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진은 화가 나서 석규리를 향해 말을 퍼부었다.“내가 그동안 정말 눈이 삐었지. 너 같은 애를 우리 집 며느리로 들이려고 했다니. 다행히 우리 아들이 널 안 좋아해서 망정이야. 혹시라도 네가 우리 집안 문턱을 밟았으면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놨겠구나!”석규리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그건 아주머니가 먼저 절 꼬드긴 거잖아요. 처음엔 절 내연녀로 들여놓으려고 하면서 약 섞인 차까지 마시게 했고요. 그게 제 몸에 어떤 영향을 줬을지 누가 알아요?”석규리가 정미진을 몰아붙이며 날을 세웠다.이미 관계가 완전히 틀어졌으니, 석규리는 들을 때 가장 불쾌할 법한 말들만 골라서 내뱉었다.“두 가지 선택을 줄게요. 진호 씨랑 결혼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방법은 아주머니가 알아서 하면 되죠. 진호 씨한테 약을 한 번 넣었으면 두 번도 못 넣겠어요? 그게 안 되면 저한테 50억 원을 보상금으로 주면 됩니다.”석규리는 노골적으로 거액을 요구해 왔다. 정미진은 그 액수에 놀라 숨이 턱 막혔다.“50억? 꿈도 야무지구나!”그토록 큰돈이면 한 세대가 아니라 세 세대가 먹고살아도 모자라지 않을 터였다.배진호의 자금에 그만큼 여유가 있는지도 의문이었고, 설령 있다고 해도 그건 배진호가 땀 흘려 번 돈이었다. 석규리에게 내줄 이유가 없었다.“돈을 못 주겠어요? 그럼 어쩔 수 없네요.”석규리는 휴대폰을 꺼내 카메라를 정미진 쪽으로 돌렸다.정미진은 곧바로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뭘 하려는 거야?”“아주머니의 선행을 네티즌에게 알릴 건데요. 진호 씨가 적어도 기업의 대표쯤은 되죠? 그리고 그 아내분도 권씨 가문 장녀 아니던가요. 이 스캔들이 온라인에 터지면 아주머니는 비난받고 끝나겠죠.”석규리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마치 자신은 두려울 게 없다는 듯이 말이다.어차피 잃을 게 없으니 50억은 어떻게든 뜯어내겠다는 태도였다.“석규리,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정미진은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몸을 가누고 싶어도 하반신 마비인 상태에서 이 자세를 고치기조차
석규리는 한 발 뒤로 물러서 휴대폰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렸다. 그러곤 입 모양으로 돈을 내놓으라는 뜻을 보였다.다음 순간, 정미진이 침대 머리맡에 놓인 뜨거운 물 주전자를 실수로 치고 말았다. 주전자가 바닥에 떨어지며 커다란 소리를 냈고 뜨거운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정미진도 석규리도 뜨거운 물을 뒤집어썼다.“아! 아주머니, 일부러 그러신 거 아니에요?”석규리는 화가 나 이를 악물었다.병실엔 다른 사람이 없었고, 석규리는 화풀이를 할 기회라도 찾으려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권다솔이 의사를 데리고 들어섰다. 그녀는 석규리를 보고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다시 침대에 누워 있는 정미진을 살폈다. 속이 복잡했지만 정미진이 어떤 사람인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다솔아, 어서 저년 휴대폰을 뺏어! 지금 라이브 켜서 우리 집안 망치려고 해!”정미진이 다급하게 권다솔에게 도움을 청했다.다정하게 불린 이름을 들은 석규리의 표정은 한층 더 일그러졌다.어째서일까. 예전에 그녀를 다정하게 부른 사람도 정미진이었고, 이제 와서 구박하며 내쫓으려는 것도 정미진이었다.물론 석규리가 돈에 눈이 멀어 부잣집에 시집가고 싶어 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정미진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부추기지만 않았어도 굳이 배진호에게 마음을 품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정신을 차린 권다솔은 순식간에 석규리의 휴대폰을 낚아챘다. 보니 실시간 시청자 수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권다솔은 단숨에 라이브 방송을 끄고 휴대폰을 한쪽에 던져두었다.“석규리 씨, 안 그래도 할 말이 있었는데 잘 찾아왔어요. 이제 예전 일도 새 일도 같이 정리해요.”권다솔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다른 길을 찾을 기회도 많았을 텐데 석규리는 제 발로 가장 천대받을 길을 골라 들어선 셈이었다.“대체 뭘 정리하겠다는 거예요? 뭐가 됐든 다 아주머니가 한 짓이에요. 아주머니가 당신 해치려다 유산까지 시켰잖아요!”석규리는 권다솔 앞에서 여전히 기가 죽었다. 그저
