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는 여희영보다 더 급해져서 여이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여이현은 바쁜지 전화를 받지 않았고 신호음만 들려올 뿐이었다.“됐어요. 더 이상 전화하지 않아도 돼요. 그 대신 구급차 좀 불러주세요. 누가 약을 잘못 먹었다고 말이에요.”“여 본부장님, 누가 누구한테 약을 먹였다는 건가요? 도대체 무슨 일인 거죠? 차는 제가 직접 준비한 거예요. 맹세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요. 여 본부장님, 믿어주세요. 저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비서는 그녀의 손을 잡았지만, 여희영은 그를 밀어내 버렸다.회의실 쪽에서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여희영은 급히 문을 열고 들어갔고 이태훈이 의자에 부딪힌 듯 고통스러워하며 바닥에 누워 있었다.“가까이 오지 마요. 여이현 씨 정말 대단하시네요. 얼마나 독한 약을 쓴 건지 정말...”“바로 구급차를 부를 테니까 잠깐만 참아요.”여희영은 이태훈의 상태를 보며 걱정스럽게 말하고는 문을 닫고 비서한테 구급차를 부르라고 했다.구급차가 도착했을 때, 뒤따라 기자들도 같이 몰려들었다.기자들은 누군가에게서 소문을 들은 듯했다. 이태훈이 실려 나오자 미친듯리 사진을 찍어댔다.“이태훈 씨, 누군가가 당신한테 약을 먹이셨나요? 누가 그런 일을 한 거죠?”“이태훈 씨, 그동안 이후 그룹과 여진 그룹 사이에 아무런 협력도 없었는데 무슨 일로 여진 그룹에 오신 거죠? 그리고 약은 왜 먹게 된 건가요?”“이태훈 씨, 어떤 약을 먹으셨나요?”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지만 이태훈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그는 뭐라 설명하고 싶었지만 말이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여진 그룹을 대변하려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고 또 여진 그룹을 탓하는 말이라도 하면 여희영의 기분이 상할까 봐 걱정됐다.결국 이태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시동을 걸라고 재촉할 뿐이었다.이 뉴스는 곧 큰 화제가 되었고 여이현은 온지유의 전화를 받고 나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가 회사로 돌아왔을 때 의사와 간호사들은 이미 떠난 상태였다.여희영은 그의 사무
“이태훈 씨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어떻게 이런 일이...”온지유가 문을 열고 사무실로 들어가자 모니터를 확인하고 있던 여이현이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무슨 일이라니? 네가 한 거 아니야?”“내가 했다고 생각해?”여이현은 모니터 화면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비서가 회의실에서 나온 순간, 모니터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러자 여이현은 온지유에게 그 사람을 계속 지켜보라고 말했다. 사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온지유는 이미 그 사람을 주의 깊게 보고 있었고 매우 낯이 익다고 느꼈다.그는 회사 CCTV 위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CCTV에 찍힌 건 그의 뒷모습뿐이었다. 게다가 모자까지 쓰고 있어 머리 스타일로는 누군지 파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온지유는 그 모습이 매우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는 회의실에 들어갔다가 허리를 펴고 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운은 왜 이렇게 좋은지 아무도 그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이 사람, 왠지 익숙하지 않아?”온지유가 물었다.여이현은 계속해서 진지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 사람이 엘리베이터로 들어가는 모습을 포착할 수 있었다.“뭐가 이렇게 당당해?”온지유는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이렇게 당당하게 걸어 다니는 걸 보면 분명히 그룹 내부의 사람일 것이다.“경찰에 신고해야겠어. 이 사람이 누구든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온지유는 여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여이현이 직접 나섰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걱정하며 덧붙였다.“혹시 네가 나서기 어려우시면 내가 너 대신 나설게.”“그럴 필요 없어.”그는 온지유가 다른 사람들의 안 좋은 눈초리를 받게 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래도 온지유가 자신을 생각해서 해주는 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여이현은 그녀의 얼굴에 입맞춤을 했다.“악역을 하는 건 너보다 내가 더 어울려. 내가 더 잘생겼잖아?”“무슨 그런 말을 눈도 안 깜빡하고 해?”“여보 앞에서 항상 이렇게 굴었잖아. 왜 새삼 이제 와서 그래?”두 사람은 이렇게 한동안 알콩달
