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에 모인 세 사람은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여이현은 일하면서 알게 된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었고 별이는 아주 흥미진진하게 들었다.별이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나중에 별이도 크면 아빠처럼 회사를 운영할 거예요. 그러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고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줄 수 있잖아요.”“그래. 어느 정도 크면 아빠 회사로 와서 인턴으로 일해 봐도 되겠어.”아들의 꿈에 여이현은 응원하고 있었고 원래부터 회사를 별이와 온하윤에게 물려줄 생각 하고 있었다.회사를 이끌어 갈 사람이 남자이든 여자이든 그는 상관없었다. 어쨌든 그와 온지유의 아기기만 하면 경영도 잘할 수 있고 회사를 물려받을 능력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별이는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전 저만의 회사를 만들 거예요. 아빠가 해낸 걸 저도 해내고 싶어요!”별이는 웃는 얼굴로 진지하게 말하는 별이를 향해 엄지를 척 들어주었다.“우리 별이 꿈이 멋지다! 엄마는 우리 별이가 꼭 꿈을 이룰 거라고 믿어!”온지유는 별이가 그녀와 여이현의 아이였으니 당연히 뭐든 잘 해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저녁을 먹고 난 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알아서 척척 빈 그릇을 정리해주며 거실로 가서 애니메이션을 보았다.온지유와 여이현은 설거지를 하면서 대책을 상의했다.“지금은 오빠랑 혜연 씨가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당신은 언제 출국하려고?”온지유는 수도를 작게 틀며 나직하게 물었다.여이현은 여전히 먼저 움직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이 문제를 얼른 해결하는 게 그 사람들에게 계속 감시당하면서 사는 것보단 낫지.”그 사람들은 목표에 달성하지 못하면 절대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사람이었다.계속 방어만 하면서 살 바엔 먼저 손을 대서 처리하는 것이 나았다.“그럼 내일 움직이는 건 어때? 그 인간들 본거지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온지유가 몸을 돌리자 원래부터 가까이 있었던 여이현과 거리가 더 좁혀져 버렸다.여이현은 자연스럽게 손을 그녀의 허리에 올리며
“그래도 다 선생님께서 잘 가르쳐준 덕분이죠.”온지유는 선생님과 간단히 대화를 나눈 후 전화를 끊어버렸다.욕실로 들어가 간단히 씻은 뒤 아침을 먹고 별이와 온하윤을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신무열은 법로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었고 온지유를 발견한 김혜연은 얼른 다가가 맞이했다.“하윤이는 저한테 맡겨요.”온지유는 먼저 법로의 상태를 물은 후 신무열에게 눈빛을 보냈다.그 눈빛의 의미를 알고 있는 신무열은 온지유와 함께 칸막이 방으로 들어왔다.문을 닫은 후 온지유는 조직의 일에 관해 말해주었다.“전 이번에 이현 씨랑 함께 출국해서 암영이란 조직을 부숴버릴 생각이에요. 그 나쁜 놈들은 국제 범죄 조직인데 아이들까지 연루되어 일이 더 심각해질 수 있어요.”아이들은 한 나라의 희망이었고 소미처럼 친엄마가 키워주거나 복지원으로 가게 되면 적어도 정상적인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하지만 그 조직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면 어린 나이에 나쁜 짓을 배우게 되었고 나중에 어른이 되면 얼마나 더 나쁜 짓을 하고 다니게 될 줄 모른다.“지유야, 난 우리 Y 국에 그런 사악한 조직이 있을 줄은 몰랐어. 정말 괘씸하군.”그녀의 말을 전부 들은 신무열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고 이도 빠득 갈았다.한편으로 어린 나이에 독살당할 뻔한 온하윤이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했고 다른 한 편으로 Y 국의 아이들이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다.아이들도 하나의 살아있는 귀한 생명이었지만 그 조직에서는 대체품으로 사용되고 있었다.“지유야, 나한테 거리낄 것 없단다. 어쨌든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도 돼. 아이들도 우리가 대신 돌봐줄 테니까.”신무열은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온지유뿐만 아니라 지금 그도 온지유처럼 그 조직을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고 싶었다.그의 말에 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았어요.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이현 씨가 밖에서 저 기다리고 있거든요. 한 시간 뒤에 출국하는 거니까 시간이 빠듯하네요.”신무열은 직접 온지유를 배웅해주었다.법로는 온지유가 오자마자
