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전, 피투성이인 소은정을 안고 비행기에 오른 박수혁은 소은정의 손을 꼭 잡은 채 말없이 눈물까지 흘렸었다.헬리콥터에 동행한 박수혁의 전우들은 그 모습에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다행히 군의관 출신인 한연우가 바로 응급조치를 취했고 크루즈에 타자마자 바로 응급 수술을 시작했지만 박수혁의 이상행동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굳이 수술 현장을 지켜보겠다며 우기더니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소은정과 수술을 집도하는 한연우의 손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총알을 꺼낼 때는 식은땀까지 흘리는 믿을 수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수술을 마친 한연우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이렇게 긴장되는 수술은 처음이었어. 아주 내가 칼 한 번 댈 때마다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더구만? 왜? 내가 뭐 허튼짓이라도 할까 봐?”오랜 전우의 장난에도 박수혁은 붉은 눈시울로 소은정을 바라볼 뿐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그리고 그 모습을 전부 지켜보던 소은찬은 혼란스러웠다. 두 사람 분명 이혼했다고 했었는데... 게다가 결혼생활 내내 사랑 한 번 못 받았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런데 저 모습은 뭐지?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여동생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모습에 박수혁을 바라보는 소은찬의 눈빛은 어느새 점차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수술이 끝나고 소은해와 박수혁은 자기가 서로 소은정을 간호하겠다며 다투었지만 결과는 전우들의 “도움”을 받은 박수혁의 승.남자들의 손에 이끌려 질질 끌려나가면서도 소은해는 욕설을 멈추지 않았다.소은정의 상태가 안정된 걸 확인한 박수혁은 잔뜩 굳은 표정으로 갑판 위로 올라왔다. 그런 그의 손에는 전우가 건넨 사진 한 장이 들려있었다. 그 사진을 누가 찍었는지 어떻게 구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사진에 찍힌 소은정의 얼굴, 그리고 피투성이가 된 채 그녀의 부축을 받아 겨우 서 있는 박수혁 자신의 모습...그날, 링 위에 뛰어든 한 여자의 도움을 받아 겨우 목숨을 구했던 모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문이 열리고 환한 달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는 순간, 두
소은정의 방, 티끌 하나 없이 깔끔한 방에서 눈을 뜬 소은정이 상황 파악을 끝내기도 전에 소은해의 오버스러운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은정아!”그 소리에 귀가 웅웅거렸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왠지 친숙하게 느껴졌다. 푸른 하늘에 걸린 흰 구름,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 그리고 귓가에 들리는 조용한 파도 소리...모든 게 현실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붕대를 칭칭 감은 두 손, 코끝을 자극하는 소독수 냄새... 절경인 바깥세상과 다른 현실을 인지한 소은정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아, 살았구나.“은정아, 난 정말 네가 어떻게 되는 줄 알고....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뭐든 말만 해! 오빠가 다 사줄게!”턱 끝까지 내려온 다스서클과 까칠한 수염. 항상 완벽한 자기관리를 자랑하던 소은해였지만 지금은 꼴이 말이 아니었다.그 모습에 마음이 아팠지만 괜히 농담을 던지며 미소를 지었다.“그래. 한두 푼으로 안 끝날 거니까 각오해.”소은해가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 누군가 방문을 벌컥 열었다.“은정아...”박수혁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소은정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헬리콥터에서 내려오는 박수혁의 모습... 너무 비현실적이라 죽기 전 마지막 환상이라도 보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현실이었다니.그리고 그 해적들 틈에서 어떻게 그녀를 구한 걸까? 수많은 질문이 입가에 맴돌았지만 정작 밖으로 나온 말은 형식적인 인사의 말뿐이었다.“도와줘서 고마워. 큰 신세 졌네.”소은정의 말에 그녀를 향해 뻗으려던 박수혁의 손이 허공에서 어색하게 움직임을 멈추었다.은정이에게 난... 아제 남보다 못한 존재인 건가?눈동자에 실망감이 스쳐지났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다가갔다.“뭐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 배고프진 않아?”“어, 괜찮아.”예상치 못한 박수혁의 태도에 소은정의 형식적인 미소가 어색하게 굳었다. 박수혁에게 대답한 그녀는 바로 고개를 돌려 소은해에게 말했다.“오빠, 나 물 좀.”
