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율은 도혁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은 채 그를 차갑게 노려보았다.“모르겠어? 네 비서한테 직접 물어보지 그래?”도혁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배 비서 말하는 거야?”서율은 고개를 돌려 대답하지 않았다.도혁의 표정이 점차 차가워졌고, 그의 날카로운 얼굴은 먹구름이 낀 듯 어두워졌다. 그는 눈앞의 문을 열었다.“문서율 씨, 제가 경고했죠. 또다시 이곳에 나타나서 귀찮게 하면...” 정희는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도혁을 발견하고 말문이 막혔다.“대표님!” 정희는 차가운 표정을 숨긴 채 온화하고 다정한 미소를 보였다. “오셨어요?”도혁은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 “문서율 손에 난 상처, 네가 한 짓이야?”정희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도혁은 어두운 표정으로 다시 한번 물었다.“네가 한 짓이야?”정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뒤 옆에 선 서율의 차가운 표정을 보며 모든 것을 이해한 듯했다.“대표님, 문서율 씨가 또 이곳에 나타나 대표님을 귀찮게 하려는 것 같아서, 제가 대신 내보내드린 것뿐입니다. 그래서...”도혁은 정희의 말을 냉정하게 가로막았다. “내가 언제 이렇게 하라고 시킨 적 있어?”정희는 또 한 번 당황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남자의 차가운 눈빛은 숨이 막힐 듯이 매섭고 무서웠다.“전... 대표님께서 지난 번 서율 씨를 불편해하시던 게 떠올라서... 그래서 제멋대로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도혁의 입가에 웃음기가 살짝 번졌으나, 그 눈빛은 차갑기만 했다“제멋대로 결정을 내린 거라고?”정희는 상황이 점점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걸 느끼며 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저, 저는 그저 대표님께 도움이 되고자 했을 뿐입니다. 다른 의도는 없었어요.”서율이 담담하게 말했다. “변도혁, 굳이 배 비서를 난처하게 할 필요는 없잖아? 매번 배 비서가 나를 내쫓을 때 너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잖아. 네가 동의하고 방관하지 않았다면 배 비서가 나한테 손을 댈 수 있었을까?”서율은 정희를 도우려는
장한성이 도혁의 사무실 문을 열어주자, 도혁은 서율을 품에 안고 사무실로 들어가 소파에 조심스럽게 앉혔다. 그는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지금 당장 내 사무실로 와.”서율은 전화를 끊은 도혁을 힐끔 쳐다보았다.남자의 잘생긴 얼굴이 굳어 있었고, 얇고 매력적인 입술이 꾹 다물려 있었다. 명백히 기분이 나쁜 표정이었다.하지만 대체 뭐가 그렇게 기분 나쁜 건지, 서율은 이해할 수 없었다.오늘 그녀가 겪은 모든 일은 도혁의 책임 때문이 아닌가?“미안해.” 도혁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배 비서가 너한테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어.”서율은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며 어딘가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그래. 네가 몰랐던 일이 참 많거든. 어르신이 날 얼마나 괴롭혔는지, 집안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함부로 대했는지, 그리고 임호석이 나를 모욕한 일까지... 이제는 네 비서까지도 마치 범죄자를 쫓아내듯 나를 대하고 있네.”서율의 목소리는 낮고 가벼웠지만, 그녀의 말은 도혁의 가슴에 깊이 파고들었다.“넌 항상 내가 지민 씨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지민 씨를 괴롭히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잖아.”그러나 진짜로 서율을 괴롭히는 일들은 항상 도혁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지옥순, 임호석, 배정희... 그들은 모두 도혁이 모르는 사이에 서율을 괴롭히고 있었으니까.그리고 도혁이 그 모든 것을 모르는 이유는 간단했다. 애초에, 그는 이에 관심조차 없었다.도혁의 눈빛이 어두워졌고, 그저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을 뿐이었다.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젊은 남자가 의약품 상자를 들고 성큼성큼 사무실로 들어왔다.“변 대표님, 이렇게 급하게 부르시다니... 또 다치신 겁니까?”서율은 들어오는 남자를 보고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는 도혁의 비서인 구태민이었다. 서율은 그가 정희와 친하다는 소문을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도혁은 차갑게 말했다. “발을 삐었고, 손목에 멍이 들었어. 제대로 치료해.”태민의 시선이 서율에게로 향하며
