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그래도 서율을 아니꼽게 보던 유미는 이번 일을 계기로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그녀는 차가운 눈빛으로 서율을 노려보며 말했다. “서율 씨, 어떻게 이런 부끄러운 짓을 하실 수 있죠? 만약 소문이라도 나면 얼마나 수치스러울지 모르시나요?” 유미는 더 많은 말을 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서율의 신분을 의식하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오늘 회의에는 들어가지 않는 게 좋겠네요.” 옆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효연은 유미와 서율 사이의 관계를 잘 모르고 있었다. 효연은 유미의 팔짱을 끼며 친근하게 말했다. “정 비서님, 저 여자한테 속지 마세요. 저 여자는 도혁 오빠를 잡으려고 뭐든 다 하는 사람이에요. 옛날에 말이죠, 이런 짓까지 했다니까요...” “효연아.” 지민이 조용히 그녀의 말을 끊었다. “곧 회의가 시작되니까 정 비서님께서 준비하셔야 해. 방해하지 말자.” 효연은 아쉬운 듯 입을 다물었지만, 서율을 향한 비웃음 섞인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효연은 지민의 비서로 회의에 참여할 자격이 없었기에 지민이 준 서류를 받아 들고 물러났다. 그러나 서율은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회의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지민은 그 앞을 가로막았다. 지민은 서율을 향해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서율 씨, 도혁이는 지금 중요한 회의에 참석 중입니다. 그 안에는 회사의 주요 임원들이 모여 있으니, 들어가시면 곤란합니다.” 서율은 눈길을 돌려 유미를 힐끗 보았다. 유미는 그녀가 이 프로젝트의 책임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런 설명 없이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다. 마치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인 양 행동하며 모른 척하는 표정이었다. 그때, 효연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서율에게 다가갔다. “문서율, 네가 쓸데없이 나대는 바람에 HS그룹과 LS그룹의 협력이 끊긴 거야! 이번엔 LJ그룹과 협력하는 자리야. 네가 여기서 사고를 치면, 그 책임을 질 수 있을 것 같아?” 서율은 차분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효연은 도혁을 보자마자 서율을 가리키며 그에게 바로 불평을 늘어놓았다.“도혁 오빠, 회의가 곧 시작될 텐데 이 여자가 억지로 회의실에 들어가려고 했어요! 지민이가 회의가 끝난 후에 얘기하라고 설득했는데도 전혀 말을 듣지 않더라구요! 들어가면 회의에 방해될까 봐 제가 막았는데, 오히려 저를 밀쳐서 넘어지게 했어요!”효연은 도혁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까 봐 서둘러 덧붙였다. “지민과 정 비서님도 다 보셨어요. 못 믿으시겠다면 두 사람한테 물어보세요!”도혁의 눈길이 서율에게로 향했다. “날 찾아온 이유가 뭐지? 중요한 일이라도 있는 거야?”그의 말투는 차분하고 냉정했지만, 예전처럼 서율의 행동에 대해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말을 걸어오는 점에서 약간의 변화가 느껴졌다. 하지만 서율은 비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겉으로는 차분해 보였지만, 그의 말투에서 효연의 말을 어느 정도는 믿고 있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때문에 서율은 도혁에게조차 시선을 주고 싶지 않았다.서율은 아무 말 없이 회의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회의실 앞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손목이 도혁에게 붙잡혔다.서율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손 놔.”“문서율, 대체 왜 이러는 거야?”서율은 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변도혁, 손 놓으라고.”도혁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문서율...”서율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도혁의 손을 힘껏 밀어내며 그에게서 벗어났다. 감정이 북받쳐 오른 서율은 의도치 않게 힘을 꽤나 세게 줬고, 도혁은 잠시 균형을 잃고 물러섰다. 그가 다시 서율을 잡으려던 찰나, 그의 시선이 서율의 손목에 남은 멍 자국에 닿았다. 그 순간, 도혁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도혁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서율은 이미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효연은 이를 놓칠세라 토끼처럼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뒤쫓았다. 지민이 급히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서율이 회의실에 들어서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일부 임원
