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뒤, 소은정은 간만에 소지혁을 학교에 데려다주었고 그가 학교에서 적응을 잘하는지 궁금한 소은정이 학교 가는 게 재밌냐고 물을 때마다 소지혁의 대답은 늘 똑같았다.“재미없으면 안 가도 돼요?”안 된다는 소은정의 단호한 거절에 소지혁은 한숨을 푹 내쉬었으며 앙탈을 부리는 모습을 보니 학교생활이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닌 듯했다. 학교에 도착하자 소은정은 소지혁의 가방을 들고 한 손으로는 그의 손을 꼭 잡은 채 감개무량한 듯이 말했다.“네가 영원히 이렇게 어리고 귀여우면 얼마나 좋을까?”소은정의 말에 소지혁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대답했다.“이모가 영원히 젊음을 유지하고 싶은 건 불가능한 일이에요.”“넌 진짜 우리 오빠 친 아들이 맞구나!”“네.”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웃음이 터졌다. 이때, 소은정의 뒤쪽을 쳐다보던 소지혁의 두 눈이 반짝거리더니 힘껏 팔을 흔들었다.“시준아!”무거운 가방을 메고 달려오던 박시준은 소지혁을 발견하자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다가 소은정을 보자마자 살짝 들떠 있다가 이내 표정이 굳어졌다. 저번 생일 파티 때, 새봄이가 하마터면 사고나 날 뻔한 뒤로부터 박시준은 계속 자책에 빠져 있었기에 이렇게 소은정을 다시 보게 되자 그는 기분이 들뜨면서도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이와 반대로 전에 있었던 일을 진작에 까먹은 소은정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조심스럽게 그녀를 쳐다보는 박시준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시준이는 오늘 개학인데 기분이 좋아 보이네?”소은정에게 전혀 원망의 뜻이 보이지 않자 박시준은 그제야 웃으며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고 시간을 확인하던 그녀는 소지혁에게 가방을 건네며 말했다.“씩씩아, 무슨 일 생기면 고모한테 전화해. 나 먼저 간다.”“안녕히 가세요, 고모.”소지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들었고 곁에 있던 박시준도 환하게 웃으며 펜과 종이를 꺼내 뭔가를 빠르게 적고 있었지만 갑자기 바람이 분 탓에 손에 들고 있던 종이가 날아가 버렸다. 박시준이 다급하게 종이를 쫓아가다가 지나가던 학생과 정면
눈살을 찌푸린 박수혁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이한석 씨가 며칠 동안 유럽에 있어서 연락이 안 되실 겁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가사도우미에게 연락하시거나 제가 다른 비서 연락처를 드릴게요.”“가사도우미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거 같습니다. 소은정 씨마저도 저희한테 박시준 군 가족에게 연락해 보라고 하셨거든요.”박수혁의 말에 놀란 선생님이 소은정을 언급하며 대답하자 그제야 차갑던 박수혁의 태도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말씀하세요.”“박 대표님, 아이를 학대하는 건 위법행위라는 걸 잘 아시죠?”선생님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하자 박수혁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들어 선생님을 빤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하고 싶은 말씀이 뭔가요?”“저희가 우연히 박시준 군 등과 엉덩이에서 멍든 자국을 발견했습니다. 생긴지 얼마 안 되는 새로운 상처들도 있더군요. 박 대표님은 이 상처들에 대해 알고 계셨어요?”박수혁의 기에 눌려 크게 숨을 들이마신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묻는 말에 순식간에 사무실에는 정적이 흘렀고 한참 지나서 박수혁이 눈살을 찌푸리며 싸늘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뭐라고 하셨어요?”흠칫하던 선생님은 박수혁에게 다시 한번 물었고 그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알겠다는 말만 남긴 채, 비서를 시켜 선생님을 돌려보냈다.자리에서 일어선 박수혁은 이한석 사무실에서 그가 떠나기 전에 남겼던 문서를 찾으려 했으며 박수혁의 기억으로는 윤이영이 언급되었던 것 같았다.박시준이 학대를 당했다면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윤이영일 것이다. 박수혁은 비서에게 박시준을 태한 그룹으로 데려오라고 시켰고 어린 박시준은 아빠가 기분이 안 좋다는 건 느낄 수 있었는데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었기에 전전긍긍한 얼굴로 자리에 서있었다.두 사람은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고 한참 지난 뒤, 비서가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박 대표님, 윤이영 씨 왔습니다.”윤이영의 이름을 들은 박시준의 두 눈이 불안하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박수혁은
