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현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정말 매정해서 순식간에 양시은을 숨 쉴 틈 없이 몰아붙였다.양시은은 해명하려 애썼다.“우리 그런 사이 아니야. 오늘 우연히 마주쳐서 그냥 몇 마디 한 거야.”그러나 말을 꺼내자마자 나도현이 가로챘다.“그래? 그럼 네 주변에 남자가 끊이질 않는다는 뜻이겠지. 너 같은 여자가 임신이라도 하면 애 아빠가 누군지도 모를 거 아냐.”양시은은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그가 뭐라고 욕을 하든 상관없지만 아이만큼은 건드리지 말아 줬으면 했다.‘우리 하민이는...’“나도현, 나한테 너 말고 다른 남자는 없었어. 그러니까 내가 임신한다면 아이는 당연히...”“설마 내 애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나도현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기억 안 나? 네가 떠나기 전날 밤 내가 혹시 임신하면 어쩔 거냐고 물었을 때, 넌 망설이지도 않고 지워 버릴 거라고 했잖아.”그때의 그는 혹시라도 양시은이 임신하면 결혼할 생각이었다.부모님이 아무리 반대한다고 해도 혼인신고는 신분증만 있으면 충분하니까.두 사람이 법적 부부가 되어 아이가 태어나면 세 식구가 행복하게 살면 된다고 믿었다. 언젠가 부모님도 물러서 주리라 생각했고 안 된다면 집에 돌아가지 않을 결심이었다.하지만 양시은의 대답은 마치 뺨을 후려치는 듯했다. 그녀는 주저 없이 아이를 지우겠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이런 말로 그를 속이려 한다니 말이다.“네 거짓말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네. 설마 그렇게 말하면 내가 믿고 널 불쌍히 여겨서 남의 애까지 내 자식처럼 받아들이고 행복하게 살자고 할 줄 알아?”“난 그런 거 바라지도 않아. 그냥 더 이상 너랑 얽히고 싶지 않아. 제발 날 좀 놓아 줘. 네가 그렇게 날 하찮게 본다면 시궁창 쥐 보듯이 생각하고 그냥 보내 줘.”양시은은 정말 그거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하지만 나도현이 제일 못하는 게 바로 그거였다.“그건 절대 불가능해. 당장 나랑 같이 가.”그는 그녀 손목을 움켜쥐고는 강제로 끌고 가려 했다.“아, 그리고 방금
양채은은 임신 초기라 당연히 제때 산전 검사를 받고 모든 위험을 피해야 한다.“양채은이 네 칭찬을 얼마나 하는지 몰라. 산부인과 검진 담당 의사도 네가 직접 알아봐 줬다며? 그런데 너는 이런 소리나 하네. 네가 한 말을 양채은이 들으면 어쩔 건데? 난 양채은한테 우리 사이를 들키든 말든 상관없어. 너랑 나 사이에 벌어지는 꼴을 보여 준다고 해도 양채은은 날 떠나지 않을 거야.”나도현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양시은은 그가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분명히 뭔가 확신을 잡은 거라고 직감했다. 그가 자신감이 넘칠 땐 이미 모든 걸 꿰뚫고 있다는 뜻이니까.그녀의 머릿속은 아찔하게 어지러웠다.“어젯밤 네 요구도 들어줬고 오늘 밤도 네가 원하면 얼마든지...”“난 변호사지, 헐값에 파는 신발 같은 걸 전문으로 주워 오는 업자가 아니야. 게다가 가격이 4000만 원이라고? 도대체 금을 발랐어, 다이아몬드를 박았어?”나도현이 다시 가차 없이 말을 끊었다. 그렇다고 그의 마음이 안 아픈 건 아니었다.결국 둘 다 상처 주는 싸움을 하고 있을 뿐이니까.그가 하는 말도 전부 사실에 근거해 있었다. 4년 전 양시은이 떠난 뒤, 그녀를 찾아보려 했고 여기저기 뒤져서 나온 건 그녀가 여러 남자와 찍힌 사진들이었다.심지어 소리까지 생생한 동영상도 있었다. 합성일 거라며 애써 부정했지만 가짜 흔적이 전혀 없었다.직접 눈으로 확인해 버렸으니 이제 더는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그녀도 한 일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양시은은 갑자기 눈앞이 새까매지며 뒤로 그대로 쓰러졌다. 나도현은 팔이 머리보다 먼저 반응해 그녀를 재빨리 붙잡았다. 하지만 이내 팔을 풀어 버려 그녀가 바닥에 털썩 떨어지게 했다.“또 연기하는 거야? 하필 이런 얘기할 때 기절한 척한다고? 너 연기 전공도 아니잖아. 그렇게 연기가 하고 싶었으면 연예계로 갔어야지.”양시은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그 모습을 보자 나도현은 순간적으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덜덜 떨리는 손을 그녀 코 밑에 대 봤다. 다행히 숨은 쉬고