등 뒤에 있던 남자는 가면남이 지시한 대로 케이지의 문을 연 뒤 거칠게 소미를 다루며 끌고 나왔다.소미는 저항하려고 했지만 남자는 손을 들어 뺨을 때려버렸다. 머리가 어질거렸던 소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시끄럽게.”가면남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암일아, 내가 알아보라고 한 건 알아봤어?”“네, 신무열은 이미 경성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온지유와 여이현은 이곳으로 오는 길이라고 합니다.”암일은 알아낸 정보를 전부 말해주자 가면남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그리고 내가 준비하라고 하던 여자는 준비됐나?”확신의 답을 들은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을 기대하고 있었다....한편 온지유는 몇 시간의 비행 끝에 온지유와 함께 비행기에서 내리게 되었다.짐을 찾으러 가던 도중에 앞에서 소동이 벌어졌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여이현은 얼른 온지유의 손을 꽉 잡았지만 사람은 너무도 많았고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던지라 손을 놓치고 말했다.짐을 든 여이현은 주위를 두리번대며 얼른 온지유를 찾으려고 했지만 눈앞엔 낯선 얼굴들뿐이었고 온지유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온지유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급하게 여이현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등 뒤로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나타났다. 빠르게 그녀의 코와 입을 막으며 제압하면서 무언가가 든 주사기로 그녀의 몸에 찔러넣었다.주사기 안에 있던 약물이 전부 그녀의 몸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약효가 빠른 약이었던지라 그녀는 30초도 되지 않아 정신이 흐릿해지며 쓰러지게 되었다.곧이어 그녀의 몸이 뒤로 넘어가게 되었고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그녀를 데리고 갔다.그들이 공항에서 나왔을 때 갑자기 몰려든 한 무리의 사람들도 흩어지게 되었지만 여이현은 여전히 온지유를 찾지 못했다.전화를 걸자 등 뒤로 익숙한 핸드폰 벨 소리가 들렸다.“이현 씨, 나 여기 있어.”고개를 돌리자 ‘온지유'가 그의 등 뒤에 서 있었지만 여이현은 보자마자 가슴이 덜컥 내려
여이현은 여자가 하자는 대로 전부 해주었다.호텔로 돌아오자마자 별이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고 별은 평소와 같은 신이 난 모습이었지만 화면 속에 있는 여자를 아무리 봐도 온지유로 보이지 않았다.‘이상하다. 오늘따라 엄마가 왜 이렇게 낯설지?'여자는 끊임없이 별이를 걱정하고 있었고 수상한 티가 폴폴 났다.여이현은 간단히 몇 마디 대화를 나눈 뒤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 호텔은 김혜연의 것이었고 그의 통제구역이기도 했다.방금 그는 이미 몰래 사람을 시켜 호텔 안에 수상한 사람이 없는지 알아보라고 했기에 지금은 일단 연기에 어울려 주는 수밖에 없었다....온지유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앞에는 가면을 쓴 남자가 서 있었고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굳이 그딴 헛짓거리를 하면서 나를 여기로 끌고 온 이유는 뭐지? 가면을 쓰는 것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 못할 정도로 흉측해서 그런가?”가면남은 그녀의 말에 큰 소리를 내어 웃더니 사진을 온지유에게 보여주었다.“이 여자, 너랑 아주 닮은 것 같지 않아? 지금 이 여자는 네 남편이랑 같은 방에 있어. 남녀가 둘이 한 방에서 뭘 하겠어?”그는 상상만 해도 흥미롭고 즐거웠다.온지유는 주위를 두리번거린 후 눈앞에 있는 남자를 훑어보면서 등 뒤로 묶인 손을 부단히 움직이자 밧줄은 손쉽게 풀려버렸다.다만 그녀는 티를 내지 않았고 이상하리만큼 냉정해 가면남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어보게 되었다.“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돼? 내가 이 여자를 네 남편 곁에 붙여두었다고. 여이현은 애초에 이 여자가 네가 아니라는 걸 눈치도 못 챘으니까 넌 얌전히 내 곁에 있어.”“고작 그걸로 내 남편을 속일 수 있을 것 같아?”온지유는 대놓고 비웃으며 또박또박 말해주었다.“꿈. 깨!”“하, 그럼 우리 내기 하나 할까? 정말로 못 알아본 거라면 넌 영원히 내 노예로 사는 거고, 눈치챈 거라면 내가 가면을 벗어서 누구인지 밝힐게. 어때?”가면남은 승부욕이 생겨났다.짝퉁 온지유는 그가 3개월 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든
