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이현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이태훈 씨가 언제 우리 고모를 병원에 데려간 거죠? 난 몰랐는데요. 언제 있었던 일이죠? 저희 고모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이태훈 씨가 우리 고모한테 무슨 짓을 한 거죠? 이태훈 씨 이 일은 분명히 설명하셔야 할 겁니다. 설령 내가 이씨 가문과 싸워 이길 수 없더라도 우리 고모를 위해 정의를 되찾겠습니다.”“당신...”이태훈은 여이현이 보인 예상 밖의 행동에 말문이 막혔다.하지만 이태훈 역시 계획대로 이을 진행한 것은 아니었다.이태훈은 갑자기 깨달은 듯 건방진 웃음을 지으며 여이현에게 말했다.“내가 여이현 씨의 고모부가 되고 싶다고 하면 여 대표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이 말이 떨어지자 기자들은 모두 놀랐고 최승현은 소리를 질렀다.“난 반대야.”“그쪽이 무슨 자격으로 반대해요? 그쪽이 누군데?”“그러니까요. 자기 신분도 모르고. 내 생각에 여 대표님이 승낙해 주시는 게 낫겠어요. 강한 자끼리 연합하면 여진 그룹은 더욱 번창할 거예요.”“만약 그렇게 되면 정말로 경성에 큰 경사가 일어나는 거야.”기자 중 일부는 여씨 가문과 이씨 가문의 결혼을 찬성하는 분위기를 보였다. 세상이 혼란스러우면 좋아하던 기자들이 언제부터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해 주게 된 걸까?여이현은 온지유의 의아한 눈빛에 낮은 목소리로 해명했다.“여긴 내 회사야. 나도 내 사람 몇 명은 준비해야 상대방 손에서 놀아나 체면을 상하는 일을 방지할 수 있어.”“맞는 말이네.” 온지유는 생각해 보더니 그제야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런데 이때 한 기자가 갑자기 소리쳤다.“여 대표님께서 이태훈 씨에게 약을 먹인 건 혹시 여희영 씨와 이태훈 씨의 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해 생각해 낸 특별한 방법이 아니었습니까?”여이현은 미소를 지었고 이런 표정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날카로운 기자들은 즉시 이를 포착해 질문했다.“여 대표님, 일을 성공하지 못하셨는데 다음 계획은 있으신가요?”온지유는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온지유 씨,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당신을 만나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영광이에요. 여기까지 오면서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당신이었고 이 사실은 언제나 변함이 없어요. 사람들이 당신을 세컨드라며 소문을 퍼뜨려 당신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는 걸 알고 있어요. 누가 그런 소문을 낸 건지 모르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오늘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건.”화면에 온지유와 여이현의 일상 사진들이 나타났고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이 사람들의 부러움을 자아냈다.여이현은 마이크를 잡고 일어나 온지유를 일으켜 세웠고 온지유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다.“온지유, 사람들은 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몰라. 그 사람들은 내가 너에게 과분한 줄 알지만 사실 네가 나에게 과분하다는 사실을 난 잘 알고 있어. 너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건 나에게 큰 행운이자 영광이야. 사람들이 우리가 어떻게 만나 사랑하게 되었는지 모를 뿐이지. 넌 잘 알고 있잖아?”여이현은 눈가가 촉촉해졌다. 원래는 세컨드라는 소문을 해명하기 위해서였지만 그동안의 사진들을 보며 깊은 감정에 휩싸였다. 두 사람의 사랑이 여기까지 오는 데는 정말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두 사람은 다행히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냈다.온지유는 눈물이 맺힌 채 부끄러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여이현이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영원히 너라는 걸 믿지?”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기억해. 넌 세컨드가 아니고 난 너 이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한 적도 없어. 기억해 줄 거지?”여이현은 말을 끝마치고서는 온지유의 이미에 키스하더니 기자들을 향해 말했다.“오늘 이태훈 씨 덕분에 여러분 앞에서 제 아내와 저의 사랑을 증명하게 되었네요.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온지유 씨를 보게 된다면 사모님이라고 불러주시기를 바랍니다.”사실 온지유는 이미 여씨 가문의 사모님이었고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여이현이 굳이 강조한 것은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기자들은 조금
