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시은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양채은은 잡았던 그녀의 손을 놓은 채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걸어갔다.그러다가 양채은은 화장대 앞에 놓인 나도현의 핸드폰을 발견하게 되었다. 숨 참고 지켜보고 있던 양시은은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이젠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거지?'“태경 씨도 참. 핸드폰을 여기에다 흘리고 갔나 보네.”양채은은 나도현의 핸드폰을 들고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전혀 의심하지 않는 것 같은 모습에도 양시은은 안도할 수 없었고 얼른 화제를 돌렸다.“오늘은 네가 주인공이니까 얼른 밖으로 나가자. 난 이번에도 화장실로 달려가 봐야 할 것 같아.”말을 마친 양시은은 양 채는 이 말하기도 전에 얼른 화장실로 도망치듯 나와버렸다. 문을 꼭 잠근 후에야 그녀는 숨을 몰아 내쉴 수 있었다.다만 화장실에서는 나도현의 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고 다시 그녀를 문으로 가둬버렸다.나도현의 손은 언제나 정확하게 그녀를 잡아버렸고 양채은의 목소리가 아까처럼 문밖에서 들려왔다.“언니,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어. 얼른 병원에 가봐. 내가 지금 태경 씨한테 가서 기사님 붙여달라고 할게.”“아니야. 괜찮아. 참을 만해. 뭐가 어찌 되었든 네 약혼식이 더 중요하잖아.”양시은은 최선을 다해 평온한 목소리를 내자 말을 마친 양채은은 나도현을 찾으러 가보겠다고 했다...만약 찾다가 나도현이 그녀와 함께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라도 한다면... 양시은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지만 양채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언니, 어디가 어떻게 불편한데. 자꾸 고집부리면서 참으려고 하지 마. 아프면 바로 병원에 가. 난 이만 가볼 테니까.”이내 양시은은 멀어져 가는 양채은의 발걸음 소리를 듣게 되었다. 힘이 풀려버린 양시은은 문에 기댔지만 머리 위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역시 양시은이네. 연기를 너무 잘해.”나도현이 다정했던 모습을 알고 있었던 그녀는 현재 자신을 비웃고 괴롭히는 모습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 저도 모르게 이를 빠득 갈면서 주먹을 움켜쥐었다.“너한테 미안해야 할
양시은은 나도현이 양채은을 진심으로 좋아해서 약혼식까지 올리는 것이 아님을 확신했다.이것은 결국 그녀에게 복수하기 위한 엄청난 함정이었고 나도현은 이미 오래전부터 양채은이 그녀의 동생이라는 것을 알고 이런 계략을 꾸민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녀는 거절할 수 없었다.“채은이한테는 말하지 마. 내가 어떻게든 방법을 생각해볼 테니까.”“그래. 오늘 밤 난 네가 내 개가 되는 모습을 봐야겠어. 반드시 날 만족시켜야 할 거야.”나도현은 피식 웃으며 그녀를 아래로 깐 뒤 뜨거운 숨결을 그녀의 귓가에 불어넣었다.두 사람 사이엔 알콩달콩한 분위기는 없었고 오로지 무한한 살얼음판만 존재했다.양시은은 겨우 그에게서 벗어나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채은이 그녀의 곁으로 돌아와 말했다.“태경 씨는 대체 어디 갔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서 내가 약국 가서 약 좀 사 왔어. 언니, 이따가 저녁에 내가 패물을 팔아서 하민이 병원비를 어떻게든 마련해볼게.”양채은의 말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양시은의 심장을 난도질하는 것 같았다.양채은은 그녀를 신경 써 줄 뿐만 아니라 하민이도 신경 써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 때문에 이런 계략을 꾸민 나도현을 생각하니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다.“그러지 마. 그 패물들은 네 약혼자가 준 거잖아. 그런데 팔아버리고 나중에 어디에 있냐고 물어보면 어떻게 설명하려고?”양채은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이미 나한테 줬으니까 내 거인 거지. 게다가 태경 씨도 말했어. 약혼하고 3개월 후에 결혼하자고. 언니, 이 패물들은 비싸지 않아. 나중에 나랑 태경 씨 월급 받게 되면 그때 또 하민이 수술비 마련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보자.”기대가 가득한 목소리에 양시은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그 사람도 너와 같은 평범한 직장인이야?”“나는 비서고 태경 씨는 변호사야. 지금 도현 씨의 명의로 집 한 채와 차가 있어. 대놓고 돈을 요구하기엔 입이 떨어지진 않지만 도현 씨가 준 패물은 내가 팔 수 있어. 나중에 결혼하고 나면...
