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그렇다고 하지만 그래도 치료는 받으셔야죠. 설령 완치하지 못한다고 해도 고통은 덜 수 있고 더 오래 살 수 있잖아요. 아버지는 의학 지식도 있으면서 왜 이런 것도 모르시는 거예요?”온지유는 진지하게 말했다.여하간에 가족이었던지라 그녀는 법로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고 직설적으로 물었다.“혹시.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 탈모로 머리카락이 전부 빠질까 봐 그러시는 거예요? 머리카락이 없으면 추해질까 봐요?”법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이 죽을 땐 멋진 모습으로 죽이길 바랐고 초췌한 몰골로 죽고 싶지 않았다.나중에 자신의 두 아이가 보고 놀랄까 봐 말이다.“아니,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신 거예요? 20대도 아니고 왜 외모에 그렇게 신경 쓰시는 건데요?”온지유는 어처구니가 없었다.“머리카락이 없으면 어때서요. 어차피 아버지는 나이가 많으셔서 탈모가 와도 정상적인 거라고요. 길가에 나가보시면 대부분 어르신들이 머리숱이 없어요.”“자연적으로 탈모하는 거와 아예 없는 거와는 다르단다.”법로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올려 자신의 머리를 만졌다. 이미 꽤나 빠졌지만 만약 남아있는 머리카락마저 사라진다면 얼마나 추하겠는가.더구나 항암 치료의 부작용에는 탈모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구체적인 것은 항암 치료를 시작한 뒤에야 할 수 있었다.“그러면 아버지는 두 아이들한테 외할아버지가 영원히 사라져도 괜찮은 건가요? 다른 아이들처럼 할아버지 할머니 사랑 듬뿍 받고 자라지 않아도 된다는 건가요? 저랑 이현 씨를 제외하고 아이들한테 진심으로 사랑을 주고 아껴주는 사람이 아버지인데, 정말로 어느 날 말도 없이 떠나신다면 아이들은 어떻게 하라고요? 별이랑 하윤이가 아버지를 많이 좋아한다는 걸 아버지도 알고 계시잖아요.”온지유는 계속 설득했다.“저도 아버지가 오래 살아계셨으면 좋겠어요. 설령 항암 치료의 효과가 고작 1년 반을 더 살게 된다고 해도 더 오래 살아계셨으면 좋겠다고요.”“정말로 내가 살기를 바라는 거니?”법로는 고개를 들어 딸을
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후 주치의를 불러와 법로의 상태에 관해 자세히 물었다.“선생님, 아버지가 치료를 받으시겠다고 마음을 바꾸셨어요.”“정말 대단하세요. 저와 간호사들이 그동안 꾸준히 설득했는데도 치료 안 받으시겠다고 하셨거든요. 역시 이런 문제는 자식들한테 맡기면 되는 거였네요.”주치의는 온지유를 보며 따라 웃음을 지었다. 사람이 눈앞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것보다 역시나 최선을 다해 살려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어떤 치료를 받게 될지 설명을 들은 후 온지유는 법로와 조금 더 대화를 나누다가 병실을 나섰다.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바로 신무열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지만 한참 지나서야 연결이 되었다. 화면에 나타난 초췌한 얼굴을 보니 온지유는 순간 걱정되었다.“요즘 공무가 많은 거예요?”“그래. 이 자리에 직접 올라와 보니 알겠더라고. 얼마나 부담스럽고 힘든 자리인지를.”신무열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비록 김혜연의 자연 유산은 배아 상태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지만 그는 만약 두 사람 모두 바쁜 나날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 아이가 먼저 그들의 곁을 떠날 리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지금은 아이를 잃었고 김혜연은 계속 병원에서 입원하며 몸조리를 하고 있었으니 그가 가장 바쁠 때였다.그러나 그는 병원으로 가서 아내의 곁에 오래 있어 줄 수 없었다.처리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많았고 설령 오늘 할 일을 마친다고 해도 하룻밤만 지나면 또 새로운 일거리가 산처럼 쌓였다. 이 자리에 앉았으면 할 일은 해야 했던지라 그는 쉽사리 공무를 내팽개칠 수 없었다.“그래도 가끔은 쉬면서 해요. 그러다가 병나면 어떻게 하려고요. 혜연 씨는요?”김혜연을 찾는 온지유에 신무열은 가슴 아픈 표정을 지었다.그의 표정을 본 온지유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기우이길 바라면서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혜연이는 지금 병원에 있어. 우리 아이가 우리 곁을 떠났어.”이 말을 꺼내는 신무열의 눈가가 촉촉해졌고 온지유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어떻게 그럴 수