여희영은 약속한 호텔에 도착한 뒤 이태훈 혼자 있는 것을 보고 돌아가려 했지만 그 순간 온지유의 메시지를 받았다.[상황이 시끄러워졌어요. 이태훈 씨에게 호감이 없다면 오늘 확실하게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하지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다면 한 번쯤 사귀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어쩌면 이태훈 씨가 고모님의 운명일지도 모르잖아요.]여희영은 자기보다 나이도 어린 온지유에게 이런 충고를 듣는 것이 화가 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지만 온지유의 말이 맞긴 했다.이태훈은 정말 괜찮은 사람이었기에 먼저 친구로 사귀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여희영은 용기 내 이태훈의 맞은편에 앉아 해명했다.“두 사람은 아마 안 올 거예요. 태훈 씨가 기분 나쁘시다면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사실 내가 보상을 요구한 것도 희영 씨를 만나고 싶어서 그런 거지 다른 뜻은 없거든요.”이태훈의 눈빛이 흔들렸다.오늘 밤 평소보다 더욱 아름다운 여희영의 모습은 이태훈의 눈길을 더욱 사로잡았다.이태훈은 마치 아름다운 꽃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당장이라도 여희영에게 다가가고 싶었지만 마음을 다잡고 요리를 주문한 뒤 요리가 테이블에 오르자 요리마다 조리법과 숨겨진 이야기들을 해주었다.이태훈은 어린 시절부터 여러 곳을 여행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아왔기 때문에 또래보다 식견이 넓었다. 그리고 이태훈도 호기심이 많아 많이 배웠기에 여러 가지 비하인드를 많이 알고 있었다.이태훈의 설명을 들은 여희영은 조금 자격지심이 느껴졌다.이제 보니 각 요리마다 독특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여희영은 줄곧 셰프들의 솜씨가 뛰어나서 이렇게 여러 가지 요리를 연구해 낸 줄 알았다.술을 몇 잔 비우자 두 사람은 점점 편해졌고 그에 따라 이야깃거리도 점점 더 많아져 어느새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한편 영화관에서 여이현은 온지유에 의해 끌려 나왔다.사실 여이현도 오늘 밤 정말 억울했다. 그는 확실히 비서에게 표를 예약하도록 했지만 영화 제목을 잘못 말하는
온지유는 여희영이 아침 일찍 찾아와 옷을 빌리겠다고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만약 여희영이 여씨 가문의 딸이 아니라면 옷을 빌리는 행동이 이상하지 않았겠지만 문제는 여희영이 여씨 가문의 딸이라는 것이었다.여희영이 원한다면 갖지 못할 옷이 없을 텐데 왜 굳이 온지유에게 옷을 빌리려는 걸까?온지유는 잠시 여희영을 살펴봤지만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하지만 온지유는 여희영이 옷을 빌려 달라고 하던 돈을 빌려달라고 하던 두말없이 빌려줄 수밖에 없었다.온지유는 찻잔을 내려놓고서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올라가서 옷 골라 보세요.”여희영은 놀라며 물었다.“왜 내가 옷을 빌려 달라고 하는지 안 물어봐?”물론 궁금했지만 여희영이 굳이 말하지 않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아 온지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은 드레스룸에 도착했고 그곳에 진열된 옷들은 눈이 부실 정도로 다양했다. 하지만 여희영은 몇 벌을 골라보다가 결국 마음에 드는 게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냥 안 빌릴래. 나한테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어울리는 게 없긴 할 거예요. 이 옷들은 제 나이에 맞는 것들이니까요. 고모님 나이에는 좀 더 성숙한 옷을 입어야 할 것 같아요.”온지유는 여희영을 한참 바라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런데 고모님도 옷이 많으실 거고. 만약 적당한 옷이 없다면 가서 사시면 될 텐데 왜 저에게 빌리러 오셨어요?”여희영은 얼굴이 빨개지며 즐거운 일이 떠오른 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한껏 부끄러워하는 여희영의 모습에 바보가 아닌 온지유는 바로 여희영이 연애 중임을 깨달았다.온지유는 여희영에게 살짝 다가가 장난스럽게 물었다.“혹시 이태훈 씨와 잘되고 있는 거예요? 말해주세요. 진도는 어디까지 가셨어요?”“진도는 무슨 진도. 그냥 사람이 괜찮아 보여서 일단 사귀기 전에 시간을 두고 좀 알아보려는 거야. 나 아직 그 사람하고 사귈 생각 없거든?”여희영은 얼굴이 빨개져 빨간 과즙이 흐를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을 보니 대답하지 않아도 이미
