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나 도망치려던 게 아니야. 문 닫으러 가려던 거였어.”양시은이 급하게 해명했다.그녀가 어떻게 감히 도망칠 수 있겠는가? 애초에 나도현이 그녀에게 화풀이하느라 동생 양채은에게까지 피해가 가고 있는 상황이다.만약 그녀가 도망가 버린다면 양채은을 고스란히 불구덩이에 내던지는 꼴이 된다. 그녀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내가 문 닫는 거 허락했어?”나도현은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그의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양시은의 옷깃까지 뻗더니 강하게 잡아당겨 단숨에 찢어버렸다.“걸어서 다니라는 말도 안 했잖아. 우리 전에 키우던 개 기억 안 나? 개는 기어서 다녀야지.”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비웃듯 덧붙였다.“아, 까먹었나 보네. 그럼 동영상 하나 구해서 다시 익혀 볼래?”“아니, 잊지 않았어.”양시은은 고개를 저었다.강아지는 그들의 많은 추억을 품고 있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그의 어머니가 들이닥쳤던 날, 양시은은 돈을 받고 떠나기로 결심하면서 강아지도 데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막혀 버렸다.“이 돈 너한테 엄청난 거잖아. 평생 벌어도 못 모을 큰돈 아니야? 이 정도는 나씨 집안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넌 나씨 집안 대문조차 들어올 수 없지만 개는 들어올 수 있거든. 근데 왜 개까지 데리고 가서 고생시키려고 해?”그 말은 평생 잊을 수 없었다.그녀는 두 사람 사이의 격차가 얼마나 큰지 이미 알고 있었고, 그래서 강아지도 포기했다. 결과적으로 그 선택이 옳았다.이 몇 년 동안 그녀는 일도 해야 했고 아이도 돌봐야 했으며 하루를 세 토막 낼 만큼 바빴다. 반려견을 보살필 여력 같은 건 전혀 없었다.“도넛은 잘 지내?”양시은은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도넛은 강아지의 이름이다. 온몸이 새하얀 사랑스러운 사모예드였다.나도현은 그녀의 가슴을 후벼 파듯 대답했다.“네가 떠난 뒤에 바로 개고깃집에 팔아 버렸어.”“그럴 리 없어. 너도 도넛 엄청 좋아했잖아, 게다가 돈이 모자랄 일도 없고.”양시은은 믿지 않았다.그가 설령 그녀에게
방 안에는 양시은 혼자 누워 있었고 눈물은 멈출 줄 몰라 베갯잇이 금세 흠뻑 젖어 버렸다.그녀는 자신이 몇 시까지 울었는지조차 몰랐다. 체력이 바닥나서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이 밤은 나도현 역시 편히 보내지 못했다. 그는 서재로 돌아가 차가운 물로 샤워를 마친 뒤 책상 앞에 앉았다.서랍을 열자 양시은과 함께 찍었던 사진 한 장이 나왔다. 그는 그 사진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계속 간직해 왔다.사진 속 두 사람은 서로를 꼭 껴안고 있었고 눈동자에는 사랑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지금은...그는 양시은을 증오했고, 양시은 역시 그를 지독히 싫어했다.서로 보기만 해도 지겨운 사이가 되었는데 이성적으로는 당장 떨어져 살아야 한다고 말해도 그럴 수 없었다. 설령 계속 얽혀서 상처만 주고받는 관계가 된다고 해도, 그는 기꺼이 감수하려 했다....