시간이 1분 1초 흐르자 처음에 자신만만하던 가면남은 초조해지게 되었다.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임무를 완수했다는 연락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렇다는 것은 그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짝퉁이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이기도 했다.정말로 그렇다면 그의 정체가 드러날 가능성이 아주 컸고 그가 있는 곳으로 여이현이 사람을 끌고 올 가능성이 있었다.“온지유, 너희 둘 사이가 아주 깊지?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여이현이 그 짝퉁이 네가 아니라는 걸 눈치챘겠어.”가면남은 시선을 돌려 온지유를 보았다. 비록 계획은 실패했지만 그에겐 온지유가 있었으니 아직은 괜찮았다.어차피 그의 손에 잡혀 있는 온지유로 하나로 여이현이든 신무열이든 협박해서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두 사람 모두 온지유가 죽길 바라지 않았으니까.이런 좋은 인질이 손아귀에 있었으니 절대 그가 망할 리가 없었다.그는 온지유의 곁으로 다가간 뒤 가면을 벗었다. 그저 한없이 평범한 얼굴이었다.“내기는 끝났어. 내가 졌지. 난 약속대로 내 얼굴을 보여주긴 했지만 한 가지 알려줄 게 있지. 내 얼굴을 본 사람은 대부분 죽었다는 걸 말이야!”말을 하면서 그는 가방에서 주사기를 꺼냈고 전처럼 마취제를 온지유에게 주사했다.약물이 온지유의 몸속에 퍼지면 저항하기는커녕 그가 휘두르는 대로 휘두를 수 있게 된다.그러나 그다음 순간 온지유는 묶었던 손을 풀고 빠르게 주사기를 빼앗은 뒤 그의 어깨에 찔러 넣어버렸다. 대량의 약물이 남자의 몸에 들어가고 남자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어떻게 이럴 수가?”그는 분명 꽉 묶어두었지만 온지유는 그것을 혼자의 힘으로 풀어냈을 뿐만 아니라 반격까지 했다.“이제 상황이 뒤바뀌었네? 지금은 네가 내 인질이야.”온지유는 당연히 그의 질문에 대답할 생각이 없었고 그녀의 말에 남자는 지옥에 떨어진 기분이었다.온지유는 남자를 제압한 뒤 남자의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 관자놀이에 들이댔다.“암영 조직은 네가 이끌어가고 있는 거지? 네가 암영의 보스냐고. 하지만 총 앞에서는 누구
여이현은 당연히 휴가를 안 줄 수가 없었다.하지만 나도현에게 약혼까지 약속할 상대가 있을 거라곤 전혀 몰랐다. 애초에 그에게는 첫사랑이자 평생의 원한을 품고 있는 상대가 있었기 때문이다....“나도현, 제발 여기서는 안 돼... 내가 부탁할게...”작은 화장대 앞에서 나도현의 품에 갇힌 양시은은 그에게 애원하고 있었다.남자는 애원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도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고 오히려 더 원망 가득한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이제야 나한테 애원을 하는 거야? 내가 전에 너한테 애원했을 때가 생각나?”양시은은 목에 무언가가 턱 막혀버린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고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도현아, 예전에는 내가 잘못했어. 하지만 채은이는 아무 잘못 없잖아. 채은이가 밖에 있으니까...”오늘은 그녀의 동생인 양채은의 약혼식이었고 밖에서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그러나 그녀는 친동생의 남편이 될 사람에게 이렇듯 모욕을 당하고 있었다.엄청난 두려움과 죄악감이 파도처럼 밀려와 그녀를 휘 감싸면서 몸을 덜덜 떨게 되었다.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니 나도현은 더 흥분했다.“양시은, 너도 두려움이 뭔지 알긴 아는구나? 난 또 네가 두려움 따위는 뭔지 모르는 줄 알았잖아!”그녀가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그와 결혼하려는 상대가 그녀의 친동생인데 말이다.양시은은 반항하고 싶었지만 나도현의 품에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갇혀 버렸고 심지어 그는 그녀를 수치스러운 자세로 만들어 강압적으로 거울 앞에 눌러버렸다.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양시은은 안색이 창백해졌다.“나도현! 내가 죽어야 그만둘 거야?”그녀는 4년 전에 그에게 상처를 준 일로 자신을 뼛속까지 증오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죽겠다고?”나도현은 픽 코웃음을 치면서 독사보다 더 사악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그건 너한테만 편한 일이잖아. 양시은, 난 네가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못하게 만들 거야!”똑똑.이때 문을 두드리는