양채은은 옆을 힐끗 보다가 검은 옷으로 차려입은 나도현을 발견했다.등 뒤에 있던 양시은도 나도현을 발견했다.나도현과 강태경이 같은 인물이라는 생각에 양시은은 다시 한번 짙은 한숨을 내쉬게 되었고 묻혀 두었던 기억이 떠올랐다.“양시은 씨가 예전에 사귀었던 사람은 강태경입니다. 그 사람이 지금 나도현이 되었으니 포기하세요!”그는 나도현이자 강태경이었다.그녀는 원래 강태경과 행복해질 수 있었지만 나도현과 엮여서는 안 되었기에 결국 떠나는 것을 선택하고 말았다.그 뒤로 강태경이라는 이름을 기억 저편에 묻어 두었는데 양채은이 자꾸만 그 이름을 부르니 묻어 두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그는 강태경이란 신분으로 양채은에게 접근했을 뿐 아니라 임신까지 하게 했다. 그리고 그녀에겐 신혼집으로 들어와 살라고 하면서 복수를 하고 있었다.그런데 그는 대체 왜 이 복수에 그녀의 여동생을 끌어들인 걸까?양채은은 분명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굳이 잘못을 따져본다면 못난 언니를 둔 잘못밖에 없었다.“방금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어. 네 쪽은 마무리된 거야?”나도현은 아주 자연스럽게 양채은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양채은은 그의 팔에 팔짱을 꼈고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양채은은 드레스 차림이었고 나도현은 정장 차림이었던지라 멀리서 보면 정말로 한 쌍의 완벽한 커플로 보였다.그러나 조금 전 있었던 일이 떠오른 양시은은 눈시울이 붉어졌다.나도현은 대체 왜 이런 계략을 꾸민 걸까?“다른 건 이미 다 해결했어요. 제 친구들도 생각보다 많이 와서 준비했던 의자가 부족할 것 같네요. 그래서 말인데 태경 씨, 우리 테이블이랑 의자를 조금 더 추가하면 안 될까요?”“돼. 이런 건 네가 알아서 하면 돼.”나도현은 양채은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지금은 그가 양채은을 배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애초에 이 일에 신경 쓰고 있지 않을 뿐이었다.그가 진심으로 양채은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고 이름마저 예전에 쓰던 이름을 알려줬는데 오늘 이 약혼식은 더 말할 것도 없
“하, 아무 잘못도 없다고?”나도현은 코웃음을 쳤다.“네가 그렇게나 많은 돈을 챙겨놓고 설마 동생한테 한 푼이라도 나눠주지 않은 거야? 정말 그런 거라면 너와 네 동생 사이도 그저 그런 건가 보네.”양시은은 또다시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팠고 지금 말을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차피 나도현은 그녀의 말을 믿어줄 생각이 없었으니까.그에게 그녀는 그저 돈에 환장한 여자일 뿐이고 뼛속까지 증오하고 있다.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조차 혐오스러워하고 있는데 여기서 무슨 말을 더할 수 있겠는가.그럼에도 그녀는 나도현에게 애원해야 했다.“우리 사이 일은 이미 4년 전에 끝났잖아. 채은이가 지금 네 아기를 임신하고 있어. 배 속에 있는 아기가 네 자식이라고! 둘이 결혼할 정도로 좋아하는 거라면 그럼 채은이한테 잘해줘.”나도현의 눈빛이 점점 더 싸늘해지고 손을 올려 그녀의 멱살을 잡았다.아직 복도에 덩그러니 남아있었던지라 양시은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머리 위엔 CCTV가 있었고 언제든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었다.만약 두 사람의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바로 인터넷을 떠들썩하지 않겠는가.또 양채은이 본다면 어떻게 하겠는가.양채은은 늘 행복한 가정을 바랐고 자신을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귀여운 아기를 낳아 키우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이런 것을 떠올린 양시은은 점점 더 죄책감이 들었고 그동안 동생에게 무관심했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조금이라도 일찍 동생의 남자친구가 나도현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녀는 반드시 간섭해 둘 사이를 갈라놓았을 것이다.“양시은, 네가 나한테 빚진 거 아직 다 갚지 못했잖아. 그런데 지금 고작 몇 마디로 과거의 모든 걸 얼버무리려는 거야? 네 말 한마디가 천금이라도 된다고 생각해?”나도현은 바로 비꼬았다.“우리 둘 사이에 있는 이 빚은 넌 영원히 갚을 수 없어. 내가 널 싫어할 수는 있어도 넌 날 버릴 수 없어.”과거에 이미 양시은에게 한번 차였던 그는 절대 또다시 그를 찰 기회를 주지 않을 생각이