“이분이 사모님이세요? 두 분 정말 잘 어울리네요. 보자마자 부부라는 걸 알겠어요. 사이가 좋은 이유를 딱 보면 알겠네요.”이태훈은 부러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온지유는 무언가 생각난 듯 가져온 과일 바구니를 내려놓고서는 나무 의자를 당겨 침대 옆에 앉았다.“사이가 좋은 게 똑 닮아서 그런 건 아니에요. 두 사람이 진심으로 사랑하면 되는 거죠. 태훈 씨 같은 훌륭한 분이라면 마음에 드는 여자를 꼭 만나실 거예요.”온지유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이태훈이 자기 입으로 여희영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인정하길 바랐다.이태훈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는 그런 복이 없을까 봐 그래요. 젊었을 때는 너무 경쟁에 집착해서 운을 다 써버렸어요. 이제는 고독하게 늙어갈 운명인 걸지도 모르죠.”“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우리 그룹에서 약에 취한 일 때문에 그러세요?”온지유는 이태훈에게 돌려 말하거나 가식적으로 말하지 않고 바로 문제의 핵심을 찔렀다.이태훈은 여이현을 힐끗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온지유는 고개를 들어 여이현과 눈을 마주치며 한숨을 쉬었다“사모님, 왜 그러세요? 저와 슬픔을 비교하려는 건가요? 그럴 필요 없어요. 그렇게 제 눈치 보실 필요도 없고요. 저도 외부에서 이 일에 대해 떠들어대고 있다는 거 알아요. 몸이 좀 나아지면 제가 나서서 해명할 겁니다. 여희영 씨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요.”“이태훈 씨, 지금 피해를 보고 있는 건 제 남편 여이현 대표예요. 잘못 알고 계신 거 아니세요?”온지유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저희는 이태훈 씨에게 약을 먹이지 않았어요. 하지만 사건이 우리 그룹에서 일어난 건 맞으니 책임을 져야겠죠. 하지만...”“온 비서, 흥분하지 마세요. 이태훈 씨도 그런 뜻이 아닐 겁니다.”여이현은 이태훈의 눈에 담긴 불쾌함을 눈치채고서는 급히 온지유의 말을 막았다.여이현은 온지유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먼저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내가 이태훈 씨와 잠시 얘기
교외의 폐공원에 도착하자 여이현은 이른바 이씨 가문의 사모님이라는 사람을 만났다.“별이와 싸운 그 아이의 부모예요.”온지유는 작은 목소리로 사실을 알리고서는 마음속으로는 법로가 왜 이 사람을 잡아 왔는지 의아해했다. 이씨 가문의 사모님인 박민정은 온지유를 보자마자 격렬하게 반응하며 온지유에게 달려들려고 몸부림쳤다. 박민정은 온지유를 산산조각 낼 정도로 두 눈에 증오가 가득했다.여이현은 법로에게 박민정의 입에 물린 헝겊을 제거하라고 지시했다.“내가 너희들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너희를 끝장내버릴 거야. 아니, 너희의 명성을 땅에 떨어뜨리고 말 거야.”박민정은 악랄하게 저주를 퍼부었다.법로의 부하가 다시 박민정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여이현은 그를 막고 박민정을 발로 차 분노를 표출했다.박민정은 고통스러워 눈물을 흘리면서도 여전히 독설을 퍼부었다.“이런 방식으로 만나게 된 건 우리 잘못입니다만 박민정 씨라고 했죠? 남편이 누군지 말해주실 수 있나요?”“내 남편의 이름을 당신 같은 사람이 알아서 뭐 하게? 얼른 날 풀어줘. 그렇지 않으면 내가 여기서 나간 뒤 바로 남편에게 당신들을 고소하라고 할 거야. 당신들 전부 감옥에 처넣고 말 거라고.”박민정은 이렇게 말하고서는 여이현에게 침을 뱉었다.여이현은 피하지 못해 침을 맞고서는 불쾌함에 얼굴을 찌푸렸다. 여이현은 겉옷을 벗어 바닥에 던지더니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경성에 이씨 가문은 한 곳뿐인데 그쪽은 이씨 가문 사람이 아니군요. 더는 다른 사람 이름을 빌려 나를 협박하려 하지 마세요.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하면 최소한 시체라도 보존할 수 있게 해드리죠.”여이현은 겁을 주기 위해 위협적인 표정을 지을 필요조차 없었다. 그저 가볍게 말했을 뿐인데 그의 말은 박민정을 절망으로 몰아넣었다.“너, 너, 너...”박민정은 한참 동안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지금 박민정 씨에게 두 가지 선택을 드리죠. 그쪽이 누구인지 밝히고 남편에게 전화해 나와 대화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하나의 선택지고 다른
