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끝이라고? 더 시도해 보지 않을 건가?’온지유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 여자가 여이현을 붙잡을까 봐 많이걱정하고 있었다. 바람기 많은 남자보다 진지한 여자가 더 위험하기 마련이다.자신의 마음을 과감히 고백하는 여자에게 유혹당하지 않을 남자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여이현, 운 좋은 줄 알아.”온지유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이때 갑자기 누군가 그녀 앞길을 막고 서있었다.고개를 들어보니 여이현이 부드러운 눈길로 온지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끝이보이지 않는 소용돌이처럼 온지유를 빨아 들어갈 것으로 보였다.“어떤 여자분이 찾던 것 같던데 가보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받아 주지. 그러면...”“그럼 나 간다.”그 대답에 온지유는 재빨리 여이현을 잡으며 소리쳤다.“가긴 어딜 가!”이 틈을 타 여이현이 온지유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하고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안 갈 거야. 내 곁에 지유 너와 별이만 있으면 행복한걸.”갑작스러운 돌직구에 온지유는 너무 기쁜 나머지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두 사람은 금방 발생한 불쾌한 사건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다시 야시장 돌아다녔다. 허기진 배도 채우고 재밌게 놀고 나니 시간이 물 흐르듯 흘러 어느덧 늦은 밤이 되었다.연이어 하품하는 온지유를 보고 여이현은 택시를 불러 호텔로 향했다. 힘들게 약속한 단둘만의 데이트라 여이현은 오늘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뜨거운 밤이 지나가고 아침이 찾아왔다.비몽사몽 한 상태로 꿈나라에서 빠져나온 온지유의 머릿속은 온통 뜨거웠던 어젯밤 화면으로 가득 차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여러 번 흔들어 요동치는 마음을 가까스로 가라앉히고 시간을 보니 벌써 별이 등교 시간이었다.온지유는 아직 한창 꿈나라에서 여행 중인 여이현을 버려두고 옷을 바꾼 뒤 허둥지둥 방을 나섰다.“어머, 우리 자기 왜 그렇게 급해. 혹시 내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여희영이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는 온지유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귀가에대고
최승현은 여희영의 말을 듣고도 포기하지 않고 그녀를 붙잡으며 말했다.“여희영 씨, 저는 진심으로 여희영 씨를 좋아해요.”여희영은 비록 여이현의 친고모는 아니었지만 여진 그룹에 큰 변화가 생긴 뒤로부터여이현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여이현은 현재 그녀를 친 고모로 여기며 존경스러운 태도로 모시고 있다. 그건 여희영이 여진 그룹의 다양한 광고 촬영에 참여했다는 소식에서 알아볼 수 있었다.최승현이 악착스레 달라붙는 것도 뒷백이 센 여희영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여희영은 그의 속셈을 모른 채 짜증 나기만 했다.그녀가 온지유를 바라보며 도와달라고 하려던 찰나 최승현이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 손을 댔다.여희영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최승현을 두 손으로 밀어 내팽개쳤다.이 장면을 목격한 온지유가 소리를 지르며 쏜살같이 달려와서는 여희영을 끌어안고 대성통곡했다.“안돼요. 전 반대에요! 저와 약속하셨잖아요!”너무나도 가련한 온지유의 모습에 구경꾼들이 모여들더니 작은 소리로 두 사람을 의논하기 시작했다.여희영은 온지유의 등을 토닥이며 차가운 말투로 최승현에게 말했다.“최승현 씨, 제가 분명히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텐데요. 더는 저에게 달라붙지 마세요.”말을 마치기 무섭게 그녀는 온지유를 끌어안고 호텔을 나섰다. 두 사람은 숨을 죽인 채 최승현이 또 따라올까 봐 부리나케 달려나갔다.“아직도 따라오고 있어?”여희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아니요. 하지만 아직도 저희를 보고 있어요. 어? 이현 씨가 내려왔는데요.”여희영은 여이현이 두 사람의 계획을 망칠까 봐 두려워 발걸음을 재촉했다.“아니 근데 이현이가 최승현 쪽으로 다가가서 뭘 말하고 있는데.”이 말에 온지유는 여희영을 밀어내고 눈을 가늘게 뜬 채 여이현이 입 모양으로 말을 읽어내려고 노력했다.“이현 씨가 최승현 씨에게 계속 달라붙으면 연예계에서 사라지게 만들겠다고 말했어요.”온지유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희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최승현 씨 연예인이에요?”“아니. 여