의사는 바로 옆에 있던 간호사를 불렀다.“이분 모시고 수납 창구 가서 조회 좀 해 드려요.”마침 그 간호사는 하민의 상태를 보살피는 담당 간호사였다.그녀는 양시은과 하민의 사정을 딱하게 여기고 있었고, 지금은 자연스럽게 나도현을 하민의 아버지로 여겼다.그래서 나도현에게 양시은과 하민이 얼마나 힘들게 지내는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무래도 혼자서 병든 아이를 돌보는 게 쉽지 않죠. 게다가 병원비 모으려고 일을 여러 개 한다던데 정말 안쓰러워요. 전에 제가 병실을 VIP로 업그레이드하자고 권했어요. 그쪽엔 침대가 두 개라 보호자도 편하게 묵을 수 있거든요. 그런데 그분이 거절하더라고요. 너무 비싸다고... 지금도 보면 정말 말라서 제가 다 속상해요.”이 말을 들으며 나도현 가슴 한편이 아릿하게 조여 왔다.‘그렇게 힘들게 살아왔다는 건가, 양시은이. 그리고… 그 아이는 대체 누구 아이지? 설마 내 아이...? 아니, 그럴 리 없어.’당시 양시은은 돈 때문에 그를 떠났고 연락까지 전부 차단했었다. 그런 사람이 그의 아이를 낳았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수납 창구에 도착했다.간호사가 하민의 이름과 병실 번호를 말하자 나도현은 바로 진료 기록을 받아 볼 수 있었다.간단히 훑어본 그는 페이지마다 적힌 처치와 약물 항목들을 보며 큰 충격을 받았다.‘애 병이 얼마나 심하면 이렇게 많은 약들을 쓰게 된 거지?’“아이가 있는 병실로 가 보고 싶어요.”그는 진료 기록을 덮고 간호사를 향해 고개 돌렸다.“좋아요. 왼쪽으로 돌아가시면 엘리베이터 있어요. 5층 올라가서 오른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병실이 보일 거예요.”간호사는 흔쾌히 안내했다.그 길은 멀지 않았지만 나도현은 마치 엄청난 거리처럼 천천히 걸었다.드디어 병실 문 앞에 섰을 때, 긴장된 마음으로 문손잡이에 손을 올려 살짝 눌러 열었다.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자 하민은 양시은이 온 줄 알고 신나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들어온 사람이 낯선 남자라는 걸 확인하자 금세 표정이
나도현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그러다 문득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이 떠올라 하민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봐, 여기 사진에 있는 사람이 네 엄마 맞지?”하민은 화면을 슬쩍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믿겠어? 난 정말 네 엄마랑 아는 사이야.”“근데... 요즘은 사진도 얼마든지 합성할 수 있잖아요. 이게 진짜 사진인지, 가짜인지 제가 어떻게 알아요.”하민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도현을 바라봤다.나도현은 살짝 당황했다.“넌 어떻게 이렇게 잘 알아?”그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양시은처럼 예쁜 여자가 혼자 아이를 키우며 살면 세상에 온갖 못된 이들이 꼬일 수 있다는 걸 말이다.하민은 곁에서 보기만 해도 많이 배웠을 것이다.“그럼 이건 어때? 동영상도 있어. 합성이면 흔적이 남기 마련이지.”나도현은 다시 앨범을 뒤적였다.그제야 하민은 조금 마음을 놓은 듯했다.“정말 엄마 친구라면 굳이 의심할 필요는 없겠네요.”그리고 조금 전의 질문에 답을 해 줬다.“저는... 아빠 같은 거 없어요.”“계속 없었어?”“네. 태어났을 때부터 쭉 엄마 혼자였어요. 그러니까 저도 아빠 필요 없어요. 엄마만 있으면 충분해요.”하민도 한 때 아빠가 있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꺼낼 때마다 양시은이 몰래 우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더 이상 아빠 얘기를 안 했다.아빠가 한 번도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면 처음부터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그래도... 혹시 네 엄마 주위에 다른 아저씨가 온 적은...”나도현은 더 물어보고 싶었다.바로 그때 병실 문이 다시 열리며 양시은이 다급하게 들어왔다.그녀는 문간에서 나도현과 눈이 마주친 순간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느낌을 받았다.‘나도현이 왜 여기 있지?’하민의 존재만큼은 끝까지 숨길 생각이었다. 자신을 증오하는 그가 혹시 아이까지 빼앗아 가버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그가 정말 마음을 먹는다면 원래도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하물며 그는 뛰어난 변호사이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두 사람이 떨어져 지낸 건 고작 4년인데 아이가 벌써 세 살이 넘었다.