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은 표정의 소찬식이 고개를 저었다.“아니. 양 회장은 아주 똑똑한 사람이야. 특히 젊은 사람들의 부탁을 들어주면서 묘한 우월감을 느끼는 타입이지. 웬만하면 부탁을 들어줄 법도 한데 이렇게 나왔을 때는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거야.”잠깐 고민하던 집사가 말을 이어갔다.“회장님, 조금 더 기다려 보시는 게 어떨까요? 아가씨 능력이라면 양 회장 도움 없이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이에 소찬식이 눈썹을 치켜세웠다.“은정이를 그렇게나 믿는단 말이야?”“그럼요. 은정 아가씨는 어렸을 때부터 쭉 봐왔는 걸요. 아가씨라면 분명 해내실 거예요.”집사의 인자한 미소에 소찬식도 기분이 좋아졌지만 짐짓 그를 흘겨보았다.“참나. 누가 보면 자네가 우리 은정이 아빤 줄 알겠어. 나도 우리 딸 믿어!”“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시죠. 정말 도움이 필요할 때면 직접 찾아올 겁니다. 은정 아가씨는 유연한 분이시니까요.”집사의 위로에 어느새 기분이 좋아진 소찬식이 훨씬 다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자네 말에도 일리가 있네. 나 혼자 속 끓여봐야 아무 소용 없지. 정 안 되면 내가 직접 나설 수밖에.”...호텔로 돌아온 소은정은 기분 전환을 위해 욕조에 몸을 담그었다.따뜻한 물의 온기와 은은한 향초의 향기에 피곤함이 밀려들고 눈꺼풀이 저절로 내려오려던 그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정신이 번쩍 든 소은정이 순간 얼굴을 찡그렸다.박수혁 이 인간이 왜...받을까 말까 한참 고민하던 그녀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뭔데?”미국에서 도움 받은 게 있으니까 상대해 주는 줄 알아...소은정의 날카로운 반응에 박수혁 역시 살짝 흠칫했다.“지성그룹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겼다면서?”하, 빨리도 아셨네...“강서진 그 인간이 말했어? 하, 두 사람 혹시 사귀어?”매일 쌍둥이처럼 붙어다니는 꼴이 아무리 봐도 보통 친구처럼 보이지 않는단 말이야...장난스러운 소은정의 목소리와 달리 박수혁은 진지하기만 했다.“이번 일 태한그룹과 상관없는 일이야.”“하,
샤워를 마친 소은정이 욕실을 나온 순간, 휴대폰이 또다시 울렸다.당연히 박수혁이라고 생각한 소은정이 발신인 확인도 하지 않고 짜증스레 전화를 받았다.“진짜 짜증 나게 왜 이래?”다짜고짜 화부터 내는 소은정의 모습에 잠깐 동안의 침묵이 이어지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간질였다.“누가 우리 은정 씨 이렇게 화 나게 만들었어요?”동하 씨...?그제서야 소은정은 자신이 하루종일 전동하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음을 인지했다.오늘 너무 바빠서 문자 한 번을 못 했네... 내 연락 기다렸을 텐데 난 다짜고짜 화나 내고... 진짜 최악이다.“별거 아니에요. 아직 안 잤어요?”소은정은 자연스레 화제를 돌리려 했지만 전동하는 쉽게 넘어가주지 않았다.“별거 아닌 사람 때문에 이렇게 화를 낸다고요? 뭔데요?”하... 예리하네.“박수혁 때문에요.”오늘 겪었던 일이 다시 떠오르고 왠지 울컥하는 마음에 소은정은 자초지종을 전동하에게 말해 주었다.“...”전동하의 침묵에 소은정이 조심스레 물었다.“듣고 있어요? 리액션 좀 해줄래요? 아니면 동하 씨도 내가 한심해요?”그제야 전동하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아, 미안. 생각 좀 하느라고요.”“무슨 생각이요?”여느 때와 다름없는 목소리에 소은정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화난 줄 알았네...“범인이 누굴지에 대해서요.”“그 기자부터 찾아내면 뭐든 알아낼 수 있겠죠.”생각하면 할수록 짜증 나네. 아주 잡히기만 해봐. 내가 가만히 안 둘 거야.“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벌인 일일까요? 아니면 상업적인 음모일까요?”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에 소은정이 흠칫했다.예리한 전동하의 질문에 혼돈 같았던 상황의 실마리가 조금은 보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동하 씨 생각엔 어때요?”“지성그룹 프로젝트는 S시 경제발전에도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예요. 정부 측에서 쉽게 허가를 내준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상업적인 견제였다면 아마 계약 체결 전에 태클을 걸지 않았을까요?”“그럼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다음 날 오전 10시.소은정은 우연준이 방문을 두드릴 때쯤에야 부스스 눈을 떴다.시간을 확인한 소은정은 묘한 죄책감에 사로잡혔다.지금 상황이 이 모양인데 속 편하게 늦잠이나 자고 있었던 거야?그녀가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끝내니 마침 우연준이 주문한 룸 서비스가 도착했다.