여진숙은 서찬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녀는 여진 그룹의 일에 관심이 일도 없었다.서찬이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당연히 사모님에게 할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죠. 여진 그룹에 큰 변화가 생겼다는 소식 들어보셨나요? 글쎄 여이현이 여 대표님 편을 드는 사람들을 모두 해고했지 뭐에요. 지금 여진 그룹은 여이현의 천하에요.”여진숙은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덤덤한 태도로 “그래요.”라고 대답한 뒤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서찬은 여전히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설득했다.“사모님, 여진 그룹이 여 대표님 손으로 다시 돌아올 수만 있다면 더는 요양원에 계시지 않아도 돼요. 들은 바에 의하면 사모님께서는 경제적인 원인 때문에 아직 외국으로 떠나지 못하신다면서요. 사실, 이 모든게 여이현 때문이잖아요.”“도대체 무슨 얘길 하고 싶은 겁니까?”여진숙이 드디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무표정이었다.서찬이 그녀 가까이 다가가서 뭐라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말이 끝나자 여진숙이 입꼬리를 올리면서 분부했다.“알겠어요. 서 부장님 뜻대로 하세요.”허락을 받은 서찬은 한껏 부풀어 올라 당장 하늘로 날아갈 것 같았다.그는 허리를 굽힌 채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담보했다.두 사람의 계획은 가정모임이었다. 여진숙은 여이현의 어머니였기에 지금 이 모양이 되었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가정모임에서 그녀의 체면을 구기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물론 여의현은 아니였다.밝은 하늘에 어둠이 깃들 무렵 여이현이 온지유와 별이를 데리고 모임 장소에 도착했다.그는 여진숙을 향해 머리를 끄덕이고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여진숙은 자상한 눈길로 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별아, 할머니께 인사해야지.”여이현의 말에 별이가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별이 인사를 받은 여진숙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별이에게 미리 준비한 돈 봉투를 쥐여주었다.여이현과 온지유 두 사람은 확연히 달라진 여진숙의 모습에 어리둥절했다.가정모임에 여희영이 빠질 리가 없었다. 그들이 자리에 앉으려던
“어머, 네가 마음 많이 썼네. 나도 깜박하고 있었는데. 맞아. 예전에는 파리에서 생활하고 싶었지 하지만 지금은 너도 알다시피...”여진숙이 더는 입을 열지 않았지만 모두 원인을 알고 있었다.이때 온지유가 여진숙에게 선물 상자를 가져다주며 말했다.“이 얘긴 그만하는 게 어때요? 자 이건 저희가 준비한 선물이에요. 한번 열어보세요. 맘에 드시는지.”여진숙이 상자를 열자 그 속에는 열쇠와 부동산 계약서가 들어 있었다. 부동산 계약서에 쓰여있는 파리 주소를 보자 여진숙은 너무 기쁜 나머지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온지유가 여진숙의 모습을 보고 다가와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해줬다.“사람이 필요하시다면 어머님께서 직접 고르시고 말씀하세요. 의료팀도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이현 씨가 모두 준비해뒀어요.”여희영은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는 이번 가정모임에서 여진숙이 수작을 부릴 것 같아서 여이현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았다.파리에서 자리 잡고 살 기회를 얻은 여진숙은 그 자리에서 여씨 가문을 여이현에게 전부 넘겨주고 모든 재산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했다.지금부터 여진숙은 남은 세월을 편안히 누리고 재단의 일에 손을 뗄 것이다.세 사람이 모임 장소에서 나오자 여희영은 더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인제야 비로소 여진 그룹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올 수 있다.“이현아, 정말 대단해. 근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 여진숙이 파리에 가고 싶어 한다는 거 말이야.”그녀는 여이현이 그처럼 세심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온지유도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여이현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여이현은 차에 시동을 걸고 어느 정도 주행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서찬이 찾아갔을 때부터 눈치챘어요. 그래서 제가 사람을 불러 간병인을 매수했죠. 서찬이 떠나자마자 간병인 쪽에서 정보를 입수했어요.”‘그렇구나.’두 사람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괜찮아요. 기사 아저씨께서 한 번만 내면 된다고 하셨잖아요. 제 것만 낸 거로 하면 되죠. 돌려 주지 않으셔도 돼요.”최승현은 택시비를 내고 차에서 내려 여희영에게 차 문을 열어줬다.차에서 내리자마자 이 장면을 목격한 온지유는 아무 생각 없이 달려가서 여희영을 몸 뒤로 숨겼다.“두 사람이 왜 같은 차에서 내려요?”온지유는 질투 난 듯 잔뜩 뾰로통한 얼굴로 최승현을 바라보았다. 여희영은 마음속으로 그녀의 연기에 감탄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최승현은 낮은 소리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제가 그쪽을 온지유 씨라고 부를까요? 