나도현은 일부러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더 가까이 다가간 뒤 물었다.“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 지금 당장 양채은에게 달려가서 헤어지자고 할까? 방금 우리 둘이 했던 그 짓도 말해주고 양채은을 병원으로 끌고 가서 아기를 지우라고 하면. 그럼 만족할 거야?”“아니야!”양시은은 다급하게 반박했지만 그녀의 안색은 창백해져 있었다.“채은이 배 속에 있는 아기는 네 자식이라고.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양채은은 늘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을 꿈으로 여겼다. 그걸 알고 있었던 그녀는 절대 양채은의 꿈이 무너지게 할 수 없었다.“그럼. 넌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나도현은 다시 굽혔던 몸을 피곤 그녀를 위아래 훑어보았다.“아까 그 용기로 네 생각을 말해 봐. 양시은.”“내가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서 갚을 거야. 원하는 금액을 말해줘. 내가 어떻게든 마련해 볼 테니까. 그리고 우리는 다시는 만나지 않는 거야. 앞으로 채은이한테도 잘해줘. 나는 그냥 죽은 사람으로 취급하면 돼. 아니면 내가 여기를 떠날게. 외국이든 어디든 떠나서 절대 네 앞에 나타나 거슬리게 하지 않을게.”양시은은 간절하게 말했다.그녀와 나도현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기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의 눈앞에서 사라져 그와 양채은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었다.나도현의 미간이 점점 더 구겨지고 두 눈엔 분노가 짙어졌다.한참 지나자 그는 분노에 기가 찬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정말 꿈도 크다. 덕분에 난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만약 노벨상에 엉뚱상이 있다면 넌 반드시 받을 거야.”양시은은 묵묵히 고개를 푹 숙였다.그녀는 방금 자신이 한 말들이 분명 나도현에게 하찮게 보일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경성 최고의 엘리트 변호사로서 그가 받는 월급은 일반인이 상상도 못 할 만큼 엄청났고 집안에도 돈이 많았다...그러나 문제는 적디적은 돈 말고는 지금 그녀가 내놓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난 네가
“태경 씨, 방금 우리 언니랑 무슨 말을 했어요?”손님맞이를 끝낸 양 채는 이 고개를 돌려 반짝이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오늘은 언니에게 처음으로 남자친구를 소개하는 날이기도 했기에 그녀는 조금 긴장하고 있었다.만약 언니가 강태경을 탐탁지 않아 하면 어쩌나 생각하면서 말이다.나도현은 고개를 저었다.“그냥 간단히 인사를 나눴어.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 언니는 너한테 어떤 사람이야?”“언니는 나한테 세상에 단 하나뿐인 착한 사람이에요. 저한테 엄청 잘해주기도 하고 언니는 친구들한테도 인기가 많아요. 근데 조금 아쉬운 게 있죠.”뭔가가 떠오른 양채은이 한숨을 내쉬자 나도현은 얼른 캐물었다.“왜? 나한테 말해주면 안 돼?”“어차피 이제 한 가족이니까 못 말할 것도 없죠. 언니한테는 아주 사랑하던 남자친구가 있었어요. 하지만 두 사람은 헤어졌죠. 그 일로 언니는 한동안 슬픔에 빠져나오지 못했어요.”그 남자만 언급하면 양채은은 안색이 좋지 못했다.두 사람이 왜 헤어졌는지는 양시은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기에 그녀도 몰랐다.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었다. 언니는 너무 착하고 그 사람을 너무 사랑했으며 헤어진 후 몇 년 동안 힘들어하며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었다.그런 것을 보면 분명 그 남자가 언니에게 상처를 준 것이 틀림없었다.그렇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이미 결혼하고도 남았고 둘째까지 낳고 살았을 것이다.나도현은 그녀의 말에 흥미를 느껴 조금 더 물어보려고 했지만 양채은은 아는 게 없었고 흥미가 사라지고 말았다.“참, 태경 씨. 우리 언니가 사는 집의 집주인이 갑자기 방을 빼라고 하더라고요. 갑자기 방을 빼면 갈 곳도 없고 다시 새로 집을 구하기도 힘들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언니를 우리가 사는 집에 들어와 살게 해도 될까요? 마침 저도 임신해서 언니의 도움이 필요하거든요.”양채은은 설령 그가 거절이라도 할까 봐 걱정했지만 그녀가 말을 꺼내자마자 그는 바로 허락해 주었다.“네 언니면 내 누나기도 하지. 그냥 들어와서
나용민과 박은희는 쉽게 넘어갈 사람들이 아니었다. 나도현의 결혼 문제에 있어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상대의 집안이었는데 지금 나도현이 결혼하려는 여자는 특별한 배경도 없었고 그렇다고 잘사는 집 딸도 아니었다.그런 그들이 어떻게 양채은을 며느리로 받아들이겠는가.“아니. 잊지 마, 네가 해외에서 사고 쳤을 때 누가 수습해줬는지. 설마 날 배신해서 우리 부모님께 알릴 건 아니겠지?”나성원은 바로 고개를 저으며 충성심을 보여주었다.“형, 그게 무슨 말이에요.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요. 설령 우리 아버지를 배신하는 한이 있어도 형을 배신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오늘 이 일은 제가 무덤까지 가져가긴 할 거지만... 아무리 제가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평생 숨길 수는 없을 거예요. 형 부모님이 언젠가 아시게 될 거예요.”이미 나용민과 박은희는 아들에게 맞선 상대를 알아봐 주고 있었고 어떻게든 잘사는 집안의 딸과 엮어주려고 할 것이었다.