다음 날 아침, 양채은이 눈을 떴을 때 옆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심지어 이불조차 움직여지지 않은 상태였다.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한번 훑어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한 뒤 곧바로 옆방으로 양시은을 찾으러 갔다.문 앞에서 노크를 해 봐도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뭔가 이상했다.비록 둘이 같이 살지는 않았어도 그녀는 양시은의 생활 패턴을 잘 알고 있었다.늦어도 아침 7시면 일어나는 언니였다. 그런데 지금 벌써 8시를 넘겼고 곧 9시가 되려 하는데도 전혀 기척이 없었다.‘혹시 쓰러져서 의식을 잃은 건 아닐까?’양채은은 불안감에 사로잡혀 목소리를 높여 불렀다.“언니? 내 말 들려? 언니!”이대로 문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양채은은 뒤로 몇 발짝 물러난 다음 문을 발로 차서 열려고 했다.그런데 몇 번 세게 차자 서재에서 나도현이 뛰쳐나오며 그녀를 붙잡았다.“임신 중이잖아. 그렇게 세게 발길질하면 안 돼.”나도현이 급히 부축해 주었다.“근데 언니가 아직도 안 깼다니까요. 뭔가 이상해요. 혹시 쓰러졌을까 봐 걱정돼요.”양채은은 전에 비슷한 일을 겪었기에 더 불안했다.예전에도 양시은이 전
“나 그냥 너무 피곤해서 그래.”양시은이 고개를 저었다.“그럼 좀 더 자. 언니 괜찮은 거 확인했으니까 난 이만 갈게.”양채은은 더 묻지 않고 자리를 떴다.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아침을 만들고 식탁에 차려 놓은 뒤 나도현을 불렀다. 그가 자신에게 크게 도움을 줬으니 해줄 건 제대로 해 주고 싶었다.아침 식사 후 나도현은 출근했고, 양채은은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았다.양시은은 충분히 자고 난 뒤에야 일어났다. 시간을 본 그녀는 서둘러 옷차림을 정돈하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채은아, 나 오늘 늦잠 잤어. 지금 병원에 가 봐야 해.”“잠깐만. 아침밥 챙겨 놨으니까 들고 가. 아침 안 먹으면 위 안 좋아질 텐데. 언니 위염도 있잖아.”양채은은 재빨리 부엌으로 가서 이미 포장해 둔 도시락을 꺼내 왔다.“2인분이야. 하나는 언니가 먹고, 다른 하나는 하민이 주면 돼.”“고마워.”양시은은 양채은의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도 못한 채 도시락을 받아 들었다.그녀는 황급히 저택을 빠져나왔고 밖에 나오자 신선한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나도현이 갑자기 양심에 찔려서 날 놓아 주면 얼마나 좋을까...’물론 그럴 리 없다는 걸 잘 알았다.시간이 이미 늦었는데 때마침 버스 한 대가 눈앞에서 지나가 버렸다. 다음 차를 기다리려면 최소 20분은 더 걸린다.병실에 혼자 있을 하민이가 분명히 애타게 기다릴 텐데 말이다.결국 양시은은 이를 악물고 택시를 잡아탔다. 병원에 도착해 요금을 내려고 보니 휴대폰 잔액이 이제 몇만 원도 안 남았다.이걸로는 하민에게 영양식조차 충분히 사 주기 힘들었다.설상가상으로 간호사가 병실에 찾아와 입원비를 독촉했다.“아드님 치료비가 다 떨어졌어요. 지금 병원비가 10만 원 정도 밀렸는데 오늘 안에 내셔야 해요.”“며칠만 더 봐줄 수 없나요?”양시은은 간절히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하민이 아픈 뒤로 병원 이리저리 뛰어다닌 건 양시은이 전부였다. 가끔 양채은이 와 주긴 했지만 아이 아빠는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간호사도