박시준은 두 손을 꼭 쥔 채, 자리에 멍하니 서서 왠지 억울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박수혁은 그런 아이를 보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말하기 싫은 거 보면 내가 윤이영 저 여자를 오해한 걸 수도 있겠네? 저 사람이 계속 너를 돌보게 하고 싶어?”아무리 물어도 박시준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가만히 서있었다. 결국 짜증이 난 박수혁은 싸늘한 눈빛으로 자신과 닮은 눈앞의 이 아이를 빤히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너에게 이렇게 낭비할 시간이 없어. 계속 말을 하지 않을 거면 나도 방법이 없어. 너와 가사도우미 사이의 일은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아.”박수혁의 말에 드디어 박시준이 반응을 보이며 고개를 들었지만 모든 걸 포기한 듯한 눈빛이었으며 어린아이의 맑고 순수한 눈빛은 찾아볼 수가 없이 한순간에 훅 커버린 것만 같았다. 박시준은 창백한 얼굴로 입술만 계속 깨물었다.이때, 비서가 문을 두드리며 회의에 참석할 시간이 되었다고 말했고 박수혁은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핸드폰을 들고 사무실을 나섰다.한참 뒤, 비서가 사무실에 들어와 박시준을 쳐다보며 물었다.“도련님, 대표님이 어디 가고 싶은지 물으셨습니다. 제가 모셔다드릴게요.”비서도 박수혁이 왜 자신의 친 아들에게 이렇게까지 차가운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너무도 닮은 두 사람을 보면 친자가 아닐 확률은 아예 없었다.잠시 머뭇거리던 박시준은 메모지와 펜을 꺼내 뭔가 끄적거렸고 메모를 확인한 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40분 뒤, 회의를 마친 박수혁은 나오자마자 박시준의 동향부터 물었다.“도련님은 여전히 원래 있던 그곳으로 가고 싶다고 하셔서 모셔드리고 왔습니다.”눈살을 찌푸린 박수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저녁 시간이 되자 문자 한 통을 받았다. 문자를 확인한 박수혁의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으며 잠시 고민하다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어둠이 깃든 저녁, 박수혁은 굳은 얼굴로 눈앞에 우뚝 서있는 아파트를 빤히 쳐다보다가 한참 지나고 나서야 차에서 내려 아파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만약 처음부터 박수혁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윤이영도 전동하에게 약점이 잡혀서 협박을 받지도 않았을 것이며 이렇게 자유를 잃지도 않았을 것이다.윤이영은 바닥에 누워있는 박수혁을 보며 표정이 점점 악독해지기 시작했고 칼을 천천히 들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이 사람만 죽으면 넌 순조롭게 이 사람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게 될 거야. 그럼 나도 동남아로 돌아가서 내 세력을 다시 키울 수 있어. 아들, 내가 널 낳은 보람을 느낄 수 있게 해줘!”박시준은 바닥에서 힘겹게 일어나 고개를 연신 저으며 윤이영을 말렸지만 윤이영은 아이의 생각을 전혀 신경 쓰지도 않은 채, 한시라도 빨리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하려고 했다. “내가 너 아빠를 죽이는 걸 보면 넌 평생 트라우마가 남을 거야. 하지만 괜찮아. 엄마도 어릴 때부터 사람이 죽는 걸 보면서 컸고 엄마도 사람을 죽여봤어. 넌 내 아들이야. 앞으로 차차 사람을 어떻게 죽이는지 배우게 될 거야. 이렇게 하자. 네가 이 사람을 죽여. 네 손으로 직접 죽이면 네 마음의 병이 나을 수도 있어.”광기 가득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을 하던 윤이영은 박시준의 손에 칼을 쥐여 주었고 깜짝 놀란 박시준은 공포에 가득 찬 눈빛으로 연신 뒷걸음질을 쳤다.윤이영은 뒷걸음질 치고 거부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화가 치밀어 올라 아이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고 박시준의 작은 몸은 그녀의 힘을 이기지 못한 채, 바닥에 주저앉아서 온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양심도 없는 놈! 겁이 이렇게 많은 네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운이 좋았던 거야. 내가 왜 너 같은 놈을 낳았는지 진짜 미치게 후회돼. 넌 나한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이곳이 동남아였으면 난 총으로 네 머리를 쐈을 거야!”윤이영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박시준은 이 상황이 너무 무섭고 공포스러웠지만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물만 줄줄 흘렸으며 불쌍한 표정으로 윤이영을 쳐다보았다.아이는 괴롭고 힘들고 미칠 것 같았지만 이 감정들을
