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용민과 박은희는 쉽게 넘어갈 사람들이 아니었다. 나도현의 결혼 문제에 있어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상대의 집안이었는데 지금 나도현이 결혼하려는 여자는 특별한 배경도 없었고 그렇다고 잘사는 집 딸도 아니었다.그런 그들이 어떻게 양채은을 며느리로 받아들이겠는가.“아니. 잊지 마, 네가 해외에서 사고 쳤을 때 누가 수습해줬는지. 설마 날 배신해서 우리 부모님께 알릴 건 아니겠지?”나성원은 바로 고개를 저으며 충성심을 보여주었다.“형, 그게 무슨 말이에요.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요. 설령 우리 아버지를 배신하는 한이 있어도 형을 배신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오늘 이 일은 제가 무덤까지 가져가긴 할 거지만... 아무리 제가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평생 숨길 수는 없을 거예요. 형 부모님이 언젠가 아시게 될 거예요.”이미 나용민과 박은희는 아들에게 맞선 상대를 알아봐 주고 있었고 어떻게든 잘사는 집안의 딸과 엮어주려고 할 것이었다.하지만 그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분명 화산이 폭발하는 것처럼 화를 낼 것이고 그때는 아무도 좋은 나날을 보내지 못할 것이다.“네가 입단속만 잘하면 돼. 난 너 빼고 가족 중 아무도 안 불렀으니까. 그러니까 날 실망시키지 마.”나도현이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툭툭 치자 나성원은 등골이 서늘해졌다.“하하, 알겠어요. 형.”그는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은 후 주위를 두리번대며 구경하고 나니 더 머리가 지끈거렸다.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란 말인가.하필이면 이때 박은희가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성원아, 내가 지금 도현이 맞선 상대를 골라주고 있는데 네가 좀 봐주렴. 너희 같은 젊은이들이 어떤 아가씨를 좋아하는지 도통 모르겠구나.]곧이어 여러 타입의 여자 사진들이 도착했고 그중에는 귀염, 섹시, 성숙한 유형도 있었다.사진 속 여자들의 공통점은 오로지 하나였고 전부 잘사는 집안의 딸이라는 것이다.그는 대충 사진을 보고 나서 고개를 들어 드레스를 입은 양채은을 본 후 에둘러 답장했다.[사실 저는 형이 좋아하는
“채은아, 너 정말 진심으로 저 사람을 좋아해?”걱정스러운 눈길로 자신을 보는 동생에 양시은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어쩌면 두 사람을 떼어놓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말이다.길게 아파하는 것보다 짧게 아파하고 끝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그녀의 말에 양채은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당연하지. 언니, 설마 지금 나란 태경 씨 헤어지게 하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양시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우리 둘은 서로 사랑하고 있어. 난 정말로, 진심으로 태경 씨를 사랑해. 태경 씨는 나한테 흠잡을 데 없이 아주 잘해주거든. 언니가 남자도 믿지 않고 사랑도 믿지 않는다는 거 알지만 곧 아이의 엄마가 될 사람한테는 다르지. 난 내 아이가 아빠 없이 자라게 하고 싶지 않아.”양채은은 그녀의 손을 잡아 아기가 있는 배 위에 올렸다.“이 안에 작은 생명이 자라나고 있어. 그래서 난 아기를 위해서라도 태경 씨와 헤어지지 않을 거야. 그리고 이미 약혼식도 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태경 씨와 함께 살 거야.”이렇게까지 말하는 데 양시은이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겠는가.그녀도 사랑해본 적 있었기에 사랑에 빠진 그 기분을 당연히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나도현은...“둘이서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 남은 건 집에 가서 해. 늦었는데 이젠 집으로 가야지.”나도현이 저벅저벅 걸어온 뒤 양채은의 팔에 팔짱을 끼면서 나란히 섰다.양시은 두 사람을 따라 밖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호텔 프런트를 지나칠 때 양채은은 다가가 계산하려고 했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당연하게도 나도현의 카드였다.양시은은 자리에 멈춰서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순간 나도현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두 사람은 넓은 로비에 서 있었던지라 양채은이 고개를 돌리기만 하면 두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양시은은 놀란 고양이처럼 황급히 그의 손을 쳐냈다.“이러지 마.”“그럼 밤에 얌전히 내가 하라는 대로 해. 자꾸 거슬리게 하지 말라고. 나도 참는 데 한계가 있으니까.”나도현은 그녀를 난처하게 하
