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한 목소리에 소은정이 미간을 찌푸렸다.“그쪽이 꾸민 짓인가요?”“에이, 설마요. 제가 무슨 수로 이렇게 큰 판을 짜겠어요. 전 그냥 구경꾼일 뿐이에요. 은정 씨가 너무 헤매고 있는 것 같아서 힌트를 주려는 것뿐이라고요.”이 말을 마지막으로 박수아는 전화를 끊어버렸다.소은정이 이미 어두워진 액정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때, 우연준이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대표님, 기자가 폭로 영상의 진실에 대해 해명하겠다고 말했답니다.”“대중들 앞에 설 기회를 주면 안 돼요. 기자가 인정한 사실 전부 경찰한테 알려주고 경찰이 직접 입장 발표를 하게 해요. 그리고 오늘 일... 무슨 일이 있어도 배후에 숨은 범인까지 알아내야겠어요.”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에 우연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하긴, 대놓고 협박을 당하신데다 다치시기까지 했으니 당연한 거지.“대표님, 최 팀장 혼자서 경찰 측과 소통하기엔 어려움이 있을 겁니다. 제가 직접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그렇게 해요. 그 기자도 최 팀장이 옆에 있으면 거짓말을 못 할 테고... 두 사람이 같이 가는 게 좋겠어요.”“대표님, 오늘 많이 놀라셨을 텐데 일찍 쉬십시오. 전 대표님은... 새로운 소식 들어오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고개를 끄덕인 소은정은 바로 침실로 향했다.한편, 호텔방을 나서려던 우연준이 발걸음을 멈추었다.뭔가 이상한데...하지만 소은정이 침대에 눕는 모습까지 확인한 그는 그저 너무 예민한 거겠지라는 생각과 함께 결국 방문을 나섰다.어차피 호텔 주위는 경호원들이 빈틈없이 지키고 있으니 파리 한 마리도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역시... 불안한 예감이 틀린 적이 없다고 했던가?우연준이 나가자마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소은정은 차키와 휴대폰을 챙기고 호텔방을 나섰다.경호원들의 경비가 삼엄하긴 했지만 그 정도 감시를 따돌리는 건 소은정에겐 식은 죽 먹기, 은밀하게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간 소은정은 창고를 향해 엑셀을 밟았다.잠시 후. 창고의 창문을 통해 미약한 불빛이
창고에는 불에 취약한 건축자재들이 가득 쌓여있다. 지금 성급하게 문을 열었다간 창틈에 뿌려진 휘발유를 타고 불꽃이 흘러들어와 순식간에 창고 전체가 타버릴 게 분명했다.여기서 통구이가 될 순 없어.소은정은 불길을 피해 창문과 최대한 먼 곳으로 도망쳤지만 창고 내부의 온도는 점점 더 높아지기 시작했다.유독연기와 점점 희박해지는 산소...창고가 찜통처럼 느껴지며 소은정은 천천히 정신을 잃어가기 시작했다.한편, 전동하 시점.깨질 듯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어루만지며 눈을 뜬 전동하는 낯선 주위의 풍경에 당황하기 시작했다.은정 씨가 묵고 있는 호텔 근처에 있는 곳인 것 같은데...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천천히 기억을 더듬던 전동하의 머릿속에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수상한 남자를 따라가던 그때 갑자기 다른 누군가의 기습으로 정신을 잃었었다.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게 틀림없는 깔끔하고 잔인한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었지... 그럼 은정 씨는...!겨우 정신을 차린 전동하가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연 순간, 예상치 못한 얼굴이 그를 맞이했다.소파에 앉아있던 박수아가 환하게 웃으며 그를 훑어보았다.“깼어요? 배 안 고파요? 음식 준비해 줄까요?”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확연히 야윈 전인국이 앉아있었다.미국에 있어야 할 아버지가 왜 여기에...! 입국했다는 소리는 전혀 못 들었는데.불안한 예감이 밀려오고 전동하는 얼굴을 들이미는 박수아를 힘껏 밀어냈다.“그쪽이 꾸민 짓입니까?”박수아와 전인국을 번갈아 바라보던 전동하는 S시 프로젝트와 관련된 루머 뒤에 뭔가 더 큰 음모가 숨겨져 있음을 눈치챘다.내가 너무 안일했어. 전기섭이 다친 걸 알면 아버지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데...은정 씨는 지금 자기가 얼마나 위험한지도 모르고 있을 거 아니야.한편, 말없이 소파에 앉아있던 전인국이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잔뜩 굳은 얼굴로 그를 훑어보던 전인국이 입을 열었다.“그쪽? 이제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않는 거냐? 네가 내 아들로 태어난 걸 고맙게