정갈한 음식들이 식탁을 가득 채웠지만 입이 깔깔한 것이 도저히 입맛이 돌지 않았다.대충 먹는둥 하던 소은정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기자 쪽은 좀 어때요?”“아직 신변 확보는 안 됐지만 현재 거주 중인 아파트와 본가 주소까지 알아냈습니다.”우연준의 대답에 소은정이 눈을 반짝였다.“그래서요? 뭐 좀 알아낸 거 있어요?”“기자 본인과 가족들의 계좌를 다 확인해 봤는데 며칠 전 어머니 명의로 된 계좌에 5억이 입금되었더군요. 해외 계좌로 입금되었고 지금은 말소된 상태라 추적하기가 힘듭니다.”살짝 고개를 끄덕인 소은정은 저도 모르게 식탁보를 꽉 부여잡았다.역시... 우연히 일어난 사고 같은 게 아니라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거였어.“어머니란 사람도 만나봤는데 그냥 평범한 주부였습니다. 아들이 평소 무슨 일을 하는지도 돈의 존재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는 눈치였어요. 그래도 집 근처에 사람들을 풀어뒀으니 기자가 모습을 드러내면 바로 연락올 겁니다.”“그래요.”“그리고... 댓글 상황은 여전히 안 좋습니다. 지나친 댓글은 적당히 삭제하고 있습니다만... 영상 자체를 차단하기엔 좀... 저희의 움직임을 눈치채면 대중들은 더 반감을 가질 겁니다.”“그래요. 상대가 다시 움직임을 드러내기 전에 아무것도 하지 말아요.”“네. 환경부 쪽에서 저희 편을 조금이라도 들어준다면 확실히 편해질 텐데요.”우연준의 말에 차가운 미소를 짓던 소은정이 티슈로 입을 닦아냈다.“하, 그쪽 사람들도 국민들 눈치 보느라 쉽게 나서진 못할 거예요.”“차라리 회장님께 부탁드릴까요? 회장님 부탁이라면 양 회장도 못 이기는 척 도울 겁니다.”“아니요. 양 회장 쪽에는 다시 연락하지 않을 거예요. 부탁
꽤 큰일이 일어났으니 누군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더 이상 이 회사에서 얼굴 들고 다닐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에서 한 말이었다.한편, 이건이 이렇게 나올 거라 예상하지 못한 듯 소은정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이 팀장님. 지금 팀장님께서 하고 계신 일 설령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 해도 더 좋은 결과가 나오진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이번 일은 이 팀장님의 무능함 때문에 일어난 게 아니에요. 그저 운이 좀 안 좋으셨던 것뿐이죠. 도망칠 생각부터 하지 말고 일단 이 상황을 수습할 방법부터 생각해 보죠.”소은정의 진심 어린 말에 이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어제보다 훨씬 부드러운 태도에 이건의 마음도 조금이나마 홀가분해졌다.어제까지만 해도 이건은 소은정이 그의 무능함을 탓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의 뜻은 곧 그룹의 뜻이나 마찬가지.이 나이에 회사에서 해고될 바에야 스스로 물러나는 게 보기에도 훨씬 좋을 것 같아 미리 선수를 친 거기도 했다.하지만 직장에서 십여 년간 구른 그도 막막하게 느껴지는 이 상황에서 소은정의 태도는 생각외로 차분했다.무엇보다 지금까지 그가 들였던 노력을 인정해 주고 무덤덤하게 건네는 그녀의 위로가 이건의 가슴을 울렸다.“이번 일로 회사 측에서도 손실을 많이 입었을 테니 주주들도 아마...”고개를 푹 숙인 이건이 말끝을 흐렸다.“돈은 다시 벌면 그만이에요. 그리고 S시의 상황에 대해 주주들도 알고 있으니 별 의견은 없을 겁니다. 물론 불만을 가진 이가 한 사람도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만... 그 정도 불만이야 항상 있었던 거니까요. 이 팀장님이 지금까지 이룬 성과에 비할 바가 못 되죠.”주주들이 이러쿵저러쿵 하는 게 뭐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럼 뭐 어쩔 건데? 대주주는 나인데.소은정의 말에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려 애쓰던 이건이 이를 꽉 깨물고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대표님. 회사가 절 필요로 하는 한 최선을 다해 일하겠습니다.”“네. 우 비서님 커피 좀 부탁할게요.”잠시 후,
소은정의 말에 사무실은 깊은 적막에 잠겼다.그녀의 설명을 듣고 있던 우연준의 표정은 걱정에서 충격으로 바뀌었다.그래. 꼭 나쁜 일이 아닐지도 몰라. 어쩌면 매출이 오히려 올라갈 수도 있겠어.파격적인 소은정의 제안에 놀란 건 이건도 마찬가지였다.잔뜩 흥분한 얼굴의 이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이러면 소비자들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 이번 사건의 배후에 누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선동을 받은 입주자들이 돈을 아무리 받아봤자 집 한 채 값은 아닐 테니까요. 게다가 이번 사건이 해결되면 집값이 다시 오를 텐데 그게 두려워서라도 섣불리 나서지 못할 거예요. 