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다솜이 방에서 나간 후 연미혜는 자신이 두고 간 책을 찾았지만 방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저 책을 들고 2층 거실 창가에 앉았다. 반 시간 후 노현숙이 금방 끓인 것인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한약을 들고 올라왔다.“미혜야, 여기 있었구나.”연미혜는 책을 내려놓고 일어나 받아들었다.“할머니께서 왜 직접 가져오셨어요? 그냥 저를 부르시지.”“넌 몸이 약하니 조금이라도 덜 움직이는 게 낫단다.”노현숙은 옆에 있던 소파에 앉아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원래는 민준이한테 시키려고 했는데 서재에서 또 그놈의 컴퓨터를 보고 있더구
그 말인즉슨 경민준의 전화를 받은 사람이 임지유라는 소리였다. 경다솜은 연미혜를 보며 부자연스러운 거짓말을 해댔다.“엄마, 그냥 다음에 데려다주세요.”“그래.”연미혜는 경준혁과 같은 길이었기에 같은 차를 타고 이동했다. 경준혁은 아침 자습 시간을 놓치긴 했지만 차에서 열심히 책을 보며 내용을 외우고 있었다. 자꾸만 기억을 더듬는 경준혁의 모습에 듣고 있던 연미혜가 단어 몇 개 알려주었다. 그러자 경준혁은 그녀를 향해 엄지를 척 들었다.“형수님 기억력이 완전 컴퓨터 급이네요!”차는 먼저 경준혁의 학교 앞에 도착했다. 연미혜도
그러던 전현재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다른 건 몰라도 임지유 씨는 정말로 운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전현재는 연미혜와 김태훈이 말할 시간도 주지 않고 갑자기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조심스럽게 말했다.“참, 임지유 씨 팀원들이 주말 내내 야근했는데도 프로젝트에 아무런 진전도 없었잖아요? 어제 경 대표님이 그런 임지유 씨가 안쓰러웠는지 저녁 7시 넘어서 회사로 오셨다고 하더라고요. 와서 임지유 씨 대신 중요한 자료를 정리해준 덕분에 겨우 진전이 생겼대요. 그리고,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아세요? 어젯밤에 경 대표님과 임지유
전현재는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 이사님.”임지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김태훈과 그를 향해 말했다.“민준이가 우리 팀원들 밥 사준다고 하는데 두 분도 합석하실래요?”물론 연미혜는 쏙 빼놓았다.전현재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이내 김태훈과 연미혜를 바라보았다.김태훈이 잽싸게 말했다.“호의는 감사하다만 이미 선약이 있어서...”임지유가 눈살을 찌푸렸다.“대표님?”지금껏 온갖 수단을 동원했지만 김태훈이 끄떡도 하지 않을 줄이야.그녀는 옆에 앉아 물을 마시는 연미혜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의 말에도 경민준의 시선은 휴대폰에서 떠나지 않았다.“알았어.”확답을 들은 이상 연미혜도 한시름 놓았다.집사와 이야기를 나누던 노현숙은 둘이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서로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기쁜 마음에 미소를 머금었다.그리고 저녁을 먹고 나서 도우미에게 연미혜가 마실 한약을 가져오라고 부탁했다.경민준은 다이닝룸을 벗어나 통화하러 갔다.한약을 마시고 거실로 나온 연미혜의 귀에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이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밖에 나간 거예요?”노현숙이 씩씩거리며 말했다.“응. 무슨