나도현은 만약 자신의 아이라면 양시은이 이렇게 말하기 힘들어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양시은이 무작정 떠난 것도 뱃속에 다른 남자의 아이가 있어서라고 여겼다.“도대체 누구 애야? 아까 너랑 시시덕거리던 놈 거야, 아니면 또 다른 놈 거야?”나도현은 계속 몰아붙였다.양시은은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그저 침묵을 택할 뿐이다.나도현의 인내심도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애한테 네가 망가지는 꼴을 보여주기 싫으면 그냥 사실대로 털어놓으면 되잖아! 왜 말을 못 해!”‘설마 상대가 유부남이라 입이 떨어지지 않는 건가?’나도현은 머릿속에서 온갖 상상을 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침대에 누워 있던 하민이 입을 열었다.“엄마, 아저씨... 무슨 얘기하는 중이에요?”“아무것도 아니야. 엄마 친구랑 일 얘기 좀 했어.”양시은은 애써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하민은 매일 병과 싸우느라 이미 힘겨웠다. 불쾌하고 어두운 일은 그녀 혼자 짊어질 것이라고 마음먹었다.“일 얘기라...”나도현은 묘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봤다.“그러니까 너도 애 아빠가 누군지 모르는 거구나. 일하다가 생긴 애라 이거지.”양시은은 그의 말 속 악의가 또렷이 묻어남을 느낄 수 있었다.나도현에게도 그녀를 끔찍이 아끼던 때가 있었다. 조금만 다쳐도 큰일 난 듯 걱정해 줬던 사람이 이제는 이런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결국 둘은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렸다.“그럼 이 아저씨랑 엄마는 회사 동료예요?”하민은 어른들 간의 복잡한 속사정을 알 리 없었다. 딱 들리는 일 얘기라는 말만 이해할 뿐이다. 그래서 일 같이하는 사람이면 동료라고 생각했다.나도현의 표정은 금세 새까맣게 질렸다.‘몸 파는 애랑 동료라니... 그럼 난 뭐가 되는 건데? 나도 몸 파는 사람 취급한다는 건가?’하민은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나도현을 향해 말했다.“아저씨, 우리 엄마 일 진짜 열심히 해요. 혹시 아저씨가 자리 좀 편한 거 주실 수
나도현은 양시은이 아직도 꿈에서 깨지 못했다고 생각했다.“아무것도 모르는 애가 한 말이야. 신경 쓰지 마.”양시은은 고개를 연신 저었다.그녀가 유일하게 원하는 건 나도현에게서 더 멀어지는 것, 그리고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 마주치지 않는 것뿐이다.그와는 어떤 식으로도 엮이고 싶지 않았고 도움 따위도 필요하지 않았다.하민은 두 어른을 번갈아 보며 어리둥절해 있었다.“나 이제 회사 돌아가야 해. 3시간 뒤에 집에 갈 건데, 내가 갔을 때 네가 없으면... 어차피 네 아들이 어느 병실에 있는지, 네 동생이 누군지 다 아니까, 어디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나도현은 문을 나섰다.그전까지 그녀가 가진 약점이 하나뿐이었다면 이제 두 개가 되어 버렸다. 그야말로 그에게 전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다.병실을 나선 뒤 나도현은 손바닥을 펼쳤다. 거기에는 갓 뽑힌 듯한 머리카락 한 가닥이 있었다.비록 그의 아이일 가능성이 작다고 생각했지만 혹시 모르니 검사해 볼 작정이었다....병실 안.나도현이 떠나자마자 양시은은 하민을 꽉 껴안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방금 그 사람 너한테 뭐 하진 않았지?”“아뇨. 그냥 제 아빠가 누구냐고 물어봤어요. 처음에는 나쁜 아저씨인 줄 알았는데 엄마랑 같이 찍은 사진을 보여줬어요. 엄마 되게 행복해 보였어요.”하민은 느낀 대로 말했다.그 말을 들은 양시은의 눈물은 더 거세게 쏟아졌다.그녀는 수표를 손에 쥔 날 바로 사진들을 전부 지워 버렸다. 그 기억들이 남아 있으면 더 힘들어질 테니까.하지만 나도현은 사진을 지우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때 얼마나 사랑했으면 지금은 그만큼 증오할 것이다.“엄마, 왜 울어요?”하민은 머리맡에서 휴지를 꺼내 그녀의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 줬다.“아까 그 아저씨가 엄마 괴롭힌 거예요? 엄마가 싫어한다면 나도 싫어요. 만약 또 오면 나가라고 할 거예요!”적어도 하민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양시은이다. 양시은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라면 그에게도 나쁜 사람일 뿐이다.“안 돼. 네가 그 사람