“사모님, 어떻게 해야 저를 용서해 주시겠어요? 제가 아들을 잘못 키웠어요.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제발요.”뒤에서 박민정의 애원이 들렸지만 온지유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여이현은 온지유를 따라오며 다정하게 물었다.“왜 그래? 갑자기 기분이 왜 이렇게 안 좋아졌어?”온지유는 고개를 저었다.“그냥 저 여자 풀어주고 아들은 전학시키라고 해. 앞으로 별이랑 다시는 만나지 못하도록.”“알겠어. 바로 그렇게 처리할게.”여이현은 온지유의 기분이 많이 상했음을 느끼고서는 이는 분명 박민정과 관련 있다고 확신했다. 이미 법로가 나섰고 또 상대방도 이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기에 미적거리지 않고 일을 마무리 짓기로 했다.여이현은 부하의 귀에 대고 지시를 내렸다.“저 사람 가족을 데리고 떠나라고 해. 아가씨가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말도 전하고.”법로의 부하는 바로 알겠다고 대답한 뒤 한 명이 빠르게 박민정을 기절시키고 다른 한 명이 자루에 넣었다. 그런 다음 바로 내려가려 하는 것을 다행히 여이현이 제지하여 여이현과 온지유가 떠난 다음 떠났다.아름다운 밤 여이현은 온지유를 끌어안고 통유리창 앞에 서서 아래쪽의 복잡한 교통을 내려다봤다.“박민정이 나한테 세컨드라고 했어. 난 생각하면 할수록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닐까 싶어. 그렇다고 내가 일일이 세컨드가 아니라고 알릴 수도 없잖아. 맞지?”온지유는 고개를 들어 여이현을 바라보며 물었다.여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네가 세컨드가 아니라는 걸 알릴 방법이 필요한데 어떤 방법이 있을까?”여이현은 마치 깊이 고민하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온지유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입술을 삐죽였다.“난 상관하지 않을 거야. 이 일은 이현 씨가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해. 더 이상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으니까. 안 그러면 이현 씨를 탓할 거야.”“알겠습니다. 리더님.”여이현은 이미 해결책을 가지고 있었지만 온지유에게 말할 생각은 없었다이태훈이 여진 그룹에서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누
“두고 보시죠.”여이현은 이태훈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뒤 온지유의 손을 잡고 사무실로 들어갔다.셋이 아직 자리에 앉기도 전에 비서가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 비서는 긴장된 표정으로 이태훈을 한 번 바라보더니 말을 꺼내지 못했다.“무슨 일이죠? 그냥 얘기해요”“최승현 씨가 밑에 와 있습니다. 지금 기자들 앞에서 이태훈 씨의 험담을 하고 있어요.”비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태훈은 벌떡 일어나 최승현에게 따지러 가려고 했다.여이현은 이태훈을 붙잡으며 진지하게 말했다.“이태훈 씨가 최승현 씨의 마음을 빼앗았으니 이태훈 씨를 비난하는 것쯤은 받아들일 수 있지 않아요? 최승현 씨는 일생의 행복을 잃었으니까요.”이태훈은 잠시 멈칫하더니 큰 웃음을 터뜨렸다.“맞아요. 맞아. 그게 최승현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다면 그냥 두는 게 좋겠네요. 굳이 막을 필요는 없죠.”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며 미소를 지었고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겉보기에는 등 떠밀려 기자 회견을 진행하는 것 같지만 사실 모든 것은 여이현의 계획 속에 있었다.비서가 기자들을 1층 응접실로 유도한 뒤 그제야 세 사람은 여유롭게 내려갔다. 응접실에 가까이 다가가자 최승현이 이태훈을 헐뜯는 소리가 들려왔다.셋은 서로를 바라보며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여이현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원래 떠들썩했던 응접실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세 사람의 발걸음 소리만 울렸다.“저 사람이 여 대표의 부인인가요? 온지유라고 하던데. 저 여자가 왜 왔죠? 여희영이 와야 하는 거 아닌가요?”“모르겠어요. 아마 여희영이 나서기 민망해서 저 여자를 대신 보낸 것 같네요.”누군가는 온지유가 현장에 있는 목적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지만 여이현 일행은 모른 척하며 자리에 앉았다. 이어서 비서가 선물을 나눠주자 의문은 더욱 커졌다. 사람들은 여이현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이태훈이 입을 열길 기다렸다.“여러분, 이태훈 씨가 우리 회사에서 사고를 당한 건 다들 아실 겁니다. 이태훈 씨는 저에게 분명한
여이현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이태훈 씨가 언제 우리 고모를 병원에 데려간 거죠? 난 몰랐는데요. 언제 있었던 일이죠? 저희 고모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이태훈 씨가 우리 고모한테 무슨 짓을 한 거죠? 이태훈 씨 이 일은 분명히 설명하셔야 할 겁니다. 설령 내가 이씨 가문과 싸워 이길 수 없더라도 우리 고모를 위해 정의를 되찾겠습니다.”“당신...”이태훈은 여이현이 보인 예상 밖의 행동에 말문이 막혔다.하지만 이태훈 역시 계획대로 이을 진행한 것은 아니었다.이태훈은 갑자기 깨달은 듯 건방진 웃음을 지으며 여이현에게 말했다.“내가 여이현 씨의 고모부가 되고 싶다고 하면 여 대표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이 말이 떨어지자 기자들은 모두 놀랐고 최승현은 소리를 질렀다.“난 반대야.”“그쪽이 무슨 자격으로 반대해요? 그쪽이 누군데?”“그러니까요. 자기 신분도 모르고. 내 생각에 여 대표님이 승낙해 주시는 게 낫겠어요. 강한 자끼리 연합하면 여진 그룹은 더욱 번창할 거예요.”“만약 그렇게 되면 정말로 경성에 큰 경사가 일어나는 거야.”