아니면 사모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그 말에 두 사람은 조각상처럼 굳어졌다. 최승현은 진실을 알고 있었으면서 모르는 척했다.여희영은 그런 최승현이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아 그를 무시하고 온지유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여희영 씨, 전 여희영 씨를 진심으로 좋아해요. 여희영 씨가 저에게 못되게 굴더라도 저는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여희영 씨를 제 여자로 만들 거에요!”고래고래 소리치는 최승현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이리로 주의를 기울이며 소곤소곤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여희영은 최승현이 큰소리를 치고 있다고 생각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온지유와 함께 여이현을 찾으러 올라갔다.연회가 열리는 곳은 교외에 있는 바캉스 호텔이었다. 주최 측에서는 호텔 전부를 연회장소로 정해서 사람들이 마음껏 즐기도록 만들었다.홀로 연회장에 들어선 여희영은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각양각색의 남녀들이 모여있는 연화장은 마치 소개팅을 하는 것 같았다.이때 그녀 눈이 들어온 간판이 그 추측을 실증해줬다. 그제야 여이현이 왜 온지유를 참가 못 하게 막으려 했는지 깨달았다.“아가씨, 저와 함께 춤을 추실 수 있나요?”어떤 남자가 다가오더니 젠틀하게 초대를 보내왔다.여희영은 기분전환을 하려고 연회에 참가했기 때문에 소개팅할 마음이 없었다.여희영은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누군가는 일부러 연회에 참가했다.“이분은 여희영 씨라고 여진그룹 여
호텔 바닥은 아수라장이었다.잠에서 깬 지유는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지유는 미간을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커다란 몸집을 가진 남자가 옆에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지나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은 조각과도 같았고 눈매도 깊고 진했다.아직 깊은 잠이 들어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지유가 몸을 일으키자 이불이 그녀의 몸에서 미끄러져 내렸고 뽀얗고 매혹적인 두 어깨에 어젯밤 남긴 흔적이 보였다.지유가 앉았던 자리에 선명한 핏자국이 보였다.시간을 보니 어느새 출근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유는 바닥에 널브러진 출근룩을 다시 집어 들어 얼른 갈아입었다.스타킹은 이미 남자에 의해 찢겨 있었다.지유는 스타킹을 돌돌 말아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하이힐을 신었다.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깔끔하게 차려입은 지유는 어느새 워커홀릭 비서로 완전히 돌아왔고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들어온 사람은 청순한 미녀였다.지유가 부른 사람이었다.이현의 취향이 이런 여자였다.지유가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침대에 누워서 대표님 깨나길 기다리면 돼요. 다른 건 한마디도 하지 마요.”지유는 고개를 돌려 아직 단잠에 빠진 남자를 힐끔 쳐다봤다. 억울한 마음에 코끝이 찡해졌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방에서 나왔다.지유는 두 사람이 어젯밤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이현이 아는 게 싫었다.그들 사이에 계약에 의하면 아무도 모르게 3년간 결혼을 유지하면 바로 이혼할 수 있었다.이 기간에 선을 넘는 행동은 그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지유는 7년째 이현의 비서로, 3년째 이현의 와이프로 있었다.졸업한 그날부터 이현의 곁을 한시도 떠난 적이 없었다.같은 날, 이현은 지유에게 두 사람은 그저 상사와 부하의 관계일 뿐 이 관계를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지유는 복도 창가에 서서 어제 일을 떠올렸다. 이현은 그녀를 안고 침대에 누워 ‘승아’라는 이름을 연신 불러댔다.지유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승아는 이현의 첫사랑이었다.이현은 지유를 승