도혁은 어두운 눈빛으로 효연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예전처럼 서율의 말을 거짓으로 여기지 않고, 옆에 있는 정유미에게 물었다.“정 비서, 사실인가요?”유미는 주위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문서율이 변 대표의 아내라니!’ ‘그럼 문서율이 LJ그룹에 온 건 육 대표 덕분이 아니라 변 대표와의 관계 때문인 거야?’ 이런 생각에 서율에 대한 경멸과 더불어 강한 질투심이 불타올랐다. ‘정말 운 좋은 여자네.’유미는 서율을 공개적으로 망신 주고 싶었지만, 이곳에서 사실을 왜곡했다간 자신의 입장이 위험해질 것을 알았다. 유미는 결국 표정을 굳히며 인정했다.“네, 문서율 씨가 이번 LJ그룹 프로젝트의 새로운 책임자입니다.”회의실 안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며 숨을 죽였다. 그저 겉모습만 그럴듯한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서율이가 어떻게 갑자기 LJ그룹의 중요한 프로젝트 책임자가 된 건지 의심스러웠다.어떤 이들은 서율의 배후에 도혁이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그래서 모두 유미처럼 서율의 실력을 의심하고 있었다.서율은 사람들의 반응을 하나하나 살피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그들의 의심과 비난에 흔들리지 않았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 걸 진작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원래 여자가 잘나가면 별의별 소문이 뒤따르는 법이다. 마치 여자는 태어나서부터 약자라고 생각하는 것처럼.그들의 입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실력으로 그들의 편견을 뒤집어버리는 것뿐이었다.효연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서율을 쳐다보며 비아냥거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민이 그녀를 막으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효연은 마지못해 멈춰 섰고, 도혁이 서율의 옆에 앉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도혁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그럼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죠.”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몇몇 고위 임원들의 시선은 서율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서율은 그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차분히 회의 내용을 경청했다. 그녀는 발언을
서율은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뭘 설명해야 하지?”“네가 무슨 수로 LJ그룹의 책임자가 된 거지?”“그게 이상한 일인가?” 서율은 도혁을 쳐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결혼한 뒤로는 밖에서 일하지 않았지만, 결혼하기 전에 한가하게 집에만 있었을 리가 없잖아. 안 그래?”도혁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네가 어떻게 LJ그룹의 책임자가 된 거지?”도혁도 잘 알고 있었다. LJ그룹 같은 최상위급 회사는 채용 기준이 SH그룹보다도 더 까다롭다는 것을. 그런 곳에 서율이 입사했다니, 그것도 젊은 나이에. 서율은 도혁의 생각을 알아차리고는 미소 지었다. “당연히 내 조건이 LJ그룹 대표님이 찾던 요구에 맞았기 때문에 LJ그룹에 들어간 거겠지. 육 대표님이 날 아무 이유 없이 도와줄 리가 없잖아. 안 그래?”도혁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깊어졌다. 그는 경남이 업무에 있어서는 공정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서율이 입사하자마자 그렇게 높은 자리에 오르는 건 이해하기 어려웠다.“회사 업무에 대해 공부를 했었어?” 서율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부를 하지 않았으면 LJ그룹에서 일할 수 없었겠지.”“왜 한 번도 얘기한 적 없었지?”서율은 되물었다. “네가 한 번이라도 물어본 적 있었어?”그 순간, 도혁은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자신이 서율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율의 과거는 물론 그녀의 가족 관계조차 모르고 있었다. 도혁은 자신이 그녀에 대해 궁금해한 적조차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서율은 도혁의 마음속 갈등을 꿰뚫어 보았지만 화내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변도혁, 우리가 결혼한 이후에 내가 SH그룹에 가서 도와주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네가 거절했었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내가 얘기하지 않았다고 탓하는 거야? 정말 우습네.”서율은 도혁을 돕기 위해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도혁은 그녀가 일을 핑계로 자신에게 들러붙으려 한다고 생각했다.
