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손을 잡은 이상 송지현이 낙찰 가능성은 훨씬 더 커진 상태, 소은정은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유지했지만 마음은 어느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오늘은 아무 수확 없이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4500억.”경매장에 무서운 적막이 감돌고 진짜 전쟁은 이제부터임을 모두들 예감했다. 소은정을 힐끗 바라본 송지현은 망설임 없이 외쳤다.“4800억.”어느새 소은정이 생각한 최대 가격에 근접해 가고 있었다. 몇천억이라는 천문학적 단위의 자금을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해도 구매 후 향후 몇 년간은 뚜렷한 수익을 내지 못할 땅에 그 이상의 자금을 부어 넣을 필요는 없었다.잠깐 고민하던 소은정이 우연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4900억.”SC그룹의 마지노선이었다. 이에 송지현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마 저쪽에서 생각한 마지노선도 이 정도겠지.송지현이 이한석에게 무언가를 속삭이자 이한석은 바로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문자를 받는 쪽은 아마 박수혁이겠지.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4900억!”경매사가 두 번째로 가격을 외친 순간, 송지현이 무거운 얼굴로 다시 번호판을 들었다.“4930억.”더 이상 입찰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던 소은정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자, 4930억!”소은정이 따르지 않자 송지현의 표정에도 잠깐 여유가 생겼다. 경매사가 낙찰을 외치려던 순간, 소은정 옆에 앉아있던 성강희가 갑자기 번호판을 들었다.“5000억.”쿠궁!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성강희가 갑자기 나서자 소은정의 눈도 커다래졌다.“너 미쳤어?”하지만 성강희는 씩 웃을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송지현도 갑작스레 끼어든 성강희의 존재에 꽤나 당황스러운 듯했다.“5000억. 5000억. 5000억. 성일그룹 성강희 대표님 축하드립니다.”경매장에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울려 퍼지고 성강희는 일어서 사람들을 향해 손을 저은 뒤 무대로 올라갔다.이런 경쟁에 참여하지 않던 성일그
만약 결혼이라도 한다면 이 정도는 충분히 줄 수 있는 성강희였다. 한편, 소은정은 성강희의 모든 돌발행동이 그녀를 위한 것임을 깨닫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100억을 더 얹어 원가에 살 수도 있었지만 이건 그녀의 개인 자금이 아니라 회사 돈이다. 100억이 아니라 10원 한 푼도 허투루 결정할 수 없었다. 소은정은 성강희의 호의에 왠지 버거움을 느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던 그때, 송지현이 차갑게 웃더니 말했다.“이렇게 공사 구분 못하는 사람이었어? 여자 때문에 그룹을 말아먹을 생각인 거야?”어느새 선을 넘은 송지현의 말에 성지현의 기분도 조금 언짢아졌다. 하지만 그는 송지현이 아닌 소은정을 바라보며 말했다.“은정이를 기쁘게 할 수만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소은정에 대한 마음이 이 정도였나? 송지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항상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그녀의 눈시울이 살짝 붉게 변하더니 결국 그대로 자리를 떠버렸다.“야, 너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이야.”소은정이 미간을 찌푸리고 성강희를 나무랐다.“네가 갖고 싶었던 거잖아.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는 건 싫어.”그게 박수혁이라면 더더욱. 성강희는 마지막 말을 억지로 삼켰다.소은정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우연준에게 말했다.“4900억 성일 쪽에 입금해 줘요.”“네.”“그리고 남은 100억은 내 개인 계좌로 줄 거야.”소은정이 말했다.성강희와는 분명 절친한 사이였지만 어디까지나 소은해처럼 혈연으로 묶인 사이가 아니다. 100억이란 큰돈을 빚지고 싶지 않았다.“은정아, 그게...”“싫으면 안 살 거니까 그렇게 알아둬. 그 땅에 5000억이나 퍼부은 거 너희 할아버지께서 아시면 혼나는 걸로 안 끝날 거야.”불만스러운 성강희의 표정에 소은정은 이렇게 대꾸한 뒤 돌아섰다. 성강희는 잠깐 망설이다 그 뒤를 따랐다.“난 어디까지나 널 위해서...”“아 됐다고...”한편, 태한그룹.박수혁은 무거운 얼굴로 이한석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차라리 소은정이 낙찰을 받았다면 이렇게 화가