양시은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양채은은 잡았던 그녀의 손을 놓은 채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걸어갔다.그러다가 양채은은 화장대 앞에 놓인 나도현의 핸드폰을 발견하게 되었다. 숨 참고 지켜보고 있던 양시은은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이젠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거지?'“태경 씨도 참. 핸드폰을 여기에다 흘리고 갔나 보네.”양채은은 나도현의 핸드폰을 들고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전혀 의심하지 않는 것 같은 모습에도 양시은은 안도할 수 없었고 얼른 화제를 돌렸다.“오늘은 네가 주인공이니까 얼른 밖으로 나가자. 난 이번에도 화장실로 달려가 봐야 할 것 같아.”말을 마친 양시은은 양 채는 이 말하기도 전에 얼른 화장실로 도망치듯 나와버렸다. 문을 꼭 잠근 후에야 그녀는 숨을 몰아 내쉴 수 있었다.다만 화장실에서는 나도현의 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고 다시 그녀를 문으로 가둬버렸다.나도현의 손은 언제나 정확하게 그녀를 잡아버렸고 양채은의 목소리가 아까처럼 문밖에서 들려왔다.“언니,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어. 얼른 병원에 가봐. 내가 지금 태경 씨한테 가서 기사님 붙여달라고 할게.”“아니야. 괜찮아. 참을 만해. 뭐가 어찌 되었든 네 약혼식이 더 중요하잖아.”양시은은 최선을 다해 평온한 목소리를 내자 말을 마친 양채은은 나도현을 찾으러 가보겠다고 했다...만약 찾다가 나도현이 그녀와 함께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라도 한다면... 양시은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지만 양채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언니, 어디가 어떻게 불편한데. 자꾸 고집부리면서 참으려고 하지 마. 아프면 바로 병원에 가. 난 이만 가볼 테니까.”이내 양시은은 멀어져 가는 양채은의 발걸음 소리를 듣게 되었다. 힘이 풀려버린 양시은은 문에 기댔지만 머리 위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역시 양시은이네. 연기를 너무 잘해.”나도현이 다정했던 모습을 알고 있었던 그녀는 현재 자신을 비웃고 괴롭히는 모습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 저도 모르게 이를 빠득 갈면서 주먹을 움켜쥐었다.“너한테 미안해야 할
양시은은 나도현이 양채은을 진심으로 좋아해서 약혼식까지 올리는 것이 아님을 확신했다.이것은 결국 그녀에게 복수하기 위한 엄청난 함정이었고 나도현은 이미 오래전부터 양채은이 그녀의 동생이라는 것을 알고 이런 계략을 꾸민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녀는 거절할 수 없었다.“채은이한테는 말하지 마. 내가 어떻게든 방법을 생각해볼 테니까.”“그래. 오늘 밤 난 네가 내 개가 되는 모습을 봐야겠어. 반드시 날 만족시켜야 할 거야.”나도현은 피식 웃으며 그녀를 아래로 깐 뒤 뜨거운 숨결을 그녀의 귓가에 불어넣었다.두 사람 사이엔 알콩달콩한 분위기는 없었고 오로지 무한한 살얼음판만 존재했다.양시은은 겨우 그에게서 벗어나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채은이 그녀의 곁으로 돌아와 말했다.“태경 씨는 대체 어디 갔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서 내가 약국 가서 약 좀 사 왔어. 언니, 이따가 저녁에 내가 패물을 팔아서 하민이 병원비를 어떻게든 마련해볼게.”양채은의 말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양시은의 심장을 난도질하는 것 같았다.양채은은 그녀를 신경 써 줄 뿐만 아니라 하민이도 신경 써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 때문에 이런 계략을 꾸민 나도현을 생각하니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다.“그러지 마. 그 패물들은 네 약혼자가 준 거잖아. 그런데 팔아버리고 나중에 어디에 있냐고 물어보면 어떻게 설명하려고?”양채은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이미 나한테 줬으니까 내 거인 거지. 게다가 태경 씨도 말했어. 약혼하고 3개월 후에 결혼하자고. 언니, 이 패물들은 비싸지 않아. 나중에 나랑 태경 씨 월급 받게 되면 그때 또 하민이 수술비 마련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보자.”기대가 가득한 목소리에 양시은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그 사람도 너와 같은 평범한 직장인이야?”“나는 비서고 태경 씨는 변호사야. 지금 도현 씨의 명의로 집 한 채와 차가 있어. 대놓고 돈을 요구하기엔 입이 떨어지진 않지만 도현 씨가 준 패물은 내가 팔 수 있어. 나중에 결혼하고 나면...