서율은 무심하게 말했다. “내가 먼저 그여자를 끌어들인 적은 없어. 그여자가 내 자리를 차지하려고 날 붙잡고 늘어나는 거지.”도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민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서율은 지민의 이야기가 나오면 늘 도혁이가 다른 사람으로 변한 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주성철 사건 이후에도 여전히 지민을 그토록 신뢰하고 감싸는 모습을 보니, 서율의 가슴이 답답해졌다. 더 이상 지민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던 서율은 도혁을 뒤로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LJ그룹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유미는 쉴 새 없이 서율을 비난하고 있었다. “서율 씨, 손님으로서 마지막에 도착해 SH그룹 직원들더러 기다리게 만든 건 매우 무례한 행동이에요.”“서율 씨가 변 대표님의 부인이라는 건 알지만,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아셔야죠. 서율 씨는 LJ그룹을 대표하고 있잖아요.”“오늘 서율 씨의 모든 행동이 LJ그룹의 이미지를 깎아먹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일하러 SH그룹에 간 거지, 애정행각을 벌이러 간 게 아니라고요! 다음에도 이런 순수하지 못한 의도로 움직인다면... 앞으로는 SH그룹에 가지 않으시는 게 좋을 거예요!”순간 차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서율은 무심하게 말했다. “기사님, 제가 누군가요?”앞좌석에서 운전하던 기사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LJ그룹에서 일하는 만큼 그도 보통 기사가 아니었다. 눈치가 빠른 기사는 서율의 의도를 곧바로 알아챘다. “서율 씨는 LJ그룹의 부장님이십니다.”서율은 다시 물었다. “그럼, 정유미 씨는 누구죠?”“정유미 씨는 문 부장님의 비서입니다.”서율은 고개를 돌려 유미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정 비서님은 무슨 자격으로 나를 훈계하고, 비난하는 거죠?”유미는 자신의 위치를 자각했는지,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서율 씨가 새로 오셔서 업무 흐름을 잘 모르실 것 같아서... 그냥 알려드린 겁니다.”서율의 눈빛은 차갑기만 했다. “제가 한 행동이 망신
SH그룹.장한성은 조사된 자료를 모두 도혁에게 건넸다.“대표님, 이 안에 사모님에 대한 모든 자료가 담겨 있습니다.”도혁은 몇 페이지를 넘기다 눈썹을 약간 찌푸리며 물었다.“이게 전부인가?”한성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네...”‘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은데?’ 한성은 속으로 중얼거렸다.서율은 세계 상위 3위에 드는 명문 대학을 졸업했다. 학업 성적이 우수해 조기 진급을 거듭한 끝에, 18세에 LJ그룹에 입사해 최하위직부터 시작했다. 서율은 불과 1년 만에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아 큰 성과를 이루며 승진했고, 이후에는 그녀의 화려한 성과들이 이어졌다.도혁은 차분히 서율의 경력을 살펴보며 어두운 표정을 보였다. 짧은 시간 내에 이렇게 뛰어난 실적을 쌓으며 고위직까지 따내다니. 도혁은 그녀가 훌륭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지사 부장을 넘어 본사 부장 자리도 충분히 경쟁할 자격이 있었다. 그 다음으로 이어진 서율의 경력란은 공백이었다. 그 공백은 바로 그와 결혼하면서 생긴 것이었다. 도혁은 서율의 가족관계 부분에 시선을 멈췄다.“가족 관계는 이것뿐인가?”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사해본 결과, 사모님의 부모님과 오빠분은 해외에 계신 듯합니다. 사모님도 S시에서 자란 분이 아니기에 확인할 수 있는 정보는 이것들이 전부입니다...”‘항상 사모님에 대해 무심하시더니 왜 갑자기 사모님 자료를 조사하시는 거지?’도혁은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이만 나가 봐.”한성은 가볍게 대답한 뒤 조용히 사무실을 나섰다....며칠 전 서율에게 단단히 혼이 난 유미는 그 후로 서율의 지시에 맞춰 성실히 일했고, 그녀 앞에서 더 이상 무례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서율은 일을 마치고 오후 일정표를 살펴보며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경남이가 이곳에서 지사를 세운 목적은 HS그룹과의 협력을 통해 S시에서 사업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이를 발판 삼아 Z국에서 입지를 다지는 것이다. 현재 LJ그룹의 가장 큰 프로젝트는
