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와 법로 사이의 사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돈독해졌다. 별이는 그를 만나는 걸 정말 좋아했다.“맞다, 엄마. 오늘 숙제 다 했는데 확인해 주실 수 있어요?”온지유는 기쁘게 그리하겠다고 답했다.유치원 숙제는 워낙 간단했고 별이도 거의 실수 없이 해 놓아서 검사는 금세 끝났다.별이는 숙제를 챙겨 아래층으로 내려가 TV를 켰고, 온지유는 그 사이 온하윤과 놀아 주고 있었다.그때 초인종 소리가 났고 택배 기사가 물건을 건네주었다.온지유는 최근 온라인 쇼핑을 한 적이 없어서 여이현이 주문했으려니 생각하고 일단 열어 봤다.상자 안에는 몇 병의 약과 편지 한 통이 들어 있었다. 편지를 펼치자마자 온지유는 보낸 사람이 누군지 단박에 알아차렸다.바로 인명진이었다. 그가 자신을 율이라고 부르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편지에는 그가 최근 경성에 새 병원을 열어 본격적으로 이곳에서 활동할 예정이라는 점과 함께 약들은 직접 공수해 온 보약이니 그녀가 꼭 써 보았으면 좋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온지유는 고맙다는 의미의 짧은 문자를 보내고 약을 귀하게 챙겨 두었다. 그가 정성을 들여 마련한 것이라면 효과도 나쁠 리 없다고 믿었다.저녁에 여이현이 돌아오자, 온지유는 보약 이야기를 슬쩍 꺼냈다. 그리고 온 가족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다음 날 아침, 온지유는 아이들을 학교에 내려 준 뒤 집에 들러 이것저것 챙겼다. 특히 온하윤 기저귀와 분유, 젖병 등을 준비해 두고 시간에 맞춰 다시 학교로 가 별이를 데려 병원으로 향했다.법로는 그들이 내일쯤 방문할 거라 예상하고 전혀 대비를 하지 못했다. 침대 머리맡에 간암 말기 판정서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약을 들고 들어온 간호사는 그 서류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 자기 아버지도 비슷한 나이였고 암 판정을 받은 적이 있었다며 말문을 열었다.“말기라도 치료를 완전히 포기하면 안 돼요. 저희 아버지도 처음엔 극구 거절하셨지만 가족들이 전부 나서서 설득했고 덕분에 예상보다 1년은 더 사셨답니다.”이미 한 발은 저세상에 걸쳤더라
아프면 치료를 받아야 하는 법이다. 요즘 의료 기술이 발전한 데다가, 그들은 경제적 형편도 넉넉한 편이지 않은가.아픈 것이 사실이라면 왜 숨기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우리 먼저 들어가서 외할아버지께 직접 물어보자.”온지유는 속사정을 알지 못했기에 별다른 설명 없이 아이를 달랬다. 그리고 마음속에 의문을 품은 채 병실 문을 밀고 들어갔다.법로는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들어오는 사람이 간호사인 줄로만 짐작하고 짜증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아까 분명히 말씀드렸잖아요. 치료든 뭐든, 제 몸은 제가 결정하겠다고. 또 와서...”그러다 고개를 들어 온지유의 얼굴을 보자 나머지 말이 목에 걸려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곧 기쁨이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지유, 아니.. 오늘 온 거야? 아까 통화할 때 분명 내일쯤 온다고 했잖니. 별이 학교 때문에 무리하지 말라고 했는데.”“오늘은 학교가 일찍 끝났어요. 그래서 별이랑 하윤이 데리고 잠깐 들렀죠.”온지유는 병상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법로는 방긋 웃으며 이야기하던 중 불현듯 시선을 침대 머리맡으로 돌렸다.거기에는 간암 말기라는 문구가 선명한 진단서가 놓여 있었다. 이걸 온지유가 보면 더는 숨길 길이 없을 터였다.그는 얼른 진단서를 두 번 접어 베개 밑으로 밀어 넣었다. 행동이 워낙 황급했고, 그 얼굴에 비친 당혹스러운 기색도 뚜렷했다.온지유는 그 모습만으로도 무엇인가 감추는 것임을 직감했다. 병실에 놓인 서류라면 아마도 몸 상태와 관련된 것일 거다.“외할아버지!”별이는 깡총깡총 뛰어오더니 가방에서 빨간 종이꽃 하나를 꺼내 법로 곁에 놓았다.“이거 오늘 제가 받은 작은 칭찬 꽃이에요. 저도 한 송이, 엄마도 한 송이. 이제 외할아버지도 한 송이 드릴게요.”“와, 어쩜 이렇게 빨갛고 예쁜 꽃일까.”법로는 작은 꽃을 집어 자신의 옷에 꽂았다.살아오면서 온갖 귀한 화초를 다 봤어도, 별이 손에 들린 이 작은 종이꽃만큼 마음 뭉클해지는 건 없었다.그건 아이가 학교에서 잘해 선생님께 받은 상이
