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진호는 아버지 배상준의 얼굴이 시뻘게진 것을 보고 한마디 거들었다.“아버지, 괜히 화내지 마세요. 나이 드신 분들은 화를 잘못 내다 병 얻기 쉬워요. 어머니도 그렇잖아요.”정미진이 쓸데없는 데까지 간섭하지만 않았더라면 오늘 수술실까지 들어가는 사태는 없었을 것이다.배상준은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아버지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나 더는 너랑 얘기 안 해. 다솔이 좀 바꿔 봐.”“다솔 씨 바쁩니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저한테 하세요. 딱히 할 말 없으시면 전화 끊겠습니다.”배진호는 철벽을 단단히 세웠다. 배상준이 권다솔을 들볶으려는 게 뻔히 보여서 그가 나서서 막아 줄 생각이었다.“이건 제가 혼자 한 결정입니다. 다른 사람 탓할 거 없어요.”“그래, 이제 네가 완전히 독립했나 보구나. 아무도 널 말릴 수 없다는 거지?” 배상준은 버럭 화를 낼 듯하더니 결국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더 이어 가다간 욕부터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저 멍청한 녀석 때문에 피가 거꾸로 솟는구나.” 배상준은 전화기 건너에서 이를 갈았다.통화가 끝나자 권다솔은 배진호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진호 씨, 아버님 건강 괜찮으실까요? 아까 보니까 엄청 화가 나신 것 같았는데...”“괜찮아요. 그래도 제 아버지인데 스무 해 넘게 같이 살면서 못 말리는 성격이라는 건 뻔히 알죠.” 배진호는 고개를 저었다.권다솔도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들은 복도에서 한참을 기다렸고 마침내 수술실 문이 열렸다. 배진호는 재빨리 의사에게 다가갔다.“저희 어머니 상태가 어떤가요?”“절반 정도 성공했습니다. 일단 목숨은 건졌어요. 그런데 하반신이 마비됐습니다. 언제 나아질지 저도 확답 못 드립니다. 환자 본인 체질이나 운에도 달렸으니까요.” 의사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오랜 진료 경험상 이렇게 병을 끌다가 막판에야 뛰어드는 케이스가 드물긴 해도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미리 치료받았으면 충분히 개선할 여지가 있었을 텐데 스스로 상태
배진호에게는 강경책도 온정도 통하지 않았다.권다솔이 병실에 들어섰을 때, 정미진은 혹시 또 찾아와서 따지려는 건 아닌가 긴장했다.“아주머니, 병원비는 다 계산해 뒀어요. 여기서 편히 요양하세요. 원하시면 퇴원 후에 좋은 요양원을 알아봐 드릴 수도 있고요.” 권다솔의 목소리는 무척 쌀쌀해 보였다.그녀로선 이미 많은 일을 겪었기에 더는 어머님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앞으로는 그냥 아주머니라고 부르기로 했다.정미진은 얼떨떨했다. 권다솔이 굳이 자신을 보러 와 줬다니 말이다.배진호는 얼마 전 아버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간단히 정미진에게 현재 상황을 알리고 곧장 권다솔과 함께 병실을 나갔다.정미진만 혼자 병상에 누워 오랫동안 멍하니 있었다.“아주머니.” 배성연이 갑자기 입을 뗐다. “사실 전부터 드리고 싶었던 말이 있었어요. 아주머니께서 정말 심하셨어요. 물론 아주머니는 제 친척이고, 저한테도 많은 걸 챙겨 주셨지만... 이제 제 양심을 속이면서까지 편들긴 어려워요.”배성연은 혹시라도 잘못 거들었다간 이 집안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조력자가 될까 봐 두려웠다. 그녀는 스스로 해를 부르는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다.정미진은 중얼거렸다.“권다솔은 어떻게 또 임신을 한 걸까...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 거네.”그 말을 들은 배성연은 귀를 막고 싶었다.“임신이 뭐가 어때서요? 오빠가 수술까지 했는데, 복원해 봐야 성공할지도 모르잖아요. 이렇게 된 게 차라리 잘된 거예요. 아주머니, 죄송하지만 이젠 제발 그만 좀 하세요. 오빠는 애초에 다솔 씨 없이 못 산다고요.”“그래, 나 안 할래. 이제 그냥 치료나 잘 받으면서 더 살아 보는 수밖에 없지.” 정미진은 진심으로 체념한 듯했다. 그런데 문제는 석규리였다. 그녀는 배진호가 마음을 돌이켜 자신에게 돌아오길 애타게 기다렸는데 되레 정미진이 완전히 손을 뗀다는 소식을 들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석규리는 곧장 병원으로 달려와 정미진이 누워 있는 병상 앞에서 따졌다.“아주머니, 그동안