여이현은 대답을 들은 뒤 여희영을 보고서는 놀라며 말했다.“왜 지유 옷을 입고 있어요? 옷이 없어요?”그렇게 말하며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사고 싶은 거 있으면 사요. 내 돈은 아까워하지 말고요.”“내가 돈을 다 쓰면 네 와이프는 무슨 돈을 써?”여희영은 여이현을 놀리고 싶어 농담을 던졌지만 여이현이 슬며시 웃으며 온지유를 감싸안더니 말했다.“내 돈은 다 지유 손에 있어요. 고모한테 준 건 내 용돈일 뿐이에요.”“정말이야?”여희영은 마음속으로 여이현 같은 그룹의 대표가 모든 돈을 온지유에게 맡겼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건 일반적인 가정의 몇백만 원, 몇천만 원이 아니라 수백억, 수천억에 달할 테니 말이다.하지만 두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아 여희영은 다시 한번 놀랐다.“만약 이태훈이 돈을 다 나한테 맡긴다고 해도 나는 받지 못할 것 같아.”“바보 아니에요? 못 받긴 왜 못 받아요? 그냥 대범하게 받으면 되지. 이태훈이 안 주면 그게 이상한 거예요.”온지유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여이현도 모든 돈을 다 온지유의 명의로 돌린 것은 아니었다. 여이현의 개인적인 자산만 온지유의 손에 있을 뿐 그룹의 자산은 여전히 여이현의 손에 있었다.“이현아, 넌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네가 이러면 다른 남자는 어떻게 살아?”여희영은 이 일을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부부는 비록 일심동체라고 해도 자산을 모두 한쪽에 넘기는 건 너무 모험이었기 때문이다.“나는 지유하고 이혼할 생각 없는데. 그럼 돈을 누구에게 맡기겠어.”여이현은 온지유에게 입을 맞추며 물었다.“그렇지, 여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질투하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자. 알겠지?”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여이현의 턱에 얼굴을 비볐다.여희영은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참지 못하고 서둘러 소파에 놓았던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 더 이상 방해가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태훈과 데이트를 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여희영이 떠나자 정색하며 각자 소파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온지유가 운동회에 참가하기로 한 건 여이현의 계략에 빠진 것이다.여이현은 미소를 지으며 온지유의 앞으로 다가가 천천히 말했다.“그럼 부인께서는 위층에 올라가서 옷을 갈아입으시죠. 저는 지금 별이를 불러 준비되면 바로 출발하겠습니다.”“어디 가는데?”온지유는 의아해했다.여이현은 온지유의 코끝을 가볍게 툭 치며 말했다.“운동회 가야지.”‘학교 운동회를 오늘 한다고?’온지유가 의문을 품고 위층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고 내려오자 두 부자는 이미 차에서 온지유를 기다리고 있었다.가는 길 내내 온지유는 자신이 여이현의 계략에 속아 넘어간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괘씸한 생각이 들었지만 온지유는 자진해서 여이현의 함정에 뛰어든 꼴이었다.학교 정문 앞은 차들로 가득했고 여이현은 주차할 자리를 찾지 못 해 온지유와 별이를 먼저 학교에 들여보낸 뒤 여이현은 주차를 마치고서는 다시 만나기로 했다.온지유는 별이를 데리고 축구장으로 들어갔다. 신나서 뛰어노는 아이들과 더운 날씨에 얼굴을 찌푸린 부모들을 보며 온지유는 마음속으로 왜 이런 운동회를 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운동회를 하는 건 괜찮아도 왜 굳이 부모들까지 참가 해야 하는지 정말 짜증이 났다.‘학교에 다니는 건 아이들의 일인데 왜 부모가 참가해야 하는 거야?’온지유가 불쾌함을 느끼고 있을 때 어떤 부모들은 흥분한 얼굴로 선생님 옆에서 이번 운동회가 얼마나 의미 있는지 떠들고 있었다. 온지유는 이를 듣기만 해도 가식적으로 느껴졌다.‘의미가 있다고? 그럼 왜 저렇게 꽁꽁 전신 무장을 하고 온 거야? 다른 사람이 타도 되고 자기는 타면 안 된다는 건가?’“저기... 혹시 별이네 아줌마세요?”방금 운동회가 의미 있다고 말하던 한 어머니가 다가와 온지유를 훑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별이네 아버지는 사업하신다고 들었어요. 아무리 봐도 아닌 것 같네요. 사업하는 가문에서 고용한 도우미가 이렇게 꾸미나요?”“그럼 어떻게 꾸며야 하는데요? 그쪽처럼 입어야 하나요?”온지유는 마침 화풀이할 상대를
유인영은 주의 사항이 적힌 종이를 온지유의 얼굴 앞에 뿌렸고 자칫 잘못하면 눈에 닿을 정도였다.온지유는 이에 화를 내며 말했다.“할 말 있으면 똑바로 말하세요.”유인영은 낮은 목소리로 비웃음을 날렸다.“주의 사항을 확인하시라고요. 그리고 뒷면에는 오늘 점심에 준비할 요리가 적혀 있어요.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맛으로 준비하셔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그쪽 요리를 먹지 않을 거고 그쪽 아들이 오늘 운동회에서 따낸 성적도 전부 무효화될 거예요.”“제 요리가 맛이 없는 게 제 아들과 무슨 상관이죠? 저를 벌하면 벌했지 왜 아이까지 피해를 주려는 건가요?”온지유는 운동회에 참가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별이까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만약 정말 아무도 온지유의 요리를 먹지 않는다면 별이까지 힘들게 할 수 있었다.온지유는 얼굴을 찌푸렸다.‘학교에서 이런 결정을 내렸을 리 없어. 이건 분명 이 학부모회장이라는 여자가 권력을 남용하는 거야.’이미 와버렸으니 온지유는 준비하라는 대로 따를 생각이었지만 꼭 직접 요리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만약 할 줄 모르는 요리라면 호텔에 주문하면 될 일이었다.온지유는 종이를 당당하게 받아 들고 뒷면에 적힌 내용을 확인했다.그러자 온지유는 너무 놀라서 턱이 빠질 뻔했다.“왜요? 설마 못 하겠다는 건 아니겠죠?”유인영은 온지유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비웃었다.“하지만 당시 같은 아줌마라면 문제없을 거예요. 나는 할 줄 몰라요. 요리 같은 거 해본 적이 없어서요. 다른 엄마들도 마찬가지로 요리는 못할 거예요. 그러니까 점심 준비는 아줌마한테 맡길게요.”“걱정하지 마세요. 문제 해결이 제 전문이거든요. 회장님은 마음 편히 쉬세요.”온지유는 여유롭게 대답했다.“그쪽... 그냥 말로만 큰소리치는 거 아니죠? 이번엔 넘어가 줄게요.”유인영은 돌아갔고 이번에는 다시 온지유에게 찾아와 귀찮게 하지 않았다.운동회가 곧 시작되자 각 반 학생이 운동장에 모여 일련의 절차를 진행했다. 절차가 끝나고 교장이 신호