하지만 전동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아버지의 표정을 살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집으로 다시 돌아와 그룹 경영을 맡으라고...?복권 1등 100장보다 더 갚진 기회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게다가 정말 그렇게 좋은 마음으로 온 거라면 이렇게 납치하 듯 불러들이지도 않았을 터...“그건 아버지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제 인생 어떻게 살지는 제가 알아서 결정합니다. 제 일에 신경 끄세요.”말을 마친 전동하는 미련없이 돌아섰다.그에겐 소은정이 전인그룹 경영권보다 훨씬 더 소중했으니까.지금쯤이면 그가 사라졌다는 걸 눈치챘을 텐데 얼마나 걱정하고 있을까...하지만 총총 달려온 박수아가 다급하게 그를 불러세웠다.“전 대표님. 아직 좀 더 쉬셔야 해요. 그리고 아버님이랑 오랜만에 만나는 걸 텐데 식사라도 하고 가시지 그래요?”그녀의 목소리에 전동하가 발걸음을 멈추었다.“도대체 아버지한테서 뭘 받기로 했길래 여기서 이짓거리를 하고 있는 겁니까?”뼛속까지 시릴 정도로 차가운 시선에 박수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그 자리에 굳어버린 박수아가 전인국의 눈치를 살폈다.“수아양은 기섭이 학교 후배야. 명문대 출신이기도 하고 전인그룹 경영팀 팀장으로 스카우트 할 생각이다. 두 사람 같이 미국으로 들어와.”역시... 아버님, 믿고 있었다고요!박수아가 두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돌렸지만 그녀를 맞이하는 건 전동하의 차가운 미소뿐이었다.“경영팀 팀장? 하, 두 사람 꽤 큰 거래를 하신 모양이에요? 그런 자리에 이제 학교를 졸업한 초짜를 덜컥 앉힐 정도면.”속셈을 들킨 박수아가 발끈했다.“동하 씨,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나 나름 아이비리그 대학교 출신에 능력있는 여자예요. 내가 은정 씨랑 사이가 안 좋은 건 맞지만 동하 씨랑은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 내 능력까지 비하하지 말아줘요.”“은정 씨랑 사이가 안 좋은 게 어떻게 나랑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죠?”박수아를 훑어보던 전동하가 픽 헛웃음을 흘렸다.매정한 그의 모습
지나친 정보량에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박수아의 눈이 동그래졌다.전기섭이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아? 그리고 동하 씨가 전인그룹 후계자가 될 거라고? 게다가... 전기섭을 그렇게 만든 게 진짜 소은정이란 말이야?무지막지한 비밀을 알게 되었단 생각에 콩닥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박수아는 다시 전동하의 모습을 살펴보았다.평소에 봤던 전동하는 태양신의 가호를 받기라도 하듯 항상 밝고 따뜻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비록 전인그룹과의 연결고리는 끊어졌지만 혼자 힘으로 훌륭한 사업체를 키워낸 그는 항상 당당하고 멋진 모습이었다.하지만 지금 그녀 앞에 서 있는 전동하는 전에 보았던 따뜻한 미소가 전부 거짓이었나 싶을 정도로 날카롭고 매서웠다.한편, 이 상황이 마땅치 않은 건 전인국도 마찬가지였다.기섭이만 멀쩡했었어도 전인그룹을 저 사생아 자식한테 물려줄 일은 없었을 텐데... 전동하, 너한테도 절호의 기회라는 걸 잘 알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내 개가 돼. 널 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면 그것도 나름 나쁘지 않겠지.하지만 전동하는 그의 가식적인 호의를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큭큭큭...”한참을 고개 숙여 웃던 전동하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하, 이제 와서 아들 취급이라도 해주시려는 겁니까? 그냥 하던대로 삼촌 뒷바라지나 하세요. 아니, 삼촌이 아니라... 형인가?”담담한 목소리로 내뱉은 충격적인 말에 전인국의 흐릿한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충격이 컸는지 살짝 휘청이던 그는 의자 등받이를 손으로 잡아 겨우 중심을 잡았다.“너... 너 지금 뭐라고 했어?”전동하의 말에 충격을 받은 건 박수아도 마찬가지였다.내가 지금... 도대체 뭘 듣고 있는 거야? 막장인 걸로 치자면 우리 집안도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인데... 이 집안은 진짜 콩가루잖아?한편, 전인국은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는 아들이 이 순간만큼은 악마처럼 느껴졌다.당혹스러움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전인국의 눈동자가 천천히 붉게 물들였다.“왜요? 평생 숨기고
