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유는 공손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과찬입니다.”지관식은 하승태, 염성민, 그리고 지현승을 번갈아 보며 웃었다.“너희도 얼른 좋은 사람 만나야지.”그때 마침, 지철호가 연미혜와 김태훈을 데리고 이쪽으로 왔다. 그는 지관식을 향해 말했다.“아버지, 여기는 김씨 가문 어르신의 손자입니다. 현재 운영 중인 넥스 그룹이 최근 크게 성장했고 앞으로 국가 차원에서 집중적으로 지원할 핵심 기업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네요.”그러고는 연미혜를 소개했다.“이쪽은 넥스 그룹의 핵심 기술 개발자 연미혜 씨입니다. 과학 기술 분야에서 귀한
잠시 후, 지관식은 다시 한번 모두에게 인사를 건넨 뒤, 복도를 따라 자신의 사적인 공간으로 들어갔다.연미혜, 김태훈, 경민준, 하승태, 그리고 임씨 가문과 손씨 가문의 사람들도 함께 그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에 들어간 사람이 많았지만, 임씨 가문과 손씨 가문의 사람들도 함께 있었기에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정원과 긴 정자에는 손님들이 자리를 잡았고 도우미들이 다과와 차를 내왔다.지관식은 허미숙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허미숙뿐만 아니라, 지관식에게는 동양화에 조예가 깊은 두 명의 친구가 더 있었다. 대화가 무르익자
경민준은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공손하게 말했다.“어르신과 바둑을 둘 수 있다니, 오히려 제가 영광입니다.”그는 차분한 걸음으로 다가와 이병철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이 모습을 보고 임지유와 하승태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둘러앉아 바둑을 구경하기 시작했다.연미혜와 김태훈도 뒤따라왔지만, 그들은 이병철의 뒤쪽에 서서 조용히 지켜보았다.임지유와 하승태는 바둑을 둘 줄 아는 편이었다. 그런데 연미혜가 예상보다 진지한 눈빛으로 바둑판을 바라보는 것을 본 하승태가 슬쩍 다가가 물었다
연미혜는 경민준과 이병철의 대국을 조용히 복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임지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르신, 방금 대국을 보니 저도 한번 해보고 싶어졌어요. 하지만 제 실력으로 민준 씨를 이기는 건 쉽지 않겠네요.”“그런 건 걱정할 필요 없어.”이병철이 웃으며 손을 저었다.“그냥 재미로 두는 거지, 부담 가질 필요 없어. 어서 와서 한 수 두어 보게.”임지유가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누군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끼어들었다.“지유 씨가 두면 승패를 장담하기 어렵겠는데요?”이어 또 다른 사람이 맞장구쳤다.“그러게 말입니다
이병철이 웃으며 말했다.“정말 꽤 훌륭하네.”그는 말을 마치고 지관식을 향해 물었다.“근데 네 그림은 안 그리고 여기는 또 왜 온 거야?”지관식이 태연하게 답했다.“너한테 접대가 소홀하다고 잔소리 들을까 봐 일부러 챙겨 주러 온 거야.”이병철은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됐고 얼른 가서 네 할 일이나 해. 여기서 방해하지 말고.”하지만 지관식은 갈 생각이 없었다.한편, 임씨 가문과 손씨 가문의 사람들은 이병철과 지관식이 임지유를 칭찬하는 걸 들으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이 자리의 많은 이들이 이미 임지유를 알고 있었다
“좋아요.”경민준이 짧게 대답했다.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연미혜는 평온한 얼굴로 바둑판을 바라보았다.임지유는 처음엔 놀랐지만, 이내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지관식과 몇 마디 나눈 뒤, 조용히 경민준의 곁으로 돌아갔다.사실 놀란 건 하승태나 임씨 가문, 손씨 가문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지현승과 지관식도 예상치 못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이전 바깥 전시장에서 지철호가 간략히 연미혜를 소개한 적은 있었지만, 그녀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그들은 연미혜를 단아하고 조용한 성격의 사람으로 보았다. 눈에 띄길 좋아하는
그다음, 그녀는 연미혜 쪽에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경민준이 만든 난국을 풀어내는 연미혜를 보며, 그녀의 마음이 순간 얼어붙었다.그리고 이병철의 감탄이 들려오자, 심장이 아예 바닥까지 가라앉았다.하지만 정작 연미혜는 오직 눈앞의 바둑판에만 집중하고 있었다.‘일단 흐름은 잡았어. 하지만 이기려면...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그녀는 잠시 생각을 멈추고 경민준을 바라보았다.경민준이 다시 한 수를 두자, 연미혜의 손이 멈췄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관식이 흐뭇하게 웃었다.“확실히 볼만하군. 이런 자리에
사람들은 경민준을 한번 보고 다시 연미혜를 보더니 이내 시선을 임지유에게로 옮겼다. 그리고 서서히 미간을 좁혔다.잠시의 정적 속에서 경민준이 문득 입을 열었다.“오랜만에 바둑 두는 맞아?”연미혜는 그의 포석을 해체하며 분석하고 있었다.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짧게 대답했다.“맞아.”그와 결혼한 이후로 바둑을 둘 기회가 거의 없었다.“확실히 손이 덜 풀린 것 같아.”연미혜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오직 바둑판에만 집중했다.지금 상황은 그녀에게 불리했다. 얼핏 보면 경민준 쪽에 돌파구가 보이지만, 실상은 그의 함정이 곳곳
