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조롱할 것 없어. 여이현, 네가 날 찾아왔다는 건 내가 여진을 조정하는 중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찾아왔다는 의미겠지. 그래, 여진은 내가 반드시 손에 넣을 거야. 여진뿐만 아니라 여씨 가문 모든 재산을 손에 넣을 거라고.”여재호는 고개를 빳빳이 들며 말했다. 꼭 반항기가 흘러넘치는 청소년처럼 말이다.여이현은 술을 한잔 마시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고모는 어디에 있어요.”그는 회사 때문에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여재호에게 고모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서 찾아왔다.오는 길에 이미 여희영의 집으로 사람을 보냈으나 여희영을 찾을 수 없었고 그의 추측이 거의 확신이 되어갔다.여재호의 표정이 부자연스럽게 굳어지더니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웃음을 멈추었다.“여희영을 데려가도 돼. 하지만 내일 회사로 가서 계약서에 사인해. 여진의 모든 지분과 운영할 권리는 내게 넘긴다고.”“제가 싫다고 하면요?”“그럼 여희영을 만날 생각은 하지 마. 희영이가 걱정되지? 그래, 당연히 그렇겠지. 여희영한테 그렇게 네 편에 서지 말라고 말했는데 말이야. 오빠인 내 말을 안 듣더라고.”여재호는 음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여이현은 그와 쓸데없는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차 키를 들고 일어나며 싸늘한 시선으로 여재호를 보았다.“그동안 꽤나 많은 돈을 빼돌리고 계셨나 봐요. 집까지 업소녀를 부르고 말이에요. 지금 신경 써야 할 게 명성이 아닌가요? 이미지 나락으로 빠지고 싶은 거 아니라면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거예요.”여재호는 코웃음을 쳤다.“저의 일 처리 방식이 어떤지 그동안 봐서 잘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해요. 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도 않고 자비도 베풀지 않는 사람이죠.”말을 마친 여이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렸다.여재호는 여이현의 말에 순간 겁을 먹게 되었다. 그리곤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방으로 올라간 여자에게 화풀이했다.여재호에게서 단서를 알아내지 못한 여이현은 다시 회사로 돌아와 모든 CCTV를 돌려보았다.여희영이
두 사람은 익숙하게 별장으로 들어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여희영을 부축하면서 나왔다.온지유는 여희영이 입원한 병원으로 왔다.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여희영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여희영은 그런 온지유의 손등을 토닥이며 달랬다.“괜찮아. 정말이야.”“저희가 너무 소홀했어요.”“너희 탓이 아니야. 이것도 다 내 운명인 거지. 이런 오빠의 동생으로 태어난 게 잘못이지.”여희영은 말을 마친 후 여이현을 보았다.“여재호가 회사를 엉망으로 만들어 놨어. 얼른 다시 원상복구 해야 해. 절대 다른 사람이 빈틈을 노리게 해서는 안 돼. 그리고 여재호는 고민할 것 없어. 그냥 너희들이 하고 싶은 대로 처리해.”여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계획이 있었다. 이번 일을 겪은 후 이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회사 쪽은 여희영이 입원해 있는 동안 전부 깔끔하게 정리했다.속도는 빠르게 진행도이었다. 아무리 여재호가 업소녀에게 돈을 주며 입막음을 했다고 해도 늦었다. 경찰이 너무도 빠르게 도착했기 때문이다.여재호의 사람들을 전부 해고했다. 그리고 그가 매수한 거래처들과도 전부 거래를 끊어버렸다.여재호에게 처음으로 매수당한 고객은 차정혁이었다.그는 가짜를 진품처럼 팔고 품질이 안 좋은 물건을 대놓고 팔았다. 여재호에게 매수당하지 않았어도 여이현은 그와 거래를 끊을 생각이었다.두 사람은 차에 올라탔다. 차정혁은 바로 여재호에게 자료 한 부를 건넸다. 그 자료에는 여진 그룹 서류뿐만 아니라 온지유가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시간도 적혀 있었다.여재호는 미간을 찌푸렸다.“여이현의 여자를 건들라고? 죽고 싶어?”“대표님, 정말로 판을 뒤엎고 싶다면 이것이 마지막으로 남은 기횝니다. 아니면 정말로 새파랗게 어린놈한테 밟히고 싶은 겁니까. 잊지 마세요, 여진 그룹을 물려받아야 할 사람은 응당 대표님이십니다.”차정혁은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이 일은 제가 다 준비를 해뒀으니 대표님께선 지시만 내리시면 됩니다. 그러면 제 사람들이 바로