지민은 역시 다른 비서들과는 달랐다. 단순한 비서임에도 불구하고, 도혁이 직접 데리고 다니며 신경을 쓰고 있었다. 서율은 지민이 건넨 자료를 받으며 담담하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지민은 잠시 눈을 내리깔아, 서율을 향한 묘한 시선을 숨겼다. 요즘 서율은 엄청 주목을 받고 있다. 게다가 대체 무슨 수를 써서 그 자리에 오른 건지 알 수조차 없었다.지민은 오늘 이 자리에서 도혁을 포함한 모든 협력사들에게 서율의 실력을 드러내, 그녀가 얼마나 부적합한 사람인지 증명해 보일 작정이었다.회의 참석자들은 각자 손에 든 자료를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지민은 정상적인 업무 순서를 따라 미소를 띠며 설명했다. “문 부장님께서 SH그룹과의 협업 전략을 소개해 주시죠.”서율은 방금 받은 자료를 들고 일어나 설명을 시작하려다, 그 내용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놀람과 당혹감이 어렸다.서율이 받은 문서는 전부 C국말로 작성된 기획서였다.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한 해외 협력사 중에는 C국에서 온 기업도 포함되어 있었다. 비록 C국이 큰 나라는 아니지만, 이번 사업에서 그들의 자원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다만, C국말은 세계 공용어도 아니며, 특유의 소수 언어로 분류되는 편이었다.이 세상에는 수백 개의 언어가 있다. 그 모두를 마스터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설령 언어를 이해한다고 해도, 문서 속 전문 용어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상당한 자료 조사가 필요하다.서율은 차가운 눈빛으로 지민을 쳐다보았다. 지민은 그 시선을 알아차린 뒤 다소 놀란 척 물었다. “문 부장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서율은 잠시 말이 없었다. 참석자들 또한 이상함을 느끼고 그녀를 쳐다보기 시작했다.“어떻게 된 거지? 왜 소개를 안 하는 거야? 설마 이 문서를 이해 못 하는 건 아니겠지?” “기획서도 못 읽으면서 여기 왜 앉아 있는 거지? 장난치러 왔나?”서율은 LJ그룹의 새 부장으로, 다들 그녀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어린 나이와 낯선 얼굴 덕분에 모두 서
그러나 차분하면서도 또렷한 목소리가 회의실에 먼저 울려 퍼졌다. 여자의 목소리는 마치 아나운서처럼 정확하고 듣기 좋아 사람들을 매료시켰다.처음엔 여유롭게 미소 짓고 있던 지민의 표정이 시간이 지날수록 경악으로 바뀌었다. C국말이 생소한 언어라 이를 아는 사람이 드물다는 걸 알기에, 그녀는 위험을 무릅쓰고 서율의 서류를 몰래 바꿔치기한 것이었다. 서율이 계획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중간에 실수를 한다면, ‘능력 부족’으로 낙인찍혀 명성이 크게 실추될 거라 생각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서율은 완벽하게 C국말로 내용을 설명하고 있었다.서율은 발표를 마친 후 주위를 둘러보더니 차분하게 물었다. “이 계획안에 대해 의견 있으신 분 계신가요?”참석자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잠깐 논의했지만,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서율은 돌아서서 다른 말을 하려다가 도혁의 깊고도 강렬한 눈빛과 마주쳤다. 도혁은 마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풀 듯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서율은 곧 무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이 자리에서 자신이 받은 자료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말한들 얻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능한 사람은 항상 예상치 못한 상황도 완벽히 대처해야지, 남에게 문제를 떠넘기며 스스로의 무능함을 드러내는 일은 하지 않는다. 지민이 이걸 노리고 일을 꾸민 것이리라.지민은 충격에 빠진 눈빛으로 서율을 쳐다보고 있었다. 비서팀에서도 C국말 번역을 위해 일주일이나 걸렸을 만큼 복잡한 문서였다. 일부 전문 용어는 사전을 찾아가며 겨우 번역할 수 있었다.지민은 서율이가 망신당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는데 서율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 상황을 넘겼다.지민은 이를 부서질 듯이 악물고 있었다.아무도 이 사실을 모른 채 회의는 예정대로 끝나고 사람들은 차례로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때 서율이 서류를 손에 든 채 담담하게 말했다. “서 비서님, 제 사무실로 잠깐 오시죠.”이 말을 들은 도혁이 바로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
어머니로서 자식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 서율은 도혁의 ‘가식’이 정말로 불쾌했지만, 그가 사람을 달래는 데는 재주가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었다. 심지어 서율도 문미정을 그토록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으니 말이다.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자, 서율의 얼굴에는 차가운 표정이 드리워졌다. “오늘 밤은 다른 곳에서 자. 내일 아침에 엄마한테 네가 일이 있어 먼저 출근했다고 말씀드릴게.” 도혁은 외투를 벗던 중 고개를 들며 눈썹을 살짝 올렸다. “뭐라고?” 서율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동안 도와준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우리가 지금처럼 지내는 간 합당하지 않은 것 같아.” “왜 합당하지 않지?” “우리는 곧 이혼할 사이니까...” 서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혁이 차분히 말을 끊었다. “문서율, 우리 아직 법적으로 부부라는 사실을 잊은 거야?” 서율은 차갑게 말했다. “곧 끝날 관계야.” “문서율.”도혁의 검은 눈동자는 깊고 차가웠다. 