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한숨을 내쉰 양 회장이 주위를 살짝 둘러보다 수저를 내려놓았다.“사실... 이번 일은 나도 도움이 못 될 것 같아. 그래도 마침 오늘 자리에 한 사람들 중에 그쪽 업무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이 많으니 대화는 나눠보렴.”양 회장의 눈짓에 장 검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사실 회장님도 잘 아시겠지만 이번 사건...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까다롭습니다. 소 대표님도 아시다시피 요즘 여론 환경이 많이 달라졌어요. 게다가 이번 사건은 소비자들의 건강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문제이니 조용히 해결하는 건 어렵지 않을까 싶네요...”장 검사의 말에 다른 국회위원도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맞습니다. 폭로글을 작성한 기자 본인이 직접 해명하지 않는 이상... 쉽게 끝날 것 같진 않군요.”“그런데 그 기자 지금 잠적 상태라면서요?”“휴, 이렇게 시간을 끄는 것도 그룹 입장에선 좋을 게 없는데요. 잘 진행되던 프로젝트 날개가 꺾이겠어요...”“감사도 들어갔다던데... 재점검 결과가 나오면 해결되지 않을까요?”...너도 나도 자기 의견을 밝혔지만 프로젝트 자체와 SC그룹을 걱정하는 듯한 그들의 말에는 그 어떤 영양가도 담겨있지 않았다.누구나 할 수 있는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해졌다.얼굴에 띤 미소를 유지하는 게 점점 더 힘들어질 무렵, 물 한 모금을 마신 소은정이 양 회장을 바라보았다.“전 회장님 의견이 더 궁금한데요.”애써 소은정의 시선을 무시하던 양 회장이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사실 내 의견도 저 분들과 별 다르지 않아. 지금 뭔가 조치를 취해 봤자 소비자들의 반감만 얻게 될 거다. 점검 결과가 나오면 의심도 비난도 자연스럽게 사라지지 않겠니?”양 회장을 빤히 바라보던 소은정이 피식 웃었다.“알겠습니다. 귀한 시간 내주시고 이렇게 좋은 인맥도 쌓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께서 얼마나 절 걱정하고 계신지 느낄 수 있는 자리였어요.”말을 마친 소은정이 잔에 담긴 술을
그뒤로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정말 취한 것 같네요...”“자기도 마음이 착잡하겠지...”“회장님, 정말 모르는 척하실 겁니까? SC그룹이 주관하고 있는 프로젝트 아닙니까? 소찬식 회장이 직접 나서면 거절하기 힘들 텐데요...”이에 박수아가 코웃음을 쳤다.“소 회장님이 이런 일에 직접 나설 리가 있나요? 이 정도 일도 수습 못 한다며 혼이나 안 내면 다행이죠. 능력있는 척 온갖 이미지 플레잉은 다 하더니. 이제 밑천이 다한 것뿐이에요. 다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계세요...”승리의 기쁨에 잠긴 박수아를 힐끗 바라보던 양 회장이 진지한 얼굴로 주의를 주었다.“수아야, 너도 정도껏 해. 소 회장은 나랑 꽤 친한 사이야. 소 회장이 직접 연락 오면 나도 그쪽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어.”“그럼 일단 계속 시간을 끌면 되는 거죠?”장 검사의 질문에 양 회장이 한숨을 내쉬었다.“그래. 아직 어리니 별 다른 방법이 없을 거야. 아버지한테 부탁하든 수아한테 사과를 하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겠지. 우리 수아 기분을 풀어줄 수만 있다면 이 정도야 뭐.”박수아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양 회장의 모습에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 자체가 달라졌다.박수아 때문에 소은정 대표의 부탁을 거절한다라... 그냥 박수혁 대표의 사촌동생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좀 더 잘 보일 필요가 있겠어...“고마워요, 할아버지. 저도 할아버지 입장 난처해지시지 않게 정도껏 할게요.”양 회장의 팔짱을 끼며 애교를 부리던 박수아의 눈빛이 서늘하게 번뜩였다.소은정... 멍청한 여자는 아니니 오늘 할아버지가 왜 부탁을 거절했는지도 눈치챘겠지...한편, 별장을 나선 소은정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몸을 꼿꼿이 세웠다.그녀가 진짜 취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던 최성문도 자연스레 그녀의 팔목을 놔주었다.“호텔로 돌아가실 겁니까?”10시네...시간을 확인한 소은정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비록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지만 아무 수확도 없다고 볼 순 없었다. 적당한 인맥 따위