하민이 수술비가 필요하다면 양채은도 똑같이 산전 검사할 돈이 필요했다. 그녀가 돈을 가져가면 양채은은 어떡하란 말인가?“안 될 게 뭐가 있어! 하민이 살리는 게 중요하지. 남도 아니고 왜 나랑 이런 걸 따지고 그래.”양채은은 추호도 물러서지 않고 은행카드를 억지로 건넸다. 양시은은 계속해서 거절하려고 했는데 양채은이 기분 상한 티를 냈다.“언니, 대체 뭘 걱정하고 있는 거야? 우리 바로 쓸 수 있는 돈이 적은 건 사실이야. 근데 여기 별장도 있듯이 병원에 못 갈 정도로 가난해질 일은 없어.”양시은은 걱정되는 것이 있어도 어떻게 말하지 못했다. 나도현에게 별장 하나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 정도 돈도 쉽게 꺼낼 수 있었다.사람과 사람 사이의 차이는 이렇듯 컸다. 한 사람은 하늘에, 한 사람은 땅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둘 사이의 간격이 너무나도 컸다.만약 나도현이 원한다면 하민의 치료비는 얼마든지 부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태도를 봤을 때 도와줄 것 같지 않았다.하민이 일을 말해 봤자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며 비아냥대기만 할 것 같았다.“아무튼 이 돈을 일단 받아. 내가 내일 보석 좀 팔든지 할 테니까. 있어봐, 보여줄게.”양채은은 침실에 달려가서 주얼리를 담은 박스를 가져왔다. 그 안에는 금도 있고 다이아몬드도 있었다. 디자인은 전부 흔히 보이는 것들이었다.양채은의 취향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녀가 황궁에서 쓸법한 화려한 주얼리를 좋아한다는 건 양시은도 알았다.“전에 일부러 금값이 좋을 때 사러 갔었어. 이름값으로 돈 낭비하지 않게 유명한 브랜드도 아니고. 어차피 순금이니까 브랜드든 아니든 파는 값은 같을 거 아니야.”양채은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돈 아낄 줄 아는 자신이 내심 뿌듯한 모양이었다.반대로 양시은은 잠깐 멈칫하더니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는 동생을 꼭 끌어안은 채 눈물을 펑펑 흘려댔다.“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줘?”‘난 아무것도 못 해주는데...’자신은 양채은과 같은 동생이 있을
“언니, 여기 잠깐 앉아 있어. 내가 가서 문 열고 올게.”양채은은 종종걸음으로 달려갔다.온 사람은 역시 나도현이었는데 손에 쇼핑백을 잔뜩 들고 있었다.“태경 씨, 뭘 이렇게 많이 챙겨왔어요? 그냥 몸만 오면 되는데... 얼른 들어와 앉아요. 제가 차 한 잔 따라줄게요.”양채은은 서둘러 그의 손에서 쇼핑백을 받았다.나도현은 슬리퍼로 갈아 신고 거실 안으로 들어왔다.그는 양시은 바로 옆에 앉아 그녀의 허벅지 위에 손을 올리더니 부엌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양채은을 바라보며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채은아, 임신했으면 쉬어야지. 그런 건 네가 안 해도 돼. 내가 하면 되니까.”“제 몸 상태는 제가 알아요. 지금 입덧도 없으니까 괜찮아요. 오히려 태경 씨가 하루 종일 고생했는데 저까지 챙기게 할 수는 없죠.”양채은은 손을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였다.나쁜 나도현을 챙겨주고 싶은 것도 있고, 언니인 양시은을 돕고 싶은 것도 있었다.일반 남자라면 양시은과 같은 언니가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겁먹고 도망갔을 것이다. 경제적인 지원은 상상도 못 한다.나도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길은 점점 대담해져서 양시은의 치마를 걷어 올리려 했다.양시은은 겁에 질려 두 다리를 바짝 모았고 눈가가 또다시 촉촉해졌다.“하지 마...”“뭘 하지 말라는 건데? 크게 말해 봐. 나처럼.”나도현은 한 손으로 양시은의 손을 붙잡고, 다른 손을 그녀의 등 뒤로 돌렸다. 그가 검지와 엄지를 살짝 움직이자 속박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너무 무서워서 미칠 것 같았다.“그만...”“날 두고 다른 남자랑 있을 때도 이렇게 부끄러워했어?”나도현은 이를 악물었다.반면 양시은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에게 남자는 나도현 한 명뿐이었다. 그를 제외하면 손조차 잡아본 적 없었고 이런 친밀한 행동은 더더욱 없었다.지금은 자세히 생각할 틈도 없이 그에게서 벗어날 궁리만 했다. 하지만 그녀가 옆으로 조금만 움직여도