박수혁은 단호하게 아이를 밀쳐내고 밖으로 향하려고 했고 바로 이때, 밖에서 잠복하고 있던 보디가드가 달려와 말했다.“대표님, 잡았습니다.”“좋아.”순간, 차갑게 변한 박수혁의 눈빛에는 통쾌함까지 보였고 가만히 서있던 박시준은 다급하게 그들을 따라갔다. 멈출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나도 아이는 엄마가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너무 걱정됐다.아이의 세계에는 뒤끝이라는 감정이 없었기에 박시준은 엄마가 너무 무섭지만 엄마를 너무 사랑하기도 했다.그는 높은 소리로 박수혁을 말리고 싶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기에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빌 수밖에 없었다.맨 앞에 서있던 박수혁의 뒷모습은 무서울 정도로 살기가 가득했고 안진은 그가 철저한 준비를 했을 줄은 몰랐으며 꼼짝 못 하게 잡힌 지금 그녀는 드디어 두렵고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박수혁, 내가 여기로 온 목적을 알고 싶지 않아?”“알고 싶지 않아.”말을 끝낸 박수혁은 부하들에게 안진을 묶어버리라고 지시했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었던 안진은 박수혁 뒤에 서있는 박시준을 보며 갑자기 오열하기 시작했다.“시준아, 엄마 좀 구해줘! 엄마가 이렇게 죽는 거 보고만 있을 거야?”박시준은 그런 안진을 보며 마음이 약해졌다. 어린 나이에 아직 모르는 일이 많았기에 박시준은 그저 불쌍한 표정으로 박수혁에게 살려달라는 눈빛을 보냈으며 작은 두 손은 그의 옷깃을 꽉 잡은 채 놓지 않았다.“안 돼요… 안 돼요…”아이는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오열하고 있었고 안진이 박수혁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박수혁, 네가 나를 죽이면 아이는 평생 그 모습만 기억할 거야. 너 설마 아들까지 죽이려는 거야?”안진을 빤히 쳐다보던 박수혁은 부하에게 눈빛을 보내자 부하가 테이프를 꺼내 그녀의 입에 붙여버렸고 겨우 조용해진 안진을 차 트렁크에 쑤셔 넣었다.“강에 던져.”“네.”이내 차에 시동이 걸렸고 박시준은 힘이 다 풀린 얼굴로 계속 눈물만 줄줄 흘렸으며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넌 이곳에 남아도 되
박수혁은 전동하를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싫었는데 그의 말을 듣고 나니 더 싫어졌다.세상에 어떻게 저런 밉상이 있을까 생각하던 박수혁은 붉으락 푸르락한 얼굴로 소파에 가만히 앉아있었고 상처에 덧날까 봐 전동하와 몸싸움이라도 해서 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을 맛보게 해주고 싶은 심정을 꾹 참았다.경악에 찬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던 하인은 이 방에 더 머물렀다가 큰일이라도 날 거 같아서 다급하게 방을 나서며 문까지 닫았다.“몸보신하시라고 가져왔어요.”전동하가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고 박수혁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필요 없어요. 도로 가져가세요!”“박 대표님, 제가 병문안을 하러 온 게 아닙니다. 제 호의를 오해하지 말아주세요.”전동하가 박수혁을 비웃듯이 피식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자 박수혁은 저 가식적인 얼굴을 찢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전동하 씨,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해요. 내가 당신에게 손을 대지 못할 거라는 자신감은 버려요. 여긴 내 구역이고 내가 당신을 정말 죽이려고 하면 당신은 여기 서있을 기회도 없을 거예요.”전동하는 박수혁의 말에 웃음을 거두고 눈썹을 살짝 들썩였으며 박수혁 맞은편 소파에 자리 잡고 앉아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박 대표님이 저에 대해 충분히 많이 참고 계신 거 잘 압니다. 제가 대표님과 목숨 걸고 싸울 준비까지 했는데 결국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잖아요.”“저랑 싸우려면 당연히 목숨 정도는 걸어야죠!”박수혁이 싸늘한 표정으로 전동하를 보며 말했고 전동하는 딱히 그의 말을 반박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윤이영 씨가 바로 안진입니다. 그 여자는 지금 어디 있나요?”전동하가 이곳에 찾아온 목적이 명확해지자 박수혁의 그의 패를 한눈에 꿰뚫은 듯 여유로운 모습을 되찾았고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카리스마 넘치는 얼굴로 물었다.“윤이영 그 여자가 안진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당신이 그 여자를 조종한 건가? 그 여자가 당신 손에 잡혔