“아니지. 아버지가 죄책감 같은 걸 느낄 리가 없죠. 그런 건 인간이나 느끼는 감정일 테니까. 아들보다 남동생을 더 끔찍하게 아끼는 그 모습, 누가 봐도 정상은 아니니 수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겁니다. 이 비밀 관짝까지 가지고 가고 싶으면 행동거지 조심하세요.”다시 돌아선 전동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래... 잘 참았어...“전동하! 감히 나한테 그딴 식으로 말을 해? 더러운 사생아 자식, 먹여주고 재워줬더니 말도 안 되는 루머로 우리 가문의 얼굴에 똥물을 끼얹어?”하지만 전동하는 전씨 일가의 체면 따위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이미 콩가루인 집안, 더 잃을 체면 같은 게 남아있었나?“피차 얼굴 보면 역겹고 기분 더러운 건 마찬가지니 저한테서 관심 끄세요. 그리고 은정 씨한테도요. 가만히 있는 사람 자꾸 들쑤시지 말라는 말입니다. 안 그럼... 어느 날 아침 기사 톱라인에 이 재밌는 가십거리가 뉴스로 올라오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기자들이 환장할 만한 소재잖아요?”하지만 전인국도 이대로 물러날 위인은 아니었다.“넌 몰라도 소은정 그 여자는 안 돼. 박수혁 대표가 대단하긴 하더라. 법적으로 해결할 만한 증거는 아주 다 지워버렸더라고? 그런데 날 너무 무시한 거 아니니? 내가 정말 못 알아낼 거라 생각했어?”전인국의 주름진 목이 팽창된 힘줄의 흔적으로 꿈틀거렸다.“우리 기섭이 그렇게 만들어놓고 평생 하하호호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야? SC그룹의 딸이라고 해도 상관없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대가는 치르게 만들 테니까.”“지금 뭐라고 하셨어요?”다시 돌아선 전동하 역시 악마가 빙의라도 된 듯 무시무시한 얼굴로 전인국을 노려보았다.“전기섭 그 자식이 왜 그렇게 됐는지는 모르시나 봐요? 자업자득이니 업보다 생각하고 평생 병수발이나 드세요. 은정 씨 털끝 하나라도 건드려 봐요. 정말 가만히 안 있습니다.”전인그룹의 추잡한 비밀은 전동하의 목숨을 지키는 부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내가 은정 씨를 지킬
바보 같이 눈 앞에 굴러들어온 기회를 차버리는 전동하가 안타까웠고 그를 이렇게 만든 소은정이 질투나고 미웠다.“난 전씨 집안 사람이 아닙니다. 설령 나랑 결혼한다 해도 그쪽이 원하는 건 얻지 못할 거예요. 그러니까 포기해요.”박수아가 진짜 원하는 건 그가 아니라 전인그룹이라는 걸 훤히 들여다 본 전동하가 다시 한 번 강조했다.뭐...?충격을 받은 듯 눈물로 얼룩진 박수아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후회할 거야...! 여자 때문에 미래를 포기해? 당신 결국 후회하게 될 거라고.”한편, 점점 강렬하게 느껴지는 불안한 예감에 전동하의 가슴은 미친 듯이 쿵쾅대기 시작했다.전인국이 아무런 준비 없이 덜컥 한국 땅을 밟았을 리가 없다.박수혁 대표도 아버지가 귀국했다는 건 모르는 눈치였어. 그리고 박수아... 저 여자를 이용해 뭘 하려는 걸까...? 설마...뭔가 떠오른 전동하가 허둥지둥 주머니를 뒤졌지만 그곳에 있어야 할 휴대폰은 만져지지 않았다.이대로 가만히 있을 순 없어.“동하 씨... 잠깐...”박수아의 처절한 외침에도 전동하는 냅다 밖으로 달리기 시작했고 눈 깜박할 사이에 자취를 감추었다.한편, 방금 전 무음모드로 해놓은 박수아의 휴대폰 액정에 “양 회장”이라는 단어로 불을 밝혔다 꺼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다행스럽게도 그의 예상대로 전동하가 있었던 곳은 소은정이 묵는 호텔과 굉장히 가까웠고 초인적인 힘으로 전력질주를 한 전동하는 혼란스러운 뉴욕 거리를 헤치며 3분만에 호텔에 도착했다.“헉헉헉...”거친 숨을 몰아쉬며 나타난 전동하의 모습에 경호원들이 당황하고 마침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온 우연준 역시 눈이 휘둥그레졌다.“전 대표님?”겨우 숨을 돌린 전동하가 물었다.“은정 씨는요?”“사라지셨습니다. cctv 영상 확인해 봤는데 약 7분 전에 스스로 운전을 해서 호텔을 빠져나가셨어요.”우연준이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어디로 이동했는지는 못 알아냈어요?”“하필 그 시간대에 CCTV에 문제가 생겨서... 지금 전화도 안 받으시