병원 밖으로 나오던 중, 권다솔은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석규리가 저지른 일에 대해 이제 제대로 된 계산을 할 때가 온 것이다.그때 한 대의 차가 그녀 앞에서 멈춰 섰고 창문이 내려가자 배진호의 얼굴이 보였다. 표정에는 걱정이 가득했다.“혹시 어머니가 다솔 씨를 힘들게 했어요?”“아니에요. 오히려 후회하면서 용서를 구하셨지만 제가 아직 마음의 문이 안 열려서...”권다솔은 차 문을 열고 올라탔다. 그리고 조금 전 병실에서 있었던 일을 전부 이야기해 주었다.이야기를 들은 배진호는 권다솔의 손을 꼭 잡았다.“앞으로 우리는 그냥 각자 편하게 살아요. 명절이나 제사 때 정도만 제가 혼자 집에 다녀올게요. 다솔 씨는 억지로 갈 필요 없어요.”피붙이라고 해서 부모와 완전히 끊을 수는 없지만, 굳이 권다솔까지 또 겪게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권다솔은 그의 배려를 느끼고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석규리 일까지 처리한 후, 두 사람은 가족에게 잠깐 인사를 전하고 곧바로 비행기에 올랐다.비행 내내 둘은 나란히 붙어 있었고, 권다솔은 배진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이렇게 쭉 행복하면 좋겠어요. 진호 씨가 이혼을 언급했을 때 사실 정말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그땐 괜히 완고하게만 굴었어요.”“제가 더 잘했어야 했어요. 일찍 집안 문제를 정리했다면 다솔 씨가 그렇게까지 상처 입진 않았을 텐데.”배진호는 권다솔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췄다.“불편했던 일들은 이제 끝났으니 꺼내지 말죠. 조금 자요. 눈뜨면 같이 폭포도 보러 가요.”“진호 씨도 잠깐 눈 좀 붙여요.”권다솔이 고개를 들어 그와 입술을 살짝 맞췄다.두 사람은 이 행복이 영원하리라 굳게 믿었다....그 무렵, 여이현은 회사 새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동시에 어떤 조직을 수사하느라 무척 바빴다.배진호가 권다솔과 화해했으니 이 프로젝트를 그가 맡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전화를 걸었는데 돌아온 답변은 단 두 마디였다.“저희 신혼여행 중이에요. 프로젝트 이야기는 돌아가서 하면 안 될까요?”“언제쯤 돌아
여이현은 고개를 들고 나성원에게 물었다.“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나요?”“물론이죠, 대표님. 사실 전 여기서 제 한계를 뛰어넘고 싶어 왔습니다.”나성원의 목소리에는 강한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그는 원래부터 일에 대한 열의가 남달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학생 시절부터 여러 대기업을 전전하며 인턴 생활을 해냈을 리 없었다. 주어진 업무가 아니어도 배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하려 애썼다.졸업 후 귀국한 이유도 이곳에서 더 크게 성장하기 위해서였다.“마침 새 프로젝트가 하나 있어요. 기획안은 완성된 상태고 세부적인 부분을 보완하면 되죠. 그리고 전체 진행을 맡아줄 분이 필요한데 할 수 있겠어요?”여이현은 서류를 그의 앞에 놓았다.“뭐든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제게 물어봐도 좋아요.”물론 말은 그렇게 했어도 프로젝트 하나를 단독으로 맡는 건 일반 보조 업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난이도가 높았다.나성원은 바로 답하지 않고 자료를 꼼꼼히 훑었다. 그리고 나서야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대표님,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좋습니다. 그럼 이번 달부터 기본급을 20% 인상할게요. 프로젝트 진도에 따라 추가 커미션도 책정해 드리겠습니다. 만약 프로젝트를 무리 없이 완수한다면 그만큼 대우도 확실히 해 드릴 겁니다.”여이현은 결코 악덕 업주가 아니었다. 지인의 동생이라고 해서 급여나 처우를 이유 없이 깎고 싶지 않았다.나성원은 돈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편이었다. 집안이 아주 부유하진 않아도 넉넉했기에 해외 유학을 감당할 수 있었고, 박사 과정 중에도 받았던 월급으로 꽤 많은 돈을 모았다.그가 진짜 필요로 하는 건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할 기회였다.프로젝트 일정을 대략 정리한 뒤, 여이현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제 곧장 집에 가서 온지유에게 전화를 걸어 금방 돌아간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막상 전화를 걸자 통화 중이었다.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집에 가는 길에 온지유와 별이가 좋아하는 간식을 몇 가지 샀다.한편, 온지유는 법로와 통화하고
