀는 나도현을 위해 이 녹음 파일을 박은희에게 건넬 생각이다.생각보다 눈치가 빠른 양시은에 박은희도 더는 방법이 없어 그녀의 요구대로 계약서를 쓰기로 했다.양시은은 그제야 녹음 파일을 그녀에게 전송했고 박은희는 하는 수 없이 사람을 보내 하민이를 구해야 했다.마스크남은 지금 이런 시기에 누군가 자신을 찾아와 깽판을 벌일 줄은 몰랐
“저한테 뭘 해줄 필요는 없어요. 그냥 우리 가족만 건들지 않으면 돼요. 그게 제 유일한 요구예요.”마스크남은 나직하게 웃었다.“이 세상에서 돈과 권력을 마다하는 사람이 존재하다니. 참 신기하네요.”허효준은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그냥 내 요구만 들어줘요. 앞으로 다시는 날 찾아오지도 말고요. 그 어떠한 것도 들어주지 않을 거니까요.”그러나 마스크남은 이렇듯 손쉽게 허효준을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그다음 순간 그는 허효준에게 리스트를 건넸다.“이 위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든 풀어줘요. 안 그러면 그쪽이 엘리트 변호사를 모함했다는 사실을 까발릴 거니까요.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시민들이, 그쪽 직장에서 그쪽을 가만둘 것 같아요?”여기까지 녹음한 양시은은 아주 만족했다. 그러나 나가려던 순간 허효준이 그녀를 알아보았다.“시은 씨가 여긴 왜 있는 거예요?”마스크남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해버렸다.양시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잽싸게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녀는 구체적인 상황을 몰랐지만 허효준이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목격하고 나도현이 모함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그들이 그녀를 가만둘 리가 없지 않겠는가.허효준은 뒤쫓아 가고 싶었지만 마스크남이 그를 불러세웠다. 그는 태연하게 차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어차피 도망쳐봤자 손바닥 안이라는 걸 모르나요?”허효준은 마스크남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마스크남의 눈빛이 더 어둡게 가라앉았다.“양시은에게 아들이 있지 않나요?”그 말에 허효준은 바로 깨닫게 되었다.마스크남은 핸드폰을 꺼내더니 누군가에게 연락했다.“병원 쪽으로 가서 양시은의 아들을 인질로 잡고 있어.”허효준은 다른 사람이 이 일에 휘말리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지만 이미 이 지경이 되었으니 양시은이 다른 곳에 가서 말할 수 없게 막아야 했다.양시은은 녹음 파일을 저장한 후 바로 박은희를 찾아가려고 했지만 마스크남이 한 발 더 빨랐다.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하민이의 울음소리에 양시은은 더는 나도현을 도와줄 수
말을 마친 양채은은 바로 자리를 떠나버렸고 양시은은 그런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양채은의 마음이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 그녀였어도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그녀는 바로 박은희를 찾아가려고 했고 택시를 잡은 후 나씨 가문 본가로 향했다.이곳을 찾아온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박은희의 초대로 와본 적 있었다.박은희는 그녀에게 호화롭기 그지없는 집안 내부를 보여준 뒤 8억을 주면서 나도현의 곁에서 떨어지라고 말했다. 그때 그녀는 속으로 맹세했다. 다시 이곳으로 발을 들이지 않으리라.그런데 오늘 그녀는 양채은을 위해 다시 발을 들이게 되었고 입구 경비원이 그녀를 막아섰다.“누구시죠?”양시은은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전 양시은이라고 해요. 제 이름을 사모님께 말씀드리면 들어오라고 하실 거예요.”그녀는 양채은을 붙잡지 않은 이유가 양채은에게 받아들일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양채은을 혼자 오랫동안 둘 수는 없었던지라 서둘러야 했다.입구 경비원은 너무도 침착한 그녀의 모습을 보곤 이내 들어가 보고를 올리기로 했다.그녀의 이름을 들은 박은희는 안색이 변했고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는 대신 직접 나와서 양시은을 만났다.박은희를 본 순간 양시은은 모든 걸 깨닫게 되었다. 특히 박은희의 싸늘한 눈빛만 봐도 박은희는 그녀가 이 집안에 발을 들일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 직접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박은희는 비꼬아 말했다.“왜, 돈이 필요한 거니?”양시은은 입술을 짓이기며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아니요. 오늘 이렇게 찾아온 건 사모님이 제 가족을 건드려서예요. 전에 이미 약속했잖아요. 나도현의 곁에서 떨어져 영원히 눈앞에 나타나지 않기로요. 전 그 약속을 지켰어요.”그녀를 찾아온 사람은 나도현이었다.“내가 네 가족을 건드렸다고? 도현이가 왜 네 동생한테 접근한 건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알고 있는 거 아니니? 네 동생한테는 난 손도 대지 않았다.”박은희의 표정을 보니 거짓말하고 있는 건 같지 않았다. 박은희가 아니라면.