온지유는 당연히 두 사람의 선택을 존중해야 했다. 그녀의 인생이 아니었으니 선택권은 그들에게 있었고 동생으로서 해줄 수 있는 것은 슬플 때 곁에 있어 주는 것과 위로뿐이었다.그녀는 신무열과 간단히 대화를 나눈 뒤 법로의 상태를 말해주었다.“아버지가 암에 걸렸다고 병원에서 그러더라고요. 그것도 간암 말기래요.”“뭐?”신무열은 멍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법로가 출국하기 전까지만 해도 건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지났다고 간암 말기라니 믿을 수 없었다.온지유도 이 모든 것이 가짜이길 바랐지만 다시 검사를 해봐도 하얀 종잇장엔 간암 말기라는 충격적인 글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가짜이겠는가.“아버지는 원래 치료를 포기하려고 하셨어요. 그래서 매일 약만 드시면서 버티고 계셨는데 제가 겨우 설득해서 다시 치료받으시기로 했어요.”온지유는 사실 신무열이 자신이 있는 곳으로 와 법로를 만나길 바랐다. 여하간에 신무열은 법로의 아들이었으니까. 비록 법로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분명 신무열이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었다.그러나 신무열의 상황도 좋지 않았기에 그녀는 말을 꺼낼 수 없었고 결국 신무열이 먼저 입을 열었다.“일단 며칠 동안 네가 아버지를 잘 보살펴줘. 난 최대한 빨리 일을 마무리하고 갈 테니까.”“알겠어요. 의사 선생님께 물어봤는데 아직은 별 큰 문제는 없다고 했어요. 치료를 잘 받기만 한다면 무조건 효과를 볼 수 있을 거라고 했어요.”온지유는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전화를 끊은 후 신무열은 반 시간 만에 손에 쥐고 있던 업무를 마치고 병원으로 달려갔다.김혜연은 혼자 창가에 앉아 밖에서 뛰어다니며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았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도 대체 언제쯤이면 남들처럼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걸까?“혜연아, 나 왔어. 네가 좋아하는 과일 사 왔어.”신무열이 문을 열고 들어오며 과일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깨끗한 그릇을 꺼내 과일을 씻은 뒤 껍질을 까서 그릇에 담아 놓았다.소리를 들은
김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푹 숙였다. 가슴 한편에서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예전의 그녀는 일만 마치면 태교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이젠 그러지도 못하게 되었다.“혜연아? 무슨 생각해?”신무열은 그런 그녀의 상태를 눈치채고 먼저 물었지만 김혜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얼른 가봐요. 병실엔 저 혼자 있어도 되니까요.”신무열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부정적인 기운을 주고 싶지 않았던 그녀였다.그가 떠난다면 그녀는 혼자 병실에서 마음 놓고 울 수 있었다.“아니야. 조금 더 있다가 갈게. 어차피 오늘 그렇게 바쁘진 않거든.”신무열은 이렇게 떠나고 싶지 않았다.두 사람은 부부였고 아기까지 생겼었기에 서로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는 바로 김혜연의 상태를 눈치채고 있었고 이 상태는 이미 떠나간 아기와 연관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김혜연도 그가 일부러 그녀를 달래주기 위해 남겠다고 한 것을 알고 있었다.“그냥 조금 피곤해서 자려고 그래요. 전 정말로 괜찮다니까요. 설마 제가 당신을 속이기라도 하겠어요?”“난 네가 혼자 속으로 끙끙 앓고 있을까 봐 그래. 나한테 속마음을 말할 엄두가 나지 않는 거잖아. 넌 항상 어떻게든 혼자 감당하려고 하니까. 그러니까 나한테 털어놔도 돼. 해결해줄 수는 없어도 적어도 기분은 나아질 수 있잖아.”신무열이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자 김혜연은 자연스럽게 그의 품에 기댔다.고개를 들자 그의 두 눈에 담긴 걱정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지금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다.“무열 씨.”그녀는 갑자기 그의 이름을 불렀다.“당신이 곁에 있으면 전 슬프지 않아요. 전 언젠가 우리의 아이가 다시 우리를 찾아올 거라고 믿거든요.”방금 그 순간 그녀는 갑자기 마음이 편해진 기분이었다.아기를 떠나보낸 건 괴로운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일 괴로움 속에서 살 수 없는 노릇이었다. 반드시 앞날만 보며 살아야 한다.그녀는 곁에 신무열이 있는 것으로도 족했고 이미 떠나간 아이도 자신의 부모가 평생 슬픔에
연이은 이틀 동안 신무열은 일에만 열중했고 김혜연은 끼니를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잠도 푹 잘 자니 혈색이 전보다 훨씬 나아졌다.그녀의 모습을 본 신무열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짓게 되었다.“지금 모습이 훨씬 더 좋은 것 같네. 보기 좋다.”“그럼 전에 모습은 보기 싫었어요?”김혜연이 일부러 그에게 농담을 던지자 신무열은 더 짙은 미소를 지어버렸다.“그럴 리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너거든. 네가 어떤 모습이든 난 다 좋아. 그래도 네가 건강했으면 좋겠어. 난 너와 오래오래 살고 싶거든.”김혜연도 당연히 같은 생각이었다.특히 법로가 간암 말기라는 사실만 떠올리면 인생에서 돈은 건강보다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역시 먼저 자기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야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아낄 수 있었다.