이 정도면 내일 입주자들 농성은 막을 수 있을 것 같아요.”며칠 내내 어둡기만 하던 이건의 얼굴에 드디어 미소가 피어올랐다.“그래요. 우리가 결백하다는 걸 명확하게 밝히는 겁니다.”이건의 연설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소은정이 눈썹을 치켜세웠다.“그러니까 어서 움직이셔야죠?”그녀의 말에 흠칫하던 이건과 우연준이 부리나케 사무실을 달려나갔다.소은정은 그저 큰 방향을 제시한 것뿐, 구체적인 조항은 위기 대응팀과 상의가 필요했으니까.하지만 오늘 소은정의 말에서 한 가지만큼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이제 대표님께서도 반격을 시작하시려는 거야.회사 직원들은 묘한 긴장감속에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였고 소은정도 사건 발생 첫날보다는 훨씬 더 차분한 마음가짐이었다.내가 대표로 있는 한 지성그룹 프로젝트는 절대 포기 못해.자금적인 손실은 차치하더라도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직원들의 직장을 위해서라도 이대로 물러날 순 없어.오후 5시, SC그룹의 첫 공식입장이 업로드되고 예상보다 더 강경한 태도는 큰 파장을 일으켰다.“진짜 그냥 루머였나 보네? 이렇게까지 강하게 나오는 걸 보면...”“SC그룹이 모함당한 건가?”“불만있는 입주자들은 바로 환불하면 되겠네.”“재점검 결과가 나오려면 6개월 정도는 걸릴 텐데... 그 사이에 몇 명이나 환불할 줄 알고. 그 손해를 다 감당하고서라도 결백을 밝히겠다면..
S시의 지리를 정확히 모르는 소은정은 정처없이 거리를 떠돌았다.어느새 골목의 끝에 도착하고 왠지 길을 잃은 듯한 느낌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소은정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이런 외딴 골목에 펍이 있네.잠깐 고민하던 소은정이 펍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가슴이 울릴 정도로 큰 음악소리가 그녀를 반겼다.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한산한 펍을 쭉 둘러보던 소은정은 대충 구석쪽에 자리를 잡았다.너무 피곤하다... 한 잔 하면서 긴장 좀 풀어야겠다.잠시 후, 누군가 그녀의 앞에 멈춰 서고 화려한 조명들을 가렸다.오랜만의 휴식을 또 누가 방해하는 건가 싶어 언짢은 마음에 소은정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박수아...?반갑지 않은 얼굴에 소은정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다.그녀의 뒤에는 훤칠한 남자 몇 명이 서 있었는데 그들의 몸에서 풍기는 독한 향수 냄새에 머리가 지끈거렸다.“여기서 다 보네요? 박수아 씨.”이에 박수아도 싱긋 미소를 지었다.“그러게요. 그런데 왜 혼자 있어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괜찮으시면 같이 합석할래요?”박수아의 질문에 소은정이 장난스러운 말투로 되물었다.“합석은 됐고 괜찮으면 박수아 씨, 여기서 좀 나가줄래요?”그녀의 체면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듯한 가시돋친 말투에 박수아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지만 곧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소은정 대표님. 여긴 A시가 아니에요. 그리고 이 펍이 그쪽 것도 아니고 무슨 자격으로 나가라 마라 하는 거죠?”경멸 어린 시선으로 박수아를 힐끗 바라보던 소은정이 핸드백을 집었다.“그러네요. 그럼 제가 나가죠.”박예리고 박수아고... 진짜 짜증 나네. 누가 박씨 집안 핏줄 아니랄까 봐. 하지만 소은정이 발걸음을 옮기기 전에 박수아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솔직히 난 당신이 나한테 먼저 연락하길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할아버지한테 다시 연락도 안 하고 정석적인 방법을 선택했던데요?”하, 피곤해서 그냥 넘어가주려고 했더니. 기어이 선을 넘네...형
그녀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소은정이 갑자기 픽 웃었다.“절 도와주고 싶으신가 봐요? 내가 용서를 빌면 정말 도와줄 건가요?”방금 전 그녀를 때리기라도 할 것처럼 다가오던 소은정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니 박수아도 턱을 치켜세웠다.“물론 그렇게 쉽게는 안 되죠. 나도 얻는 게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뭘요? 혹시 동하 씨인가요?”...소은정의 날카로운 질문에 박수아의 귀가 멍멍해졌다.시끄러운 음악소리를 뚫고 자신의 심장 박동이 더 크게 들릴 정도였다.하, 다 눈치채고 있었어?그녀의 알량한 욕망 따위 진작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소은정의 미소에 박수아는 왠지 벌거벗겨진 기분이 들었다.그리고 곧 주도권을 빼앗겼다는 모멸감이 그녀를 사로잡았다.겨우 정신을 차린 박수아의 목소리도 확연히 차가워졌다.“어차피 그쪽도 동하 씨 진심으로 좋아하는 거 아니잖아요? 