기자 중 일부는 여씨 가문과 이씨 가문의 결혼을 찬성하는 분위기를 보였다. 세상이 혼란스러우면 좋아하던 기자들이 언제부터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해 주게 된 걸까?여이현은 온지유의 의아한 눈빛에 낮은 목소리로 해명했다.“여긴 내 회사야. 나도 내 사람 몇 명은 준비해야 상대방 손에서 놀아나 체면을 상하는 일을 방지할 수 있어.”“맞는 말이네.” 온지유는 생각해 보더니 그제야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런데 이때 한 기자가 갑자기 소리쳤다.“여 대표님께서 이태훈 씨에게 약을 먹인 건 혹시 여희영 씨와 이태훈 씨의 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해 생각해 낸 특별한 방법이 아니었습니까?”여이현은 미소를 지었고 이런 표정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날카로운 기자들은 즉시 이를 포착해 질문했다.“여 대표님, 일을 성공하지 못하셨는데 다음 계획은 있으신가요?”온지유는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온지유 씨,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당신을 만나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영광이에요. 여기까지 오면서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당신이었고 이 사실은 언제나 변함이 없어요. 사람들이 당신을 세컨드라며 소문을 퍼뜨려 당신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는 걸 알고 있어요. 누가 그런 소문을 낸 건지 모르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오늘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건.”화면에 온지유와 여이현의 일상 사진들이 나타났고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이 사람들의 부러움을 자아냈다.여이현은 마이크를 잡고 일어나 온지유를 일으켜 세웠고 온지유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다.“온지유, 사람들은 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몰라. 그 사람들은 내가 너에게 과분한 줄 알지만 사실 네가 나에게 과분하다는 사실을 난 잘 알고 있어. 너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건 나에게 큰 행운이자 영광이야. 사람들이 우리가 어떻게 만나 사랑하게 되었는지 모를 뿐이지. 넌 잘 알고 있잖아?”여이현은 눈가가 촉촉해졌다. 원래는 세컨드라는 소문을 해명하기 위해서였지만 그동안의 사진들을 보며 깊은 감정에 휩싸였다. 두 사람의 사랑이 여기까지 오는 데는 정말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두 사람은 다행히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냈다.온지유는 눈물이 맺힌 채 부끄러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여이현이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영원히 너라는 걸 믿지?”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기억해. 넌 세컨드가 아니고 난 너 이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한 적도 없어. 기억해 줄 거지?”여이현은 말을 끝마치고서는 온지유의 이미에 키스하더니 기자들을 향해 말했다.“오늘 이태훈 씨 덕분에 여러분 앞에서 제 아내와 저의 사랑을 증명하게 되었네요.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온지유 씨를 보게 된다면 사모님이라고 불러주시기를 바랍니다.”사실 온지유는 이미 여씨 가문의 사모님이었고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여이현이 굳이 강조한 것은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기자들은 조금
여학생이 사망한 직접적인 원인은 달리기를 하던 중 과다 출혈이 일어난 것이었다.그녀는 생리 기간이라 선생님에게 달리기를 면제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선생님이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무리하게 달리기를 하다가 출혈이 심해진 데다가 제때 치료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그런데 학교 쪽에서는 자신들이 잘못한 건 일부일 뿐이고, 학생과 학부모 쪽 책임도 크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다른 여학생들은 달려도 멀쩡한데, 왜 그 여학생만 그랬냐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양시은은 사건 자료를 살펴보면서 분노를 참기 어려웠다.“이런 파렴치한 학교가 다 있네!”나도현이 달래듯 말을 건넸다.“진정해.”양시은은 억지로 심호흡을 했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사례가 드물지 않다는 걸 알기에 더 마음이 무거웠다.400만 원으로 한 생명의 가치가 판단되는 것이 황당하기는 해도 실존한다. 현실에서는 정말 흔히 일어나고 있지만 법에 명시된 조항이 없어서 답답할 따름이다.