도혁은 물수건을 적셔 서율의 발에 먼저 찜질해주려 했다. 서율은 그가 들고 있던 수건을 받으려 손을 뻗었다.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러나 도혁은 그녀의 손을 피하고 말했다. “움직이지 마.”서율의 발목은 외상이라 뼈에는 이상이 없었지만, 움직일 때마다 통증이 꽤 심했다. 찬 수건이 닿자마자, 서율은 고통에 숨을 들이마셨다. 그 순간 도혁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많이 아파?” “괜찮아.”“태민의 약이 효과가 좋으니까 금방 괜찮아질 거야.” 발 찜질이 끝난 뒤, 도혁은 직접 서율의 발목에 약을 발라주었다. 약이 발리자마자 시원한 느낌이 퍼지며 불같은 통증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 약이 약국에서 파는 약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서율은 도혁의 손길을 쳐다보며 불쑥 말했다. “변도혁, 이건 양심에 찔려서 해주는 보상이야?” 도혁의 손길이 잠시 멈췄더니 눈빛이 서율을 향했다. “그렇게 생각해?” 그럴지도 몰랐디. 결국 서율은 효연에게 밀려 물에 빠져 죽을 뻔했고, 그 이후에는 지옥순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임호석에게 모욕까지 당했으니까. 그러나 서율은 예전엔 이런 일들을 도혁에게 말하지 않은 채 혼자서 견뎌냈다. 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제 보니, 떼를 써야 당연한 대접을 받는 것 같았다. 여자는 때때로 너무 이해심이 많을 필요가 없다. 남을 사랑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서율이 잠시 멍하니 있을 때, 도혁이 말했다. “배 비서 일은 내가 확실하게 처리할게.” 서율은 그의 말에 흥미를 느끼며 시선을 돌렸다. “확실하게 처리한다고?”도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선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이 창백해진 정희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대표님, 정말 죄송합니다.” 정희는 들어오자마자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사과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야.” 도혁은 차갑게 말했다. “인수인계 잘 마치고 나가.” 정희는 놀란 듯이
서율은 고개를 숙인 채 무릎을 꿇고 있는 정희를 쳐다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너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럼 절 용서해 주실 때까지 무릎을 꿇겠습니다.”서율은 가볍게 웃으며 다시 침묵했다. ‘지금 날 협박하는 건가?’예전 같았으면 서율은 정말 이쯤에서 봐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서율의 몸에는 아직도 상처가 그대로 있었고, 정희의 무례함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서율은 남의 잘못을 덮어주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필요가 없었다. 사무실 내의 공기는 점점 무거워졌고, 주변 온도마저 서늘해진 듯했다. 서율이 침묵하자, 도혁 역시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정희는 예상치 못한 서율의 태도에 다급하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도 아무런 통증을 느낄 새도 없이, 정희는 이내 이를 악물고 스스로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서율 씨를 다치게 한 건 제 잘못입니다. 서율 씨가 용서해 주신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철썩!고요한 사무실 안에는 무거운 손바닥 소리가 메아리쳤고, 정희의 뺨에 선명한 자국이 남았다. 서율은 잠시 멍하니 그녀를 쳐다봤다. 정희가 이렇게까지 가혹하게 자신을 대하는 모습은 예상치 못한 광경이었다. 정희는 자신의 뺨을 반복해서 때렸다. 곧 그녀의 입가에 피가 번졌고 양 뺨은 붉게 부어올랐다. 서율은 인상을 찌푸리고 도혁을 쳐다보았다. 정희는 그의 직원이기에, 이 상황은 도혁이 처리해야 할 문제였다. 그러나 도혁의 표정은 한결같이 차갑기만 했다. 그의 정교한 이목구비에는 감정이라곤 전혀 묻어나지 않았고, 고고한 그의 눈빛에는 한 치의 미동조차 없었다. 정희가 계속해서 자신의 뺨을 때리자 서율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됐어요, 이제 그만하세요.”정희는 잠시 멈칫하며 무의석적으로 도혁을 쳐다보았다. 도혁의 차가운 시선은 여전히 서율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화 풀렸어?”서율은 이마를 문지르며 대답했
‘날 이렇게 생각할 줄이야!’ 도혁은 잠시 감정을 억누르고 표정을 가다듬으며 서율을 조용히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내게 조금이라도 호감을 느낀 거야?” 도혁이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자신을 쳐다보자, 서율은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도혁이 비록 매정하긴 하지만, 그의 깊고 계산된 성격과 수단만큼은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는 정말로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였다. 서율은 얼굴이 잘생긴 남자를 좋아했지만, 단지 외모만 보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강하고 능력 있는 남자를 좋아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예전처럼 사랑에 빠져 도혁에게 홀리지 않았을 것이다. 