“얼른 여이현한테 전화해서 여진을 나한테 넘기라고 말해. 그리고 여씨 가문의 모든 재산도 전부 나한테 주라고 해. 안 그러면 지금 이곳이 곧 너의 무덤이 될 테니까.”여재호는 뒤를 돌아보라는 턱짓을 했다.온지유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이현 씨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거니까 헛된 망상은 그만하시죠.”“여이현이 그러지 않겠다고 하면 널 죽여버리면 돼. 그리고 네 아들을 여기로 잡아 오는 거지. 여이현이 그럼에도 넘기지 않겠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네 아들도 죽이는 거지 뭐.”여재호는 칼을 꺼낸 후 온지유의 앞으로 갔다. 그녀의 턱을 꽉 잡으며 뺨을 때렸다.“가능한 어떻게든 여이현을 설득해야 할 거야. 안 그러면...”서늘한 칼날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온지유는 눈을 가늘게 떴다.여재호는 돈을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런 그가 계속 이 세상에 남는다면 세상은 앞으로 불안만 가득해질 것이다.무언가 떠오른 온지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제가 이현 씨를 설득해볼게요. 그런데 저한테 핸드폰이라도 줘야 설득해보는 거 아닌가요? 핸드폰도 없이 제가 어떻게 말을 해보죠?”여재호는 머릿수가 많다는 이유로 방심하면서 온지유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어차피 산 아래에도 그의 사람들이 깔려 있었으니까.바로 옆 사람에게 지시를 내려 온지유에게 핸드폰을 주었다.자유를 되찾은 온지유는 뻐근한 손목을 돌리며 여이현에게 전화를 거는 척했다.“이현 씨, 나 지금 사방이 무덤인 산에 있어. 얼른 와줘...”“씨X, 지금 날 속여?”여재호는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가 핸드폰을 확 빼앗았다. 온지유는 그를 꽉 끌어안더니 벼랑 끝으로 뛰어내렸다.“야!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여재호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차정혁이 얼른 사람들과 함께 벼랑 끝으로 달려와 내려다보았지만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온지유는 죽지 않았다. 이미 전에 더 험한 일을 당했었던지라 여재호를 상대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여재호가 그 말을 하자마자 그녀는
어둠이 내려앉자 경성은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오늘은 밸런타인데이였던지라 곳곳의 가게에서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밸런타인데이를 삼켜버릴 것처럼 말이다.온지유는 여희영이 알려준 호텔로 왔으나 바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커다란 창가로 여희영이 알려준 파란 장미를 든 남자를 찾아보고 있었다.테이블마다 한 쌍씩 앉아 있었지만 여희영이 말한 남자는 없었다.전화를 들어 여희영에게 상대가 기다리다가 지쳐 먼저 돌아간 것은 아닌지 물어보려고 한순간 익숙한 형체를 발견하게 되었다.여이현이 코너를 돌며 2층의 룸으로 올라갔다.밸런타인데이에 귀가하지 않고 이곳에 와서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것일까.온지유의 머릿속에 순간 여러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대부분은 여이현이 바람을 피웠다는 가능성이었다.그녀는 씩씩대며 호텔 안으로 들어간 뒤 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어서 오세요, 몇 분이실까요?”직원이 그녀를 붙잡았다.온지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이 안에 몇 분이 예약되었는지 알려주시면 이 돈을 전부 드리죠.”그녀는 통 크게 돈뭉치를 꺼내 직원에게 주었다. 직원은 눈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을 두 개 펼쳐 보였다.밸런타인데이에 호텔에 혼자 오는 사람은 없었다.그녀는 바로 발을 들어 문을 차버리곤 코웃음을 쳤다.“이현 씨, 즐거운가 봐. 나한테 들켰다고...”뒷말을 이을 수 없었다. 룸 안에 여이현 혼자 있었기 때문이다.온지유는 바로 고개를 돌려 직원에게 따져 물었다.“안에 둘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대표님께선 두 명으로 예약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직 아내 분이 도착하지 않으셨다고...”“이제 가도 됩니다. 여긴 제가 설명하죠.”여이현은 직원에게 물러나라고 하곤 문을 닫으려 했으나 그제야 문이 뜯겨 나갔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내 빙긋 웃었다.“룸을 바꿔야 할 것 같네.”직원은 눈치껏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온지유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다. 바람 피우는 현장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직원은 그녀에게 여이현의 아내가 아직 도착하지 않
호텔 바닥은 아수라장이었다.잠에서 깬 지유는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지유는 미간을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커다란 몸집을 가진 남자가 옆에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지나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은 조각과도 같았고 눈매도 깊고 진했다.아직 깊은 잠이 들어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지유가 몸을 일으키자 이불이 그녀의 몸에서 미끄러져 내렸고 뽀얗고 매혹적인 두 어깨에 어젯밤 남긴 흔적이 보였다.지유가 앉았던 자리에 선명한 핏자국이 보였다.