온지유는 법로가 일부러 숨기는 게 있다고 직감했다.하지만 지금은 확실한 증거도 없고 구체적으로 뭘 겪고 있는지 모르니, 그저 조심스레 말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아버지께서 요즘 평안하게 지내신다니까 제 마음도 놓이긴 해요. 그렇지만 정말 어디가 안 좋으시면 치료를 받으셔야죠. 의료 기술도 발달했고 우리 집이 돈이 모자란 것도 아니니까요. 더 오래 사셔서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도 보시면 좋잖아요. 나중에 둘이 결혼해서 결혼식 할 때 저희랑 같이 참석하시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그래... 만약 정말로 그런 날이 온다면 얼마나 좋겠니.”법로 역시 그 모습을 간절히 바랐다.하지만 그간 자신이 저지른 일들이 떠올라, 이런 병도 어쩌면 업보가 돌아온 게 아닌가 싶었다.그래도 죽기 전에 이렇게 친딸과 화해하고 나란히 앉아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것만 해도 그로선 감사했다. 사람은 만족할 줄 알아야 하니까.그렇게 생각하던 중 법로는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고 곧 극심한 기침이 터져 나왔다.온지유는 깜짝 놀라 얼른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고, 별이는 소리를 듣자마자 후다닥 달려가 컵을 챙겼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보온병을 들어 따뜻한 물을 부었다.별이는 물컵을 침대 앞으로 가져가 건네주었다.“외할아버지, 물 좀 드세요. 그러면 숨쉬기 훨씬 편해지실 거예요.”자신도 전엔 목이 따끔거릴 때 온지유가 따뜻한 물을 주었는데 마시고 나면 한결 괜찮아졌던 기억이 있었다.법로는 휴지로 입가의 피를 닦고 그 휴지를 뭉쳐 휴지통에 버렸다.그 뒤 별이가 준 물을 단숨에 마셨다. 분명 그냥 맹물이었는데 왠지 달큰한 기분이 들었다.“아버지, 제가 의사 불러서 간단히 검사라도 받아 보시죠. 약도 좀 처방받으면 좋을 텐데... 이렇게 기침하시면 너무 힘드시잖아요.”온지유는 이 기회를 틈타 의사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법로가 실제로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그러나 법로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그럴 거 없어. 어젯밤에 창문 열고 잤더니 감기에 좀 걸린 거야.
법로는 아직 얼마나 더 살 수 있는지 몰랐다. 아이들도 안을 때마다 기회가 줄어들기 때문에 당연히 지금을 틈타 더 오래 안고 싶었다.정말 그날이 오면 그가 떠나더라도 후회는 남지 않을 것이다.온지유는 마음속으로 한탄했다. 위 세대가 아래 세대에 대한 특별한 정도 법로와 두 아이를 보며 이해할 수 있었다.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이 말해도 믿지 못했을 것이다.온하윤은 분유를 먹기 시작했지만, 별이는 아직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법로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한 온지유가 말했다.“밖에 가서 먹을 걸 좀 사 올게요. 뭐 먹고 싶어요?”“엄마, 저는 햄버거랑 매시 포테이토 먹고 싶어요!”드문 외식 기회에 별이는 신나게 주문했다.법로는 음식에 별다른 요구가 없었다.“가벼운 음식이면 돼. 가능하면 채소를 더 먹자.”현재 그의 건강 상태는 매운 음식이나 기름진 음식은 소화가 전혀 안 되어서 몸에 부담만 줄 뿐이었다.“알겠어요, 금방 올게요.”온지유는 돌아서서 떠났다.법로는 식습관까지 완전히 변했다. 나중에 주치의에게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물어봐야 했다.법로는 온지유가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을 예상했다. 그래서 온지유가 병원을 떠난 후 먼저 주치의에게 찾아갔다.“제 가족들 앞에서 병을 숨겨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가벼운 병이라면 들어줬을 테지만 이렇게 심각한 병은 가족들도 알 권리가 있습니다.”의사의 첫 반응은 거절이었다.누군가의 자식으로서 의사는 부모님이 아플 때 소식을 알리고 다 함께 결과를 논의하기를 바랐다. 의사로서 그는 너무 많은 것을 봤다.지금 괜히 환자 가족에게 숨겼다가 치료를 원하지 않는 환자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나중에 어떤 문제가 생길지 누가 알겠는가? 환자 가족이 소란을 일으킬 가능성도 있었다.“제 딸이 알게 되면 분명히 걱정할 거예요. 딸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요. 만약 제 딸이 문제를 일으킬까 봐 걱정한다면 진술서를 작성할 수 있어요. 이건 제 생각일 뿐이고, 어떤 결과든 제가 혼자 감당할 테
사무실에 들어서자 그녀는 문을 닫았다.“선생님, 제 아버지의 상태에 대해 여쭤보고 싶은데요. 정확히 어떤 병이 있으신가요?”“그건 환자의 개인 정보에 해당하여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의사는 온지유의 눈에 비친 걱정을 분명히 알아차렸다.하지만 그는 방금 법로와 비밀을 유지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온지유의 질문에 형식적인 대답을 했다.“구체적인 상황은 가족이 환자와 직접 소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하지만 그분은 제 친아버지이고, 제가 보기에는 심각한 병을 앓고 계신 것 같아요. 이런 상황에서 가족은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온지유는 방금 법로에게도 물어보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하지만 그에게 물어봐도 소용이 있을까?법로는 분명히 비밀을 지키기로 결심한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의사에게 물어볼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그러나 의사도 말하려 하지 않았다.