서율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 사이,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혁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들어와.” 문이 열리면서 서류를 든 아름다운 여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사무실에 또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서율 씨도 여기 있었군요.” 들어온 사람을 확인한 서율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도혁을 힐끔 쳐다보았다. 이미 경남을 통해 지민이 HS그룹에 비서로 일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그러나... 서율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가 떠올랐다. 당시 서율은 도혁이가 일에 매진하느라 매일 바쁘게 지내는 것을 보고 안쓰러워하며 도와주겠다고 했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HS그룹에 한가한 사람을 둘 여유는 없어.” 그런데, 댄스를 전공하고 대기업에서의 비서 경험도 없었던 지민은 귀국하자마자 도혁에 의해 HS그룹에 스카우트 되었다. 심지어 정효연까지 HS그룹에서 함께 일하고 있었다. 도혁이 말한 ‘한가한 사람’을 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관심 없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이었을 뿐이었다. 서율은 지민을 흘끗 쳐다보며 담담하게 인사했다. “지민 씨.” 도혁이 방금 자신을 안고 나갔을 때, 지민이 그 장면을 목격한 것 같은데도 지금은 마치 아무
“이제 괜찮아.” 도혁이 냉정하게 말했다. “확실해?” “태민 씨가 별일 아니라고 말했잖아.” “그래서 또 다치려고 해?” 서율은 지민 앞에서 도혁과 이 문제로 다투고 싶지 않아서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거기서 좀 쉬어.” 도혁이 나지막이 말했다. “어디 가고 싶으면, 내가 끝나고 데려다 줄게.”서율은 인상을 찌푸렸다가, 뭐라고 말하려던 찰나에 지민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도혁이가 서율 씨를 많이 걱정되나 봐요. 여기서 조금 더 쉬다 가세요.” 지민은 서율의 아직 붉게 부어 있는 발목을 보며 덧붙였다. “5분만 기다려 줄 수 있죠?”서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더 말을 하면 지민을 일부러 내쫓으려는 의도로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민은 오래 머물지 않고 자리를 떴고, 떠나기 전에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했다. 서율은 도혁의 차가운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변도혁, 정말 이래도 괜찮은 거야?” 도혁은 한쪽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되물었다. “뭐가?” “지민 씨 앞에서 일부러 니한테 이렇게 신경 쓰는 모습 보여주는 거, 지민 씨가 상처받지 않을까?” 도혁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우리 사이에 원래 그런 건 없어.”서율은 도혁이 자신을 진심으로 신경 쓰는 게 아니라, 일부러 지민에게 보여주려고 그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설마... 지민 씨랑 결혼할 생각이 바꿨어?” 도혁은 서율을 흘겨보며 대답했다. “내가 언제 그랬어?”도혁의 태도는 서율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서율은 물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3년 전에 서지민과 결혼하려고 했었잖아?” “그건 3년 전 일이야.”서율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건 3년 전 일이다.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다. 서율은 다시 물었다. “왜 갑자기 결혼할 마음이 없어진 거야?” 도혁은 차갑게 말했다. “내가 이미 결혼했잖아.” “우리가 이혼한 후 서지민과 결혼하
전화가 끊기자 서율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비서조차 자신에게 이런 태도를 보이다니.서율은 자신이 신분을 숨긴 채로 LJ 지점을 인수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게 바로 냉혹한 현실이라는 거겠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회의실 복도를 걷던 서율은, 유미가 성난 얼굴로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서율 씨, 왜 이제 오신 거죠? 변 대표님은 이미 도착하셨어요!” 유미는 잔뜩 불만을 드러내며, 거칠게 서율을 비난했다.서율은 시간을 확인하고 침착하게 말했다. “제가 알기론 회의 시작까지 아직 5분 남았어요. 지각한 건 아닌데요.”그러자 유미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고, 경멸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율 씨는 미리 도착하는 게 기본적인 예의라는 걸 모르시나요?” 서율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정 비서, 지금 절 가르치려고 드는 건가요?”유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줄곧 서율을 못마땅하게 보고 있었다. 