이 정도 조건이면 쉽게 먹히는 거래 아닌가요?”이미 속마음을 들켰으니 박수아도 노골적으로 원하는 바를 밝혔다.“대표님 주위에야 남자들이 끊이지 않잖아요. 연예계 신인부터 그 천하의 박수혁 대표의 마음까지 잡았으니... 그러니까 이 세상 모든 게 다 그쪽 마음대로 될 줄 알았어요? 당신 같은 사람은 동하 씨한테 어울리지 않아요. 동하 씨는 당신 같은 여자랑 만나기에 너무 좋은 사람이라고요. 결국 가벼운 그쪽 마음에 지쳐서 상처만 받고 말 걸요? 그러니까 착한 사람 괴롭히지 말고 다른 사람 만나요.”전동하를 언급하니 눈에 띄게 긴장하는 박수아의 모습에 소은정은 화가 나기보다 왠지 웃음이 흘러나왔다.동하 씨가 이 말을 들었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풉... 박수아 씨. 맞아요. 동하 씨가 나 좋다고 매달려서 만났던 거예요. 그게 왜요? 동하 씨가 진짜 사랑하는 날 떠나서 당신을 만나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말을 마친 소은정은 다시 박수아를 훑어보았다.얼굴도 몸매도 별로네... 외모적으론 박씨 집안 유전자를 물려받지 못했나 봐?소은정의 차가운 목소리와 날카로운 눈빛이 박수아의 자존
깊이 숨을 들이쉰 박수아는 한참 뒤에야 마음이 편해졌다.큰 결심을 내린 듯한 박수아는 벌떡 일어서더니 바로 양 회장 집으로 향했다.저택에 도착하니 이미 그녀를 오래 기다린 듯한 양 회장이 미간을 찌푸렸다.“왜 연락이 안 돼! 난 무슨 일이라도 생겼는 줄 알았잖니!”박수아는 다소곳하게 허리를 숙였다.“그럴 리가요. 휴대폰 배터리가 나가서요.”하지만 양 회장의 표정은 여전히 어둡기만 했다.“그 뒤로 은정이한테서 다시는 연락이 안 왔어. 게다가 절차대로 재점검을 받겠다는 공식 성명까지 발표했잖니?”자신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소은정의 반응에 양 회장의 표정이 상당이 어두워졌다.“그러라고 하세요. 어차피 시간을 끌 수록 손해만 더 늘어날 테니까요. 설령 재점검 결과가 정상으로 나온다 해도 이번 프로젝트로 흑자를 내긴 힘들 거예요.”하지만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의 박수아와 달리 양 회장의 표정은 심각하기만 했다.“넌 정말 내가 SC그룹과 돌아서길 바라는 거냐? 소은정은 몰라도 소찬식은 보통 사람이 아니야. SC그룹만 아니었다면 내가 이 S시에 머물 리는 없었을 거란 말이다. 정말 소 회장과 사이가 틀어지면 우리에게 좋을 게 없어!”양 회장이 이렇게 화를 내는 모습을 처음 보는 박수아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할아버지가 저렇게나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니...“할아버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정 안 되면 며칠 뒤에 먼저 소은정 대표에게 연락을 해보시는 게 어때요? 재점검 결과를 더 빨리 얻을 수 있게 힘써 보겠다고 말하면 소은정도 바로 바짝 엎드릴 걸요?”하지만 양 회장의 표정은 여전히 어둡기만 했다.“며칠 뒤에? SC그룹이 이미 공식 입장까지 발표한 이상 내 도움을 필요없다고 말한 거나 마찬가지야.”그의 목소리에 박수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그럼 지금 먼저 연락하실 생각이신가요?”“수아야, 너와 은정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렇게까지 해야겠니? 일이 더 커지기 전에 그 기자 꼬리 자르기부터 해. 어떻게든 이번 일 수습하란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문준서는 그녀의 눈물을 보고 죄책감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새봄이가 점차 울음이 잦아들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새봄이는 길게 심호흡하고 감정을 식혔다.준서에게는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다.문준서는 울어서 빨갛게 부은 새봄이의 눈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커피 계속 마실 거야? 안 마실 거면 우리 집에 올래? 내가 맛있는 커피 만들어 줄게!”새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준서는 소녀의 손을 잡고 핸드백을 챙긴 뒤, 밖으로 나갔다.커피숍 직원들마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새봄이는 그와 손을 잡고 걷고 있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었다.어릴 때는 항상 손을 잡고 다녔는데 지금은 어딘가 어색했다.어린 문준서는 항상 새봄이를 우선으로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럴까?문준서는 소녀가 기억하는 어린 준서가 아니었다. 그의 거대한 뒷모습은 왠지 모를 안정감을 주었다.문준서가 웃으며 소녀에게 물었다.“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키 몇이야?”“192, 만족해?”새봄이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내가 키 큰 사람 별로라고 하면 뼈라도 깎을 거야?”