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야 별이는 권서정이 자신의 엄마를 속이고 몰래 이곳에 데려왔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지금 당장 엄마에게 연락을 해야 했다.주위를 둘러본 별이는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옆에 있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권서정은 온지유에게 해명을 하고 있어서 별이가 엘리베이터로 간 데에 눈치채지 못했다. 고개를 돌렸을 때 이미 자리에는 누구도 없었다.별이는 사람들의 뒤를 따라 아파트 가장 안쪽의 집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후문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고 별이도 함께 밖으로 따라 나갔다. 하지만 큰길로 나간 별이는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몰랐다.바로 그때, 한 여자가 다가와 별이를 끌어안으며 웅얼거렸다.“아들, 우리 아들, 엄마가 드디어 널 찾았네.”“이거 놔요! 난 아줌마 아들이 아니에요. 우리 엄마 찾으러 갈 거라고요!”별이는 놀라서 울음을 터뜨렸다.권서정이 별이를 데려갈 때도 무섭다고 느끼지 않았지만 이 면목 모를 사람에게 완전히 놀라고 말았다.공포에 싸인 별이는 큰 소리를 지르는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아이의 울음소리에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몇몇 어른들이 다가오는 것을 본 별이는 급히 그들을 향해 소리 질렀다.“살려주세요, 전 이 사람 몰라요! 제발 도와주세요.”“제 아들입니다, 제 아들이에요.”여자는 미친 듯이 깔깔 웃으며 누구도 별이를 만지지 못하게 손을 휘적였다.온지유는 별이가 사라졌다는 연락을 받고 허겁지겁 달려 온 참이었다. 이 광경을 본 온지유는 놀라서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다.그녀는 바로 회사에 연락해 경고했다.“만약 계속해서 권서정을 별이의 매니저로 쓴다면 법정에서 볼 줄 아세요.”차에서 내린 온지유는 여자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별이를 끌어냈다. 아이를 잘 달랜 후 온지유는 여자가 공허한 눈을 한 채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고 약간의 동정심이 들었다.그때. 여이현의 보디가드도 도착했다.온지유는 보디가드에게 여자를 병원으로 데려가라고 시키고 잘 처리해달라 부탁했다.이 결정은 주위 사람들의 찬양을 받았고 그중에는 별이를 알아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지금 바로 그렇게 회사에 알릴게요.”온지유가 휴대폰을 꺼내려는 순간 여이현이 그녀를 제지했다. 온지유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여이현은 책상 위에 앉아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이렇게 하지. 권서정 씨에게 내일 정오에 만나자고 메시지를 보내 봐.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보자고.”온지유는 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의문 가득한 얼굴로 권서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약속 장소는 카페였다.온지유가 도착했을 때 권서정은 이미 도착 해 있었다. 그녀와 함께 온 사람은 회사의 사장 비서 김하나였다.권서정은 온지유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지유 씨, 오셨군요.”“앉으세요. 커피는 이미 주문하셨나요?”온지유는 웨이터를 불러 모카 한 잔을 주문한 뒤 말을 이었다.“어제 일을 밤새 고민했는데, 정말 아찔한 기분이 드네요. 그래서 당분간 다른 매니저를 고용하려고 해요.”권서정과 김하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특히 권서정은 급히 준비해 온 선물을 꺼내며 말했다.“지유 씨, 이건 DS의 최신 귀걸이입니다. 꼭 받아주세요. 어제 일은 정말 제 실수였습니다. 하지만 별이를 해치려는 의도는 없었어요. 절 믿어주세요.”온지유는 선물을 받지 않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가져가라는 듯한 신호를 보냈다.권서정과 김하나는 불안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김하나는 온지유가 말을 꺼내자마자 회사에 메시지를 보냈고 지금은 사장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침묵이 길어지자 권서정이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지유 씨, 저희 회사는 정말 정성을 다해서 일 하는 곳이에요. 제 행동 하나로 회사 전체를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일방적인 판단은 하지 말아주세요.”온지유는 차분히 말했다.“그 점은 잘 알아요. 하지만 저는 계약한 회사를 교체하려는 게 아니에요. 강유진 씨가 해외에 나가 있잖아요? 유진 씨가 돌아오면 다시 별이를 맡길 겁니다.”온지유의 확고한 태도는 사실 여이현의 의도였다. 권서정을 신뢰할 수는 없지만 회사를 교체하
