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찬식은 이 모든 걸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동생에게 생긴 일 따위는 관심없었다. 다 큰 어른의 인생에 간섭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과거 가정을 져버린 건 어디까지나 소찬학의 선택이었으니 지금 이 상황도 인과응보라고 생각했으니까.소찬식을 화 나게 만드는 건 저 두 여자 때문에 소은정의 생일파티가 엉망이 되었다는 사실이었다.여기 더 있어봤자 좋은 꼴은 못 볼 거란 생각에 도망치 듯 자리를 떴고 소찬학도 소찬식에게 대충 인사를 한 뒤 파티장을 나섰다.상황이 종료되자 몰려들었던 사람들은 다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소씨 일가의 가정사는 충분히 흥미로운 가십거리였지만 적어도 감히 이 자리에서는 떠들 수 없으니까.소은정은 그제야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여유롭게 입꼬리를 올렸다.고개를 돌려 여전히 씩씩거리는 소찬식의 모습에 소은정은 바로 아빠의 팔짱을 끼며 애교를 부렸다.“아빠, 됐어요. 제가 이긴 거잖아요? 왜 저런 사람들 때문에 화를 내세요? 오늘은 제 생일이니까 즐겁게 보내요.”방금 전까지 얼음의 여왕처럼 매서운 포스를 내뿜던 소은정이 바로 소찬식에게 애교를 부리는 모습에 그들을 힐끔힐끔 바라보던 사람들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찬학이 저 자식... 여기가 어디라고 저 여자를 데리고 와? 여자한테 단단히 미쳐서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소찬식은 소은정의 애교에 마음이 조금 풀리긴 했지만 여전히 분이 채 풀리지 않은 듯 중얼거렸다.“아이 참, 화 내지 마시라니까.”소은정의 애교에 소찬식도 결국 피식 웃음을 터트렸고 다시 손님들과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유난히 길었던 생일파티가 끝나고 몸도 마음도 지친 소은정은 소찬식에게 언질을 준 뒤 바로 파티장을 나섰다.피한다고 피했지만 어쩔 수 없이 술을 마신 탓에 취기가 살짝 오른 그녀는 술도 깰겸 조금 걷고 싶었다.박수혁의 키스, 성강희의 장미... 생일파티를 빙자한 친목 쌓기 행사라 즐겁지만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답답한 마음에 소은정은 한
처음 만난 경매장, 쇼핑몰, 성강희의 집, 그리고 오늘 파티... 송지현은 항상 이 향수를 뿌렸었다. 독특한 향기라 기억하고 있었던 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하, 어떻게 알았어요?”송지현이 푸흡 웃음을 터트렸다.소은정은 대답하지 않았다.성강희 사건과 별개로 소은정은 어린 나이에 유산을 물려받아 회사를 훌륭하게 경영하는 송지현을 진심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런 추잡한 방법을 쓸 줄이야.충동적으로 벌인 일도 아니고 돈을 노리고 벌인 일도 아님을 소은정은 직감했다.“선수까지 푸신 걸 보니 좋은 일로 부른 건 아닌 것 같고. 피차 바쁜 사람들끼리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죠? 원하는 게 뭡니까?”송지현의 호흡이 급박해졌다. 아마 최대한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거겠지.두 장정에게 붙잡혀서가 아닌, 덤덤한 얼굴로 다가오는 소은정의 모습도 놀라웠지만 두려움은커녕 찰나의 순간 그녀의 신분까지 알아낸 소은정은 확실히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정체가 들킨 이상 더 이상 모습을 숨기는 건 의미가 없다. 송지현이 어둠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소은정과 시선을 마주했다.“소 대표님, 무섭지 않으세요? 제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고분고분 따라오셨어요?”은근한 협박에 소은정은 웃음을 터트렸다.“어디 보자... 왜 송지현 대표님이 이렇게까지 화가 나셨을까? 아, 강희 때문이구나?”소은정의 대답에 분위기가 또다시 싸해졌다. 성강희, 어린 나이에 산전, 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그녀를 유일하게 흔들리게 만드는 이름이었다.10년 전, 성강희에게 첫눈에 반한 그녀는 성강희가 수많은 여성들과 염문설을 뿌리고 다녔음에도 개의치 않았다.언젠가 그녀에게도 기회가 돌아올 거라 생각했으니까.하지만 오늘 소은정의 생일을 위해 정성스레 준비한 성강희의 서프라이즈 선물을 확인한 순간, 송지현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어쩌면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겠구나... 추잡한 수를 써서 성강희와 결혼에 성공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마음만큼은 평생 가지지 못 하겠구나...그래서 소