비록 차는 느리게 달리고 있었지만 갑자기 밀려 그대로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고 너무도 아팠다. 하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양채은은 검은색 차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곤 양시은에게 전화를 걸었다.“언니, 지금 뭐 해? 나 궁금한 게 있어서 물어보려고. 직접 얼굴 보고 물어보고 싶은데...”양채은의 목소리만 들어도 양시은은 그녀가 분명 무언가를 눈치챘다는 것을 알아챘다. 양채은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 불안해할 양채은이 걱정되어 양시은도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고 그렇게 양시은은 양채은을 찾아가기로 했다.양채은은 길가에 앉아 표정이 잔뜩 어두워진 채 공허한 눈빛으로 길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양시은은 그런 그녀를 발견하고 얼른 뛰어갔다.“채은아, 무슨 일이야?”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양채은은 고개를 들며 잔뜩 비웃음이 담긴 얼굴로 보았다.“언니는 정말로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긴 지 몰라서 묻는 거야? 사랑하는 언니야?”양채은이 의미심장하게 내뱉은 말과 조롱 섞인 미소, 그리고 싸늘해진 눈빛에 양시은은 그녀가 모든 걸 알아버렸음을 직감했지만 이렇듯 빨리 알아버리게 될 줄은 몰랐다.양시은은 목이 너무도 아팠고 무언가 딱딱한 것이 막혀버린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채은아, 나도 일부러 숨기려고 한 건 아니었어. 그때 나도현과 헤어진 건 나도현 어머니에게서 돈을 받아서였어.”양시은은 고개를 푹 숙인 후 양채은의 곁에 앉았다. 하지만 양채은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딴 과거는 신경 쓰지 않아. 내가 지금 받아들일 수 없는 건 언니가 날 속이고 있었다는 거야. 대체 왜 말을 하지 않은 건데? 내가 언니한테 그렇게 나쁜 사람이었어? 이용당하고 있다는 걸 알려주기 싫을 만큼?! 아니면 나한테 진실을 알려주고 나면 내가 언니한테서 나도현을 빼앗아갈까 봐 걱정된 거였어?!”양채은은 역시 모든 걸 다 알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렇듯 흥분할 리가 없었다.양시은은 비록 마음이 괴롭기는 했지만 양채은이 지금 알게 된 것이 나중에 알게 된
그 순간 양채은은 지금 이 기분을 어떻게 형언해야 할지 몰랐다.강태경은 그녀에게 아주 좋은 사람이었고 그녀의 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지금 그녀에게 전부 가짜라고 하지 않는가.진짜 이름은 나도현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었고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몰랐다.그녀는 어디 내놓을만한 집안 배경을 가진 것도 아니고 대단한 위인도 아니었을뿐더러 일을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인맥도 없었다.경찰은 넋 나간 그녀를 보며 물었다.“혹시 신체 포기 각서 같은 것에 사인하거나... 은행 카드를 빌려주거나 하지 않았어요?”지금 이 시대에 보이스 피싱이 난무하고 있었기에 물어보는 것이었다.양채은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그냥 저한테 용돈 준 기록뿐이에요. 전 임산부라 뭘 가져갈 만한 것도 없거든요.”그럼 더욱 이상했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고 그저 이름만 가짜로 알려주었다니.경찰은 조사한 내용을 더 자세히 양채은에게 알려주었다.“나도현, 경성의 엘리트 변호사고 아마도 나도현 씨의 악취미에 이용당한 것 같네요.”돈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악취미가 있기 마련이었다. 양채은은 원래부터 충격을 받은 상태였지만 경찰의 말을 들으니 더 괴로웠다.그러니까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도현의 손에 놀아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나도현이 자신에게 잘해주었던 기억이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더욱 괴로워졌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괴로웠던 것은 경찰서로 나오자마자 누군가 빠르게 그녀를 검은색 차로 납치한 것이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경계하며 덜덜 떨리는 몸으로 물었다.“당신들은 누구죠? 대체 뭘 원하는 거죠!”검은색 차는 창문마저 꼭꼭 닫혀 있었다. 차 안에는 운전자와 조수석, 그리고 그녀의 옆에 앉은 사람, 총 세 명의 남자가 있었고 전부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그녀의 옆에 앉은 남자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나도현을 찾고 있는 거 아니었나? 우리가 도와주지.”양채은은 더 겁에 질렸다.“좋은 사람이라면 왜 전부 얼굴을 가리고 있는 거죠?”“네가