하민은 자신이 아니었으면 양시은이 돈을 이렇게 많이 쓸 일도 없다고 생각했다.“아니야. 넌 하늘이 내게 준 선물이야. 나한테 제일 소중한 보물이고 한 번도 널 짐처럼 생각해 본 적 없어.”양시은은 아이를 꽉 끌어안았다.비록 여러 해 동안 힘겹게 살아왔지만 하민을 낳은 걸 후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가 주는 정서적 위로가 정말 컸으니까.“그런데 엄마 치료비는 어떡해요? 엄마가 힘들어하는 거 보고 싶지 않아요.”하민이 고개를 들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아직 어린 나이지만 양시은이 돈 때문에 얼마나 고생하는지 대략은 짐작하고 있었다. 돈이 잘 벌린다면 그녀가 이렇게 힘들어할 리가 없으니까.양시은은 잠시 침묵했다.이대로 아르바이트를 미친 듯이 해도 최소 이틀은 있어야 10만 원을 간신히 모을 텐데, 병원에서는 결코 이틀씩이나 기다려 주지 않는다.게다가 이틀 새 새로 쌓일 치료비까지 생각하면 그녀가 돈을 모으는 속도가 치료비 오르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결국 그 카드를 쓰는 수밖에 없었다.카드에는 4000만 원 넘게 있어서 하민이 병원에 오래 입원해도 버틸 만하다. 하지만 그 돈은 나도현의 것이다. 정말로 그 돈을 써 버리면 그가 트집 잡으러 올지도 몰랐다.‘모르겠다.’그녀는 마음을 굳혔다.‘올 테면 오라지. 일단 오늘 치료비부터 내고 보자. 그 뒤에 날 어떻게 괴롭히든 상관없어.’“괜찮아, 하민아. 엄마 돈 있어. 오늘 늦게 온 것도 은행 가서 돈 찾으려고 그랬던 거야. 지금 당장 가서 치료비 낼게.”양시은은 벌떡 일어섰다.하민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엄마, 그 돈 어디서 났어요?”“네 이모가 빌려준 거야. 그러니까 치료비 걱정 말고 의사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치료만 열심히 하면 돼.”양시은은 아이를 다독인 뒤 아래층으로 가서 수납 창구에서 치료비를 냈다.그녀는 카드 속 전액을 병원 계좌에 그대로 넣었다....한편, 나도현 쪽.회의 중이던 그는 갑자기 휴대폰에 카드 사용 알림이 떠서 열어
허민기가 따라오며 말했다.“사실 우리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네 상태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혹시 도움 필요하면 말해. 우리 어릴 때부터 쭉 봐 온 사이잖아, 소꿉친구였고.”어릴 적 그는 한때 양시은을 좋아하기도 했다. 그러다 가족이 다른 도시로 이사 가면서 양시은과 점점 연락이 끊겼고, 말 못 한 소년 시절의 짝사랑도 마음속 깊은 곳에 묻혀 버렸다.지금 그는 여자친구가 생겼고 양시은과 다시 이어질 가능성도 없지만, 어릴 적 정을 생각해서라도 조금이나마 도와주고 싶었다.“고마워, 근데 딱히 네가 도와줄 일은 없어. 나 혼자 충분히 처리할 수 있어.”양시은은 걸음을 멈추고 그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더는 다른 사람에게 빚지고 싶지 않은 게 그녀 마음이었다.허민기에게는 허민기만의 인생이 있고, 그녀도 마찬가지다. 괜히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알았어. 