총성이 울리자마자 아 하는 소리와 함께 별이가 넘어져 바닥에 쓰러졌다. 상황을 보니 부상이 가볍지 않은 것 같았다.온지유는 가장 먼저 달려가 별이를 안아 올렸다. 그녀는 별이의 무릎 피부가 크게 까져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엄마, 아파요. 다리가 너무 아파요.”별이는 온지유의 품에 안겨 크게 울기 시작했다.“별이야, 걱정하지 마. 엄마가 지금 당장 의사 아저씨한테 데려다줄게.”온지유는 주변을 재빨리 둘러보았고 가까운 곳에 임시로 설치된 의무실이 있는 걸 발견하고서는 바로 뛰어갔다.선생님과 다른 학부모들도 뒤따라왔고 모두가 별이의 상처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의사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아이의 감정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밖으로 나가달라고 요청했다. 덕분에 의무실이 조용해지자 온지유는 의사에게 다급히 물었다.“의사 선생님, 뼈에는 이상이 없나요?”이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만약 뼈에 문제가 있다면 시간을 지체하지 말고 바로 큰 병원으로 가야 했다.의사는 다시 검진한 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어머님, 뼈는 다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무릎의 상처가 나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겁니다. 그 기간 절대 상처가 물에 닿지 않게 하고 또 손으로 상처를 만지게 하면 안 됩니다.”온지유는 대답한 뒤 진지하게 주의해야 할 점을 적었다.상처 치료를 끝낸 뒤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별이가 작은 목소리로 훌쩍이고 있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보였다.온지유는 아이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위로했다.“별이야, 아프면 그냥 마음껏 울어도 돼. 무서워하지 마. 아프면 울 수밖에 없는 거야. 어른들도 마찬가지고.”“엄마, 그럼 나 울어도 애들이 나를 겁쟁이라고 놀리지 않는 거예요?”“당연히 안 놀리지. 혹시 누가 너를 놀린다고 해도 엄마는 항상 네 편이야. 엄마는 네가 겁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오히려 아주 용감하고 강하다고 생각해.”별이는 완전히 이해한 건 아니지만 아픈 걸 참지 않고 작은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별이가
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은 아니나 음치는 아니었다.별이는 기쁜 얼굴로 손뼉을 쳤다.“너무 좋아요. 아빠, 엄마, 내일 어린이집에서 가족 이벤트를 한다고 했어요. 노래 대회라고 했는데 별이랑 같이 참가해줄 거죠?”내일은 주말이었다. 어린이집에서 주말에 이런 이벤트를 계획한 것도 평일 출근할 학부모를 고려해서였다.만약 여이현에게 다른 일정이 없다면 당연히 아내와 함께 별이의 어린이집으로 갈 것이었지만 하필이면 새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배진호는 권다솔의 마음을 되돌리느라 시간이 없으니 그가 해야 했다.“여보, 여보가 별이랑 같이 가줘. 난 그날 거래처 만나봐야 하거든.”신호를 기다리는 틈을 타 여이현이 온지유에게 말했다.온지유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아이의 일에 부모 모두 책임을 져야 했지만 두 사람은 부부였던지라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도 필요했다.여이현이 바쁘게 일하는 것도 더 유복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을 온지유도 잘 알고 있었다.별이는 더욱 배려심이 깊은 아이였다. 고집을 부리지도 않고 온지유의 팔을 꼬옥 잡아 기대며 말했다.“그럼 아빠는 일하러 가세요. 별이는 엄마만 있어도 괜찮아요. 선생님도 두 분 중 한 명만 있어도 된다고 했어요. 물론 두 분이 같이 가면 더 환영한댔어요.”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세 사람은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세 사람이 돌아왔다는 것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인지 자고 있던 온하윤도 눈을 떴다. 작은 입을 벌리며 하품했다.옆에 있던 김명자는 얼른 주방으로 가서 분유를 탄 뒤 온하윤의 입에 물려주었다. 향긋한 분유 냄새를 맡은 온하윤은 꿀꺽꿀꺽 젖병을 빨아 먹었다.세 사람이 집 안으로 들어왔을 때 마침 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너무도 행복했다.“오늘 저녁은 내가 할게. 별이가 먹고 싶다는 햄버거를 만들고 있을 테니까 당신은 아이들이랑 놀아줘.”온지유는 여이현에게 뽀뽀한 뒤 앞치마를 두르곤 주방으로 들어갔다.거실에선 웃고 떠드는 소리가 울