정미진은 화가 나서 석규리를 향해 말을 퍼부었다.“내가 그동안 정말 눈이 삐었지. 너 같은 애를 우리 집 며느리로 들이려고 했다니. 다행히 우리 아들이 널 안 좋아해서 망정이야. 혹시라도 네가 우리 집안 문턱을 밟았으면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놨겠구나!”석규리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그건 아주머니가 먼저 절 꼬드긴 거잖아요. 처음엔 절 내연녀로 들여놓으려고 하면서 약 섞인 차까지 마시게 했고요. 그게 제 몸에 어떤 영향을 줬을지 누가 알아요?”석규리가 정미진을 몰아붙이며 날을 세웠다.이미 관계가 완전히 틀어졌으니, 석규리는 들을 때 가장 불쾌할 법한 말들만 골라서 내뱉었다.“두 가지 선택을 줄게요. 진호 씨랑 결혼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방법은 아주머니가 알아서 하면 되죠. 진호 씨한테 약을 한 번 넣었으면 두 번도 못 넣겠어요? 그게 안 되면 저한테 50억 원을 보상금으로 주면 됩니다.”석규리는 노골적으로 거액을 요구해 왔다. 정미진은 그 액수에 놀라 숨이 턱 막혔다.“50억? 꿈도 야무지구나!”그토록 큰돈이면 한 세대가 아니라 세 세대가 먹고살아도 모자라지 않을 터였다.배진호의 자금에 그만큼 여유가 있는지도 의문이었고, 설령 있다고 해도 그건 배진호가 땀 흘려 번 돈이었다. 석규리에게 내줄 이유가 없었다.“돈을 못 주겠어요? 그럼 어쩔 수 없네요.”석규리는 휴대폰을 꺼내 카메라를 정미진 쪽으로 돌렸다.정미진은 곧바로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뭘 하려는 거야?”“아주머니의 선행을 네티즌에게 알릴 건데요. 진호 씨가 적어도 기업의 대표쯤은 되죠? 그리고 그 아내분도 권씨 가문 장녀 아니던가요. 이 스캔들이 온라인에 터지면 아주머니는 비난받고 끝나겠죠.”석규리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마치 자신은 두려울 게 없다는 듯이 말이다.어차피 잃을 게 없으니 50억은 어떻게든 뜯어내겠다는 태도였다.“석규리,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정미진은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몸을 가누고 싶어도 하반신 마비인 상태에서 이 자세를 고치기조차
석규리는 한 발 뒤로 물러서 휴대폰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렸다. 그러곤 입 모양으로 돈을 내놓으라는 뜻을 보였다.다음 순간, 정미진이 침대 머리맡에 놓인 뜨거운 물 주전자를 실수로 치고 말았다. 주전자가 바닥에 떨어지며 커다란 소리를 냈고 뜨거운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정미진도 석규리도 뜨거운 물을 뒤집어썼다.“아! 아주머니, 일부러 그러신 거 아니에요?”석규리는 화가 나 이를 악물었다.병실엔 다른 사람이 없었고, 석규리는 화풀이를 할 기회라도 찾으려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권다솔이 의사를 데리고 들어섰다. 그녀는 석규리를 보고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다시 침대에 누워 있는 정미진을 살폈다. 속이 복잡했지만 정미진이 어떤 사람인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다솔아, 어서 저년 휴대폰을 뺏어! 지금 라이브 켜서 우리 집안 망치려고 해!”정미진이 다급하게 권다솔에게 도움을 청했다.다정하게 불린 이름을 들은 석규리의 표정은 한층 더 일그러졌다.어째서일까. 예전에 그녀를 다정하게 부른 사람도 정미진이었고, 이제 와서 구박하며 내쫓으려는 것도 정미진이었다.물론 석규리가 돈에 눈이 멀어 부잣집에 시집가고 싶어 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정미진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부추기지만 않았어도 굳이 배진호에게 마음을 품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정신을 차린 권다솔은 순식간에 석규리의 휴대폰을 낚아챘다. 보니 실시간 시청자 수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권다솔은 단숨에 라이브 방송을 끄고 휴대폰을 한쪽에 던져두었다.“석규리 씨, 안 그래도 할 말이 있었는데 잘 찾아왔어요. 이제 예전 일도 새 일도 같이 정리해요.”권다솔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다른 길을 찾을 기회도 많았을 텐데 석규리는 제 발로 가장 천대받을 길을 골라 들어선 셈이었다.“대체 뭘 정리하겠다는 거예요? 뭐가 됐든 다 아주머니가 한 짓이에요. 아주머니가 당신 해치려다 유산까지 시켰잖아요!”석규리는 권다솔 앞에서 여전히 기가 죽었다. 그저
병원 밖으로 나오던 중, 권다솔은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석규리가 저지른 일에 대해 이제 제대로 된 계산을 할 때가 온 것이다.그때 한 대의 차가 그녀 앞에서 멈춰 섰고 창문이 내려가자 배진호의 얼굴이 보였다. 표정에는 걱정이 가득했다.“혹시 어머니가 다솔 씨를 힘들게 했어요?”“아니에요. 오히려 후회하면서 용서를 구하셨지만 제가 아직 마음의 문이 안 열려서...”권다솔은 차 문을 열고 올라탔다. 그리고 조금 전 병실에서 있었던 일을 전부 이야기해 주었다.이야기를 들은 배진호는 권다솔의 손을 꼭 잡았다.“앞으로 우리는 그냥 각자 편하게 살아요. 명절이나 제사 때 정도만 제가 혼자 집에 다녀올게요. 다솔 씨는 억지로 갈 필요 없어요.”피붙이라고 해서 부모와 완전히 끊을 수는 없지만, 굳이 권다솔까지 또 겪게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권다솔은 그의 배려를 느끼고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석규리 일까지 처리한 후, 두 사람은 가족에게 잠깐 인사를 전하고 곧바로 비행기에 올랐다.비행 내내 둘은 나란히 붙어 있었고, 권다솔은 배진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이렇게 쭉 행복하면 좋겠어요. 