시간을 보니 어느새 출근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유는 바닥에 널브러진 출근룩을 다시 집어 들어 얼른 갈아입었다.스타킹은 이미 남자에 의해 찢겨 있었다.지유는 스타킹을 돌돌 말아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하이힐을 신었다.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깔끔하게 차려입은 지유는 어느새 워커홀릭 비서로 완전히 돌아왔고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들어온 사람은 청순한 미녀였다.지유가 부른 사람이었다.이현의 취향이 이런 여자였다.지유가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침대에 누워서 대표님 깨나길 기다리면 돼요. 다른 건 한마디도 하지 마요.”지유는 고개를 돌려 아직 단잠에 빠진 남자를 힐끔 쳐다봤다. 억울한 마음에 코끝이 찡해졌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방에서 나왔다.지유는 두 사람이 어젯밤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이현이 아는 게 싫었다.그들 사이에 계약에 의하면 아무도 모르게 3년간 결혼을 유지하면 바로 이혼할 수 있었다.이 기간에 선을 넘는 행동은 그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지유는 7년째 이현의 비서로, 3년째 이현의 와이프로 있었다.졸업한 그날부터 이현의 곁을 한시도 떠난 적이 없었다.같은 날, 이현은 지유에게 두 사람은 그저 상사와 부하의 관계일 뿐 이 관계를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지유는 복도 창가에 서서 어제 일을 떠올렸다. 이현은 그녀를 안고 침대에 누워 ‘승아’라는 이름을 연신 불러댔다.지유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승아는 이현의 첫사랑이었다.이현은 지유를 승
이에 지유가 화들짝 놀라며 하마터면 발을 삐끗할 뻔했다.중심을 잘 잡지 못한 지유는 그렇게 이현의 몸에 기댔다.이현은 지유의 몸이 앞으로 쏠리자 손으로 지유의 허리를 잡아줬다.뜨거운 체온이 전해지자 지유는 어젯밤 그가 저돌적으로 그녀를 덮치던 화면이 떠올랐다.지유는 가까스로 진정하고 고개를 들어 이현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 봤다.이현의 눈동자는 매우 진지했고 그 속엔 질문과 의혹도 담겨 있었다. 눈빛은 지유를 뚫어버릴 것만 같았다.지유는 심장이 벌렁거렸다.이현과 더는 눈을 마주칠 엄두가 나지 않아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아까 나간 그 여자라고 생각했을 때도 이현은 불같이 화를 냈는데 여기서 만약 지유가 자신이었음을 인정한다면 후과가 그리 좋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아니라고 하기엔 억울했다.만약 어젯밤 잠자리를 가진 사람이 지유라는 걸 이현이 알게 된다면 결혼 생활을 조금이라도 더 이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그래도 지유는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게 겁나 고개를 숙인 채로 물어봤다.“그건 왜 묻는 거예요?”지유는 사실 남몰래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이현이 코웃음을 치더니 이렇게 말했다.“너는 그런 용기가 없을 것 같아서.”지유는 멈칫하더니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어쩌면 이현은 어젯밤 잠자리를 가진 사람이 지유가 아니길 더 바랄지도 모른다. 계약 결혼일뿐이니 말이다.게다가 며칠만 더 지나면 계약도 끝나간다순간 이현이 지유의 손을 힘껏 낚아챘다.지유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이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심사하듯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지유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발버둥 치며 손을 빼려 했지만 이현이 지유를 전신 거울 앞으로 바짝 몰아갔다.“뭐 하는 거예요?”지유는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긴장과 두려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너 정말 사무실에서 잠들었어?”지유는 칠흑같이 어두운 이현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혹시나 들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3년 전, 결혼한 첫날 밤, 지유는
고개를 들어보니 승아가 앞치마를 두르고 손에 국자를 들고 있었다.지유를 본 승아는 표정이 살짝 굳었다가 다시 부드럽게 인사했다.“아주머니 손님이에요? 마침 삼계탕을 조금 더 끓였는데 같이 와서 먹어볼래요?”승아의 느긋한 태도는 마치 그녀가 이곳의 안주인인 것 같았다.오히려 지유가 멀리서 찾아온 손님처럼 보였다.하긴 얼마 지나지 않아 지유는 곧 이 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된다.지유는 이런 거지 같은 상황에 미간이 찌푸려졌다.이현과 결혼할 때 모든 사람에게 알렸고 승아도 축복을 보내왔기에 지유가 이현의 와이프라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승아는 지유가 문 앞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자 얼른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왔으면 손님이죠. 