신무열은 미리 대기해 둔 전용기로 법로가 있는 병원으로 갔다. 그들이 마침 도착했을 때 법로는 오늘의 항암 치료를 받고 나왔다.“할아버지, 많이 아파요?”별이는 법로의 곁에 꼭 붙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보았다.“할아버지 머리카락이 없어요.”“할아버지 모습이 많이 추하지?”법로는 손을 올려 아무것도 없는 머리를 만졌다.원래는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한 가닥도 남지 않아 대머리가 되었다.법로의 말에 별이는 고개를 저었다.“할아버지는 저한테 영원히 멋진 할아버지예요. 하나도 추하지 않아요. 머리카락이 없으면 오히려 더 재밌어 보이는걸요. 할아버지, 저 머리 한번 만져봐도 돼요?”“당연하지.”법로는 별이의 작은 손을 잡은 뒤 자신의 머리에 가져다 댔다. 촉감이 신기했던 별이는 저도 모르게 두어 번 쓰다듬게 되었다.“할아버지, 지금 너무 귀여운 것 같아요! 별이는 너무 좋아요!”게다가 아이는 이미 엄마에게서 외할아버지가 병 치료 때문에 대머리가 됐다는 얘기를 들었었다.만약 치료하지 않으면 전처럼 머리카락은 남아있겠지만 빨리 그들의 곁을 떠나게 된다고 했었다.별이는 당연히 그것을 원치 않았고 법로의 곁에 찰싹 붙어 작은 팔로
“물론이지. 매일 바꿀 것도 없단다. 별이가 원하면 아침저녁으로 바꿀 수도 있어.”법로는 원래 탈모로 되어버린 대머리에 속상해하고 있었지만 별이와 대화를 나누며 눈빛을 반짝이는 아이를 보니 고민거리가 싹 사라지게 되었다.대머리인들 어떠하겠는가.가발이 있었으니 그는 언제든 사람들 속에서 제일 멋진 별이의 할아버지가 되어줄 수 있지 않은가.“와, 할아버지 멋져요! 그럼 저녁에도 별이 데리러 와주실 수 있어요? 친구들한테 자랑하고 싶어요! 별이 할아버지는 패셔니스타라고요!”별이는 상상만 해도 너무 즐겁고 흥분되었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온지유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두 사람이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니 사람이 늙으면 아이처럼 변한다고 한 말도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온하윤도 옹알옹알하며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고 싶어 했지만 아직 알아듣지 못했을 뿐 아니라 별이와 법로도 아이의 옹알거림을 알아듣지 못했다.법로는 손을 뻗어 온하윤을 품에 안았다.“아이고, 우리 손녀. 이 할애비가 안아보자꾸나. 이틀 만에 우리 하윤이 포동포동해졌네?”온하윤은 입을 벙긋거리며 침으로 풍선을 만들어냈다.“그래, 그래. 할애비가 더 놀리지 않을게. 우리 하윤이는 하나도 안 통통해. 전보다 조금 더 자랐을 뿐이란다.”법로는 아이가 기분 나빠할까 봐 얼른 말을 바꾸었다. 별이도 곁으로 다가와 온하윤과 놀아주면서 병실의 분위기는 화목해지고 있었다.이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온지유는 의사가 온 것이라고 생각해 얼른 달려가 문을 열었지만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뜻밖에도 신무열과 김혜연이었다.“두 사람, 이렇게 빨리 온 거예요?”지난번 신무열에게 전화를 했을 때만 해도 그녀는 신무열이 얼마나 바쁜 나날을 보내는지 직접 보게 되었고 책상 위엔 수많은 서류가 있었다.그녀는 신무열이 한참 지난 후에야 올 수 있을 거로 생각했었다.“얼른 들어와요. 아버지가 분명 아주 기뻐하실 거예요.”법로는 고개를 들자마자 신무열과 김혜연
김혜연은 아주 조심스럽게 품에 안으며 나긋하게 동요를 불러주었다.온하윤은 하품을 하더니 그녀의 옷을 꼭 잡은 후 품에 안겨 잠들어 버렸다.온하윤이 잠들어 버렸다는 것을 발견한 김혜연은 그대로 경직되어 버렸다. 행여나 아기가 잠에서 깨기라도 할까 봐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온지유와 말을 할 때도 입만 벙긋거릴 뿐 소리를 내지 않았다.“하윤이가 잠을 자고 있어요!”그 모습을 본 온지유는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김혜연이 곧 태어날 아기를 위해 수많은 공부를 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아기를 잘 달랬을 뿐 아니라 온하윤이 다른 아기들보다 얌전했기에 김혜연은 아기를 키우는 것이 더 좋게만 느껴졌다.그녀는 한참 안고 있고 나서 아쉬운 얼굴로 온하윤을 내려놓았다.법로는 아들과 안부 인사를 한 후 다시 쫓아내기 시작했다.“그래, 얼굴도 봤으니까 저녁까지 함께 먹고 잠시 쉬다가 내일 돌아가거라.”“아니, 저랑 혜연이가 그 먼 곳에서 이렇게 왔는데 반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벌써 쫓아내시려는 거예요?”신무열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법로는 그들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법로는 두 사람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뭐가 어찌 되었든 제 아버님이시잖아요. 이렇게 큰 병에 걸렸는데 어떻게 바로 떠날 수 있겠어요. 지유 씨가 옆에 있다고 해도 저희가 그냥 갈 수 없는걸요.”김혜연도 다가와 법로를 설득했지만 법로는 고집스러웠다.그는 그 자리에 앉아본 적 있었기에 신무열이 얼마나 바쁜 사람인지 알고 있었고 게다가 신무열은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신무열은 전보다 더 바쁘고 힘들어졌을 것이었다. 아버지로서 도와줄 것은 없었지만 적어도 짐이 되진 말자고 생각했다.“게다가 너는 곧 아빠가 될 몸이 아니니. 육아를 하랴, 나라를 돌보랴 시간이 어디 남아돌겠니.”말을 하던 법로는 무의식적으로 김혜연의 복부로 시선을 돌렸다.김혜연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신무열이 얼마나 기뻐했을지 그는 알고 있었다.대충 시간을 계산해