이에 지유가 화들짝 놀라며 하마터면 발을 삐끗할 뻔했다.중심을 잘 잡지 못한 지유는 그렇게 이현의 몸에 기댔다.이현은 지유의 몸이 앞으로 쏠리자 손으로 지유의 허리를 잡아줬다.뜨거운 체온이 전해지자 지유는 어젯밤 그가 저돌적으로 그녀를 덮치던 화면이 떠올랐다.지유는 가까스로 진정하고 고개를 들어 이현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 봤다.이현의 눈동자는 매우 진지했고 그 속엔 질문과 의혹도 담겨 있었다. 눈빛은 지유를 뚫어버릴 것만 같았다.지유는 심장이 벌렁거렸다.이현과 더는 눈을 마주칠 엄두가 나지 않아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아까 나간 그 여자라고 생각했을 때도 이현은 불같이 화를 냈는데 여기서 만약 지유가 자신이었음을 인정한다면 후과가 그리 좋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아니라고 하기엔 억울했다.만약 어젯밤 잠자리를 가진 사람이 지유라는 걸 이현이 알게 된다면 결혼 생활을 조금이라도 더 이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그래도 지유는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게 겁나 고개를 숙인 채로 물어봤다.“그건 왜 묻는 거예요?”지유는 사실 남몰래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이현이 코웃음을 치더니 이렇게 말했다.“너는 그런 용기가 없을 것 같아서.”지유는 멈칫하더니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어쩌면 이현은 어젯밤 잠자리를 가진 사람이 지유가 아니길 더 바랄지도 모른다. 계약 결혼일뿐이니 말이다.게다가 며칠만 더 지나면 계약도 끝나간다순간 이현이 지유의 손을 힘껏 낚아챘다.지유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이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심사하듯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지유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발버둥 치며 손을 빼려 했지만 이현이 지유를 전신 거울 앞으로 바짝 몰아갔다.“뭐 하는 거예요?”지유는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긴장과 두려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너 정말 사무실에서 잠들었어?”지유는 칠흑같이 어두운 이현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혹시나 들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3년 전, 결혼한 첫날 밤, 지유는
고개를 들어보니 승아가 앞치마를 두르고 손에 국자를 들고 있었다.지유를 본 승아는 표정이 살짝 굳었다가 다시 부드럽게 인사했다.“아주머니 손님이에요? 마침 삼계탕을 조금 더 끓였는데 같이 와서 먹어볼래요?”승아의 느긋한 태도는 마치 그녀가 이곳의 안주인인 것 같았다.오히려 지유가 멀리서 찾아온 손님처럼 보였다.하긴 얼마 지나지 않아 지유는 곧 이 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된다.지유는 이런 거지 같은 상황에 미간이 찌푸려졌다.이현과 결혼할 때 모든 사람에게 알렸고 승아도 축복을 보내왔기에 지유가 이현의 와이프라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승아는 지유가 문 앞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자 얼른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왔으면 손님이죠. 얼른 들어와요.”승아가 가까이 다가오자 옅은 재스민 향이 풍겨왔다. 이현은 작년 생일에 지유에게 똑같은 향수를 선물했다.지유는 목구멍이 점점 메어와 숨쉬기가 힘들었고 다리가 천근만근인 듯 움직이기 힘들었다.여진숙은 지유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자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지유야, 여기 서서 뭐 하는 거야? 손님이 왔으면 차라도 내와야지.”지유는 승아와 겨뤄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물었다.“어머님, 승아 씨가 왜 우리 집에 있는 거예요?”여진숙이 답했다.“승아도 오랜만에 귀국했으니 한 번쯤은 나 보러 와야 할 거 아니니? 왜? 승아가 우리 집에 오면 안 돼? 현이도 뭐라 안 하는데 네가 뭐라고 시비야?”“그런 뜻 아니에요.”지유가 고개를 푹 숙였다.“아, 지유 언니였구나. 이현 오빠가 결혼사진을 보여준 적이 없어서 못 알아봤네요. 기분 상했다면 죄송해요.”지유는 환하게 웃는 승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허.’하긴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여자에게 다른 여자와 결혼한 사진을 보여줄 리가 없지.이때 여진숙이 호통치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얼른 승아한테 차를 내주지 않고 뭐 해?”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놓은 주전자를 들었다.승아는 여진숙과 웃고 떠들며
“괜찮아요. 기사 아저씨께서 한 번만 내면 된다고 하셨잖아요. 제 것만 낸 거로 하면 되죠. 돌려 주지 않으셔도 돼요.”최승현은 택시비를 내고 차에서 내려 여희영에게 차 문을 열어줬다.차에서 내리자마자 이 장면을 목격한 온지유는 아무 생각 없이 달려가서 여희영을 몸 뒤로 숨겼다.“두 사람이 왜 같은 차에서 내려요?”온지유는 질투 난 듯 잔뜩 뾰로통한 얼굴로 최승현을 바라보았다. 여희영은 마음속으로 그녀의 연기에 감탄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최승현은 낮은 소리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제가 그쪽을 온지유 씨라고 부를까요? 아니면 사모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그 말에 두 사람은 조각상처럼 굳어졌다. 최승현은 진실을 알고 있었으면서 모르는 척했다.여희영은 그런 최승현이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아 그를 무시하고 온지유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여희영 씨, 전 여희영 씨를 진심으로 좋아해요. 