양채은의 반응은 너무도 격했고 무슨 말을 하든 믿지 않으려 했다.“저랑 태경 씨는 알고 지낸 지 오래된 사이예요. 태경 씨가 저한테 얼마나 잘해주는데요. 일도 열심히 하고 능력도 뛰어난 변호사인데 어떻게 그런 짓을 할 리가 있겠어요? 당장 다시 조사해보세요. 분명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걸 거예요!”국장은 그녀가 말 마치기를 기다린 후 물었다.“양채은 씨, 방금 태경 씨라고 호칭하던데 맞습니까?”“네, 맞아요. 제 약혼자 이름은 강태경이에요. 곧 결혼할 사이인데 그 호칭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양채은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 눈앞에 있는 경찰이 쓸데없는 것에 관심이 참 많다고 생각했다. 곧 결혼할 사이인 예비부부의 호칭까지 신경 쓰다니 말이다.국장은 고개를 저었다.“이건 두 사람이 곧 결혼할 사이이든 아니든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이 이름은 양채은 씨가 말해준 약혼자의 신분 정보랑 일치하지 않습니다. 혹시 알고 있습니까?”“그게 무슨 소리세요. 저한테 그런 농담은 통하지 않아요.”양채은은 멍한 표정을 지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덜덜 떨리는 몸으로 국장을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보았다.‘그럴 리가 없잖아! 태경 씨 이름은 강태경이라고. 강태경이 아니면 대체 뭐라는 거야? 태경 씨가 날 속일 리가 없다고!'“신분 정보를 알고 있지만 상대의 이름이 뭔지를 모르는 걸 보니 양채은 씨도 이 사건과 연관이 있다고 의심이 되는군요.”국장은 그녀를 데리고 취조실로 들어갔다. 양채은은 여전히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그 사람이 강태경이 아니면 대체 뭔데요?”“나도현.”이 이름은 양채은에게 아주 낯선 이름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한 순간이 아주 많았지만 살면서 단 한 번도 이 이름을 들어본 적 없었다.“신분 정보를 알고 있다는 건 신분증을 보았다는 소리인데 본인이 알고 있는 이름과 신분증에 있는 이름이 다르다는 걸 모르셨습니까? 양채은 씨,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거죠?”국장은 계속 말을 이었다.양채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약혼식이 있던
여이현에게도 딸이 있었고 매일 만날 수 있지만 온지유와 법로는 오랜 시간 동안 떨어져 살지 않았는가.게다가 법로는 지금 시한부였고 살 수 있는 시간이 5년뿐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이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고 서로에게 좋은 추억만 남겨야 했다.권다솔도 이해하고 있었던지라 여이현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곤 배진호의 팔짱을 꼈다. 그리고 함께 차를 주차해둔 곳으로 갔다.“사실 요즘 시간의 여유가 생겼잖아. 그래서 너랑 함께 다른 도시로 가서 여행하려고 했는데 지금 보니 그 계획을 뒤로 미뤄야겠네.”배진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그의 눈빛은 한없이 다정했다. 그녀가 곁에 있으니 너무도 좋았기 때문이다.권다솔은 웃으며 말했다.“요 며칠은 시간이 없겠지만 다음 주에 가면 되잖아. 다다음 주도 괜찮고. 어쨌든 우리에겐 이젠 시간은 많아.”두 사람은 아직 젊었으니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한편 양채은 쪽 상황.양시은이 일하러 나가니 집 안에는 그녀 혼자 남게 되었다.할 일이 없었던 그녀는 집안을 구석구석 청소하려고 했지만 별장이 너무 컸던지라 힘도 많이 들어가 쉬었다가 할 수밖에 없었다.청소를 마치고 나니 어느덧 저녁이 되었다.양채은은 시간을 보곤 나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도현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만약 오늘 집으로 돌아올 수 없대도 그저 간단한 대화 몇 마디면 충분했다.신호 연결음이 한참이나 들려왔지만 받지 않았다. 그녀는 문자를 보낸 뒤 얌전히 기다렸지만 여전히 아무런 답장도 오지 않아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그녀가 알고 있는 강태경은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시간을 내서 그녀의 문자에 답장을 해주거나 전화를 해주었다. 그런데 오늘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전화든 문자든 한 통도 오지 않았고 잠수를 탄 사람처럼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한참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그의 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사무소 전화번호도 나도현이 그녀에게 알려준 것이었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걸어본 적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