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오빠 취급하든 말든 상관없어. 어차피 돈 생기고 권력이 생기면 내가 원하는 걸 전부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니까.”여재호는 결국 여희영이 정신을 잃을 때까지 폭행한 후 작은 다락방에 가둬버렸다.밤이 되니 온지유와 여이현이 탑승한 비행기도 도착했다.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보이는 커다란 광고판에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공항에 설치된 가장 큰 광고판에는 여진 그룹에서 출시하여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화장품 영상을 틀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음식 밀키트 광고로 바뀌었다.여이현의 동의도 없이 광고를 바꿨다는 건 너무도 이상했다.두 사람의 생각은 같았다. 서로 마주 본 두 사람은 경성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바로 눈치챘다.온지유가 입을 열려던 순간 여이현의 핸드폰이 울렸다.전화를 건 사람은 기획부 부장이었고 여진 그룹의 원로라고 할 수도 있는 존재였고 여진을 향한 충성이 아주 높았다..“서 부장님, 마침 연락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공항 광고판 광고가 왜 바뀐 거죠?”“대표님, 안 그래도 이 일로 연락드렸습니다. 얼른 저의 집으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다들 대표님만 기다리고 계십니다.”서철민은 다급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이현과 온지유는 더는 묻지 않고 바로 서철민의 집으로 출발했다.서철민의 집 서재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여이현을 보자마자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대표님.”모든 사람들이 입을 열었다.여이현은 그들에게 앉으라는 제스처를 한 뒤 입을 열었다.“저를 찾으신 이유를 말해보세요.”그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으나 증거가 없었기에 함부로 말을 꺼낼 수 없었다.“여재호가 저희 회사 재무부장과 구매부 부장, 그리고 일부 고객들을 매수했습니다. 현재 여진이 여재호 쪽으로 기울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하...”서철민과 일부 사람들이 까발린 여재호의 만행은 그들의 예상을 뛰어넘었다.온지유는 미간을 찌푸렸다. 경성으로 돌아오면 평화로운 일상을 보낼 줄 알았으나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날 조롱할 것 없어. 여이현, 네가 날 찾아왔다는 건 내가 여진을 조정하는 중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찾아왔다는 의미겠지. 그래, 여진은 내가 반드시 손에 넣을 거야. 여진뿐만 아니라 여씨 가문 모든 재산을 손에 넣을 거라고.”여재호는 고개를 빳빳이 들며 말했다. 꼭 반항기가 흘러넘치는 청소년처럼 말이다.여이현은 술을 한잔 마시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고모는 어디에 있어요.”그는 회사 때문에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여재호에게 고모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서 찾아왔다.오는 길에 이미 여희영의 집으로 사람을 보냈으나 여희영을 찾을 수 없었고 그의 추측이 거의 확신이 되어갔다.여재호의 표정이 부자연스럽게 굳어지더니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웃음을 멈추었다.“여희영을 데려가도 돼. 하지만 내일 회사로 가서 계약서에 사인해. 여진의 모든 지분과 운영할 권리는 내게 넘긴다고.”“제가 싫다고 하면요?”“그럼 여희영을 만날 생각은 하지 마. 희영이가 걱정되지? 그래, 당연히 그렇겠지. 여희영한테 그렇게 네 편에 서지 말라고 말했는데 말이야. 오빠인 내 말을 안 듣더라고.”여재호는 음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여이현은 그와 쓸데없는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차 키를 들고 일어나며 싸늘한 시선으로 여재호를 보았다.“그동안 꽤나 많은 돈을 빼돌리고 계셨나 봐요. 집까지 업소녀를 부르고 말이에요. 지금 신경 써야 할 게 명성이 아닌가요? 이미지 나락으로 빠지고 싶은 거 아니라면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거예요.”여재호는 코웃음을 쳤다.“저의 일 처리 방식이 어떤지 그동안 봐서 잘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해요. 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도 않고 자비도 베풀지 않는 사람이죠.”말을 마친 여이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렸다.여재호는 여이현의 말에 순간 겁을 먹게 되었다. 그리곤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방으로 올라간 여자에게 화풀이했다.여재호에게서 단서를 알아내지 못한 여이현은 다시 회사로 돌아와 모든 CCTV를 돌려보았다.여희영이