휴대폰을 다시 우연준에게 넘긴 전동하가 말했다.“박수아한테 전화 걸어줘요.”휴대폰을 받은 우연준이 그녀의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고 잠시 후.“여보세요?”휴대폰을 빼앗은 전동하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박수아 씨, 은정 씨 지금 어디 있습니까? 다 알고 있는 거 아니까 말해 줘요.”하지만 박수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3, 4초 동안 침묵이 흘렀을까?다급해진 전동하는 거칠게 넥타이를 풀어헤쳤다.“박수아 씨, 소씨 일가 사람들은 가만히 있을 것 같습니까? 은정 씨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쪽에서도 어떻게든 알아볼 테고 이 일에 박수아 씨가 연루되어 있다는 것도 곧 알아낼 겁니다. 박수혁 대표가 은정 씨 좋아하는 거 알죠? 은정 씨 때문에 자기 여동생과도 의절한 남자입니다. 얼굴 몇 번 본 적 없는 사촌동생 정도야 기꺼이 내줄 거예요. 오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 죄는 전부 박수아 씨가 뒤집어쓰게 된다는 겁니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전동하는 최대한 분노를 억누르며 객관적으로 상황을 설명했다.역시나, 그의 설득이 먹힌 건지 수화기를 통해 박수아의 숨이 가빠지고 있음이 그대로 느껴졌다.“그... 그럴 리가 없어요.”하,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설마 양 회장을 믿는 겁니까? 오늘 기자가 모습을 드러낸 걸 보면 소찬식 회장과 화해하려는 모양인 것 같던데... 피 한 방울 안 섞인 손녀의 편을 들어줄 것 같아요?”전동하의 말에 박수아의 마지막 버팀목마저 부숴지고 말았다.박수아는 박씨 일가에서 애매한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다. 박대한과 박수혁을 믿고 이기적인 성격으로 자란 박예리는 별의별 해괴한 짓을 저질러도 곱게 자라서, 세상물정을 몰라서란 이유로 무사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달랐다. 오히려 애매한 위치 덕분에 박수아는 어려서부터 그녀에게 유리한 사람과, 불리한 사람들을 가려야 한다는 법을 깨우쳤고 더 죽도록 공부해 나름 훌륭한 학벌도 얻어냈다.소은정을 잘못 건드린 박예리가 미국으로 쫓겨났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하지만 각목 따위로 철제 문이 열릴 리가 없었고 오히려 벌어진 문틈 사이로 연기가 더 밀려들 뿐이었다.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각목을 내리치는 소은정의 팔도 힘이 점점 떨어졌지만 소은정은 벽에 기댄 채 발악을 멈추지 않았다.휴대폰도 여전히 먹통...이런 절망감은 진짜 오랜만이네... 이대로 죽으면 안 되는데...“그렇게나 오래? 우리 은정이 바보 된 건 아니겠죠?”잠시 후, 이때 환청처럼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그녀의 정신이 다시 돌아오는 듯했다.“그게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소리야. 너 정말...!”“아빠, 나 지금 얘 때문에 열 몇 시간 동안 비행기 타고 날아왔어요. 안아주지는 못할 망정... 진짜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저리 꺼져. 징그럽게 얘가 왜 이래.”평소처럼 투닥거리는 시끌벅적한 가족들의 목소리가 마치 거대한 힘처럼 깊은 심연으로 빠지려는 그녀를 확 끌어당겼다.“헉!”겨우 정신을 차린 소은정의 눈 틈 사이로 맑은 햇살과 창문 사이로 하늘거리는 나뭇가지가 보였다.갑작스러운 빛에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은 소은정이 어떻게든 움직여 보려고 움찔거렸지만 누군가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어 꿈쩍도 할 수 없었다.안전한 상황은 맞는 것 같은데... 누구지?다시 눈을 뜬 그녀의 시야에 정신을 잃는 마지막 순간 가장 그리웠던 남자의 얼굴이 들어왔다.그녀의 모습을 1초도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 눈을 똑바로 뜨고 있는 그의 모습이 왠지 안쓰럽게 느껴졌다.푸르스름한 수염이 자란 까칠한 턱과 눈 아래를 채운 다크서클...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으음...”소은정의 목소리에 흠칫하던 전동하의 눈동자에 드디어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그가 물었다.“깬 거예요? 은정 씨, 내 얼굴 알아보겠어요?”미간을 찌푸린 소은정은 뭔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목과 입안이 바싹 말라 도저히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그 모습에 얼굴이 사색으로 변한 전동하가 벌떡 일어섰다.“의... 의사선생님!”아니... 그냥 물이라도 좀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