“아니야.”양시은의 두 손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떨렸다.나도현은 그녀가 돈을 받아서 막 써버렸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사실 100억 중 양시은 손에 떨어진 건 단 한 푼도 없었다.아픈 아이 병원비 역시 전부 그녀가 직접 벌어서 조금씩 마련한 거였다.물론 나도현은 이 말을 믿을 리가 없었다.“됐고, 내 앞에서 억지 부리지 마. 난 다른 남자랑 달라. 네가 아무 말이나 늘어놓는다고 넘어가지 않는다고. 내 직업 잊지 마.”변호사로 일해 온 그는 온갖 사건을 다뤘다. 어떤 의뢰인은 변호사를 앞에 두고도 끝까지 진실을 말하지 않기도 한다.그래서 그는 거짓말을 가려내는 능력을 오래전에 익혔다.하지만 정작 본인도 알아채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의뢰인을 상대할 때는 이성적으로 대응하면서도, 양시은을 대할 때만큼은 감정이 먼저 튀어나온다는 사실 말이다.감정이 치고 올라오면 이성은 자연스레 뒷전으로 밀려나기 마련이었다.“어차피 믿지도 않을 거면서, 왜 물어? 내가 뭘 어떻게 말해도 너한테는 전부 거짓말로밖에 안 들릴 텐데, 말해 봐야 소용 있겠어?”양시은은 완전히 벼랑 끝에 몰린 기분이었다.그녀는 몇 년 동안 줄곧 힘든 삶을 살아왔다. 아이가 아프면 엄마가 가장 괴로운 법이다. 거기에 경제적 압박까지 겹쳤다.이제는 양채은까지 챙겨야 하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나도현은 그녀를 몰아붙이기만 했다. 순간 양시은은 베란다 난간에서 그냥 뛰어내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그러나 곧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는 아이가 떠올랐다.‘내가 죽으면 누가 그 아이를 진심으로 보살펴 줄까?’그 생각에 바로 마음을 접었다.“양시은, 지금 나한테 말대답하는 거야?”나도현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그는 양시은을 난간 쪽으로 밀치더니 손을 뻗어 그녀의 치마를 걷어올리려고 했다.“말하고 싶지 않다면 하지 마. 어차피 네가 떠드는 건 하나도 들을 가치가 없으니까.”“안 돼... 이러지 마!”양시은이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다음 순간, 짝 하는 소리가 또렷하게 울렸다.나
나도현은 다이아몬드만 보면 양시은이 떠올랐다. 두 사람이 함께했던 사랑, 그리고 어리석기 짝이 없던 과거의 자신까지.“고마워!”양채은은 기쁨에 겨워 외쳤다. 하지만 나도현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는 양시은의 귀에 바짝 다가가 그녀의 마음을 일부러 후벼 파듯 말했다.“네 동생이랑 결혼 예물 사러 갔을 때, 금반지는 금값을 따지고 다이아몬드 반지는 중고로 고르더라. 그땐 왜 이렇게 가성비를 따지나 했는데, 결국 그 돈을 너한테 주려고 그랬던 거지?”‘중고라니...’양시은의 눈물은 더욱 거세게 흐르기 시작했다.지금 이 순간 그녀는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채은아... 넌 왜 이렇게 착하고, 또 멍청할 정도로 헌신적이야...’나도현은 그녀가 몸을 떨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럴수록 그의 말은 더욱 양채은에게서 벗어나지 않았다.“근데 말이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평소에 넌 어떻게 네 동생을 세뇌하는 거야? 같은 집안인데 성격이 완전 정반대잖아. 때로는 채은이가 너무 순진해서 나도 함부로 못 대하겠어.”실제로 그는 양채은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친밀한 스킨십도 전혀 없었다.그런데 양시은은 이를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녀 머릿속에는 나도현이 말한 것보다 훨씬 끔찍한 장면만 그려지고 있었다.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나도현은 만족스럽다는 듯 그녀를 놓아주었다. 옷매무새를 고치던 그는 선언하듯 말했다.“채은이가 네 방을 우리 바로 옆방에 잡아 놨어. 오늘 밤에 깨끗이 씻고 기다려. 내가 갈 거니까.”양시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아무리 방음 좋은 저택이라 해도 벽 하나 떨어진 곳이 얼마나 막아줄까.양채은은 잠귀가 밝아서 밖에 고양이가 울어도 깰 정도다. 만약 들키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나도현, 넌 진짜 미쳤어.”그녀는 처참한 몰골로 이를 악물고 그를 저주하듯 내뱉었다.나도현은 잠시 멈칫했지만 특별한 말 없이 그대로 사라졌다.역시 미친 게 맞았다.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벌써 양시은을 잊고 새출발을
