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을 둘러본 박수혁은 눈에 들어오는 낯익은 진열품들에 깜짝 놀라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큰 움직임에 링거 바늘이 살을 찢기 일보 직전이었다.“어딜 가려고 그러니…!”당장이라도 떠날 채비를 하는 박수혁에 박대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관리인과 하인 모두가 나서 박수혁을 막아섰다.“소은정…. 소은정을 찾으러 가야 돼…….”“이미 죽었다는 거 너도 알잖니….”그의 말은 청천벽력처럼 박수혁을 덮쳐왔다. 가장 듣기 싫던 그 말이었다. 궁지에 몰린 것만 같았다. 팽팽하던 이성의 끈이 탁, 하고 끊어졌다.“아니…. 안 죽었어! 그럴 리 없다고!”그의 목소리는 단단했다. 결코 소은정을 바다에 두고 올 수 없었다. 어떤 형태의 그녀를 찾게 되던, 그는 그녀를 집에 데려다 주어야만 했다.당장 뛰쳐나가려는 그의 모습에 박대한은 그의 하인에게 눈짓을 하였으며, 그의 하인들은 힘이 빠진 박수혁을 다시금 침대에 강제로 앉혔다.“대표님, 휴식을 취하셔야….”“당장 비켜!”자신의 뜻대로 행동하지 않는 박수혁의 모습에 박대한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우리가 그 아이에게 빚졌다는 거 안다. 그 애가 살아 있다면 네가 나가서 뭘 하든 막지 않겠지만, 그 애는 죽지 않았니! 우리가 나서서 장례라도 치뤄 주길 바라는 것이냐? 네가 그 애를 찾아다닌다고 나가 있던 동안 우리 회사 상황은 어땠는지 알기나 하는 거냐!”“뭐가 됐든 찾으러 갈 겁니다. 내가 꼭 찾아야만 해요!”자신에게 소은정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직접 말할 것이다.반드시 사과와 애정을 정중히 표할 것이다.소은정의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칼에 찔린 것만 같은 고통을 느꼈던 그의 마음을 누가 알까.제 눈 앞에서 난동을 부리는 손자는, 훌륭하고 결단력 있는 모습으로 조만간 포브스에 이름을 올릴 예정이었다.그런 아이가 계집애 하나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니.“이 방에서 절대 못 나가게 문 잘 단속해!”박대한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떠나려 하였다.아
20여분을 넘게 걸으니 소은정은 다리가 저리고 물집이 생겼는지 여기저기가 따끔거려 왔다. 그를 따라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다행히 폭우가 그친 뒤였다.숲을 벗어나 멀리 걸어오니 질퍽해진 땅에 발도 쉽게 들 수 없었다. 그러나 제 앞의 남자는 그렇게 오래 걷고 뛰었는데도 힘든 기색 하나 없었다. 이런 환경에 익숙해진 것일까….연이은 암초들과 산비탈을 지나 도착한 곳에서 박우혁은 사람 반 크기의 커다란 돌을 치웠다. 그러자 웬 동굴이 나타났다.단군신화인가?소은정은 군말없이 그를 따라 들어갔으나 공간은 매우 협소했다. 성인 둘로 꽉 차는 공간에 바닷물이 스멀스멀 비집고 들어왔다.박우혁은 이랑곳 않고 벽에 뚫린 40센티 가량의 틈으로 들어갔고, 틈을 통과한 그가 안에서 소은정에게 손짓했다. 내키지 않았으나 그녀는 몸을 돌려 틈으로 비집고 들어섰고, 이내 펼쳐진 광경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틈 너머 공간은 넓게 뚫려 있었으며, 건조하고 깨끗한 나뭇잎이 깔려 있어 조금 습한 것 빼고는 바깥보다 10배는 좋았다. 게다가 등불도 있었다.박우혁은 배낭을 꺼내 들었고, 소은정은 익숙한 라스포티바 브랜드에 웃음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배낭에서 남성용 바람막이 재킷을 꺼내 입었고, 같은 종류의 바지도 꺼내 입으려 허리를 굽혔으나 이내 소은정의 시선에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소은정은 또 어느 틈으로 그가 사라질까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런 그녀에 박우혁이 말을 건넸다.“계속 쳐다볼 건가?”소은정은 어리둥절하다 이내 그의 뜻을 깨닫고 황급히 몸을 돌렸다. 얼굴이 뜨거웠다.“목마를 텐데, 옆에 도구 있으니까 물 좀 담아오면 증류해서 마시자고.”그는 어색함을 풀어보려 일부러 말을 건넸다.“아, 좋아요.”소은정은 맑은 물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나뭇잎 몇 개를 엮은 ‘도구’에 잠시 머뭇거렸지만 여기서 무얼 더 가리겠는가.소은정은 울적한 얼굴로 나가 옆 바위 틈에서 그나마 깨끗한 물을 그릇에 담았다. 박우혁은 어느새 옷을 갖춰 입고