서율이 정식 면접 절차를 거치지 않고, 갑자기 회사로 내려온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갑작스레 등장한 인재라면 대단한 실력자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서율이 자신보다 어린 젊은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고선 큰 실망을 느꼈다. 서율은 아름다운 얼굴 외엔 특별한 점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유미는 서율을 보잘것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유미는 여전히 싸늘한 태도로 말했다. “서율 씨는 회사에 오신지 얼마 되지 않으셨으니 익혀야 할 것들이 많을 겁니다. 제 역할은 서율 씨가 빨리 업무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서율이 더 말을 잇기 전,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율 씨, 혹시 도혁을 찾으려고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서율이 고개를 돌리자 지민과 효연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지민은 놀란 듯한 눈빛으로 서율을 바라보며 말했다. “서율 싸, 도혁이는 지금 회의 중이니...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떠세요?”유미는 지민과 효연을 아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서율을 아니꼽게 보던 유미는 이번 일을 계기로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그녀는 차가운 눈빛으로 서율을 노려보며 말했다. “서율 씨, 어떻게 이런 부끄러운 짓을 하실 수 있죠? 만약 소문이라도 나면 얼마나 수치스러울지 모르시나요?” 유미는 더 많은 말을 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서율의 신분을 의식하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오늘 회의에는 들어가지 않는 게 좋겠네요.” 옆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효연은 유미와 서율 사이의 관계를 잘 모르고 있었다. 효연은 유미의 팔짱을 끼며 친근하게 말했다. “정 비서님, 저 여자한테 속지 마세요. 저 여자는 도혁 오빠를 잡으려고 뭐든 다 하는 사람이에요. 옛날에 말이죠, 이런 짓까지 했다니까요...” “효연아.” 지민이 조용히 그녀의 말을 끊었다. “곧 회의가 시작되니까 정 비서님께서 준비하셔야 해. 방해하지 말자.” 효연은 아쉬운 듯 입을 다물었지만, 서율을 향한 비웃음 섞인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효연은 지민의 비서로 회의에 참여할 자격이 없었기에 지민이 준 서류를 받아 들고 물러났다. 그러나 서율은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회의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지민은 그 앞을 가로막았다. 지민은 서율을 향해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서율 씨, 도혁이는 지금 중요한 회의에 참석 중입니다. 그 안에는 회사의 주요 임원들이 모여 있으니, 들어가시면 곤란합니다.” 서율은 눈길을 돌려 유미를 힐끗 보았다. 유미는 그녀가 이 프로젝트의 책임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런 설명 없이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다. 마치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인 양 행동하며 모른 척하는 표정이었다. 그때, 효연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서율에게 다가갔다. “문서율, 네가 쓸데없이 나대는 바람에 HS그룹과 LS그룹의 협력이 끊긴 거야! 이번엔 LJ그룹과 협력하는 자리야. 네가 여기서 사고를 치면, 그 책임을 질 수 있을 것 같아?” 서율은 차분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머니로서 자식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 서율은 도혁의 ‘가식’이 정말로 불쾌했지만, 그가 사람을 달래는 데는 재주가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었다. 심지어 서율도 문미정을 그토록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으니 말이다.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자, 서율의 얼굴에는 차가운 표정이 드리워졌다. “오늘 밤은 다른 곳에서 자. 내일 아침에 엄마한테 네가 일이 있어 먼저 출근했다고 말씀드릴게.” 도혁은 외투를 벗던 중 고개를 들며 눈썹을 살짝 올렸다. “뭐라고?” 서율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동안 도와준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우리가 지금처럼 지내는 간 합당하지 않은 것 같아.” “왜 합당하지 않지?” “우리는 곧 이혼할 사이니까...” 서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혁이 차분히 말을 끊었다. “문서율, 우리 아직 법적으로 부부라는 사실을 잊은 거야?” 서율은 차갑게 말했다. “곧 끝날 관계야.” “문서율.”도혁의 검은 눈동자는 깊고 차가웠다. 