“채은아, 정말 고마워.”양시은은 억지웃음을 지었다.그녀는 몸을 곧추세우고 양채은을 따라 계단을 올랐다. 막 발을 떼는 순간 허리에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아까 나도현이 그녀를 너무 거칠게 다뤘다. 그는 자신의 분노를 푸는 데만 급급해서 그녀가 어떻게 느낄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양채은은 바로 눈치채고 먼저 그녀 팔을 부축했다.“언니, 또 허리 디스크가 도진 거야?”“응... 맞아.”양시은은 애매하게 넘겼다. 그러자 양채은은 더 안쓰럽다는 듯 말했다.“언니 몇 년간 죽어라 일하고 알바 뛰느라 허리디스크가 심해진 거잖아. 예전엔 어쩔 수 없었다 쳐도 이제는 나랑 강태 씨가 있어. 혼자 다 짊어지려고 하지 마.”양시은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양채은은 강태경이 나타나면 그녀가 한결 편해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의 존재는 그녀에게 더 큰 짐이 될 뿐이었다.방에 들어선 뒤 양채은은 옷장을 열어 실크 이불 세트를 꺼냈다.“이것도 태경 씨가 언니 주려고 준비한 거야. 말주변이 없어도 세심한 사람이거든.”‘나도현이 말주변이 없다고?’이건 양시은이 살아오면서 들어 본 말 중 제일 우스운 이야기였다.법정에서는 누구도 그의 기세를 이기기 어렵고, 한창 사랑에 빠졌을 땐 몇 마디로 그녀를 뒤흔들어 놓았다. 오늘 약혼식 때도 그는 단 몇 마디로 그녀를 간담 서늘하게 만들었다.이런 남자를 어떻게“말주변이 없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아마도 그는 그저 양채은에게는 대꾸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렇다면 둘 사이에 대화가 아예 없을 텐데 애정은 대체 어디서 생겼을까?양채은이 그에게 완전히 속은 게 분명했다.양채은은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걱정을 알아채지 못했다. 이불을 펴면서 연애담을 들려주듯 말했다.“산부인과랑 담당 의사 정하는 것까지 전부 태경 씨가 알아봐 줬어. 가끔 나도 전생에 무슨 좋은 일을 했길래 이런 남자를 만났지 싶다니까.”“양채은.”더는 듣고 있을 수 없었던 양시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너 정말 그
나도현이 오늘 밤 온다고 했으니 분명히 올 거다.결국 밖에서 노크가 울렸다.양시은은 잠깐 망설였다. 문은 이미 안에서 잠근 상태다.지금 나가서 문을 열지 않고 침대에 누워 자는 척한다면 오늘 밤만큼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내일 나도현을 만났을 때 어떻게 될지는 내일 생각하면 되었다.그 순간 휴대폰 벨소리가 울려 조용한 방 안을 파고들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노크도 점점 거세졌다.양시은은 폰을 집어 확인했다. 발신인은 나도현이었다.[안 자는 거 알아. 얌전히 나와서 문 열어. 아니면 더 크게 노크할 거야. 차라리 양채은도 깨워서 구경 좀 시켜줄까?]언니가 자기 남편과 함께 있는 장면을 동생에게 일부러 보여주겠다니, 나도현은 대체 무슨 심보인 건가 싶었다. 그는 너무나도 잔혹했다.양시은은 허둥지둥 문 앞으로 달려갔고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애원했다.“그러지 마, 제발...”“자는 거 아니었어?”나도현은 지금 당장 들어갈 생각도 없는 듯 문간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양시은의 목덜미를 움켜쥐듯 집었다.“이왕이면 복도에서 해볼까, 어때?”거의 억지로 끌어내듯 양시은을 옆방 문 앞까지 몰고 가더니 문 쪽으로 밀쳐버렸다.양시은은 몸이 완전히 굳어 버렸다. 벽 하나 너머 방 안에는 코 고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평온히 잠들어 있는 양채은이 있었다. 그 밖에서 그녀는 동생의 남편과 이런 상황을 겪고 있다.차라리 칼로 한 번에 찌르고 끝내는 게 더 나을 만큼 비참했다.“우리 방으로 돌아가자. 여기서는 안 돼.”양시은은 물러설 대로 물러나 마지막 자존심조차 포기하고 부탁했다.나도현은 그녀에게 바싹 붙어서 물었다.“그래야 할 이유가 뭐지?”그는 그녀의 자존심을 짓밟고 마음속 분노를 터뜨리고 싶어 이러는 것이었다.그 의도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양시은은 울먹이며 말했다.“오늘 약혼식에서 말했던 거... 나 다 맞춰 줄게.”“정확히 뭘 말했는데?”서로 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도현은 모르는 척했다.“똑바로 말해 봐. 우리 이렇