송지현이 손을 드는 순간, 뒤에 서 있던 장정 두 명이 동시에 다가섰다.두 사람의 손이 소은정에게 닿으려는 순간, 차가운 바람이 두 남자의 얼굴을 스쳤다. 눈 깜박할 사이에 소은정이 눈앞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방금 전까지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어둠이 오히려 좋은 조건을 만들어주었다.소은정은 민첩하게 옆으로 피한 뒤 중심을 최대한 낮추었고 눈 깜박할 새에 그들의 뒤로 이동했다.어둠 속에서 두 남자가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소은정은 신고 있던 하이힐 하나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하이힐을 들어 두 남자를 향해 공격을 날렸다.등 뒤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기분에 남자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낮추었지만 소은정의 목표는 그들이 아니었다. 소은정은 손목을 살짝 돌리더니 송지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이힐 굽은 길고 얇아 센 힘으로 급소를 노려야만 상대를 제압할 수 있었다. 뭔가 이상함을 눈치챈 송지현이 당황하기 시작했지만 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 그녀는 대단한 기업가였으나 피지컬적으로는 연약한 여자에 불과했고 소은정처럼 따로 무술을 익힌 것도 아니었다.퍽 하는 소리와 함께 하이힐 굽이 그녀의 머리통에 내리꽂혔다. 송지현은 찢어질 듯한 비명과 함께 머리를 움켜쥐었다.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끌까 봐 걱정되어서인지 처량한 모습을 소은정이 비웃을까 봐서인지 고통이 밀려와도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머리가 울리고 따뜻한 액체가 손바닥을 타고 흘러내렸다.그렇게 잠깐 동안의 정적이 흐르고 두 장정이 멍한 표정으로 송지현을 바라보고 있던 틈을 타 소은정은 남자 중 한 명의 머리를 찍었다.두 사람 중 하나라도 정신을 차리면 그녀가 불리해진다. 최대한 빨리 정확하게 끝내야 했다. 하이힐을 맞은 남자는 비틀거리며 송지현의 앞을 막아섰다.여리여리한 몸매에 화려한 외모, 딱 봐도 고생 한 번 안 해보고 곱게만 자랐을 것 같은 부잣집 아가씨가 이런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니.대충 자기 몸 하나 지키려 배운 호신술 따위가 아니었
강서진의 질문에 송지현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소은정을 노려보았다. SC그룹보다는 아니지만 그녀는 유명 기업 송열그룹의 대표였다. 그런데 왜 소은정 저 여자는 그녀를 무시하는 걸까?송지현은 아직 멀쩡한 보디가드를 향해 명령했다.“뭘 멍하니 서 있어. 어서 처리해.송지현의 명령에 남자는 차가운 얼굴로 한 발 앞으로 다가섰다. 움직임을 제압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바로 정신을 잃게 만들면 그만이다.남자가 점점 다가옴에도 소은정의 얼굴에서는 그 어떤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들고 있던 하이힐을 더 꽉 쥐었다...분위기가 점점 차가워지고 남자는 왼손으로 소은정의 어깨를 잡은 뒤 뒤통수를 때려 바로 기절시키려 했다. 강서진과 이한석이 소은정에게 피하라고 소리치려던 그때, 박수혁이 전광석화의 속도로 달려나가 남자의 가슴을 퍽 하고 차버렸다.박수혁의 킥에 맞은 남자는 오장 육부가 찢어지고 영혼마저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바닥에 쓰러진 남자는 기절이라도 한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미약하게 들리는 숨소리만이 남자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그제야 송지현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완벽한 그녀의 패배였다.박수혁 저 인간은 왜 갑자기 끼어들어서는...박수혁을 노려보던 송지현이 이를 악물었다.“박 대표님, 뭐 드라마 남자 주인공 코스프레라도 하시는 겁니까?”물론 박수혁의 눈빛도 차갑기는 마찬가지였다. 차가운 눈빛과 어울리지 않는 뜨거운 분노가 눈동자를 점점 잠식해 나갔다...귀신마저 떨게 만들 매서운 눈빛에 강서진마저 소름이 돋았다.“송지현 씨, 정말 자기가 뭐라도 된 줄 압니까? 부모님이 물려주신 귀한 회사인데 잘 지키셔야죠?”박수혁은 이성을 유지하기 위해 차오르는 분노를 참고 또 참았다.소은정이 맨발로 바닥에 서 있는 모습, 그리고 그녀에게 악의를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해 보이는 세 사람... 이 모든 걸 눈에 담은 순간, 그는 당황스러웠고 행여나 소은정이 다칠까 두려웠지만 이 모든 감정을 압도하는 건 바로 무지막지한