그는 서율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이렇게 서둘러 이혼하려는 이유가 뭐지? 다른 사람이라도 생긴 거야?” 서율은 당황한 듯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도혁의 입가에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에는 전혀 웃음기가 없었다. “고지성, 네가 새로 만날 아니야?” 처음에는 황당하게 들렸지만, 서율은 이내 웃음이 나왔다. “정말 어이가 없네!” 서율은 차갑게 도혁을 쳐다보며 말했다. “변도혁, 네가 더러운 짓을 했다고 해서 나도 그런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너처럼 결혼 중에 불륜을 저지를 만큼 뻔뻔하지 않아.” 도혁은 차가운 눈빛으로 서율의 턱을 쥐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지성과는 언제부터 연락을 주고받았던 거야?” 서율은 그의 손을 떨쳐내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너랑 상관없어.” 도혁의 눈빛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도혁은 옆에 있는 안전벨트를 꺼내 그녀에게 채워주었다. 서율은 잠시 얼어붙었다. 곧 도혁의 차갑고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안전벨트 매야지.” 이 광경을 지켜본 문미정은 도혁에게 더욱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율아, 조수석에 타더라도 안전벨트를 매야 한단다. 도혁이가 참 세심하구나.” 문미정이 없었다면, 서율은 아마 비웃었을 것이다. ‘하긴 세심하긴 해. 다른 여자의 물건이 당당하게 조수석에 잡을 정도로.’마치 지민이 그의 아내인 것처럼. 서율은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때 문미정은 도혁에게 슬며시 질문을 던졌다. “도혁아, 예전에 너한테 첫사랑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 사람이 최근에 돌아왔다며?” 문미정의 말에 서율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도혁이가 지민과 함께 어울린다는 건 이미 비밀이 아니었다. 모두 도혁이가 지민에게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문미정이 이 일을 알게 된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반면 도혁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매우 차분하게 인정하며 말했다. “네, 지금 HS그룹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 문미정이 살짝 톤을 올리며 물었다. “그 아가씨가 어쩌다 HS그룹에서 일하게 된 거지?” “지민은 원래 무용을 전공했는데, 저를 구하다 다리를 다쳐 예전처럼 무용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그래서 귀국한 뒤, 제가 HS그룹 내의 가벼운 일을 맡겼습니다. 지민이가 제게 은혜를 베풀었으니, 갚아야 마땅합니다.” 도혁의 말은 매우 합리적이었다. 문미정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서율 역시 그의 말에 딱히 흠잡을 곳을 찾을 수 없었다. 문미정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도혁아, S시에 네가 그 아가씨와 만난다는 소문이 돌던데... 아직 옛 정을 못 잊은 건 아닌지 걱정돼서 물어보는 거란다...” 도혁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저와 지민은 이미 끝난 관계입니다. 제가 서율과 결혼한 이
서율은 두 사람의 표정을 살피며 의아하게 물었다. “나에 대해 묻고 있었다고?” 도혁은 미묘한 눈빛을 보이며 말했다. “우리가 결혼한 지 3년이 되었지만, 고지성 씨만큼 잘 알지는 못하거든. 그래서 고지성 씨께 당신에 대해 좀 더 배우고 싶었어.” 지성과 서율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친구이니, 그들의 오랜 정은 부부 3년의 세월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도혁의 말을 듣자 문미정은 도혁에 대해 고마운 마음이 들었고 지성에 대한 미안함이 들었다. 자신의 경쟁자에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정보를 공유한다는 것은 지성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문미정은 서둘러 말했다. “시간이 늦었구나. 피곤하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지성은 문미정의 앞에서 무언가 더 보여줄 수 없었기에 미소를 지으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차에 타려는 순간, 서율은 문미정과 함께 뒷좌석에 앉으려고 했다. 그때 도혁이 갑자기 조수석 문을 열어 그녀에게 타라고 손짓했다. 서율은 그를 흘깃 쳐다보며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정말 연기 잘하네.’ 결혼한 3년 동안, 도혁은 한 번도 서율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조수석에 앉히지도 않았다. 한 번은 도혁과 함께 지옥순의 생신잔치에 참석할 때, 그녀가 조수석 문을 열고 앉으려 하자, 도혁은 차갑게 말했다. “뒷좌석에 타.” 그 이후로, 서율은 도혁과 함께 외출할 때 조수석에 앉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고, 언제나 뒷좌석에 앉았다. 이제 와서, 서율은 조수석에 앉는 것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벌어진 일로 인해 문미정의 마음은 점차 도혁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아까도 문미정은 서율에게 도혁과 다투지 말라고 계속해서 타일렀다. 문미정이 있는 자리에서 도혁이 그녀에게 문을 열어준 이상, 서율은 그의 체면을 깎지 않기 위해 조수석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안전벨트를 매려던 서율의 눈에 문 앞에 붙은 ‘전용 좌석’이라는 스티커가 들어왔다. 순간 멍하니