얼른 들어와요.”승아가 가까이 다가오자 옅은 재스민 향이 풍겨왔다. 이현은 작년 생일에 지유에게 똑같은 향수를 선물했다.지유는 목구멍이 점점 메어와 숨쉬기가 힘들었고 다리가 천근만근인 듯 움직이기 힘들었다.여진숙은 지유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자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지유야, 여기 서서 뭐 하는 거야? 손님이 왔으면 차라도 내와야지.”지유는 승아와 겨뤄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물었다.“어머님, 승아 씨가 왜 우리 집에 있는 거예요?”여진숙이 답했다.“승아도 오랜만에 귀국했으니 한 번쯤은 나 보러 와야 할 거 아니니? 왜? 승아가 우리 집에 오면 안 돼? 현이도 뭐라 안 하는데 네가 뭐라고 시비야?”“그런 뜻 아니에요.”지유가 고개를 푹 숙였다.“아, 지유 언니였구나. 이현 오빠가 결혼사진을 보여준 적이 없어서 못 알아봤네요. 기분 상했다면 죄송해요.”지유는 환하게 웃는 승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허.’하긴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여자에게 다른 여자와 결혼한 사진을 보여줄 리가 없지.이때 여진숙이 호통치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얼른 승아한테 차를 내주지 않고 뭐 해?”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놓은 주전자를 들었다.승아는 여진숙과 웃고 떠들며
“지유 언니 오늘 기분이 별로 안 좋다면서 오기 싫다고 해서 내가 올 수밖에 없었어요.”승아는 얼른 손에 난 덴 자국을 일부러 보여주며 말했다.“오빠도 지유 언니 너무 미워하지 마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예요. 일을 그르친 건 아니죠?”지유가 회사의 서류를 다른 사람에게 넘긴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이현은 안색이 너무 어두웠지만 승아 앞이라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넥타이를 살짝 풀며 덤덤하게 말했다.“아니야.”이현은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왔으니 앉아.”이현의 말에 승아는 내심 기뻤다. 그녀를 받아준다는 건 그래도 미워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회의하러 간다면서요? 내가 방해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이현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이렇게 말했다.“회의 시간 뒤로 30분 미루세요.”승아는 입꼬리가 올라갔다. 전에 인사도 없이 떠나서 혹시나 이현이 원망하면 어쩌지 했는데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심각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잃어버린 시간은 다시 메꾸면 된다.소파에 앉은 승아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해명하려 했다.“오빠,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요. 그때 내가 인사도 없이 떠난 거 잘못한 거 알아요. 근데 지금은 다시 돌아왔으니까...”“먼저 일 처리 좀 할게.”이현이 승아의 말을 잘라버렸다.승아는 하려던 말을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바빠 보이는 이현의 모습에 승아는 별수 없이 이렇게 말했다.“오빠 일 끝나는 거 기다릴게.”승아는 방해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남은 반 시간 중 얼마나 더 앉아 있어야 마주 보고 앉아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약간 이현의 속내를 맞히기 어려웠다.진호가 안으로 들어와서야 이현은 하던 일을 멈췄다.이현이 걸어오자 승아가 웃으며 말했다.“오빠, 나...”“손은 아직도 아파?”그녀의 상처를 발견했다는 건 그녀를 걱정한다는 걸까?승아가 잽싸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이제 안 아파요.”“응.”이현이 가볍게 대답하더니 진호의 손에서 한약을 받아왔다.“귀국해서 계속 속이 안 좋다며, 목
어둠이 내려앉자 경성은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오늘은 밸런타인데이였던지라 곳곳의 가게에서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밸런타인데이를 삼켜버릴 것처럼 말이다.온지유는 여희영이 알려준 호텔로 왔으나 바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커다란 창가로 여희영이 알려준 파란 장미를 든 남자를 찾아보고 있었다.테이블마다 한 쌍씩 앉아 있었지만 여희영이 말한 남자는 없었다.전화를 들어 여희영에게 상대가 기다리다가 지쳐 먼저 돌아간 것은 아닌지 물어보려고 한순간 익숙한 형체를 발견하게 되었다.여이현이 코너를 돌며 2층의 룸으로 올라갔다.밸런타인데이에 귀가하지 않고 이곳에 와서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것일까.온지유의 머릿속에 순간 여러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대부분은 여이현이 바람을 피웠다는 가능성이었다.