소은정이 말이 끝나고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차가운 적막이 한동안 감돌았다.박수혁이 의아한 눈빛으로 소은정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고 소은정의 눈동자에 담긴 불신을 보는 순간,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설... 설마 내가 시킨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박수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이에 소은정은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이 의미하는 바는 확실했다.어색한 분위기에 강서진도 이한석도 등골이 오싹해졌다.“그럼 왜 하필 당신이 여기에 나타났을까?”일촉즉발의 상황에 강서진이 다급하게 해명했다.“은정 씨, 오해예요. 형은 진짜 아무것도 몰랐어요. 형이 은정 씨랑 할 말이 있다고 이리저리 찾아다녔거든요. 발렛 기사가 은정 씨가 이쪽으로 갔다고 해서 그래서 저희도 이쪽으로 온 거예요. 정말요...”강서진이 이한석에게 눈치를 주자 이한석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습니다.”소은정은 그들의 말을 믿어도 되는지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침묵했다.“그래도 한때 부부로 한 이불 덮으며 지냈던 사이인데 형이 은정 씨한테 그런 짓까지 하겠어요? 형은 은정 씨가 위험해진 건 아닐까 미친 사람처럼 달려왔는데 그렇게 의심부터 하는 건 좀 심하잖아요.”호의로 나섰는데 괜한 오해가 받는 박수혁이 안쓰러웠을까 강서진의 말투에는 불평이 그대로 담겨있었다.한 이불 덮고 살던 부부 사이라...실제로 두 사람은 진짜 부부라 할 수 있는 사이도 아니었고 한 이불을 덮고 잠든 적은 더더욱 없었다.소은정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박수혁을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그럼 내가 고맙다고 해야 하는 상황이네?”그녀가 거의 사건을 해결한 뒤에 겨우 나타난 박수혁이다. 강서진의 말 몇 마디에 그의 의도가 순수하다고 믿기엔 무리가 있었다.게다가 SC그룹이 참여하기 전 운산 프로젝트는 송열그룹과 협력하기로 했던 사안,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을 리가...박수혁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지고 강서진은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이번
성강희의 질문에 송지현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다. 항상 장난기 넘치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던 성강희가 이렇게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몇 년 동안 일편단심 성강희만 바라봐 왔던 그녀의 사랑이 먼지처럼 보잘것없이 느껴졌다. 송지현의 눈빛이 살짝 슬퍼졌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의 표정 따위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이 모습을 지켜보던 소은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그럴 리가.”소은정의 대답에 성강희와 소은호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맞은 게 아니었다면 왜 경보가 발동된 걸까?그리고 저 남자들은 박수혁의 부하들일까 아니면 송지현의 사람들일까?“박 대표님께서 왜 여기 계신 거죠?”박수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소은정을 바라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이번에도 역시 강서진이 앞으로 나서며 해명을 시작했고 이한석이 그를 거들었다.두 사람의 말에 소은호는 생각에 잠겼다. 박수혁의 성격상 음침하게 사람을 시켜 여자를 납치할 리는 없고... 송지현이 한 짓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잠시 침묵하던 그가 여동생을 향해 물었다.“은정아, 너 어떻게 할 생각이야?”“글쎄... 나한테 하려던 짓을 그대로 돌려주는 게 어떨까 싶어... 사진 몇 장 찍는 걸로 끝내는 거 괜찮으시죠?”송지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성강희 앞에서 어떻게 그런 말을... “소은정, 네가 감히!”“내가 정말 못할 것 같아?”소은정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송열그룹에서 가만히 있을 것 같아? 날 건드린다면 앞으로 안연시 진출은 영원히 접어야 할 거야!”이에 소은호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송열그룹? 그게 우리한테 위협이 될 거라 생각하는 겁니까? 안연시의 주인도 이제 바뀔 때가 된 것 같군요...”소은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은 송지현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지난 십여년 간 안연시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쏟았던 노력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었다.“일단 은정이 말대로 사진부터 찍죠.”