남극?그의 친구라는 자가 저 야인들 속에서 구해 줄 수 있지 않을까? 망상을 멈출 수가 없었다.그래. 이제 반나절 지났는 걸?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박우혁은 자상하게도 준비했던 라이터로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그럼…. 외부에 연락할 뭐라도 없어요?”박우혁은 그녀를 올려다보며 자비없이 말했다.“없어.”“여길 나갈 생각 안 해봤어요?”“해봤어. 소재 찾을 것도 다 찾았고…. 나 같은 바보가 여기 또 떨어지면 그 사람한테 빌붙어서 같이 나가려고 했지.”“…….”그 바보가 자신이었다.박우혁은 능숙한 동작으로 바닷물을 증류하였고, 자신이 먼저 맛을 본 뒤에 나머지를 모두 소은정에게 건네 주었다.“마셔. 물 한 모금도 못 마셨지?”“응. 한 모금도…….”그녀가 마지막으로 마신 것은 비행기에서 마신 장미 향의 샴페인이었다.깨끗하게 마셔 없앤 소은정이 박우혁을 처연히 바라보았다.“다 마셨어요…….”“지금은 끝, 다음에.”누가 이렇게 조금 떠오라고 한 건지, 몇 모금 마시지 싹 사라져버렸다.“그쪽은 좀 마셨어요?”소은정은 분명 그가 얼마 마시지 않은 것을 보았다.박우혁은 웃음을 띈 채 대답했다.“우리 같은 탐험가들은 이런 도구 없는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어.”사람이 극한 상황이라면 소변이라도 마시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그러나 제 눈 앞의 곱게 자란 것처럼 보이는 소은정은 죽을지 언정 그것으로 목숨을 부지할 것 같진 않아 보였다.“그래서, 여태까지 이렇게 야인 분장을 하고 지낸 거예요?”소은정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자신은 통구이로 만들려 했으면서, 왜 박우혁은 가만히 냅두었는가?그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적이 되지 않으려면, 동반자가 되는 수밖에. 지능이 그렇게 높지 않으니, 이방인이라 알아보지도 못하던걸.”소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조금 더 일찍 만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박우혁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지금쯤 재가 되었을 것이다.“그
그의 다정한 말에 코 끝이 시큰해져왔다.“다들 분명 내가 죽은 줄 알겠지…. 아빠랑 오빠들이 얼마나 고생하고 있을까…….”박우혁은 절망에 빠진 그녀를 차마 볼 수가 없었다.“…그래도 희망을 가져야 해.”마주친 그의 눈동자는 달빛이 비춘 밤 바다와 같았다.“역사상에도 바다를 헤엄쳐서 횡단했다는 기록이 많아.”“입 좀 다물래요?”“그럴까?”소은정은 얼마만의 편안한 잠자리인지, 자신도 모르게 잠에 빠져 들어버렸다.소호랑은 주변에 위험이 없다는 것을 감지하고서야 코트 주머니에서 비적비적 걸어 나왔다. 홀로 동굴 안을 구경하는 소호랑을 단숨에 집어 올린 박우혁이 말했다.“애완견을 데리고 다니나 보네…….”새끼 호랑이의 네 다리가 공중에서 마구 휘날렸다.“이거 놔. 난 호랑이야! 애완견 아니야!”박우혁의 눈이 반짝 빛났다.“오, 말하는 가짜 호랑이?”“난 진짜야!”박우혁은 처음 보는 신기한 생명체에 이번에는 꼬리를 마치 쥐를 들 듯 쥐며 흔들거렸다. 소호랑은 큰 소리로 소은정을 불렀다.“이 사람이 날 죽이려고 해요!”박우혁은 순간 소호랑의 입을 틀어 막았다. 큰 소리에 찡그리던 소은정의 얼굴이 다시금 평온을 되찾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쓰읍. 큰 소리내면 안 돼.”그가 손을 놓자 소호랑은 재빨리 높은 돌 위로 튀어 올라 그를 내려다보았다. 당당한 눈빛이었으나 온몸이 지저분 해져 이전의 깨끗하고 귀여운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난 당신 알아요! 1인 미디어인으로 탐험 다큐멘터리 5회 연속 국제대상을 수상했고, 전 세계에 수많은 팬을 보유하고 계시죠. 박대한 회장님의 외손자 분이시죠!”다른 것도 놀라웠지만 마지막 한 마디에는 정말 눈을 번쩍 뜨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잘 알고 있네…….”“그럼요. 인터넷에 모든 소식은 다 알고 있거든요!”박우혁은 방긋 웃으며 작은 호랑이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박수혁은 내 삼촌 쪽이지. 네 주인에겐 비밀이다. 그렇지 않으면……. 흠, 그 야인들
소은정은 그에게 돈이 필요할 것임을 진작 알고 있었다. 돈이 궁한 게 아니라면 이런 일을 하지도 않았겠지.그녀는 그의 어깨를 톡톡 토닥였다.“그래요. 내가 도와줄 테니까 걱정 말아요!”박우혁은 순간 울컥하여 눈물을 흘릴 뻔했다.“내 남은 인생 너한테 감사하며 살게…….”소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 형제가 하나 더 늘었다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그 시각 소은찬.그는 소은정의 소식을 듣자마자 실험실에서 나와 개인용 비행기를 불러 사고가 난 해역으로 향했다. 소은호가 아무 말이 없다는 것은 아직 확답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얘기인데….