진호 씨가 이혼을 언급했을 때 사실 정말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그땐 괜히 완고하게만 굴었어요.”“제가 더 잘했어야 했어요. 일찍 집안 문제를 정리했다면 다솔 씨가 그렇게까지 상처 입진 않았을 텐데.”배진호는 권다솔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췄다.“불편했던 일들은 이제 끝났으니 꺼내지 말죠. 조금 자요. 눈뜨면 같이 폭포도 보러 가요.”“진호 씨도 잠깐 눈 좀 붙여요.”권다솔이 고개를 들어 그와 입술을 살짝 맞췄다.두 사람은 이 행복이 영원하리라 굳게 믿었다....그 무렵, 여이현은 회사 새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동시에 어떤 조직을 수사하느라 무척 바빴다.배진호가 권다솔과 화해했으니 이 프로젝트를 그가 맡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전화를 걸었는데 돌아온 답변은 단 두 마디였다.“저희 신혼여행 중이에요. 프로젝트 이야기는 돌아가서 하면 안 될까요?”“언제쯤 돌아
여이현은 고개를 들고 나성원에게 물었다.“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나요?”“물론이죠, 대표님. 사실 전 여기서 제 한계를 뛰어넘고 싶어 왔습니다.”나성원의 목소리에는 강한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그는 원래부터 일에 대한 열의가 남달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학생 시절부터 여러 대기업을 전전하며 인턴 생활을 해냈을 리 없었다. 주어진 업무가 아니어도 배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하려 애썼다.졸업 후 귀국한 이유도 이곳에서 더 크게 성장하기 위해서였다.“마침 새 프로젝트가 하나 있어요. 기획안은 완성된 상태고 세부적인 부분을 보완하면 되죠. 그리고 전체 진행을 맡아줄 분이 필요한데 할 수 있겠어요?”여이현은 서류를 그의 앞에 놓았다.“뭐든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제게 물어봐도 좋아요.”물론 말은 그렇게 했어도 프로젝트 하나를 단독으로 맡는 건 일반 보조 업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난이도가 높았다.나성원은 바로 답하지 않고 자료를 꼼꼼히 훑었다. 그리고 나서야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대표님,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좋습니다. 그럼 이번 달부터 기본급을 20% 인상할게요. 프로젝트 진도에 따라 추가 커미션도 책정해 드리겠습니다. 만약 프로젝트를 무리 없이 완수한다면 그만큼 대우도 확실히 해 드릴 겁니다.”여이현은 결코 악덕 업주가 아니었다. 지인의 동생이라고 해서 급여나 처우를 이유 없이 깎고 싶지 않았다.나성원은 돈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편이었다. 집안이 아주 부유하진 않아도 넉넉했기에 해외 유학을 감당할 수 있었고, 박사 과정 중에도 받았던 월급으로 꽤 많은 돈을 모았다.그가 진짜 필요로 하는 건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할 기회였다.프로젝트 일정을 대략 정리한 뒤, 여이현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제 곧장 집에 가서 온지유에게 전화를 걸어 금방 돌아간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막상 전화를 걸자 통화 중이었다.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집에 가는 길에 온지유와 별이가 좋아하는 간식을 몇 가지 샀다.한편, 온지유는 법로와 통화하고
온지유의 미간은 갈수록 더 깊게 찌푸려졌다.법로의 태도가 오늘따라 이상했다. 지난번에 온지유가 여이현과 외출할 때 온하윤을 며칠 동안 법로에게 맡기려 했더니 변명을 대며 거절하지 않았던가.그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나이 드신 분에게도 본인만의 생활이 있겠거니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이 전화를 들으니 도무지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온지유는 속에 드는 의구심을 일단 억누르고 겉으론 내색하지 않았다.“지금 하윤이 자고 있어요. 이번 주말 정도면 별이가 학교에 안 가니까, 그때 저희 셋이 아버지한테 갈까요?”“그래, 네가 편하면 그때 오면 된다.”법로는 전화를 끊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마침내 병실 문이 열리고 담당 의사가 들어왔다.“수액 주사 놓겠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치료 건은 좀 더 생각해 보셨나요?”법로는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이성적으로는 치료가 옳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간암 말기 환자라 해도 항암치료에 성실히 임하면 수명이 몇 년은 더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화학요법이 가져오는 고통과 변화가 너무 컸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몸도 급격히 쇠약해진다. 