그녀는 씩씩대며 호텔 안으로 들어간 뒤 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어서 오세요, 몇 분이실까요?”직원이 그녀를 붙잡았다.온지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이 안에 몇 분이 예약되었는지 알려주시면 이 돈을 전부 드리죠.”그녀는 통 크게 돈뭉치를 꺼내 직원에게 주었다. 직원은 눈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을 두 개 펼쳐 보였다.밸런타인데이에 호텔에 혼자 오는 사람은 없었다.그녀는 바로 발을 들어 문을 차버리곤 코웃음을 쳤다.“이현 씨, 즐거운가 봐. 나한테 들켰다고...”뒷말을 이을 수 없었다. 룸 안에 여이현 혼자 있었기 때문이다.온지유는 바로 고개를 돌려 직원에게 따져 물었다.“안에 둘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대표님께선 두 명으로 예약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직 아내 분이 도착하지 않으셨다고...”“이제 가도 됩니다. 여긴 제가 설명하죠.”여이현은 직원에게 물러나라고 하곤 문을 닫으려 했으나 그제야 문이 뜯겨 나갔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내 빙긋 웃었다.“룸을 바꿔야 할 것 같네.”직원은 눈치껏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온지유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다. 바람 피우는 현장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직원은 그녀에게 여이현의 아내가 아직 도착하지 않
“얼른 여이현한테 전화해서 여진을 나한테 넘기라고 말해. 그리고 여씨 가문의 모든 재산도 전부 나한테 주라고 해. 안 그러면 지금 이곳이 곧 너의 무덤이 될 테니까.”여재호는 뒤를 돌아보라는 턱짓을 했다.온지유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이현 씨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거니까 헛된 망상은 그만하시죠.”“여이현이 그러지 않겠다고 하면 널 죽여버리면 돼. 그리고 네 아들을 여기로 잡아 오는 거지. 여이현이 그럼에도 넘기지 않겠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네 아들도 죽이는 거지 뭐.”여재호는 칼을 꺼낸 후 온지유의 앞으로 갔다. 그녀의 턱을 꽉 잡으며 뺨을 때렸다.“가능한 어떻게든 여이현을 설득해야 할 거야. 안 그러면...”서늘한 칼날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온지유는 눈을 가늘게 떴다.여재호는 돈을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런 그가 계속 이 세상에 남는다면 세상은 앞으로 불안만 가득해질 것이다.무언가 떠오른 온지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제가 이현 씨를 설득해볼게요. 그런데 저한테 핸드폰이라도 줘야 설득해보는 거 아닌가요? 핸드폰도 없이 제가 어떻게 말을 해보죠?”여재호는 머릿수가 많다는 이유로 방심하면서 온지유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어차피 산 아래에도 그의 사람들이 깔려 있었으니까.바로 옆 사람에게 지시를 내려 온지유에게 핸드폰을 주었다.자유를 되찾은 온지유는 뻐근한 손목을 돌리며 여이현에게 전화를 거는 척했다.“이현 씨, 나 지금 사방이 무덤인 산에 있어. 얼른 와줘...”“씨X, 지금 날 속여?”여재호는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가 핸드폰을 확 빼앗았다. 온지유는 그를 꽉 끌어안더니 벼랑 끝으로 뛰어내렸다.“야!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여재호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차정혁이 얼른 사람들과 함께 벼랑 끝으로 달려와 내려다보았지만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온지유는 죽지 않았다. 이미 전에 더 험한 일을 당했었던지라 여재호를 상대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여재호가 그 말을 하자마자 그녀는
두 사람은 익숙하게 별장으로 들어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여희영을 부축하면서 나왔다.온지유는 여희영이 입원한 병원으로 왔다.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여희영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여희영은 그런 온지유의 손등을 토닥이며 달랬다.“괜찮아. 정말이야.”“저희가 너무 소홀했어요.”“너희 탓이 아니야. 이것도 다 내 운명인 거지. 이런 오빠의 동생으로 태어난 게 잘못이지.”여희영은 말을 마친 후 여이현을 보았다.“여재호가 회사를 엉망으로 만들어 놨어. 얼른 다시 원상복구 해야 해. 절대 다른 사람이 빈틈을 노리게 해서는 안 돼. 그리고 여재호는 고민할 것 없어. 그냥 너희들이 하고 싶은 대로 처리해.”여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계획이 있었다. 이번 일을 겪은 후 이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회사 쪽은 여희영이 입원해 있는 동안 전부 깔끔하게 정리했다.속도는 빠르게 진행도이었다. 아무리 여재호가 업소녀에게 돈을 주며 입막음을 했다고 해도 늦었다. 경찰이 너무도 빠르게 도착했기 때문이다.여재호의 사람들을 전부 해고했다. 그리고 그가 매수한 거래처들과도 전부 거래를 끊어버렸다.