이 와중에 자신이 예의있다 생각하는 몇몇 이들이 소은정의 집을 알아내 꽃다발을 보내었다. 소은호는 이를 완전히 차단하였다. 누가 뭘 보내던 무조건 돌려보내라는 명령이었다.인터넷에서도 그녀의 사망 소식은 금기시되었고, 검색 엔진에는 이 일을 언급하지 않을 것을 확실히 해두었다. 이 가족이 소은정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소은찬의 비행기는 장장 열시간을 날아 소은호가 탄 선박에 다다랐다. 바다 위에는 비행기의 잔해가 떠다니고 있었다. 산산조각 난 비행기에 사람이 살아있을 가능성은 만무했다.시간이 흐를수록 소은해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 소은찬이 크루즈에 올라타자마자 마주한 것은 멍하니 바다만 바라보며 술을 들이켜는 소은해의 모습이었다.우연준은 예상치도 못한 소은찬의 등장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둘째 도련님….”“…. 그만 마셔. 아버지가 우리 재산을 전부 기부할 거래. 네 재산도….”소은해는 퀭한 눈을 하고는 힘 없이 되받아 쳤다.“그럼 그렇게 하라고 해…….”“막내가 돌아왔는데 우리가 빈털터리가 돼 있으면 안 되잖아….”“그래…. 그건 그런데…. 은정이가 돌아올까…?”소은해가 벌떡 일어나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정말, 정말 우리 은정이가 돌아올 수 있을까?”“내 친구가 비행기에 있던 시스템을 해킹 했어. 지금 확인해 볼 거야, 진정해….”소은
소은해는 잔뜩 충격받은 얼굴로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은정이가 죽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속에 남은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던 그였다. 그런 소은해에게 소은찬의 말은 구세주가 내린 한줄기의 햇살과도 같은 존재였다. 소은찬이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소은해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힘없이 쓰러진 그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고 세계적인 톱스타라 칭송받는 남자가 어린아이처럼 펑펑 오열하기 시작했다.가만히 서 있던 우연준도 그 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졌다.“미안. 내가 너무 늦게 왔지.”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소은찬이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비밀 프로젝트에 참여하지만 않았더라도 이렇게 늦게 소식을 입수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자책이나 슬픔에 잠겨있을 때가 아니었다. 소은찬은 최대한 이성을 유지하며 모든 단서들을 취합했다. 소은정이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조금의 실마리라도 찾기 위함이었다.지금 소호랑에게 장착된 위치 추적 장치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상태, 첨단 기술을 적용한 차단 장치에 의해 신호가 막힌 게 틀림없다.이에 소은찬은 수색 범위를 2000마일 밖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한참을 울고 난 소은해도 정신을 차렸는지 바로 소은찬의 말대로 구조팀을 이동시켰다. 소은찬은 위성지도를 유심히 살펴보며 해역의 지형을 살폈다.섬이 많다는 건 그만큼 수많은 변수가 있음을 의미한다...소은찬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소찬식에게 전화를 걸었다.“아빠, 기부 기자회견 아직 안 하셨죠? 은정이 살아있을 수도 있대요!”“이놈의 자식,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돈타령이야! 그래, 우리 은정이가 그렇게 쉽게 죽을 리가 없지. 그래...”아버지의 핀잔에 입이 삐죽 나온 소은해를 보던 소은찬이 피식 웃었다.“그 멍청한 머리로 나름 애썼네. 수고했어.”멍청?짜증이 치밀었지만 딱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학창 시절 나름 수재 소리를 듣던 소은해였지만 IQ 200에 육박하는 찐 천재인 소은찬에게 그는