그는 서율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이렇게 서둘러 이혼하려는 이유가 뭐지? 다른 사람이라도 생긴 거야?” 서율은 당황한 듯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도혁의 입가에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에는 전혀 웃음기가 없었다. “고지성, 네가 새로 만날 아니야?” 처음에는 황당하게 들렸지만, 서율은 이내 웃음이 나왔다. “정말 어이가 없네!” 서율은 차갑게 도혁을 쳐다보며 말했다. “변도혁, 네가 더러운 짓을 했다고 해서 나도 그런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너처럼 결혼 중에 불륜을 저지를 만큼 뻔뻔하지 않아.” 도혁은 차가운 눈빛으로 서율의 턱을 쥐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지성과는 언제부터 연락을 주고받았던 거야?” 서율은 그의 손을 떨쳐내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너랑 상관없어.” 도혁의 눈빛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도혁은 옆에 있는 안전벨트를 꺼내 그녀에게 채워주었다. 서율은 잠시 얼어붙었다. 곧 도혁의 차갑고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안전벨트 매야지.” 이 광경을 지켜본 문미정은 도혁에게 더욱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율아, 조수석에 타더라도 안전벨트를 매야 한단다. 도혁이가 참 세심하구나.” 문미정이 없었다면, 서율은 아마 비웃었을 것이다. ‘하긴 세심하긴 해. 다른 여자의 물건이 당당하게 조수석에 잡을 정도로.’마치 지민이 그의 아내인 것처럼. 서율은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때 문미정은 도혁에게 슬며시 질문을 던졌다. “도혁아, 예전에 너한테 첫사랑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 사람이 최근에 돌아왔다며?” 문미정의 말에 서율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도혁이가 지민과 함께 어울린다는 건 이미 비밀이 아니었다. 모두 도혁이가 지민에게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문미정이 이 일을 알게 된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반면 도혁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매우 차분하게 인정하며 말했다. “네, 지금 HS그룹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 문미정이 살짝 톤을 올리며 물었다. “그 아가씨가 어쩌다 HS그룹에서 일하게 된 거지?” “지민은 원래 무용을 전공했는데, 저를 구하다 다리를 다쳐 예전처럼 무용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그래서 귀국한 뒤, 제가 HS그룹 내의 가벼운 일을 맡겼습니다. 지민이가 제게 은혜를 베풀었으니, 갚아야 마땅합니다.” 도혁의 말은 매우 합리적이었다. 문미정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서율 역시 그의 말에 딱히 흠잡을 곳을 찾을 수 없었다. 문미정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도혁아, S시에 네가 그 아가씨와 만난다는 소문이 돌던데... 아직 옛 정을 못 잊은 건 아닌지 걱정돼서 물어보는 거란다...” 도혁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저와 지민은 이미 끝난 관계입니다. 제가 서율과 결혼한 이
서율은 두 사람의 표정을 살피며 의아하게 물었다. “나에 대해 묻고 있었다고?” 도혁은 미묘한 눈빛을 보이며 말했다. “우리가 결혼한 지 3년이 되었지만, 고지성 씨만큼 잘 알지는 못하거든. 그래서 고지성 씨께 당신에 대해 좀 더 배우고 싶었어.” 지성과 서율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친구이니, 그들의 오랜 정은 부부 3년의 세월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도혁의 말을 듣자 문미정은 도혁에 대해 고마운 마음이 들었고 지성에 대한 미안함이 들었다. 자신의 경쟁자에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정보를 공유한다는 것은 지성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문미정은 서둘러 말했다. “시간이 늦었구나. 피곤하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지성은 문미정의 앞에서 무언가 더 보여줄 수 없었기에 미소를 지으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차에 타려는 순간, 서율은 문미정과 함께 뒷좌석에 앉으려고 했다. 그때 도혁이 갑자기 조수석 문을 열어 그녀에게 타라고 손짓했다. 서율은 그를 흘깃 쳐다보며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정말 연기 잘하네.’ 결혼한 3년 동안, 도혁은 한 번도 서율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조수석에 앉히지도 않았다. 한 번은 도혁과 함께 지옥순의 생신잔치에 참석할 때, 그녀가 조수석 문을 열고 앉으려 하자, 도혁은 차갑게 말했다. “뒷좌석에 타.” 그 이후로, 서율은 도혁과 함께 외출할 때 조수석에 앉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고, 언제나 뒷좌석에 앉았다. 이제 와서, 서율은 조수석에 앉는 것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벌어진 일로 인해 문미정의 마음은 점차 도혁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아까도 문미정은 서율에게 도혁과 다투지 말라고 계속해서 타일렀다. 문미정이 있는 자리에서 도혁이 그녀에게 문을 열어준 이상, 서율은 그의 체면을 깎지 않기 위해 조수석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안전벨트를 매려던 서율의 눈에 문 앞에 붙은 ‘전용 좌석’이라는 스티커가 들어왔다. 순간 멍하니
