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표님이셨군요. 오랜만입니다.”박우빈이 다가오자, 임해철과 임지유가 반갑게 악수하며 인사를 건넸다.“박 대표님은 김 대표님이랑 사업 얘기 나누시던 중인가요?”“네. 요즘 김 대표님 회사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 몇 개가 꽤 흥미롭더라고요. 그래서 시간 내서 좀 만나 뵀죠.”김태훈과 연미혜가 아직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걸 본 임해철은 잠시 의아한 듯 시선을 던졌지만, 별다른 반응 없이 대화를 이어갔다.박우빈은 그 상황을 전혀 모른 채, 김태훈이 인사를 건네지 않는 걸 약간 의아해했다. 사업가라면,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그날의 기억은 이미 오래전 일이었지만, 연미혜는 지금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그날, 마음이 복잡했던 그녀는 잠시 화장실에 다녀왔다.돌아왔을 때, 이금자의 손에는 두 개의 아이스크림이 들려 있었다. 하나는 연미혜를 위한 아이스크림이었고, 또 하나는 임지유를 위한 것이었다.가게 직원이 더러운 쟁반을 들고 지나가던 중 실수로 아이스크림을 건드려 한쪽이 긁혀나가고 기름까지 살짝 묻었다.임지유는 주저하지 않고 멀쩡한 쪽을 먼저 집어 들었다.그러자 이금자는 그저 임지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고 아무 말 없이 그 더러워진 아이스
조금 떨어진 뒤에야, 박우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분, 임씨 가문하고 뭔가 오해라도 있으신 건가요?”김태훈과 연미혜는 짧게 눈을 마주쳤다.연미혜는 특별한 감정 없이 대답했다.“오해는 없어요.”사실이었다. 그건 오해가 아니라, 너무나도 분명한 원한 관계에 가까웠다.하지만 박우빈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아, 그렇다면 다행이네요.”그는 잠시 말을 골랐다가,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경민준 씨가 임지유 씨를 얼마나 신경 쓰는지 업계에선 다 알잖아요. 그러니 임씨 가문은 이제 날개를 달았다고 봐야겠죠. 경씨 가문
그 선물을 대신 전해달라는 것은 직접 참석하지 않을 것이란 뜻이었기에 연미혜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그녀는 다른 용건이 없었기에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경민준은 연미혜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다. 매년 이맘때면 연미혜는 그가 함께 연씨 가문에 가줄 수 있냐고 꼭 물어왔었지만, 올해는 그 흔한 질문 하나조차 없었다는 사실을 그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연미혜가 전화를 끊자, 경민준은 휴대전화를 경다솜에게 건네며 말했다.“내일 밤에 엄마가 데리러 올 거야. 토요일엔 외증조할머니 댁에 가서, 하루 종일 엄마 말씀 잘 들어야 해.
경다솜은 연미혜 얼굴에 드리운 냉기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저 연미혜의 말을 듣고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연창훈이 허미숙에게 선물을 건넨 뒤, 연미혜도 준비한 선물을 차례로 내밀었다.가장 먼저 건넨 건, 한 폭의 자수 그림이었다.“이 자수는 할머님께서 민준 씨에게 부탁해서 준비하신 거예요.”허미숙은 그림을 받아 펼쳐 보더니, 잠시 들여다보다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마음에 쏙 든 눈치였다.“정성이 느껴지네.”이번엔 조심스럽게 조각 하나를 열어, 장신구 세트를 내놓았다.“이건 민준 씨가 드리는 선물이래요.”비취의 색감은
경민준을 무서워해서 괜히 엮이기 싫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아예 나서서 임씨 가문과 손씨 가문에 줄 서려는 사람들도 있었다.연씨 가문은 수년째 내리막이었고, 반면 임씨 가문과 손씨 가문은 지금 경민준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등에 업고 있었다. 누구 편을 드는 게 유리한지는 뻔했다.남정우는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고, 조용히 자리를 떴다.처음엔 허미숙과 연미혜의 외숙모 하여진도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들락날락하는 손님 수가 늘고,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할 시간이 다가왔는데도 자리는 텅텅 비어 있고, 게다가 몇몇 테이블에만
손님들이 끊임없이 몰려들자, 박영순과 손종철은 연신 웃음꽃이 피었다.연미혜가 짐작했던 대로, 그들 역시 허미숙의 생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오히려 수십 년간 생일을 챙겨온 날이라 일부러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었다. 그만큼 오늘 손씨 가문이 이사 잔치를 허미숙 생일에 맞춘 건, 의도적인 계산이 깔려 있었다.과거 손씨 가문이 연씨 가문 맞은편으로 이사 오려다, 연미혜가 경민준에게 부탁해 그 계획이 틀어졌던 일을 생각하면, 그들이 이날을 택한 심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그 일로 마음이 상했던 손씨 가문은 경민준의 보상 덕에 결
그 시각, 하승태와 정범규도 연회장에 도착했다.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자, 손씨 가문과 임씨 가문 사람들은 일제히 반가운 얼굴로 그쪽을 향해 걸어갔다.도원시에서 이 두 사람의 위치는 남다른 데다, 하씨 가문 역시 경씨 가문 못지않은 명문가였기에, 그들에게 공을 들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하승태를 예전부터 본 적 있던 손아림은 그가 다시 눈앞에 나타나자 정성스레 화장한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딸의 반응을 본 한효진은 미소를 지었다.하씨 가문은 말할 것도 없이 일류 명문, 하승태는 능력이며 외모며 흠잡을 데 없는 인물이었다. 손
월요일 아침, 연미혜가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AI 학술지에서 그녀의 논문이 정식 게재 승인되었다는 메일이 도착했다.잠시 후, 김태훈이 업무 관련해서 찾아왔다가 그 소식을 들었다.“논문 게재 승인되었어요.”“난 예상했어.”그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유명욱 교수가 검토하고 좋다고 한 논문이라면 당연히 통과됐을 거라 믿고 있었다.업무 이야기를 마무리하던 연미혜가 시계를 흘끗 보며 물었다.“점심 같이 드실래요?”김태훈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오늘은 안돼. 약속 있어.”“무슨 약속이요?”“소개팅.