문미정은 서율을 쳐다보며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도혁을 데리고 온 건 사실 네가 아닌 도혁을 시험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야. 네가 어릴 때부터 자존심이 강해서 힘든 일이 있어도 우리한테 잘 말하지 않잖니. 그래서 네가 도혁과의 관계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좋은지 의심스러웠거든.” “지성이는 참 괜찮은 아이야. 그동안 여자친구도 사귀지 않고, 부모님께서 아무리 결혼하라고 재촉해도 따르지 않았대. 그건 아마 아직 네가 마음속에 남아 있기 때문일 거야.” “도혁이가 너에게 진심이라면, 지성의 마음을 일찍 정리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서율은 잠시 침묵했다. 서율도 지난번 지성과의 만남에서 그가 여전히 자신에게 미련이 남아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지성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서율은 그를 오빠처럼만 여겼다. 그렇지 않았으면 도혁과 결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도혁과 이혼한다고 해도, 지성과는 이어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지성의 마음을 빨리 정리해주는 게 맞는 일이기도 했다. ... 지성은 계산을 마치자마자 뒤에 서 있는 도혁을 발견했다. 지성은 도혁을 보자마자 표정이 차가워졌다. 그건 서율과 문미정 앞에서 보여준 따뜻한 모습과는 달랐다. “변도혁 씨, 아주머니와 서율이랑 함께 있지 않고 왜 여기 와 있어요?” 도혁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머니께서 지난번에 고지성 씨가 서율을 대접했다는 얘길 듣고, 이번에는 고지성 씨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며 저더러 계산하라고 하셨어요.” 도혁의 말에 담긴 도발을 느낀 지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변도혁 씨, 아무리 연기가 완벽해도 결국엔 연기일 뿐이죠. 아주머니를 속이는 건 몰라도, 나한테 와서 이런 말 하는 건 좀 가식적이지 않나요?” 지성의 비꼼에도 불구하고, 도혁은 전혀 화를 내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연기라도 고지성 씨는 어머님을 어머님이라고 부를 수 없지만, 저는 부를 수
서율은 거짓말이 들통날 상황을 생각하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도혁은 변함없는 표정을 유지하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서율은 순간 당황하여 무의식적으로 도혁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도혁은 오히려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을 밀어 넣으며 열 손가락을 깍지 끼듯 맞잡았다. 서율은 깜짝 놀라며 멍하니 몇 초간 움직이지 못했다. 도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메뉴를 주문했다. 서율은 도혁의 손짓에 온 신경이 쏠려 그가 무엇을 주문하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도혁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도혁은 손을 더 세게 쥐었고 서율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었다. 도혁은 자신이 이 상황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걸 아는 듯, 더욱 장난스럽게 그녀의 손바닥을 간질였다. 서율은 당장이라도 화를 낼 뻔했지만, 간신히 참고 있었고 얼굴은 이미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지성은 서율의 변화를 눈치채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서율아,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졌어? 더운 거야? 에어컨 온도를 좀 더 낮춰줄까?” 서율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지금 온도가 딱 좋아.” 지성은 그녀가 거절하자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도혁도 서율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느낀 듯, 메뉴를 다 고른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서율은 정말이지 그 자리에서 물컵을 들어 도혁의 얼굴에 물을 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지성과 문미정은 그들의 상황을 알아채지 못한 듯, 최근의 일상이나 업무에 대해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며 웨이터가 음식을 가져왔다. 서율은 그제야 자신이 아까 도혁의 손에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메뉴 주문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율의 머릿속은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녀는 이제 문미정에게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웨이터가 가져온 음식을 본 순간, 서율은 할 말을