강서진의 “전략”에 소은정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아차, 실수했다...순식간에 변하는 그녀의 표정에 강서진의 등골이 오싹해졌다.“사람 참 쉽게 안 변해요. 당신 같은 쓰레기가 제대로 된 조언을 할 거라 생각했던 내가 잘못이지... 추하나 씨도 하루빨리 정신 차리고 당신한테서 벗어났으면 좋겠네요. 추하나 씨가 원하면 두 사람 이혼 내가 물심양면으로 도울 거예요.”경멸 가득한 소은정의 표정과 날카로운 목소리에 강서진의 표정 역시 점점 더 어두워졌다.사실 강서진이 이런 조언을 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박수아가 전동하와 만난다면 박수혁에게도 다시 기회가 생기는 것이니 슬쩍 던진 것뿐인데 이 정도로 반감을 느낄 줄이야.그리고 추하나까지 언급하는 소은정의 모습에 강서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겨우 다시 찾은 사랑을 눈 뜨고 빼앗길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서였다.소은정이 정말 추하나를 돕는다면 어쩌면 평생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그건 안 돼... 절대 안 돼...!이때 최성문을 태운 차량이 천천히 다가오고 소은정 역시 또각또각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강서진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다급하게 외쳤다.“잠... 잠깐만요.”또 무슨 소리를 지껄이려고...?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소은정의 모습에 강서진은 본능적으로 움찔했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다. 다른 방법이 있어요.”“뭔데요?”인내심이 바닥난 소은정이 정말 욕이라도 내뱉기 전에 강서진이 대답했다.“사진... 그 사진만 넘겨요. 그럼 내가 할아버지한테 부탁해 볼게요. 솔직히 수양딸의 딸? 따지고 보면 그냥 남이잖아요? 혈연으로 엮인 나랑은 차원이 다르다고요. 내가 직접 부탁드리면 할아버지도 못 이기는 척 들어주실 거예요.”강서진의 말을 듣고 있던 소은정이 코웃음을 쳤다.그 웃음이 모욕처럼 느껴졌지만 강서진은 말을 이어갔다.“그 대신 앞으로 나랑 하나 일에 간섭하지 말아요. 우리 두 사람 이제 곧 재혼할 거예요. 다른 사람 결혼 생활에 이
박수혁의 섬뜩한 목소리에 강서진은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지만 곧 이성을 되찾았다.으이그, 지금 속 편하게 잠이나 잘 때가 아니라고, 이 양반아...“형, 큰일났어.”이 사건에 태한그룹이 엮여있다는 걸 안 이상 박수혁도 무조건 알아야만 했다. 모든 게 끝난 뒤에 박수혁이 알게 된다면...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그도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정말 큰일날지도 모르니까.“뭔데.”오랜만에 듣는 강서진의 다급한 목소리에 박수혁도 진지하게 임했다.“그게 SC그룹에서 진행하는 지성그룹 프로젝트에 문제가 조금 생겼거든? 그런데 그 루머를 퍼트린 사람이... 태한그룹 사람이래.”...죽음 같은 침묵이 한동안 이어지고 혹시 전화가 끊겼나 싶어 휴대폰을 확인한 강서진이 머리를 갸웃했다.“형, 듣고 있어?”한참 뒤에야 감정을 추스린 박수혁이 물었다.“그게 무슨 소리야. 태한그룹 사람이라니.”“은정 씨가 직접 말했으니 거짓말은 아닌 거야. 오늘 은정 씨 진짜 화 많이 났어... 양 회장 알지? 우리 작은 할아버지? S시는 꽉 잡고 있는 분이시니까 그쪽에 부탁하러 왔었는데 좀 잘 안 풀렸거든...”잠이 확 달아난 박수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오늘 저녁에 있었던 일 하나도 빼놓지 말고 다 얘기해. 특히 은정이가 했던 말 한 마디도 빼놓지 말고 전부!”박수혁의 말에 강서진이 억울하다는 듯 발로 바닥을 굴렀다.지금 소은정이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닌데...하지만 심상치 않은 박수혁의 목소리에 순순히 자조치종을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물론 박수아가 전동하 때문에 이런 짓을 꾸몄다는 건 쏙 빼고 말이다.이 사건에 전동하까지 엮여있다는 걸 알면 정말 화병으로 미국에서 비명횡사할지도 모르니까...마지막으로 강서진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한 마디 덧붙였다.“내가 볼 땐 태한그룹 쪽 사람인 건 거의 확실한 것 같은데... 정확히 누구란 걸 말 안 하는 걸 보면 은정 씨도 정확히 알아내진 못한 모양이야...”“띠띠띠...”이 말을 마지