여재호에게 처음으로 매수당한 고객은 차정혁이었다.그는 가짜를 진품처럼 팔고 품질이 안 좋은 물건을 대놓고 팔았다. 여재호에게 매수당하지 않았어도 여이현은 그와 거래를 끊을 생각이었다.두 사람은 차에 올라탔다. 차정혁은 바로 여재호에게 자료 한 부를 건넸다. 그 자료에는 여진 그룹 서류뿐만 아니라 온지유가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시간도 적혀 있었다.여재호는 미간을 찌푸렸다.“여이현의 여자를 건들라고? 죽고 싶어?”“대표님, 정말로 판을 뒤엎고 싶다면 이것이 마지막으로 남은 기횝니다. 아니면 정말로 새파랗게 어린놈한테 밟히고 싶은 겁니까. 잊지 마세요, 여진 그룹을 물려받아야 할 사람은 응당 대표님이십니다.”차정혁은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이 일은 제가 다 준비를 해뒀으니 대표님께선 지시만 내리시면 됩니다. 그러면 제 사람들이 바로
“날 조롱할 것 없어. 여이현, 네가 날 찾아왔다는 건 내가 여진을 조정하는 중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찾아왔다는 의미겠지. 그래, 여진은 내가 반드시 손에 넣을 거야. 여진뿐만 아니라 여씨 가문 모든 재산을 손에 넣을 거라고.”여재호는 고개를 빳빳이 들며 말했다. 꼭 반항기가 흘러넘치는 청소년처럼 말이다.여이현은 술을 한잔 마시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고모는 어디에 있어요.”그는 회사 때문에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여재호에게 고모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서 찾아왔다.오는 길에 이미 여희영의 집으로 사람을 보냈으나 여희영을 찾을 수 없었고 그의 추측이 거의 확신이 되어갔다.여재호의 표정이 부자연스럽게 굳어지더니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웃음을 멈추었다.“여희영을 데려가도 돼. 하지만 내일 회사로 가서 계약서에 사인해. 여진의 모든 지분과 운영할 권리는 내게 넘긴다고.”“제가 싫다고 하면요?”“그럼 여희영을 만날 생각은 하지 마. 희영이가 걱정되지? 그래, 당연히 그렇겠지. 여희영한테 그렇게 네 편에 서지 말라고 말했는데 말이야. 오빠인 내 말을 안 듣더라고.”여재호는 음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여이현은 그와 쓸데없는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차 키를 들고 일어나며 싸늘한 시선으로 여재호를 보았다.“그동안 꽤나 많은 돈을 빼돌리고 계셨나 봐요. 집까지 업소녀를 부르고 말이에요. 지금 신경 써야 할 게 명성이 아닌가요? 이미지 나락으로 빠지고 싶은 거 아니라면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거예요.”여재호는 코웃음을 쳤다.“저의 일 처리 방식이 어떤지 그동안 봐서 잘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해요. 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도 않고 자비도 베풀지 않는 사람이죠.”말을 마친 여이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렸다.여재호는 여이현의 말에 순간 겁을 먹게 되었다. 그리곤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방으로 올라간 여자에게 화풀이했다.여재호에게서 단서를 알아내지 못한 여이현은 다시 회사로 돌아와 모든 CCTV를 돌려보았다.여희영이
“날 오빠 취급하든 말든 상관없어. 어차피 돈 생기고 권력이 생기면 내가 원하는 걸 전부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니까.”여재호는 결국 여희영이 정신을 잃을 때까지 폭행한 후 작은 다락방에 가둬버렸다.밤이 되니 온지유와 여이현이 탑승한 비행기도 도착했다.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보이는 커다란 광고판에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공항에 설치된 가장 큰 광고판에는 여진 그룹에서 출시하여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화장품 영상을 틀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음식 밀키트 광고로 바뀌었다.여이현의 동의도 없이 광고를 바꿨다는 건 너무도 이상했다.두 사람의 생각은 같았다. 서로 마주 본 두 사람은 경성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바로 눈치챘다.온지유가 입을 열려던 순간 여이현의 핸드폰이 울렸다.전화를 건 사람은 기획부 부장이었고 여진 그룹의 원로라고 할 수도 있는 존재였고 여진을 향한 충성이 아주 높았다..“서 부장님, 마침 연락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공항 광고판 광고가 왜 바뀐 거죠?”“대표님, 안 그래도 이 일로 연락드렸습니다. 얼른 저의 집으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다들 대표님만 기다리고 계십니다.”서철민은 다급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이현과 온지유는 더는 묻지 않고 바로 서철민의 집으로 출발했다.서철민의 집 서재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여이현을 보자마자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대표님.”모든 사람들이 입을 열었다.