양시은은 고통 속에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전에 나도현을 위해 칼을 대신 막아준 상처는 아직 다 낫지 않았고 그 상처 위에 임다혜가 보낸 약까지 보내져 그녀의 몸은 점점 뜨거워졌다. 지금 양시은의 체온은 39도를 넘어서 거의 40도에 가까운 상태였다. 의식은 흐릿하고 이마에서 땀이 비오듯 쏟아져 내린다. 그때 음식을 가지고 온 가사도우미가 양시은이 침대에 누워서 꼼짝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는 갑자기 입을 벌려 놀랐다. 마치 그녀가 이미 숨을 거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급히 나도현에게 전했다. “도련님, 양시은 씨가 죽은 것 같아요...” “뭐라고?” 나도현은 그 말을 듣고 벌떡 일어섰다. 그의 눈빛은 찰나에 이른 속도로 깊어진 흑단처럼 좁아지며 가사도우미를 향해 날카롭게 쏘아봤다.도우미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움찔거렸다. 도우닌 나도현이 이렇게 급해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나도현의 얼굴은 흰 종이처럼 창백하고 그의 눈에서는 한치의 흔들림도 볼 수 없었다. 그의 몸은 긴장으로 굳어있었고 그는 바로 서재를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몇 걸음에 방에 도달하고, 그는 문을 급하게 열었다.침대에 누운 양시은을 확인한 그는 잠깐 멈칫했다. 양시은은 살고 있는 듯 숨을 헐떡이며 자고 있었다. 그러나 땀에 젖은 얼굴과 급한 숨소리가 그에게 명확히 문제의 심각성을 알려주었다.그는 양시은의 붉어진 뺨을 보며 이마를 만지자 그녀의 열기가 손끝을 뜨겁게 만들었다. 나도현은 급히 핸드폰을 꺼내 지석훈에게 전화를 걸었다.“지석훈, 지금 내 별장에 바로 와. 열 나는 사람이 있어.”지석훈은 피곤한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너희 개인 의사야 뭐야. 열 정도로 괜찮은 거면 약 있잖아.”온지유가 아프면 여이현이 그를 찾았고 권다솔이 아프면 배진호가 그를 찾았다. “나도현의 여자가 아프다니... 아니. 잠깐만. 여자?”지석훈의 눈이 반짝였다. “나도현, 거기 아픈 사람이 여자라고? 어디서 생긴 여자야? 설마 그 전 여친이냐?”“그냥 빨리 와. 약도
여자는 일부러 말을 모호하게 꺼냈다. 그녀를 보낸 사람은 임다혜였고 여기에 더해 박은희가 몰래 도와주면서 이 두 사람이 협력하여 별장에 하녀 한 명을 배치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양시은에게는 그 의도가 확실히 잘못 전달됐다. 여기가 바로 나도현의 집이므로 이 여자는 분명히 나도현이 불러낸 사람일 것이다. 이 보약을 마시지 않으면 나도현이 분명히 그녀를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마음속에서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약은 여기 두세요. 목마를 때 마실게여.”“양시은 씨, 저는 꼭 당신이 이 약을 마시는 걸 봐야만 갈수 있습니다. 지금 마시지 않으면 저는 여기서 기다리면 됩니다.” 여자는 그 말을 하고 나서 트레이를 테이블 위에 놓고 의자 하나를 끌어당겨 바로 양시은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양시은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마치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만약 그녀 앞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이렇게 대담하게 나올 수 없었겠지만 이 상대는 양시은이었다. 그리고 박은희는 반드시 양시은을 집에서 쫓아내라고 말한 바 있었다. 따라서 양시은이 별로 두렵지 않았다. “약을 언제 마시면 난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예요. 같이 기다려 보시든지.”양시은은 지금 아이를 찾는 일이 급해서 이 여자와 시간을 보내며 신경 쓰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알겠어요. 마셨으니 이제 가세요.” 그러자 양시은은 그 말과 함께 보약을 한 모금 두 모금, 금방 다 마셨고 그릇을 여자의 쪽으로 돌려보냈다. “다 마셨어요. 이제 가셔도 됩니다.”“물론이죠. 양시은 씨, 푹 쉬세요.” 여자는 목적을 달성하고는 그릇을 들고 떠났다. 여자가 별장을 나서며 길가에 서 있던 차로 올라타 이내 임다혜와 만날 예정이었다.양시은은 보약을 다 마신 뒤 어지러움이 몰려왔다. 하지만 그리 신경을 쓰진 않았다. 나도현이 아무리 말을 까칠하게 해도 그녀를 정신적으로 괴롭히