김태훈의 변호사는 지난주 세인티와의 계약 해지를 논의하기 위해 직접 회사를 찾았지만, 결국 협의는 결렬되었고 넥스 그룹은 그날 바로 법원에 소장을 제출했다.그 무렵 연미혜와 임지유 사이에 세인티에서 벌어진 마찰은 업계에 이미 소문이 퍼진 상태였고, 당시 김태훈은 지방 출장을 떠나 있었기에 자리에 없었다.김태훈과 아직 직접 대면하지 못했기에, 임지유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보였다.월요일 아침, 출근한 연미혜는 회사 1층에서 다시 임지유와 마주쳤다.두 사람은 서로를 보는 순간, 눈길만 짧게 마주치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
경다솜에게 있어서 연미혜와 경민준, 임지유, 이 셋은 절대 한 자리에 함께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경다솜이 말한 건 ‘엄마도 같이 가줘요’가 아니라 ‘엄마가 저랑 같이 가주세요’였다.그 한 문장에 담긴 경다솜의 마음을 연미혜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경다솜의 펜싱 대회는 다음 주말로 예정돼 있었다.통상적으로 연미혜에게도 여유가 있는 시간이었고 무엇보다 아이에게는 아주 중요한 날이었으니, 예전 같았으면, 당연히 가장 먼저 그 자리에 함께하려 했을 것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연미혜는
코치는 끝내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연미혜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사실 코치가 굳이 언급하지 않았더라도, 경다솜이 펜싱을 배우게 된 건 아마 경민준이나 임지유의 영향일 거라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사실에 대해 연미혜는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이미 양육권을 포기한 입장에서, 아이의 미래에 자신이 얼마나 개입할 수 있을지 잘 알고 있었고, 어쩌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 거리는 더 멀어질 거란 것도 받아들이고 있었다.그렇다고 해도 경다솜은 그녀가 열 달 동안 뱃속에 품었던 아이였기에, 언젠가 거리가 더
경다솜과의 통화를 마친 지 십여 분쯤 지났을 무렵, 경민준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내일 경다솜이 훈련받을 장소와 시간을 문자로 보내왔던 것이었다.하지만 문자에는 필요한 정보만 짧게 적혀 있을 뿐, 다른 말은 단 한 마디도 덧붙여져 있지 않았다.다음 날, 연미혜가 펜싱장에 도착한 지 5분쯤 지났을 무렵, 경다솜 도착했다.차에는 경다솜과 기사만 타고 있었고, 경민준은 함께 오지 않았다.차에서 내린 경다솜은 반갑게 웃으며 연미혜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연미혜의 손을 꼭 잡고는 힘차게 말했다.“엄마, 같이 가요!”그러고는 연미혜
연미혜가 사무실에 막 돌아오자마자 휴대폰이 울렸다.발신자는 경다솜이었다.조금 전 회의실에서 경민준이 식사를 제안했던 그 의도를 떠올리며, 연미혜는 경다솜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하지만 경다솜은 포기하지 않고 연이어 세 번이나 전화를 걸어왔고, 끝내 통화가 되지 않자 짧은 메시지를 남겼다.[엄마, 나 다음 달에 펜싱 대회 나가야 돼요. 내일 펜싱 연습이 있는데, 같이 가줄 수 있어요?]그 문자를 본 연미혜는 손에 든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바쁘게 움직이던 손이 그대로 멈췄다.경민준을 따라 경다솜을
하승태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연미혜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별거 아닙니다.”오전 일정을 마친 후, 오후에는 김태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방금 변호사한테 연락이 왔어. 임지유 쪽에서 아직도 계약 해지는 못 받아들이겠다고 했대. 대신 명예 훼손에 대한 배상금은 꽤 크게 제시했더라고. 근데 그건 내가 거절했어. 협상이 더 이상 의미 없다고 판단해서, 그냥 법적으로 절차 밟기로 했어.”연미혜는 짧게 응답했다.“네. 알겠습니다. 수고했어요.”잠시 뜸을 들인 김태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출장 중이었구나...’임지유가 생각을 정리하던 그때 구진원이 담담하게 물었다.“나한테 다른 볼일 있어?”임지유는 고개를 저은 뒤, 어색한 웃음과 함께 말을 건넸다.“넥스 그룹에서 일하게 된 지도 꽤 됐지? 잘 적응하고 있어? 어려운 점은 없고?”“난 잘 지내.”구진원이 짧게 대답하고는 말을 이었다.“다른 일 없으시면, 난 먼저 올라가 볼게. 출근 시간이라...”그 말과 함께 구진원은 인사도 없이 곧장 등을 돌려 걸어갔다.머뭇거림 없이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임지유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녀는 예전에 구
손아림은 눈이 동그래진 채 얼어붙었다.경민준이 직접 나섰음에도 해결되지 않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손아림은 다급히 말했다.“전 아직도 이해가 안 돼요. 그날 일은 그냥... 그냥 소소한 해프닝 아니었나요? 그걸로 진짜 계약 해지를 걸 수 있다는 게 말이 돼요?”임지유는 차분하게 설명했다.“세인티가 넥스 그룹이랑 계약할 때 쓴 계약서는 변호사를 통해서 다시 확인했어. 거기에 빼도 박도 못하게 명시돼 있었어. 어느 한쪽이 상대방의 명예를 훼손했을 경우, 피해자 측은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고...”손아림은 납득이 되지
“몇 분 전에 저한테 먼저 전화 왔었어요.”김태훈이 코웃음을 쳤다.“비겁한 자식, 역시 너한테 먼저 연락했었구나...”임지유가 경민준에게 도움을 청했을 가능성, 그리고 그 일로 연씨 가문까지 건드릴 수도 있다는 건 김태훈과 연미혜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반대로 경민준도 그들이 넥스 그룹과 경문 그룹의 협력 프로젝트를 카드로 꺼낼 거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먼저 연미혜에게 연락해 틈을 보려 했지만 연미혜가 전혀 여지를 주지 않자 방향을 바꿔 김태훈을 택한 거였다.애초에 이 문제를 김태훈이 직접 나선 것도, 겉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