권다솔은 이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결혼할 수 없었다.게다가 남태건과 평생 묶여 살고 싶지도 않았다.설령 어젯밤 이상한 약물 탓에 그와 밤을 보내게 되었다고 해도 그녀의 마음속엔 온통 배진호뿐이었다.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온몸이 남태건의 터치를 거부하고 있었다. 설령 그저 손을 잡는 것일 뿐이라고 해도 말이다.남태건은 잔뜩 실망한 기색이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그래, 일단 생각은 해봐. 다솔아, 급하게 답을 주지 않아도 돼.”그녀가 계속 거절한다면 그녀의 부모님을 찾아가 설득하면 그만이었다.권다솔의 부모님은 그를 아주 좋아했다. 어떻게든 그녀와 이어주려고 했으니 그들과 손을 잡는다면 권다솔과 결혼할 수 있을 것이다.권다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설령 오랫동안 생각을 해본다고 해도 남태건을 받아줄 리가 없었다....한편 온지유 쪽.권다솔이 떠난 후 두 사람은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그동안 여이현은 배진호를 찾아간 적 있었다. 기획하고 있던 프로젝트를 넘겨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배진호는 집안일로 상태가 아주 좋지 못했다. 지금까지 혼자 회사를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어 보였으며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을 기력은 없었다.배진호는 여이현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솔직하게 말했다.그가 솔직하게 말하니 여이현도 강요하지 않았다.“일단 집안일부터 처리하세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고요. 집안일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나한테 다시 찾아와도 돼요. 그때 또 새로운 일을 줄 테니까요.”여하간에 여진 그룹은 대기업이었기에 프로젝트는 언제든지 있었다.한번 기회를 놓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건 없었다.배진호는 그런 여이현이 너무도 고마웠다. 이미 충분히 그를 도와주고 있었다.하지만 감정이라는 건 결국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 법이었다. 물을 마셔도 뜨거운 것인지 차가운 것인지 본인만 아는 것처럼 말이다. 너무 많은 사람이 끼어들면 때로는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킬 때도 있었다.그는 권다솔과 다시 함께 살고 싶었지만, 전제가
“참.”권다솔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체크아웃 해야겠어요.”“그럴 필요 없어. 어젯밤 방은 내가 예약한 거거든. 우린 그냥 바로 병원으로 가면 돼. 나머진 내가 알아서 다 처리할 거야.”남태건은 급하게 그녀를 말렸다.두 사람이 나가자마자 배진호가 돌아왔다.그의 손에는 금방 만든 샌드위치가 있었다. 맛집으로 소문난 가게였던지라 그는 족히 반 시간은 기다려서야 살 수 있었다.하지만 괜찮았다. 권다솔이 좋아하기만 한다면 반 시간이든 한 시간이든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손님.”이때 로비 직원이 그를 불렀다.그녀는 배진호를 측은한 눈길로 보았다. 즐거운 마음으로 아침을 사러 나갔다가 그의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와 함께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그는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직원은 결국 참지 못하고 말해주었다.“여자친구분이 이미 떠나셨어요. 체크아웃하시겠어요?”“네, 체크아웃할게요.”배진호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잠에서 깨어난 권다솔이 그에게 말도 없이 가버린 것을 보면 아직 그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그래서 그가 나간 사이에 생각을 정리할 겸 먼저 가버린 것으로 생각했다.체크 아웃을 한 뒤 배진호도 호텔에서 나왔다.그는 누군가 자신을 사칭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남태건은 권다솔을 데리고 병원으로 온 뒤 기본적인 검사를 진행했다. 권다솔은 아주 건강했다.하지만 그녀는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다솔아, 나랑 함께 밤을 보낸 게 그렇게 슬픈 일이야? 너한테 나는 그런 존재였어?”그녀를 집으로 데려다주던 남태건은 눈가가 붉어졌다.권다솔은 오직 배진호만 원했다. 그 사실에 그는 가슴이 쓰라리면서 분노가 치밀었다.그는 이미 권다솔을 자신의 아내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배진호는 그의 아내와 밤을 보내지 않았는가.권다솔은 고개를 저었다.“그런 게 아니에요. 전 그냥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 뿐이에요. 전 태건 씨를 여전히 친구로만 생각하고 있거든요.