온지유의 미간은 갈수록 더 깊게 찌푸려졌다.법로의 태도가 오늘따라 이상했다. 지난번에 온지유가 여이현과 외출할 때 온하윤을 며칠 동안 법로에게 맡기려 했더니 변명을 대며 거절하지 않았던가.그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나이 드신 분에게도 본인만의 생활이 있겠거니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이 전화를 들으니 도무지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온지유는 속에 드는 의구심을 일단 억누르고 겉으론 내색하지 않았다.“지금 하윤이 자고 있어요. 이번 주말 정도면 별이가 학교에 안 가니까, 그때 저희 셋이 아버지한테 갈까요?”“그래, 네가 편하면 그때 오면 된다.”법로는 전화를 끊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마침내 병실 문이 열리고 담당 의사가 들어왔다.“수액 주사 놓겠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치료 건은 좀 더 생각해 보셨나요?”법로는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이성적으로는 치료가 옳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간암 말기 환자라 해도 항암치료에 성실히 임하면 수명이 몇 년은 더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화학요법이 가져오는 고통과 변화가 너무 컸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몸도 급격히 쇠약해진다. 딸에게 그런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그래도 저는 치료를 권하고 싶어요. 간암 말기는 완치가 쉽지 않아도 적극적으로 대처하면 몇 년 더 사는 분도 많습니다. 그리고 선생님도 살고 싶어 하시잖아요. 그런데 왜 치료를 안 받으시려는 거예요?”의사는 계속 설득했다.돈이 없어서 치료를 못 받는 상황도 아니었고 법로 본인이 죽고 싶어 한다고 보기도 힘들었다.의사는 법로에게 강한 생존 의지가 있음을 느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무엇을 망설이는 걸까?“딸이 제가 망가진 모습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아요. 선생님 마음은 감사하지만 이 문제는 좀 더 생각해 봐야겠습니다.”법로는 더 깊이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돌렸다.처음 간암 말기 진단을 받았을 때, 그는 병원을 몇 군데씩 돌아다니며 재검사만 반복했다. 정신이 없어서 온지유와 아이들을 부를 여유도 없었다.시간이 흘러
별이와 법로 사이의 사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돈독해졌다. 별이는 그를 만나는 걸 정말 좋아했다.“맞다, 엄마. 오늘 숙제 다 했는데 확인해 주실 수 있어요?”온지유는 기쁘게 그리하겠다고 답했다.유치원 숙제는 워낙 간단했고 별이도 거의 실수 없이 해 놓아서 검사는 금세 끝났다.별이는 숙제를 챙겨 아래층으로 내려가 TV를 켰고, 온지유는 그 사이 온하윤과 놀아 주고 있었다.그때 초인종 소리가 났고 택배 기사가 물건을 건네주었다.온지유는 최근 온라인 쇼핑을 한 적이 없어서 여이현이 주문했으려니 생각하고 일단 열어 봤다.상자 안에는 몇 병의 약과 편지 한 통이 들어 있었다. 편지를 펼치자마자 온지유는 보낸 사람이 누군지 단박에 알아차렸다.바로 인명진이었다. 그가 자신을 율이라고 부르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편지에는 그가 최근 경성에 새 병원을 열어 본격적으로 이곳에서 활동할 예정이라는 점과 함께 약들은 직접 공수해 온 보약이니 그녀가 꼭 써 보았으면 좋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온지유는 고맙다는 의미의 짧은 문자를 보내고 약을 귀하게 챙겨 두었다. 그가 정성을 들여 마련한 것이라면 효과도 나쁠 리 없다고 믿었다.저녁에 여이현이 돌아오자, 온지유는 보약 이야기를 슬쩍 꺼냈다. 그리고 온 가족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다음 날 아침, 온지유는 아이들을 학교에 내려 준 뒤 집에 들러 이것저것 챙겼다. 특히 온하윤 기저귀와 분유, 젖병 등을 준비해 두고 시간에 맞춰 다시 학교로 가 별이를 데려 병원으로 향했다.법로는 그들이 내일쯤 방문할 거라 예상하고 전혀 대비를 하지 못했다. 침대 머리맡에 간암 말기 판정서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약을 들고 들어온 간호사는 그 서류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 자기 아버지도 비슷한 나이였고 암 판정을 받은 적이 있었다며 말문을 열었다.“말기라도 치료를 완전히 포기하면 안 돼요. 저희 아버지도 처음엔 극구 거절하셨지만 가족들이 전부 나서서 설득했고 덕분에 예상보다 1년은 더 사셨답니다.”이미 한 발은 저세상에 걸쳤더라