“걱정하지 말아요.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의사 선생님께 알려드릴게요.”자신을 도와주는 사람의 말을 들은 양채은은 그제야 마음이 놓여 눈을 감을 수 있었다.나도현은 어둠 속에서 양시은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고 술도 몇 잔 마셨지만 정신은 점점 더 멀쩡해졌다.똑똑똑.이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공허한 사무실에 더 크게 울려 퍼졌다. 그는 안 올 줄 알았던 양시은이 돌아온 것이라 생각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나 문을 열자 그 미소는 사라지고 싸늘함만 남게 되었다.“누구시죠?”라이더 복을 입은 남자는 느껴지는 서늘한 한기에 저도 모르게 몸을 덜덜 떨었다. 그는 얼른 들고 있던 쇼핑백을 건넸다.“나도현 씨 맞으시죠? 퀵 서비스입니다.”‘하, 머리를 쓰긴...'나도현은 눈을 가늘게 접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쇼핑백을 받은 후 문을 닫아버렸다.‘괜찮아.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두고 보자고!'배달 기사는 그제야 안도하며 서둘러 1층으로 내려갔다.야심한 밤 응급실은 전체 도시에서 가장 바쁜 곳이었고 의사와 간호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보호자는요?”간호사가 달려 나와 물었지만 젊은 커플은 고개를 저었다.“저희도 몰라요. 우연히 길에 쓰러져 있는 걸 발견해서 데리고 온 거예요. 배 속에 아이가 있다고 하니까 아이도 살려주세요.”“저희는 현재 산모분의 안전만 확보할 수 있습니다.”간호사는 조급해 미칠 지경이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신고였다. 다른 건 몰라도 일단 산모의 목숨부터 살려야 했으니까.밤새 치료한 끝에 양채은의 상태는 겨우 안정되었고 날 밝기 전에 그녀는 깨어나게 되었다. 눈앞에 보이는 하얀 천장에 자신이 어디로 실려 왔는지 깨닫고 황급히 약을 갈러 와준 간호사의 팔을 잡았다.깜짝 놀란 간호사는 그녀가 깨어난 것임을 확인한 후에야 진정했다.“아직 상태가 좋은 건 아니니 푹 쉬고 있으세요. 제가 담당 선생님을 불러드릴게요.”그러나 양채은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고 빤히 보면서 거의 히스테리를 부
양채은은 고개를 돌리자 눈 부신 빛을 보게 되었다. 황급히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너무 다급하게 움직였던 탓에 중심을 잃고 그만 넘어져 버렸고 작은 트럭은 휘청이며 달리더니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등을 스치며 뒤에서 멈추었다.‘아파!'온몸의 온기가 빠져나가며 점차 의식이 흐릿해졌다. 이마에선 어느새 식은땀이 가득했다. 복부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통증에 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을 올려 만져보았고 하체에선 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트럭 운전자는 자신이 사고를 쳤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그녀를 힐끗 보더니 바로 시동을 걸며 도망쳐 버렸다.차가운 밤바람이 텅 빈 도로 위로 불어오고 있었고 그녀는 혼자 있었다. 살이 찢어질 듯한 고통이 그녀의 이성을 붙잡고 있었고 가슴 속에선 증오의 불씨가 피어올랐다.양시은은 급하게 따라 나왔지만 양채은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 늘 일을 그르치는 자신을 탓하며 원망하듯 머리를 때렸다.핸드폰을 들어 양채은에게 전화를 걸어보아도 양채은은 받지 않았고 아마도 여전히 자신을 원망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마 더는 그녀의 연락을 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그렇다면 양채은이 진정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린 후 다시 만나 대화를 해보기로 했다. 그녀와 나도현은 더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말할 생각이다.게다가 나도현은...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생각을 그만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때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낯선 번호였지만 전화기 너머로는 나도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시은...”양시은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나 힘들어. 채은이가 지금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겠고 할 말이 있으면 채은이 찾은 뒤에 해.”나도현은 흥미롭다는 어투로 말했다.“아, 그래? 양채은을 찾은 뒤에 삼자대면하고 싶은 건가?”양시은은 그가 너무도 원망스러웠지만 이를 빠득 갈며 그를 설득하는 수밖에 없었다.“채은이랑 결혼하기로 했으면 그럼 잘해줘. 채은이는 좋은 사람이니까.
나도현의 갈라진 목소리는 마음에 꾹꾹 눌러 담고 있던 것을 억지로 쥐어짜 내는 것처럼 들려와 양시은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고 자신이 이 상황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그때 그녀는 확실히 그를 떠났고 그와의 감정을 포기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사정이 있었다.“나도현, 나는...”양시은이 입을 열려던 순간 나도현이 말을 잘랐다.“그만 말해! 듣고 싶지 않으니까!”나도현은 격한 반응을 보이며 그녀의 말을 잘랐고 마치 무언가로부터 회피하려는 듯했다.양시은은 다시금 눈물이 맺혔고 무력감이 밀려왔다. 더는 할 말이 없었던 그녀는 고개를 돌려 모든 걸 받아들였고 수치심과 절망을 느꼈다.나도현이 원하던 바를 이루려던 그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사무실의 적막을 깨버렸다.“도현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충격을 받은 듯한 목소리에 나도현과 양시은은 모두 당황해했다.고개를 돌리니 문 앞에서는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고 양채은이었다.양채은의 안색은 창백해졌고 두 눈을 커다랗게 뜬 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핸드폰을 들고 있던 손에 힘이 얼마나 많이 들어갔는지 손가락이 하얗게 될 정도였다.“두 사람...”그녀는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다. 자신의 약혼자와 친언니가 함께 있지 않은가.양시은은 살면서 이렇듯 당황하게 된 건 처음이었고 황급히 옆에 있던 옷을 잡아 몸을 가렸다.“채은아, 내가 다 설명할게. 절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양채은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양시은의 뺨을 때리곤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안 들어! 안 들을 거라고! 양시은, 이 사기꾼! 넌 지금도 날 속이고 있었던 거야! 절대 용서 안 해!”말을 마치자마자 양채은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며 창백한 얼굴엔 절망이 보였다.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양시은은 가슴이 너무도 아팠고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힘없는 목소리로 변명만 할 뿐이다.“채은아, 나도현은 그냥 취해서 날 너로 착각했을 뿐이야.