문미정은 서율을 쳐다보며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도혁을 데리고 온 건 사실 네가 아닌 도혁을 시험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야. 네가 어릴 때부터 자존심이 강해서 힘든 일이 있어도 우리한테 잘 말하지 않잖니. 그래서 네가 도혁과의 관계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좋은지 의심스러웠거든.” “지성이는 참 괜찮은 아이야. 그동안 여자친구도 사귀지 않고, 부모님께서 아무리 결혼하라고 재촉해도 따르지 않았대. 그건 아마 아직 네가 마음속에 남아 있기 때문일 거야.” “도혁이가 너에게 진심이라면, 지성의 마음을 일찍 정리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서율은 잠시 침묵했다. 서율도 지난번 지성과의 만남에서 그가 여전히 자신에게 미련이 남아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지성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서율은 그를 오빠처럼만 여겼다. 그렇지 않았으면 도혁과 결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도혁과 이혼한다고 해도, 지성과는 이어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지성의 마음을 빨리 정리해주는 게 맞는 일이기도 했다. ... 지성은 계산을 마치자마자 뒤에 서 있는 도혁을 발견했다. 지성은 도혁을 보자마자 표정이 차가워졌다. 그건 서율과 문미정 앞에서 보여준 따뜻한 모습과는 달랐다. “변도혁 씨, 아주머니와 서율이랑 함께 있지 않고 왜 여기 와 있어요?” 도혁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머니께서 지난번에 고지성 씨가 서율을 대접했다는 얘길 듣고, 이번에는 고지성 씨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며 저더러 계산하라고 하셨어요.” 도혁의 말에 담긴 도발을 느낀 지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변도혁 씨, 아무리 연기가 완벽해도 결국엔 연기일 뿐이죠. 아주머니를 속이는 건 몰라도, 나한테 와서 이런 말 하는 건 좀 가식적이지 않나요?” 지성의 비꼼에도 불구하고, 도혁은 전혀 화를 내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연기라도 고지성 씨는 어머님을 어머님이라고 부를 수 없지만, 저는 부를 수
서율은 거짓말이 들통날 상황을 생각하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도혁은 변함없는 표정을 유지하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서율은 순간 당황하여 무의식적으로 도혁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도혁은 오히려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을 밀어 넣으며 열 손가락을 깍지 끼듯 맞잡았다. 서율은 깜짝 놀라며 멍하니 몇 초간 움직이지 못했다. 도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메뉴를 주문했다. 서율은 도혁의 손짓에 온 신경이 쏠려 그가 무엇을 주문하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도혁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도혁은 손을 더 세게 쥐었고 서율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었다. 도혁은 자신이 이 상황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걸 아는 듯, 더욱 장난스럽게 그녀의 손바닥을 간질였다. 서율은 당장이라도 화를 낼 뻔했지만, 간신히 참고 있었고 얼굴은 이미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지성은 서율의 변화를 눈치채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서율아,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졌어? 더운 거야? 에어컨 온도를 좀 더 낮춰줄까?” 서율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지금 온도가 딱 좋아.” 지성은 그녀가 거절하자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도혁도 서율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느낀 듯, 메뉴를 다 고른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서율은 정말이지 그 자리에서 물컵을 들어 도혁의 얼굴에 물을 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지성과 문미정은 그들의 상황을 알아채지 못한 듯, 최근의 일상이나 업무에 대해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며 웨이터가 음식을 가져왔다. 서율은 그제야 자신이 아까 도혁의 손에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메뉴 주문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율의 머릿속은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녀는 이제 문미정에게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웨이터가 가져온 음식을 본 순간, 서율은 할 말을