이는 별이가 아직 어린아이라는 것을 고려한 감독의 배려였다.게임이 시작되고 그룹을 정할 때 문제가 발생했다. 인원수가 모자란다는 것이었다. 본래 오기로 했던 참가자의 비행기가 내일 아침으로 지연되면서 하는 수 없이 현장에서 다른 사람을 대타로 넣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감독은 한 바퀴 둘러보더니 온지유를 올려보내기로 했다. 별이가 덜 긴장할 수 있게끔 함과 동시에 더 재밌는 화면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뽑기로 순서를 정하고 별이네는 가장 마지막 순서로 뽑혔다. 앞의 세 팀은 아주 좋은 성적을 냈다. 모두 5개의 문제 중 첫 팀은 4문제를, 두 번째와 세 번째 팀은 3문제를 맞혔다.별이와 온지유의 차례가 오고 첫 문제는 별이가 그림을 그리고 온지유가 답을 맞히게 되었다.출제인이 문제를 펼쳤다. 주제는 속담이었다.‘굴러 온 돌이 박힌 돌 뺀다.’이 속담이 펼쳐지자 사람들은 모두 별이가 속담을 이해 못할까 봐 걱정하기 시작했다.하지만 별이는 그 걱정이 무난하게 술술 그림을 그려 나갔다.동그란 돌이 바닥에 반쯤 박힌 돌과 부딪히는 그림이었다.온지유는 한참을 생각하다 답을 외쳤다.“계란으로 바위 치기?”다른 세 팀의 사람들이 깔깔 웃으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감독은 그들이 온지유에게 답을 알려주게 될까 긴급히 룰을 추가했다.“지금부터 힌트를 주는 팀에게는 1점씩 감점하겠습니다.”모두 그 소리를 듣고 조용히 하기 시작했다. 감독이 속이 좁다고 중얼대면서 말이다.“엄마, 이건 나쁜 사람을 말하는 거예요.”별이는 박힌 돌에 휙 빠져나오는 화살 표시를 그려 넣었다.“이 다음엔 이렇게 돼요.”온지유가 웃으며 말했다.“굴러 온 돌이 박힌 돌 뺀다, 맞지?”“정답입니다!”MC가 둘에게 1점을 추가해 줬다.처음의 경험을 토대로 다음 몇 문제도 쉽게 맞힐 수 있었다. 다섯 문제 모드 맞혔지만 방송 분량은 아직 더 필요했다.감독이 어쩔 바를 모를 때 누군가가 게임을 하나 더 추가 하자고 제안을 했다.바로 진실 게임이었다. 이 제안
그들은 더는 별이에게 장난을 치지 않았고 계속 게임을 이어갔다.저녁을 먹은 후 별이는 집에 돌아가겠다고 떼를 썼고 아무리 달래도 소용이 없어 온지유는 감독님에게 사정을 얘기했다.감독님은 처음엔 별로 탐탁지 않아 했다. 내일 아침 일찍 일정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온지유는 내일 아침 절대 지각하지 않을 거라고 당부하면서 설득한 후에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다만 큰 비가 내리고 있었던지라 평탄치 못했던 시골길은 질퍽해졌다. 다행히 온지유는 운전에 능숙했기에 질펀한 길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질펀한 길을 지나니 평평한 도로가 나왔다. 온지유는 여이현에게 문자를 보내며 번화가에서 만나자고 했다.도로 위를 달리는 차는 그다지 많지 않았고 온지유의 운전실력도 아주 부드러웠다.그 순간 맞은편으로 커다란 화물차가 가드레일에 부딪히더니 휘청이며 온지유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엄마, 앞에 차 조심해요!”별이는 소리를 쳤다.온지유는 이미 핸들을 꺾으며 무섭게 다가오는 화물차를 피하려고 했다.그런데 화물차 운전기사는 핸들을 꺾었다. 꼭 두 사람을 노린 것처럼 말이다.온지유는 욕설을 읊조리곤 가드레일을 들이받았다. 화물차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려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가드레일에 멈춰 서 있는 그녀의 차를 보고도 핸들을 꺾어 다가온다면 이건 계획 살인이었다.도로의 경사도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온지유는 핸들을 꽉 잡고 있었다.“별아, 꽉 잡고 있어야 해.”“네, 엄마.”별이는 울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볼 뿐이다.쾅 소리가 여러 번 울려 퍼지고 차는 휘청이며 내리막길을 내려가다가 커다란 나무에 부딪히며 멈춰 섰다.온지유는 망설임도 없이 안전벨트를 풀어 뒤로 자리를 옮겼다. 별이의 안전벨트를 풀어준 후 뒷문을 열었다.“별아, 얼른 내려. 조심해. 차에서 내리고 바로 저쪽으로 뛰는 거야.”온지유는 도로 위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상대의 목적이 뭔지 몰랐지만 화물차가 일부러 그녀가 있는 곳으로 핸들을 꺾은 것을 보아 그녀를 노리는 것이