“부탁하지 마. 부탁이 효과가 있었다면 나는 이미 나도현 씨에게 그만 두라고 애원했을 거야. 언니, 제발 부탁한다고 해서 그게 진짜 유용할까?” 양채은은 눈가의 눈물을 훔쳤다.“오늘 내가 전화를 한 이유는 한 가지 말할 게 있어서야. 네가 나한테 빚진 것 나는 하나하나씩 네 아들 하민에게서 얻어 올 거야. 부모의 빚은 자식이 갚는 게 맞잖아.”이 무시무시한 말을 하고 양채은은 전화를 바로 끊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들고 마음속이 점점 아려왔다.마스크남이 그 옆으로 다가와 그녀에게 물었다. “채은 씨, 지금 이걸 하는 게 무슨 의미에요? 양시은을 미워하면서도 왜 그 여자의 아들을 돌보고 있어요? 난 가끔은 당신을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요.”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마스크남은 자기가 양채은이라면 이 기회를 확실히 잡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양채은은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다.“하민은 날 이모라 불렀고 어른들의 잘못을 왜 아이를 탓하겠어요.”양채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양시은은 무정할 수 있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어느 정도는 선이 있었다. “당신 말도 일리는 있어요. 안에 있는 아이는 정말로 아무 죄가 없죠. 그나저나 당신 배 속의 아이는요?” 마스크남이 점점 더 압박을 걸면서 말을 이었다. “다른 아이를 생각하려면 먼저 네 애부터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만해요. 이건 내 일이니까.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아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양채은은 등을 돌리며 걸어갔다.마스크남은 유유한 눈빛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알겠습니다! 이름을 변경하여 번역을 다시 작성하겠습니다. 양시은은 마음속으로 하민에 대한 걱정이 극에 달해 당장이라도 아이를 찾으러 나가고 싶었다. 겨우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그 순간 방 문이 열리며 낯선 여자가 트레이를 들고 그녀 앞에 섰다.“양시은 씨, 이건 제가 끓인 보약이에요. 기력 보충에 좋으니 따끈할 때 빨리 드세요.”“저 안 마셔요. 그냥 가져가세요.” 양시은은 보약에 전혀
약혼 연회 당일 나도현의 휴대폰이 양시은 옆에 나타났다. 그것은 하나의 신호였지만 그녀는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 후 양채은은 친절히 그녀를 집으로 데려와 더 잘 챙겼고 심지어 나도현이 양시은을 싫어할까 봐 걱정했다. 결국은? 챙겨준 끝에 그들은 결국 한 침대에서 자고 있었고 이제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그와 그녀의 아이는? 양채은은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특히 하민을 보았을 때 갑자기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그녀의 아이가 양시은 덕분에 행복하지 않다면 그녀는 양시은의 아이에게 복수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갚는 복수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하민은 계속해서 이모라고 부렀고 그들 사이에는 감정이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무정할 수 없었다. “난 나도현의 별장에 있어. 그 사람이 나를 안 보내줘.” 양시은은 사실대로 말했다. 그녀는 자기 잘못이라면 반드시 인정한다. “미안해.” “미안하다고 해서 끝나는 거야? 미안하다는 말이 효과가 있으면 세상에 경찰과 법이 왜 필요해.” 양채은의 감정은 점점 격해졌다. “너희는 계속해서 하민이만 찾았고 나에겐 관심을 둔 사람이 있었어? 내가 도대체 뭘 그렇게 잘못해서 이런 결과를 맞아야 하는 거야.” 그녀가 남의 감정을 고의로 끼어들어 이 상황에 빠졌다면 지금 배신을 당한 것은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와 나도현은 자유 연애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 결국 약혼에 이르게 됐다. 그녀가 가장 행복했던 그 순간 이 두 사람은 함께 힘을 합쳐 그녀를 지옥으로 몰아넣었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이렇게 큰 차이를 그녀는 도대체 어떻게 견뎠는지 자신도 몰랐다. 게다가 요즘은 마스크를 쓴 남자가 그녀 곁에 있으면서 이것저것 말하고 그로 인해 그녀의 감정은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았다. “채은아, 우리 한 번 만나자. 하민이만 병원에 데려다주면 네가 나에게 어떻게 하든 상관없어.