양시은은 씁쓸함이 물 밀듯 밀려왔고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채은이는 내 동생이니까 내가 더 잘 알아. 어떻게든 잘 설명할 거야.”나도현은 순간 취기가 올라 붉어진 눈으로 그녀를 빤히 보았다.“그러면 나는? 나는 뭐가 되는데? 네가 쉽게 버린 나는 뭐가 되냐고!”양시은은 그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볼 엄두가 나지 않아 고개를 돌린 뒤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이미 지나간 일이고 이젠 의미 없잖아.”나도현은 담담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 순간 자신이 그녀를 그리워했던 시간이 가소롭게 느껴졌다.“이미 모든 걸 내려놓은 사람에게 당연히 의미 없게 들리겠지. 하지만 상처를 받지 않고서야 내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그 말을 끝으로 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돌변하더니 그녀의 가느다란 목을 꽉 잡고 거칠게 키스해버렸다. 양시은은 점차 숨이 쉬어지지 않아 뒷걸음질을 쳤다.“나도현, 취했어? 정신 좀 차려! 난 채은이가 아니라고!”그는 당연히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동안 사무치게 그리워했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녀의 손을 꽉 제압한 뒤 사무소 문을 열고 들어갔다.양시은은 결국 화를 내고 말았다.“지금 대체 뭐 하자는 거야? 넌 채은이 약혼자야. 나한테는 매제가 될 사람이라고.”그녀의 매혹적인 목소리가 그의 두 귀로 흘러들어왔다.“하, 그래? 양시은, 넌 돈이 더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나? 그런 사람이 도덕은 잘 알고 있네. 어이없게도 말이야. 그럼 내 내연녀 노릇 해. 돈을 줄 테니까.”그는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 같은 풀려버린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양시은은 다가오는 그의 단단한 가슴을 밀어내며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변호사 일도 잘 풀리고 예쁜 아내도 있는데 뭐하러 아이도 있는 나를 내연녀로 삼는데? 네가 듣기에도 어처구니없지 않아?”그녀가 말을 하고 있는 와중에 나도현은 이미 그녀를 자기 사무실 책상까지 밀고 왔다.그는 몸을 굽히며 마디마디 선명한 손가락으로 천천히 그녀의 보드라운 살결을 만졌다. 손가
양시은은 있는 힘껏 나도현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힘 차이가 있었던지라 뿌리치지 못했다.나도현은 안간힘을 쓰고 있는 양시은을 보았다. 화를 내면서 버둥거리고 있는 것 외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하지만 허효진이 분명 말했었다. 양시은이 녹음해서 그를 구해준 것이라고. 그의 어머니도 같은 말을 했었지만 양시은은 딱히 그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나도현은 그녀의 목적이 궁금해졌다.“양시은, 대체 뭐 하자는 거야? 그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녹음을 하고 아들이 인질로 잡혔는데도 나를 위해 녹음 파일을 내놓았다고. 그런데 지금은 또 나한테 동생이랑 잘살라고 하네? 네가 뭔데? 네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야?”나도현은 양시은을 뼛속까지 원망하는 섬뜩한 눈빛으로 보았다. 양시은은 그가 진실을 알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알게 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지 않은가.그녀는 전부 원해서 한 일이었고 절대 원하는 것이 있어 한 것이 아니었다.“내 동생의 배 속에는 네 아이가 있어. 게다가 이미 약혼도 했잖아. 나도현, 네가 일을 벌였으면 책임져. 내 동생은 널 아주 사랑하고 있으니까.”양시은의 말에 나도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나더러 책임을 지라고? 양시은, 네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그러는 너는 날 책임졌나?”양시은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만약 상황이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면 누가 사랑하는 사람을 포기하고 돈을 선택하겠는가.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비꼬아 말했다.“나도현, 이미 지나간 일인데 왜 자꾸 신경 쓰는 거야? 아직도 나한테 미련이 남아서 다시 잘해보길 바라는 건 아니지?”양시은은 나도현이 자신을 사랑한 만큼 원망하고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애당초 그녀의 배신으로 그녀를 원망하고 있는 것이었기에 그녀도 딱히 탓할 것도 없었다.하지만 나도현은 이 일에 양채은을 끌어들였고 임신까지 시켰으니 당연히 양채은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나도현은 원래부터 양시은을 원망하고 있는 데다가 양시은의 말을 들으니 화가 치밀었다.