소은정의 의아한 눈빛에 박수혁은 코를 만지며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더니 남자들을 향해 짜증스레 소리쳤다.“조용히 해!”박수혁의 포스에 모두들 입을 다물었지만 다들 어떻게든 소은정의 얼굴을 보겠다고 고개를 쑥 내밀고 있었다.“안녕하세요. 목숨 걸고 절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소은정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말로만 하는 인사치레가 아니라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름 모를 섬에서 싸늘한 주검이 되었을 테니까.“에이, 별말씀을요. 형수님, 그거 아십니까? 제가 아는 사람들 중 해적 두목에게 총구를 겨누고 살아남은 사람은 수혁 형님과 형수님뿐입니다!”“그러니까요. 두 분 정말 천생연분이십니다!”......가장 앞에 선 군의관 한연우가 한발 앞으로 다가갔다.“진료 시작해야 하거든? 다들 좀 조용히 하지?”그리고 고개를 돌려 박수혁에게 말했다.“애들 데리고 나가.”박수혁은 아직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소은정을 힐끗 바라보았지만 결국 한연우의 말을 따랐다.“소은해 씨도 나가세요. 정신 사나우니까!”한연우의 호통에 고소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던 소은해도 시무룩한 얼굴로 방을 나섰다.소은정이 깨어나지 않았을 때는 박수혁 동료들의 등쌀에 밀려났지만 소은정이 깬 지금도 찬밥 신세라니.방금 전까지 시끌벅적하던 방이 조용해졌다.“선생님, 잘 부탁드려요.”소은정의 미소에 한연우는 소은정의 상처를 살피며 무심한 듯 말했다.“생각했던 거랑 많이 다르시네요?”“어떻게 생각하셨는데요?”“기사에서 봤던 소은정 씨는 SC그룹 금지옥엽 외동딸, 제멋대로인 성격처럼 보였거든요. 뭐 수혁이도 소은정 씨가 고집이 세다고 말한 적도 있었고.”한연우의 돌직구에 소은정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이런 말까지 말한 걸 보면 꽤 돈독한 사이인 듯 싶었다.하지만 박수혁에 대해 더 얘기하고 싶지 않았던 소은정은 바로 화제를 돌렸다.“저랑 같이 있었던 박우혁은 어떻게 됐어요?”“잘 먹고 잘 자고 잘 지내고 있습니다. 수혁이한테 한
그 말에 소은정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감정을 감추기 위해 바로 고개를 숙였다.이 빚을 도대체 어떻게 갚아야 할까... 한연우까지 나가고 나니 방은 다시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소은정이 착잡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소은해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방 안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뒤에야 들어온 소은해는 바로 불만을 쏟아냈다.“참나, 저 사람들 완전 막무가내인 거 알아? 네 곁에 있지도 못하게 한다니까. 참나, 네 생명의 은인만 아니었으면 콱 때려주는 건데.”프로 용병들을 어떻게 때려주겠다고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스꽝스러운 소은해의 표정이 소은정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아빠랑 오빠들은 괜찮아?”“은찬이 형은 지금 여기 있어. 형 아니었으면 네 위치를 찾지 못했을 거야. 그 잘난 머리가 우리한테 도움이 되는 날이 다 있네.”소은해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역시, 오빠라면 내 위치를 찾아줄 줄 알았어!“은호 형은 뭐 괜찮고. 아빠는 충격으로 쓰러지셔서 입원하셨어.”“뭐?”아버지의 소식에 소은정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괜찮을 리가 있겠어? 네가 실종되고 나서 며칠이 흘러도 소식 하나 안 들려오니까 전 재산을 기부하고 자연인으로 사시겠다는 걸 우리가 겨우 말렸다니까!”......소은해의 말에 소은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래서? 우리 집... 정말 파산한 건 아니지?”그깟 돈이야 다시 벌면 되지만 괜히 아쉬운 마음이었다.“이 오빠가 누구냐? 목숨 걸고 막았지. 우리 동생 거지꼴 되는 걸 내가 어떻게 봐!”소은해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소은정은 그제야 자신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지저분하던 옷과 몸이 깔끔하게 정리된 상태였다. 뭐 오빠들이 여직원들한테 시킨 거겠지 싶어 별로 개의치 않았다.“그런데... 박수혁 그 인간이 왜 여기 있어?”“왜긴 왜야. 뻔뻔하니까 버티고 있는 거지!”소은해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바로 이때 방으로 들어오며 마침 그 말을 들은 소은찬