여희영 씨가 저에게 못되게 굴더라도 저는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여희영 씨를 제 여자로 만들 거에요!”고래고래 소리치는 최승현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이리로 주의를 기울이며 소곤소곤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여희영은 최승현이 큰소리를 치고 있다고 생각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온지유와 함께 여이현을 찾으러 올라갔다.연회가 열리는 곳은 교외에 있는 바캉스 호텔이었다. 주최 측에서는 호텔 전부를 연회장소로 정해서 사람들이 마음껏 즐기도록 만들었다.홀로 연회장에 들어선 여희영은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각양각색의 남녀들이 모여있는 연화장은 마치 소개팅을 하는 것 같았다.이때 그녀 눈이 들어온 간판이 그 추측을 실증해줬다. 그제야 여이현이 왜 온지유를 참가 못 하게 막으려 했는지 깨달았다.“아가씨, 저와 함께 춤을 추실 수 있나요?”어떤 남자가 다가오더니 젠틀하게 초대를 보내왔다.여희영은 기분전환을 하려고 연회에 참가했기 때문에 소개팅할 마음이 없었다.여희영은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누군가는 일부러 연회에 참가했다.“이분은 여희영 씨라고 여진그룹 여
“어머, 네가 마음 많이 썼네. 나도 깜박하고 있었는데. 맞아. 예전에는 파리에서 생활하고 싶었지 하지만 지금은 너도 알다시피...”여진숙이 더는 입을 열지 않았지만 모두 원인을 알고 있었다.이때 온지유가 여진숙에게 선물 상자를 가져다주며 말했다.“이 얘긴 그만하는 게 어때요? 자 이건 저희가 준비한 선물이에요. 한번 열어보세요. 맘에 드시는지.”여진숙이 상자를 열자 그 속에는 열쇠와 부동산 계약서가 들어 있었다. 부동산 계약서에 쓰여있는 파리 주소를 보자 여진숙은 너무 기쁜 나머지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온지유가 여진숙의 모습을 보고 다가와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해줬다.“사람이 필요하시다면 어머님께서 직접 고르시고 말씀하세요. 의료팀도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이현 씨가 모두 준비해뒀어요.”여희영은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는 이번 가정모임에서 여진숙이 수작을 부릴 것 같아서 여이현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았다.파리에서 자리 잡고 살 기회를 얻은 여진숙은 그 자리에서 여씨 가문을 여이현에게 전부 넘겨주고 모든 재산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했다.지금부터 여진숙은 남은 세월을 편안히 누리고 재단의 일에 손을 뗄 것이다.세 사람이 모임 장소에서 나오자 여희영은 더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인제야 비로소 여진 그룹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올 수 있다.“이현아, 정말 대단해. 근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 여진숙이 파리에 가고 싶어 한다는 거 말이야.”그녀는 여이현이 그처럼 세심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온지유도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여이현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여이현은 차에 시동을 걸고 어느 정도 주행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서찬이 찾아갔을 때부터 눈치챘어요. 그래서 제가 사람을 불러 간병인을 매수했죠. 서찬이 떠나자마자 간병인 쪽에서 정보를 입수했어요.”‘그렇구나.’두 사람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여진숙은 서찬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녀는 여진 그룹의 일에 관심이 일도 없었다.서찬이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당연히 사모님에게 할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죠. 여진 그룹에 큰 변화가 생겼다는 소식 들어보셨나요? 글쎄 여이현이 여 대표님 편을 드는 사람들을 모두 해고했지 뭐에요. 지금 여진 그룹은 여이현의 천하에요.”여진숙은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덤덤한 태도로 “그래요.”라고 대답한 뒤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서찬은 여전히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설득했다.“사모님, 여진 그룹이 여 대표님 손으로 다시 돌아올 수만 있다면 더는 요양원에 계시지 않아도 돼요. 들은 바에 의하면 사모님께서는 경제적인 원인 때문에 아직 외국으로 떠나지 못하신다면서요. 사실, 이 모든게 여이현 때문이잖아요.”“도대체 무슨 얘길 하고 싶은 겁니까?”여진숙이 드디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무표정이었다.서찬이 그녀 가까이 다가가서 뭐라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말이 끝나자 여진숙이 입꼬리를 올리면서 분부했다.