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진호는 아버지 배상준의 얼굴이 시뻘게진 것을 보고 한마디 거들었다.“아버지, 괜히 화내지 마세요. 나이 드신 분들은 화를 잘못 내다 병 얻기 쉬워요. 어머니도 그렇잖아요.”정미진이 쓸데없는 데까지 간섭하지만 않았더라면 오늘 수술실까지 들어가는 사태는 없었을 것이다.배상준은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아버지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나 더는 너랑 얘기 안 해. 다솔이 좀 바꿔 봐.”“다솔 씨 바쁩니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저한테 하세요. 딱히 할 말 없으시면 전화 끊겠습니다.”배진호는 철벽을 단단히 세웠다. 배상준이 권다솔을 들볶으려는 게 뻔히 보여서 그가 나서서 막아 줄 생각이었다.“이건 제가 혼자 한 결정입니다. 다른 사람 탓할 거 없어요.”“그래, 이제 네가 완전히 독립했나 보구나. 아무도 널 말릴 수 없다는 거지?” 배상준은 버럭 화를 낼 듯하더니 결국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더 이어 가다간 욕부터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저 멍청한 녀석 때문에 피가 거꾸로 솟는구나.” 배상준은 전화기 건너에서 이를 갈았다.통화가 끝나자 권다솔은 배진호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진호 씨, 아버님 건강 괜찮으실까요? 아까 보니까 엄청 화가 나신 것 같았는데...”“괜찮아요. 그래도 제 아버지인데 스무 해 넘게 같이 살면서 못 말리는 성격이라는 건 뻔히 알죠.” 배진호는 고개를 저었다.권다솔도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들은 복도에서 한참을 기다렸고 마침내 수술실 문이 열렸다. 배진호는 재빨리 의사에게 다가갔다.“저희 어머니 상태가 어떤가요?”“절반 정도 성공했습니다. 일단 목숨은 건졌어요. 그런데 하반신이 마비됐습니다. 언제 나아질지 저도 확답 못 드립니다. 환자 본인 체질이나 운에도 달렸으니까요.” 의사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오랜 진료 경험상 이렇게 병을 끌다가 막판에야 뛰어드는 케이스가 드물긴 해도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미리 치료받았으면 충분히 개선할 여지가 있었을 텐데 스스로 상태
배진호에게는 강경책도 온정도 통하지 않았다.권다솔이 병실에 들어섰을 때, 정미진은 혹시 또 찾아와서 따지려는 건 아닌가 긴장했다.“아주머니, 병원비는 다 계산해 뒀어요. 여기서 편히 요양하세요. 원하시면 퇴원 후에 좋은 요양원을 알아봐 드릴 수도 있고요.” 권다솔의 목소리는 무척 쌀쌀해 보였다.그녀로선 이미 많은 일을 겪었기에 더는 어머님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앞으로는 그냥 아주머니라고 부르기로 했다.정미진은 얼떨떨했다. 권다솔이 굳이 자신을 보러 와 줬다니 말이다.배진호는 얼마 전 아버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간단히 정미진에게 현재 상황을 알리고 곧장 권다솔과 함께 병실을 나갔다.정미진만 혼자 병상에 누워 오랫동안 멍하니 있었다.“아주머니.” 배성연이 갑자기 입을 뗐다. “사실 전부터 드리고 싶었던 말이 있었어요. 아주머니께서 정말 심하셨어요. 물론 아주머니는 제 친척이고, 저한테도 많은 걸 챙겨 주셨지만... 이제 제 양심을 속이면서까지 편들긴 어려워요.”배성연은 혹시라도 잘못 거들었다간 이 집안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조력자가 될까 봐 두려웠다. 그녀는 스스로 해를 부르는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다.정미진은 중얼거렸다.“권다솔은 어떻게 또 임신을 한 걸까...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 거네.”그 말을 들은 배성연은 귀를 막고 싶었다.“임신이 뭐가 어때서요? 오빠가 수술까지 했는데, 복원해 봐야 성공할지도 모르잖아요. 이렇게 된 게 차라리 잘된 거예요. 아주머니, 죄송하지만 이젠 제발 그만 좀 하세요. 오빠는 애초에 다솔 씨 없이 못 산다고요.”“그래, 나 안 할래. 이제 그냥 치료나 잘 받으면서 더 살아 보는 수밖에 없지.” 정미진은 진심으로 체념한 듯했다. 그런데 문제는 석규리였다. 그녀는 배진호가 마음을 돌이켜 자신에게 돌아오길 애타게 기다렸는데 되레 정미진이 완전히 손을 뗀다는 소식을 들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석규리는 곧장 병원으로 달려와 정미진이 누워 있는 병상 앞에서 따졌다.“아주머니, 그동안