문준서는 웃으며 소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응. 네가 집도해.”새봄이도 덩달아 웃었다.10여 년을 떨어져 지내다 보니 처음에는 정말 보고 싶었지만 점차 감정은 옅어져 갔다. 매번 부모님에게 준서의 안부를 물을 때면 그들은 머리만 흔들었다.그 뒤로 새봄이는 더 이상 준서를 찾지 않았다.말없이 사라진 그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가 해외에서 무사히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던 것 같았다.문준서는 길가에 세워진 스포츠카로 다가갔다.차도 주인을 닮아 검은색으로 차분하고 화려하지 않은 디자인이었다.처음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새봄이는 그가 문준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티없이 맑고 순수했던 눈동자는 어릴 때와 비교해 변한 게 전혀 없었다.하지만 소녀
새봄이가 떠난 뒤로 전동하는 한숨을 달고 살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소은정은 어이가 없었다.학교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따분하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곱게 자란 새봄이지만 거만하지 않고 성격이 활발했기에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아이는 가끔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파티를 벌였다.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도 충분히 즐겼다.가끔 센 강변에 가서 산책도 하고 석양을 감상하며 오리에게 먹이를 주기도 했다.그런데 가끔 혼자 있을 때면 누군가가 지켜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주변에 수시로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새봄이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홀로 석양 아래에서 산책을 즐겼다. 손에는 엄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인 한정판 명품백이 들려 있었다.이목구비가 화려한 동양소녀가 길을 걷고 있자 무수히 많은 시선들이 따라다녔다.하지만 프랑스의 치안은 별로 좋지 못했다.새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이 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가 소녀의 핸드백을 가로채서 사람들 틈으로 도주했다.놀란 새봄이는 다급히 남자의 뒤를 따라가며 소리쳤다.“도둑이야!”안타깝게도 유럽에서 비슷한 사건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아무도 핸드백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아했다.새봄이는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에 끝까지 남자를 쫓아갔다.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뒤를 돌아보며 뭐라고 욕설을 지껄이더니 골목으로 진입했다.새봄이가 쫓아갔을 때,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소녀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을 때, 갑자기 옆 골목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남자는 바로 새봄이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지만 손이 소녀에게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달려와서 남자를 걷어찼다.새봄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훤칠하고 잘생긴 동양인 남자가 등 뒤에 서 있었다.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새봄이의 앞으로 다가갔다.그에게서 익숙한 우드향이 풍겼다.그는 천천히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가늘고 예쁜 손이었다.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강