지성은 문미정과 서율을 보자마자 온화하게 인사를 건넸했다. “아주머니, 서율아.” 곧이어 그의 시선이 함께 온 도혁에게로 향했다. 이미 사전에 이야기를 들은 듯, 지성은 전혀 놀라지 않는 표정이었다. “변도혁 씨, 반갑습니다.” 도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지성 씨, 오랜 만이네요.” 지난번 만남의 기억이 아직 생생했다. 서율은 지성이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준 것에 대해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 일 이후로, 지성과 도혁 사이에는 은근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서율은 두 사람을 만나게 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다시 이렇게 마주치자 머리가 아팠다. 서율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이미 결혼했는데, 엄마가 혹시 아직도 지성 오빠와 나를 이어주려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런 생각이라면, 왜 변도혁까지 데리고 온 걸까?’서율은 무심코 문미정을 흘끗 쳐다보았다. 문미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안심하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문미정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지성이가 예약한 방으로 들어간 네 사람은 각각 자리에 앉았다. 문미정은 먼저 지성의 할아버지와 부모님의 건강에 대해 물었고, 지성은 미소를 지으며 차근차근 대답했다. 이때 웨이터가 메뉴판을 가져와 주문을 부탁했다. 문미정은 메뉴판을 받아 들고 도혁에게 건넸다. “엄마랑 서율이 입맛이 비슷하니까, 서율이가 좋아할 만한 요리를 몇 가지 골라주면 돼.” 서율은 단번에 문미정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문미정은 그들이 연기한 행복한 부부의 모습을 쉽사리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방법으로 그들의 관계를 시험해보려는 것이었다. 도혁이가 서율이 좋아하는 음식을 모른다면, 그들이 친밀한 사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서율은 지난번 식사 때 도혁이가 자신의 취향을 전혀 모르던 상황이 떠올라 마음이 답답해졌다. 아마 이번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모를 것이라 생각
서율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더 이상 도혁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도혁도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기에, 둘은 묵묵히 차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LJ그룹 건물에 도착하자, 서율은 간단히 감사 인사를 건네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로 향했다. ... 사무실에 도착한 서율은 바로 육경남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S시에 온 거 알고 있었어?” 핸드폰 너머에서 경남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들려왔다. [나도 어제 알았어. 엄마가 너 혼자 지내는 게 많이 걱정되셨나 봐. 네가 혹시 힘들어하고 있진 않은지 보러 오신 거래.] 서율은 잠시 머뭇거리다 물었다. “오빠, 나랑 변도혁이 곧 이혼할 거라는 걸 엄마에게 말해야 할까?” 경남은 미소를 머금은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이혼을 결심했다면, 이혼 후에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율은 그의 말에서 뭔가를 느끼고 다시 물었다. “오빠 말은, 지금 이혼한다고 하면 엄마 아빠가 반대할 거라는 뜻이야?” 경남의 목소리에는 가벼운 웃음이 담겨 있었다. [엄마 아빠는 그렇게 완고한 분들이 아니야. 하지만 네가 이혼을 하겠다고 하면 당연히 이유를 물어보시겠지. 단순히 성격 차이라고 말하고 넘기려는 건 거의 불가능할 거야.][네 잘못이라면 엄마 아빠는 결혼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며 널 혼낼 거야. 반대로 도혁의 잘못이라면, 엄마 아빠가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잖아.][게다가 변도혁이 이혼에 동의할지도 의문이야. 내가 보기엔 네 남편, 그렇게 쉽게 물러날 사람은 아니야. 변도혁이 진지하게 나오면 너 혼자 상대하기 어려울지도 몰라.] 경남의 말에 서율은 아침에 도혁이 자신을 유혹하려던 장면이 떠오르며 마음이 더 답답해졌다. 서율은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 “오빠, 엄마 보러 안 올 거야?” [이미 엄마랑 통화했어. 변도혁은 네가 누구인지 아직 모르는 것 같아서, 그 문제로 싸울까 봐 당분간 나서지 말자고 하시더라.] S시에 오기 전까지 경남은 부모와 함께