남은 업무를 처리한 소은정은 의자에 기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저런 일로 마음이 복잡하던 그때, 한유라가 함께 쇼핑을 하자며 문자를 보냈고 소은정은 바로 응했다.쇼핑몰 이곳저곳을 누비던 두 사람은 쇼핑몰에 전시된 애스톤마틴-one-77에 시선을 빼앗겨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름다운 라인과 고급스러운 컬러, 게다가 국내에 처음 들어온 모델이라는 점이 소은정의 흥미를 불러일으켰다.“우리 집 차고에 두면 딱일 것 같은데...”고급스러운 차림의 한유라와 소은정의 모습에 바로 직원이 다가왔다. 게다가 소은정은 최근 웬만한 톱스타보다 더 핫한 셀럽 중의 셀럽, 그녀의 마음만 사로잡는다면 받을 수 있는 인센티브가... 계산을 마친 직원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소은정 대표님 맞으시죠?”소은정은 두 눈을 반짝이며 차량의 보닛을 만지작거렸다. 그녀가 입을 열려던 순간, 익숙하고도 낯선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그 차 얼마죠? 제가 사겠어요.”고개를 돌린 소은정의 눈에 들어온 건 송지현과... 박예리였다.잔뜩 주눅 든 채 송지현과 다니던 박예리는 소은정을 발견하고 바로 독기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송열그룹과 태한그룹은 오랜 시간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관계를 유지해 왔으니 두 사람이 서로 친분이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박예리와 사적으로 쇼핑을 다닐 정도로 친했었나?“아, 소 대표님, 여기서 뵙네요?”송지현이 형식적인 인사를 건넸다. 예의에 전혀 어긋나지 않는 인사말이었지만 왠지 가시가 느껴졌다.“송 대표님도 이 차가 마음에 드시나 봐요?”“그럼요. 처음 보는 순간, 가지고 싶었는데 먼저 보시고 계셨네요?”송지현이 여유롭게 대답했다.“뭐, 어차피 아직 돈 안 낸 거 아니야? 그럼 내 거, 네 거가 어딨어?”소은정에게 지금까지 당한 수모만 수십 번,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두 거물의 등장에 난처한 건 직원이었다.“네... 소 대표님도 차량에 대해 문의하고 계시던 중이셨습니다.”송지현에게서 묘하게 느
하지만 송지현의 먼저 제안한 탓에 거절하기도 애매했다.“그러시죠.”소은정 또한 가식적인 미소로 응했다. 송지현은 그녀를 노리고 다가온 게 분명했다.하지만 왜?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네 사람이 명품 매장에 들어서자 소은정의 얼굴을 알아본 직원들이 바로 다가왔다.“대표님, 뭐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이번 시즌 신상 백인데 3개뿐인 한정판을 저희 매장에서 하나 들여오게 됐습니다. 한 번 착용해 보시겠어요?”소은정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직원은 핸드백을 들고 그녀에게 보여주었다.“포장해 주세요.”하지만 직원의 말에 대답한 건 소은정이 아닌 송지현이었다.갑자기 끼어든 송지현의 모습에 직원들은 모두 소은정의 눈치를 살폈다.소은정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뭐해요? 어서 포장해 드리지 않고.”“아, 네.”그제야 정신을 차린 직원들이 부랴부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송지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직원들이 소은정에게 추천해 준 상품들 모두 송지현이 먼저 계산을 해버렸지만 소은정은 미소로 응할 뿐이었다.명품 매장 싹쓸이가 대충 끝났을 무렵, 한유라가 소은정의 팔을 잡아당기더니 속삭였다.“저 여자, 나보다 훨씬 더 쇼핑중독인 것 같은데?”너무 돌아다녀서 다리가 시큰거리자 소은정은 야외 커피숍으로 향했다. 짙은 원두 향이 소은정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었다.송지현도 마지막 제품 계산을 마치고 커피숍으로 들어왔고 역시 커피를 주문했다.“어떻게? 쇼핑은 즐거우셨어요?”소은정이 여유로운 미소로 물었다.“네? 네, 뭐...”이 정도면 화를 낼 법도 한데 여전히 여유로운 소은정의 모습에 송지현이 물었다.“그런데 직원들이 먼저 대표님께 추천해 준 제품을 제가 사버렸는데 화 안 나세요?”소은정은 찰랑거리는 머리를 뒤로 넘기며 여유롭게 웃었다.“아, 모르셨어요? 이 쇼핑몰 저희 그룹 소유거든요. 송 대표님께서 오늘 저희 쇼핑몰 매출 팍팍 올려주셨는데 화가 날 리가요? 그리고 저희 집에 오신 손님이나 마찬가지인데.