“알겠어요. 서 부장님 뜻대로 하세요.”허락을 받은 서찬은 한껏 부풀어 올라 당장 하늘로 날아갈 것 같았다.그는 허리를 굽힌 채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담보했다.두 사람의 계획은 가정모임이었다. 여진숙은 여이현의 어머니였기에 지금 이 모양이 되었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가정모임에서 그녀의 체면을 구기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물론 여의현은 아니였다.밝은 하늘에 어둠이 깃들 무렵 여이현이 온지유와 별이를 데리고 모임 장소에 도착했다.그는 여진숙을 향해 머리를 끄덕이고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여진숙은 자상한 눈길로 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별아, 할머니께 인사해야지.”여이현의 말에 별이가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별이 인사를 받은 여진숙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별이에게 미리 준비한 돈 봉투를 쥐여주었다.여이현과 온지유 두 사람은 확연히 달라진 여진숙의 모습에 어리둥절했다.가정모임에 여희영이 빠질 리가 없었다. 그들이 자리에 앉으려던
최승현은 여희영의 말을 듣고도 포기하지 않고 그녀를 붙잡으며 말했다.“여희영 씨, 저는 진심으로 여희영 씨를 좋아해요.”여희영은 비록 여이현의 친고모는 아니었지만 여진 그룹에 큰 변화가 생긴 뒤로부터여이현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여이현은 현재 그녀를 친 고모로 여기며 존경스러운 태도로 모시고 있다. 그건 여희영이 여진 그룹의 다양한 광고 촬영에 참여했다는 소식에서 알아볼 수 있었다.최승현이 악착스레 달라붙는 것도 뒷백이 센 여희영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여희영은 그의 속셈을 모른 채 짜증 나기만 했다.그녀가 온지유를 바라보며 도와달라고 하려던 찰나 최승현이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 손을 댔다.여희영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최승현을 두 손으로 밀어 내팽개쳤다.이 장면을 목격한 온지유가 소리를 지르며 쏜살같이 달려와서는 여희영을 끌어안고 대성통곡했다.“안돼요. 전 반대에요! 저와 약속하셨잖아요!”너무나도 가련한 온지유의 모습에 구경꾼들이 모여들더니 작은 소리로 두 사람을 의논하기 시작했다.여희영은 온지유의 등을 토닥이며 차가운 말투로 최승현에게 말했다.“최승현 씨, 제가 분명히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텐데요. 더는 저에게 달라붙지 마세요.”말을 마치기 무섭게 그녀는 온지유를 끌어안고 호텔을 나섰다. 두 사람은 숨을 죽인 채 최승현이 또 따라올까 봐 부리나케 달려나갔다.“아직도 따라오고 있어?”여희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아니요. 하지만 아직도 저희를 보고 있어요. 어? 이현 씨가 내려왔는데요.”여희영은 여이현이 두 사람의 계획을 망칠까 봐 두려워 발걸음을 재촉했다.“아니 근데 이현이가 최승현 쪽으로 다가가서 뭘 말하고 있는데.”이 말에 온지유는 여희영을 밀어내고 눈을 가늘게 뜬 채 여이현이 입 모양으로 말을 읽어내려고 노력했다.“이현 씨가 최승현 씨에게 계속 달라붙으면 연예계에서 사라지게 만들겠다고 말했어요.”온지유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희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최승현 씨 연예인이에요?”“아니. 여
‘이게 끝이라고? 더 시도해 보지 않을 건가?’온지유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 여자가 여이현을 붙잡을까 봐 많이걱정하고 있었다. 바람기 많은 남자보다 진지한 여자가 더 위험하기 마련이다.자신의 마음을 과감히 고백하는 여자에게 유혹당하지 않을 남자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여이현, 운 좋은 줄 알아.”온지유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이때 갑자기 누군가 그녀 앞길을 막고 서있었다.고개를 들어보니 여이현이 부드러운 눈길로 온지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끝이보이지 않는 소용돌이처럼 온지유를 빨아 들어갈 것으로 보였다.“어떤 여자분이 찾던 것 같던데 가보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받아 주지. 그러면...”“그럼 나 간다.”그 대답에 온지유는 재빨리 여이현을 잡으며 소리쳤다.“가긴 어딜 가!”이 틈을 타 여이현이 온지유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하고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안 갈 거야. 내 곁에 지유 너와 별이만 있으면 행복한걸.”갑작스러운 돌직구에 온지유는 너무 기쁜 나머지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두 사람은 금방 발생한 불쾌한 사건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다시 야시장 돌아다녔다. 허기진 배도 채우고 재밌게 놀고 나니 시간이 물 흐르듯 흘러 어느덧 늦은 밤이 되었다.연이어 하품하는 온지유를 보고 여이현은 택시를 불러 호텔로 향했다. 