“가족에게 알 권리는 분명히 있지만 환자의 개인적인 의사가 가족보다 우선입니다. 가족 간의 원만한 소통을 권장합니다.”“알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온지유는 계속 물어봐도 아무런 정보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병실로 돌아가 햄버거를 별이에게 주고, 두 개의 도시락을 꺼냈다. 이 두 개는 모두 채식으로 한 개는 그녀가 먹고 다른 한 개는 법로에게 주었다.“지유야, 요즘 바쁘다면 하윤이를 우리 쪽으로 보내는 게 어때? 도우미도 같이 오게 해서 우리 둘이 아이를 돌보면 분명 잘 돌볼 수 있을 거야. 별이도 방과 후에 같이 저녁 먹으러 올 수 있고.”법로는 식사를 하면서 제안했다.이것이 바로 그가 꿈꾸던 생활이었다.온지유는 법로 머리에 생긴 몇 가닥의 흰머리를 보며 그들이 만날 기회가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식사 후, 그들은 병실에서 잠시 놀다가 저녁이 될 때까지 있었다. 온지유는 한 손으로 온하윤을 안고 다른 손으로 별이를 잡은 채 법로에게 인사했다.“오늘은 먼저 돌아가요. 다음에 다시 찾아뵐게요.”“그래, 천천히 가고 집에 도착하면 문자 한 통 보내.”법
“지유야, 전에 그 여자애 기억나? 소미?”여이현이 묻자 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물론 기억했다. 바로 그 아이 때문에 그들은 한순간의 부주의로 온하윤의 목숨을 잃을 뻔했다.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녀는 상대방이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절대 마음이 약해지지 않았을 것이다.“내가 계속 조사하고 있었어. 걔네 집안이 엄청 가난한데, 누나 두 명과 오빠 두 명, 그리고 남동생 두 명이 있어.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 혼자 힘들게 가정을 지탱하고 있어. 하지만 수입이 낮아서 혼자 대가족을 먹여 살리지 못해. 누군가가 오랫동안 그들을 후원해 주고 있어.”이 말을 듣고 온지유는 즉시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오랫동안 그들을 후원해 온 그 친절한 사람은 어떤 조직의 구성원일 것이다. 후원은 거짓이고 이용하려는 것이 진짜였다.여이현은 말을 이었다.“소미처럼 후원을 받는 아이들이 몇 명 더 있어. 하지만 그 아이들은 지금 모두 현지에 머물러 있고 해외로 나가지 않았어.”“분명히 아이들을 예비 인력으로 본 거겠지. 생활비를 손톱만큼 보내면서 필요할 때 해외로 보내 임무를 완수하게 하려는 거야.”온지유는 눈살을 찌푸리며 마음속이 복잡해졌다.아이들에게 조직은 정말로 악랄했다. 그들이 원하지 않는 일을 강요하고 가족을 이용해 협박했다. 하지만 조직이 없었다면 그들의 경제적 조건으로는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고 일찍이 굶어 죽었을지도 몰랐다.“우리 생각이 일치하네. 이 조직의 목표가 나 혼자만은 아닐 거라고 추측해.”여이현은 자신의 계획을 말했다.“내가 해외로 가서 그들을 직접 만날게. 너는 집에 남아서 하윤이랑 별이를 돌봐 줘. 내가 돌아올 때까지.”“안 돼.”온지유는 주저함 없이 그를 거절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여이현을 바라보며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우리는 부부야. 결혼식에서 한 맹세를 잊었어?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둘이 함께 맞서야 해. 너 혼자서 이 문제를 해결하게 둘 수는 없어.”“온지유, 나는 네가 위험에
다른 사람들은 걱정할 만했지만 법로는 달랐다. 그에게 아이를 맡기면 온지유는 안심할 수 있었다.“근데 시간이 있을까?”여이현은 진심으로 온지유를 데리고 모험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이유를 찾아 온지유의 생각을 꺾으려 했다.“지난번 우리 셋이 나갔을 때는 도와줄 시간이 없다고 했잖아. 이번에는 외출 시간이 더 길어. 나는 그냥 포기하는 게 좋겠어.”“괜한 변명 찾지 마, 이현 씨. 다리는 내 몸에 달려있어. 나를 안 데려간다고 해서, 내가 혼자 못 찾아갈 것 같아?”온지유는 그의 속마음을 직설적으로 꿰뚫어 보았다.“나는 연약하고 힘없는 여자가 아니야. 내가 찾아가서 너를 곤란하게 할까 봐 걱정이라도 하는 거야?”“물론 그런 생각은 아니야.”여이현은 손을 뻗어 그녀를 꽉 안았다. 그는 온지유가 실력도 있고 지혜로우며 매우 용감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남편으로서 그는 이 가정을 지켜야 했다.“우리는 부모야. 아이들을 돌볼 의무가 있어. 난 모든 부담을 너 혼자 지게 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나도 같이 가자.”온지유의 목소리는 부드럽고도 확고했다.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여이현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온지유를 꼭 껴안고 이마에 입맞춤을 했다.“그래, 같이 가자.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가 같이 맞서자. 지유야, 너를 만난 건 정말 내 운명이야.”온지유는 그의 몸에서 풍기는 향기를 맡았다. 그녀 역시 똑같이 생각했다.