여이현은 그들에게 앉으라는 제스처를 한 뒤 입을 열었다.“저를 찾으신 이유를 말해보세요.”그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으나 증거가 없었기에 함부로 말을 꺼낼 수 없었다.“여재호가 저희 회사 재무부장과 구매부 부장, 그리고 일부 고객들을 매수했습니다. 현재 여진이 여재호 쪽으로 기울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하...”서철민과 일부 사람들이 까발린 여재호의 만행은 그들의 예상을 뛰어넘었다.온지유는 미간을 찌푸렸다. 경성으로 돌아오면 평화로운 일상을 보낼 줄 알았으나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많은 사람들이 여이현에게 연락하며 상황을 알렸다.하지만 그는 배진호와 함께 비행기에 있어 전화를 받지 못했다.여재호는 오직 하나의 목표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돈과 지위를 얻는 것이었다.과거에 자신이 손에 넣지 못했던 재산을 이번에는 반드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결심이었다.그가 여진그룹에서 큰 소동을 일으키자 결국 여희영도 나서게 되었다.여희영은 직접 찾아와 그를 말렸다.“할 말은 이미 다 했어. 그날 결혼식에서 이현이의 태도가 얼마나 분명했는지 오빠도 직접 봤잖아. 그런데 왜 또 이러는 거야?”“이현이는 너를 홀대한 적이 없잖아?”여진 그룹이 위태로웠던 시절 여이현의 뛰어난 능력 덕분에 그룹은 조금씩 번창하며 오늘날의 위치에 올랐다.하지만 지금...여재호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이현이 여진 그룹을 이 정도로 키운 건 맞아. 그런데 문제는 나도 빈손으로 남을 수는 없다는 거야.”“네가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너를 불러들였을 때엔 왜 거절하지 않았대? 지금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위선적이라는 생각은 안 들어?”여희영는 직설적인 성격이었다.그녀는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일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말하는 성격이었다.게다가 그녀의 오빠는 지금까지 제대로 한 일이 없었을뿐더러 지금은 더 악랄하게 굴고 있었다.“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어이가 없어서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네.”“할 말이 없으면 하지 마. 내가 하는 일이 네게 방해가 되는 것도 아니잖아. 뭘 걱정하는 건데? 여희영, 너도 알잖아. 이현이는 가문의 사람이 아니야. 왜 네 팔은 밖으로만 굽는 거야?”여재호는 돈을 받지 못하고 여이현에게 문전박대를 당한 것만으로도 이미 인내심이 폭발할 지경이었다.여기에 여희영의 말까지 더해지자 그는 더 이상 화를 참을 수 없었다.여희영도 화가 치밀었다.“내 팔이 밖으로 굽는다고? 오빠가 가문을 내팽개쳤을 때 나는 가문을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알아? 아버지와 이현이에게 일을 다 떠넘기고는 이제 와서
“전 무열 씨의 의지력을 믿어요. 당신이라면 분명히 이겨낼 수 있을 거예요. 앞으로는 제가 계속 상태를 관리할게요.”인명진은 부드럽게 말했다.그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약물 금단 증상은 고통스러웠지만 신무열의 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특히 김혜연은 늘 그의 주변에 함께 있어 주었다.덕분에 신무열은 일주일 만에 약물 의존을 끊어냈다.이는 모두에게 기쁜 소식이었고, 특히 김혜연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었다.“무열 씨, 우리 현장에도 내려가 봐요. 현장에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을 거예요.”김혜연의 생각은 간단했다. 함께 일에 몰두하면 그는 아린의 죽음을 떠올릴 시간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동안 신무열은 막 결혼한 상태에서 그녀에게 미안함을 느껴 곁을 떠나지 않았지만, 그로 인해 더 큰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신무열은 김혜연을 품에 안으며 말했다.“좋은 생각이야. 현장으로 가자. 이쪽의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 요한도 있으니까 걱정 마.”“좋아요.”그들의 결정을 들은 법로는 남아서 Y국의 상황을 관리하기로 했다.그는 별이를 떠나보내는 것이 유일한 아쉬움이었다.경성에서 별이와 함께 보낸 시간은 매우 따뜻하고 행복한 순간들이었다.이번은 신무열과 김혜연의 결혼식에 참석하려 Y국에 온것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일이 벌어져 버렸다.“별아, 이번에 엄마랑 아빠랑 같이 돌아가면 말 잘 들어야 한다. 외할아버지가 나중에 보러 갈게.”법로는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외할아버지, 걱정 마세요. 아빠랑 엄마 말씀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할게요. 돌아오시면 꼭 다시 만나요!”“그래.”법로는 그들을 공항까지 직접 배웅했다.업무적으로는 배진호가 있었지만 온지유와 관련된 부분은 온지유의 결정을 존중했다.배진호는 먼저 제안했다.“대표님, 아드님을 제가 먼저 데려가서 학교에 보내겠습니다. 두 분은 Y국에서 조금 더 머무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사모님의 양부모님들과