권다솔은 눈을 떴다.옆에 누워있는 남태건을 본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머릿속도 하얘졌다.그녀는 힘겹게 입을 뗐다.“어젯밤에... 그럴 리가 없잖아요?”머릿속에 남아 있던 기억이 알려주고 있었다. 어젯밤 그녀와 함께 있었던 사람은 배진호라고. 하지만 왜 남태건이 눈앞에 있는 것일까?그녀는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다솔아, 내가 어제 일찍 집에 들어가라고 했잖아. 그런데 네가 싫다면서 나더러 먼저 가라고 했지. 내가 어떻게 너만 혼자 남겨두고 집에 가? 주위에 남자들이 득실거리는데. 정말로 내가 먼저 갔다면 이상한 파리들이 너한테 꼬였을 거라고. 내가 그렇게 경계하고 있었는데도 너한테 파리가 꼬였을 줄은 몰랐네.”남태건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해댔다.얼굴도 붉지 않고 가슴도 요동치지 않을 정도로 태연했지만 두 눈엔 안타까움만 남아 있었다.“누가 네 술잔에 뭔가를 탔어. 그걸 눈치 못 챈 네가 주스를 가지러 갈 때 결국 정신을 잃게 되었었지. 하마터면 처음 보는 놈들에게 끌려갈 뻔한 걸 내가 막은 거야.”권다솔은 어젯밤 있었던 일을 기억해내려고 애를 썼다.그녀는 확실히 자신에게 치근대던 남자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녀에게 손을 대려고 했으나 배진호가 나타나 남자를 때려주며 무사하게 되었다.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배진호라는 것을. 애초에 남태건이 아니었다.“정말로 절 구해준 사람이 태건 씨예요? 거짓말 하고 있는 건 아니죠?”권다솔은 반신반의하며 말했다.남태건은 손을 번쩍 들며 맹세했다.“당연히 거짓말이 아니야. 어젯밤 널 구한 사람이 내가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 너랑 같은 방에 있겠어? 다솔아, 그 약은 아주 위험한 약이야. 사람 기억까지 흐릿하게 만들 수 있는 약이지. 이따가 나랑 같이 병원에 가자. 후유증이라도 남으면 안 되잖아.”기억까지 흐릿하게 만든다는 말에 권다솔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설마 진호 씨랑 보낸 시간이 전부 꿈인 거야? 약 때문에 환각이 생긴 거야?'그녀는 어제 꿈속에서 배
만약 권다솔이 모른다고 한다면 그는 이곳을 떠나 그녀가 푹 쉴 수 있게 해줄 생각이었다.그는 알고 있었다. 권다솔이 취했다는 것을. 술에 취한 사람과 억지로 하고 싶지 않았다.“진호 씨, 내가 어떻게 진호 씨 얼굴을 잊겠어요. 설마 내가 진호 씨를 못 알아볼 거로 생각한 거예요?”권다솔은 그를 보았다.그녀는 지금 술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호텔 불빛 아래 보이는 배진호의 얼굴도 흐릿했다.이 모든 게 꿈일 거로 생각했다.현실에서는 감정을 꾹꾹 누르고 있었으니 꿈에서만큼은 전부 표현하리라 생각했다.그녀는 한번 또 한 번 배진호의 이름을 불렀다.그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배진호는 이성을 잃고 말았다.그는 옷을 하나씩 벗으며 방 안의 불을 꺼버렸다. 그리고 고개를 내려 권다솔에게 키스했다. 두 사람은 뜨거운 키스를 나누었다.얼마나 지났을까, 두 사람은 전부 힘이 빠진 상태였다. 그제야 서로에게서 떨어졌다.권다솔은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손가락 하나조차 움직일 수 없었기에 샤워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했다.그래서 그대로 눈을 감고 자버렸다.그날 밤, 그녀와 배진호는 그 어느 때보다 푹 자게 되었다.다음 날 아침이 되자 열린 커튼 틈 사이로 햇볕이 들어와 배진호는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옆에 누워있는 권다솔을 본 그는 전례 없던 행복을 느끼게 되었고 이대로 시간이 멈추길 바랐다.그는 권다솔에게 이불을 덮어준 뒤 옷을 입었다. 아침을 사러 갈 생각이었다.어젯밤 두 사람은 아주 격렬하게 서로를 원했기에 권다솔이 깨어나면 분명 배고플 것이었다.아침을 먹은 후에 두 사람을 편히 잠 못 이루게 했던 문제들을 해결해볼 생각이었고 이혼도 취소할 생각이었다.그는 그렇게 호텔을 나섰다.그 모습을 마침 남태건이 목격했다. 그는 어젯밤 내내 권다솔을 찾아다니느라 잠도 자지 못했지만 찾지 못했다.조급해진 그가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려던 때 배진호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배진호는 호텔에서 나왔다.그렇다는 건...남태건은 이를 빠득 갈며 호텔