딸에게 그런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그래도 저는 치료를 권하고 싶어요. 간암 말기는 완치가 쉽지 않아도 적극적으로 대처하면 몇 년 더 사는 분도 많습니다. 그리고 선생님도 살고 싶어 하시잖아요. 그런데 왜 치료를 안 받으시려는 거예요?”의사는 계속 설득했다.돈이 없어서 치료를 못 받는 상황도 아니었고 법로 본인이 죽고 싶어 한다고 보기도 힘들었다.의사는 법로에게 강한 생존 의지가 있음을 느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무엇을 망설이는 걸까?“딸이 제가 망가진 모습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아요. 선생님 마음은 감사하지만 이 문제는 좀 더 생각해 봐야겠습니다.”법로는 더 깊이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돌렸다.처음 간암 말기 진단을 받았을 때, 그는 병원을 몇 군데씩 돌아다니며 재검사만 반복했다. 정신이 없어서 온지유와 아이들을 부를 여유도 없었다.시간이 흘러
별이와 법로 사이의 사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돈독해졌다. 별이는 그를 만나는 걸 정말 좋아했다.“맞다, 엄마. 오늘 숙제 다 했는데 확인해 주실 수 있어요?”온지유는 기쁘게 그리하겠다고 답했다.유치원 숙제는 워낙 간단했고 별이도 거의 실수 없이 해 놓아서 검사는 금세 끝났다.별이는 숙제를 챙겨 아래층으로 내려가 TV를 켰고, 온지유는 그 사이 온하윤과 놀아 주고 있었다.그때 초인종 소리가 났고 택배 기사가 물건을 건네주었다.온지유는 최근 온라인 쇼핑을 한 적이 없어서 여이현이 주문했으려니 생각하고 일단 열어 봤다.상자 안에는 몇 병의 약과 편지 한 통이 들어 있었다. 편지를 펼치자마자 온지유는 보낸 사람이 누군지 단박에 알아차렸다.바로 인명진이었다. 그가 자신을 율이라고 부르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편지에는 그가 최근 경성에 새 병원을 열어 본격적으로 이곳에서 활동할 예정이라는 점과 함께 약들은 직접 공수해 온 보약이니 그녀가 꼭 써 보았으면 좋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온지유는 고맙다는 의미의 짧은 문자를 보내고 약을 귀하게 챙겨 두었다. 그가 정성을 들여 마련한 것이라면 효과도 나쁠 리 없다고 믿었다.저녁에 여이현이 돌아오자, 온지유는 보약 이야기를 슬쩍 꺼냈다. 그리고 온 가족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다음 날 아침, 온지유는 아이들을 학교에 내려 준 뒤 집에 들러 이것저것 챙겼다. 특히 온하윤 기저귀와 분유, 젖병 등을 준비해 두고 시간에 맞춰 다시 학교로 가 별이를 데려 병원으로 향했다.법로는 그들이 내일쯤 방문할 거라 예상하고 전혀 대비를 하지 못했다. 침대 머리맡에 간암 말기 판정서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약을 들고 들어온 간호사는 그 서류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 자기 아버지도 비슷한 나이였고 암 판정을 받은 적이 있었다며 말문을 열었다.“말기라도 치료를 완전히 포기하면 안 돼요. 저희 아버지도 처음엔 극구 거절하셨지만 가족들이 전부 나서서 설득했고 덕분에 예상보다 1년은 더 사셨답니다.”이미 한 발은 저세상에 걸쳤더라
양시은은 입술을 짓이겼다. 피가 많이 흘러나왔던지라 안색이 창백해져 자조적으로 웃었다.“나는 내 주제를 알아.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너한테 상처를 주겠어?”나도현은 가슴이 갑갑해졌고 커다란 돌덩이가 가슴을 누르고 있는 것처럼 불편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접으며 싸늘한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양시은, 너 정말 뻔뻔하다.”박은희는 찬 바람만 부는 두 사람 사이를 보며 속으로 기뻐했고 이내 맞장구를 쳤다.“그깟 돈 때문에 너를 버리는 여자인데 왜 미련을 가지고 있는 거니.”“그만 하세요.”나도현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다시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이 여자에게 돈을 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럴 만한 가치도 없으니까요.”그는 시선을 돌려 양시은을 차갑게 보았다. 박은희는 속으로 아주 기뻐했다.“네가 정신을 차렸다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세상엔 좋은 여자는 많고 많단다. 너랑 결혼할 여자는 더 많고.”“나가서 말하죠.”나도현은 차갑게 말을 내뱉으며 밖으로 성큼성큼 나가버렸다.양시은은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더는 참을 수 없어 침대에 털썩 엎드리게 되었다. 상처를 금방 치료했던지라 여전히 아팠고 바늘로 꿰맨 곳이 찢어질 듯 아팠다.하지만 하민이는 여전히 양채은의 손에 있었기에 마음 놓고 편히 있을 수 없었다. 결국 비틀대며 병원을 나선 뒤 양채은에게 전화를 걸어보려고 했다. 모든 일은 그녀 때문에 일어난 것이고 하민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병실 밖을 나가자마자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주었고 청량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조심해요.”“고맙습니다.”양시은은 고개도 들지 않고 상대의 손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상대는 다시 그녀를 잡았다.“양시은?”상대의 목소리에선 놀라움과 반가움이 묻어나 이어 그녀는 창백한 얼굴을 들 수밖에 없었다.그녀의 눈앞에는 잘생긴 얼굴이 있었고 품이 좀 너른 의사 가운은 유난히도 남자에게 잘 어울려 보였다. 익숙한 얼굴이었지만 양시은은 조금 생각이 나지 않아 뜸을 들이며 말했다.