지성은 문미정과 서율을 보자마자 온화하게 인사를 건넸했다. “아주머니, 서율아.” 곧이어 그의 시선이 함께 온 도혁에게로 향했다. 이미 사전에 이야기를 들은 듯, 지성은 전혀 놀라지 않는 표정이었다. “변도혁 씨, 반갑습니다.” 도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지성 씨, 오랜 만이네요.” 지난번 만남의 기억이 아직 생생했다. 서율은 지성이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준 것에 대해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 일 이후로, 지성과 도혁 사이에는 은근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서율은 두 사람을 만나게 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다시 이렇게 마주치자 머리가 아팠다. 서율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이미 결혼했는데, 엄마가 혹시 아직도 지성 오빠와 나를 이어주려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런 생각이라면, 왜 변도혁까지 데리고 온 걸까?’서율은 무심코 문미정을 흘끗 쳐다보았다. 문미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안심하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문미정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지성이가 예약한 방으로 들어간 네 사람은 각각 자리에 앉았다. 문미정은 먼저 지성의 할아버지와 부모님의 건강에 대해 물었고, 지성은 미소를 지으며 차근차근 대답했다. 이때 웨이터가 메뉴판을 가져와 주문을 부탁했다. 문미정은 메뉴판을 받아 들고 도혁에게 건넸다. “엄마랑 서율이 입맛이 비슷하니까, 서율이가 좋아할 만한 요리를 몇 가지 골라주면 돼.” 서율은 단번에 문미정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문미정은 그들이 연기한 행복한 부부의 모습을 쉽사리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방법으로 그들의 관계를 시험해보려는 것이었다. 도혁이가 서율이 좋아하는 음식을 모른다면, 그들이 친밀한 사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서율은 지난번 식사 때 도혁이가 자신의 취향을 전혀 모르던 상황이 떠올라 마음이 답답해졌다. 아마 이번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모를 것이라 생각
서율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더 이상 도혁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도혁도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기에, 둘은 묵묵히 차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LJ그룹 건물에 도착하자, 서율은 간단히 감사 인사를 건네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로 향했다. ... 사무실에 도착한 서율은 바로 육경남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S시에 온 거 알고 있었어?” 핸드폰 너머에서 경남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들려왔다. [나도 어제 알았어. 엄마가 너 혼자 지내는 게 많이 걱정되셨나 봐. 네가 혹시 힘들어하고 있진 않은지 보러 오신 거래.] 서율은 잠시 머뭇거리다 물었다. “오빠, 나랑 변도혁이 곧 이혼할 거라는 걸 엄마에게 말해야 할까?” 경남은 미소를 머금은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이혼을 결심했다면, 이혼 후에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율은 그의 말에서 뭔가를 느끼고 다시 물었다. “오빠 말은, 지금 이혼한다고 하면 엄마 아빠가 반대할 거라는 뜻이야?” 경남의 목소리에는 가벼운 웃음이 담겨 있었다. [엄마 아빠는 그렇게 완고한 분들이 아니야. 하지만 네가 이혼을 하겠다고 하면 당연히 이유를 물어보시겠지. 단순히 성격 차이라고 말하고 넘기려는 건 거의 불가능할 거야.][네 잘못이라면 엄마 아빠는 결혼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며 널 혼낼 거야. 반대로 도혁의 잘못이라면, 엄마 아빠가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잖아.][게다가 변도혁이 이혼에 동의할지도 의문이야. 내가 보기엔 네 남편, 그렇게 쉽게 물러날 사람은 아니야. 변도혁이 진지하게 나오면 너 혼자 상대하기 어려울지도 몰라.] 경남의 말에 서율은 아침에 도혁이 자신을 유혹하려던 장면이 떠오르며 마음이 더 답답해졌다. 서율은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 “오빠, 엄마 보러 안 올 거야?” [이미 엄마랑 통화했어. 변도혁은 네가 누구인지 아직 모르는 것 같아서, 그 문제로 싸울까 봐 당분간 나서지 말자고 하시더라.] S시에 오기 전까지 경남은 부모와 함께