아프면 치료를 받아야 하는 법이다. 요즘 의료 기술이 발전한 데다가, 그들은 경제적 형편도 넉넉한 편이지 않은가.아픈 것이 사실이라면 왜 숨기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우리 먼저 들어가서 외할아버지께 직접 물어보자.”온지유는 속사정을 알지 못했기에 별다른 설명 없이 아이를 달랬다. 그리고 마음속에 의문을 품은 채 병실 문을 밀고 들어갔다.법로는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들어오는 사람이 간호사인 줄로만 짐작하고 짜증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아까 분명히 말씀드렸잖아요. 치료든 뭐든, 제 몸은 제가 결정하겠다고. 또 와서...”그러다 고개를 들어 온지유의 얼굴을 보자 나머지 말이 목에 걸려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곧 기쁨이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지유, 아니.. 오늘 온 거야? 아까 통화할 때 분명 내일쯤 온다고 했잖니. 별이 학교 때문에 무리하지 말라고 했는데.”“오늘은 학교가 일찍 끝났어요. 그래서 별이랑 하윤이 데리고 잠깐 들렀죠.”온지유는 병상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법로는 방긋 웃으며 이야기하던 중 불현듯 시선을 침대 머리맡으로 돌렸다.거기에는 간암 말기라는 문구가 선명한 진단서가 놓여 있었다. 이걸 온지유가 보면 더는 숨길 길이 없을 터였다.그는 얼른 진단서를 두 번 접어 베개 밑으로 밀어 넣었다. 행동이 워낙 황급했고, 그 얼굴에 비친 당혹스러운 기색도 뚜렷했다.온지유는 그 모습만으로도 무엇인가 감추는 것임을 직감했다. 병실에 놓인 서류라면 아마도 몸 상태와 관련된 것일 거다.“외할아버지!”별이는 깡총깡총 뛰어오더니 가방에서 빨간 종이꽃 하나를 꺼내 법로 곁에 놓았다.“이거 오늘 제가 받은 작은 칭찬 꽃이에요. 저도 한 송이, 엄마도 한 송이. 이제 외할아버지도 한 송이 드릴게요.”“와, 어쩜 이렇게 빨갛고 예쁜 꽃일까.”법로는 작은 꽃을 집어 자신의 옷에 꽂았다.살아오면서 온갖 귀한 화초를 다 봤어도, 별이 손에 들린 이 작은 종이꽃만큼 마음 뭉클해지는 건 없었다.그건 아이가 학교에서 잘해 선생님께 받은 상이
온지유는 법로가 일부러 숨기는 게 있다고 직감했다.하지만 지금은 확실한 증거도 없고 구체적으로 뭘 겪고 있는지 모르니, 그저 조심스레 말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아버지께서 요즘 평안하게 지내신다니까 제 마음도 놓이긴 해요. 그렇지만 정말 어디가 안 좋으시면 치료를 받으셔야죠. 의료 기술도 발달했고 우리 집이 돈이 모자란 것도 아니니까요. 더 오래 사셔서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도 보시면 좋잖아요. 나중에 둘이 결혼해서 결혼식 할 때 저희랑 같이 참석하시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그래... 만약 정말로 그런 날이 온다면 얼마나 좋겠니.”법로 역시 그 모습을 간절히 바랐다.하지만 그간 자신이 저지른 일들이 떠올라, 이런 병도 어쩌면 업보가 돌아온 게 아닌가 싶었다.그래도 죽기 전에 이렇게 친딸과 화해하고 나란히 앉아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것만 해도 그로선 감사했다. 사람은 만족할 줄 알아야 하니까.그렇게 생각하던 중 법로는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고 곧 극심한 기침이 터져 나왔다.온지유는 깜짝 놀라 얼른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고, 별이는 소리를 듣자마자 후다닥 달려가 컵을 챙겼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보온병을 들어 따뜻한 물을 부었다.별이는 물컵을 침대 앞으로 가져가 건네주었다.“외할아버지, 물 좀 드세요. 그러면 숨쉬기 훨씬 편해지실 거예요.”자신도 전엔 목이 따끔거릴 때 온지유가 따뜻한 물을 주었는데 마시고 나면 한결 괜찮아졌던 기억이 있었다.법로는 휴지로 입가의 피를 닦고 그 휴지를 뭉쳐 휴지통에 버렸다.그 뒤 별이가 준 물을 단숨에 마셨다. 분명 그냥 맹물이었는데 왠지 달큰한 기분이 들었다.“아버지, 제가 의사 불러서 간단히 검사라도 받아 보시죠. 약도 좀 처방받으면 좋을 텐데... 이렇게 기침하시면 너무 힘드시잖아요.”온지유는 이 기회를 틈타 의사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법로가 실제로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그러나 법로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그럴 거 없어. 어젯밤에 창문 열고 잤더니 감기에 좀 걸린 거야.