나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계속 술만 마셨다. 최주하는 뭐라고 더 말하고 싶었지만 여이현이 그에게 눈치를 주었고 최주하는 입을 꾹 다물게 되었다.그는 꽤나 많은 술을 마시게 되었고 여이현과 배진호는 먼저 자리를 떠나게 되었다. 지석훈도 일 때문에 먼저 자리를 뜨게 되었다.룸 안에는 최주하와 나도현만 남게 되었고 최주하는 나도현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잊을 수 없다면 그럼 받아들여. 아이와 친해질 수 없다고 해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만큼 잘해주면 되는 거잖아. 양시은이랑 함께 사는데 아이가 뭐가 중요하겠어?”설령 그렇다고 해도 양시은의 첫사랑은 그였다. 하지만 다른 남자와 함께 지내는 모습을 절대 두고만 볼 수 없었다. 그가 여전히 신경 쓰고 있는 것은 양시은의 포기와 배신이었다. 이 두 가지 때문에 양시은과 다시 잘 되는 것을 꺼리고 있다.“오늘 이 술은 내가 살 테니까 넌 더 놀다가 가. 난 이만 집으로 가봐야겠어.”나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걸음을 옮겼다.최주하는 그런 나도현의 기분과 표정을 눈치챘다. 가슴이 아주 답답해 보였고 아직도 마음이 복잡한 것 같으니 당연히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기에 최주하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다만 나도현은 문을 열자마자 양시은을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평생 양시은의 얼굴을 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양시은은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그는 걸음을 옮겨 양시은에게 다가가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그러나 보폭이 컸던 나도현은 몇 걸음 만에 따라잡아 그녀의 손을 잡았다.“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게다가 양시은은 청소 도구와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양시은은 나도현이 오해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낄만한 일을 한 적 없는 양시은은 당연히 억울함을 느끼고 싶지 않아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오해하지 마. 난 너 때문에 여기 온 게 아니야. 난 여기서 일하고 있어.”일하고 있다는 그녀의 말에 나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법대를 다니며 성적도
나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떠나버렸다.그는 확실히 양시은과 양채은 자매를 찾아가지 않았고 여이현과 친구들을 만났다. 그들과 만나기로 한 장소는 경성의 유명한 클럽이었고 여이현은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배진호는 핸드폰을 든 채 끊임없이 누군가와 문자를 보내고 있었고 최주하와 지석훈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도현은 너무도 심란했다.“두 사람, 이렇게 만난 것도 아주 오랜만인데 자꾸 핸드폰만 하고 있을래? 평소에도 그러는 거야? 안 힘들어?”나도현은 이내 술을 원샷했다. 그의 머릿속엔 온통 양시은의 생각으로 가득했다. 배진호는 소파에 널브러지며 말했다.“힘들 리가 있나요. 이런 기분이 뭔지 모르죠? 너무도 행복한 이 기분을 말이에요. 예전에는 감정이라는 것이 하등 쓸모없는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직접 사랑을 하고 보니 정말 행복하네요.”배진호는 정말로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그는 권다솔과 수많은 일이 있었고 함께 손을 잡고 세계 여행하면서 세상에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권다솔이 곁에 있는 것보단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나도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최주하는 눈짓을 했다.“참나. 그게 지금 우리 앞에서 할 소리예요? 그래도 이해는 가네요. 여이현 곁에서 얼마나 참고 있었겠어요. 그동안 참고 있어서 수고했네요. 연애하고 싶은 걸 대체 어떻게 참았대?”배진호는 화도 나지 않았다.“참을 게 뭐가 있겠어요. 그때는 제게 일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기에 딱히 연애할 생각도 없었죠. 하지만 지금은 아내가 있는 게 너무도 행복하네요.”“쯧쯧. 두 사람 정말 똑 닮았네. 나중에 진호 씨에게 딸이 생기면 분명 여이현처럼 매일 우리에게 딸 사진만 보여주겠네요! 안 봐도 뻔해요!”여이현이 예전에 어떤 사람인지 그들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허구한 날 무뚝뚝한 표정을 했고 온지유가 그의 곁에서 비서 일을 오랫동안 했는데도 결혼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매일매일 아들과 딸 사진을 보여주면서 사랑스러운 눈길로