연미혜는 김태훈의 말을 듣고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김태훈은 이력서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며 물었다.“이력서는 깔끔하게 잘 만들었네. 실력은 어때?”“수준급이었어요. 인공지능 쪽에 입문한 지는 2년도 안 됐는데, 이미 대부분 박사급 개발자보다 뛰어나요.”“오... 그 정도야?”김태훈은 놀랍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진짜 타고났네. 마음에 들어?”“후보로 생각하고 있어요. 다만...”“며칠 못 가고 훌쩍 떠날까 봐 걱정이지?”“맞아요...”물론 CUAP이든 Infinite-CM이든, 구진원은 정말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게
“봐야죠. 면접 끝까지 봐야죠.”그는 능청스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구진원입니다. 진실의 진, 원할 원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연미혜는 간단히 악수를 나누며 고개를 끄덕였다.“이력서 봤어요.”연미혜는 이력서에서 눈을 떼고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이제부터 제가 구진원 씨를 면접해 보는 건가요? 아니면 계속해서 저를 테스트하실 생각인가요?”그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전 뭐, 둘 다 괜찮습니다.”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알고리즘에 강점을 둔다고 했다.연미혜는 그가 데이터 정제, 특성 엔지니어링, 하이퍼파라미터
경민준이 말을 이었다.“할머니한테 네가 직접 말씀드릴래?”연미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할머니는 내가 무일푼으로 이혼하는 걸 절대로 허락하지 않으실 거야...’연미혜는 되물었다.“그러면 협의서 내용을 안 건드리면 이혼 절차는 언제쯤 마무리될 것 같아?”“올해 안엔 가능할 거야.”이제 갓 3월이 시작됐으니, 연말까지는 아직 한참 많이 남아있었다. 차분히 기다릴 수 없는 시간은 아니었다.“우리 이혼에 대해 또 궁금한 거 있어?”연미혜는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통화를 끝낸 지 얼마 되지
배지호는 연미혜의 말에 흠칫 놀랐다.“진짜 전부 포기하실 거예요?”배지호는 한동안 침묵했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경민준이 연미혜에게 약속한 이혼 합의 재산은 그녀가 평생 써도 다 못 쓸 만큼 큰 금액이었다.그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내려놓겠다는 말에, 배지호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연미혜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네. 확실해요.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요.”사실 그녀는 애초에 그의 재산에 욕심을 낸 적이 없었다. 경민준이 뭘 주든 안 주든, 받아도 미련 없고 안 받아도 아쉬울 게 없었다.‘다만...’예전에 노현숙이 갑
연미혜, 김태훈과 전현재, 세 사람은 따로 소통하는 단체 채팅방이 있었다.오늘 벌어진 일은 워낙 충격적인 데다 화제성도 커서, 전현재는 특유의 ‘소문 레이더’ 본능을 억누르지 못한 채 가장 먼저 그 내용을 공유했다.임지유에게 대체 얼마나 많은 남자가 줄을 서 있는지, 그 남자들이 그녀를 두고 얼마나 광기를 부리는지 일일이 ‘브리핑’했다.하지만 연미혜와 김태훈은 그 얘기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오후, 전현재는 또 새로운 이야기를 꺼냈다.“참, 아까 경 대표님 딸이 회사에 와서 임 이사님을 찾아왔었어요. 전에 임 이사님이 다솜
노현숙의 생일이 끝난 뒤, 도원시 상류층 사회는 그야말로 술렁였다.경민준이 이미 결혼한 적이 있는 데다가 여섯 살짜리 딸까지 있다는 사실이 퍼졌다. 그동안 임지유를 짝사랑하던 재벌가 자제들은 충격과 함께 안타까움에 휩싸였다.임지유가 경민준과 연인 사이라는 건 대부분이 알고 있었지만 ‘결혼 이력’과 ‘자녀 존재’까지는 처음 알려졌기 때문이었다.다음 날 아침, 여러 남성들이 세인티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임지유를 붙잡고 이쯤에서 그만두라며 설득하려 들었다.결국 장건식 등 측근들이 나서 겨우 임지유를 그 상황에서 벗어나게 도왔다.
정범규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연미혜의 과거를 아예 모르고 있는 거 아니야?”하승태는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예전엔 많은 사람들이 연미혜와 김태훈이 사귀는 줄 알았지만,그녀가 유명욱 교수의 제자라는 걸 알고 난 후 그는 두 사람의 관계를 유심히 지켜본 적이 있었다.그리고 그들 사이엔 남녀 간의 감정 따윈 없었다고 확신했다.이미연이 그런 말을 했던 건 정말로 김태훈과 이어지길 바랐던 건지, 아니면 단순히 체면을 지키려는 소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의 연미혜라면 설령 한 번 결혼했고 아이가 있다 해도, 누구와
김태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경다솜은 다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삼촌 목소리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아요.”그 순간 김태훈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설 연휴쯤, 연미혜와 스피커폰으로 몇 시간씩 업무를 논의하던 일이 떠올랐다.그때 경다솜이 바로 옆에서 레고를 조립하고 있었다.‘다솜이가 내 목소리를 기억 못할 리 없지.’하지만 그는 그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랬구나?”경다솜은 고개를 끄덕였다.“네.”“삼촌 목소리가 좀 흔한가 보네?”그 말을 듣고 있던 경민준은 가만히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