힘들게 약속한 단둘만의 데이트라 여이현은 오늘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뜨거운 밤이 지나가고 아침이 찾아왔다.비몽사몽 한 상태로 꿈나라에서 빠져나온 온지유의 머릿속은 온통 뜨거웠던 어젯밤 화면으로 가득 차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여러 번 흔들어 요동치는 마음을 가까스로 가라앉히고 시간을 보니 벌써 별이 등교 시간이었다.온지유는 아직 한창 꿈나라에서 여행 중인 여이현을 버려두고 옷을 바꾼 뒤 허둥지둥 방을 나섰다.“어머, 우리 자기 왜 그렇게 급해. 혹시 내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여희영이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는 온지유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귀가에대고
두 사람은 야시장 입구에 왔다. 인파로 사람들 머리만 보이자 여이현은 바로 그녀를 끌어안고 나직하게 말했다.“옷이라도 갈아입고 올까? 인파들 속에서 기회를 틈타 널 만지려고 하면 어떡해.”온지유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흥, 드레스를 고를 땐 야시장을 구경할 거라는 생각은 못 해봤나 봐? 안 갈아입을래. 오랜만에 이쁘게 입었는데 왜 갈아입어. 게다가 여긴 사람도 많잖아. 그럼 더 신경 써야지.”여이현은 그녀를 설득할 수가 없었기에 속으로 어떻게든 지켜내고 말겠다고 다짐했다.실컷 놀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온지유는 더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맛있는 것을 보면 맛보고 배가 부르면 여이현에게 넘겨주었다. 알록달록한 칵테일에 맛만 본 후 바로 여이현에게 주기도 했고 재밌는 것이 있으면 체험해보기도 했으며 무서운 것이 있으면 바로 여이현의 품으로 안겨들었다.그녀는 밤하늘에 뜬 예쁜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기에 사람들도 저도 모르게 자꾸만 그녀를 힐끗거리고 있었다.당연히 눈치 없는 사람들이 접근하기도 했다.아이스크림을 사러 줄을 서고 있을 때 온지유는 누군가와 부딪치게 되었고 바로 표정이 일그러졌다.여이현은 바로 걱정스럽게 물었다.“괜찮아?”“누가 내 엉덩이를 만졌어.”온지유는 고개를 돌리며 인파 속에서 의심이 갈 만한 사람을 찾아보았으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엉덩이를 만진 건 확실했다.여이현의 표정이 바로 굳어졌다.얼른 그녀를 데리고 가까운 옷가게로 들어가 명령 어조로 말했다.“당장 갈아입어. 안 그러면 지금 당장 집으로 갈 거야.”“왜 화를 내.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잖아.”“알아. 네 잘못이 아닌 거. 하지만 난 짜증이 난다고. 그런 썩을 놈들이 네 엉덩이를 만졌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다 불쾌하고 화가 나.”여이현의 기분을 누가 알겠는가. 자신의 여자가 어떤 남자에게 성희롱을 당했는데 상대가 누군지도 몰라 복수할 수도 없는 이 기분을.온지유는 억울했다. 그래서 아주 보수적인 옷을 골라 피팅룸으로 들어갔다.옷을 갈아입고도 나오지 않았
말을 하던 여이현은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더니 파란 장미를 꺼내 온지유에게 건넸다.“온지유 씨, 좋아해요. 사랑하고 있어요. 평생 당신만을 바라보며 살게요.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도 오직 당신만 사랑할 거예요. 그러니 내 마음을 받아줘요. 내가 평생 당신을 걱정하고 아끼며 사랑할 수 있게.”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에 그녀의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온지유는 이미 눈물바다가 되었다. 파란 장미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지나서야 그녀는 대답했다.“그럴게요.”그녀의 대답을 듣자마자 여이현은 그녀를 안고 빙빙 돌았다.지금 이 순간 온 세상에 둘만 남은 듯한 기분이었고 서로의 심장 소리가 확성기에 틀어놓은 것처럼 크게 들렸다.“내 고백을 받아줬으니까 다음 순서로 그 장미를 뜯어 봐.”여이현의 목소리가 다시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녀는 놀란 얼굴로 그를 힐끗 보다가 조심스럽게 장미를 뜯었다.안에는 반지가 있었다.온지유는 깜짝 놀랐다.“이현 씨, 정말!”“마음에 들어?”여이현은 미소를 지었다. 이번 밸런타인데이에 얼마나 정성을 쏟아부었는지 모른다. 무엇을 좋아할지 몰라 그는 아주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며 준비했다.다행히 온지유는 아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온지유가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는가. 여자라면 대부분 그의 이벤트를 좋아할 것이다.그녀는 발꿈치를 들더니 여이현에게 입을 맞추었다. 짧은 입맞춤 후 입을 떼려던 순간 여이현은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더니 이내 질척인 키스를 했다.얼마나 지났을까, 온 세상에 둘만 있는 기분이었다.온지유는 숨이 막혔다. 여이현은 그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뭐야. 하지 마. 나 배고파. 얼른 음식을 준비해달라고 해줘.”온지유는 배고프다는 핑계를 대며 야릇해진 분위기를 피해 보려고 했다.여이현이 준비한 저녁은 전부 밸런타인데이와 연관이 있는 음식이었다.데코레이션이든 음식의 의미이든 전부 마음에 들었다.이런 이벤트를 싫어할 여자는 없을 것이다. 다만 온지유는 하루 종일 자신을 방치해둔 것