“게다가 그 여자애 학교에서 전학한 뒤로 적응도 못 하고 왕따까지 당했어. 여기저기 호소해 봐도 해결이 안 됐고 집에서도 신경을 안 썼대.”그렇게 말하던 양시은은 고개를 들어 나도현을 바라보았다. 눈에는 순수한 의문이 서려 있었다.“이렇게 비슷한 일이 자꾸 생기는데 왜 명확한 규정 하나 안 만들어지는 걸까?”왕따는 겉보기에는 사소해 보여도 실제로는 사람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문제였다. 심지어 매년 그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나도현은 시선을 살짝 떨구며 깊은 무력감이 깃든 목소리로 대답했다.“진정해. 이런 일에는 얽힌 게 생각보다 많이 있어. 그래도 좋게 생각해 보자. 이번에 네가 변론에서 이기면 많은 사람이 이 사건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잖아. 그럼 좀 나아질 수도 있어.”“응.”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다시 자료를 꼼꼼히 살폈다.그 사이, 나도현도 일하기 시작했지만 둘은 같은 공간에 머무르며 묘한 평온을 공유했다. 창문 너머
“이 법률 자료들은 누구 겁니까?”양시은이 대답했다.“제 거예요. 요즘 어떤 대회에 참가 중이라서요.”간단히 상황을 설명하자, 경찰은 자료를 돌려주며 회사 내에 이런 자료가 있으면 안 된다고 한마디 덧붙이고는 그냥 돌아갔다.그러자 그 남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아니, 제대로 조사 안 해본 겁니까? 저 사람은 변호사였다고요! 변호사가 어떻게 대표가 될 수 있어요? 그건 불법이잖아요!”남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나도현이 서 있었다. 경찰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나도현 씨의 변호사 자격은 이미 오래전에 말소됐습니다.”남자는 순간 멍해져서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부인했다.“그, 그럴 리가... 그건 말이 안 돼요!”“뭐가 안 된다는 거죠? 나도현 씨가 변호사 자격증을 취소하러 왔을 때, 일부 서류를 저희 쪽에서도 처리해 줬어요.”경찰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이건 사실관계를 의심하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사실 나도현은 워낙 유명한 변호사였기에 변호사 자격을 정리할 때도 꽤 화제가 됐었다. 그래서 경찰들 역시 모를 리가 없었다.남자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휘청거리며 같은 말만 반복했다.“이럴 수가... 이럴 수가...”경찰들은 허탕 치고 가게 된 것이 불만인 듯 돌아가기 전 남자를 한 번 더 나무랐다.“다음부터 뚜렷한 증거가 없으면 함부로 신고하지 마세요.”이 한마디로 그 남자는 체면이 말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양시은은 시퍼렇게 질린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떠한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이제 믿겠어요? 아직도 못 믿겠다면 직접 로펌에 가도 돼요. 거기선 다들 증언해 줄 테니. 만약 믿었다면 이전에 한 약속 이행 좀 부탁드릴게요.”남자는 약속을 어기고 싶었지만, 이미 주변에서 그를 지켜보는 시선이 엄청났다. 만약 그 자리에서 발을 빼려 한다면 사회적 신뢰가 무너질 게 뻔했다.결국 그는 마지못해 공개 해명을 올렸다. 그 덕분에 온라인에서 막 불붙으려던 논란은 재빨리 사그라들었고, 나도현
그렇다고 해서 나도현은 양시은이 자신을 대신해 앞장서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그는 양시은을 뒤로 끌어당기며 말을 시작한 무리에게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그럼 경찰 불러서 조사해 보죠.”양시은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물론 잘못이 없으면 두려울 이유도 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이들은 애초에 시비를 걸 목적으로 왔을 게 뻔했다. 혹시 뒤에서 상대편이 사주한 걸 수도 있고, 결국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해도 여론몰이를 해서 나도현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높았다.‘도현 씨가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려 하다니...’양시은은 감동스러우면서도 안절부절못했다. 그를 말리고 싶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의 따뜻하면서도 단호한 손길이 양시은을 제지하는 듯했다.“왜 신고 안 해요? 이제 와서 겁내는 거예요?”나도현은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눈썹을 치켜떴다. 여유로우면서도 강압적인 기세가 느껴졌다.시끄럽게 목소리를 높이던 이가 가장 먼저 그 기세에 눌려 뒷걸음질 치고, 곧 스스로를 다독이듯 중얼거렸다.“무, 무서울 건 없지. 어차피 다 허세일 뿐이야. 그렇게 짧은 시간에 증거를 없앨 수 있었겠어...”그러면서 나도현을 노려보았다.“좋아요. 지금 바로 신고하죠. 다만 약속하세요. 제대로 입증하지 못하면 뒤에 있는 저 여자는 준결승에서 사퇴해야 해요.”“당신들 같은 사람이 대회에 나오는 건 인정할 수 없어요.”나도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조건을 바꾸죠. 이건 제 일이니 다른 사람은 끌어들이지 마요.”자신이야 어떻게 되든 괜찮지만 양시은이 휘말리는 건 견딜 수 없었다. 그녀가 이 대회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그 말을 들은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비웃음을 흘렸다.“겁난다면 그냥 겁난다고 하지 그래요?”“그렇게 하죠.”“시은아, 너...”나도현이 말을 잇기도 전에 양시은이 괜찮다는 눈빛을 건넨 뒤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 조건에 응할게요. 다만 저도 약속을 받아야겠어요