하지만 그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분명 화산이 폭발하는 것처럼 화를 낼 것이고 그때는 아무도 좋은 나날을 보내지 못할 것이다.“네가 입단속만 잘하면 돼. 난 너 빼고 가족 중 아무도 안 불렀으니까. 그러니까 날 실망시키지 마.”나도현이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툭툭 치자 나성원은 등골이 서늘해졌다.“하하, 알겠어요. 형.”그는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은 후 주위를 두리번대며 구경하고 나니 더 머리가 지끈거렸다.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란 말인가.하필이면 이때 박은희가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성원아, 내가 지금 도현이 맞선 상대를 골라주고 있는데 네가 좀 봐주렴. 너희 같은 젊은이들이 어떤 아가씨를 좋아하는지 도통 모르겠구나.]곧이어 여러 타입의 여자 사진들이 도착했고 그중에는 귀염, 섹시, 성숙한 유형도 있었다.사진 속 여자들의 공통점은 오로지 하나였고 전부 잘사는 집안의 딸이라는 것이다.그는 대충 사진을 보고 나서 고개를 들어 드레스를 입은 양채은을 본 후 에둘러 답장했다.[사실 저는 형이 좋아하는
“채은아, 너 정말 진심으로 저 사람을 좋아해?”걱정스러운 눈길로 자신을 보는 동생에 양시은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어쩌면 두 사람을 떼어놓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말이다.길게 아파하는 것보다 짧게 아파하고 끝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그녀의 말에 양채은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당연하지. 언니, 설마 지금 나란 태경 씨 헤어지게 하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양시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우리 둘은 서로 사랑하고 있어. 난 정말로, 진심으로 태경 씨를 사랑해. 태경 씨는 나한테 흠잡을 데 없이 아주 잘해주거든. 언니가 남자도 믿지 않고 사랑도 믿지 않는다는 거 알지만 곧 아이의 엄마가 될 사람한테는 다르지. 난 내 아이가 아빠 없이 자라게 하고 싶지 않아.”양채은은 그녀의 손을 잡아 아기가 있는 배 위에 올렸다.“이 안에 작은 생명이 자라나고 있어. 그래서 난 아기를 위해서라도 태경 씨와 헤어지지 않을 거야. 그리고 이미 약혼식도 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태경 씨와 함께 살 거야.”이렇게까지 말하는 데 양시은이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겠는가.그녀도 사랑해본 적 있었기에 사랑에 빠진 그 기분을 당연히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나도현은...“둘이서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 남은 건 집에 가서 해. 늦었는데 이젠 집으로 가야지.”나도현이 저벅저벅 걸어온 뒤 양채은의 팔에 팔짱을 끼면서 나란히 섰다.양시은 두 사람을 따라 밖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호텔 프런트를 지나칠 때 양채은은 다가가 계산하려고 했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당연하게도 나도현의 카드였다.양시은은 자리에 멈춰서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순간 나도현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두 사람은 넓은 로비에 서 있었던지라 양채은이 고개를 돌리기만 하면 두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양시은은 놀란 고양이처럼 황급히 그의 손을 쳐냈다.“이러지 마.”“그럼 밤에 얌전히 내가 하라는 대로 해. 자꾸 거슬리게 하지 말라고. 나도 참는 데 한계가 있으니까.”나도현은 그녀를 난처하게 하
나도현은 입술을 짓이겼다. 지금 이 기분을 어떻게 형언해야 할지 몰랐다. 양시은이 돈을 위해 자신을 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양시은의 아들도 자신과 혈연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양시은은 그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니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나도현은 더는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네 할머니는 아무런 잘못도 없으시잖아. 걱정하지 마. 네 할머니는 내가 어떻게든 보살펴줄 테니까.”“고마워.”허효준은 고개를 숙이면서 감사 인사를 전했다. 나도현도 고개를 까닥거리며 인사를 받아준 뒤 허효준과 멀어졌다.그가 경찰서에서 나오자 박은희는 사특한 기운을 몰아낸다며 소금을 뿌려댔고 나도현은 가만히 있었다.박은희의 의식이 끝난 후에야 나도현은 차에 탈 수 있었다.“대체 누구한테 부탁해서 절 구해내신 거예요?”나도현은 허효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박은희는 양시은과 했던 거래를 잊지 않았다. 