두 사람은 익숙하게 별장으로 들어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여희영을 부축하면서 나왔다.온지유는 여희영이 입원한 병원으로 왔다.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여희영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여희영은 그런 온지유의 손등을 토닥이며 달랬다.“괜찮아. 정말이야.”“저희가 너무 소홀했어요.”“너희 탓이 아니야. 이것도 다 내 운명인 거지. 이런 오빠의 동생으로 태어난 게 잘못이지.”여희영은 말을 마친 후 여이현을 보았다.“여재호가 회사를 엉망으로 만들어 놨어. 얼른 다시 원상복구 해야 해. 절대 다른 사람이 빈틈을 노리게 해서는 안 돼. 그리고 여재호는 고민할 것 없어. 그냥 너희들이 하고 싶은 대로 처리해.”여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계획이 있었다. 이번 일을 겪은 후 이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회사 쪽은 여희영이 입원해 있는 동안 전부 깔끔하게 정리했다.속도는 빠르게 진행도이었다. 아무리 여재호가 업소녀에게 돈을 주며 입막음을 했다고 해도 늦었다. 경찰이 너무도 빠르게 도착했기 때문이다.여재호의 사람들을 전부 해고했다. 그리고 그가 매수한 거래처들과도 전부 거래를 끊어버렸다.여재호에게 처음으로 매수당한 고객은 차정혁이었다.그는 가짜를 진품처럼 팔고 품질이 안 좋은 물건을 대놓고 팔았다. 여재호에게 매수당하지 않았어도 여이현은 그와 거래를 끊을 생각이었다.두 사람은 차에 올라탔다. 차정혁은 바로 여재호에게 자료 한 부를 건넸다. 그 자료에는 여진 그룹 서류뿐만 아니라 온지유가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시간도 적혀 있었다.여재호는 미간을 찌푸렸다.“여이현의 여자를 건들라고? 죽고 싶어?”“대표님, 정말로 판을 뒤엎고 싶다면 이것이 마지막으로 남은 기횝니다. 아니면 정말로 새파랗게 어린놈한테 밟히고 싶은 겁니까. 잊지 마세요, 여진 그룹을 물려받아야 할 사람은 응당 대표님이십니다.”차정혁은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이 일은 제가 다 준비를 해뒀으니 대표님께선 지시만 내리시면 됩니다. 그러면 제 사람들이 바로
“얼른 여이현한테 전화해서 여진을 나한테 넘기라고 말해. 그리고 여씨 가문의 모든 재산도 전부 나한테 주라고 해. 안 그러면 지금 이곳이 곧 너의 무덤이 될 테니까.”여재호는 뒤를 돌아보라는 턱짓을 했다.온지유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이현 씨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거니까 헛된 망상은 그만하시죠.”“여이현이 그러지 않겠다고 하면 널 죽여버리면 돼. 그리고 네 아들을 여기로 잡아 오는 거지. 여이현이 그럼에도 넘기지 않겠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네 아들도 죽이는 거지 뭐.”여재호는 칼을 꺼낸 후 온지유의 앞으로 갔다. 그녀의 턱을 꽉 잡으며 뺨을 때렸다.“가능한 어떻게든 여이현을 설득해야 할 거야. 안 그러면...”서늘한 칼날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온지유는 눈을 가늘게 떴다.여재호는 돈을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런 그가 계속 이 세상에 남는다면 세상은 앞으로 불안만 가득해질 것이다.무언가 떠오른 온지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제가 이현 씨를 설득해볼게요. 그런데 저한테 핸드폰이라도 줘야 설득해보는 거 아닌가요? 핸드폰도 없이 제가 어떻게 말을 해보죠?”여재호는 머릿수가 많다는 이유로 방심하면서 온지유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어차피 산 아래에도 그의 사람들이 깔려 있었으니까.바로 옆 사람에게 지시를 내려 온지유에게 핸드폰을 주었다.자유를 되찾은 온지유는 뻐근한 손목을 돌리며 여이현에게 전화를 거는 척했다.“이현 씨, 나 지금 사방이 무덤인 산에 있어. 얼른 와줘...”“씨X, 지금 날 속여?”여재호는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가 핸드폰을 확 빼앗았다. 온지유는 그를 꽉 끌어안더니 벼랑 끝으로 뛰어내렸다.“야!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여재호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차정혁이 얼른 사람들과 함께 벼랑 끝으로 달려와 내려다보았지만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온지유는 죽지 않았다. 이미 전에 더 험한 일을 당했었던지라 여재호를 상대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여재호가 그 말을 하자마자 그녀는
어둠이 내려앉자 경성은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오늘은 밸런타인데이였던지라 곳곳의 가게에서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밸런타인데이를 삼켜버릴 것처럼 말이다.온지유는 여희영이 알려준 호텔로 왔으나 바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커다란 창가로 여희영이 알려준 파란 장미를 든 남자를 찾아보고 있었다.테이블마다 한 쌍씩 앉아 있었지만 여희영이 말한 남자는 없었다.전화를 들어 여희영에게 상대가 기다리다가 지쳐 먼저 돌아간 것은 아닌지 물어보려고 한순간 익숙한 형체를 발견하게 되었다.여이현이 코너를 돌며 2층의 룸으로 올라갔다.밸런타인데이에 귀가하지 않고 이곳에 와서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것일까.온지유의 머릿속에 순간 여러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대부분은 여이현이 바람을 피웠다는 가능성이었다.