양시은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지만 나도현이 자신을 포기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8억보다는 아니라니...나도현이 강태경으로 살 때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돈을 아껴 쓰라는 말을 한 적 없었고 나중에 나도현이 된 후에도 손에 돈이 부족했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양시은의 말을 들으니 두 사람이 쌓았던 감정이 전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고 가소로웠다.“양시은, 돈이 필요하면 나한테 말해. 내 기분만 맞춰주면 8억보다 더 많은 돈을 얻을 수 있지 않나?”나도현은 상처받은 두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양시은이 한 말이 제발 전부 거짓이길 바랐다. 그녀는 나도현이 자신에게 잘해줬던 시절은 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입을 열려던 순간 밖에서 콰당 소리가 났다. 박은희가 있는 힘껏 문을 밀어 연 것이다.엄청난 기세를 내뿜던 박은희는 바로 양시은에게 시선을 돌렸다. 양시은은 그녀가 좋은 의도로 찾아온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입을 꾹 다문 채 박은희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박은희는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지 않고 문에 서 있었다. 거리가 조금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쩌렁쩌렁하게 들려왔다.“양시은 씨, 전에 8억 주면서 내가 뭐라고 했지? 내 아들 곁에서 떨어지라고 했잖아. 난 지금도 내 아들이랑 함께 있는 꼴 보고 싶지 않으니까 서로 좋게 합의 보자고. 얼마를 원하는지 말해.”박은희는 나도현이 양시은을 향한 마음을 접길 바랐다. 그래서 나도현이 보는 앞에서 양시은에게 얼마나 요구를 하는 것이냐고 물은 것이다. 양시은도 박은희가 대놓고 물어볼 줄은 몰랐다. 목구멍에 커다란 돌멩이가 막힌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고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팠다. 하지만 그녀에겐 다른 선택은 없었다.“그때는 8억이지만 지금은 적어도 2배 정도는 주셔야 할 거예요. 하지만 전에 거래한 것이 있으니 12억만 주시면 영원히 눈앞에서 사라져 드릴게요. 아니, 죽으라고 하셔도 돼요.”양시은은 한 글자씩 내뱉을 때 나도현을 똑바로 바라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아이는 양채은이 나도현과의 유일한 아이였다.이때 나도현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나도현의 전화에 그녀는 당연히 바로 받았다. 다만 그녀는 하민이에게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자리를 옮겼고 전화기 너머로 여전히 차가운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채은, 내가 예전에 쓰던 이름으로 네게 접근한 걸 인정해. 하지만 난 너한테 상처 주는 일은 한 적 없어. 네 배 속에 있는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야.”나도현의 말에 양채은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의 아이가 나도현의 아이가 아니라면 누구의 아이란 말인가. 게다가 그날 그녀의 옆에 있던 사람은 분명 나도현이었다.그러나 나도현은 그녀에게 영상 하나를 전송했고 그 영상 속엔 악취미로 가득한 재벌들이 있었다. 양채은은 바로 진실을 알게 되었다.나도현이 지금 이런 때에 그녀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있다는 건 그녀가 아무런 잘못도 없는 아이에게 화풀이하지 않기를 바라서였다. 하민이도 그녀가 예전에 온 힘을 다해 지켜주려고 했던 아이였으니까.아무리 이성을 잃었다고 해도 그녀는 직접 아이에게 손을 댈 만큼 미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결국은 어느 날 갑자기 그녀의 곁에 나타난 나도현은 그녀 때문이 아니라 양시은 때문이었다는 것이다.나도현은 그녀에게 이용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고 심지어 본명도 알려줄 생각도 없었다. 그녀에게 잘해주었던 것도 전부 그의 연기였다는 사실에 그녀는 역겨웠다.양채은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그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만나줄래요?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래요. 얼굴 마주 보면서 하고 싶거든요.”나도현은 이미 이 지경이 되었던지라 양채은과 만나 자세하게 얘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그녀의 요구를 받아들였다.“그래.”양채은은 먼저 시간을 알려주었다.“그럼 사흘 뒤에 봐요.”말을 마친 양채은은 전화를 끊어버렸고 나도현은 양채은과 했던 대화를 양시은에게 알려주었다. 침대에 힘없이 누워있는 양시은은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이미 양채은과 좋게 얘기가 끝났고 하민이와도 사이