그 말을 들은 양시은이 하민의 말을 극구 부인했다.“하민아, 엄마 화 안 났어. 왜 그렇게 생각해?”양시은은 하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를 안심시켰다.“엄마가 예전처럼 행복해 보이지 않아서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괜찮아. 어른들한테는 항상 많은 걱정거리가 있는 거거든.”천진난만한 하민이를 바라보며 양시은은 자신의 고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저런 방식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어떻게 보면 걱정거리가 맞긴 하니까...’하민은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 이해한 듯 양시은의 손을 잡고 그녀를 위로했다.“하민이는 엄마가 슬프지 않았으면 좋겠거든요. 그러니까 제 기쁨 중 절반을 나눠줄게요.”그 말에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고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그 후, 양시은은 하민이와 함께 놀아주었다. 그러다가 밖에서 놀고 싶었는지 하민이는 갑자기 밖으로 나가버렸다. 하민이가 도대체 뭘 하러 간 건지는 그녀조차 몰랐다.양시은은 하민이가 멀리 가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사실 하민이는 그저 침실 밖으로 나간 것이었다.“아저씨, 말한 대로 했는데도 안 알려주는데요? 어떻게 할까요?”하민은 나도현의 목을 끌어안고 말했다.나도현은 하민의 코를 톡톡 건드리며 칭찬했다.“그래도 잘했어. 하민이가 엄마를 웃게 했잖아. 그게 제일 멋진 거야.”그 말을 들은 하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어린아이와 어른의 기쁨은 결국 무게가 다른 것이었다.하민이가 준 위로는 일시적이었다. 양시은은 그런 단순한 위로로 바로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고 나도현도 그녀가 걱정돼서 점점 우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양시은은 익명의 문자 한 통을 받았다. 문자 내용은 딱 한 줄 뿐이었다.“나 채은이야. 누군가가 두 사람한테 해를 끼치려고 하니까 꼭 조심해야 돼.”그 문자를 본 양시은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고 의자는 뒤로 넘어져 버리면서 큰 소리를 냈다.그 소리를 듣고 도우미가 달려왔다.“아가씨, 무슨 일 있으세요?”그녀는 계속해서
“아까 본 사람 말이야. 채은이가 맞을까?”양시은은 나도현을 꽉 붙잡으면서 물었다.“안돼. 가서 확인해 봐야겠어... 불이 그렇게 큰데 혹시나 벗어나지 못했으면 어쩌지?”양시은은 그저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힐 것 같았다.그녀의 여동생도 화재로 죽은 것이었으니 말이다.‘채은이가 아직 살아있다면? 살아있는데 또 내 부주의로 화재 속에서 죽게 된다면?’이런저런 생각이 들자 양시은은 마음을 추스를 수 없었다.“시은아, 가지 마. 이미 경찰들이 다 막아놔서 들어갈 수도 없어.”나도현은 그녀를 말렸다.“하지만 정말 채은이라면...”“너도 채은이라고 확신 못 하잖아.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잖아. 왜 그런 불확실한 걸 위해서 죽을 위험까지 감수하려고 해? 네가 다치면 하민이는 어떡하려고?”나도현은 한마디 덧붙이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네가 다치면 난 어떡해?’양시은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눈시울을 붉혔다.나도현은 그녀를 품에 안아주며 말했다.“내가 비서를 보내서 찾으라고 할게. 우리는 집으로 가자.”집으로 가자는 말에서 양시은은 따뜻한 온기를 느껴졌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응.”그때의 양시은은 몰랐다. 근처에 한 대의 밴이 주차되어 있었고 차 안에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웨이브 펌을 한 아름다운 여인이 앉아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녀는 마치 어두운 밤 속에서 피어난 장미와 같은 미모를 가졌다.만약 양시은이 그곳에 갔더라면 분명 깜짝 놀랐을 것이다.왜냐하면 그 여인이 바로 양시은이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양채은이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녀는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일부러 풀어준 거죠?”운전석에 앉은 남자한테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채은은 깜짝 놀라며 부인했다.“그런 거 아니에요.”“거짓말하지 마요. 다 봤거든요! 한 번 죽었으면서 아직도 그렇게 네 언니를 생각해 주는 건가요? 참 눈물겨운 혈연이네요.”“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그 남자는 그녀가 하는 말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그쪽이 뭐라고 변명하든