“위에 CCTV도 있어요. 임다혜 씨를 위해 화풀이하려는 거라면 이렇게 말씀드리죠. 나씨 가문 일이라고 하든, 임씨 가문 일이라고 하든, 외부인인 단미주 씨가 낄 자리는 없어요. 이 술 한 잔으로 경고하는 거예요. 제 한계를 시험하려 들지 마요.”나도현의 한계란 곧 양시은이었다. 다른 사람이 그녀를 괴롭히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여러분 다 들으셨죠? 술로 저를 경고하겠다네요. 여러분은 이게 맞는다고 생각하세요? 제가 몇 마디 했다고 이 지경을 만드는 게 말이나 돼요? 나도현 씨 같은 사람은 분명히 벌을 받게 돼 있어요! 다들 궁금하지 않나요? 변호사로 잘 나가던 사람이 왜 갑자기 회사를 운영하겠어요. 변호사가 상업에 뛰어들면 안 된다는 건 기본 상식이에요.”단미주는 나도현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지만 이대로 물러나긴 억울했다. 그 억울함은 임다혜를 대신한 것이기도 했고, 동시에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그녀는 한평생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굴욕을 당해 본 적이 없었다. 나도현이 무슨 권리로 함부로 술을 끼얹느냐는 분노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그 말이 떨어지자 장내가 일제히 술렁거렸다.“그러고 보니 나도현 씨 전에는 유명한 변호사였는데 왜 갑자기 진로를 바꿨지? 설마 내막이 있는 거 아냐?”“그야 뻔하죠. 뒷배경 없이 어떻게 변호사 접고 곧장 대표 자리에 오르겠어요?”“변호사라는 직업 특성상 인맥도 많고 나씨 가문의 오랜 기반도 있잖아요. 뭐든 상상 초월인 거죠.”“돈 많고 힘 있는 사람은 언제나 원하는 걸 얻기 마련이니까,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나도현은 양시은을 데리고 세상 구경을 시키려 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곳은 어느새 나도현을 몰아세우는 비난의 장소로 바뀌어 버렸다. 사람들 태도가 하나같이 막무가내였다.양시은은 나도현을 끌고 나가려 했으나, 그가 오히려 양시은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나도현은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며 천천히 말했다.“제 직종 변경은 모두 절차에 따른 겁니다. 변호사 자격증도 이미 말소했고, 나
양시은은 자신과 나도현의 관계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뭐라 하든 크게 신경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두 사람이 오래갈 것 같아요? 둘 사이에는 애초에 신분 격차가 있어요. 나도현 씨가 정말 신경을 안 썼다면 이렇게 자주 연회에 왔겠어요? 결국에는 신경 쓰고 있다는 거겠죠.”말투에서 은근히 도발적인 기색이 풍겼다. 상대는 우아하고 고상해 보였지만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였다.양시은은 낮은 목소리로 비꼬듯 대꾸했다.“도현 씨가 신경 쓴다고 해도, 그건 저희 문제지 그쪽과는 상관없잖아요? 그리고 이런 말, 정말 당당하면 도현 씨 앞에서도 해봐요. 근데 저만 붙잡고 이러는 거 보니까 그럴 용기는 없나 보네요.”양시은은 이 상황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낯선 여자가 모른다고 해도 그녀는 잘 알았다. 나도현이 그녀에게 얼마나 헌신적인지를 말이다.“나도현 씨 앞에서도 얼마든지 말할 수 있어요. 그렇게까지 안 한 건 당신이 눈치 있는 사람인 줄 알아서였는데... 보다시피 아니네요.”여자는 이렇게 말하고 돌아섰다.마침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나도현은 곧장 움직였다. 양시은에게 시비를 건 여자가 임다혜의 친구인 단미주라는 걸 바로 알아챘기 때문이다.단미주가 양시은의 앞에 나타난 목적은 뻔했다.그렇게 생각한 나도현은 대화를 나누던 무리에서 벗어나 양시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는 잠시 망설이지도 않고 양시은과 함께 곧장 단미주를 찾아갔다. 단미주는 나도현이 나타난 걸 보자마자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다.“당신 고자질하는 취미도 있었네요.”단미주는 나도현이 자신의 앞에 온 이유가 양시은이 무언가 일러바쳤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직접 찾아올 리 없다고 여긴 것이다.“시은이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제가 직접 본 거거든요. 남 험담하는 게 그렇게 좋으면 재능 살릴 만한 직업이라도 구해줄까요, 단미주 씨?”나도현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서빙 트레이에 있던 술잔을 집어 들어 단미주의 얼굴에 그