세 남매가 대화를 나누던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소은찬은 연구할 게 있다며 눈치껏 일어섰지만 소은해는 못된 시누이처럼 팔짱을 끼더니 고개를 쳐들었다.“넌 또 뭐야?”박우혁이었다. 섬에서는 워낙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있었고 워낙 상황이 긴박했던지라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지만 샤워를 마치고 옷까지 멀끔하게 갈아입으니 사람이 아예 달라 보였다.흰 피부, 박수혁과 어딘가 비슷한 이목구비, 귀티가 좔좔 흐르는 누가 봐도 재벌 2세의 모습이었다.“깼어?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호들갑을 떨며 달려오는 박우혁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소은해는 눈을 흘겼다.박우혁이 무사한 모습을 보니 소은정도 기쁘긴 마찬가지였다. 단 며칠 전에 알게 된 사람이지만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함께 넘기다 보니 묘한 전우애 같은 감정이 피어올랐다.“걱정? 아주 잘 먹고 잘 자서 신수가 훤해졌네 뭐.”“무슨 소리야!”박우혁이 볼을 만지며 소리쳤다.“그런데 너 박수혁이랑 아무 사이도 아니라면서?”소은정이 눈썹을 씰룩거리며 묻자 박우혁이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일... 일부러 속이려던 건 아니야. 여기저기 오지만 다녔지만 나도 인터넷 기사는 보고 산다고. 두 사람 이혼한 사이인 거 뻔히 아는데 내가 전 남편 조카라는 걸 알면 날 버리고 갈까 봐...”박우혁의 변명에 소은해가 코웃음을 쳤다.“그래. 살고 싶으면 그렇게 하는 게 맞지. 솔직하게 말했으면 무조건 버리고 갔을 테니까.”“에이 형, 은정 누나 그런 사람 아니에요. 일촉즉발의 순간, 제 앞을 막아서는데... 와 저도 진짜 반할 뻔했다니까요.”박우혁이 넉살 좋은 얼굴로 말했다.“우리 은정이가 워낙 착하긴 하지.”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던 소은해는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야, 그래도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마.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무조건 너부터 챙기라고!”긴박했던 상황이 다시 떠오르며 소은정의 코끝이 시큰해졌다. 그녀가 대답하려던 순간, 박우혁이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박우혁의 말에 소은정은 머리가 지끈거렸다.박우혁을 평생 먹여살리겠다고 한 건 그가 가난한 모험가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박수혁의 조카라는 걸 알았다면 절대 그런 약속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그게...”이때 소은해가 소은정의 말을 잘랐다.“야, 우리 집안 삥 뜯으려고 작정했어? 참나, 어이가 없어서.”하지만 박우혁은 소은해의 냉대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싱글벙글이었다.“형, 저 아직 젊잖아요. 저한테 투자하시면 무조건 버는 장사입니다. 그리고 사실 저 제가 벌 정도는 벌 수 있어요. 그냥 누나 곁에 평생 있고 싶어서...”박우혁의 말에 박수혁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꿈 깨. 너 그 섬에서 머리라도 다친 거 아니야? 어디 우리 은정이 혼삿길을 막으려고!”소은해도 불쾌하다는 말투로 쏘아붙였다.“다들 그만해. 그리고 오빠, 내가 그런 말을 한 건 맞아.”소은정이 인정하자 박수혁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지만 다음 순간 곧 실망감으로 어두워지고 말았다.“하지만 그건 네가 박수혁 조카인 걸 몰랐을 때고. 이번에 태한그룹 쪽에서 지불한 인건비, 해적들에게 준 몸값까지 내가 2배로 갚아줄 테니까 이쯤에서 퉁 치자? 재벌 2세 도련님까지 스폰해 주고 싶지 않아..”말을 마친 소은정이 고개를 들어 박수혁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를 은혜라면 돈으로 갚는 게 가장 깔끔하다는 생각에서 한 말이었다. 하지만 소은정의 제안에도 박수혁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분위기가 어색하게 가라앉자 소은정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이 정도로는 부족한가?“아, 운산 프로젝트에서 얻은 수익도 전부 태한그룹에 넘기는 걸로.”소은정이 시험 조로 조건을 하나 덧붙였다.몇천 억대의 대형 프로젝트의 수익까지 내놓았다. 이 정도면 만족하겠지.“내가 원하는 게 겨우 그런 거라고 생각해?”박수혁은 이를 악물고 물었다.뭐야? 이걸로도 부족하다고? 하, 내 목숨 값이 이렇게 비쌌었나...소은정이 미간을 찌푸리고 박우혁도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삼촌, 그냥