전동하는 그날 밤 새봄이에게 해외유학 얘기를 꺼냈다.새봄이는 고민도 해보지 않고 바로 동의했다.어디에 가고 싶냐고 물었더니 프랑스만 제외하고 아무데나 괜찮다고 했다.전동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준서 때문에 프랑스에 가기 싫은 거야?”새봄이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걔가 누군데? 하나도 기억 안 나! 걔 얘기하지 마!”아이는 억울함을 토로했다.줄곧 아이의 옆을 지켜주던 오빠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더 이상 아이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던 오빠는 없었다.아이는 준서가 보고 싶었지만 준서는 떠날 때 편지 한장 남기지 않았다.전동하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새봄이도 이제 컸잖아. 준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연락이 없던 것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였어. 나중에 준서 만나도 너무 준서를 욕하지 마.”새봄이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려버렸다.부모의 사랑만 받고 자란 아이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가끔 딸이 울기라도 하면 전동하는 항상 달려와서 딸을 위로해 주었다.태어날 때부터 다이아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는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런데 어느 날 오빠가 보고 싶었던 아이가 준서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아이는 버려진 느낌을 받았다.출국이 결정되었으니 전동하는 아이가 다닐 학교를 알아보았다.결국 새봄이는 유럽을 선택했다.마치 누군가가 거기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처럼.떠나기 전, 아이는 일곱 남자친구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아이가 출국하는 날, 온가족이 나와서 새봄이를 배웅햇다.새봄이는 딱히 슬프거나 아쉬운 티를 내지 않았다. 마치 부모님 손을 잡고 해외여행을 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아이는 활짝 웃으면서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전동하와 소은정은 영지까지 데리고 같이 프랑스로 출국하기로 했다.일가족이 탑승수속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새봄아!”고개를 돌리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이쪽
눈 깜짝할 사이에 새봄이는 어엿한 숙녀로 자라났다.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녀에게는 남자친구가 생겼다.새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이 소식을 소은정에게 알렸다.소은정은 딱히 말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렸을 때 이런저런 경험을 다 해보는 게 아이에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새봄이가 진심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전동하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그는 아이와 대화를 나눠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새봄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친구들이 다들 남자친구를 사귀는데 나만 솔로면 유행에 뒤떨어지잖아. 그래서 만나보기로 했어. 그리고 너무 이른 나이도 아니잖아! 중학교 때부터 연애하는 애들도 많다고!”전동하는 인내심 있게 아이를 타일렀다.“그래도 넌 아직 너무 어려.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더 많이 접촉해 보면 알게 될 거야. 남자는 다 믿을 놈이 못 돼….”“그럼 엄마가 아빠를 만난 것도 사랑에 눈이 멀어서 만난 거겠네?”어릴 때부터 말싸움에는 절대 지지 않던 새봄이는 미소가 소은정을 닮은 예쁘고 사랑스러운 소녀로 성장했다.그리고 총기 있는 눈동자와 말빨, 그리고 큰 키는 전동하를 많이 닮았다.소은정은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딸이 나중에 남자 여럿을 울릴 거라는 것을 알기에 아이에게는 사랑을 하면 꼭 아빠랑 엄마처럼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라고 강조했다.새봄이는 전동하가 말이 없자 달려가서 그의 팔짱을 꼈다.“아빠, 걱정하지 마. 그냥 연애는 어떤 느낌인가 궁금해서 해보는 거야.”“그래서 그 남자친구는… 어떤 사람이야?”“어느 남자친구를 말하는 거야?”전동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몇이나 사귀었는데?”“다른 애들은 다 한명하고만 사귀는데 난 다른 애들 따라하기 싫어. 그래서 하루에 한 명, 일주일에 일곱 명이야! 주일을 정해서 따로 만나!”새봄이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전동하는 입을 뻐금거리며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그래도 다행인 건 사랑에 깊이 빠지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점이랄까.