그래도 혹시 괜찮다면 우리 잠깐 앉아서 얘기 좀 할래?”허민기가 다시 한번 제안했다.양시은은 수긍했고 둘은 간단히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를 나눴다.그녀의 아이가 아프다는 얘기를 듣고 허민기의 얼굴에 근심이 어렸다.“애 아빠는 어디 있는데? 너 혼자 책임질 일이 아니잖아. 설마 전혀 신경 안 쓰고 너희 둘 다 버렸어?”“그들은 애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몰라. 알았으면 억지로라도 아이 지우라고 했을 거야.”양시은은 씁쓸하게 웃었다.그녀가 말하는 ‘그들’은 나도현의 부모다.남자 쪽 입장에서는 아이를 갖는 게 훨씬 쉬울 테니 필요하다면 원하는 수만큼 가질 수도 있었다. 그에 비해 여자 쪽은 평판이니 희생이니 온갖 걸 감내해야 한다.당연히 그들은 나씨 가문에 이런 부적격한 여자가 들어오는 걸 용납하지 않았을 거다.그래서 아이를 낳기로 한 순간부터 아이에 대한 모든 책임은 스스로 질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누군가 도와주길 바라지도 않았다.“차라리 그때 아이 지우는 게 나았을 수도 있잖아. 혼자서 애까지 키우고, 게다가 아픈 애라면 네 한평생 다 바치는 셈이야.”허
“당신 누구야? 여긴 병원 복도고 CCTV가 잔뜩 달려 있어. 경고하는데 다들 보는 데서 함부로 여자 괴롭히지 마.”허민기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당장이라도 나도현에게 덤벼들 기세였다.하지만 나도현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대학생 때부터 운동을 습관처럼 해 온 그다. 처음에는 양시은이 복근 있는 남자를 좋아한다길래 시작했지만 하다 보니 몸 만드는 게 일상이 되었다.무산소 운동으로 땀을 쭉 빼는 걸 꽤 좋아했다. 그런 그에게 허민기 정도는 상대도 아니었다.“둘이 싸우지 마.”양시은은 재빨리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허민기에게 말했다.“나 아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너 먼저 돌아가 줘.”“방금도 너한테 막 손대려고 했잖아. 내 앞에서조차 저렇게 거칠게 구는데, 내가 가고 나면 더 심하게 굴지 어떻게 알아?”허민기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그가 하는 말 하나하나가 분노에 불타는 나도현에게는 기름 붓는 격이었다.나도현은 이를 악물었다. 뿌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다.그가 이렇게까지 달려온 이유가 뭔가?회의까지 취소하며 수많은 신호 위반을 감수하고 미친 듯이 달려온 건 양시은이 다칠까 봐서였다.그런데 막상 와 보니 양시은은 다른 남자와 다정하게 대화 중이고, 그 남자는 거꾸로 그를 협박까지 했다.“양시은.”나도현은 이빨 사이로 그녀 이름만 뱉어 냈다. 노골적인 경고가 담긴 목소리였다.결국 양시은은 다시 허민기를 말렸다.“나 정말 괜찮아. 그러니까 제발 돌아가 줘. 부탁이야.”그가 계속 여기 있으면 나도현만 더 자극하게 될 뿐이었다.“왜 자꾸 보내려고 해? 셋이 앉아서 얘기 좀 하자. 편의점에서 카드라도 사 와서 고스톱이라도 치든가.”나도현은 허민기를 바라보며 눈빛에 살벌한 기운을 담았다.‘지난 4년 동안 저 남자랑 쭉 지낸 모양이네. 게다가 임신까지 한 거야? 내가 죽을 만큼 괴로워할 때 다른 남자랑 웃고 떠들었다, 이거지? 참 잘도 해 먹는다.’분노가 그의 속에서 끓어올랐다.“난 당신이랑 할 말 없어.