나도현은 입술을 짓이겼다. 지금 이 기분을 어떻게 형언해야 할지 몰랐다. 양시은이 돈을 위해 자신을 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양시은의 아들도 자신과 혈연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양시은은 그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니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나도현은 더는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네 할머니는 아무런 잘못도 없으시잖아. 걱정하지 마. 네 할머니는 내가 어떻게든 보살펴줄 테니까.”“고마워.”허효준은 고개를 숙이면서 감사 인사를 전했다. 나도현도 고개를 까닥거리며 인사를 받아준 뒤 허효준과 멀어졌다.그가 경찰서에서 나오자 박은희는 사특한 기운을 몰아낸다며 소금을 뿌려댔고 나도현은 가만히 있었다.박은희의 의식이 끝난 후에야 나도현은 차에 탈 수 있었다.“대체 누구한테 부탁해서 절 구해내신 거예요?”나도현은 허효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박은희는 양시은과 했던 거래를 잊지 않았다. 하지만 이 공로를 아무것도 모르는 임다혜에게 돌리고 이 사실에 대해 알린다면 더 불리해질 것이었기에 결국 사실대로 말해주었다.“양시은이 어떻게 녹음 파일을 구했는지 모르겠지만 나한테 주면서 거래를 하자더구나. 양시은 아들이 인질로 잡혀 있었어.”모든 게 허효준이 했던 말과 일치했다.나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술을 짓이겼다. 박은희는 그런 나도현의 안색을 살피며 잔소리를 해댔다.“너도 얼른 양시은을 향한 마음을 접어. 그러면 네가 한 짓에 관해 더는 묻지 않으마. 하지만 앞으론 반드시 내가 하라는 대로 해. 임다혜랑 결혼도 다음 달에 해버려.”박은희는 양시은을 여전히 인정하지 않았기에 당연히 양채은도 인정할 리가 없었다. 더구나 나도현은 예전에 쓰던 이름으로 양채은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나도현도 진심으로 대한 적 없는 여자를 더욱 며느리로 받아들일 리가 없지 않겠는가.나도현은 비록 양채은에게 진심은 아니었지만 박은희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를 순 없어 차갑게 말했다.“임다혜는 어머니가 좋아하는 사람이잖아요.”“내가
천사와 악마의 목소리는 이러했다.“하민이는 원래부터 아픈 아이였잖아. 네 언니는 애초에 널 동생으로 생각한 적도 없는데 왜 언니 입장까지 고려해야 하는 거지? 그런 사람이라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하는 거야!”악마의 목소리가 점차 그녀의 이성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천사의 목소리는 여전히 악마와 대항하고 있었다.“안 돼. 아이가 아직 어리잖아...”그러자 악마는 다시 반박했다.“양채은, 만약 네가 손 놓고만 있다가 네 아이가 사라진 뒤에야 복수할 생각이야?”양채은은 당연히 자신의 아이가 사라지길 바라지 않았다.몇 년 동안 그녀는 항상 노력했지만 양시은은 그녀가 노력하는 모습을 본 적 없었고 심지어 약혼식 그날에도 나도현과 뒹굴고 있었다.분명 나도현은 그녀의 약혼자이고 그녀의 배 속에 있는 아이의 아빠인데도 말이다. 오로지 그녀의 배 속에 있는 아이만 나도현에게 아빠라고 불러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양채은의 눈빛이 점점 싸늘해졌다....한편 나도현은 녹음 파일 덕분에 검찰과 경찰은 허효준을 소환해 조사하기 시작했고 허효준이 다른 누군가와 나도현을 모함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나도현을 석방했다.나도현이 나오자 허효준이 들어가게 되어 두 사람의 상황은 정반대가 되었다.원래는 그저 스쳐 지나가게 되겠지만 나도현은 허효준 앞에 서 있었다.그는 처음부터 자신이 누군가에게 모함당했을 거라곤 생각도 하지 않았다. 여하간에 변호사가 된 순간부터 그의 손으로 들어온 사건은 전부 잘 해결되었으니 말이다. 더구나 그에겐 나씨 가문이 있었으니 아무도 그를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그런데 허효준이 누군가와 손을 잡고 자신을 모함했다고 하니 나도현은 배신감에 가슴이 아팠다.“허효준, 난 널 제일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어. 난 너도 내 소꿉친구들이랑 같은 취급을 하고 있었다고.”여이현과 최주하, 지석훈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다. 허효준은 그의 대학교 시절 친구였지만 그는 변호사가 되었고 허효준은 판사가 되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다시 친해져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