법로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어차피 VIP 병실로 옮겼기에 전에 지내던 병실보다 훨씬 더 넓었고 화장실도 따로 있었을 뿐 아니라 자그마한 주방도 있었다. 비록 가스는 없었지만 전기밥솥으로 밥을 지어 먹을 수는 있었다.병실에는 칸막이 방도 있었는데 그곳에 너비가 1.5M인 침대가 있었다. 그것은 환자의 보호자를 위한 공간이었고 개인 프라이버시도 지켜주는 그런 방이었다.김혜연은 가져온 짐을 그곳으로 밀어 넣은 후 며칠 동안 병실에서 지내기로 했다.온지유는 그들을 도와 짐을 정리한 뒤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갈 준비를 했다.법로 쪽에는 신무열과 김혜연이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드디어 조금 마음이 놓였다.이젠 그 조직을 처리할 때가 되었다.사람을 해치는 짓을 많이 한 조직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가정까지 망쳐버렸기에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주리라 생각했다.“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나중에 다시 찾아올게요.”온지유는 품에는 온하윤을 안고 별이의 손을 잡은 채 병실을 나왔다.김혜연은 멍한 얼굴로 세 사람의 뒷모습을 빤히 보았다.아들과 딸을 전부 바라지는 않았다. 심지어 아이의 성별에도 욕심이 없었지만 그저 자신에게도 아이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신무열은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자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았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눈치채고 있었다.그들에게도 언제가 분명 아이가 있으리라 말이다....집으로 돌아온 온지유는 온하윤을 아기 침대에 눕혀놓았고 별이는 평소처럼 방으로 올라가 숙제를 했다.거기다 김명자가 옆에서 온하윤을 지켜보고 있었으니 그녀는 소파에 앉아 조금 쉬려고 했다.이때 핸드폰이 번쩍 빛나며 여이현의 문자가 도착했다.[오늘은 좀 늦게 들어갈 것 같아. 아마 8시가 되어야 도착할 것 같아.]온지유는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았다.6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던지라 그녀는 방으로 올라가 잠을 조금 자두려고 했지만 눈을 뜨니 시계는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주방으로 내
양시은은 한참 동안 복잡한 표정으로 손에 쥔 약을 바라보다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나도현도 그녀를 위한 마음이었으니 못 본 척 눈감아주기로 했다.하민이를 돌보는 간호사가 책임감 있게 일을 한 덕분에 양시은의 부담을 많이 덜어주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마음을 놓고 자신의 치료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나도현은 지석훈에게 양시은의 진료를 부탁했다.“지석훈에게 별일 없다고 해서 네 진료를 부탁해 봤어.”양시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지석훈에게는 털어놓을 불평이 많았다.‘내가 할 일이 없었다고? 뭔 소리야? 나도현 네가 나를 병원에서 강제로 끌어낸 거잖아.’“진료는 끝났어요. 위가 좀 안 좋네요. 요즘 거의 안 먹죠? 그리고 조금씩 먹어야 해요.”양시은은 조심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처음으로 나도현 앞에서 죄책감을 느꼈다.나도현은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양시은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물었다.“그 외에 다른 건 없어?”“다른 건 없어. 그냥 푹 쉬면 돼. 그럼 난 먼저 갈게. 병원 일이 많아서 중요한 일이 아니면 날 부르지 마.”지석훈은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병원에 수술이 있다며 급히 떠났다.양시은은 나도현이 그녀에게 물어볼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예상과 달리 먼저 하인에게 물었다.“시은 씨, 최근에 음식을 거의 안 먹었나요?”하인은 양시은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네... 거의 안 드세요. 제가 설득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어요.”“정말 입맛이 없어. 이 사람들 잘못 아니야.”양시은이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그날 이후, 양시은은 나도현의 집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처음에는 양시은이 아프다는 이유로 그녀를 설득했고 후에는 하민이를 보러 가는 것이 편하다고 해서 방법이 없었다.그녀는 속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나도현이 요즘에 선을 넘지 않고 조용히 있어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최근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서 그래. 입맛이 없어. 좀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복용하고 있는 약도 그녀의 식욕에 영향을