나도현은 양시은이 자신을 위해 대신 칼에 맞아줄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당황하고 있던 순간에 양시은이 그의 손을 잡으며 애원했다.“나도현, 제발 하민이를 구해줘...”...양시은이 다시 눈을 떴을 땐 병원이었다.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양채은에게 문자를 보냈다.[양채은, 죽어야 할 사람은 나야. 내가 죽을 테니까 하민이는 살려줘. 하민이는 아무 잘못도 없잖아. 그리고 넌 하민이가 제일 좋아하는 이모잖아.]양채은은 지금 이성을 잃은 상태였던지라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그간 쌓은 정으로 설득하는 것이다. 아이를 잃은 양채은에게 당연히 통할 리가 없었다.양시은과 나도현의 아이는 멀쩡히 살아있었다. 양시은이 그녀를 동생으로 여기고 나도현을 본 순간 나도현의 정체를 알려주면서 그녀를 이용하려는 것 같다고 말했었더라면 이 정도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양시은은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녀가 나도현에게 푹 빠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결국 그녀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도 없고 나도현은 애초에 그녀를 사랑하지도 않았다. 모든 건 양시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녀는 죽게 되는 한이 있어도 양시은이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고 싶었다.“이모, 우리 여기에 며칠 동안 있는 거예요? 엄마가 보고 싶어요. 이모, 혹시 하민이가 잘못한 거 있어요? 왜 하민이랑 놀아주지 않는 건데요?”아이들은 감정에 민감했다. 양채은이 자신을 이곳으로 데리고 온 뒤 자신과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 순간 양채은은 마음이 누그러지며 아이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하민아, 만약 이모랑 엄마가 싸우면 하민이는 누구를 선택할 거야? 이모 말 믿어 줄 거야?”양채은은 양시은을 증오하고 있었지만 하민이 앞에서는 완전히 냉랭해질 수 없었다. 하민이는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조카였기 때문이다.전에 학교 다닐 때도 그녀는 학교 끝나자마자 하민이를 데리고 나와 간식도 사주면서 돌봐주었다. 심지어 돈만 생기면 하민이의
나도현은 차 키를 챙기고 외출하려고 하자 비서가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변호사님, 지금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아직 일정이 남아 있습니다만...”“오후 일정을 전부 뒤로 미루세요.”나도현은 말을 마친 후 성큼성큼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올라탄 그는 심지어 자신을 원망하기도 했다.‘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양시은이 한 말 때문에 고분고분 찾아간다고?!'그는 다시 한번 고민하다가 결국 찾아가 보기로 했다.이때 검은색 차에 앉은 흉악한 얼굴의 두 남자가 나도현을 지켜보고 있었고 그중 한 사람이 옆에 있던 파트너의 어깨를 툭툭 쳤다.“이봐요, 저 사람 맞아요?”고개를 푹 숙인 채 핸드폰으로 문자를 주고받던 남자는 고개를 확 들어 호화로운 차에 올라타는 나도현을 보더니 이를 빠득 갈았다.“맞아요. 저 사람이에요. 저 사람 때문에 내 아들이 형량 아주 많이 받았다고요. 내가 죽어 재가 되어버린다고 해도 저 사람만큼은 절대 잊지 않을 거예요.”“그럼 지금 혼자 차에 올라탄 이 시점이 아주 좋은 기회가 아닌가요?”두 사람은 그렇게 몰래 나도현의 뒤를 따라가게 되었고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보아하니 동료를 호출하는 것 같았다.양시은이 말한 무스 카페는 아주 외진 곳에 있었던지라 나도현은 내비게이션을 틀어서야 찾을 수 있었다. 카페 안으로 들어갔을 때 양시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이내 미간을 확 구겼다.‘이 여자가 설마 또 날 속인 건가?'가슴 속에 분노가 슬금슬금 피어올랐지만 고개를 돌리니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양시은을 발견했다.양시은은 양채은이 무슨 이유로 나도현을 부르라고 한 것인지 몰랐기에 일단 그에게 다가가는 수밖에 없었다.“왔어?”“어젯밤에는 신고하겠다고 협박하더니 오늘은...”나도현은 픽 소리를 내며 웃었다.“양시은, 이번엔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지?”“난...”양시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 후 그녀는 안을 가리키며 말했다.“일단 안으로 들