남자는 머리가 어질거렸다. 고개를 들자 보이는 잔뜩 화가 난 배진호의 얼굴에 그는 꼬리를 내리게 되었고 이내 배진호에게 비위를 맞추려고 했다.“깼어요, 깼어요. 이 여자는 형님한테 넘길게요. 두 사람 방해하지 않고 바로 여기서 꺼져드릴 테니까 형님은 천천히 즐기십시오!”“여자도 사람이야. 우리랑 같은 인간이라고. 물건처럼 넘기느니 마느니 할 자격 없어, 너한테.”배진호는 손을 뻗어 남자의 멱살을 잡으며 엄숙하게 경고했다.그는 방금 이곳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나서서 도와준 이유는 아무 잘못도 없는 여자가 괴롭힘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그저 한 몫 챙겨보려고 구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그의 마음속에 권다솔 외에는 누구도 들어올 수 없었다.“네, 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남자는 바닥을 기어 다니더니 빠르게 몸을 일으켜 도망쳤고 중얼거리며 배진호를 욕했다.‘어디서 허세를 부려!'‘세상에 욕망이 없는 남자가 어디에 있다고! 다들 여자를 원한다고!'배진호는 쫓아가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방금 남자에게 당하고 있었던 여자에게 밤늦게 술집에 왔을 땐 조심하라고 말하고 싶었다.그런데 그는 권다솔을 발견하게 되었다.“진호 씨?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건 아니죠? 진호 씨가 왜 여기에 있어요?”권다솔은 그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그녀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보았다. 자신이 그렇게나 그리워했던 남자가 지금 바로 눈앞에 있자 땜이 무너져버린 저수지처럼 감정이 흘러나왔다.이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권다솔은 속으로 자신에 말했지만, 여전히 참지 못하고 손을 뻗게 되었다. 배진호를 직접 만지며 꿈인지 현실인지 확인하고 싶었다.“나예요. 우리가 같은 목적으로 여기에 온 것 같네요.”배진호는 씁쓸하게 웃었다.방금 그는 차를 몰고 이곳으로 오면서 안에서 빛나는 불빛 보며 생각했었다. 만약 이곳에 권다솔이 있다면 분명 안으로 들어가 한잔 마셨을 것이라고.그 생각으로 이 안까지 들어온 것이다.그러나 그는 정말로 이곳에서 권다솔을 만나게
“태건 씨, 다시 말하지만 나는 도움이 필요 없어요. 빨리 돌아가세요.”권다솔의 목소리엔 이미 지친 듯한 짜증이 묻어났다.그녀가 밤늦게 클럽에 온 이유는 마음을 풀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이지 남태건이 옆에서 잔소리를 늘어놓으라고 온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남태건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그녀 옆에 자리를 잡고 자신도 맥주 한 병을 땄다.“네가 술을 마시고 싶다면 내가 같이 마셔줄게. 네가 집에 가고 싶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데려다줄게.”권다솔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갑자기 술 마실 기분이 뚝 떨어진 그녀는 술병을 옆으로 밀어두고 춤추는 남녀들로 가득한 스테이지를 멍하니 바라봤다.‘이 순간에 배진호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다솔아, 우리도 같이 춤출래?”남태건이 먼저 제안했다.아까 이쪽으로 오면서 그는 배진호를 봤다.그 남자는 정말로 끈질기게 권다솔의 앞에 나타났다. 아니면 둘 사이엔 정말 인연이라도 있는 걸까? 이렇게 힘들고 지칠 때 찾는 곳이 똑같다는 것 자체가.하지만 남태건은 그런 인연도 자신이 있는 한 반드시 끊어낼 거라 다짐했다.그는 배진호가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권다솔과 자신이 춤을 추며 두 사람의 몸이 밀착해 있는 모습을 말이다.권다솔은 고개를 저었다.“혼자 가세요. 난 그냥 조용히 있고 싶어요.”“네가 안 간다면 나도 안 가. 나는 너하고만 있고 싶어. 다른 여자는 보지도 않을 거야.”남태건은 천천히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둘 사이의 거리가 한층 더 좁혀졌다.남태건이 손을 내밀어 권다솔의 손끝에 닿으려는 순간, 권다솔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다솔아, 어디 가려고?”남태건은 그녀가 화난 줄 알고 얼른 따라가려고 몸을 일으켰다.권다솔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주스 좀 받아어려고요. 금방 올 테니까 여기 있으세요.”그제야 남태건은 안심하고 자리에 앉았다.그는 미리 준비해 둔 액세서리를 가방에서 꺼냈다. 권다솔이 돌아오면 그녀에게 선물할 생각에 미소를 지