나도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아깐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지금은 괜찮아졌어.”그는 양시은의 상태를 확인한 뒤 큰 자극을 피해야 한다는 말 때문에 이 상황을 그녀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양시은은 아무런 의심 없이 그 말을 믿었다.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거의 기억하지 못했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상태였다.나도현은 그녀가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설명했고 양시은은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이때 하민이가 양시은의 손을 잡고 말했다.“엄마 많이 피곤해요? 그럼 집에 가서 쉬어야 해요. 저는 남자아이니까 엄마가 항상 옆에 있을 필요 없어요.”양시은은 웃는 얼굴로 그의 통통한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우리 하민이 다 컸네. 엄마는 그래도 너를 혼자 두는 게 걱정되는걸.”나도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나도 네가 좀 쉬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양시은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아니. 난 지금 아주 좋아. 만약 채은이 일 때문에 걱정하는 거라면 나 이젠 괜찮아.”“그럼 간병인을 부를게. 내일 하루는 쉬고 모레 다시 하민이를 보러 와.”양시은은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어떻게 이렇게 함부로 결정할 수 있어?”양채은의 사고 이후 모든 사람이 그녀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 자신도 잘 알고 있었기에 회복에 전념했다.일주일 동안의 치료를 거쳐 많이 나아졌는데 왜 나도현은 여전히 그녀를 믿지 않는 것일까? 나도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너는 지금 네 상태가 괜찮다고 생각해? 화장실 가서 거울을 한 번 봐봐.”양시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는 요 며칠간 늦게까지 밤을 새웠고 다음 날 하민이를 보려 일찍 일어나야 해서 쉴 시간이 없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엄청 피곤해 보였을 수밖에. 심지어 다크서클이 깊게 자리를 잡아 파운데이션으로 간신히 가릴 수 있을 정도였다.하민이도 같이 양시은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협공 덕분에 양시은은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약속한 뒤 나도현은 믿을 만한 간병인을 구하러 갔다
양시은은 입원한 하민이를 돌보기 위해 모든 일을 뒤로 하고 매일 병원에서 지냈다.“엄마, 새우 죽 먹고 싶어요.”하민이가 다리를 흔들며 말했다.수술을 받은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아직 거부 반응이 나타나지 않자 양시은은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하민이가 점차 건강을 되찾고 있었지만 새우 죽을 먹겠다는 아이의 요구는 들어줄 수 없었다.“안 돼. 의사 선생님이 당분간 못 먹는다고 했잖아. 다른 거 먹는 게 어때?”양시은이 도시락을 꺼내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 안에는 그녀가 직접 만든 만두가 들어 있었다. 음식을 가리지 않는 하민이는 그 말을 듣고 신바람이 나서 말했다. “좋아요. 전 엄마가 만든 만두를 제일 좋아해요!”그 말을 듣는 양시은은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엄마가 먹여줄게. 천천히 먹어야 해.”“뜨거워요.”두 사람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하민이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보더니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아저씨, 또 저 보러 왔어요?”양시은의 몸이 순간 조각상처럼 굳어졌다. 요 며칠 동안 나도현이 자주 와서 이미 익숙해진 줄로만 알았는데 그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여전히 심한 반응을 하게 되었다. 양시은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도현처럼 바쁜 사람이 어떻게 매일 시간을 내서 아이를 보러 올 수 있는 건지? 하민이가 있는 앞에서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없어 나도현이 물건을 들고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하민이에게 줄 선물이야. 새로운 장난감 마음에 들어?”나도현이 가방에서 장난감을 꺼내며 하민이 앞에서 흔들자 하민이의 눈이 보석처럼 반짝였다.“좋아요, 감사합니다. 도현 아저씨!’하민이는 손에 작은 로봇 장난감을 들고 나도현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아이들은 정말 장난감을 좋아했다. 입원한 동안 이전에 가지고 놀던 장난감들이 지루해졌던 하민이는 새 장난감의 등장에 날아갈 듯 기뻐했다.“하민이에게 장난감을 가져다줬네.”양시은이 말했다.하민이는 심장병으로 앓고 있었지만 말을 잘 듣