온지유는 여이현에게 연락했다. 그녀는 가만히 앉아 도로 위를 달리는 차를 세워 타지 않았다. 두 사람이 언제 다시 깨어날지도 모르고 깨어난 두 사람이 그녀가 아직 멀리 도망가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또 달려들게 분명했으니까.그녀는 싸우는 것이 두렵지는 않았다. 여하간에 일반인은 더 이상 그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다만 두 사람이 지원군을 부를까 봐 두려웠다.여이현은 전화를 받았다. 그는 운전 중이었다.온지유는 바로 입을 열었다.“이상한 사람들이 우릴 죽이려고 해. 얼른 와줘.”“알았어. 지금 바로 갈 테니까 조심해.”여이현은 전화를 끊지 않았다. 통화를 이어가면서 빠르게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비는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온지유는 몸이 점점 더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상처에 빗물이 묻으면서 고열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았지만 유감스럽게도 비상약이 들어있는 가방을 챙기지 못했다.그녀는 반 시간 째 걷고 있었지만 지나가는 차는 없었다. 다행히 두 남자는 더는 그녀를 쫓아오지 못했다.어쩌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을 수도 있고 그녀가 이미 멀리 도망쳤다고 생각하고 포기했을 수도 있다.온지유가 거의 정신을 잃고 쓰러져 가려던 때 차 한 대가 멈춰 섰다.“지유 언니, 별아.”권서정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온지유는 대답하고 싶었으나 결국 버티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지유 언니...”권서정은 바로 부축하며 별이에게 물었다.“별아, 이모한테 말해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나쁜 사람이 나타나서 저랑 엄마를 공격했어요.”별이는 두려움에 온지유는 꼬옥 끌어안으며 계속 온지유를 불렀다.권서정은 그런 아이를 달랬다.“별아, 일단 차에 타. 엄마가 지금 많이 다쳐서 당장 병원으로 가야 할 것 같아. 별이는 씩씩한 아이니까 이모 말대로 할 수 있지? 일단 얼른 이모랑 같이 차에 태자.”별이는 눈물을 닦은 후 권서정과 함께 차에 올라탔다.권서정은 핸들을 돌려 시내로 달렸다. 일부러 창문을 내
“등원했어.”여이현은 물 한잔 따라주었다.“그래도 공부에 열중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별이를 데리고 오지 않았어. 비록... 아직 유치원생이긴 하지만.”유치원에선 아직 글을 가르치지 않았지만 여러 가지 아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활동을 했고 분위기도 아주 좋았다.하지만 연예계는...여이현은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노승아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괜찮았지만 연예계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변해버렸기 때문이다.별이는 아직 어렸다.게다가 그에겐 돈도 많았기에 만약 별이가 어느 정도 자란 후에도 연예계에 관심을 보인다면 그때 가서 그가 도와주면 되는 일이었다.“응. 그동안 별이랑 쭉 함께 있어서 갑자기 곁에 없으니까 이상해서 그랬어.”온지유는 다소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여이현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쓸어내렸다.“이해해. 오후에 나랑 같이 별이 데리러 가자.”“응, 알았어.”이날 온 하루 여이현은 온지유의 곁에 있어 주었다. 온지유는 서류도 보지 않는 그를 보며 순간 궁금해져 물었다.“안 바빠?”“응, 회사는 배 비서한테 맡겼으니까 괜찮아. 그리고 새 비서를 뽑았거든. 오늘 면접이니까 앞으로 내가 할 일은 많지 않을 거야. 너랑 별이 곁에 있어 주는 게 난 더 중요해.”그는 두 사람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런데 돌아오고 나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검은 속내를 품은 임원과 돈에 눈이 멀어버린 여재호 때문에 방심할 수가 없었다.비록 결혼식은 아주 성대하게 올렸지만 그래도 잊어버린 사람은 있는 법이니까.그동안 그는 온지유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 그 결과 온지유와 별이가 어떻게 되었는가.“그랬구나. 그럼 배 비서님에게 휴가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니야?”그녀와 여이현이 자리를 비웠을 때 배진호가 여진에서 5년 동안 버티며 관리를 해주었다. 심지어 그들과 함께 Y 국으로 가기도 했었다.그런데 이번엔 인턴 교육까지 맡게 되었으니 업무량이 아주 많이 늘어버리지 않았겠는가...여이현은 그녀를 끌어안았다.“그래