사랑, 걱정, 그리움, 섭섭함, 모든 감정을 담아 내뱉은 말이었다.박수혁의 말에 가뜩이나 창백하던 소은정의 얼굴빛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뭐야? 내가 잘못 들은 건가?보고 싶었다고? 쓰레기처럼 미련 없이 버려놓고 이제 와서 보고 싶다고?박수혁... 당신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충격, 의아함, 분노, 자조...박수혁은 소은정의 눈동자에 비치는 감정 하나하나를 읽으려 애썼다. 그 감정들 사이에 혐오가 없어 안심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에 헛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박수혁은 소은정의 머리카락을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지만 뒤로 물러서는 소은정의 모습에 어색하게 손을 거두었다.박우혁이 어깨에 기댈 때도 평온하던 그녀인데... 이 정도 접촉도 싫은 건가?마음이 아팠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 보였다.“농담한 거 아니야. 네가 실종되고 나서... 나도 정말... 힘들었어. 네가 이대로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어. 우리가 너무... 너무 성급하게 이혼을 결정한 건 아닐까?”박수혁의 말에 소은정이 고개를 돌렸다. 타오르는 불길처럼 뜨거운 눈빛에 소은정은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저 열렬한 눈빛... 그녀가 아주 익숙한 감정, 바로 사랑이었다.순간, 호수처럼 고요하던 소은정의 마음에 돌멩이가 떨어진 듯 은은한 파장이 일었다. 하지만 그것도 순간일 뿐, 소은정은 다시 차가운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경솔? 3년 전에 우리가 결혼했던 거. 그런 걸 경솔하다고 하는 거야. 당신한테 이혼은 하루 만에 내린 결정일지 모르지만 난 3년 내내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결심한 거야. 나한테 이혼은 구원이나 마찬가지였다고.”소은정의 말에 박수혁의 몸이 흠칫 굳었다. 부드러운 미소가 굳고 상처를 받은 눈동자로 슬프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소은정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돈이라면 박수혁이 얼마를 원한다 해도 목숨 값이라 생각하고 기꺼이 내주겠지만 다시 그 지옥으로 들어가고 싶진 않았다.“은정아, 한 번만 더
소은정은 더 이상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소호랑의 털을 쓰다듬기 시작했다.하지만 박수혁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3년 동안 소은정에게 줬던 상처를 생각해서라도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박수혁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소은정을 향해 뻗은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사진 속 여자 너 맞지? 네가 날 구했었다고... 왜 말 안 했어?”그의 목숨을 구해주고 홀연히 사라진 여자가 소은정이라는 걸 알았다면 무턱대고 사랑한다며 달려드는 소은정을 의심하지도 않았을 테고 결혼생활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사진을 힐끗 쳐다보던 소은정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다. 박수혁의 눈동자에 담긴 미안함과 죄책감을 확인한 소은정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아... 그래서... 내 마음을 되돌리려고 한 거였어? 내가 당신을 구해준 것 때문에?“나 아니야.”그런 거라면 죽는 한이 있어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유럽에서 있었던 일은 그저 전부 한여름 밤의 꿈으로 묻어두고 싶었다.하지만 박수혁이 소은정의 말을 믿을 리가 없었다.“이게 네가 아니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거짓말! 왜 거짓말을 하는 거야!비수가 가슴을 찔러 피가 뚝뚝 흐르는 기분이었다.“당신이 잘못 본 거야. 사진 속 여자는 내가 아니야.”소은정이 담담하게 웃으며 반박했다. 어차피 오래전 묻어버린 기억, 오직 그녀만 소중하게 간직해 온 기억이다. 마지막으로 지키고 있던 자존심까지 짓밟히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헤어지기로 한 이상, 첫 만남이 언제인지 따위가 뭐가 중요할까.소은정의 고집에 이글거리던 박수혁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소은정이 인정하지 않는 이상 억지로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 어차피 앞으로 시간은 많으니 지금까지의 실수를 천천히 만회하고 싶었다.그는 다시 사진을 주머니에 넣었다.“그래. 네가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어. 어차피 너에 대한 내 마음은 이거랑 상관없으니까.”박수혁은 기다란 손가락을 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