그녀는 씩씩대며 호텔 안으로 들어간 뒤 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어서 오세요, 몇 분이실까요?”직원이 그녀를 붙잡았다.온지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이 안에 몇 분이 예약되었는지 알려주시면 이 돈을 전부 드리죠.”그녀는 통 크게 돈뭉치를 꺼내 직원에게 주었다. 직원은 눈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을 두 개 펼쳐 보였다.밸런타인데이에 호텔에 혼자 오는 사람은 없었다.그녀는 바로 발을 들어 문을 차버리곤 코웃음을 쳤다.“이현 씨, 즐거운가 봐. 나한테 들켰다고...”뒷말을 이을 수 없었다. 룸 안에 여이현 혼자 있었기 때문이다.온지유는 바로 고개를 돌려 직원에게 따져 물었다.“안에 둘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대표님께선 두 명으로 예약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직 아내 분이 도착하지 않으셨다고...”“이제 가도 됩니다. 여긴 제가 설명하죠.”여이현은 직원에게 물러나라고 하곤 문을 닫으려 했으나 그제야 문이 뜯겨 나갔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내 빙긋 웃었다.“룸을 바꿔야 할 것 같네.”직원은 눈치껏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온지유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다. 바람 피우는 현장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직원은 그녀에게 여이현의 아내가 아직 도착하지 않
말을 하던 여이현은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더니 파란 장미를 꺼내 온지유에게 건넸다.“온지유 씨, 좋아해요. 사랑하고 있어요. 평생 당신만을 바라보며 살게요.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도 오직 당신만 사랑할 거예요. 그러니 내 마음을 받아줘요. 내가 평생 당신을 걱정하고 아끼며 사랑할 수 있게.”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에 그녀의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온지유는 이미 눈물바다가 되었다. 파란 장미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지나서야 그녀는 대답했다.“그럴게요.”그녀의 대답을 듣자마자 여이현은 그녀를 안고 빙빙 돌았다.지금 이 순간 온 세상에 둘만 남은 듯한 기분이었고 서로의 심장 소리가 확성기에 틀어놓은 것처럼 크게 들렸다.“내 고백을 받아줬으니까 다음 순서로 그 장미를 뜯어 봐.”여이현의 목소리가 다시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녀는 놀란 얼굴로 그를 힐끗 보다가 조심스럽게 장미를 뜯었다.안에는 반지가 있었다.온지유는 깜짝 놀랐다.“이현 씨, 정말!”“마음에 들어?”여이현은 미소를 지었다. 이번 밸런타인데이에 얼마나 정성을 쏟아부었는지 모른다. 무엇을 좋아할지 몰라 그는 아주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며 준비했다.다행히 온지유는 아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온지유가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는가. 여자라면 대부분 그의 이벤트를 좋아할 것이다.그녀는 발꿈치를 들더니 여이현에게 입을 맞추었다. 짧은 입맞춤 후 입을 떼려던 순간 여이현은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더니 이내 질척인 키스를 했다.얼마나 지났을까, 온 세상에 둘만 있는 기분이었다.온지유는 숨이 막혔다. 여이현은 그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뭐야. 하지 마. 나 배고파. 얼른 음식을 준비해달라고 해줘.”온지유는 배고프다는 핑계를 대며 야릇해진 분위기를 피해 보려고 했다.여이현이 준비한 저녁은 전부 밸런타인데이와 연관이 있는 음식이었다.데코레이션이든 음식의 의미이든 전부 마음에 들었다.이런 이벤트를 싫어할 여자는 없을 것이다. 다만 온지유는 하루 종일 자신을 방치해둔 것
두 사람은 야시장 입구에 왔다. 인파로 사람들 머리만 보이자 여이현은 바로 그녀를 끌어안고 나직하게 말했다.“옷이라도 갈아입고 올까? 인파들 속에서 기회를 틈타 널 만지려고 하면 어떡해.”온지유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흥, 드레스를 고를 땐 야시장을 구경할 거라는 생각은 못 해봤나 봐? 안 갈아입을래. 오랜만에 이쁘게 입었는데 왜 갈아입어. 게다가 여긴 사람도 많잖아. 그럼 더 신경 써야지.”여이현은 그녀를 설득할 수가 없었기에 속으로 어떻게든 지켜내고 말겠다고 다짐했다.실컷 놀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온지유는 더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맛있는 것을 보면 맛보고 배가 부르면 여이현에게 넘겨주었다. 알록달록한 칵테일에 맛만 본 후 바로 여이현에게 주기도 했고 재밌는 것이 있으면 체험해보기도 했으며 무서운 것이 있으면 바로 여이현의 품으로 안겨들었다.그녀는 밤하늘에 뜬 예쁜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기에 사람들도 저도 모르게 자꾸만 그녀를 힐끗거리고 있었다.당연히 눈치 없는 사람들이 접근하기도 했다.아이스크림을 사러 줄을 서고 있을 때 온지유는 누군가와 부딪치게 되었고 바로 표정이 일그러졌다.여이현은 바로 걱정스럽게 물었다.“괜찮아?”“누가 내 엉덩이를 만졌어.”