여이현은 단순히 좋은 아버지가 아니라 좋은 남편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와 결혼한 것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하지만 해외로 가기 전에 먼저 아버지 상태를 조사하고 싶어. 아버지가 많이 아픈 것 같은데 전혀 말을 하지 않거든. 심지어 의사랑 공모해서 나를 속이려고 해.”온지유는 오늘 일어난 일을 간단히 설명했다.법로가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그녀가 의사를 찾았을 때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의사는 환자를 도와 비밀을 유지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말을 꺼내기 어려웠던 것이다.“아
“별아, 여기 혼자 왜 서 있어?”온지유는 빠르게 몇 걸음 걸어와 별이를 안았다.“무슨 일 있어?”별이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아빠 엄마랑 같이 놀고 싶은데... 바쁘면 됐어요. 저는 혼자 애니메이션 보러 갈게요.”그전까지 여이현은 얼마나 늦게 돌아오든 옷을 갈아입고 나면 항상 그들과 놀아줬다. 하지만 오늘은 돌아오자마자 온지유와 함께 침실로 들어갔다.별이는 한편으로는 두 사람과 함께 있고 싶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불편을 끼칠까 봐 두려웠다.“일 다 끝났으니 같이 내려가자. 엄마가 안아줄게.”온지유는 그를 안고 함께 내려갔고 여이현도 따라왔다.셋은 소파에 앉아 웃고 떠들었다. 온하윤은 그들이 번갈아 가며 안아주다가, 결국 별이의 품에서 잠들었다.별이는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움직임이 조금만 커져도 여동생을 깨울까 봐 두려웠다.“별아, 하윤이 이만 내려놔. 엄마가 침대에 눕힐게.”온지유는 그의 손이 저리기 전에 먼저 손을 내밀어 온하윤을 안으려 했다. 온하윤은 몇 달밖에 안 되었다. 어른들에게는 무겁지 않았지만 별이도 여전히 어린 아이였다. 그녀는 한 아이가 오랜 시간 다른 아이를 안아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아니에요. 엄마. 조금만 더 안아줄래요.”별이는 고개를 저으며 두 손을 더욱 꽉 잡았다. 그는 여동생의 통통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하얗고 붉게 빛나는 얼굴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갓 태어났을 때보다 날이 갈수록 더 귀엽게 변했다.온지유는 두 아이 사이의 애정이 깊어져서 매우 기뻤다. 별이의 고집을 보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그럼 안고 있다가 힘들면 엄마한테 말해줘.”별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계속해서 버텼고 두 팔이 저리기 시작하자 온지유에게 말했다.“엄마, 이제 안 되겠어요.”“엄마가 안아줄게.”온지유는 딸을 안아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혔다. 어떤 아이들은 이렇게 움직이면 깨우기 쉽지만 온하윤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오히려 더 깊이 잠들었다.온지유는 온
양시은은 입술을 짓이겼다. 피가 많이 흘러나왔던지라 안색이 창백해져 자조적으로 웃었다.“나는 내 주제를 알아.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너한테 상처를 주겠어?”나도현은 가슴이 갑갑해졌고 커다란 돌덩이가 가슴을 누르고 있는 것처럼 불편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접으며 싸늘한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양시은, 너 정말 뻔뻔하다.”박은희는 찬 바람만 부는 두 사람 사이를 보며 속으로 기뻐했고 이내 맞장구를 쳤다.“그깟 돈 때문에 너를 버리는 여자인데 왜 미련을 가지고 있는 거니.”“그만 하세요.”나도현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다시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이 여자에게 돈을 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럴 만한 가치도 없으니까요.”그는 시선을 돌려 양시은을 차갑게 보았다. 박은희는 속으로 아주 기뻐했다.“네가 정신을 차렸다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세상엔 좋은 여자는 많고 많단다. 너랑 결혼할 여자는 더 많고.”“나가서 말하죠.”나도현은 차갑게 말을 내뱉으며 밖으로 성큼성큼 나가버렸다.양시은은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더는 참을 수 없어 침대에 털썩 엎드리게 되었다. 상처를 금방 치료했던지라 여전히 아팠고 바늘로 꿰맨 곳이 찢어질 듯 아팠다.하지만 하민이는 여전히 양채은의 손에 있었기에 마음 놓고 편히 있을 수 없었다. 결국 비틀대며 병원을 나선 뒤 양채은에게 전화를 걸어보려고 했다. 모든 일은 그녀 때문에 일어난 것이고 하민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병실 밖을 나가자마자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주었고 청량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조심해요.”“고맙습니다.”양시은은 고개도 들지 않고 상대의 손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상대는 다시 그녀를 잡았다.“양시은?”상대의 목소리에선 놀라움과 반가움이 묻어나 이어 그녀는 창백한 얼굴을 들 수밖에 없었다.그녀의 눈앞에는 잘생긴 얼굴이 있었고 품이 좀 너른 의사 가운은 유난히도 남자에게 잘 어울려 보였다. 익숙한 얼굴이었지만 양시은은 조금 생각이 나지 않아 뜸을 들이며 말했다.