하지만 이 공로를 아무것도 모르는 임다혜에게 돌리고 이 사실에 대해 알린다면 더 불리해질 것이었기에 결국 사실대로 말해주었다.“양시은이 어떻게 녹음 파일을 구했는지 모르겠지만 나한테 주면서 거래를 하자더구나. 양시은 아들이 인질로 잡혀 있었어.”모든 게 허효준이 했던 말과 일치했다.나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술을 짓이겼다. 박은희는 그런 나도현의 안색을 살피며 잔소리를 해댔다.“너도 얼른 양시은을 향한 마음을 접어. 그러면 네가 한 짓에 관해 더는 묻지 않으마. 하지만 앞으론 반드시 내가 하라는 대로 해. 임다혜랑 결혼도 다음 달에 해버려.”박은희는 양시은을 여전히 인정하지 않았기에 당연히 양채은도 인정할 리가 없었다. 더구나 나도현은 예전에 쓰던 이름으로 양채은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나도현도 진심으로 대한 적 없는 여자를 더욱 며느리로 받아들일 리가 없지 않겠는가.나도현은 비록 양채은에게 진심은 아니었지만 박은희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를 순 없어 차갑게 말했다.“임다혜는 어머니가 좋아하는 사람이잖아요.”“내가
천사와 악마의 목소리는 이러했다.“하민이는 원래부터 아픈 아이였잖아. 네 언니는 애초에 널 동생으로 생각한 적도 없는데 왜 언니 입장까지 고려해야 하는 거지? 그런 사람이라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하는 거야!”악마의 목소리가 점차 그녀의 이성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천사의 목소리는 여전히 악마와 대항하고 있었다.“안 돼. 아이가 아직 어리잖아...”그러자 악마는 다시 반박했다.“양채은, 만약 네가 손 놓고만 있다가 네 아이가 사라진 뒤에야 복수할 생각이야?”양채은은 당연히 자신의 아이가 사라지길 바라지 않았다.몇 년 동안 그녀는 항상 노력했지만 양시은은 그녀가 노력하는 모습을 본 적 없었고 심지어 약혼식 그날에도 나도현과 뒹굴고 있었다.분명 나도현은 그녀의 약혼자이고 그녀의 배 속에 있는 아이의 아빠인데도 말이다. 오로지 그녀의 배 속에 있는 아이만 나도현에게 아빠라고 불러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양채은의 눈빛이 점점 싸늘해졌다....한편 나도현은 녹음 파일 덕분에 검찰과 경찰은 허효준을 소환해 조사하기 시작했고 허효준이 다른 누군가와 나도현을 모함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나도현을 석방했다.나도현이 나오자 허효준이 들어가게 되어 두 사람의 상황은 정반대가 되었다.원래는 그저 스쳐 지나가게 되겠지만 나도현은 허효준 앞에 서 있었다.그는 처음부터 자신이 누군가에게 모함당했을 거라곤 생각도 하지 않았다. 여하간에 변호사가 된 순간부터 그의 손으로 들어온 사건은 전부 잘 해결되었으니 말이다. 더구나 그에겐 나씨 가문이 있었으니 아무도 그를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그런데 허효준이 누군가와 손을 잡고 자신을 모함했다고 하니 나도현은 배신감에 가슴이 아팠다.“허효준, 난 널 제일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어. 난 너도 내 소꿉친구들이랑 같은 취급을 하고 있었다고.”여이현과 최주하, 지석훈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다. 허효준은 그의 대학교 시절 친구였지만 그는 변호사가 되었고 허효준은 판사가 되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다시 친해져 나도
박은희는 눈물을 흘리는 양시은의 모습에도 마음이 약해지지 않았고 어떻게든 양시은이 가지고 있는 증거로 나도현을 구해낼 생각만 했다.게다가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모습에 박은희는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왜 마침 시은 씨가 그 증거를 가지고 있는 거지?”양시은은 손을 들며 맹세했다.“아르바이트할 때 효준 씨가 우연히 제가 일하는 가게로 왔고 마침 제가 서빙하고 있어서 녹음한 거예요. 사모님, 제가 왜 제 친자식으로 장난을 치겠어요?”양시은은 한 치의 거짓 없는 얼굴로, 토끼 같은 동그란 눈빛으로 말했다.박은희도 그녀와 같은 여자고 한 아이의 엄마로서 당연히 양시은의 지금 감정을 이해하고 있었다.하지만 만약 양시은의 아이가 죽게 된다면 양시은은 패닉에 빠질 것이다. 그런 상태의 양시은은 미쳐버리거나 죽어버리게 될 가능성이 아주 컸고 나도현도 양시은을 점차 잊으리라 생각했다.박은희의 머릿속에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핸드폰을 나한테 넘겨. 네 아들은 내가 어떻게든 방법을 생각해내 볼 테니까.”양시은은 핸드폰을 박은희에게 넘기려던 순간 직감했다.“아니요. 사모님께서 그렇게 흔쾌히 제 요구를 들어주실 리가 없죠. 전 사모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요. 제가 죽기를 바라고 있고 더는 나도현 앞에서 나타나길 바라지 않는 거잖아요.”박은희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순간 양시은은 자신의 추측이 정확했음을 눈치챘다.그녀는 이 틈을 타 제안했다.“계약서라도 써주세요.”박은희는 인맥을 동원해서라도 그녀의 아들을 구해낼 방법이 있었지만 나도현은 그저 잠시 누명을 썼을 뿐이다. 박은희가 하민이를 구해내는 걸 본 후에야 그녀는 나도현을 위해 이 녹음 파일을 박은희에게 건넬 생각이다.생각보다 눈치가 빠른 양시은에 박은희도 더는 방법이 없어 그녀의 요구대로 계약서를 쓰기로 했다.양시은은 그제야 녹음 파일을 그녀에게 전송했고 박은희는 하는 수 없이 사람을 보내 하민이를 구해야 했다.마스크남은 지금 이런 시기에 누군가 자신을 찾아와 깽판을 벌일 줄은 몰랐