소은정은 테이블 위에 팔을 올린 채 턱을 괴고는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송지현을 바라보았다.1초, 2초, 3초...시간이 흐르고 아무런 대답도 없는 송지현의 모습에 소은정은 자신의 추측에 더욱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반면, 송지현은 자신의 마음이 들킨 게 불쾌한 모양이었다. 항상 담담하던 눈동자에 분노가 서렸다.“받아주지도 않을 거면서 어장 속 물고기로 가두기엔 강희가 너무 아깝잖아요?”“네?”내가 어장관리를 하는 중이라고?“제 말이 틀렸나요? 강희가 대표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면서 여지를 주는 게 어장관리가 아니면 뭐죠?”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한유라가 반박했다.“저기요. 우리가 어떤 사이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하지만 송지현도 물러서지 않았다.“아, 친하면 상대의 마음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아도 된다는 건가요?”그녀의 말에 소은정의 얼굴도 차갑게 굳었다. 이 정도면 참을만큼 참았다.“가지고 놀아요?”소은정이 피식 웃었다.“제가 가지고 노는 것처럼 보이세요? 전 강희를 확실하게 거절했고 걔 멋대로 날뛰는 거예요.”날 어장관리녀로 매도하고 싶은 모양인데. 나도 더 이상 참지 않아.요즘 따라 자꾸 선을 넘는 성강희의 행동이 불편해지려던 차에 송지현까지 끼어드니 짜증이 치밀었다.송지현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소은정을 훑어보았다.“강희 마음을 받아줄 생각이 없다면 더 깔끔하게 거절하셔야죠. 다가오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게 가지고 노는 게 아니면 뭐죠?”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시선에 겁을 먹고 물러섰겠지만 소은정은 달랐다.“설마... 제가 뭐 강희와 절교라도 해야 속이 시원하시겠어요?”소은정의 질문에 송지현은 더 이상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마 오랫동안 그녀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고 오늘 기회를 잡은 김에 그녀의 기를 눌러주려 했던 거겠지. 하지만 그녀도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가 아니다. 3년 동안 온갖 치욕을 견뎌온 그녀에게 송지현쯤이야.성강희와 소은정은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마일 때부터 함께 놀며 자란
송열그룹을 대기업으로 성장시킨 능력 있는 CEO라는 풍문과 달리 유치하고 멍청해 보이기까지 하는 모습에 소은정은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다.말을 마친 소은정은 한유라의 팔짱을 끼고 밖으로 나섰다.늦은 오후의 햇살이 소은정의 얼굴을 비추고 방금 전까지 불편했던 마음이 사르륵 녹는 느낌이었다.“참나, 사랑에 빠지면 바보가 된다더니. 그게 사실인가 봐.”한유라가 투덜거렸다.그녀의 말에 소은정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어린 나이에 부모를 모두 여읜 송지현은 결코 쉽게 송열그룹 대표 자리에 오른 게 아니었다. 평소에 친하게 지내지도 않던 친척들이 고기를 노리는 늑대들처럼 어떻게든 송열그룹의 재산을 떼먹으려 달려들었었다.하지만 송지현은 합법적인 후계자로서 결국 대표로 취임했고 보란 듯이 기업을 성장시켜 그녀를 향한 의심과 불만을 모두 없애버렸었다.어린 나이와 달리 과감한 일처리, 편법을 사용해서라도 목적을 달성하는 그녀의 성격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레 겁을 먹고 떨어져 나간 남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정말 이번에는 강희 마음을 잡고 싶은가 보네.”소은정이 싱긋 웃었다.“아이고, 그럼 뭐해. 강희는 저런 스타일 안 좋아하는데 말이야.”한유라가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글쎄?”소은정이 어깨를 으쓱했다. 뭔가 알고 있는 듯한 소은정의 모습에 한유라가 더 캐물어려던 그때, 익숙한 랜드로버가 두 사람 앞에 멈춰 섰다.창문이 내려가고 박수혁이 매력 있는 중저음으로 말했다.“타...”소은정은 짜증스런 얼굴로 한유라의 팔짱을 끼고 자리를 뜨려 했다. 쇼핑 한 번 하는데 왜 이렇게 방해하는 사람이 많은 건지. 차라리 온라인 쇼핑이 낫겠다 싶었다.“소은정, 그 땅, 사고 싶지 않아?”박수혁이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 그의 말에 발걸음을 멈춘 소은정이 고개를 돌렸다.“그게 무슨 말이야?”어차피 박수혁에게 넘어간 거 아니었나? 왜 굳이 그 땅에 5000억을 퍼부었는지 알 수 없지만 박수혁 성격상 밑지는 장사를 할 인간이 아니니 따로 생각이 있겠거