다른 CCTV에서 정황이 포착되었다. 직원이 그쪽으로 다가가다가 발을 헛디디며 하마터면 술잔을 쏟을 뻔한 정황이었는데 그때 잔을 안쪽으로 옮기며 위치가 바뀐 것 같았다.독극물 검사결과도 나왔다.청산가리였다.심청하의 몸에서 나온 독극물과 약병에 있던 독극물 성분이 일치했다.살인을 계획했던 심청하가 제 꾀에 당한 상황이었다.아마 그녀는 죽을 때까지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몰랐을 것이다.형사들은 밤을 새워 CCTV를 확인하면서 이 약병의 출처가 남유주의 큰어머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그렇게 큰어머니가 경찰에 소환되었다.큰어머니는 숨김없이 사건의 경과를 진술했는데 심청하에게 협박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하지만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 넘어지는 틈을 타 약병을 바닥에 버렸다고 했다.심청하가 포기를 못하고 스스로 행동에 옮기다가 제 꾀에 당했다는 말도 했다.형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그랬다는 증거 있나요?”“당연히 있죠.”큰어머니는 딸인 남연을 호출했다.“형사님이 묻는 대로 사실을 대답해! 떨지 말고!”남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냈다.그리고 차 안에서 심청하와 대화했던 녹음을 재생했다.“그 여자가 아빠랑 엄마를 죽이겠다며 협박했어요. 그 파티 초대장은 제가 거금을 주고 산 거예요. 우린 태한그룹 사모님과 친척관계에요. 평소에 왕래는 하지 않지만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고요!”남연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형사님, 제가 아는 건 다 얘기했어요.”형사는 그녀의 진술에서 이상한 점을 포착했다.“전에 남유주 씨를 해하려 한 적이 있죠?”“그래! 너도 직접 남유주를 죽이려고 했잖아? 그건 왜 쏙 빼고 말해?”녹음본에 담겼던 심청하의 목소리였다.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파일은 편집을 거치지 않았다.남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사실을 털어놓았다.“그것도 심청하가 협박해서 했어요. 하지만 언니 앞에서 이미 잘못을 인정했고 사과도 했어요. 언니는 저를 용서했고요.”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건 박수혁 대표와
심청하는 한참 침묵하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무슨 방법을 쓰든 그 사람들과 걔를 만나게 해. 안 그러면 이 약은 네 부모님 배 속으로 들어갈 거야!”남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알겠어요.”결국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명령을 받아들였다.며칠 뒤,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오늘은 자선회가 열리는 날이었는데 박수혁은 남유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그녀와 함께 자선회에 참석했다.그리고 자선회에서 많은 보석과 골동품을 구매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자선회가 끝나고 파티가 이어졌다.남연의 부모는 힘겹게 초대장을 입수했다.심청하는 파티홀에서 이어질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남연의 부모는 뒤늦게 파티에 참석했고 그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파티가 다 끝난 뒤였다.심청하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에는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SC그룹에서는 지분 사건으로 그들을 물고늘어질 것이다.본사에서 움직이기 전에 남유주를 제거해야 했다.잠시 후, 남유주의 큰어머니는 사람이 없는 곳에 숨어들었다.그리고 약을 꺼내 술병에 쏟아넣으려고 했다.마침 취객이 그녀의 어깨를 부딪히고 지나가며 그녀가 바닥에 쓰러졌다.남유주 큰어머니가 고통에 신음을 흘리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약병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구석진 곳으로 굴러갔다.심청하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정말 뭐 하나 일을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일가족이었다.남유주의 큰아버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다급히 다가가서 아내의 손을 잡고 구급차를 호출했다.호텔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이 달려왔고 큰어머니를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호송했다.심청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그녀는 구석진 곳으로 가서 아무도 안 보는 틈을 타 약병을 손에 쥐었다.그리고 기회를 봐서 약을 와인에 쏟고 흔들었다.모든 게 끝난 뒤, 심청하는 손에 난 땀을 닦았다.이미 살인을 하기로 마음먹은 그녀였지만 직접 모든 일을 끝내고 나니
남유주는 미소를 지으며 소은정과 박수혁 사이를 스스럼없이 얘기했다.남유주는 지나간 둘의 과거를 신경 쓰지 않았다.박수혁은 소은정에게 다른 마음이 없었고 그들은 각자 다른 사람과 행복한 삶을 살기로 했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남유주가 건넨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팔찌가 있었다, 반짝이며 아름다운 화려한 목걸이의 모든 보석은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본연의 미와 섬세함의 아름다움을 결합하는 느낌이 들게 했다.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몇 년 동안 이런 것을 모으기를 좋아했는데... 고마워요, 진짜 마음에 들어요." 남유주는 화해의 의미로 소은정에게 팔찌를 건넸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팔찌를 착용했다."과거는 과거일 뿐이니 우린 서로 용서하는 게 어때요?"