“사모님, 도현 도련님이 벌써 친자 검사를 진행하셨습니다.”집사가 계속 보고했다.이번에는 박은희가 탁자 위에 있던 찻잔을 바닥에 내던졌다. 맑은소리와 함께 잔은 산산조각이 났다.“아주 잘하는 짓이네. 이제 검사 결과만 나오면 양시은이 그 병든 아이를 데리고 우리 집 문턱을 넘어서 결혼을 강요하겠지?”사실 박은희는 원래부터 그녀를 몹시 못마땅해했다.집안도 보잘것없고 나씨 가문에 도움이 될 것도 없으며 아이까지 병약했다.물론 돈이 없어서 못 키우는 건 아니지만 나도현은 결국 나씨 가문을 물려받아야 할 후계자다. 그런 애가 장손이란 건 말이 안 된다.“난 그 애가 누구 애든 신경 안 써. 어쨌든 친자 검사 보고서에는 아니라고 나와야 해. 그것도 못 하면 여기서 잘리는 줄 알아.”박은희는 미간을 찌푸리며 명령했다.“네, 사모님. 바로 처리하겠습니다.”집사는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온갖 대비를 다 했는데도 박은희는 영 개운치 않았다. 그래서 직접 양시은을 불러 어느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약속 장소에 도착한 뒤, 박은희는 히말라야산 악어가죽 핸드백을 테이블 위에 꺼냈다.가방 하나만 해도 평생 벌어도 살 수 없을 정도의 값어치였다.더군다나 그녀가 입은 드레스며 목걸이, 팔찌처럼 몸에 걸친 보석들은 하나하나가 값비싼 물건이었다.반면 양시은은 빛바랜 청바지와 단순한 상의를 입었는데 전부 합쳐도 2만 원이 안 될 듯했다.그녀는 한껏 몸을 사리며 말했다.“어머... 아니, 사모님, 절 찾으셨어요.”“나도 들었어. 너랑 도현이가 다시 붙어 다닌다고? 시은 씨, 사람이 약속했으면 지켜야지. 내 돈까지 받아 놓고 거짓말하면 결과가 어떨지 몰라?”박은희는 무심히 말했지만 안에 담긴 위협은 분명했다.양시은은 답답해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그 사람 만난 건 제 의도가 아니었어요. 저도...”‘사실 도현이 제 동생을 임신시켜서 약혼한 상황이라 꼼짝 못 하는 중이에요.’이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굳이 해 봐야 박은희 귀에 거슬릴 뿐이니까.그런데 박은
이번에도 누가 먼저 찾아갔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나도현이 아직 양시은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박은희는 예전처럼 돈으로 양시은을 쫓아내는 방식은 안 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얻지 못하면 더 갈망한다는 말처럼, 지금 당장은 막을 수 있어도 언젠가 또 둘이 마주치면 불붙은 장작처럼 타오를 게 뻔했다.“방법은 간단해. 일부러 도현이가 널 혐오하게 만들고 마음을 접도록 해줘. 그렇게만 된다면 하민이 치료비 전부, 그리고 너희 둘이 평생 먹고살 돈도 댈게. 하지만 못하면... 굳이 너희가 살아 있을 필요도 없지 않겠어?”박은희는 단 몇 마디로 양시은과 아이의 운명을 결정지었다.그녀가 정말 마음먹고 하민을 해치려 한다면 양시은은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평범한 사람이 재벌가를 상대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결국 그녀가 택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나도현이 자신을 철저히 싫어하게끔 유도하는 것이었다.하지만 나도현은 이미 그녀를 몹시 증오하는 상태다. 그런데도 놓아주지 않으려고 할 때는 대체 무슨 수를 써야 한단 말인가?“내가 줄 수 있는 시간은 석 달뿐이야. 석 달 뒤에 도현이는 집안에서 정해 준 결혼을 치르게 돼. 그땐 너희 둘 사이도 완전히 끝나야 해. 알아들었지? 내 인내심도 한계가 있어.”박은희는 그렇게 말하고 일어섰다.“오늘 커피값은 내가 내지.”그 자리에 혼자 남은 양시은은 입도 대지 않은 테이블 위 커피 두 잔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아까 박은희가 한 말들이 계속 맴돌 뿐이었다.게다가 양채은 또한 3개월 뒤 나도현과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다.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나도현이 그 결혼식 날 뭔가 큰일을 벌일 게 뻔했다.결국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3개월 남짓이다.양시은은 한동안 자리에 머물다가, 나도현이 3시간 뒤 집에서 보자고 말했던 걸 떠올리고 부랴부랴 밖으로 나왔다.카페 앞에 버스 정류장이 있었는데 택시를 탈까 잠깐 망설이다가 결국 버스를 탔다.돈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택시비까지 쓰면 정말 빈털터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