“저한테 뭘 해줄 필요는 없어요. 그냥 우리 가족만 건들지 않으면 돼요. 그게 제 유일한 요구예요.”마스크남은 나직하게 웃었다.“이 세상에서 돈과 권력을 마다하는 사람이 존재하다니. 참 신기하네요.”허효준은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그냥 내 요구만 들어줘요. 앞으로 다시는 날 찾아오지도 말고요. 그 어떠한 것도 들어주지 않을 거니까요.”그러나 마스크남은 이렇듯 손쉽게 허효준을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그다음 순간 그는 허효준에게 리스트를 건넸다.“이 위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든 풀어줘요. 안 그러면 그쪽이 엘리트 변호사를 모함했다는 사실을 까발릴 거니까요.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시민들이, 그쪽 직장에서 그쪽을 가만둘 것 같아요?”여기까지 녹음한 양시은은 아주 만족했다. 그러나 나가려던 순간 허효준이 그녀를 알아보았다.“시은 씨가 여긴 왜 있는 거예요?”마스크남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해버렸다.양시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잽싸게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녀는 구체적인 상황을 몰랐지만 허효준이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목격하고 나도현이 모함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그들이 그녀를 가만둘 리가 없지 않겠는가.허효준은 뒤쫓아 가고 싶었지만 마스크남이 그를 불러세웠다. 그는 태연하게 차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어차피 도망쳐봤자 손바닥 안이라는 걸 모르나요?”허효준은 마스크남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마스크남의 눈빛이 더 어둡게 가라앉았다.“양시은에게 아들이 있지 않나요?”그 말에 허효준은 바로 깨닫게 되었다.마스크남은 핸드폰을 꺼내더니 누군가에게 연락했다.“병원 쪽으로 가서 양시은의 아들을 인질로 잡고 있어.”허효준은 다른 사람이 이 일에 휘말리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지만 이미 이 지경이 되었으니 양시은이 다른 곳에 가서 말할 수 없게 막아야 했다.양시은은 녹음 파일을 저장한 후 바로 박은희를 찾아가려고 했지만 마스크남이 한 발 더 빨랐다.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하민이의 울음소리에 양시은은 더는 나도현을 도와줄 수
말을 마친 양채은은 바로 자리를 떠나버렸고 양시은은 그런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양채은의 마음이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 그녀였어도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그녀는 바로 박은희를 찾아가려고 했고 택시를 잡은 후 나씨 가문 본가로 향했다.이곳을 찾아온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박은희의 초대로 와본 적 있었다.박은희는 그녀에게 호화롭기 그지없는 집안 내부를 보여준 뒤 8억을 주면서 나도현의 곁에서 떨어지라고 말했다. 그때 그녀는 속으로 맹세했다. 다시 이곳으로 발을 들이지 않으리라.그런데 오늘 그녀는 양채은을 위해 다시 발을 들이게 되었고 입구 경비원이 그녀를 막아섰다.“누구시죠?”양시은은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전 양시은이라고 해요. 제 이름을 사모님께 말씀드리면 들어오라고 하실 거예요.”그녀는 양채은을 붙잡지 않은 이유가 양채은에게 받아들일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양채은을 혼자 오랫동안 둘 수는 없었던지라 서둘러야 했다.입구 경비원은 너무도 침착한 그녀의 모습을 보곤 이내 들어가 보고를 올리기로 했다.그녀의 이름을 들은 박은희는 안색이 변했고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는 대신 직접 나와서 양시은을 만났다.박은희를 본 순간 양시은은 모든 걸 깨닫게 되었다. 특히 박은희의 싸늘한 눈빛만 봐도 박은희는 그녀가 이 집안에 발을 들일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 직접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박은희는 비꼬아 말했다.“왜, 돈이 필요한 거니?”양시은은 입술을 짓이기며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아니요. 오늘 이렇게 찾아온 건 사모님이 제 가족을 건드려서예요. 전에 이미 약속했잖아요. 나도현의 곁에서 떨어져 영원히 눈앞에 나타나지 않기로요. 전 그 약속을 지켰어요.”그녀를 찾아온 사람은 나도현이었다.“내가 네 가족을 건드렸다고? 도현이가 왜 네 동생한테 접근한 건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알고 있는 거 아니니? 네 동생한테는 난 손도 대지 않았다.”박은희의 표정을 보니 거짓말하고 있는 건 같지 않았다. 박은희가 아니라면.