나도현은 양시은의 턱을 꽉 움켜잡으며 목소리를 낮게 내뱉었다. 그 당시 양시은이 그의 삶에서 사라졌을 때 나도현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빌려 그녀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가 거의 포기하려던 찰나 뜻밖에도 양시은을 만나게 되었고 이는 어쩌면 하늘이 정해준 인연일지도 모른다. 이 한 평생 그는 양시은과 사랑하고 또 싸워야 하는 운명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당연히 그 상황에 흘러가는 대로 행동해야 했다. “내 곁에서 도망칠 방법을 찾기보다는 차라리 어떻게 내게 사과할지 너의 사과를 어떻게 표현할지 생각해봐. 그러면 너의 날들이 조금이라도 나아질지도 몰라.” 양시은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나도현은 원하는 건 그녀의 사과와 태도라는 걸 그녀는 분명히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옆에 있을 자격이 없었다. 지금 그를 달래서 그를 기쁘게 할 수는 있어도 결국은 떠날 수밖에 없었다. 박은희의 편견은 산처럼 높아서 그녀는 도저히 넘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결국 함께할 수 없었다. 그녀의 침묵은 이미 그녀의 태도를 보여주었다. 나도현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내가 너를 용서할 거라고 기대하지 마. 양시은, 이제 너는 여기서 안전하게 지내. 하민이가 걱정 되면 내 마음에 들게 나한테 잘해. 그럼 하민이를 찾아줄게. 안 그러면 소식을 알아도 너한테는 절대 말 안 해.” 양채은이 지금 통화를 거부하고 있어 양시은은 도대체 하민이를 어디로 데려갔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그녀는 여기 갇혀 있고 아는 사람도 없었고 사설탐정을 고용해 조사할 돈도 없다. 그런데 나도현은 그 능력이 있었다. 지금 그는 아이를 이용해 그녀를 협박하며 그녀가 굴복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도현, 나한테 아무렇게나 대해도 아이는 건드리지 말아줘.” 양시은의 마음은 정말로 아팠다. 그녀의 마음이 아플수록 나도현은 그 점을 더욱 이용해서 계속해서 자극했다. “아이는 건드리지 말라고? 너는 전혀 신경
아쉽게도 나도현은 이런 걸 이해하지 못했다. 임다혜는 전혀 두렵지 않았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그 사람한테 아무 짓도 안 했잖아요. 그냥 평소에 말 좀 섞고 싶은 건데. 설마 이걸로 저를 쫓아 내겠어요? 저는 안 믿어요.” 박은희는 입술을 열어 말하려 했지만 임다혜가 자신감 있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어쩌면 나도현이 그녀를 거절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뒤에서 조용히 손까지 써본다면...’ 박은희는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임다혜는 그 생각을 듣고 기뻐하며 말했다. “어머니, 말씀하신 방법 너무 좋아요. 도현 씨가 더 이상 이상한 짓 안 하게 우리 빨리 실행해요.” “좋아.” 박은희의 계획은 좋았지만 그들은 계획을 삼일 뒤로 미루기로 했다. 한편 나도현은 법률 사무소에 가진 않았지만 사무소의 사건들을 계속 관리했고 양채은과도 연락을 시도하고 있었다. 전화를 통했지만 영채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양시은은 그와 대화할 때마다 불편해졌지만 양시은은 밥은 잘 먹었다. 그녀에게 있어 사람은 밥심이고 체력을 유지해야 한다. 나도현이 정신 없이 있을 때 그녀는 탈출할 수 있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도현은 그걸 참지 못했다. 그는 양시은 앞에 나타나 비꼬며 말했다. “네가 그렇게 걱정하는 네 아들 결국 네가 이런 식으로 걱정하는 거냐? 양시은, 네 입에는 한 마디 진심이라도 있어?” 양시은은 나도현이 이렇게 작은 일로도 이렇게 화를 낼 줄 몰랐다. 그러나 나도현은 그녀를 싫어하니까 당연히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거였다. 그의 눈에 양시은의 단점은 끝없이 확대되어 보였다. 양시은은 더 이상 나도현을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와 아무 말도 하기 싫었다. “나도현, 만약 내가 아무것도 먹지 않고 굶어 죽으면 하민이는 돌아와도 못 보잖아.” “그건 네 변명이야. 지금 네 얼굴에는 아무런 슬픔도 없어.”나도현의 얼굴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양시은은 잠시 말이 막혔다. 그런데
양시은이 말을 뱉을 때 나도현은 그녀를 죽여버리고 싶은 만큼 화가 났다. “네가 날 교육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인간성? 그는 인간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수많은 사건을 처리했고 그 가운데 양시은도 포함되어 있다. 처음 양시은과 함께할 땐 결혼까지 진지하게 생각했지만 결국 양시은은 그에게 깊은 배신을 했다. 나도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뭐라고 하는가?’ 그가 복수를 결심하고 양시은을 죽이려고 해도 마음이 약해져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양시은, 여기서 깊이 반성해.” 만약 양시은이 그에게 울면서 용서를 구하면 그는 분명 마음이 약해질 것이다. 그러나 양시은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 애만 신경 썼다. 그는 그 아이가 얼마나 더 버티며 살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고 생각했다. 박은희는 나도현을 설득할 수 없었고 임다혜에게도 어떻게 말할지 몰랐다. 임다혜는 박은희가 직접 고른 며느릿감이었다. 하지만 나도현은 그녀의 얼굴조차 보기 싫어했고 아예 연락도 하지 않았다. 임다혜는 나도현에게 진심이었고 종종 박은희에게 안부를 묻고 늘 영양제와 화장품을 선물하며 찾아왔다. 지금은 그녀를 볼 면목이 별로 없었다. 임다혜가 다시 물어왔다. “도현 씨는 요즘 많이 바쁜가요? 로펌에도 없고...” 임다혜는 나도현이 양시은에게 갔을 것이라고 직감했다. 양시은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사람이고 그의 마음속에 깊은 자리를 차지한 인물이었다. 나도현은 그녀를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임다혜는 포기하기 싫었다. 부모의 축복을 받지 못한 결혼은 행복하지 않다고 믿고 있었다. 게다가 박은희는 그녀 편이었다. 그녀는 박은희를 통해 나도현의 마음을 얻은 후 나 부인이 되려 했다. 박은희는 이것도 방법이 아닌지라 그녀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다혜야, 넌 정말 좋은 아이야. 하지만 이건 말해 줘야 할 거 같아. 난 네가 정말 좋은데 도현이는... 양시은이라는