온지유는 고개를 돌리며 인파 속에서 의심이 갈 만한 사람을 찾아보았으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엉덩이를 만진 건 확실했다.여이현의 표정이 바로 굳어졌다.얼른 그녀를 데리고 가까운 옷가게로 들어가 명령 어조로 말했다.“당장 갈아입어. 안 그러면 지금 당장 집으로 갈 거야.”“왜 화를 내.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잖아.”“알아. 네 잘못이 아닌 거. 하지만 난 짜증이 난다고. 그런 썩을 놈들이 네 엉덩이를 만졌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다 불쾌하고 화가 나.”여이현의 기분을 누가 알겠는가. 자신의 여자가 어떤 남자에게 성희롱을 당했는데 상대가 누군지도 몰라 복수할 수도 없는 이 기분을.온지유는 억울했다. 그래서 아주 보수적인 옷을 골라 피팅룸으로 들어갔다.옷을 갈아입고도 나오지 않았
‘이게 끝이라고? 더 시도해 보지 않을 건가?’온지유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 여자가 여이현을 붙잡을까 봐 많이걱정하고 있었다. 바람기 많은 남자보다 진지한 여자가 더 위험하기 마련이다.자신의 마음을 과감히 고백하는 여자에게 유혹당하지 않을 남자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여이현, 운 좋은 줄 알아.”온지유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이때 갑자기 누군가 그녀 앞길을 막고 서있었다.고개를 들어보니 여이현이 부드러운 눈길로 온지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끝이보이지 않는 소용돌이처럼 온지유를 빨아 들어갈 것으로 보였다.“어떤 여자분이 찾던 것 같던데 가보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받아 주지. 그러면...”“그럼 나 간다.”그 대답에 온지유는 재빨리 여이현을 잡으며 소리쳤다.“가긴 어딜 가!”이 틈을 타 여이현이 온지유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하고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안 갈 거야. 내 곁에 지유 너와 별이만 있으면 행복한걸.”갑작스러운 돌직구에 온지유는 너무 기쁜 나머지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두 사람은 금방 발생한 불쾌한 사건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다시 야시장 돌아다녔다. 허기진 배도 채우고 재밌게 놀고 나니 시간이 물 흐르듯 흘러 어느덧 늦은 밤이 되었다.연이어 하품하는 온지유를 보고 여이현은 택시를 불러 호텔로 향했다. 힘들게 약속한 단둘만의 데이트라 여이현은 오늘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뜨거운 밤이 지나가고 아침이 찾아왔다.비몽사몽 한 상태로 꿈나라에서 빠져나온 온지유의 머릿속은 온통 뜨거웠던 어젯밤 화면으로 가득 차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여러 번 흔들어 요동치는 마음을 가까스로 가라앉히고 시간을 보니 벌써 별이 등교 시간이었다.온지유는 아직 한창 꿈나라에서 여행 중인 여이현을 버려두고 옷을 바꾼 뒤 허둥지둥 방을 나섰다.“어머, 우리 자기 왜 그렇게 급해. 혹시 내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여희영이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는 온지유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귀가에대고
남태건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그는 권다솔의 손도 제대로 잡아보지 못했기에 당연히 사이즈를 알 리가 없었다.“크기 조절 가능한 팔찌는 없어요?”“있긴 한데요. 디자인이 몇 개뿐이라서요. 인기 많은 제품들은 전부 사이즈가 정해져 있어요.”직원은 그를 힐끗보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예비 신부한테 관심이 없다고 하기엔 예물을 전부 최고급을 골랐잖아. 그렇다고 해서 또 예비 신부한테 잘해준다고 하기엔 애매해. 어떻게 여자친구 팔목 사이즈도 모를 수가 있는 거지?'‘꼭 결혼까지 앞뒀는데 동거는커녕 손도 한번 못 잡아본 것 같네. 서로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을 것 같네.'“괜찮아요. 그걸로 주세요.”남태건은 제일 무거운 팔찌를 골라 쟁반에 올려두었다.“그리고 이거, 봉황이 있는 금목걸이도 주세요.”남씨 가문에 남아도는 것이 돈이었다. 권다솔의 부모님 앞에서 자신의 성의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면 얼마가 되었든 상관없었다.그가 가게에서 나왔을 때 직원의 입은 귀에 걸려 있었다. 남태건 덕분에 한 달 업적을 하루 만에 달성했기 때문이다.곧이어 남태건은 권용민이 좋아할 만한 비싼 술과 담배를 산 후 권씨 가문 본가로 운전했다. 쇼핑백을 바리바리 들고 오는 남태건의 모습에 김영은은 어안이 벙벙했다.“태건아, 우리 집으로 오는 게 처음도 아니고 이게 다 뭐니? 그냥 내 집이다 생각하면서 오면 되는 건데 뭘 이렇게 많이 사 왔어?”“아버님, 어머님. 전 오늘 손님으로 찾아온 게 아니에요. 다솔이랑 결혼하고 싶어서 온 거예요. 이건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남태건은 자신이 사 온 것을 하나씩 열어 보여주었다.그는 물건만 사 온 것이 아니었다. 한 가방의 현금과 예물까지 준비해왔다.창문으로 비쳐 들어오는 햇볕에 금붙이들은 반짝반짝 빛났다.권용민과 김영은은 서로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남태건은 아주 신경 써서 선물을 준비해온 것이 그들의 눈에도 보였다. 정말로 권다솔을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았고 앞으로 두 사람이