나도현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정말 매정해서 순식간에 양시은을 숨 쉴 틈 없이 몰아붙였다.양시은은 해명하려 애썼다.“우리 그런 사이 아니야. 오늘 우연히 마주쳐서 그냥 몇 마디 한 거야.”그러나 말을 꺼내자마자 나도현이 가로챘다.“그래? 그럼 네 주변에 남자가 끊이질 않는다는 뜻이겠지. 너 같은 여자가 임신이라도 하면 애 아빠가 누군지도 모를 거 아냐.”양시은은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그가 뭐라고 욕을 하든 상관없지만 아이만큼은 건드리지 말아 줬으면 했다.‘우리 하민이는...’“나도현, 나한테 너 말고 다른 남자는 없었어. 그러니까 내가 임신한다면 아이는 당연히...”“설마 내 애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나도현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기억 안 나? 네가 떠나기 전날 밤 내가 혹시 임신하면 어쩔 거냐고 물었을 때, 넌 망설이지도 않고 지워 버릴 거라고 했잖아.”그때의 그는 혹시라도 양시은이 임신하면 결혼할 생각이었다.부모님이 아무리 반대한다고 해도 혼인신고는 신분증만 있으면 충분하니까.두 사람이 법적 부부가 되어 아이가 태어나면 세 식구가 행복하게 살면 된다고 믿었다. 언젠가 부모님도 물러서 주리라 생각했고 안 된다면 집에 돌아가지 않을 결심이었다.하지만 양시은의 대답은 마치 뺨을 후려치는 듯했다. 그녀는 주저 없이 아이를 지우겠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이런 말로 그를 속이려 한다니 말이다.“네 거짓말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네. 설마 그렇게 말하면 내가 믿고 널 불쌍히 여겨서 남의 애까지 내 자식처럼 받아들이고 행복하게 살자고 할 줄 알아?”“난 그런 거 바라지도 않아. 그냥 더 이상 너랑 얽히고 싶지 않아. 제발 날 좀 놓아 줘. 네가 그렇게 날 하찮게 본다면 시궁창 쥐 보듯이 생각하고 그냥 보내 줘.”양시은은 정말 그거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하지만 나도현이 제일 못하는 게 바로 그거였다.“그건 절대 불가능해. 당장 나랑 같이 가.”그는 그녀 손목을 움켜쥐고는 강제로 끌고 가려 했다.“아, 그리고 방금
양채은은 임신 초기라 당연히 제때 산전 검사를 받고 모든 위험을 피해야 한다.“양채은이 네 칭찬을 얼마나 하는지 몰라. 산부인과 검진 담당 의사도 네가 직접 알아봐 줬다며? 그런데 너는 이런 소리나 하네. 네가 한 말을 양채은이 들으면 어쩔 건데? 난 양채은한테 우리 사이를 들키든 말든 상관없어. 너랑 나 사이에 벌어지는 꼴을 보여 준다고 해도 양채은은 날 떠나지 않을 거야.”나도현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양시은은 그가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분명히 뭔가 확신을 잡은 거라고 직감했다. 그가 자신감이 넘칠 땐 이미 모든 걸 꿰뚫고 있다는 뜻이니까.그녀의 머릿속은 아찔하게 어지러웠다.“어젯밤 네 요구도 들어줬고 오늘 밤도 네가 원하면 얼마든지...”“난 변호사지, 헐값에 파는 신발 같은 걸 전문으로 주워 오는 업자가 아니야. 게다가 가격이 4000만 원이라고? 도대체 금을 발랐어, 다이아몬드를 박았어?”나도현이 다시 가차 없이 말을 끊었다. 그렇다고 그의 마음이 안 아픈 건 아니었다.결국 둘 다 상처 주는 싸움을 하고 있을 뿐이니까.그가 하는 말도 전부 사실에 근거해 있었다. 4년 전 양시은이 떠난 뒤, 그녀를 찾아보려 했고 여기저기 뒤져서 나온 건 그녀가 여러 남자와 찍힌 사진들이었다.심지어 소리까지 생생한 동영상도 있었다. 합성일 거라며 애써 부정했지만 가짜 흔적이 전혀 없었다.직접 눈으로 확인해 버렸으니 이제 더는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그녀도 한 일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양시은은 갑자기 눈앞이 새까매지며 뒤로 그대로 쓰러졌다. 나도현은 팔이 머리보다 먼저 반응해 그녀를 재빨리 붙잡았다. 하지만 이내 팔을 풀어 버려 그녀가 바닥에 털썩 떨어지게 했다.“또 연기하는 거야? 하필 이런 얘기할 때 기절한 척한다고? 너 연기 전공도 아니잖아. 그렇게 연기가 하고 싶었으면 연예계로 갔어야지.”양시은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그 모습을 보자 나도현은 순간적으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덜덜 떨리는 손을 그녀 코 밑에 대 봤다. 다행히 숨은 쉬고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