하민이가 수술실로 들어갔다.박은희의 초조한 모습이 눈에 뜨이자 양시은은 좀 전에 박은희를 의심했던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사모님, 죄송해요. 제가 오해를 했어요. 전 또...”“괜찮아. 네 마음 이해해.”박은희는 복잡한 눈길로 양시은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내가 예전에 얼마나 못되게 굴었던지. 하민이가 아니었으면 아직도 시은 씨를 미워했을 거야. 마음을 바꿀 리도 없을 것이고.’“모두 그만 하세요. 의사 선생님께서 오셨어요.”나도현이 두 사람의 얘기를 끊고 앞으로 나서서 의사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나도현도 수술이 잘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지만 걱정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도 양시은처럼 수술실에 들어간 아이가 마음에 놓이지 않았지만 입 밖에 내지 않았을 뿐이다.양시은은 바삐 돌아치는 나도현을 복잡한 눈길로 바라보며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잠시 후 하민의 수술이 시작되었다. 심장 이식수술은 고난도 수술이라 지속시간이 아주 길었다. 그들은 점심부터 저녁까지 수술실 밖에서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길 손꼽아 기다리며 수술중이라는 간판을 뚫어지게 바라보았지만 수술이 끝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양시은은 몸이 회복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기다리는 내내 눈앞이 새까매지는 느낌이 들었다.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발견한 나도현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넌 얼른 들어가서 휴식해.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난 떠나면 안 돼. 하민이가 수술이 끝나서 깨어났다가 날 만나지 못하면 울음을 터뜨릴 거야.”“걱정하지 마. 수술이 끝났다 하더라도 마취가 풀려야 애가 깨어나.”양시은이 그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고집을 세우자 나도현은 온갖 방법을 써서 그녀를 설득할 수 밖에 없었다.“시은아, 네 모습을 하민이가 보면 걱정할 거야.”다른 핑계를 대면 양시은이 거절할 게 뻔해서 하민이 얘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하민이는 양시은이 자신이 목숨처럼 끔찍이 아끼는 존재였기에 그녀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양시은은 여전히 나도현은 양채은의 남자라고 고집을 세우고 있었다. 그래서 믿음이 흔들릴 때마다 그녀는 나도현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나도현은 화가 치밀어 올라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내가 채은이 사람이라고?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내 생각은 물어본 적 있어? 아니면 내가 보이지도 내 말이 들리지도 않는 건가?”그는 양시은의 손을 잡고 그 손을 자기 가슴에 대었다. 나도현의 온도와 힘찬 심장 박동이 그녀의 손끝에 전해졌다. 양시은이 당황한 기색으로 몸부림쳤다.“나도현, 이거 놔. 난 이미 너와 아무 관계 없다고 했잖아.”“그럼 하민이는 어쩔 거야? 하민이 신경도 안 쓸 거야?”나도현이 그녀의 약점을 정확히 건드리며 말했다.하민이 얘기에 양시은은 잠시 멈칫했다. 그의 말이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을 쿡쿡 찔렀다.나도현이 침묵을 지키는 양시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시은아, 날 계속 밀어내지 마. 난 네 곁에 남아서 너를 계속 지키고 싶어.”그는 양채은과 아무 관계도 없었다. 양채은의 죽음이 안타깝긴 했지만 양채은보다 더 걱정됐던 사람은 양시은이었다. 나도현은 단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싶은 평범한 남자일 뿐이었다.“나도현, 우린 이미 끝났어. 내가 아플 때 병간호해 줘서 고마워. 그럼 난 이만 돌아가 볼 거야.”“시은아, 내가 네 곁에 있는 게 너를 불편하게 만들었어?”두 사람 사이에 적막이 흐르자 나도현이 부드러운 말투로 말을 덧붙였다.“너 아직 휴식이 필요해. 오늘은 이곳에서 자고 내일 떠나는 게 어때? 지금 이 시각에 어딜 가려고?”양시은은 그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오랫동안 이곳에 있었기에 지금 떠나는 것이 더 어색할 뿐이었다. 머릿속의 오만가지 생각을 정리한 뒤 침묵을 지켰다.말없이 앉아 있는 그녀를 바라보는 나도현은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먼저 쉬어. 날 원하지 않으면 내가 떠날게.”나도현은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가면서 하인에게 양시은을 돌보라고 명령을