양시은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지만 나도현이 자신을 포기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8억보다는 아니라니...나도현이 강태경으로 살 때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돈을 아껴 쓰라는 말을 한 적 없었고 나중에 나도현이 된 후에도 손에 돈이 부족했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양시은의 말을 들으니 두 사람이 쌓았던 감정이 전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고 가소로웠다.“양시은, 돈이 필요하면 나한테 말해. 내 기분만 맞춰주면 8억보다 더 많은 돈을 얻을 수 있지 않나?”나도현은 상처받은 두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양시은이 한 말이 제발 전부 거짓이길 바랐다. 그녀는 나도현이 자신에게 잘해줬던 시절은 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입을 열려던 순간 밖에서 콰당 소리가 났다. 박은희가 있는 힘껏 문을 밀어 연 것이다.엄청난 기세를 내뿜던 박은희는 바로 양시은에게 시선을 돌렸다. 양시은은 그녀가 좋은 의도로 찾아온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입을 꾹 다문 채 박은희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박은희는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지 않고 문에 서 있었다. 거리가 조금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쩌렁쩌렁하게 들려왔다.“양시은 씨, 전에 8억 주면서 내가 뭐라고 했지? 내 아들 곁에서 떨어지라고 했잖아. 난 지금도 내 아들이랑 함께 있는 꼴 보고 싶지 않으니까 서로 좋게 합의 보자고. 얼마를 원하는지 말해.”박은희는 나도현이 양시은을 향한 마음을 접길 바랐다. 그래서 나도현이 보는 앞에서 양시은에게 얼마나 요구를 하는 것이냐고 물은 것이다. 양시은도 박은희가 대놓고 물어볼 줄은 몰랐다. 목구멍에 커다란 돌멩이가 막힌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고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팠다. 하지만 그녀에겐 다른 선택은 없었다.“그때는 8억이지만 지금은 적어도 2배 정도는 주셔야 할 거예요. 하지만 전에 거래한 것이 있으니 12억만 주시면 영원히 눈앞에서 사라져 드릴게요. 아니, 죽으라고 하셔도 돼요.”양시은은 한 글자씩 내뱉을 때 나도현을 똑바로 바라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아이는 양채은이 나도현과의 유일한 아이였다.이때 나도현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나도현의 전화에 그녀는 당연히 바로 받았다. 다만 그녀는 하민이에게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자리를 옮겼고 전화기 너머로 여전히 차가운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채은, 내가 예전에 쓰던 이름으로 네게 접근한 걸 인정해. 하지만 난 너한테 상처 주는 일은 한 적 없어. 네 배 속에 있는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야.”나도현의 말에 양채은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의 아이가 나도현의 아이가 아니라면 누구의 아이란 말인가. 게다가 그날 그녀의 옆에 있던 사람은 분명 나도현이었다.그러나 나도현은 그녀에게 영상 하나를 전송했고 그 영상 속엔 악취미로 가득한 재벌들이 있었다. 양채은은 바로 진실을 알게 되었다.나도현이 지금 이런 때에 그녀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있다는 건 그녀가 아무런 잘못도 없는 아이에게 화풀이하지 않기를 바라서였다. 하민이도 그녀가 예전에 온 힘을 다해 지켜주려고 했던 아이였으니까.아무리 이성을 잃었다고 해도 그녀는 직접 아이에게 손을 댈 만큼 미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결국은 어느 날 갑자기 그녀의 곁에 나타난 나도현은 그녀 때문이 아니라 양시은 때문이었다는 것이다.나도현은 그녀에게 이용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고 심지어 본명도 알려줄 생각도 없었다. 그녀에게 잘해주었던 것도 전부 그의 연기였다는 사실에 그녀는 역겨웠다.양채은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그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만나줄래요?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래요. 얼굴 마주 보면서 하고 싶거든요.”나도현은 이미 이 지경이 되었던지라 양채은과 만나 자세하게 얘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그녀의 요구를 받아들였다.“그래.”양채은은 먼저 시간을 알려주었다.“그럼 사흘 뒤에 봐요.”말을 마친 양채은은 전화를 끊어버렸고 나도현은 양채은과 했던 대화를 양시은에게 알려주었다. 침대에 힘없이 누워있는 양시은은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이미 양채은과 좋게 얘기가 끝났고 하민이와도 사이