나도현이 양시은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늘 이현이네랑 만났어. 시은아, 내일 나랑 같이 연회에 가지 않을래?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양시은에게 상류층 행사는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진짜 중시하는 건 나도현의 곁에 함께 있는 일뿐이었다.하지만 나도현은 그녀에게 세상을 보여 주고 싶어 했다. 사람들에게 그녀를 소개하고 싶었고, 가능한 모든 인맥과 자원을 총동원해 그녀의 앞길을 활짝 열어 주고자 했다. 양시은은 지금 이 작은 공간에서 조용히 지내는 편이 더 좋은데도 말이다.“난 지금으로 충분해. 연회 같은 거 별로 관심도 없어. 그냥 안 가면 안 될까?”양시은은 차라리 하민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종종 별이도 만나서 둘이 친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 훨씬 즐거웠다.“당연히 네 의견이 우선이야. 하지만 앞으로 점점 더 큰 자리에 나가야 하는 일이 많아질 텐데 적응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알았어. 먼저 샤워부터 해. 내가 비타민C 챙겨둘게.”이미 나도현이 결정한 듯 보였기에 양시은도 굳이 반대하지 않았다.지금 가장 중요한 건 나도현이 푹 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었다.나도현은 그녀를 살짝 끌어안고 속삭였다.“난 네가 아이를 하나 더 낳아주면 좋겠지만 출산은 고통스럽지. 그리고 우리가 이현이네랑 같은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일까 봐 좀 꺼려지기도 해. 우선 네가 좀 더 편하게 이 생활을 누리면 좋겠어. 다른 건 나중에 천천히 생각하자.”양시은이 예전에 겪었던 삶은 너무 힘겨웠다. 이제는 일단 편안한 생활을 누리고, 혹시 나중에 정말 원하게 되면 무슨 일이든 해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응, 다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나도현을 사랑했고, 당연히 그의 아이를 낳는 일도 기쁘게 여겼다. 예전에 둘이 떨어졌을 때도 아이를 기어코 낳은 건 그를 향한 마음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다.두 사람은 서로를 꼭 껴안고 잠들었다. 둘 사이의 거리는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단단했다.다음 날, 나도현은 양시은을 데리고
지석훈과 최주하가 동시에 나도현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결혼까지 다 해놓고 그러냐. 하여간 너도 참 대단하다.”여이현은 나도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이미 애도 있는데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네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주면 되는 거야. 게다가 네 와이프 지유랑 같이 있는 거 보니까 괜찮던데?”나도현은 최근 양시은의 상태를 떠올렸다.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을 다시 하게 된 뒤로는 이전처럼 피곤해 보이지 않아 상태가 훨씬 낫기는 했다.지석훈이 끼어들었다.“나 다음 달 지방 출장 가야 해서 오늘이 아니었으면 못 올 뻔했어.”“나도 내일 해외 나가야 해.”최주하도 맞장구쳤다.그렇게 짬을 내서 다 같이 모인 것이다.여이현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도현이 놀리다가 너희도 똑같이 될 줄 알아. 너희는 언제쯤 가정 꾸리고 애 낳을 건데? 우리 애들 중학생 될 때까지도 결혼 안 하고 이러고 있을 거야?”그들은 이미 서른을 훌쩍 넘겼다. 여이현은 온지유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이루면서부터 안정을 선호하게 되었다.하지만 최주하는 달랐다.“좋아하는 사람이 없는데 아무나 붙잡고 결혼할 수는 없잖아.”지석훈도 거들었다.“여이현처럼 지유 씨랑 먼저 결혼해 놓고 천천히 좋아하게 되는 쪽도, 나도현처럼 재회한 뒤 오해로 얽히고설키는 쪽도, 내 취향은 아냐.”그는 결혼에 전혀 흥미가 없다는 태도였다.“결혼해서 뭐 해? 맨날 아내랑 애들만 신경 쓰게 되잖아. 난 지금 일하는 게 더 재밌어. 인생이 꼭 결혼이 전부는 아니지.”솔직히 말해서, 그는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이 전혀 부럽지 않았다. 결혼이 도대체 뭐가 좋다는 건지 의문이었다.매일 아내와 아이를 돌보는 것보다 일하는 게 훨씬 더 매력적이지 않나. 게다가 인생이 결혼만이 전부는 아니었다.최주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석훈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나도 그렇게 생각해. 둘이 결혼했다고 우리까지 끌어들이려는 것 같아.”“뭐야, 네 명이 아니면 못 하는 거라도 있어?”최주하는 여