김태훈이 말했다.“얼른 이혼해.”연미혜가 대답했다.“알았어요.”점심이 되자 장건식이 찾아와서 임지유가 깨어났다며 경민준이 집에 데려다줬다고 했다.그녀는 한약을 챙겨왔는데 입에 대지도 못했다.저녁에 세인티를 떠난 연미혜는 경씨 저택으로 향했다.경민준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이내 입술을 살짝 깨물고 망설이다가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받는 사람이 없어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세인티에 할 일이 남았지만 넥스 그룹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었다.다음 날 아침 연미혜와 김태훈은 넥스 그룹에서 급한 업무부터 처리하고 오후에 세
이내 건네받아서 확인해 보니 이혼 합의서였다.첫 번째로 경다솜의 양육권을 갖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나머지는 재산 분할에 관한 것이며 구구절절 몇 페이지나 되었다.그녀가 경민준을 찾아온 이유도 이혼 수속의 진행 상황에 관해 물어보기 위해서였다.드디어 이혼 합의서를 손에 넣게 되었고 대충 뒤적거리다가 자세히 보지도 않고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문제없어.”말을 마치고 나서 가방을 열어 펜을 꺼내 사인하려고 했다.당시 연미혜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경민준의 옆자리를 꿰찼다.비록 그녀에 대한 이미지가 별로 안 좋았지만 그
정범규는 당최 납득이 안 갔다.이때, 노현숙이 2층으로 올라와서 말했다.“저녁 다 됐어. 미혜는 내려왔던데 아직도 여기 앉아서 뭐 해? 얼른 밥 먹으러 가.”정범규가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아, 네! 금방 갈게요.”경민준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아래층으로 내려가 보니 경다솜이 신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연미혜의 곁에 딱 붙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연미혜는 옆에서 경다솜을 바라보며 잠자코 듣고 있었다.얼핏 보면 사이좋은 모녀의 모습이 따로 없었다.하지만 딸의 양육권을 순순히 포기하는 연미혜를 떠올리자 정범규는 눈앞의 장면이
염성민은 오늘 있었던 일을 지현승에게 간단히 전했다.곧 지현승에게서 답장이 도착했다.[아버지랑 할아버지는 미혜 씨하고 미혜 씨 외할머님에 대해 인상이 꽤 좋으셨어. 아마 그래서일 거야.]지현승의 말대로라면 지철호가 연미혜를 신경 쓰는 데에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얘기였지만 염성민은 여전히 뭔가 석연치 않았다.‘아무리 좋은 첫인상이었다 해도, 겨우 한두 번 본 사이에 그 정도로 각별할 수 있을까?’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지현승에게 더 따져 묻는 건 의미 없었다.날씨 예보에 따르면 오늘 오후부터 비가 내릴 거라고 했
간담회가 끝난 뒤, 정부 측에서 참석한 기업 대표들에게 준비한 오찬 자리가 이어졌다.연미혜는 조용히 짐을 챙겨 일어났고, 경민준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곧 뒤따라 나왔다.회의실을 나서던 중, 염성민은 회의에 함께 참석했던 지철호를 발견하고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지씨 가문과 염씨 가문은 원래부터 교류가 있는 편이었고, 염성민과 지철호 역시 자주 마주치는 사이였다.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연미혜는 잠시 주춤했지만 곧 겸손한 자세로 다가가 지철호에게 고개를 숙였다.“장관님, 안녕하세요.”지철호는 눈가에 미소를
퇴근 후, 연미혜와 김태훈이 유명욱의 자택에 도착했을 때, 그는 통화를 하고 있었다심각한 얼굴로 통화를 이어가던 유명욱은 두 사람이 들어서는 걸 보고 전화를 끊고,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이번 연구 내용은 꽤 인상 깊었어. 너를 한 번 만나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몇 있어. 이번 기회에 소개해 줄게.”연미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손히 대답했다.“알겠습니다.”이번 연구는 국가 연구 과제로 정식 채택되었고, 이후의 행정적 절차나 관련 사항도 그 자리에서 간단히 조율되었다. 두 사람은 유명욱에게 남은 질문들을 이어가며 늦게까지 머