“다솔아... 너 정말로 나한테 아무런 감정이 없는 거야?”남태건은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조금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나한테 설렌 적 없어?”그는 그동안 아주 많은 노력을 했었다.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다. 그러나 여전히 권다솔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게다가 우린 함께 밤까지 보냈잖아. 난 정말로 진심으로 널 책임지고 싶어. 그냥 잠만 자고 버리는 나쁜 놈이 되고 싶지 않다고. 다솔아, 다시 한번 생각해줘. 우린 이미 밤까지 보냈다고!”“지금이 어떤 시대인데요. 전 태건 씨를 이해할 수 없네요.”권다솔은 머리가 지끈거렸다.그가 질척이면 질척일수록 그녀의 생각은 점점 더 확고해졌다. 앞으로 친구로도 지낼 수 없겠다고 말이다.그녀는 인내심 있게 마지막으로 말했다.“그날 밤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더는 제 앞에서 언급하지 말아요. 만약 태건 씨의 말대로 함께 한번 잤다고 해서 무조건 함께 살아야 한다는 거라면, 이미 아이까지 한 번 있었던 저와 진호 씨는 영원히 떨어지지 말고 함께 살아야 하는 거겠네요?”남태건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저도 모르게 이도 빠득 달았다.“권다솔, 그딴 말로 날 자극하지 마.”두 사람이 다시 잘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니 남태건은 기분이 불쾌해졌다.권다솔은 말을 이었다.“전 태건 씨를 자극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예시를 들어 알려준 거죠. 그러니까 나가요. 앞으로 더는 찾아와 문도 두드리지 말고요. 방금 같은 일 또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으니까.”“다솔아! 네가 나한테 어떻게 매정할 수가 있어! 차 한잔도 내어주지 않고 지금 날 쫓아내는 거야? 적어도 물 한 잔 마시게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밖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서 있었는데. 나 힘들어 죽겠다고.”남태건은 꼬리를 내렸다.물 한잔쯤 대접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권다솔은 그에게 희망 고문하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예의상 했던 행동이 남태건에겐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게다가 이번 한 번 타협한다면 두 번째도 있을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이웃은 더 큰 목소리로 욕을 해댔다.“안에 사람이 있는데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는 건 네가 꼴도 보기 싫다는 소리잖아! 핸드폰은 장식이냐? 문자 보낼 줄 몰라? 굳이 그렇게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려야겠어? 여기 너만 사냐? 이웃 배려할 줄 몰라?!”밖에서 싸우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권다솔은 결국 문을 열어주는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남태건이 문 앞에 서 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웃 주민들에게 계속 민폐를 끼칠 수 없었다.빠르게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연 그녀는 결국 이웃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방금 너무 푹 잔 탓에 못 들었네요. 폐를 끼쳐져 정말 죄송해요.”“됐어. 커플인 것 같은데 싸울 거면 문 닫고 싸워. 괜히 우리까지 사정 알게 하지 말고!”이웃의 어투는 조금 누그러지긴 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사나웠다. 권다솔의 진심 어린 사과에 더는 심한 말을 하지 않았다.이웃이 문을 닫은 후 권다솔도 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러나 남태건이 빠르게 잡아버렸다.그는 권다솔에게 애원했다.“나 좀 들어가게 해줘. 안에서 얘기하자, 응? 내가 계속 이렇게 밖에 서 있으면 이웃 주민들이 날 신고할지도 몰라.”“방금 그 행동은 확실히 신고할 만한 행동이죠. 그러니 폐를 끼치지 말고 그만 가세요.”권다솔은 있는 힘껏 문을 당겼다.남태건도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문을 꽉 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권다솔은 갑자기 손을 놓더니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사이에 두고 버티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다솔아, 그럼 나 들어가도 되는 거지?”남태건은 얼른 그녀를 따라갔다.집 안으로 들어온 뒤 그는 문을 닫았다. 그리고 권다솔의 옆에 서서 또 지난번과 비슷한 말을 해댔다. 여하간에 이미 밤을 보냈으니 결혼하자는 뉘앙스였다.“남태건 씨, 그날 집으로 오고 나서 지금까지 생각해 봤어요. 앞으로 어떻게 지낼지를 말이에요. 그리고 이미 생각을 끝냈어요.”권다솔은 그를 보았다.