온지유는 여이현을 살짝 째려보았다.“엄마...”별이는 온지유의 손을 잡고 흔들며 애교를 부렸다.여이현은 바로 따라 하면서 입을 열었다.“자기야...”온지유는 그런 두 사람의 공격에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두 사람 다 그만해! 일단 집으로 돌아갈까?”아직 유치원에서 벗어나지도 못했는데 두 사람은 동생을 낳아달라고 말하고 있었다.그녀와 여이현은 오랜 부부기도 했으나 아직 밖에서 이런 대화를 대놓고 할 정도로 무뎌지지 않았다. 만약 몰래 따라온 기자가 사진이라도 찍는다면 모든 플랫폼에 그녀와 여이현의 기사로 도배될 것이 분명했다.“그래, 얼른 집 가서 동생 만들자고!”여이현은 온지유의 어깨를 감싸며 온지유와 함께 차에 타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왼손으로 별이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하지만 별이는 바로 손을 빼내면서 온지유의 곁으로 다가갔다.비록 온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다소 원망이 담긴 눈빛으로 여이현을 보았다.집에 도착하자마자 법로가 그들을 반겼다.신무열과 김혜연은 Y 국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는 은퇴를 했기에 매일 시간이 많았고 지난번 별이가 그를 찾은 뒤로 그는 돌아가지 않았다.“외할아버지.”별이와 법로의 사이도 아주 좋았다. 법로가 반기자 별이는 바로 법로의 품으로 달려갔다.법로는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길로 아이를 보며 얼른 안아 올렸다.“가자, 별아. 이 할아버지랑 좋은 곳에 가자.”“저희 방금...”돌아왔다고 말하려던 순간 여이현은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바싹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일부러 별이를 데리고 집까지 비워주시는데,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잖아?”온지유는 순간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주먹을 들어 여이현의 가슴을 쳤다.여이현은 화를 내기는커녕 웃기만 했다.“자기야. 이런 일은 나이 들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해야 하는 거야. 게다가 마음껏 즐겨야지!”말을 하던 여이현은 바로 온지유를 확 끌어안았다.법로와 별이는 아직 멀리 가지 않았기에 감히 이것보다 더
권다솔은 서슴없이 말하면서 확고한 눈빛으로 배진호를 보았다.배진호는 그녀가 눈치챌 줄은 몰랐다. 하지만 확실히 권다솔의 능력은 뛰어났지만 그녀가 무슨 목적으로 여진으로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그리고 그가 알고 있는 권다솔의 능력은 면접 때 본 그것이 전부였다. 여하간에 여이현의 비서 자리는 막중한 자리였고 앞으로 그와 함께 일을 해야 했기에 신중해야 한다.“권다솔 씨의 집안이 어떤지는 저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진은 능력과 실력만 중요하게 보거든요. 권다솔 씨의 실력이 뛰어나다면 이 계약은 식은 죽 먹기가 아니겠어요?”배진호는 느긋하게 입을 열며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권다솔 씨 혼자만 가는 거 아닙니다. 저와 함께 가는 겁니다.”배진호가 있으니 아무리 권다솔의 실력이 부족하다고 해도 그가 나서서 해결하면 되었다.권다솔은 더는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배 비서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렇게 하겠습니다.”최주하와 지석훈, 그리고 나도현은 여이현의 절친한 친구였다. 이번 프로젝트는 정부와 연관이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여이현도 몇 년 동안 그들과 시간을 보내지 못했기에 이 기회에 다들 한몫 챙겨보면서 오랜만에 얼굴도 볼 생각을 했다.그런데 그들은?그들은 이번 프로젝트를 소소한 모임으로 생각했다. 협력이 아니라.그러나 그들의 시야에 나타난 사람은 여이현이 아니라 배진호와 권다솔이었다.권다솔은 연한 핑크색의 정장을 입고 있었고 머리를 단정하게 묶었다. 그녀와 배진호의 키 차이는 머리 하나 정도 길이였다.그녀는 배진호와 함께 들어오고 있었고 두 사람의 모습은 유난히도 어울렸다.최주하가 장난스럽게 말했다.“배 비서, 이분은 여자친군가요?”“아니면 약혼녀?”지석훈은 더 서슴없이 말했다.하지만 나도현은 그저 두 사람을 훑어볼 뿐이다.“두 사람 참 눈치도 없다. 배 비서 이 나이에 여자친구는 무슨 여자친구야. 아내면 모를까, 안 그래?”“...”배진호는 할 말을 잃었다.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이다.배진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