반지의 경매 최저 가격은 2천만 원이었다. 양시은이 부른 가격은 그 두 배였다.양시은의 돌발 행동으로 인해 그녀를 향한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변했다.그 순간부터 그녀는 더 이상 나도현의 파트너가 아닌 양시은이었다.그녀의 행동은 예상 밖이었지만 양시은이라면 할 만한 선택이었기에 나도현은 왠지 모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결국 그 반지는 양시은이 제시한 가격으로 낙찰되었다. 이 금액은 그녀가 예상했던 가격보다 훨씬 비쌌지만 그럼에도 양시은은 그 가격으로 낙찰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경매에서 낙찰된 반지가 그녀에게 전달되었다. 나도현이 그녀 대신 그것을 보관해 주었다.“그 반지가 되게 마음에 들었나 보네?”“어차피 경매에서 발생한 모든 수익은 자선 단체에 기부된다며? 손해 볼 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양시은은 이렇게 되물으며 나도현이 했던 질문을 넘겨 버렸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고 빨간 벨벳으로 덮인 반지 상자를 훑어보고 있었다. 그녀가 상자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나도현은 그런 양시은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그녀의 찡그린 미간을 펴주었다.갑작스러운 손길에 양시은은 깜짝 놀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나도현은 이마의 주름이 완전히 펴질 때까지 부드럽게 문지르며 말했다.“미간을 찡그린 표정이 마음에 안 들어서... 넌 웃을 때가 제일 예뻐.”그는 무심한 말투로 말했지만 그 속에는 왠지 모를 진지함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그의 손길에 양시은은 몇 초 동안 얼어 있었다.그러다가 무언가에 이끌려 옆쪽을 힐끗 쳐다본 그녀는 갑자기 두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양채은!”그러자 나도현이 그녀의 어깨를 잡고 양시은이 앞으로 달려가려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그가 본 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였다.그 여자는 검은 드레스를 입었는데 매우 마른 체형을 가져서 멀리서 보면 확실히 양채은으로 보였다.나도현은 예전에 조사했던 CCTV 자료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하지만 그의 생각이 정리되기도
양시은의 드레스는 나도현이 준비해 준 것이었다.오프숄더 드레스였는데 그녀에게 정말 잘 어울렸다. 양시은은 오랫동안 이런 드레스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약간 어색해하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계속 거울 앞을 서성이며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곤 했다.옆에서 그녀를 보고 있던 도우미가 말했다.“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아주 잘 어울려요.”양시은은 아무 말 없이 그냥 웃을 뿐이었다.“나도 그렇게 생각해. 엄청나게 잘 어울려.”뒤쪽에서 나도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시은이 뒤를 돌아보자 나도현이 수트를 입고 걸어 나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입은 건 세트로 나온 커플 의상인 듯했다.양시은은 갑자기 왠지 모를 불편한 느낌을 받았다.눈치가 빠른 도우미들은 그녀의 표정이 안 좋은 걸 보고 자리를 떴다.나도현은 주머니에서 목걸이를 꺼내며 말했다.“드레스까지 입었는데 어울리는 액세서리가 있어야지. 내가 고른 건데 어때?”양시은은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액세서리 같은 건 안 해도 돼...”나도현의 태도는 온화한 듯했지만 또 거절할 수 없을 만큼 단호했으니 말이다.양시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목걸이는 이미 그녀의 목에 걸려 있었다.그녀를 바라보는 나도현의 눈빛 반짝였다. 그는 입꼬리를 올리면서 말했다.“역시 예뻐. 내가 생각한 대로야.”그와 눈을 마주치고 있으면 양시은은 그의 깊은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애써 그를 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머릿속에는 계속해서 나도현의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가자.”나도현이 양시은을 끌어당겼다.나란히 차에 탑승한 그들은 행사장으로 향했다.시간은 그 정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행사장으로 가는 차들이 모두 질서를 잘 지켰기에 그들은 차가 막히지 않은 상태로 순조롭게 도착했다.전과 다른 점이라 하면 많은 사람들이 양시은을 보고 놀랐다는 것이다.대부분 사람들이 모두 놀라워하며 나도현 옆에 여자 파트너가 있다는 사실에 의아해했다.그때, 누
"시체도 찾았고 얼마 전 장례식마저 치렀는데 양채은이 정말로 살아 있다면 그 두 구의 시체는 누구 것일까?"너무 많은 문제가 풀리지 않자 나도현은 양시은을 안심시키기 위해 말했다.“사람을 찾더라도 지금은 아니야. 일단 차에 타. 돌아가서 얘기하자.”양시은은 밥도 먹지 못한 채 결국 집으로 돌아갔다. 점심쯤 잠에서 깬 하민이는 하인들이 만든 음식을 먹고 나서 낮잠을 잤다.거실 안.양시은은 침대에 누워서 놀이공원에서 보았던 그 여자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반복해 떠올렸다. 확실히 비슷한 점이 많았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니 그녀가 정말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닐까?나도현은 돌아오자마자 차준기가 찾아온 놀이공원의 감시카메라를 확인한 후 양시은에게 알려줬다.“내가 확인해 봤는데 양채은의 모습을 보진 못했어. 아마도 네가 잘못 본 것 같아.”“그래?”양시은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대답했다. 과연 그녀의 착각이었을까?“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내가 다시 찾아보라고 할게.”“알았으니까 그만 나가 줘. 혼자 있고 싶어.”양시은은 지금 그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양채은을 만난 줄 알았을 때 얼마나 기뻤던지. 지금은 그 순간의 기쁨과 사람을 잘못 봤다는 실망이 번갈아 가며 양시은을 괴롭혔다.나도현이 잔뜩 주눅이 든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럼 나는 이만 나가 볼게.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문이 살며시 닫혔다.양시은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손에 쥔 휴대전화로 그날 양채은으로부터 걸어온 전화를 찾아보았다. 몇 초밖에 되지 않는 통화 기록이 눈에 들어오자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처럼 양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그날 이후 양시은은 양채은에 대해 다시는 언급하지 않았다.양시은의 모습이 자꾸 마음에 걸렸던 나도현은 몰래 사람을 시켜 조사를 계속했다. 처음엔 아무것도 찾지 못할 거로 생각했는데 며칠 동안 찾아본 끝에 끝내 단서를 발견했다.그 단서는 어떤 기자가 찍은 사진이었다.처음엔 그 사람을 변장한 연예인으로 착각해서 몰래 사진을 찍었는데 잘못