“시은아, 꼭 나아야 해. 넌 아직 날 받아들이지 않았잖아.”나도현이 침대 앞에서 불덩이처럼 뜨거운 양시은의 손을 잡고 그녀의 손등을 얼굴에 대고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양시은은 한밤중에 정신이 들었다. 한잠 자고 깨어나니 두통이 한결 덜했다. 흐릿한 시야로 고개를 돌리자 침대 앞에 있는 나도현의 모습이 보였다.나도현은 평소 깔끔을 중요시하던 남자였는데 지금은 셔츠가 구겨지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담요도 덮지 않고 앉아 있었다.양시은은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손을 들었다. 그녀의 손끝이 어느새 조각 같은 나도현의 얼굴에 닿았다. 그 얼굴을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던 양시은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내밀었던 손을 거두려던 찰나 손목이 잡혔다.“자고 일어나자마자 날 만지는 걸 보니 많이 좋아진 모양이네? 마음이 바뀐 거야?”나도현의 사포처럼 거친 목소리에는 피로가 짙게 배어 있었다. 그는 온종일 아픈 양시은을 돌보느라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그의 강인한 체력이 아니었으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나도현의 말을 들은 양시은의 얼굴이 순간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이 손 놔! 그냥 네가 여기서 자는 걸 보고 감기라도 걸렸다가 내 탓 할까 봐 걱정돼서 그랬을 뿐이야.”말을 마친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이상한 적막이 흘렀다.예전에 그들 사이에 불쾌한 일이 많았었다. 그때 나도현은 듣기 좋은 말을 하지 않았고 싸울 때마다 상처는 늘 양시은의 몫이었다.양시은 역시 그 일에 자신이 이토록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걸 몰랐을 것이다.“미안해, 그땐 내가 잘못했어. 널 믿지 않았던 건 내 책임이야.”나도현이 진심 어린 사과를 했다.“괜찮아, 다 지나간 일이야. 별로 신경 쓰지 않아.”양시은은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지만 그 이상의 감정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가 말한 대로 혼자 있는 것에 이미 익숙해졌기 때문에 예전의 일에 대해서 조금의 불쾌함 외엔 다른 감정이 없었다.“하민이는 어때?”“하민이는 괜찮아. 네 열도 내렸으니 내일 낮에 같
양채은은 지금 무슨 상황인지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그녀는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나 이미 죽은 거 아니었어? 왜 눈을 뜰 수 있는 거지?’“드디어 깨어났어요?”이는 낮고 익숙한 목소리였다.잠시 뒤 양채은은 눈앞에 나타난 얼굴을 보고 놀란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이 사람이었구나!’그녀의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마스크남이였다. 마스크남은 양채은의 분노에 찬 모습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저를 그렇게 쳐다보지 마세요. 제가 그쪽을 구해낸 거예요. 제가 아니었으면 그쪽은 이미 시체가 되었을 건데요. 생명의 은인에게 예의를 좀 갖추죠.” 양채은은 소리를 내지 못했기에 두 눈을 부릅뜨고 분노에 찬 눈길로 그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양채은의 모습을 구경하고 있던 마스크남이 그녀를 툭툭 치면서 입을 열었다.“잘 치료받으세요. 그쪽이 아직 쓸모가 있으니까요.”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양채은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이 남자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그와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심한 열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진 양시은이 잠결에 양채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사랑하는 여인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나도현이 급한 마음에 지석훈을 불러왔다.“난 너희 둘만의 전용 의사가 아니야. 아프면 병원에 가야지.”지석훈은 한바탕 불만을 털어놓았지만 결국 병을 보러 집으로 찾아왔다. 그가 검사를 마치자마자 나도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시은이 어때? 어젯밤부터 열이 나서 약을 먹였는데도 나아지지 않아.”나도현은 양시은 걱정에 너무 초조해서 그런지 평소보다 훨씬 무뚝뚝해 보였다. 그는 원래 양시은을 데리고 병원에 가보려 했는데 그녀가 원하지 않았기에 지석훈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나도현은 양시은이 허약하게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녀의 연약한 모습은 그로 하여금 나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지석훈은 한참의 고민 뒤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양시은