정미진은 화가 나서 석규리를 향해 말을 퍼부었다.“내가 그동안 정말 눈이 삐었지. 너 같은 애를 우리 집 며느리로 들이려고 했다니. 다행히 우리 아들이 널 안 좋아해서 망정이야. 혹시라도 네가 우리 집안 문턱을 밟았으면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놨겠구나!”석규리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그건 아주머니가 먼저 절 꼬드긴 거잖아요. 처음엔 절 내연녀로 들여놓으려고 하면서 약 섞인 차까지 마시게 했고요. 그게 제 몸에 어떤 영향을 줬을지 누가 알아요?”석규리가 정미진을 몰아붙이며 날을 세웠다.이미 관계가 완전히 틀어졌으니, 석규리는 들을 때 가장 불쾌할 법한 말들만 골라서 내뱉었다.“두 가지 선택을 줄게요. 진호 씨랑 결혼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방법은 아주머니가 알아서 하면 되죠. 진호 씨한테 약을 한 번 넣었으면 두 번도 못 넣겠어요? 그게 안 되면 저한테 50억 원을 보상금으로 주면 됩니다.”석규리는 노골적으로 거액을 요구해 왔다. 정미진은 그 액수에 놀라 숨이 턱 막혔다.“50억? 꿈도 야무지구나!”그토록 큰돈이면 한 세대가 아니라 세 세대가 먹고살아도 모자라지 않을 터였다.배진호의 자금에 그만큼 여유가 있는지도 의문이었고, 설령 있다고 해도 그건 배진호가 땀 흘려 번 돈이었다. 석규리에게 내줄 이유가 없었다.“돈을 못 주겠어요? 그럼 어쩔 수 없네요.”석규리는 휴대폰을 꺼내 카메라를 정미진 쪽으로 돌렸다.정미진은 곧바로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뭘 하려는 거야?”“아주머니의 선행을 네티즌에게 알릴 건데요. 진호 씨가 적어도 기업의 대표쯤은 되죠? 그리고 그 아내분도 권씨 가문 장녀 아니던가요. 이 스캔들이 온라인에 터지면 아주머니는 비난받고 끝나겠죠.”석규리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마치 자신은 두려울 게 없다는 듯이 말이다.어차피 잃을 게 없으니 50억은 어떻게든 뜯어내겠다는 태도였다.“석규리,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정미진은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몸을 가누고 싶어도 하반신 마비인 상태에서 이 자세를 고치기조차
석규리는 한 발 뒤로 물러서 휴대폰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렸다. 그러곤 입 모양으로 돈을 내놓으라는 뜻을 보였다.다음 순간, 정미진이 침대 머리맡에 놓인 뜨거운 물 주전자를 실수로 치고 말았다. 주전자가 바닥에 떨어지며 커다란 소리를 냈고 뜨거운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정미진도 석규리도 뜨거운 물을 뒤집어썼다.“아! 아주머니, 일부러 그러신 거 아니에요?”석규리는 화가 나 이를 악물었다.병실엔 다른 사람이 없었고, 석규리는 화풀이를 할 기회라도 찾으려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권다솔이 의사를 데리고 들어섰다. 그녀는 석규리를 보고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다시 침대에 누워 있는 정미진을 살폈다. 속이 복잡했지만 정미진이 어떤 사람인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다솔아, 어서 저년 휴대폰을 뺏어! 지금 라이브 켜서 우리 집안 망치려고 해!”정미진이 다급하게 권다솔에게 도움을 청했다.다정하게 불린 이름을 들은 석규리의 표정은 한층 더 일그러졌다.어째서일까. 예전에 그녀를 다정하게 부른 사람도 정미진이었고, 이제 와서 구박하며 내쫓으려는 것도 정미진이었다.물론 석규리가 돈에 눈이 멀어 부잣집에 시집가고 싶어 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정미진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부추기지만 않았어도 굳이 배진호에게 마음을 품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정신을 차린 권다솔은 순식간에 석규리의 휴대폰을 낚아챘다. 보니 실시간 시청자 수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권다솔은 단숨에 라이브 방송을 끄고 휴대폰을 한쪽에 던져두었다.“석규리 씨, 안 그래도 할 말이 있었는데 잘 찾아왔어요. 이제 예전 일도 새 일도 같이 정리해요.”권다솔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다른 길을 찾을 기회도 많았을 텐데 석규리는 제 발로 가장 천대받을 길을 골라 들어선 셈이었다.“대체 뭘 정리하겠다는 거예요? 뭐가 됐든 다 아주머니가 한 짓이에요. 아주머니가 당신 해치려다 유산까지 시켰잖아요!”석규리는 권다솔 앞에서 여전히 기가 죽었다. 그저