양시은은 뭔가를 할 기분이 아니었고 하민이의 안전만 걱정되었던지라 거의 울면서 애원했다.“하민이는 네 친조카잖아. 대체 뭐 하려는 거야? 하민이로 협박하지 않아도 난 널 언제든지 도와줄 수 있어.”양채은 피식 차갑게 웃었다.“양시은, 넌 뼛속까지 가식적인 사람이야. 손에 쥐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면서 뭘 어떻게 도와주겠냐는 거지?”양시은은 그녀를 설득하고 싶었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짜증이 극에 달한 양채은이 먼저 말을 가로챘다.“됐어. 쓸데없는 말 듣고 싶지 않으니까 나도현이나 불러.”양시은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뭐 하려고?”양채은은 픽 웃었다.“그건 나와 도현 씨 일이야.”양시은은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나랑 나도현은 이미 서로 뼛속까지 증오하고 있는 사이라 내가 불러도 안 올 수도 있어.”양채은의 목소리는 너무도 냉랭했다.“그건 네 사정이고. 하민이 무사하길 바라면 어떻게든 불러와.”양시은 침묵했다.지금의 양채은은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상태였고 얼른 하민이를 데리고 오지 못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아무도 몰랐다. 어떻게든 일단 양채은을 안심시켜야 한다.“그래, 알았어. 하지만 매일 하민이 목소리를 들려줘. 영상 통화도 하게 해줘.”양채은은 흔쾌히 답했다.“좋아. 하지만 신고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알린다면 네가 얼마나 멍청한 짓을 했는지 직접 보여줄 거야.”양시은은 침을 꿀꺽 삼키며 멈추지 않는 떨림을 억누르고 진지하게 대답했다.“알았어.”이내 침묵이 흐르면서 전파 소리만 들려왔다. 그녀는 양채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그녀가 먼저 뜸을 들이며 입을 열었다.“채은아, 나는...”말을 마치기도 전에 신호음 소리가 들려왔다. 양채은은 전화를 끊어버린 것이다. 끊겨버린 전화를 보며 양시은은 머릿속이 하얘졌다.손가락을 움직이며 한참 망설이다가 결국 나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민이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난처한 일이라고 해도 그녀는 어떻게든 해야 했다.번호를 누른 순
하민이의 말을 들은 양채은은 속으로 비웃으면서 담담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표정은 다소 음험하게 보였다.“날 괴롭힌 사람이 네 엄마라면?”하민이는 순간 당황하고 말았지만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우리 엄마는 이모를 괴롭히지 않을 거예요.”양채은은 그저 차갑게 웃기만 할 뿐이다.왜 양시은의 아이는 멀쩡히 살아있는데 자신의 아이는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해보고 이렇듯 조용히 하늘나라로 갈 수밖에 없는 걸까. 마음속에 원망만 남은 그녀는 양시은을 절대 가만히 두지 않으리라 생각했다.이상함을 감지한 하민이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엄마는요? 이모, 엄마 보러 갈래요.”양채은은 그런 하민이가 시끄럽게 느껴졌고 인내심 있게 말했다.“이모는 그냥 하민이랑 농담을 던진 거야. 이따가 도착하면 이모가 엄마한테 연락해줄게.”하민이는 그녀의 말에 바로 기분이 풀어져 즐거운 얼굴로 창밖의 풍경을 보았다.양시은은 아침 내내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는 양채은에 너무도 걱정되었다. 양채은은 항상 혼자 속으로 끙끙 앓으며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으니까. 뭐가 어찌 됐든 어젯밤 일에 관해서 그녀는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큰 희망을 품지 않고 전화를 걸었지만 뜻밖에도 양채은은 전화를 받아주었다. 양시은은 서둘러 설명했다.“채은아, 어젯밤 일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양채은의 목소리엔 떨림이 느껴졌다.“아직도 날 속이려고 그러는 거야? 너랑 나 사이엔 예전에도, 지금도 온통 거짓뿐인데 내가 어떻게 널 믿으라는 거야?”양시은은 목구멍이 막힌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채은아, 그럼 내가 하민이를 데리고 떠날게.”그녀는 힘겹게 이 말을 꺼냈다.“내 인생을 이미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양채은은 이를 빠득 갈며 말을 이었다.“떠나겠다고? 양시은, 난 네가 내 인생에서 영원히 사라져줬으면 좋겠어.”“내가 어떻게 하면 화가 풀릴까?”양시은은 느껴지는 무력감에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양채은은 고개를 숙이더니 핸드폰을 혼