비록 차는 느리게 달리고 있었지만 갑자기 밀려 그대로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고 너무도 아팠다. 하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양채은은 검은색 차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곤 양시은에게 전화를 걸었다.“언니, 지금 뭐 해? 나 궁금한 게 있어서 물어보려고. 직접 얼굴 보고 물어보고 싶은데...”양채은의 목소리만 들어도 양시은은 그녀가 분명 무언가를 눈치챘다는 것을 알아챘다. 양채은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 불안해할 양채은이 걱정되어 양시은도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고 그렇게 양시은은 양채은을 찾아가기로 했다.양채은은 길가에 앉아 표정이 잔뜩 어두워진 채 공허한 눈빛으로 길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양시은은 그런 그녀를 발견하고 얼른 뛰어갔다.“채은아, 무슨 일이야?”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양채은은 고개를 들며 잔뜩 비웃음이 담긴 얼굴로 보았다.“언니는 정말로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긴 지 몰라서 묻는 거야? 사랑하는 언니야?”양채은이 의미심장하게 내뱉은 말과 조롱 섞인 미소, 그리고 싸늘해진 눈빛에 양시은은 그녀가 모든 걸 알아버렸음을 직감했지만 이렇듯 빨리 알아버리게 될 줄은 몰랐다.양시은은 목이 너무도 아팠고 무언가 딱딱한 것이 막혀버린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채은아, 나도 일부러 숨기려고 한 건 아니었어. 그때 나도현과 헤어진 건 나도현 어머니에게서 돈을 받아서였어.”양시은은 고개를 푹 숙인 후 양채은의 곁에 앉았다. 하지만 양채은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딴 과거는 신경 쓰지 않아. 내가 지금 받아들일 수 없는 건 언니가 날 속이고 있었다는 거야. 대체 왜 말을 하지 않은 건데? 내가 언니한테 그렇게 나쁜 사람이었어? 이용당하고 있다는 걸 알려주기 싫을 만큼?! 아니면 나한테 진실을 알려주고 나면 내가 언니한테서 나도현을 빼앗아갈까 봐 걱정된 거였어?!”양채은은 역시 모든 걸 다 알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렇듯 흥분할 리가 없었다.양시은은 비록 마음이 괴롭기는 했지만 양채은이 지금 알게 된 것이 나중에 알게 된
그 순간 양채은은 지금 이 기분을 어떻게 형언해야 할지 몰랐다.강태경은 그녀에게 아주 좋은 사람이었고 그녀의 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지금 그녀에게 전부 가짜라고 하지 않는가.진짜 이름은 나도현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었고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몰랐다.그녀는 어디 내놓을만한 집안 배경을 가진 것도 아니고 대단한 위인도 아니었을뿐더러 일을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인맥도 없었다.경찰은 넋 나간 그녀를 보며 물었다.“혹시 신체 포기 각서 같은 것에 사인하거나... 은행 카드를 빌려주거나 하지 않았어요?”지금 이 시대에 보이스 피싱이 난무하고 있었기에 물어보는 것이었다.양채은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그냥 저한테 용돈 준 기록뿐이에요. 전 임산부라 뭘 가져갈 만한 것도 없거든요.”그럼 더욱 이상했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고 그저 이름만 가짜로 알려주었다니.경찰은 조사한 내용을 더 자세히 양채은에게 알려주었다.“나도현, 경성의 엘리트 변호사고 아마도 나도현 씨의 악취미에 이용당한 것 같네요.”돈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악취미가 있기 마련이었다. 양채은은 원래부터 충격을 받은 상태였지만 경찰의 말을 들으니 더 괴로웠다.그러니까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도현의 손에 놀아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나도현이 자신에게 잘해주었던 기억이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더욱 괴로워졌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괴로웠던 것은 경찰서로 나오자마자 누군가 빠르게 그녀를 검은색 차로 납치한 것이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경계하며 덜덜 떨리는 몸으로 물었다.“당신들은 누구죠? 대체 뭘 원하는 거죠!”검은색 차는 창문마저 꼭꼭 닫혀 있었다. 차 안에는 운전자와 조수석, 그리고 그녀의 옆에 앉은 사람, 총 세 명의 남자가 있었고 전부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그녀의 옆에 앉은 남자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나도현을 찾고 있는 거 아니었나? 우리가 도와주지.”양채은은 더 겁에 질렸다.“좋은 사람이라면 왜 전부 얼굴을 가리고 있는 거죠?”“네가