서율은 발걸음을 잠시 멈춘 뒤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무슨 일이야?” 서율은 그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지만, 표정은 완벽하게 차분함을 유지했다. 도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데려다 줄게.” “괜찮아.” 서율은 자기도 모르게 거절했다. “혼자 가도 돼.” “율아, 도혁이가 너를 데려다주겠다고 하니, 그냥 그렇게 해.” 문미정은 옆에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부는 서로 미워할 시간이 없단다.” 문미정은 서율이 도혁에게 서운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두 사람이 다투었다고 오해한 듯했다. 서율은 거절하고 싶었지만, 문미정의 기대 어린 눈빛을 보고 차마 더 이상 거절하지 못했다. 집을 나서려는 순간, 도혁이 서율의 손을 잡았다. 서율은 깜짝 놀라며 표정이 굳어졌다. “변도혁, 지금 뭐 하는 거야?” 도혁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렇게 해야 어머니가 우리가 잘 지낸다고 믿으실 거야.” 그 말이 맞긴 했지만, 서율은 방금 일어난 일 때문인지 도혁에게 더 거부감이 들었다. 서율은 그의 손을 몇 번이나 뿌리치려 했지만, 도혁은 손을 놓지 않았다. 문미정이 뒤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서 서율은 더 이상 무리하게 저항할 수 없었기에 결국 도혁의 손을 잡고 집 밖으로 나왔다. 서율은 도혁과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도혁은 여태껏 한 번도 서율의 손을 잡은 적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손을 잡는 것은 서율에게는 처음이었다. 너무나도 가까운 스킨십이었기에,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문미정은 현관까지 나와 그들이 손을 맞잡고 떠나는 모습을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차에 타자마자, 서율은 도혁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차갑게 말했다. “변도혁, 약속을 어겼네.” 도혁은 살짝 긴 속눈썹을 움직이며 서율을 보았다. “뭐?” 도혁이 모르는 척하자 서율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어젯밤에 나랑 약속했잖아. 나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똑똑. 그때 갑자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율아, 엄마가 아침 준비 다 했으니 얼른 내려와서 아침 먹어.” 서율은 문미정의 목소리를 듣고 당황하며 황급히 옷의 단추를 채웠다. 그녀는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도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잡아주려 했다. 그러나 서율은 그의 손길을 피했다. 이 방에선 단 1초도 더 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서율이 답을 하지 않자, 문 밖에 있던 문미정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듯했다. “율아, 일어났니? 빨리 안 일어나면 회사 늦겠어...”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엄마, 방금 일어났어요. 세수하고 금방 내려갈게요.” 서율의 모습을 본 문미정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서율은 옷매무새가 엉망이었고, 입술은 붉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상황을 알아차린 문미정은 얼굴이 빨개지며 서율보다 더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너 출근 늦을까 봐 깨우러 왔지 뭐야... 어, 어서 준비해. 엄마는 먼저 내려갈게!” 그렇게 말하고는 도망치듯 떠났다. 서율이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 도혁은 이미 옷을 다 입고 평소처럼 평온하고 깔끔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도혁은 서율이가 돌아온 것을 보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씻고 와. 난 먼저 내려가 있을게.” 서율은 그와 대화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녀는 급히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도혁은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보더니 방을 나섰다. 그가 떠난 후, 서율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엉망진창인 모습을 확인했다. 붉게 부어오른 입술, 잘못 잠근 셔츠 단추,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카락. 문미정이 자신을 보고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서율은 수치심에 눈을 질끈 감았다. 눈만 감으면 도혁과의 아찔한 순간이 떠올랐고, 그 기억이 그녀를 괴롭혔다. 만약 문미정이 문을 두드리지 않았더라면,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