소은정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안타깝게도 난 어떤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네요…"그녀는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고 남유주에게 건넸다.남유주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류 내용을 살펴보았다."이게 뭐예요?""원래는 소찬학의 주식이었지만 몇 년 전에 회사 소유로 되었어요. 아빠가 나이도 있고 해서 주식 대신 배당금을 주기로 했었어요, 근데 더는 그 사람의 것이 아니니까, 아빠가 유주 씨한테 넘기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주는 작은 선물이니까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얼굴이 굳었던 남유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계약서를 다시 내밀었다."전 받지 않을래요.""유주 씨, 이게 얼마나 큰 돈인지 몰라요? 술집을 사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요? 이 돈으로 그 건물 같은 거 열 개는 살 수 있어요."소은정은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남유주는 웃음을 참고 머리를 흔들었다."이걸 받으면 소찬학이 내 생부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잖아요, 끊을 수 없는 혈연관계를 받아들여야 하고, 내가 관여하지 않은 과거의 강탈과 억압을 직면해야 해요. 태어난 이래로 부모가 없는 존재로 살아왔고, 아직 그것을 원하지 않아요. 나의 아버지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소씨 가문과 혈연적인 관계가
거침없이 내뱉는 심청하의 태도에 소찬식이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소씨 가문의 주식은 애초에 저희 집안 거에요. 그리고 둘째 삼촌이 직접 주식을 그룹 소유로 돌리겠다고 서명까지 했어요. 자기는 주식 배당만 챙기겠다고, 회사를 떠난 지금 삼촌한테 배당금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죠. 이모가 한 계산은 너무 터무니없어요. 이 주식들은 재산 분할과 관련이 없어요. 설령 분할을 한다 해도, 먼저 그룹의 이익을 보호하는 게 우리의 원칙이고요."심청하는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저는 어떻게 해요? 그이가 감옥에 가고, 우리는 손가락 빨면서 굶어 죽으라는 거예요? 주식을 전부 넘겨주세요, 그럼 더는 따지지 않을게요!" 그녀는 무례한 태도로 단호하게 앉아 있었다.소찬식의 표정이 음울하게 어두워졌다, 그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한번 쳐다보았다."그만 돌아가세요, 돌아가서 경찰 소식 기다리세요. 찬식이 회사 자금을 자기 돈처럼 써버렸고 수억 달러를 횡령했어요. 그럼에도 그룹이 이 돈에 대해 따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돈을, 주식을 요구할 수 있어요?" "나는 찬식 씨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 사정은 모르겠고, 누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없어요."그는 말을 마친 뒤 옆에 서 있는 집사에게 눈짓했다."손님을 내보내.""네."집사의 대답에, 심청하는 일어서서 조급하게 말했다. "아주버님,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형제들끼리 어떻게 이렇게 매정하게 굴어요? 이 일을 언론에 알리면 어떻게 될지 저도 기대되네요, 아마 언론도 이 일에 엄청난 관심을 둘 것 같거든요!"소찬식의 표정은 신경질적으로 굳어졌다, 눈빛이 차갑고 어둡게 변했다.공기 안에는 침묵이 깔렸다.소은정은 갑작스럽게 직감했다. 심청하가 예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을 눈치챘다.하지만 그들은 타협할 수 없었다. 한 푼이라도 더 주면, 그녀는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더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그녀는 절대로 이번 한
심청하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다 해봐야죠, 우선 믿을 만한 변호사를 찾아서 형량부터 줄여줘요."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으며 소리를 냈다.소은정이 입을 열었다."마침 잘 오셨어요, 우리도 지금 삼촌을 어떻게 구할지 토론하고 있었거든요!"심청하는 의아한 눈빛으로 소은정을 쳐다보았다. "그러면... 어떤 방법을 논의했는데?"전동하는 멋도 모르고 웃었다. 그는 소은정의 대답을 기다렸다.소은정은 청량한 목소리로 한숨을 쉬었다."사실 우리가 변호사를 찾아서 물어봤어요. 판결이 심하게 나면, 사형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어쨌든 두 사람을 죽인 거니까.그래도 방법이 있어요, 둘째 삼촌은 그때 혼인 상태였잖아요?법정에 나서서 전부 둘째 삼촌이 한 게 아니라고 증언하면 돼요. 삼촌은 줄곧 숙모랑 함께 있었고, 그런 일을 꾸밀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고!"심청하는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일어섰다."너... 나보고 거짓 증언을 하라는 거야, 말이 되니? 그거야말로 불법이야!"소은정은 차가운 눈빛으로 비웃었다."불법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네요? 근데 왜 저희 아버지한테 당당하게 그런 짓을 요구하는 거예요?"심청하는 그제야 자신이 소은정에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화가 난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은정아, 너 말 이상하게 하는 구나, 내가 마음이 너무 급해서 나온 말을 꼬투리 잡는 거니? 그리고 너희 삼촌 아직 유죄 판결도 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 더 노력하면 돼."소은정은 눈썹을 찌푸렸다."그럼 혼자 잘 해보세요! 우린 응원이나 하고 있을게요!""너 지금 뭐하자는 거니?" 심청하는 화를 내며 소찬식을 바라보았다."진짜 이렇게 내버려두실 거예요?"소찬식의 눈빛이 어둡게 깔렸다."자기가 한 일에 대가를 치러야 하겠죠, 저희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제수씨도 저희를 그만 찾아오세요."심청하는 소찬식의 태도가 이렇게 차갑고 딱딱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잠시