식사 도중 정범규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임지유를 향해 말을 건넸다.“참, 요즘 넥스 그룹에서 인재 충원 중이라던데... 혹시 다시 한번 지원해 볼 생각은 없어?”며칠 전까지만 해도 해외에 머물렀던 임지유는 그 소식은 이미 알고 있었고, 처음 접하게 되었을 때부터 꽤 솔깃했다.넥스 그룹의 기술력은 확실했기에, 다시 지원해서 합격할 수 있다면 앞으로의 커리어에 훨씬 더 유리했다.‘하지만 ’임지유가 선뜻 나서지 못하는 이유를 정범규는 짐작하고 있었다.‘지유가 망설이는 건 연미혜 때문이겠지.’정범규는 그런 임지유의 속내를 들
경다솜이 연미혜에게 전화하자마자, 경민준이 보낸 픽업차가 곧바로 도착했다.결국 경다솜은 연미혜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차에 올라타 떠났다.방에 도착하자 경다솜은 경민준과 임지유의 품에 뛰어들며 외쳤다.“아빠, 지유 이모! 다솜이 왔어요!”경민준은 임지유가 백팩을 옆으로 치우는 것을 도와주는 동안 웃으며 머리를 문질렀다.룸에 들어서자, 하승태와 정범규, 그리고 손아림 모두 함께 있었다.경다솜이 경민준과 임지유를 보고 반가워하자, 정범규가 웃으며 말했다.“민준아, 내가 너희들보고 다솜을 데리고 해외여행 하라고 했잖
밤낮으로 바쁜 시간을 보낸 연미혜는 아침 식사를 하러 내려가기 전에 정리해야 할 내용을 정리해 김태훈에게 보냈다.김태훈은 연미혜가 보낸 재료를 읽고 흥분한 목소리로 답했다.“맞아, 이거야. 훌륭해, 훌륭해, 훌륭해!”연미혜는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먼저 낮잠을 자고 나중에 얘기할게요.”“그래.”연미혜는 오후 5시가 넘어서야 잠을 잤다.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는 방의 카펫 위에서 스도쿠 게임을 하는 경다솜을 보았다.엄마가 깨어난 것을 본 경다솜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엄마 깨어났어요?”“응.”“목마르세요? 물
저녁을 먹고 영화를 본 후 오락실 앞을 지나던 경다솜은 오랫동안 엄마와 게임을 안 한 것이 생각이 나 다시 그녀를 오락실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쇼핑, 식사, 영화 감상, 오락실에서 게임을 하기는 경다솜에게 매우 드물게 활동하였다.하지만 그녀는 오랫동안 연미혜와 함께 외출한 적이 없었고 이 모두 매우 이례적인 활동이었지만 즐겁게 지냈다.연미혜와 염용석은 저녁에 함께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오락실에서 나온 연미혜는 약속 장소에 가기 전에 경다솜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싶었다.경다솜은 연미혜 곁을 떠나기 싫어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
다음날.아침 식사를 마치고 위층으로 올라갔을 때 경다솜은 경민중과 영상 통화를 하고 있었다.그녀가 돌아온 것을 본 경다솜은 고개를 들어 외쳤다.“엄마!”“응.”연미혜는 간단하게 대답하고 컴퓨터를 켰다.전화기 반대편에서 경민준이 물었다.“오늘 일정은 뭐지?”경다솜은 침대에 엎드려 행복하게 말했다.“영화를 보고 싶어요, 점심에 엄마랑 같이 영화관에 갈 거예요!”연미혜는 어제 정리한 재료를 살펴보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잠시 후 경다솜이 휴대전화를 들고 다가와 말했다.“엄마, 아빠가 엄마한테 휴대전화를 주라고 했어요.
연미혜는 다솜이 넘어지지 않도록 손을 뻗어 안아주었다.하지만 그녀가 달려가자마자 임지유가 가지고 있는 향기가 다시 한번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그녀는 책가방을 꺼내 소파에 내려놓고는 침대로 달려가려는 딸을 뒤로 끌어당기며 물었다.“아직 샤워 안 했어?”“씻었는데요.”목욕했는데도 여전히 몸에서 임지유의 냄새가 났다는 것은 임지유가 경민준과 함께 살았거나, 아니면 조금 전까지 경민준과 임지유가 함께 있었다는 뜻일 수밖에 없었다.그들은 다솜과 함께 아파트에 들어 오지 않았을 뿐.연미혜는 무심하게 말했다.“더러워진 것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