병원 밖으로 나오던 중, 권다솔은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석규리가 저지른 일에 대해 이제 제대로 된 계산을 할 때가 온 것이다.그때 한 대의 차가 그녀 앞에서 멈춰 섰고 창문이 내려가자 배진호의 얼굴이 보였다. 표정에는 걱정이 가득했다.“혹시 어머니가 다솔 씨를 힘들게 했어요?”“아니에요. 오히려 후회하면서 용서를 구하셨지만 제가 아직 마음의 문이 안 열려서...”권다솔은 차 문을 열고 올라탔다. 그리고 조금 전 병실에서 있었던 일을 전부 이야기해 주었다.이야기를 들은 배진호는 권다솔의 손을 꼭 잡았다.“앞으로 우리는 그냥 각자 편하게 살아요. 명절이나 제사 때 정도만 제가 혼자 집에 다녀올게요. 다솔 씨는 억지로 갈 필요 없어요.”피붙이라고 해서 부모와 완전히 끊을 수는 없지만, 굳이 권다솔까지 또 겪게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권다솔은 그의 배려를 느끼고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석규리 일까지 처리한 후, 두 사람은 가족에게 잠깐 인사를 전하고 곧바로 비행기에 올랐다.비행 내내 둘은 나란히 붙어 있었고, 권다솔은 배진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이렇게 쭉 행복하면 좋겠어요. 진호 씨가 이혼을 언급했을 때 사실 정말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그땐 괜히 완고하게만 굴었어요.”“제가 더 잘했어야 했어요. 일찍 집안 문제를 정리했다면 다솔 씨가 그렇게까지 상처 입진 않았을 텐데.”배진호는 권다솔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췄다.“불편했던 일들은 이제 끝났으니 꺼내지 말죠. 조금 자요. 눈뜨면 같이 폭포도 보러 가요.”“진호 씨도 잠깐 눈 좀 붙여요.”권다솔이 고개를 들어 그와 입술을 살짝 맞췄다.두 사람은 이 행복이 영원하리라 굳게 믿었다....그 무렵, 여이현은 회사 새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동시에 어떤 조직을 수사하느라 무척 바빴다.배진호가 권다솔과 화해했으니 이 프로젝트를 그가 맡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전화를 걸었는데 돌아온 답변은 단 두 마디였다.“저희 신혼여행 중이에요. 프로젝트 이야기는 돌아가서 하면 안 될까요?”“언제쯤 돌아
여이현은 고개를 들고 나성원에게 물었다.“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나요?”“물론이죠, 대표님. 사실 전 여기서 제 한계를 뛰어넘고 싶어 왔습니다.”나성원의 목소리에는 강한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그는 원래부터 일에 대한 열의가 남달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학생 시절부터 여러 대기업을 전전하며 인턴 생활을 해냈을 리 없었다. 주어진 업무가 아니어도 배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하려 애썼다.졸업 후 귀국한 이유도 이곳에서 더 크게 성장하기 위해서였다.“마침 새 프로젝트가 하나 있어요. 기획안은 완성된 상태고 세부적인 부분을 보완하면 되죠. 그리고 전체 진행을 맡아줄 분이 필요한데 할 수 있겠어요?”여이현은 서류를 그의 앞에 놓았다.“뭐든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제게 물어봐도 좋아요.”물론 말은 그렇게 했어도 프로젝트 하나를 단독으로 맡는 건 일반 보조 업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난이도가 높았다.나성원은 바로 답하지 않고 자료를 꼼꼼히 훑었다. 그리고 나서야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대표님,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좋습니다. 그럼 이번 달부터 기본급을 20% 인상할게요. 프로젝트 진도에 따라 추가 커미션도 책정해 드리겠습니다. 만약 프로젝트를 무리 없이 완수한다면 그만큼 대우도 확실히 해 드릴 겁니다.”여이현은 결코 악덕 업주가 아니었다. 지인의 동생이라고 해서 급여나 처우를 이유 없이 깎고 싶지 않았다.나성원은 돈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편이었다. 집안이 아주 부유하진 않아도 넉넉했기에 해외 유학을 감당할 수 있었고, 박사 과정 중에도 받았던 월급으로 꽤 많은 돈을 모았다.그가 진짜 필요로 하는 건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할 기회였다.프로젝트 일정을 대략 정리한 뒤, 여이현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제 곧장 집에 가서 온지유에게 전화를 걸어 금방 돌아간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막상 전화를 걸자 통화 중이었다.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집에 가는 길에 온지유와 별이가 좋아하는 간식을 몇 가지 샀다.한편, 온지유는 법로와 통화하고