나도현은 양시은의 어깨를 잡고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너랑 채은이 통화 내용을 전부 들었어. 시은아, 채은이는 네가 행복하게 잘 살길 바래. 과거에 갇혀 있지 말고 우리도 앞을 보며 살아야지.”나도현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만 일은 이렇게 된 이상 그들도 이제는 앞을 향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들은 양채은의 장례식을 후하게 치러주었고 마지막을 잘 보내줬다.나도현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지만 양시은이 어떻게 이 모든 것을 다 잊을 수 있단 말인가?양시은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나도현, 난 잊을 수가 없어. 채은이만 생각하면 네가 걔한테 의도적으로 접근한 게 생각나. 채은이 죽음이 네 탓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난 잊을 수가 없어. 이 모든 책임이 다 나한테 있으니까...”“정신 차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 돌아올 수는 없잖아. 그럼 하민이는 어떡해? 시은아, 넌 하민이가 아빠 사랑 없이 자라게 하고 싶어?”나도현의 말은 못처럼 양채은의 마음속에 박혀 들어갔다. 양시은은 양채은이 마지막 힘을 다해 그녀에게 전화로 나도현과 잘 지내라던 말을 잊지 않았다.나도현이 한창 그녀를 설득하고 있을 때 병원에 있는 하민이가 그녀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모님도 이제는 그들을 반대하시지 않았지만 너무 늦었다.양시은은 깊이 한숨을 들이키고 대답했다.“난 하민이가 널 따라가는 게 좋다고 생각해. 우리 관계가 어떻든 우리가 하민의 아빠엄마인 건 영원히 변하지 않아.”양시은은 지금까지도 마음속의 그 장벽을 넘지 못했지만 상관없었다.양시은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다. 더는 그들을 막는 사람이 없으니 나도현은 양시은이 마음의 문을 열고 그를 받아들여 한 가족이 오붓하게 잘 지낼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럼 넌 먼저 휴식해. 내 얼굴 보고 싶지 않아 하니까 나는 밖에 나가 있을게. 시은아, 모든 걸 네 탓으로 돌리지 마. 탓해야 할 게 있다면 그건 전부 내 탓이야. 내가 채은이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서 오해하게 만든 거야.”나도현이 잔뜩 잠긴 목소리로
양시은의 상태가 점점 악화하고 있다.친동생이 죽은 뒤로 그녀의 정신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잠을 자기만 하면 양채은이 너무 아프다며 우는 모습이 꿈속에 나타났다.이번에도 양시은은 양채은의 모습에 놀라 잠에서 깼다. 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나도현이 먼저 불을 켰다.순간 방안은 따뜻한 주황색 불빛으로 가득 찼고 나도현의 듬직한 모습이 그녀 눈앞에 드리워졌다. 하민이가 지금 병원에 있으니 양시은은 애를 보러 병원에 가려고 했지만 나도현이 말렸다.“너 지금 그 몸으로 어딜 가리고? 걱정하지 마. 병원에는 어머니가 있고 의료팀도 있어.”양시은이 병원에 가지 않은 제일 중요한 이유는 하민이에게 그녀의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였다. 그래서 나도현의 말대로 별장에 남아 있었는데 그녀의 상태가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지석훈을 불러줄까?”나도현은 관심 어린 말투로 물었다.지금 양시은의 모습은 너무나도 처참했다. 장례식에서 잠깐의 기억 혼란이 있었던 후로 나도현은 그녀가 동생 죽음에 대한 죄책감이 마음에 쌓여서 언젠가는 병이 될까 봐 걱정됐다.“지석훈 씨를 불러서 심리 상담을 하라고?”양시은이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지석훈은 의사였고 의사로서 능력이 출중했기에 심리 상담도 해줄 수 있었지만 양시은은 필요 없다고 하며 병 때문이 아니라 그저 너무 슬퍼서 그런 거라고 여겼다.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동생이 그녀 곁을 떠났다.나도현이 양시은에게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네주면서 말했다.“너에게 병이 있다는 뜻이 아니야. 난 네가 모든 것을 혼자 짊어져서 괴로울까 봐 걱정돼서 그래. 시은아, 채은이에 대한 일은...”그때 나도현이 강태경의 신분으로 양채은에게 접근한 건 양시은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감정에 휘둘려 내린 충동적인 결정이었다.후에 돌발상황이 생겨서 양채은이 그의 진짜 신분을 알게 된 것은 예상 밖이었다. 하지만 양채은이 갑작스러운 감정폭발로 그 일을 저질렀을 때 양채은에게 분명히 말했었다. 양채은 배 속의 아이는 그의 것이 아니고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