온지유는 들고 있던 식칼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여이현이 그녀를 불러세웠다.“여보는 손도 씻어야 하니까 귀찮게 그러지 말고 내가 가서 꺼내서 줄게.”“내 핸드백 안에 있어. 지퍼 열면 바로 보일 거야.”온지유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켕길만한 일을 한 적 없었으니 여이현이 가방을 열어보아도 딱히 걱정되지 않았다.여이현은 주방에서 나와 별이와 함께 현관 쪽으로 갔고 대화를 하며 가방을 열려고 했다.“아들, 아빠한테 오늘 노래 대회 어땠는지 말해주면 안 돼?”“당연히 돼요! 오늘 엄마는 엄청 멋졌어요! 친구들 부모님들도 엄마한테 박수를 쳐줬어요!”별이는 입에 모터가 달린 것처럼 바로 낮에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온지유는 얼굴이 예뻤을 뿐만 아니라 온화하기까지 했다. 친구들은 집에서 엄마한테 혼난 적이 있다고 했지만 별이는 혼난 적이 없었다.여이현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랐다.온지유의 가방을 열자 바로 칭찬 스티커가 보였다.그는 그것을 꺼내 별이에게 준 뒤 가방을 원래 위치에 가져다 놓았다. 그러던 중 별이가 실수로 옆에 있던 신발을 밟게 되었고 넘어질 뻔했다.여이현은 얼른 별이를 부축해주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온지유의 가방을 바닥에 떨구게 되었는데 안에서 무언가가 쏟아져 나왔다.소리를 들은 김명자가 얼른 별이를 안고 먼저 거실로 갔고 여이현은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것을 줍다가 우연히 립스틱 옆에 있는 쪽지를 발견하게 되었다.그는 온지유의 물건을 함부로 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쪽지는 열린 상태였고 그가 손을 뻗었을 때 마침 안에 쓰인 글씨를 보게 되었다.내용을 본 여이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위에는 협박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고 마지막 줄엔 커다랗게 미스터리 조직 이름을 적어두었다.이건 도발이었다.그는 어떻게든 빨리 배후를 찾아내야 한다. 그래야만 아이들과 온지유를 지킬 수 있었다.“저녁 준비 다 됐어. 얼른 와서 먹어.”바로 이때 온지유가 음식을 들고나오며 말했다.별이는 즐거운 얼굴로 달려간 뒤 자리
온지유는 속 좁은 사람이 아니었다.“우리 여보가 날 이해해줄 줄 알았어. 우리 여보랑 같이 살 수 있는 건 내 생애 최고의 행운이야.”여이현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러던 중 별이가 거실에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우리 아들은? 방에서 자고 있는 건가.”“아니야. 지금 숙제하는 중이야.'여이현은 숙제하고 있다는 말에 만감이 교차했다.“우리 아들이 다 컸네. 막 태어났을 땐 아주 자그마했는데. 지금은 숙제도 할 줄 알고. 시간이 좀 더 흐르면 혼자 등하교도 할 수 있겠네.”“이건 좋은 일이야. 별이가 엄청 열심히 숙제하더라니까. 게다가 혼자 문제를 풀더라고.”온지유는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됐어. 그만해. 그냥 숙제만 하는 것뿐이잖아. 아직 장가가기엔 한참 멀었어. 뭘 그렇게 감동하고 그래?”온하윤은 작은 손을 뻗어 여이현의 턱을 만졌다. 그러더니 품에 안고 있던 장난감을 건넸다.그것은 온하윤이 아주 좋아하는 장난감이었다.하지만 온하윤은 장난감보다 아빠를 더 좋아했기에 장난감을 건네며 아빠랑 같이 놀자는 의미로 건넸다.여이현은 딸의 작은 손에서 장난감을 받은 후 눌렀다. 폭신폭신한 촉감이었지만 여전히 마음은 서글펐다.“하윤이도 지금은 이렇게 내 품에 쏙 안기겠지만 빠르게 크겠지. 나중에 남자친구를 데리고 오면서 결혼하겠다고 하고 아이까지 낳을 생각 하니 뭔가 자꾸 아쉬운 마음이 드네.”온지유는 그의 말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만약 온하윤이 지금 성인이 되어 남자친구까지 사귀었다면 그녀도 확실히 그런 감회가 들 것 같았다.“하지만 하윤이는 아직 한 살도 안 되었잖아. 시집가기엔 한참이나 멀었는걸. 아직 한 살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그런 걱정을 하는 거야? 얼른 가서 저녁이나 차려줘. 별이도 숙제 거의 다 했을 테니까 내가 가서 보면 돼.”온지유는 걸음을 옮겼다.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니 여이현은 출산하기 전날 고통스러워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부자이든 아니든, 설령 세계에서 실력이 제일 좋은 산부인과라고 해도 출산할 때