굳은 표정의 소찬식이 고개를 저었다.“아니. 양 회장은 아주 똑똑한 사람이야. 특히 젊은 사람들의 부탁을 들어주면서 묘한 우월감을 느끼는 타입이지. 웬만하면 부탁을 들어줄 법도 한데 이렇게 나왔을 때는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거야.”잠깐 고민하던 집사가 말을 이어갔다.“회장님, 조금 더 기다려 보시는 게 어떨까요? 아가씨 능력이라면 양 회장 도움 없이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이에 소찬식이 눈썹을 치켜세웠다.“은정이를 그렇게나 믿는단 말이야?”“그럼요. 은정 아가씨는 어렸을 때부터 쭉 봐왔는 걸요. 아가씨라면 분명 해내실 거예요.”집사의 인자한 미소에 소찬식도 기분이 좋아졌지만 짐짓 그를 흘겨보았다.“참나. 누가 보면 자네가 우리 은정이 아빤 줄 알겠어. 나도 우리 딸 믿어!”“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시죠. 정말 도움이 필요할 때면 직접 찾아올 겁니다. 은정 아가씨는 유연한 분이시니까요.”집사의 위로에 어느새 기분이 좋아진 소찬식이 훨씬 다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자네 말에도 일리가 있네. 나 혼자 속 끓여봐야 아무 소용 없지. 정 안 되면 내가 직접 나설 수밖에.”...호텔로 돌아온 소은정은 기분 전환을 위해 욕조에 몸을 담그었다.따뜻한 물의 온기와 은은한 향초의 향기에 피곤함이 밀려들고 눈꺼풀이 저절로 내려오려던 그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정신이 번쩍 든 소은정이 순간 얼굴을 찡그렸다.박수혁 이 인간이 왜...받을까 말까 한참 고민하던 그녀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뭔데?”미국에서 도움 받은 게 있으니까 상대해 주는 줄 알아...소은정의 날카로운 반응에 박수혁 역시 살짝 흠칫했다.“지성그룹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겼다면서?”하, 빨리도 아셨네...“강서진 그 인간이 말했어? 하, 두 사람 혹시 사귀어?”매일 쌍둥이처럼 붙어다니는 꼴이 아무리 봐도 보통 친구처럼 보이지 않는단 말이야...장난스러운 소은정의 목소리와 달리 박수혁은 진지하기만 했다.“이번 일 태한그룹과 상관없는 일이야.”“하,
샤워를 마친 소은정이 욕실을 나온 순간, 휴대폰이 또다시 울렸다.당연히 박수혁이라고 생각한 소은정이 발신인 확인도 하지 않고 짜증스레 전화를 받았다.“진짜 짜증 나게 왜 이래?”다짜고짜 화부터 내는 소은정의 모습에 잠깐 동안의 침묵이 이어지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간질였다.“누가 우리 은정 씨 이렇게 화 나게 만들었어요?”동하 씨...?그제서야 소은정은 자신이 하루종일 전동하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음을 인지했다.오늘 너무 바빠서 문자 한 번을 못 했네... 내 연락 기다렸을 텐데 난 다짜고짜 화나 내고... 진짜 최악이다.“별거 아니에요. 아직 안 잤어요?”소은정은 자연스레 화제를 돌리려 했지만 전동하는 쉽게 넘어가주지 않았다.“별거 아닌 사람 때문에 이렇게 화를 낸다고요? 뭔데요?”하... 예리하네.“박수혁 때문에요.”오늘 겪었던 일이 다시 떠오르고 왠지 울컥하는 마음에 소은정은 자초지종을 전동하에게 말해 주었다.“...”전동하의 침묵에 소은정이 조심스레 물었다.“듣고 있어요? 리액션 좀 해줄래요? 아니면 동하 씨도 내가 한심해요?”그제야 전동하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아, 미안. 생각 좀 하느라고요.”“무슨 생각이요?”여느 때와 다름없는 목소리에 소은정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화난 줄 알았네...“범인이 누굴지에 대해서요.”“그 기자부터 찾아내면 뭐든 알아낼 수 있겠죠.”생각하면 할수록 짜증 나네. 아주 잡히기만 해봐. 내가 가만히 안 둘 거야.“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벌인 일일까요? 아니면 상업적인 음모일까요?”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에 소은정이 흠칫했다.예리한 전동하의 질문에 혼돈 같았던 상황의 실마리가 조금은 보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동하 씨 생각엔 어때요?”“지성그룹 프로젝트는 S시 경제발전에도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예요. 정부 측에서 쉽게 허가를 내준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상업적인 견제였다면 아마 계약 체결 전에 태클을 걸지 않았을까요?”