“걱정하지 말아요.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의사 선생님께 알려드릴게요.”자신을 도와주는 사람의 말을 들은 양채은은 그제야 마음이 놓여 눈을 감을 수 있었다.나도현은 어둠 속에서 양시은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고 술도 몇 잔 마셨지만 정신은 점점 더 멀쩡해졌다.똑똑똑.이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공허한 사무실에 더 크게 울려 퍼졌다. 그는 안 올 줄 알았던 양시은이 돌아온 것이라 생각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나 문을 열자 그 미소는 사라지고 싸늘함만 남게 되었다.“누구시죠?”라이더 복을 입은 남자는 느껴지는 서늘한 한기에 저도 모르게 몸을 덜덜 떨었다. 그는 얼른 들고 있던 쇼핑백을 건넸다.“나도현 씨 맞으시죠? 퀵 서비스입니다.”‘하, 머리를 쓰긴...'나도현은 눈을 가늘게 접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쇼핑백을 받은 후 문을 닫아버렸다.‘괜찮아.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두고 보자고!'배달 기사는 그제야 안도하며 서둘러 1층으로 내려갔다.야심한 밤 응급실은 전체 도시에서 가장 바쁜 곳이었고 의사와 간호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보호자는요?”간호사가 달려 나와 물었지만 젊은 커플은 고개를 저었다.“저희도 몰라요. 우연히 길에 쓰러져 있는 걸 발견해서 데리고 온 거예요. 배 속에 아이가 있다고 하니까 아이도 살려주세요.”“저희는 현재 산모분의 안전만 확보할 수 있습니다.”간호사는 조급해 미칠 지경이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신고였다. 다른 건 몰라도 일단 산모의 목숨부터 살려야 했으니까.밤새 치료한 끝에 양채은의 상태는 겨우 안정되었고 날 밝기 전에 그녀는 깨어나게 되었다. 눈앞에 보이는 하얀 천장에 자신이 어디로 실려 왔는지 깨닫고 황급히 약을 갈러 와준 간호사의 팔을 잡았다.깜짝 놀란 간호사는 그녀가 깨어난 것임을 확인한 후에야 진정했다.“아직 상태가 좋은 건 아니니 푹 쉬고 있으세요. 제가 담당 선생님을 불러드릴게요.”그러나 양채은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고 빤히 보면서 거의 히스테리를 부
양채은은 고개를 돌리자 눈 부신 빛을 보게 되었다. 황급히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너무 다급하게 움직였던 탓에 중심을 잃고 그만 넘어져 버렸고 작은 트럭은 휘청이며 달리더니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등을 스치며 뒤에서 멈추었다.‘아파!'온몸의 온기가 빠져나가며 점차 의식이 흐릿해졌다. 이마에선 어느새 식은땀이 가득했다. 복부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통증에 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을 올려 만져보았고 하체에선 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트럭 운전자는 자신이 사고를 쳤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그녀를 힐끗 보더니 바로 시동을 걸며 도망쳐 버렸다.차가운 밤바람이 텅 빈 도로 위로 불어오고 있었고 그녀는 혼자 있었다. 살이 찢어질 듯한 고통이 그녀의 이성을 붙잡고 있었고 가슴 속에선 증오의 불씨가 피어올랐다.양시은은 급하게 따라 나왔지만 양채은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 늘 일을 그르치는 자신을 탓하며 원망하듯 머리를 때렸다.핸드폰을 들어 양채은에게 전화를 걸어보아도 양채은은 받지 않았고 아마도 여전히 자신을 원망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마 더는 그녀의 연락을 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그렇다면 양채은이 진정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린 후 다시 만나 대화를 해보기로 했다. 그녀와 나도현은 더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말할 생각이다.게다가 나도현은...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생각을 그만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때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낯선 번호였지만 전화기 너머로는 나도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시은...”양시은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나 힘들어. 채은이가 지금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겠고 할 말이 있으면 채은이 찾은 뒤에 해.”나도현은 흥미롭다는 어투로 말했다.“아, 그래? 양채은을 찾은 뒤에 삼자대면하고 싶은 건가?”양시은은 그가 너무도 원망스러웠지만 이를 빠득 갈며 그를 설득하는 수밖에 없었다.“채은이랑 결혼하기로 했으면 그럼 잘해줘. 채은이는 좋은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