어린이집에서 나와 차로 돌아온 후에야 온지유는 자신의 가방이 열려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열린 지퍼를 잠그며 말했다.“별아, 이대로 집으로 갈래, 아니면 다른 데 구경하러 갈래?”“집으로 가요, 엄마. 조금 졸려요. 별이는 집에 가서 쉬고 싶어요. 내일도 어린이집 가야 하는걸요.”별이는 알아서 척척 안전벨트를 했다.온지유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별이와 대화를 나누었다. 운전기사가 앞에서 부드럽게 운전해준 덕에 편하게 집까지 도착했다.집 안으로 들어간 별이는 평소처럼 거실에 앉아 놀지 않았다. 겉옷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신은 뒤 온지유의 앞으로 달려갔다.“엄마, 전 방에서 숙제하고 있을게요. 아마 저녁 식사 전까지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아요.”“숙제하겠다고?”온지유는 숙제라는 단어가 생소하게 느껴졌다.별이는 아직 어렸던지라 어린이집을 다니고 있었다. 초등학생도 아닌데 벌써 숙제가 있다니.물론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위해 숙제를 냈을 거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조금 빠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네, 선생님이 저희한테 지금부터 숙제하는 좋은 습관을 길러야 한다고 했어요. 안 그러면 초등학생이 되면 힘들다고 하셨어요. 어려운 숙제를 내주신 게 아니니 저는 빨리 완성할 수 있어요.”별이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비록 아이가 이렇게 말하긴 했지만 온지유는 아이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 어떤 숙제를 낸 것인지 확인하려고 했다.두 사람은 계단을 올라갔다. 방으로 돌아온 뒤 별이는 가방에서 어린이집에서 나눠줬다는 연습장을 꺼내 온지유에게 보여주었다.“엄마, 선생님께선 저희에게 숙제를 두 개 내주셨어요. 하나는 글씨 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크기를 비교하는 것이에요.”온지유는 책을 넘기며 대충 훑어보았다. 책에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간단한 단어가 있었다. 아이들이 쓰기에도 쉬운 단어였다. 수학책에는 1부터 20의 숫자가 있었고 어떤 숫자가 더 큰지 적어넣는 문제가 있었다. 별이처럼 어린아이들에게 그렇게 어려운 숙제는
온지유는 당연히 잘 불러야 했다. 1등을 차지해 별이에게 멋진 엄마가 되어주고 싶었으니까.어린이집으로 가는 길에 온지유는 이어폰을 꽂고 어젯밤 생각해둔 노래를 반복해서 들었다.차는 어린이집 앞에 멈춰 섰다. 그녀는 별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별이의 반은 3층에 있었다. 다른 어린이들과 학부모들도 거의 도착해 있었다. 온지유가 안으로 들어가자 대부분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한 무리 학부모 중 온지유가 유난히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그녀는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걸음걸이마다 우아함이 돋보이며 굴곡진 몸매에 기품도 느껴졌다.이때 어린이 한 명이 별이의 곁으로 쪼르르 달려가 작게 물었다.“별이 엄마 진짜 예쁘다. 우리 엄마도 별이 네 엄마처럼 이뻤으면 좋겠다.”“우리 엄마들은 다 예뻐.”별이는 친구의 말을 바로잡아주었다.물론 별이의 마음속에 온지유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이었다.선생님들은 이미 학부모들이 앉을 의자를 준비해 주었다. 아직 어린아이들이 모여있는 반이었던지라 학생이 많지 않았을뿐더러 교실도 꽤나 컸기에 의자를 몇 개 더 가져다 놓는다고 해서 비좁은 느낌은 없었다.온지유는 자리에 앉았다. 별이는 그런 온지유 옆에 곧은 자세로 서 있었다.“별이 엄마, 몸매가 아주 좋으시네요. 평소에 운동하시는 거예요? 저도 몸매 유지하는 비결 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옆자리에 앉은 학부모가 먼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전 평소에 식사량이 많지 않은데도 뱃살은 빠지지 않더라고요.”여자들의 관심사는 전부 비슷했다. 그들은 미용이거나 몸매 관리에 관심이 아주 많았다.온지유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해준 뒤 핸드폰을 꺼내 저장해둔 영상을 몇 개 보여주었다.“전 집에서 요가를 하거든요. 이 영상들을 따라 해봤는데 효과가 꽤 있었어요. 평소에 적게 드신다면 살은 당연히 빠지겠지만 뱃살을 없애고 싶은 거라면 제 생각엔 운동은 필수인 것 같네요.”“저희 연락처 교환해요. 이 영상들을