하민이는 혼자서 회전목마를 신나게 타고 있었고 양시은은 머지않은 곳에 잇는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이때 나도현이 그녀에게 따뜻한 밀크티 한 잔을 건네며 입을 열었다.“날씨가 추우니까 따뜻한 거 마셔.”양시은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어디서 산 거야?”나도현이 가까운 곳에서 열심히 장사하는 직원들을 가리키자 직원들이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놀이공원에 고객이 세 명만 있다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면 사장이 얼마나 기뻐하실까.양시은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밀크티를 받았다.“고마워.”나도현이 놀랍게도 그녀와 같은 의자에 앉으려 하자 양시은은 의아한 표정으로 자리를 옆으로 비켜줬다. 나도현은 우아하고 깔끔한 사람이라 아무리 지쳐도 아무 곳이나 앉을 사람이 아니었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사실 직원들한테 의자 하나 달라고 해도 돼.”“괜찮아, 이렇게 앉는 게 좋아.”나도현이 담담하게 거절했다. 깔끔하고 짧은 머리로 한쪽 눈을 가리자 평소 차가운 모습과는 달리 따뜻해 보였다. 양시은은 그런 그의 모습에 잠시 마음을 뺏겼다.남자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자 양시은은 애써 다른 곳을 바라보며 딴청을 했다. 그러자 옆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낮고 부드러운 그 소리에 양시은의 귓방울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신이 나서 요리조리 쏘다니던 하민이는 체력이 부족해 점심을 먹기도 전에 지쳐버렸다.나도현은 미리 예약한 레스토랑에 전화를 걸어 확인하고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점심 먹으러 가자. 레스토랑 예약했어. 하민이가 자고 있으니 내가 안고 갈게.”말을 마친 그는 양시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양시은은 잠시 망설이다가 하민이를 조심스럽게 그에게 건넸다.나도현은 조심스럽게 양시은으로부터 하민이를 건네 안고 외투로 아이를 덮어 바람이 들어가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쌀쌀한 가을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있었지만 양시은의 마음속에는 따스한 기운이 스며들었다.나도현은 기사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어 위치를 알리고 있었
하민이 말을 들은 양시은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하민이는 도현 아저씨가 그렇게 좋아?”“네, 도현 아저씨는 하민이에게 아주 많은 선물을 줬어요. 그리고 전 그 할머니도 좋아요.”“그렇구나.”하민이는 도현 아저씨가 바로 꿈에서도 보고 싶다던 친아빠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양시은은 아무것도 모르고 마냥 신나 하는 하민이를 바라보며 가슴이 답답해 났다. 그때 나도현과 나씨 가문에게 하민이를 숨긴 결정이 옳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민이의 존재를 숨기지 않았다면 하민이는 어렸을 때부터 아빠와 함께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하민이가 말하다 말고 누구를 봤는지 얼굴에 웃음을 띤 채 양시은의 손을 놓고 뛰어갔다.“도현 아저씨!”하민이가 나도현의 품에 와락 안기자 남자는 무릎을 꿇고 그를 안아 들었다. 평소에 다른 이들에게 얼음처럼 차갑게 굴던 나도현이 하민이를 만날 때마다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저씨가 바빠서 이틀 동안이나 하민이를 못 만났는데 엄마 말은 잘 들었어?”“네. 제가 말을 잘 들어서 엄마가 절 데리고 놀러 간대요. 도현 아저씨도 같이 갈 수 있나요?”두 사람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기대하는 눈빛으로 양시은을 바라보았다.양시은은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정신 차리고는 하민이에게 다가가서 아이의 작은 얼굴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요 나쁜 아들, 도현 아저씨를 보면 엄마가 없어도 되는 거야? ”“아니요. 하민이는 엄마도 같이 있어야 되요.”양시은은 부드러운 눈길로 히죽 웃으며 그녀 손을 잡으러 다가오는 하민이를 바라보았다. 나도현이 머리를 돌려 그녀를 힐끔 보고는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얼른 타.”양시은은 하민이를 안고 차에 올랐다. 하민이가 엄마와 앉겠다고 해서 조수석에는 사람이 앉지 않았다. 나도현이 운전기사를 불러와서 그들과 함께 뒷좌석에 앉았다.가운데 하민이가 끼어 있으니 거리가 너무 가깝지 않았기에 양시은의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양채은이 세상을 떠난 후로 양시은은 나도현을 더 꺼리게 되었다.예전에는 혼자 있는 것