서율은 발걸음을 잠시 멈춘 뒤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무슨 일이야?” 서율은 그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지만, 표정은 완벽하게 차분함을 유지했다. 도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데려다 줄게.” “괜찮아.” 서율은 자기도 모르게 거절했다. “혼자 가도 돼.” “율아, 도혁이가 너를 데려다주겠다고 하니, 그냥 그렇게 해.” 문미정은 옆에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부는 서로 미워할 시간이 없단다.” 문미정은 서율이 도혁에게 서운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두 사람이 다투었다고 오해한 듯했다. 서율은 거절하고 싶었지만, 문미정의 기대 어린 눈빛을 보고 차마 더 이상 거절하지 못했다. 집을 나서려는 순간, 도혁이 서율의 손을 잡았다. 서율은 깜짝 놀라며 표정이 굳어졌다. “변도혁, 지금 뭐 하는 거야?” 도혁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렇게 해야 어머니가 우리가 잘 지낸다고 믿으실 거야.” 그 말이 맞긴 했지만, 서율은 방금 일어난 일 때문인지 도혁에게 더 거부감이 들었다. 서율은 그의 손을 몇 번이나 뿌리치려 했지만, 도혁은 손을 놓지 않았다. 문미정이 뒤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서 서율은 더 이상 무리하게 저항할 수 없었기에 결국 도혁의 손을 잡고 집 밖으로 나왔다. 서율은 도혁과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도혁은 여태껏 한 번도 서율의 손을 잡은 적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손을 잡는 것은 서율에게는 처음이었다. 너무나도 가까운 스킨십이었기에,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문미정은 현관까지 나와 그들이 손을 맞잡고 떠나는 모습을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차에 타자마자, 서율은 도혁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차갑게 말했다. “변도혁, 약속을 어겼네.” 도혁은 살짝 긴 속눈썹을 움직이며 서율을 보았다. “뭐?” 도혁이 모르는 척하자 서율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어젯밤에 나랑 약속했잖아. 나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똑똑. 그때 갑자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율아, 엄마가 아침 준비 다 했으니 얼른 내려와서 아침 먹어.” 서율은 문미정의 목소리를 듣고 당황하며 황급히 옷의 단추를 채웠다. 그녀는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도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잡아주려 했다. 그러나 서율은 그의 손길을 피했다. 이 방에선 단 1초도 더 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서율이 답을 하지 않자, 문 밖에 있던 문미정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듯했다. “율아, 일어났니? 빨리 안 일어나면 회사 늦겠어...”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엄마, 방금 일어났어요. 세수하고 금방 내려갈게요.” 서율의 모습을 본 문미정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서율은 옷매무새가 엉망이었고, 입술은 붉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상황을 알아차린 문미정은 얼굴이 빨개지며 서율보다 더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너 출근 늦을까 봐 깨우러 왔지 뭐야... 어, 어서 준비해. 엄마는 먼저 내려갈게!” 그렇게 말하고는 도망치듯 떠났다. 서율이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 도혁은 이미 옷을 다 입고 평소처럼 평온하고 깔끔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도혁은 서율이가 돌아온 것을 보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씻고 와. 난 먼저 내려가 있을게.” 서율은 그와 대화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녀는 급히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도혁은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보더니 방을 나섰다. 그가 떠난 후, 서율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엉망진창인 모습을 확인했다. 붉게 부어오른 입술, 잘못 잠근 셔츠 단추,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카락. 문미정이 자신을 보고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서율은 수치심에 눈을 질끈 감았다. 눈만 감으면 도혁과의 아찔한 순간이 떠올랐고, 그 기억이 그녀를 괴롭혔다. 만약 문미정이 문을 두드리지 않았더라면,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