송지현의 치욕 따위는 그와 아무런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고, 더 이상 그것에 머물고 싶지 않았던 소은정은 바로 집으로 향했다.다음날 아침, 눈을 뜬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건 창밖의 푸릇푸릇한 나뭇잎들이었다. 귀한 나무들 사이로 비추는 햇살을 느끼며 소은정은 천천히 일어났다.푹 자고 일어나니 어제 있었던 불쾌한 일들이 먼 과거처럼 느껴졌다.침대에서 일어나 세수를 마친 소은정은 오늘의 주식 뉴스를 확인하기 위해 태블릿을 켰다.새벽 네 시, 소은호가 그녀에게 보낸 메시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송지현은 이미 처리했으니까 안심하고 푹 자.”이렇게나 빨리? 소은호의 일처리 효율에 소은정은 혀를 내둘렀다. 식탁에 앉은 그녀는 박수혁이 이 사건에 정말 연루되었을까 잠깐 고민했다. 어제 그녀를 바라보던 그 복잡미묘한 눈빛... 도대체 무슨 의미였을까?하지만 곧 소은정은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어차피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 해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곤 여유롭게 옷방으로 걸어갔다. 온갖 명품으로 가득 찬 옷장에서 그녀는 한정판 원피스를 꺼냈다.소은정이 집을 나서려던 순간, 그녀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한유라였다.“또 뭔데? 왜 아침마다 전화야...”“야, 어제 너 큰일 날 뻔했다면서. 왜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했어!”한유라가 구시렁댔다.“지금 알았으면 됐지. 뭐 좋은 일이라고 떠벌려.”“송지현 그 여자 정말 미친 거 아니야? 널 납치하려고 했다면서. 그리고 현장을 잡혀놓고 강희한테 고백까지 했다며? 진짜 이게 리얼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더 대박인 건 뭔 줄 알아? 내가 알아봤는데 널 납치하려고 했던 그 남자들 국가대표 출신이래. 너 정말 위험할 뻔했다고. 어디 다친 데 없지?”한유라의 말에 소은정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소은정의 실력이 뛰어난 건 맞지만 국가대표를 상대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첫 공격은 상대가 방심한 틈을 타 치명타를 날렸다 치고 남은 보디가드 한 명을 제압하는 건 정말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이에 소은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임춘식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장난기가 전혀 담겨있지 않은 진지한 표정에 소은정의 표정도 어두워졌다.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개발된 AI 칩은 최첨단 기술을 탑재해 인체의 질병을 스캔할 수 있는 제품, 출시되는 순간 의학계 판도를 바꿀 수 있을 정도로 획기적인 기술이었다.소은찬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임춘식은 AI 칩의 저작권을 거성그룹, SC그룹, 태한그룹이 연합하여 설립한 실험실 명의로 돌렸다. 이런 상황에서 SC그룹이 칩의 기술을 빼돌리는 건 세 회사 모두에게 좋을 게 없는 행동이었다. 세 회사의 유대관계가 흔들리는 건 물론, 주가 하락에 프로젝트도 결국 실패로 끝날 것이다.세 회사 모두 이번 프로젝트에 막대한 자본금을 투자했다. 제품을 출시하기도 전에 이런 일로 구설수에 오르는 건 그 누구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잠시 침묵하던 소은정이 정신줄을 다잡으며 물었다.“어느 회사인지는 밝혀졌나요?”SC그룹의 수많은 계열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는 없는 노릇, 임춘식이 여기까지 왔을 때는 이미 확실히 알아낸 게 있을 것이라 소은정은 확신했다.소은정의 질문에 그가 호주머니에서 쪽지 한 장을 꺼내며 의미심장한 말투로 말했다.“박수혁 대표가 직접 조사한 결과, 진한시에 위치한 지사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현재 회장은 소찬학 씨더군요.”“아, 알겠어요.”소은정이 미간을 찌푸렸다.저번에 그 망신을 당하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아, 루머를 해명하는 최선의 방식은 바로 진실을 밝히는 것입니다. 정 안 되면 남자친구분한테 부탁하는 게 어떨지...”“네?”남자친구라니? 소은정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sunner이요. 그분이 직접 나선다면 모든 게 해결될 겁니다.”천재 물리학자 sunner이 모습을 드러낸다면 모두의 의심이 사라질 것이다. 세계 최고의 천재 물리학자가 굳이 그런 기술을 표절할 리가 없으니까. 소은정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SC그룹에서 나온 임춘식은 바로 박수혁에게 전화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