박수혁의 바다처럼 깊은 눈동자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소은정을 바라보았다.두 사람은 마치 이 세상에 둘만 남은 듯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한참이 지나고 소은정은 고개를 돌려 애써 시선을 피했다.거성그룹과의 AI 프로젝트와 달리 이 프로젝트는 굳이 리스크를 부담할 파트너가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 도대체 왜? 그녀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 걸까?잠깐 망설이던 박수혁이 입을 열었다.“이유 같은 거 없어. 그러니까 선택해.”박수혁의 대답에 소은정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피어올랐다.“설마... 결혼생활에 대한 보상이야?”시험 조로 물어보았지만 그녀의 질문에는 확신이 담겨있었다. 아니, 박수혁이 대답하는 순간, 뺨이라도 날려주려 주먹을 꽉 쥐었다.그녀가 SC그룹의 딸이 아니라 평범한 여자였다면 그녀의 인생에 신경도 쓰지 않았을 테지. SC그룹과의 관계를 완화하기 위해, 그 알량한 양심을 위로하기 위해 수천억의 수익을 포기하려는 거라고 생각했다.참, 이기적이라고 해야 할지, 호탕하다고 해야 할지...두 사람의 묘한 기류에 한유라가 어색하게 기침을 했다.“박수혁 씨, 지금 이게 애들 땅따먹기도 아니고. 굳이 이 자리에서 답변을 드려야 하나요? 그쪽 제안이 정말 은정이를 위한 일일지 아니면 함정일지도 모르고. 아무리 은정이가 대표라지만 이렇게 큰일을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는 없어요. 같은 대표로서 그 정도는 알고 계실 텐데요?”소은정이 한유라를 바라보자 그녀는 장난스레 윙크를 날렸다. 그리고 박수혁은 예상외로 한유라의 말에 동의했고 더 이상 소은정을 잡지 않았다.차에 탄 소은정이 물었다.“아까 왜 그랬어?”“박수혁이 이렇게까지 하면서 너희 집안에 복수할 필요가 있을까?”잠깐 침묵하던 소은정이 대답했다.“아니지.”비록 두 사람의 관계는 파탄 났지만 적어도 대외적으로 두 그룹 사이의 협력 프로젝트는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게다가 태한그룹까지 참여하는 프로젝트에 함정을 설치
불만 섞인 성강희의 말투에 소은정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그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야. 오히려 골치 아픈 땅이었는데 박수혁이 받겠다니가 냉큼 넘긴 거지 뭐.”“야, 내가 그 일 때문에 할아버지한테 얼마나 맞았는 줄 알아?”성강희는 억울해 죽겠다는 말투로 소리치더니 급기야 신음 소리까지 내기 시작했다.“병문안도 안 오고 말이야.”“공주님, 내가 가면 상처가 알아서 낫기라도 해? 약이나 바르세요, 네?”소은정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성강희는 이를 악물었다.“야, 공주님이라고 부르지 마.”“이번 일은 네가 잘못한 거 맞아. 그러니까 무조건 잘못했다고 싹싹 빌어.”소은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에 성강희는 화가 단단히 났는지 작별 인사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샤워를 마친 늦은 밤까지 파일을 검토하다 겨우 잠자리에 들었다.다음 날 아침,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에 소은정은 기지개를 켜며 일어섰다. 오피스텔까지 그녀를 데리러 온 우연준은 바로 소은정을 국제 전시 회관 개업식으로 안내했다.국제 전시 회관 전시홀, 개업식에 초대된 유명 인사들이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소은정은 한사코 직접 마중을 나오겠다는 관장을 거절하고 우연준과 함께 그림 전시관으로 향했다.낭만주의, 현실주의, 추상파까지, 여러 세기를 아우르는 다양한 그림들이 전시홀 벽면을 알차게 채우고 있었다.이 그림들은 전부 전시 회관을 위해 소장가들이 기꺼이 기부한 귀한 작품들로 그녀는 하나하나 자세히 훑어보았다.그림에 푹 빠진 소은정의 모습에 우연준은 관장을 비롯한 다른 손님을 응대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회관을 쭉 돌아 마지막 그림 앞에 선 소은정이 고개를 갸웃했다. 마지막 그림은 검은 천으로 가려져 그 내용을 학인할 수 없었다.설마 직원들이 실수한 건가? 그녀가 조심스레 검은 천을 거둬내자 거대한 그림이 천천히 그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 끝없이 펼쳐진 어둠 속 거대한 황금문이 펼쳐졌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황금보다 더 찬란한 햇살이 파고들어 날카로운 검처럼 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