양채은의 반응은 너무도 격했고 무슨 말을 하든 믿지 않으려 했다.“저랑 태경 씨는 알고 지낸 지 오래된 사이예요. 태경 씨가 저한테 얼마나 잘해주는데요. 일도 열심히 하고 능력도 뛰어난 변호사인데 어떻게 그런 짓을 할 리가 있겠어요? 당장 다시 조사해보세요. 분명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걸 거예요!”국장은 그녀가 말 마치기를 기다린 후 물었다.“양채은 씨, 방금 태경 씨라고 호칭하던데 맞습니까?”“네, 맞아요. 제 약혼자 이름은 강태경이에요. 곧 결혼할 사이인데 그 호칭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양채은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 눈앞에 있는 경찰이 쓸데없는 것에 관심이 참 많다고 생각했다. 곧 결혼할 사이인 예비부부의 호칭까지 신경 쓰다니 말이다.국장은 고개를 저었다.“이건 두 사람이 곧 결혼할 사이이든 아니든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이 이름은 양채은 씨가 말해준 약혼자의 신분 정보랑 일치하지 않습니다. 혹시 알고 있습니까?”“그게 무슨 소리세요. 저한테 그런 농담은 통하지 않아요.”양채은은 멍한 표정을 지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덜덜 떨리는 몸으로 국장을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보았다.‘그럴 리가 없잖아! 태경 씨 이름은 강태경이라고. 강태경이 아니면 대체 뭐라는 거야? 태경 씨가 날 속일 리가 없다고!'“신분 정보를 알고 있지만 상대의 이름이 뭔지를 모르는 걸 보니 양채은 씨도 이 사건과 연관이 있다고 의심이 되는군요.”국장은 그녀를 데리고 취조실로 들어갔다. 양채은은 여전히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그 사람이 강태경이 아니면 대체 뭔데요?”“나도현.”이 이름은 양채은에게 아주 낯선 이름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한 순간이 아주 많았지만 살면서 단 한 번도 이 이름을 들어본 적 없었다.“신분 정보를 알고 있다는 건 신분증을 보았다는 소리인데 본인이 알고 있는 이름과 신분증에 있는 이름이 다르다는 걸 모르셨습니까? 양채은 씨,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거죠?”국장은 계속 말을 이었다.양채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약혼식이 있던
여이현에게도 딸이 있었고 매일 만날 수 있지만 온지유와 법로는 오랜 시간 동안 떨어져 살지 않았는가.게다가 법로는 지금 시한부였고 살 수 있는 시간이 5년뿐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이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고 서로에게 좋은 추억만 남겨야 했다.권다솔도 이해하고 있었던지라 여이현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곤 배진호의 팔짱을 꼈다. 그리고 함께 차를 주차해둔 곳으로 갔다.“사실 요즘 시간의 여유가 생겼잖아. 그래서 너랑 함께 다른 도시로 가서 여행하려고 했는데 지금 보니 그 계획을 뒤로 미뤄야겠네.”배진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그의 눈빛은 한없이 다정했다. 그녀가 곁에 있으니 너무도 좋았기 때문이다.권다솔은 웃으며 말했다.“요 며칠은 시간이 없겠지만 다음 주에 가면 되잖아. 다다음 주도 괜찮고. 어쨌든 우리에겐 이젠 시간은 많아.”두 사람은 아직 젊었으니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한편 양채은 쪽 상황.양시은이 일하러 나가니 집 안에는 그녀 혼자 남게 되었다.할 일이 없었던 그녀는 집안을 구석구석 청소하려고 했지만 별장이 너무 컸던지라 힘도 많이 들어가 쉬었다가 할 수밖에 없었다.청소를 마치고 나니 어느덧 저녁이 되었다.양채은은 시간을 보곤 나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도현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만약 오늘 집으로 돌아올 수 없대도 그저 간단한 대화 몇 마디면 충분했다.신호 연결음이 한참이나 들려왔지만 받지 않았다. 그녀는 문자를 보낸 뒤 얌전히 기다렸지만 여전히 아무런 답장도 오지 않아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그녀가 알고 있는 강태경은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시간을 내서 그녀의 문자에 답장을 해주거나 전화를 해주었다. 그런데 오늘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전화든 문자든 한 통도 오지 않았고 잠수를 탄 사람처럼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한참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그의 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사무소 전화번호도 나도현이 그녀에게 알려준 것이었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걸어본 적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