“그 여자가 정말 죽은 거 맞아요? 제가 보기엔 아닐 수도 있을 거 같은데?”발걸음을 멈춘 전동하가 고개를 돌려 박수혁을 쳐다보며 말하자 박수혁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그게 무슨 말이에요? 왜요? 또 전 대표님이 구해갔어요?”전동하는 무섭게 노려보는 박수혁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박 대표님, 제가 몇 번을 말해야 믿어줄 거예요? 그 사람은 저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라고요. 그 사람 존재 자체가 소은정 씨에게 위협이 돼요. 전 대표님보다 더 간절하게 그 사람이 사라지길 바라고 있어요.”전동하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어깨를 들썩였으며 상냥한 말투 속에는 카리스마가 넘쳤다.전동하를 빤히 쳐다보던 박수혁은 한참 지나고 나서야 청소 도구를 챙겨온 하인들을 보며 말했다.“나중에 치워. 내 명령 없이는 아무도 들어오지 마.”화들짝 놀란 하인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청소 도구를 내려놓고 방을 나섰고 하인이 시선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박수혁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소파에 앉았다.소은정이 언급되자 박수혁은 그제야 인내심이 생긴 것이다.“안진이 왜 소은정에게 위협이 되는 거죠?”“손재은과 구태정의 죽음은 전부 안진 그 여자 짓이에요. 제 추측이 맞는다면 안진의 목적은 은정 씨를 여론 몰이에 빠트리려는 거예요. 그래야만 저희에게 자신의 존재를 들키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제 정보원 말에 의하면 안진은 지금까지 계속 동남아에서 살고 있었어요.”전동하가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자 박수혁의 안색이 굳어지기 시작하더니 싸늘하게 변한 눈빛으로 전동하에게 물었다.“그럼 그 여자가 당신의 등잔 밑에서 도망갔다는 건가요?”전동하는 눈썹을 들썩이며 한층 진지해진 표정으로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박 대표님, 안진과 그의 부하들은 얼굴을 살짝 뜯어고쳤어요. 짧은 시간 내에 얼굴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 탓에 제 부하들이 실수를 저지른 가장 큰 이유였어요. 안진은 희생양을 찾아서 본인 대신 죄를 인정했거든요. 모든 계획이 완벽했어요. 제가 지금 누구를 도우려는 게 아니에요
전동하의 말이 끝나자 거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박수혁은 전동하의 잔머리에 경악에 찬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고 예전부터 전동하를 교활한 여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여우보다 더 독한 면이 있었으며 왠지 성격이 온순한 늑대 같았다.이런 생각에 박수혁은 전동하가 더 싫어졌다. 모든 계획이 철저하고 명중률도 높았지만 그 계획에서 전동하만 쏙 빠진 것이다. 분명히 가장 사악한 놈인데 겉으로 보기엔 오점 하나 없이 깨끗했다.박수혁은 이를 꽉 깨문 채 전동하를 쳐다보았으며 눈빛에는 살기가 넘쳤지만 이와 반대로 전동하는 박수혁의 반응에 실실 웃으며 말했다.“물론 이 모든 건 제 의견에 불과합니다. 박 대표님도 본인만의 계획이 있을 거 같은데 한 번 얘기해 보세요.”물론 얘기해도 전동하의 계획보다 철저하고 훌륭하지는 못할 것이다.한참 지나서야 박수혁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의견에 찬성합니다.”남은 인생에서 안진을 다시는 보지 않기 위해 박수혁은 반드시 전동하의 뜻대로 해야 했다!“그래요. 제 부하들이 동남아 후방에서 지키고 있을 겁니다. 만에 하나 대표님의 계획이 실패하면 제가 아무런 변수도 안 생기게 잘 처리하겠습니다. 박 대표님, 그럼 완벽한 합작이 되길 바랍니다.”말을 하던 전동하는 엉망진창이 된 거실을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이곳 별장은 처음 와보네요. 박 대표님이 이렇게 정이 많은 분인지는 몰랐네요. 제 아내는 이렇게 작은 집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박 대표님은 첫 번째 결혼에 신경을 많이 안 쓴 거 같네요. 남자가 쪼잔하게.”말을 끝낸 전동하는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박수혁을 뒤로한 채, 별장을 나섰고 괜히 한 방 맞은 게 억울해서 박수혁의 마음에 칼을 꽂은 것이다.전동하의 입술에 피를 보게 했으면 박수혁의 마음에도 피눈물이 흘러야 공평한 법이다.박수혁은 전동하의 뒷모습에 구멍을 내고 싶을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한편, 전동하가 차에 타자 이제 막 동남아에서 귀국한 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