하지만 나도현은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박은희도 하민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천지개벽하고 피와 살이 뒤섞이는 상황에까지 끌고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녀가 숨기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나도현이 화가 가라앉으면 자연스럽게 그녀를 놓아줄 것이라 믿었다. “그 아이가 누구의 애인지 물어봐서 뭐 해? 나도현, 우리는 말할 건 다 했잖아. 더 이상 서로 힘들게 하지 말자.” “네 엄마가 그렇게 많은 돈을 주는데 내가 바보냐? 그걸 왜 거절해야 해? 예전에 20억에 너를 포기했던 것처럼 지난 4년 동안 우리는 이미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았어. 넌 내가 울며 매달려서 싫다고 말할 걸 기대했어?” 양시은은 담담하게 나도현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무섭기도 했지만 점점 그녀는 상황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도현이 그녀에게 죽으라고 할 리는 없으니까. 죽지 않으면 언젠가는 나도현에 의해 풀려날 날이 있을 것이다. 지금 나도현의 마음속엔 그저 그때 분노로 가득 찼을 뿐이다. “그게 가능할 리가 있냐?” 나도현은 비꼬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양시은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잖아. 그러니 내가 책임질 순 없어. 지금 나를 여기에 가두고 있을 바엔 차라리 양채은을 찾아가. 양채은은 진짜로 널 사랑해. 뱃속의 아이도...” “그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야. 그 여자가 날 사랑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지? 난 널 사랑하지만 너는 나한테 어떻게 했지?” 양시은이 말을 계속하려는 순간 나도현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더욱 어두워진 채 양시은의 몸에 머물렀다.나도현의 깊은 사랑을 양시은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도현이 예전에 사랑했던 만큼 지금은 증오도 그만큼 깊어졌다. 나도현은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말했다. “너 같은 사람한테 사랑을 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 지금까지 아이 아빠는 보지도 못한 걸 보니 네가 죽인 거 아니냐?” 양시은의 마음이 처참하게 찔렸다. 아이의 아버지는 바로 눈앞에
바로 핸드폰 속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도현은 그 번호를 비서에게 보내며 지시했다. “철저히 조사해.”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갑작스러운 결심이 떠올랐다. ‘더 이상 양시은이 밖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놔둘 순 없어.’ 그리고 나흘 뒤 박은희가 찾아왔다. “네가 가업을 물려받는 걸 싫다고 한 건 이해한다. 근데 지금 또 나랑 대항해서 그 아이를 다시 데리고 오겠다는 거야?” 나도현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박은희는 더욱 화를 내며 소리쳤다. “나도현, 양시은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눈으로 똑똑히 봤잖아. 그런데 왜 아직도 그 여자에게서 헤어 나오질 못하는 거야? 내가 너한테 소개해 준 약혼녀는 네가 고른 여자보다 어디가 못 해?” 임씨 가문도 경성의 명문가다. 나씨 가문과 임씨 가문은 비록 여씨 가문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경성에서 두 번째로 손꼽히는 대가문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나민우 집안과 친척 관계다. ‘나민우 역시 처음에는 결혼은 원하지 않았지만 결국 부모의 뜻을 따랐고 가문의 이익을 위해 결혼하게 되지 않았나?’이런 생각이 들자 박은희는 더욱 불쾌한 마음에 불만을 터뜨렸다. “나도현, 네가 내 말을 듣기 싫으면 나민우를 좀 본받으면 안 되겠니? 나민우가 어떻게 했는지 알잖아. 넌 도대체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야? 내가 진짜로 나민우를 내 아들로 삼아야 속이 시원하겠어?” 부모들이 자녀를 나무랄 때 자녀들이 흔히 하는 말처럼 ‘남이 그렇게 좋으면 그 쪽한테 가서 아들이나 돼달라고 하세요.’와 같은 뉘앙스였다. 하지만 박은희의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나도현에게 상황을 잘 파악하고 나인우를 따라 배우라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가문의 발전과 명성을 위해 양시은과는 반드시 거리를 두어여 한다. “왜 그렇게 남들과 비교하기를 좋아해요? 나민우는 나민우의 선택이 있는 겁니다. 그리고 양시은에 대한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해요.” 나도현은 등을 돌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