나도현은 양시은이 자신을 위해 대신 칼에 맞아줄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당황하고 있던 순간에 양시은이 그의 손을 잡으며 애원했다.“나도현, 제발 하민이를 구해줘...”...양시은이 다시 눈을 떴을 땐 병원이었다.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양채은에게 문자를 보냈다.[양채은, 죽어야 할 사람은 나야. 내가 죽을 테니까 하민이는 살려줘. 하민이는 아무 잘못도 없잖아. 그리고 넌 하민이가 제일 좋아하는 이모잖아.]양채은은 지금 이성을 잃은 상태였던지라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그간 쌓은 정으로 설득하는 것이다. 아이를 잃은 양채은에게 당연히 통할 리가 없었다.양시은과 나도현의 아이는 멀쩡히 살아있었다. 양시은이 그녀를 동생으로 여기고 나도현을 본 순간 나도현의 정체를 알려주면서 그녀를 이용하려는 것 같다고 말했었더라면 이 정도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양시은은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녀가 나도현에게 푹 빠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결국 그녀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도 없고 나도현은 애초에 그녀를 사랑하지도 않았다. 모든 건 양시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녀는 죽게 되는 한이 있어도 양시은이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고 싶었다.“이모, 우리 여기에 며칠 동안 있는 거예요? 엄마가 보고 싶어요. 이모, 혹시 하민이가 잘못한 거 있어요? 왜 하민이랑 놀아주지 않는 건데요?”아이들은 감정에 민감했다. 양채은이 자신을 이곳으로 데리고 온 뒤 자신과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 순간 양채은은 마음이 누그러지며 아이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하민아, 만약 이모랑 엄마가 싸우면 하민이는 누구를 선택할 거야? 이모 말 믿어 줄 거야?”양채은은 양시은을 증오하고 있었지만 하민이 앞에서는 완전히 냉랭해질 수 없었다. 하민이는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조카였기 때문이다.전에 학교 다닐 때도 그녀는 학교 끝나자마자 하민이를 데리고 나와 간식도 사주면서 돌봐주었다. 심지어 돈만 생기면 하민이의
나도현은 차 키를 챙기고 외출하려고 하자 비서가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변호사님, 지금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아직 일정이 남아 있습니다만...”“오후 일정을 전부 뒤로 미루세요.”나도현은 말을 마친 후 성큼성큼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올라탄 그는 심지어 자신을 원망하기도 했다.‘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양시은이 한 말 때문에 고분고분 찾아간다고?!'그는 다시 한번 고민하다가 결국 찾아가 보기로 했다.이때 검은색 차에 앉은 흉악한 얼굴의 두 남자가 나도현을 지켜보고 있었고 그중 한 사람이 옆에 있던 파트너의 어깨를 툭툭 쳤다.“이봐요, 저 사람 맞아요?”고개를 푹 숙인 채 핸드폰으로 문자를 주고받던 남자는 고개를 확 들어 호화로운 차에 올라타는 나도현을 보더니 이를 빠득 갈았다.“맞아요. 저 사람이에요. 저 사람 때문에 내 아들이 형량 아주 많이 받았다고요. 내가 죽어 재가 되어버린다고 해도 저 사람만큼은 절대 잊지 않을 거예요.”“그럼 지금 혼자 차에 올라탄 이 시점이 아주 좋은 기회가 아닌가요?”두 사람은 그렇게 몰래 나도현의 뒤를 따라가게 되었고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보아하니 동료를 호출하는 것 같았다.양시은이 말한 무스 카페는 아주 외진 곳에 있었던지라 나도현은 내비게이션을 틀어서야 찾을 수 있었다. 카페 안으로 들어갔을 때 양시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이내 미간을 확 구겼다.‘이 여자가 설마 또 날 속인 건가?'가슴 속에 분노가 슬금슬금 피어올랐지만 고개를 돌리니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양시은을 발견했다.양시은은 양채은이 무슨 이유로 나도현을 부르라고 한 것인지 몰랐기에 일단 그에게 다가가는 수밖에 없었다.“왔어?”“어젯밤에는 신고하겠다고 협박하더니 오늘은...”나도현은 픽 소리를 내며 웃었다.“양시은, 이번엔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지?”“난...”양시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 후 그녀는 안을 가리키며 말했다.“일단 안으로 들