신무열은 김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걱정 끼쳐서 미안해.”“무열 씨, 제발 꼭 좋아져야 해요. 이렇게 날 떠나면 안 돼요. 우리... 우리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고 다 아쉬움으로 남았잖아요.”김혜연은 신무열을 꼭 끌어안으며 목소리가 갈라질 정도로 간절히 말했다.그녀는 정말로 두려웠다.만약 신무열의 마음속에 모든 분야에 출중한 완벽한 존재가 있었다면 그녀는 이렇게까지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아린의 경우는 달랐다. 모든 조건을 떼어 놓고 보면 말이다.김혜연에게는 선택지가 주어졌지만 선택을 하지 않은 건 그녀 자신이었다.김혜연은 신무열의 남은 생이 죄책감 속에서 허비되지 않기를 바랐다.신무열은 김헤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네가 하려는 말 다 알아. 걱정하지 마. 나도 최선을 다해 이전의 일들에서 벗어나려고 할게.”김혜연은 그런 문제들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신무열은 그녀의 진심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다.이때, 인명진이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신무열의 약물 의존은 법로가 책임지고 있었고, 인명진은 그의 심리 치료를 맡게 되었다.신무열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아린이 자신의 품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그는 마음의 상처를 도저히 치유할 수 없었다.인명진은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그는 최면을 통해 신무열의 내면을 하나씩 풀어가며 그의 마음을 안정시키려 노력했다.신무열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누구도 죽이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저 때문에 죽어가요. 죽음이 이렇게도 불공평하고 아무 소리도 없이 다가온다는 걸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신무열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씩 흘러나왔다.인명진은 낮은 목소리로 그를 위로했다.“모든 일에는 아쉬움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무열 씨는 최선을 다했고 아린을 방치한 것도 아니었잖아요. 현실은 잔혹해요. 무열 씨에게는 방법이 없었고, 아린에게는 죽음이 오히려 해방이었을지도 모르죠.”“노예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은 수천, 수만 명이었어요
신무열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고통스럽게 절규했다.그의 이런 모습을 본 온지유는 가슴이 찢어졌다. 매일 곁에서 지켜보는 김혜연에게는 더 큰 고통이었다.온지유는 신무열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부드럽게 말했다.“오빠, 그건 오빠 잘못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너무 자신을 몰아붙이지 말아요...”하지만 신무열은 그녀의 말을 끊으며 힘겹게 말했다.“아니, 내 잘못이야. 만약 내가 더 잘했다면 아린은 희생하지 않았을 거야. 죽음을 많이 봐왔지만 이번처럼 고통스러운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지유야, 너도 알잖아? 난 아린이 눈앞에서 죽는 걸 직접 봤어...”그의 목소리는 쉰 듯한 낮은 톤으로 하나하나 쏟아져 나왔고, 온지유는 처음으로 신무열이 이렇게 절망하는 모습을 보게됐다.도와주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그녀는 무력감을 느꼈다.신무열이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스스로를 해칠까 두려웠던 온지유는 급히 법로에게 전화를 걸었다.곧 법로는 실험실 사람들과 함께 그들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신무열의 상태를 본 법로는 마음이 아팠다.신무열은 그의 하나뿐인 아들이다!상태를 점검한 법로는 신무열이 몰래 페노바르비탈을 복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더욱 심각한 것은, 이 약물은 한때 법로거 개량했던 중독성을 유발하는 형태였다는 점이었다.신무열의 방금 전 감정 폭발은 약을 제때 복용하지 못해 나타난 금단 증상이었다.법로는 즉시 실험실의 약물 사용 규정을 엄격히 강화했다.앞으로는 모든 약물 사용이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명령했다.또한, 신무열이 약물을 복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을 철저히 관리했다.신무열은 Y국의 수령으로, 많은 이들이 그를 끌어내리고 새 인물을 세우고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만약 그의 약물 복용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 반드시 정치적으로 이용될 것이 분명했다.김혜연은 신무열의 곁을 지키고 싶었지만 법로가 이를 막아섰다.“신무열이 자리를 비우는 건 공적인 이유로는 가능하다. 하지만 네가 자리를 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