온지유의 미간은 갈수록 더 깊게 찌푸려졌다.법로의 태도가 오늘따라 이상했다. 지난번에 온지유가 여이현과 외출할 때 온하윤을 며칠 동안 법로에게 맡기려 했더니 변명을 대며 거절하지 않았던가.그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나이 드신 분에게도 본인만의 생활이 있겠거니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이 전화를 들으니 도무지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온지유는 속에 드는 의구심을 일단 억누르고 겉으론 내색하지 않았다.“지금 하윤이 자고 있어요. 이번 주말 정도면 별이가 학교에 안 가니까, 그때 저희 셋이 아버지한테 갈까요?”“그래, 네가 편하면 그때 오면 된다.”법로는 전화를 끊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마침내 병실 문이 열리고 담당 의사가 들어왔다.“수액 주사 놓겠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치료 건은 좀 더 생각해 보셨나요?”법로는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이성적으로는 치료가 옳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간암 말기 환자라 해도 항암치료에 성실히 임하면 수명이 몇 년은 더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화학요법이 가져오는 고통과 변화가 너무 컸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몸도 급격히 쇠약해진다. 딸에게 그런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그래도 저는 치료를 권하고 싶어요. 간암 말기는 완치가 쉽지 않아도 적극적으로 대처하면 몇 년 더 사는 분도 많습니다. 그리고 선생님도 살고 싶어 하시잖아요. 그런데 왜 치료를 안 받으시려는 거예요?”의사는 계속 설득했다.돈이 없어서 치료를 못 받는 상황도 아니었고 법로 본인이 죽고 싶어 한다고 보기도 힘들었다.의사는 법로에게 강한 생존 의지가 있음을 느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무엇을 망설이는 걸까?“딸이 제가 망가진 모습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아요. 선생님 마음은 감사하지만 이 문제는 좀 더 생각해 봐야겠습니다.”법로는 더 깊이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돌렸다.처음 간암 말기 진단을 받았을 때, 그는 병원을 몇 군데씩 돌아다니며 재검사만 반복했다. 정신이 없어서 온지유와 아이들을 부를 여유도 없었다.시간이 흘러
별이와 법로 사이의 사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돈독해졌다. 별이는 그를 만나는 걸 정말 좋아했다.“맞다, 엄마. 오늘 숙제 다 했는데 확인해 주실 수 있어요?”온지유는 기쁘게 그리하겠다고 답했다.유치원 숙제는 워낙 간단했고 별이도 거의 실수 없이 해 놓아서 검사는 금세 끝났다.별이는 숙제를 챙겨 아래층으로 내려가 TV를 켰고, 온지유는 그 사이 온하윤과 놀아 주고 있었다.그때 초인종 소리가 났고 택배 기사가 물건을 건네주었다.온지유는 최근 온라인 쇼핑을 한 적이 없어서 여이현이 주문했으려니 생각하고 일단 열어 봤다.상자 안에는 몇 병의 약과 편지 한 통이 들어 있었다. 편지를 펼치자마자 온지유는 보낸 사람이 누군지 단박에 알아차렸다.바로 인명진이었다. 그가 자신을 율이라고 부르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편지에는 그가 최근 경성에 새 병원을 열어 본격적으로 이곳에서 활동할 예정이라는 점과 함께 약들은 직접 공수해 온 보약이니 그녀가 꼭 써 보았으면 좋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온지유는 고맙다는 의미의 짧은 문자를 보내고 약을 귀하게 챙겨 두었다. 그가 정성을 들여 마련한 것이라면 효과도 나쁠 리 없다고 믿었다.저녁에 여이현이 돌아오자, 온지유는 보약 이야기를 슬쩍 꺼냈다. 그리고 온 가족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다음 날 아침, 온지유는 아이들을 학교에 내려 준 뒤 집에 들러 이것저것 챙겼다. 특히 온하윤 기저귀와 분유, 젖병 등을 준비해 두고 시간에 맞춰 다시 학교로 가 별이를 데려 병원으로 향했다.법로는 그들이 내일쯤 방문할 거라 예상하고 전혀 대비를 하지 못했다. 침대 머리맡에 간암 말기 판정서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약을 들고 들어온 간호사는 그 서류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 자기 아버지도 비슷한 나이였고 암 판정을 받은 적이 있었다며 말문을 열었다.“말기라도 치료를 완전히 포기하면 안 돼요. 저희 아버지도 처음엔 극구 거절하셨지만 가족들이 전부 나서서 설득했고 덕분에 예상보다 1년은 더 사셨답니다.”이미 한 발은 저세상에 걸쳤더라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