양시은은 뭔가를 할 기분이 아니었고 하민이의 안전만 걱정되었던지라 거의 울면서 애원했다.“하민이는 네 친조카잖아. 대체 뭐 하려는 거야? 하민이로 협박하지 않아도 난 널 언제든지 도와줄 수 있어.”양채은 피식 차갑게 웃었다.“양시은, 넌 뼛속까지 가식적인 사람이야. 손에 쥐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면서 뭘 어떻게 도와주겠냐는 거지?”양시은은 그녀를 설득하고 싶었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짜증이 극에 달한 양채은이 먼저 말을 가로챘다.“됐어. 쓸데없는 말 듣고 싶지 않으니까 나도현이나 불러.”양시은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뭐 하려고?”양채은은 픽 웃었다.“그건 나와 도현 씨 일이야.”양시은은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나랑 나도현은 이미 서로 뼛속까지 증오하고 있는 사이라 내가 불러도 안 올 수도 있어.”양채은의 목소리는 너무도 냉랭했다.“그건 네 사정이고. 하민이 무사하길 바라면 어떻게든 불러와.”양시은 침묵했다.지금의 양채은은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상태였고 얼른 하민이를 데리고 오지 못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아무도 몰랐다. 어떻게든 일단 양채은을 안심시켜야 한다.“그래, 알았어. 하지만 매일 하민이 목소리를 들려줘. 영상 통화도 하게 해줘.”양채은은 흔쾌히 답했다.“좋아. 하지만 신고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알린다면 네가 얼마나 멍청한 짓을 했는지 직접 보여줄 거야.”양시은은 침을 꿀꺽 삼키며 멈추지 않는 떨림을 억누르고 진지하게 대답했다.“알았어.”이내 침묵이 흐르면서 전파 소리만 들려왔다. 그녀는 양채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그녀가 먼저 뜸을 들이며 입을 열었다.“채은아, 나는...”말을 마치기도 전에 신호음 소리가 들려왔다. 양채은은 전화를 끊어버린 것이다. 끊겨버린 전화를 보며 양시은은 머릿속이 하얘졌다.손가락을 움직이며 한참 망설이다가 결국 나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민이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난처한 일이라고 해도 그녀는 어떻게든 해야 했다.번호를 누른 순
하민이의 말을 들은 양채은은 속으로 비웃으면서 담담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표정은 다소 음험하게 보였다.“날 괴롭힌 사람이 네 엄마라면?”하민이는 순간 당황하고 말았지만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우리 엄마는 이모를 괴롭히지 않을 거예요.”양채은은 그저 차갑게 웃기만 할 뿐이다.왜 양시은의 아이는 멀쩡히 살아있는데 자신의 아이는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해보고 이렇듯 조용히 하늘나라로 갈 수밖에 없는 걸까. 마음속에 원망만 남은 그녀는 양시은을 절대 가만히 두지 않으리라 생각했다.이상함을 감지한 하민이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엄마는요? 이모, 엄마 보러 갈래요.”양채은은 그런 하민이가 시끄럽게 느껴졌고 인내심 있게 말했다.“이모는 그냥 하민이랑 농담을 던진 거야. 이따가 도착하면 이모가 엄마한테 연락해줄게.”하민이는 그녀의 말에 바로 기분이 풀어져 즐거운 얼굴로 창밖의 풍경을 보았다.양시은은 아침 내내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는 양채은에 너무도 걱정되었다. 양채은은 항상 혼자 속으로 끙끙 앓으며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으니까. 뭐가 어찌 됐든 어젯밤 일에 관해서 그녀는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큰 희망을 품지 않고 전화를 걸었지만 뜻밖에도 양채은은 전화를 받아주었다. 양시은은 서둘러 설명했다.“채은아, 어젯밤 일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양채은의 목소리엔 떨림이 느껴졌다.“아직도 날 속이려고 그러는 거야? 너랑 나 사이엔 예전에도, 지금도 온통 거짓뿐인데 내가 어떻게 널 믿으라는 거야?”양시은은 목구멍이 막힌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채은아, 그럼 내가 하민이를 데리고 떠날게.”그녀는 힘겹게 이 말을 꺼냈다.“내 인생을 이미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양채은은 이를 빠득 갈며 말을 이었다.“떠나겠다고? 양시은, 난 네가 내 인생에서 영원히 사라져줬으면 좋겠어.”“내가 어떻게 하면 화가 풀릴까?”양시은은 느껴지는 무력감에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양채은은 고개를 숙이더니 핸드폰을 혼