술병이 박살 나며 바닥이 깨진 조각들로 가득 찼다.여자는 눈앞의 상황에 깜짝 놀라 화들짝 일어섰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배진호를 쳐다보는 그녀의 심장은 놀라서 요동쳤다."당신 지금 뭐 하는 거야?""비키라고 했잖아."배진호는 마침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의 눈빛엔 감정이 전혀 없었다. 욕망은커녕 오히려 혐오감만 가득 차 있었다.그 순간, 여자는 철저히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내가 그렇게 형편없나?’제 발로 찾아온 여자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맥주병까지 깨버리다니."알았어. 가면 되잖아. 설마 내가 당신 아니면 안 될 줄 알아?"그녀도 자존심에 화가 났다.체면을 세우고 싶었던 그녀는 독설을 날렸다."당신 같은 사람 나 말고 누가 좋아한다고 그래? 사람들한테 방해받기 싫으면 여기엔 왜 온 건데?"클럽은 남녀가 자유롭게 어울리는 곳 아닌가?자기가 순진한 남자라도 되는 줄 아는가?배진호는 그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주변이 조용해진 뒤,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 조용히 술잔을 들었다.만약 권다솔이 여기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일 뿐이라는 것을.그가 술잔을 집으려 고개를 숙인 순간, 남태건이 그의 옆을 지나 안쪽 자리로 향했다.권다솔이 그곳에 앉아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쫓아낸 남자들이 몇 명인지 셀 수도 없었다. 몇몇은 버티며 소란을 피우려 했지만 그녀의 손에 든 맥주병은 그들을 봐주지 않았다.머리를 맞을 뻔한 남자들은 당연히 더 이상 그녀를 귀찮게 하지 못했다.하지만 그들 역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틈틈이 이쪽을 힐끔거리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그때 남태건이 다가왔다.그는 권다솔의 손에 있던 술병을 순식간에 낚아챘다.“다솔아,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밤늦게 집에 안 들어가고 왜 여기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어?”“이건 내 일이에요. 당신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권다솔은 그의 말을 듣고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권다솔은 방금 뺏긴 술병 대신 새로운 술병
클럽에는 예쁜 여자들이 많았지만 권다솔 같은 분위기의 사람은 얼마 보이지 않았다.권다솔이 들어서자마자 한 남자가 술잔을 들고 와서 말을 걸었다.“저희 이미 자리 잡았는데 오실래요? 스페이드 에이스도 깠어요. 마시러 와요.”“저 사람 따라가실 거면 그만두고 이쪽으로 오세요. 전 이 클럽 회원이에요. 마시고 싶은 술이 있으면 아무거나 불러요.”하지만 권다솔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그들을 밀어냈다.“비켜주세요.”권다솔은 곧장 카운터로 걸어가서 테이블 석과 맥주를 한 박스 주문했다.그녀는 혼자서 자리에 앉아 기계식으로 맥주를 열고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곧 테이블 위에는 빈 맥주병들이 줄을 지었다.알콜로 정신을 마비시키고 싶었지만 이렇게 많은 술을 마셔도 머리는 점점 맑아지기만 했다.머릿속에는 심지어 배진호의 모습이 그려지기까지 했다.같이 일을 하던 장면들, 행복한 연애를 하던 장면들, 많은 조각들이 모여져 무릎을 꿇고 프러포즈를 하는 배진호의 모습으로 변했다.한때 그녀는 자신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인 것 같았다. 크면서 한 번도 억울함을 겪은 적 없었고 일도 순조로웠다. 배진호라는 사랑하는 남자도 만났고 말이다.하지만 지금은 그저 광대가 돼버린듯한 기분이었다.“웨이터.”권다솔은 빈 술병을 한쪽에 치워두고 휘청거리며 일어섰다.“소주 몇 병 추가해 주세요.”맥주로는 아무리 마셔도 도저히 취하지 않았다.소주라도 더 마셔야 할 것 같았다.취하고 나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슬프지도 않을 것이다.머지않은 곳 다른 테이블 석에서 배진호도 한잔 또 한잔 술을 입안에 들이붓고 있었다.잘 생기고 분위기 있는 그의 모습에 고급스러운 옷차림, 게다가 주변에는 다른 여자도 없었다.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바에 있는 여자들의 이목을 끌었다.곧 노출이 심한 복장을 항 여자 한 명이 그의 곁에 와서 앉으며 배진호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오빠, 혼자 왔어? 혼자 마셔도 재미없는데 나랑 게임 할까? 진 사람이 옷 하나씩 벗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