“훌륭합니다. 양시은 변호사는 법 조항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능력이 인상 깊네요. 주장도 명확하고 논리 정연해서, 이번 사건을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해줬어요.”다른 심사위원들도 잇달아 동의하며 양시은의 변론을 높이 평가했다.대회가 끝난 뒤, 양시은은 관중의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서 내려왔다.그녀는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탈락한 여성 변호사가 갑자기 주먹을 쥐고 외쳤다.“이건 불공평합니다.”조금 전 무대에서 사용했던 마이크가 꺼지지 않았던 터라, 그 소리는 대회장 안팎으로 크게 울려 퍼졌다.순식간에 장내가 조용해졌다.“이번 변론은 양시은 변호사 쪽이 훨씬 수월하게 짜여 있습니다. 게다가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까지 있는 데 왜 참가 자격을 박탈하지 않은 거죠?”그녀의 말에 주위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양시은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표정은 차분하면서도 단호했다.“상황을 잘 모르시는 것 같네요.”양시은의 목소리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저는 어떤 특혜도 받지 않았어요. 모든 절차는 대회 운영위원회의 엄격한 심사를 거쳤고, 온라인상의 소문은 실력 있는 사람을 함부로 정의하지 못한다고 믿습니다.”여성 변호사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여전히 목소리를 높였다.“그래도 지금 누리는 편의가 전부 다 나도현 변호사 덕분이잖아요. 이게 뒤를 봐주는 게 아니면 뭐겠어요?”양시은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나도현 변호사는 대회의 스폰서 중 한 명이고, 스폰서가 추가로 한 명을 뽑을 수 있다는 건 공개된 조항이에요. 그건 운영위원회의 결정이고, 저는 그 범위 안에서 경쟁했을 뿐이죠. 만약 이게 뒤를 봐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스폰서의 추천을 받는 모든 참가자를 그렇게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요?”주위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양시은의 말은 많은 이들에게도 나름의 설득력이 있었다.“게다가 대회 중 제가 보여 준 실력은 심사위원과 관중들이 다 지켜봤다고 생각해요.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결과가 아니었다면, 저는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양시은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곧 오늘 대회가 시작되겠네요. 저는 제가 가진 전문성으로 끝까지 가볼 거예요. 설령 못 간다고 해도 떳떳하게 임할 거고요.”그 말을 남기고 양시은은 돌아섰다.곧이어 대회가 시작됐다. 유언비어 때문인지, 방청석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를 편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무시하는 기색까지 드러냈다.그러나 양시은은 전혀 개의치 않고 법 조항을 들고 무대에 올라 당당하게 변론을 펼쳤다.“이모 씨가 몸싸움을 하는 과정에, 증언에 따르면 가해자는 여전히 행동 능력이 있었고 침해 행위가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모 씨의 생존을 위한 반항은 정당방위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봅니다.”상대 변호사는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반박했다.“법의학자가 부검한 결과, 피해자는 당시 이미 행동 능력을 상실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도 이모 씨가 공격을 이어간 건 방어를 넘어섰다고 볼 수 있죠.”양시은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이모 씨는 체구가 작아서 키가 160도 안 되는 반면 가해자는 180에 달합니다. 체격 차이가 꽤 크기 때문에 가해자가 완전히 재공격 능력을 잃었다고 확신하기 전까지는 손을 뗄 수 없었겠죠? 이모 씨에게 가해자를 고의로 해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양시은의 목소리는 단단했고, 사건에 대한 이해와 법 조항 활용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 줬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의 전문성에 저절로 감탄하는 분위기였다.상대 변호사 역시 그녀의 논리에 흔들린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반박했다.“그래도 이모 씨의 행동은 필요한 한도를 이미 넘어섰습니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가상 판사가 기침을 하며 둘 사이의 공방을 제지했다.“핵심은 이모 씨의 행동에 주관적 고의가 있었는지를 어떻게 판단하느냐입니다.”양시은은 미묘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실무에서 주관적 고의 판단은 언제나 가장 복잡하고 까다로운 문제였기 때문이다.“이모 씨는 가해자가 이미 행동 불능 상태인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양시은은 차분하게 설명했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