양시은은 한참 동안 복잡한 표정으로 손에 쥔 약을 바라보다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나도현도 그녀를 위한 마음이었으니 못 본 척 눈감아주기로 했다.하민이를 돌보는 간호사가 책임감 있게 일을 한 덕분에 양시은의 부담을 많이 덜어주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마음을 놓고 자신의 치료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나도현은 지석훈에게 양시은의 진료를 부탁했다.“지석훈에게 별일 없다고 해서 네 진료를 부탁해 봤어.”양시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지석훈에게는 털어놓을 불평이 많았다.‘내가 할 일이 없었다고? 뭔 소리야? 나도현 네가 나를 병원에서 강제로 끌어낸 거잖아.’“진료는 끝났어요. 위가 좀 안 좋네요. 요즘 거의 안 먹죠? 그리고 조금씩 먹어야 해요.”양시은은 조심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처음으로 나도현 앞에서 죄책감을 느꼈다.나도현은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양시은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물었다.“그 외에 다른 건 없어?”“다른 건 없어. 그냥 푹 쉬면 돼. 그럼 난 먼저 갈게. 병원 일이 많아서 중요한 일이 아니면 날 부르지 마.”지석훈은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병원에 수술이 있다며 급히 떠났다.양시은은 나도현이 그녀에게 물어볼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예상과 달리 먼저 하인에게 물었다.“시은 씨, 최근에 음식을 거의 안 먹었나요?”하인은 양시은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네... 거의 안 드세요. 제가 설득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어요.”“정말 입맛이 없어. 이 사람들 잘못 아니야.”양시은이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그날 이후, 양시은은 나도현의 집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처음에는 양시은이 아프다는 이유로 그녀를 설득했고 후에는 하민이를 보러 가는 것이 편하다고 해서 방법이 없었다.그녀는 속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나도현이 요즘에 선을 넘지 않고 조용히 있어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최근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서 그래. 입맛이 없어. 좀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복용하고 있는 약도 그녀의 식욕에 영향을
나도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아깐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지금은 괜찮아졌어.”그는 양시은의 상태를 확인한 뒤 큰 자극을 피해야 한다는 말 때문에 이 상황을 그녀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양시은은 아무런 의심 없이 그 말을 믿었다.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거의 기억하지 못했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상태였다.나도현은 그녀가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설명했고 양시은은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이때 하민이가 양시은의 손을 잡고 말했다.“엄마 많이 피곤해요? 그럼 집에 가서 쉬어야 해요. 저는 남자아이니까 엄마가 항상 옆에 있을 필요 없어요.”양시은은 웃는 얼굴로 그의 통통한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우리 하민이 다 컸네. 엄마는 그래도 너를 혼자 두는 게 걱정되는걸.”나도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나도 네가 좀 쉬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양시은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아니. 난 지금 아주 좋아. 만약 채은이 일 때문에 걱정하는 거라면 나 이젠 괜찮아.”“그럼 간병인을 부를게. 내일 하루는 쉬고 모레 다시 하민이를 보러 와.”양시은은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어떻게 이렇게 함부로 결정할 수 있어?”양채은의 사고 이후 모든 사람이 그녀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 자신도 잘 알고 있었기에 회복에 전념했다.일주일 동안의 치료를 거쳐 많이 나아졌는데 왜 나도현은 여전히 그녀를 믿지 않는 것일까? 나도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너는 지금 네 상태가 괜찮다고 생각해? 화장실 가서 거울을 한 번 봐봐.”양시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는 요 며칠간 늦게까지 밤을 새웠고 다음 날 하민이를 보려 일찍 일어나야 해서 쉴 시간이 없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엄청 피곤해 보였을 수밖에. 심지어 다크서클이 깊게 자리를 잡아 파운데이션으로 간신히 가릴 수 있을 정도였다.하민이도 같이 양시은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협공 덕분에 양시은은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약속한 뒤 나도현은 믿을 만한 간병인을 구하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