“그럼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다음 날 오전 10시.소은정은 우연준이 방문을 두드릴 때쯤에야 부스스 눈을 떴다.시간을 확인한 소은정은 묘한 죄책감에 사로잡혔다.지금 상황이 이 모양인데 속 편하게 늦잠이나 자고 있었던 거야?그녀가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끝내니 마침 우연준이 주문한 룸 서비스가 도착했다.정갈한 음식들이 식탁을 가득 채웠지만 입이 깔깔한 것이 도저히 입맛이 돌지 않았다.대충 먹는둥 하던 소은정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기자 쪽은 좀 어때요?”“아직 신변 확보는 안 됐지만 현재 거주 중인 아파트와 본가 주소까지 알아냈습니다.”우연준의 대답에 소은정이 눈을 반짝였다.“그래서요? 뭐 좀 알아낸 거 있어요?”“기자 본인과 가족들의 계좌를 다 확인해 봤는데 며칠 전 어머니 명의로 된 계좌에 5억이 입금되었더군요. 해외 계좌로 입금되었고 지금은 말소된 상태라 추적하기가 힘듭니다.”살짝 고개를 끄덕인 소은정은 저도 모르게 식탁보를 꽉 부여잡았다.역시... 우연히 일어난 사고 같은 게 아니라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거였어.“어머니란 사람도 만나봤는데 그냥 평범한 주부였습니다. 아들이 평소 무슨 일을 하는지도 돈의 존재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는 눈치였어요. 그래도 집 근처에 사람들을 풀어뒀으니 기자가 모습을 드러내면 바로 연락올 겁니다.”“그래요.”“그리고... 댓글 상황은 여전히 안 좋습니다. 지나친 댓글은 적당히 삭제하고 있습니다만... 영상 자체를 차단하기엔 좀... 저희의 움직임을 눈치채면 대중들은 더 반감을 가질 겁니다.”“그래요. 상대가 다시 움직임을 드러내기 전에 아무것도 하지 말아요.”“네. 환경부 쪽에서 저희 편을 조금이라도 들어준다면 확실히 편해질 텐데요.”우연준의 말에 차가운 미소를 짓던 소은정이 티슈로 입을 닦아냈다.“하, 그쪽 사람들도 국민들 눈치 보느라 쉽게 나서진 못할 거예요.”“차라리 회장님께 부탁드릴까요? 회장님 부탁이라면 양 회장도 못 이기는 척 도울 겁니다.”“아니요. 양 회장 쪽에는 다시 연락하지 않을 거예요. 부탁
꽤 큰일이 일어났으니 누군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더 이상 이 회사에서 얼굴 들고 다닐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에서 한 말이었다.한편, 이건이 이렇게 나올 거라 예상하지 못한 듯 소은정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이 팀장님. 지금 팀장님께서 하고 계신 일 설령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 해도 더 좋은 결과가 나오진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이번 일은 이 팀장님의 무능함 때문에 일어난 게 아니에요. 그저 운이 좀 안 좋으셨던 것뿐이죠. 도망칠 생각부터 하지 말고 일단 이 상황을 수습할 방법부터 생각해 보죠.”소은정의 진심 어린 말에 이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어제보다 훨씬 부드러운 태도에 이건의 마음도 조금이나마 홀가분해졌다.어제까지만 해도 이건은 소은정이 그의 무능함을 탓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의 뜻은 곧 그룹의 뜻이나 마찬가지.이 나이에 회사에서 해고될 바에야 스스로 물러나는 게 보기에도 훨씬 좋을 것 같아 미리 선수를 친 거기도 했다.하지만 직장에서 십여 년간 구른 그도 막막하게 느껴지는 이 상황에서 소은정의 태도는 생각외로 차분했다.무엇보다 지금까지 그가 들였던 노력을 인정해 주고 무덤덤하게 건네는 그녀의 위로가 이건의 가슴을 울렸다.“이번 일로 회사 측에서도 손실을 많이 입었을 테니 주주들도 아마...”고개를 푹 숙인 이건이 말끝을 흐렸다.“돈은 다시 벌면 그만이에요. 그리고 S시의 상황에 대해 주주들도 알고 있으니 별 의견은 없을 겁니다. 물론 불만을 가진 이가 한 사람도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만... 그 정도 불만이야 항상 있었던 거니까요. 이 팀장님이 지금까지 이룬 성과에 비할 바가 못 되죠.”주주들이 이러쿵저러쿵 하는 게 뭐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럼 뭐 어쩔 건데? 대주주는 나인데.소은정의 말에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려 애쓰던 이건이 이를 꽉 깨물고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대표님. 회사가 절 필요로 하는 한 최선을 다해 일하겠습니다.”“네. 우 비서님 커피 좀 부탁할게요.”잠시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