소은정은 무표정한 얼굴로 생선구이를 우적우적 씹었다. 박우혁이 파도에 밀려온 생선을 주워 만든 요리. 아니, 그 어떤 조미료도 들어가지 않았으니 요리라고도 할 수 없었다.조미료가 들어가지 않으면 식재료 자체의 감미로움을 느낄 수 있다고 누군가 그랬던가? 하지만 지금 소은정이 먹고 있는 생선은 비릿한 맛만 느껴질 뿐이었다.“프랑스 파리에 있는 레스토랑이 생각나네. 화이트 와인까지 곁들이면 정말 완벽 그 자체인데...”깨작거리는 소은정과 달리 허겁지겁 생선구이를 먹던 박우혁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들더니 슬쩍 손을 뻗었다.“입맛 없으면 내가 대신 먹어줄 수도 있는데....”하, 아무리 맛이 별로라지만 살려면 이거라도 먹어야 했다. 소은정은 뒤로 물러서며 박우혁을 노려보았다.“호랑아, 물어!”소은정의 명령에 소호랑이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으르렁댔다.“그런데 왜 반말해?”피식 웃던 박우혁이 물었다.“네가 말 편하게 하라며. 죽을지 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예의 차리는 것도 웃기고 어차피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 것 같은데 그냥 편하게 하려고.”소은정의 대답에 어깨를 으쓱하던 박우혁이 물었다.“그냥 가만히 있으려니까 심심하지. 야인들 옷 입어볼래? 부족들 영지로 데리고 가줄게.”박우혁의 말에 소은정은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지루해도 목숨을 담보로 장난을 칠 수는 없다. “야인”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데 그들의 옷까지 입으라니.절대 그럴 순 없어!구름 하나 없이 맑은 하늘, 에메랄드빛 바다,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닷바람... 평소에 결코 볼 수 없는 절경이었지만 그 광경을 바라보는 소은정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도대체 언제쯤 여기서 나갈 수 있을까? 부정적인 감정의 소용돌이가 그녀를 잠식하려던 그때... 멀리 바닷가에서 모터 소리가 들려왔다.소은정은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저 멀리 보이는 요트를 향해 미친 듯이 손을 저었다.“살려주세요! 여기 사람 있어요!”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걸까? 쿠르릉거리는 엔진
총소리에 깜짝 놀란 야인들이 부랴부랴 몽둥이를 들고 전투태세를 취했다.사방이 적인 이곳에서도 항상 긍정적이던 박우혁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는 조용히 식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그리고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두 사람의 귀가를 스쳤다. 야인들은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달려나갔다.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지만 그 말투만 들어도 해적들을 향해 날리는 경고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해적들도 야인들의 기에 눌리지 않고 욕설을 내뱉었지만 압도적으로 많은 야인들의 수에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총이 아무리 대단하다지만 총알의 숫자에도 한계가 있으니 말이다.게다가 “사냥감”들을 쫓아 여기까지 왔는데 오히려 더 귀찮은 존재를 만나 화가 단단히 난 듯싶었다.“이딴 곳에 야인들이 있었다니. 젠장! 저런 놈들에게 총알을 낭비할 수야 없지.”“그 모험가 아마 이 근처에 있을 거야. 돈 좀 가지고 있으려나?”“잡아서 족치면 알 수 있겠지. 뭐 성에 안 차면 죽여버리면 그만이고.”그들을 뒤쫓아 온 해적은 단 세 명, 영어로 나누는 그들의 대화가 들려오고 너무나 태연한 말투로 살인에 대해 얘기하는 그들의 태도에 소은정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이때, 무슨 변덕이 불었는지 세 사람은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귀청을 찢을 듯한 총소리에 야인들은 허둥지둥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나무로 깎아만든 창살이 총의 상대가 될 리가 없는 법. 해적들은 거칠게 야인들을 차버리고 그들이 지은 천막을 뒤지기 시작했다.야인들의 비참한 비명소리와 해적들의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기이하게 어우러졌다. 어느새 해적들은 두 사람이 몸을 숨긴 큰 나무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소은정은 온몸이 경직된 채 숨조차 쉴 수 없었다.죽음의 그림자가 그녀를 향해 스멀스멀 다가오는 기분이었다.이제 어떡하지?일촉즉발의 순간, 야인들의 고함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그들이 반격을 시작한 것이다. 야인들의 기습을 피한 해적들이 욕설을 내뱉었다.“그만둬. 곧 떼로 몰려들 거야. 저 미개한 자식들을 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