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은 아니나 음치는 아니었다.별이는 기쁜 얼굴로 손뼉을 쳤다.“너무 좋아요. 아빠, 엄마, 내일 어린이집에서 가족 이벤트를 한다고 했어요. 노래 대회라고 했는데 별이랑 같이 참가해줄 거죠?”내일은 주말이었다. 어린이집에서 주말에 이런 이벤트를 계획한 것도 평일 출근할 학부모를 고려해서였다.만약 여이현에게 다른 일정이 없다면 당연히 아내와 함께 별이의 어린이집으로 갈 것이었지만 하필이면 새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배진호는 권다솔의 마음을 되돌리느라 시간이 없으니 그가 해야 했다.“여보, 여보가 별이랑 같이 가줘. 난 그날 거래처 만나봐야 하거든.”신호를 기다리는 틈을 타 여이현이 온지유에게 말했다.온지유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아이의 일에 부모 모두 책임을 져야 했지만 두 사람은 부부였던지라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도 필요했다.여이현이 바쁘게 일하는 것도 더 유복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을 온지유도 잘 알고 있었다.별이는 더욱 배려심이 깊은 아이였다. 고집을 부리지도 않고 온지유의 팔을 꼬옥 잡아 기대며 말했다.“그럼 아빠는 일하러 가세요. 별이는 엄마만 있어도 괜찮아요. 선생님도 두 분 중 한 명만 있어도 된다고 했어요. 물론 두 분이 같이 가면 더 환영한댔어요.”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세 사람은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세 사람이 돌아왔다는 것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인지 자고 있던 온하윤도 눈을 떴다. 작은 입을 벌리며 하품했다.옆에 있던 김명자는 얼른 주방으로 가서 분유를 탄 뒤 온하윤의 입에 물려주었다. 향긋한 분유 냄새를 맡은 온하윤은 꿀꺽꿀꺽 젖병을 빨아 먹었다.세 사람이 집 안으로 들어왔을 때 마침 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너무도 행복했다.“오늘 저녁은 내가 할게. 별이가 먹고 싶다는 햄버거를 만들고 있을 테니까 당신은 아이들이랑 놀아줘.”온지유는 여이현에게 뽀뽀한 뒤 앞치마를 두르곤 주방으로 들어갔다.거실에선 웃고 떠드는 소리가 울
권다솔은 이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결혼할 수 없었다.게다가 남태건과 평생 묶여 살고 싶지도 않았다.설령 어젯밤 이상한 약물 탓에 그와 밤을 보내게 되었다고 해도 그녀의 마음속엔 온통 배진호뿐이었다.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온몸이 남태건의 터치를 거부하고 있었다. 설령 그저 손을 잡는 것일 뿐이라고 해도 말이다.남태건은 잔뜩 실망한 기색이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그래, 일단 생각은 해봐. 다솔아, 급하게 답을 주지 않아도 돼.”그녀가 계속 거절한다면 그녀의 부모님을 찾아가 설득하면 그만이었다.권다솔의 부모님은 그를 아주 좋아했다. 어떻게든 그녀와 이어주려고 했으니 그들과 손을 잡는다면 권다솔과 결혼할 수 있을 것이다.권다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설령 오랫동안 생각을 해본다고 해도 남태건을 받아줄 리가 없었다....한편 온지유 쪽.권다솔이 떠난 후 두 사람은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그동안 여이현은 배진호를 찾아간 적 있었다. 기획하고 있던 프로젝트를 넘겨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배진호는 집안일로 상태가 아주 좋지 못했다. 지금까지 혼자 회사를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어 보였으며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을 기력은 없었다.배진호는 여이현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솔직하게 말했다.그가 솔직하게 말하니 여이현도 강요하지 않았다.“일단 집안일부터 처리하세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고요. 집안일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나한테 다시 찾아와도 돼요. 그때 또 새로운 일을 줄 테니까요.”여하간에 여진 그룹은 대기업이었기에 프로젝트는 언제든지 있었다.한번 기회를 놓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건 없었다.배진호는 그런 여이현이 너무도 고마웠다. 이미 충분히 그를 도와주고 있었다.하지만 감정이라는 건 결국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 법이었다. 물을 마셔도 뜨거운 것인지 차가운 것인지 본인만 아는 것처럼 말이다. 너무 많은 사람이 끼어들면 때로는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킬 때도 있었다.그는 권다솔과 다시 함께 살고 싶었지만, 전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