어둠이 내려앉자 경성은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오늘은 밸런타인데이였던지라 곳곳의 가게에서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밸런타인데이를 삼켜버릴 것처럼 말이다.온지유는 여희영이 알려준 호텔로 왔으나 바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커다란 창가로 여희영이 알려준 파란 장미를 든 남자를 찾아보고 있었다.테이블마다 한 쌍씩 앉아 있었지만 여희영이 말한 남자는 없었다.전화를 들어 여희영에게 상대가 기다리다가 지쳐 먼저 돌아간 것은 아닌지 물어보려고 한순간 익숙한 형체를 발견하게 되었다.여이현이 코너를 돌며 2층의 룸으로 올라갔다.밸런타인데이에 귀가하지 않고 이곳에 와서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것일까.온지유의 머릿속에 순간 여러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대부분은 여이현이 바람을 피웠다는 가능성이었다.그녀는 씩씩대며 호텔 안으로 들어간 뒤 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어서 오세요, 몇 분이실까요?”직원이 그녀를 붙잡았다.온지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이 안에 몇 분이 예약되었는지 알려주시면 이 돈을 전부 드리죠.”그녀는 통 크게 돈뭉치를 꺼내 직원에게 주었다. 직원은 눈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을 두 개 펼쳐 보였다.밸런타인데이에 호텔에 혼자 오는 사람은 없었다.그녀는 바로 발을 들어 문을 차버리곤 코웃음을 쳤다.“이현 씨, 즐거운가 봐. 나한테 들켰다고...”뒷말을 이을 수 없었다. 룸 안에 여이현 혼자 있었기 때문이다.온지유는 바로 고개를 돌려 직원에게 따져 물었다.“안에 둘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대표님께선 두 명으로 예약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직 아내 분이 도착하지 않으셨다고...”“이제 가도 됩니다. 여긴 제가 설명하죠.”여이현은 직원에게 물러나라고 하곤 문을 닫으려 했으나 그제야 문이 뜯겨 나갔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내 빙긋 웃었다.“룸을 바꿔야 할 것 같네.”직원은 눈치껏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온지유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다. 바람 피우는 현장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직원은 그녀에게 여이현의 아내가 아직 도착하지 않
“얼른 여이현한테 전화해서 여진을 나한테 넘기라고 말해. 그리고 여씨 가문의 모든 재산도 전부 나한테 주라고 해. 안 그러면 지금 이곳이 곧 너의 무덤이 될 테니까.”여재호는 뒤를 돌아보라는 턱짓을 했다.온지유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이현 씨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거니까 헛된 망상은 그만하시죠.”“여이현이 그러지 않겠다고 하면 널 죽여버리면 돼. 그리고 네 아들을 여기로 잡아 오는 거지. 여이현이 그럼에도 넘기지 않겠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네 아들도 죽이는 거지 뭐.”여재호는 칼을 꺼낸 후 온지유의 앞으로 갔다. 그녀의 턱을 꽉 잡으며 뺨을 때렸다.“가능한 어떻게든 여이현을 설득해야 할 거야. 안 그러면...”서늘한 칼날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온지유는 눈을 가늘게 떴다.여재호는 돈을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런 그가 계속 이 세상에 남는다면 세상은 앞으로 불안만 가득해질 것이다.무언가 떠오른 온지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제가 이현 씨를 설득해볼게요. 그런데 저한테 핸드폰이라도 줘야 설득해보는 거 아닌가요? 핸드폰도 없이 제가 어떻게 말을 해보죠?”여재호는 머릿수가 많다는 이유로 방심하면서 온지유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어차피 산 아래에도 그의 사람들이 깔려 있었으니까.바로 옆 사람에게 지시를 내려 온지유에게 핸드폰을 주었다.자유를 되찾은 온지유는 뻐근한 손목을 돌리며 여이현에게 전화를 거는 척했다.“이현 씨, 나 지금 사방이 무덤인 산에 있어. 얼른 와줘...”“씨X, 지금 날 속여?”여재호는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가 핸드폰을 확 빼앗았다. 온지유는 그를 꽉 끌어안더니 벼랑 끝으로 뛰어내렸다.“야!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여재호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차정혁이 얼른 사람들과 함께 벼랑 끝으로 달려와 내려다보았지만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온지유는 죽지 않았다. 이미 전에 더 험한 일을 당했었던지라 여재호를 상대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여재호가 그 말을 하자마자 그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