“걱정하지 말아요.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의사 선생님께 알려드릴게요.”자신을 도와주는 사람의 말을 들은 양채은은 그제야 마음이 놓여 눈을 감을 수 있었다.나도현은 어둠 속에서 양시은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고 술도 몇 잔 마셨지만 정신은 점점 더 멀쩡해졌다.똑똑똑.이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공허한 사무실에 더 크게 울려 퍼졌다. 그는 안 올 줄 알았던 양시은이 돌아온 것이라 생각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나 문을 열자 그 미소는 사라지고 싸늘함만 남게 되었다.“누구시죠?”라이더 복을 입은 남자는 느껴지는 서늘한 한기에 저도 모르게 몸을 덜덜 떨었다. 그는 얼른 들고 있던 쇼핑백을 건넸다.“나도현 씨 맞으시죠? 퀵 서비스입니다.”‘하, 머리를 쓰긴...'나도현은 눈을 가늘게 접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쇼핑백을 받은 후 문을 닫아버렸다.‘괜찮아.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두고 보자고!'배달 기사는 그제야 안도하며 서둘러 1층으로 내려갔다.야심한 밤 응급실은 전체 도시에서 가장 바쁜 곳이었고 의사와 간호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보호자는요?”간호사가 달려 나와 물었지만 젊은 커플은 고개를 저었다.“저희도 몰라요. 우연히 길에 쓰러져 있는 걸 발견해서 데리고 온 거예요. 배 속에 아이가 있다고 하니까 아이도 살려주세요.”“저희는 현재 산모분의 안전만 확보할 수 있습니다.”간호사는 조급해 미칠 지경이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신고였다. 다른 건 몰라도 일단 산모의 목숨부터 살려야 했으니까.밤새 치료한 끝에 양채은의 상태는 겨우 안정되었고 날 밝기 전에 그녀는 깨어나게 되었다. 눈앞에 보이는 하얀 천장에 자신이 어디로 실려 왔는지 깨닫고 황급히 약을 갈러 와준 간호사의 팔을 잡았다.깜짝 놀란 간호사는 그녀가 깨어난 것임을 확인한 후에야 진정했다.“아직 상태가 좋은 건 아니니 푹 쉬고 있으세요. 제가 담당 선생님을 불러드릴게요.”그러나 양채은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고 빤히 보면서 거의 히스테리를 부
양채은은 고개를 돌리자 눈 부신 빛을 보게 되었다. 황급히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너무 다급하게 움직였던 탓에 중심을 잃고 그만 넘어져 버렸고 작은 트럭은 휘청이며 달리더니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등을 스치며 뒤에서 멈추었다.‘아파!'온몸의 온기가 빠져나가며 점차 의식이 흐릿해졌다. 이마에선 어느새 식은땀이 가득했다. 복부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통증에 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을 올려 만져보았고 하체에선 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트럭 운전자는 자신이 사고를 쳤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그녀를 힐끗 보더니 바로 시동을 걸며 도망쳐 버렸다.차가운 밤바람이 텅 빈 도로 위로 불어오고 있었고 그녀는 혼자 있었다. 살이 찢어질 듯한 고통이 그녀의 이성을 붙잡고 있었고 가슴 속에선 증오의 불씨가 피어올랐다.양시은은 급하게 따라 나왔지만 양채은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 늘 일을 그르치는 자신을 탓하며 원망하듯 머리를 때렸다.핸드폰을 들어 양채은에게 전화를 걸어보아도 양채은은 받지 않았고 아마도 여전히 자신을 원망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마 더는 그녀의 연락을 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그렇다면 양채은이 진정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린 후 다시 만나 대화를 해보기로 했다. 그녀와 나도현은 더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말할 생각이다.게다가 나도현은...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생각을 그만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때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낯선 번호였지만 전화기 너머로는 나도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시은...”양시은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나 힘들어. 채은이가 지금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겠고 할 말이 있으면 채은이 찾은 뒤에 해.”나도현은 흥미롭다는 어투로 말했다.“아, 그래? 양채은을 찾은 뒤에 삼자대면하고 싶은 건가?”양시은은 그가 너무도 원망스러웠지만 이를 빠득 갈며 그를 설득하는 수밖에 없었다.“채은이랑 결혼하기로 했으면 그럼 잘해줘. 채은이는 좋은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